3월5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여자프로골프 신지애 고진영 동반 우승
신지애(35)는 일본 오키나와현 난조에 있는 류큐GC(파72)에서 열린 JLPGA 투어에서 최종합계 10언더파 278타로 우승했다 같은날 싱가포르 센토사 GC 탄종코스(파72)에서 LPGA투어 HSPC 위민스 월드 챔피언십에서 고진영(28)이 최종합계 17언더파 271타로 우승했다
2022년 강릉 옥계면 산불 발생 4일만에 진화
강원 강릉과 동해 일대를 덮쳤던 화마(火魔)가 산림 4000㏊를 태우고, 나흘 만에 잡혔다. 산림청 중앙산불방지대책본부는 5일 오전 1시 8분경 강원 강릉시 옥계면 남양리 일원에서 발생한 산불을 발생, 89시간 52분 만에 진화를 완료했다고 밝혔다. 산림당국은 현재 열화상 드론을 3대 배치해 뒷불감시 및 재불 방지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번 산불로 강릉 1900㏊, 동해 2100㏊에 달하는 산림이 잿더미로 변했다. 이는 여의도 면적의 13배, 축구장 면적의 5602배에 달하는 규모이다. 재산 피해는 동해에서 주택 등 130채가 전소됐고, 53채가 일부 불에 타는 피해를 봤다. 강릉에서는 주택 10채가 전소되고 4채가 일부 탔다. 이재민은 동해와 강릉에서 110명과 6명 등 모두 116명이 발생했다. 나흘간 산불 진화를 위해 헬기 106대가 투입됐고, 인력은 1만 1000여명이 투입돼 화마와 맞섰다. 이번 산불은 주민들에 앙심을 품은 60대 남성 A씨의 방화로 시작됐다
2021년 전북 내장사 대웅전 방화로 전소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전북 정읍 내장사의 대웅전이 3월5일 50대 승려의 방화로 어이없이 전소됐다. 내장사 대웅전은 5일 오후 6시 37분께 동료들과 마찰을 빚던 승려 A씨(53)가 술에 취해 인화물질을 붓고 불을 질러 모두 불에 탔다. 다행히 내장사 내에 있던 전라북도 유형문화재인 조선동종, 전라북도 기념물인 내장사지, 천연기념물인 내장산 굴거리나무군락은 무사했다.
내장사는 백제 무왕 37년인 636년 영은조사가 영은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천년 고찰이다. 1095년(고려 숙종3년) 행안선사가 당우와 전각을 중수했으며, 1566년(조선 명종 22년) 희묵 대사가 법당과 요사를 중수했다. 이때 이름이 내장사로 고쳐졌다.
1592년(선조 25년)에는 임진왜란으로 전소됐으나 이후 1639년(인조 17년) 부용이 재건했다. 그 뒤 1779년(정조 3년) 영운이 대웅전을 중수하고 요사를 개축했고, 1938년 매곡이 대웅전을 중수하고 명부전을 신축했다.
하지만 6·25전쟁때 또 완전히 불탔다. 또한 2012년 10월에는 누전으로 발생한 화재로 대웅전이 다시 전소됐다.
정읍시민 성금과 시 예산 등 총 25억원이 투입돼 2015년 7월 복원된 대웅전, 이번에는 승려의 방화로 허망하게 사라졌다. 특히 승려가 불을 질렀다는 것에 대해 더욱 충격적이다.
2015년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 피습 당해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가 괴한의 공격을 받아 부상당했다.
리퍼트 대사는 2015년3월5일 오전 7시 42분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가 주최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 그리고 한·미 관계 발전방향’이라는 강연회에 참석해 강연을 준비하던 도중 김기종(55)씨의 공격을 받았다.
용의자는 25cm길이의 과도로 리퍼트 대사의 오른쪽 얼굴과 오른쪽 손목을 공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퍼트 대사는 강북삼성병원에서 응급실에서 응급조치를 받고 CT를 찍은 뒤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송돼 오른쪽 얼굴 80바늘을 꿰매고 왼쪽 새끼손가락에는 신경접합술을 받았다. 병원 관계자는 “자상으로는 의외로 상처가 깊어 출혈이 많았지만 경동맥이 아닌 안면 자상이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한 목격자는 “리퍼트 대사의 오른쪽 얼굴이 5cm가량 찢어졌다”고 말했다.
용의자는 공격 당시 “나는 김기종이다”라며 “오늘 테러했다, 나는 ‘우리마당’ 대표다, 전쟁 훈련을 반대한다”며 “30년 동안 전쟁을 반대해왔다, 남북은 통일돼야 한다”고 소리를 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발목을 다쳤다”며 서울 종로경찰서 앞 인도에 드러눕는 등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피습 소식이 알려진 뒤 인터넷은 리퍼트 대사의 쾌유를 빈다는 한국 국민들의 응원 메시지 물결이 일었다. 테러범을 대신해 사과한다는 사람도, 건강이 염려되니 자주 메시지를 남겨달라는 사람도, 한국 사람들은 당신을 정말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도 있었다.
리퍼트 대사는 3월 10일 오후 2시 30분 입원 6일만에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퇴원하며, 한국 정부가 보여준 따뜻한 성원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리퍼트 대사는 지난 4월 14일 ‘흉기 테러’를 당했을 때 자신을 도와준 의료진과 경찰관 등 100여명을 관저로 초대해 ‘감사 리셉션’을 열기도 했다.
2010년 프랑스 여성 전쟁 영웅, 앙드레 필 사망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점령하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요원으로 맹활약하면서 연합군 병사 102명의 목숨을 구한 여성 전쟁 영웅 앙드레 필(Andree Peel)이 2010년 3월 5일 사망했다.
1905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필은 프랑스 서부 항구도시인 브레스트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던 중 나치가 고국을 점령하자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 처음엔 지하신문 배포 등 가벼운 임무를 맡다 나치 점령지에 불시착한 연합국 조종사의 탈출을 돕는 비밀활동을 했다. ‘에이전트 로즈(Agent Rose)’란 암호명으로 활동한 그녀는 영국과 미국 조종사 102명을 잠수함을 이용해 탈출하도록 도왔고, 연합군 비행기들이 밤에 나치 점령지에 착륙하도록 돕는 위험천만한 일도 진두지휘했다. 그녀의 맹활약상에 감동한 당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Churchill)은 전쟁 중 감사의 뜻을 전하는 개인편지를 그녀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녀는 2차대전 종전 직전 나치에 붙잡혀 수용소에 수감됐고 1945년 4월 나치 폐망 직전에 총살을 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때마침 수용소로 진격한 미군 덕분에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와 무공 십자훈장, 영국 국왕의 공로훈장을 받았다. 필은 전쟁 후 만난 영국인 학자 존 필과 결혼한 뒤 영국으로 거처를 옮겼다.
2010년 ‘조선일보 창간호’ 3·4·13·14면(面) 입수
1920년 3월 5일 발행된 조선일보 창간호가 조선일보사 창간 90주년을 맞아 입수해 공개되었다. 발견된 지면은 창간호 제3·4면 3장, 제13·14면 3장 등 모두 6장 12쪽으로, 미술사가 황정수씨가 소장하고 있다가 최근 근·현대사 자료전문가 김영준씨가 입수해 공개했다.
이번에 발견된 창간호는 한국 언론 역사의 공백을 메워줄 귀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번 발견을 통해 조선일보 창간호가 16면으로 그 판형(版型)도 오늘의 신문과 같은 배대판(倍大版)이라는 그간의 정설이 확인되었다. 또한 일왕의 연호를 뒤집어 인쇄한 ‘의문의 오식(誤植)’을 통해 당시 조선일보 관계자 중 누군가가 일제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기 위해 일부러 글자를 뒤집은 것이라는 추정에 힘이 실리게 됐다.
이번 일제하에서 최초로 창간된 우리나라 민간신문인 조선일보 창간호 일부 발견을 통해 조선일보 역사뿐 아니라 한국 언론사의 복원을 위해 의미가 큰 일이라는 평가이다.
2008년 삼성 특검: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서울 상계동 천주교 수락산 성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청와대 이종찬 민정수석, 김성호 국정원장 내정자, 황영기 전 우리금융 회장도 삼성의 로비 대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2007년 법무부 검사장급 이상 검찰 고위간부 51명 승진·전보 인사
2004년 세계 최고령 남성 114세 몰씨 사망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령 남성으로 공식 기재된 스페인의 존 리우다베츠 몰씨가 2004년 3월 5일 114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몰씨의 가족들은 평생 구두수선공으로 살아온 몰씨가 발레아레스 제도(諸島)의 섬 가운데 하나인 메노르카의 자택에서 감기 증세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2003년 9월 114세로 숨진 일본인 유키치 즈간지(中願寺雄吉)옹에 이어 세계 최고령을 기록했다.
몰씨는 아돌프 히틀러, 찰리 채플린이 태어나고 에펠탑이 완공된 1889년 12월에 태어났고, 1954년 구두수선공 생활을 은퇴한 이후 반세기를 정정하게 살아왔다. 그는 같은 해 태어난 동갑내기 아내가 90세에 숨진 이후로도 4반세기를 더 살았다.
몰씨는 생전에 “모든 일을 적당히 한 것”을 장수 비결로 꼽았다.
토마토와 생선·올리브유를 기본으로 한 지중해식 식사를 했으며, 하루 14시간 가까이 충분히 자고, 커피와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담배를 피웠지만 많이 하진 않았고, 풋볼과 기타를 즐겼다. 그의 생일이면 온 마을이 축제를 열었다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다.
역대 생존했던 최고령자는 1875년 출생, 1997년에 숨질 때까지 122년 164일을 산 프랑스의 잔 루이 칼망 할머니다.
2004년 대전에 3월 적설량 기록을 깨는 폭설이 내림
2003년 부산시 당감동 과학영재학교 첫 입학식
2003년 주룽지 중국 총리 퇴임
주룽지(朱鎔基) 총리가 5일 전인대(전국인민대표대회·국회 격)에서 마지막 정부공작(업무) 보고를 마침으로써, 12년간 중국 경제를 이끌었던 기나긴 여정을 사실상 끝냈다. 중국 경제성장의 빗장을 연 사람은 개혁개방 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이었지만, 중국 경제를 본격적인 시장경제로 인도하고 도약 단계에 올려놓은 사람은 주 총리다.
주 총리는 지난 1991년 상하이(上海)시 서기에서 국무원(행정부) 부총리로 발탁되면서 중국 경제의 리더로 부상했다. 당시 중국은 개혁개방 10여년의 후유증과 톈안먼(天安門) 사태 여파로 안팎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 특히 경제는 통화팽창과 경기과열로 연착륙이 위태롭던 시점이었다. 물품 재고가 창고에 쌓이고 돈은 시장에서 돌지를 않았다. 여기다 1992년 초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남쪽 지방을 돌며 개혁개방을 강조한 발언)로 전국 각지에서 무원칙적인 개발 붐이 일면서 경제에 거대한 거품이 끼기 시작했다.
주 총리는 긴급 투입된 ‘소방수’라는 별명에 맞게 과감하고 신속히 움직였다. 통화팽창과 부동산·주식 과열에 브레이크를 걸고 각종 대형건설 사업의 축소·조정에 들어갔다. 이른바 ‘거시조정’ 정책을 전면적으로 실시한 것. 주 총리는 1993년 부총리와 중앙은행인 중국인민은행장을 겸직함으로써 경제분야에 관한 한 전권을 장악, 거시조정 정책에 대한 일부 비판을 정면 돌파했다. 거시조정 정책 효과는 서서히 나타났다. 1994년 21%에 달하던 물가 상승률이 1997년 0.2%로 떨어졌으며, 경제성장률도 연 13%대의 불안한 고공비행에서 8.8%의 안정세로 돌아섰다.
주 총리는 경기 연착륙을 위해 케인즈 이론과 현대 통화정책 이론을 총동원했다. 경제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았으면서도 타고난 명민함과 전체를 보는 거시적인 안목이 그를 중국 최고의 경제전문가로 만들었다.
1998년 총리에 취임한 주 총리는 경제의 글로벌화가 유일한 활로임을 간파하고 중국의 WTO(세계무역기구) 가입을 강력히 추진하기 시작했다. 인구 13억의 중국 경제가 빠진 WTO는 불완전한 기구가 될 수밖에 없음을 세계에 강조하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경제를 최대한 빨리 국제 수준에 맞추는 데 주력했다. 결국 미국과의 기나긴 협상 끝에 2001년 중국은 WTO 가입에 성공했다. 하지만 국유기업 개혁 등 주 총리의 일부 경제 정책에 대한 비판도 있다. 지나치게 성급히 개혁을 추진, 빈부격차와 실업문제 등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비판이다. 대규모 정부 재정적자도 그가 후임자에게 넘겨 줄 짐 중 하나로 꼽힌다.
12년간 중국 경제를 이끌면서 중국 경제의 황제로 불려온 주 총리는 이번 전인대에서 원자바오(溫家寶) 부총리에게 총리직을 물려주고 은퇴했다.
2000년 영국 로슬린연구소 돼지 복제 성공
복제돼지가 2000년 3월 5일 세계 최초로 영국에서 탄생했다. 복제양 돌리를 만들었던 영국의 로슬린연구소 소속인 PPL세러퓨틱스사는 3월 14일 다섯 마리의 복제 암컷 돼지를 만들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복제돼지는 돌리와 비슷한 방법인 핵이식을 통한 체세포 복제방식으로 탄생했다.
복제돼지 탄생으로 “기관과 세포 등을 인체에 이식할 수 있는 개량돼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됐다”고 설명했다. PPL사는 미국 연구소에서 태어난 다섯 마리 복제돼지를 각각 밀레니엄에서 딴 ‘밀리’, 지난 1967년 인간의 심장이식 수술을 처음으로 실시한 크리스찬 버나드에서 따온 ‘크리스타’, 이식수술을 개척한 노벨상 수상자 알렉시스 캐럴을 기념해 ‘알렉시스’와 ‘캐럴’, 인터넷 사용증가를 뜻하는 ‘닷컴’ 등으로 이름지었다.
1997년 고건 제30대 국무총리 취임
1993년 방일영문화재단 발족
1993년 약물 복용 벤 존슨 영구제명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세기의 대결’이 열렸다.
무대는 1988년 9월 24일 오후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지구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란 타이틀을 걸고 벤 존슨(캐나다)과 칼 루이스(미국)가 올림픽 육상 남자 100m 결승에서 맞붙었다.
탕∼ 하는 출발 신호와 함께 존슨이 쏜살같이 달려 나왔다.
막판 스퍼트가 장기인 루이스가 뒤쫓았지만 역부족.
존슨은 46걸음 만에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9초 79. 세계 신기록이었다.
루이스는 9초 92로 2위로 골인했다.
존슨은 오른팔을 번쩍 들어올리며 기쁨을 표현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소변 검사에서 금지 약물인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대회 조직위원회는 사흘 뒤 존슨의 금메달을 박탈했다.
세계 신기록도 무효가 됐다.
금메달은 루이스에게 넘어갔다.
도핑 검사 결과를 부정하던 존슨은 이듬해 약물 복용 사실을 인정했다.
존슨은 2년간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1991년 출장정지가 끝나자 존슨은 다시 트랙으로 돌아왔다.
약물의 도움 없는 존슨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00m에서는 결승에도 오르지 못했다.
그는 다시 약물에 손을 댔다.
1993년 2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대회에 출전했다가 도핑 테스트에서 두 번째 적발됐다.
이번엔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검출됐다.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은 같은 해 3월 5일 존슨에 대해 선수자격 영구 정지 처분을 내렸다.
캐나다 스포츠계 고위 관계자는 “존슨은 국가의 수치이며, 차라리 (고향인) 자메이카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성명을 내놓았다.
1961년 자메이카에서 태어난 존슨은 1976년 캐나다로 귀화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각광받던 육상 스타의 끝없는 추락이었다.
존슨은 1999년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최고지도자의 셋째 아들인 알 사디 카다피의 개인 트레이너로 취직해 다시 한 번 언론의 화제가 됐다.
이탈리아 프로축구 진출을 꿈꾸던 알 사디 카다피는 2003년 세리에A 소속 페루자와 계약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단 한 경기에 출전한 뒤 도핑 테스트에서 양성 반응이 나와 징계를 받았다.
그 스승에 그 제자인 셈이다.
요즘 존슨은 육상 유망주를 가르치는 평범한 코치로 살고 있다.
1986년 정부, 농어촌종합대책 발표
1983년 중국 국제노동기구(ILO) 복귀
1983년 호주 노동당 집권
1982년 제68차 국제노동기구(ILO) 업저버자격 획득
1982년 소련, 금성 우주탐색선 비너스 14호 금성 착륙
1981년 주택 임대차 보호법 제정
1979년 중국 베트남서 전면철군 발표
1976년 국무회의, 물가안정-공정거래법 3월 15일부터 시행키로 의결
1975년 쿠웨이트, 석유산업 국유화
1974년 영국 윌슨 노동당 내각 발족
1973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추천 국회의원 73명 추천
1973년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제주권 지정
1970년 핵확산방지조약(NPT) 발효
1969년 서독, 4대 대통령선거로 구스타프 하이네만 당선
1969년 가정의례준칙 선포
국민생활의 합리화를 기하고 허레허식화된 가정의 전통적 폐습을 바로잡기 위해 정부가 마련한 가정의례준칙(전문71조 부칙2항)이 1969년 3월 5일 대통령고시로 선포됐다. 정부는 이 준칙의 실천보급을 위해 각 시-도-군단위로 심의위원회를 설치하고, 범국민운동을 전개했다.
이 준칙에 의하면 1. 부모, 조부모, 배우자의 상기를 1백일로하고 2. 호적등본과 건강진단서를 첨부한 약혼서의 교환으로 약혼을 하고 3. 혼인신고서에 신랑, 신부가 서명한 혼인 신고서를 당일에 제출하고 4. 상복을 간소화하고 노제, 삼우제 등을 없애기로 했다. 결혼청첩장. 부고장 수수답폐품 증정, 결혼피로연, 화환증정 및 진열 등이 일체 금지됐고, 장례는 3일로 제한됐다.
1966년 미국 미시시피주 등에 돌풍으로 500명 사상
1966년 영국 제트여객기 일본 상공서 폭발 124명 사망
1962년 제8사단장 포섭 기도사건 발생
1959년 미국-터키-이란-파키스탄 상호방위협정 조인
1958년 한국전 참가 16개국(유엔군)은 중공의 한반도 철수제안을 거부
1957년 장 면 부통령 저격범 재판
1957년 3월5일 장 면 부통령 저격범에 대한 공판이 열립니다.
이들은 6개월전 민주당 전국대회장에서 장 면 부통령을 저격했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가 계속되는 가운데 국민이 뽑은 야당소속 부통령이 저격당하자 국민들은 분노했습니다.
현장에서 체포된 저격범 김상붕과 배후로 지목된 최훈, 이덕신 등은 4개월 동안의 재판 뒤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조직적인 배후세력이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남긴채 재판은 끝납니다.
결국 자유당 정권이 붕괴된 뒤 사건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이익흥씨등이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습니다.
1954년 최초의 전투기 조종사인 김영환 공군 준장, 비행 훈련중 사망
한국 공군 창설의 산파역이자 최초의 전투기 조종사였던 김영환 공군 준장이 1954년 3월 5일 F-51 전투기를 몰고 사천기지에서 강릉기지로 향하던 중 악천후 때문에 34세의 일기로 순직했다. 서울에서 출생하고 경기공립중학교를 졸업한 김 준장은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 1946년 1월 15일 소위로 임관했다.
국방경비대에서 중대장과 통위부 정보국장 대리로 일하면서 공군 창설에 큰 기여를 했다. 6·25가 발발하자 T-6 훈련기로 적 전차와 차량을 폭탄과 수류탄으로 공격, 큰 공을 세웠으며, 한국 공군 최초로 10명의 동료와 함께 F-51전투기를 미 극동 공군으로부터 인수하기도 했다. 1951년 10월 11일에는 미 제5공군의 단위부대에서 한국 공군 최초로 독립 편대를 이끌고 단독출격을 개시하기도 했다.
특히 1951년 9월 18일 제1전투비행단 전대장(대령)일 때 북한군이 게릴라 활동을 벌이던 해인사 부근을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끝내 폭격하지 않아 팔만대장경과 대웅전인 `대적광전` 등 해인사의 숱한 국보급 문화재들을 전화로부터 지켰다. 그는 전투기 탑승 때 빨간 머플러를 매고 다녔으며 이것이 널리 유행하게 되면서 공군 조종사의 상징이 됐다.
1953년 스탈린 사망
30년동안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지도자로 군림해 온 스탈린은 신학교 재학 중에 반정부 서클에 가담해 퇴학당한 뒤 감옥을 드나들며 직업적인 혁명가의 길에 들어섰음. 그는 스탈린이라는 필명이 뜻하는대로 강철의 사나이였고, 철권으로 나라를 다스렸음. 세칭 모스크바 재판을 통한 정적들의 무자비한 숙청과 봉건적 개인숭배, 민주주의 몰락 등은 그의 시대를 설명하는 주요 키워드였다.
1953년 북한, 박헌영(부수상겸 외상)을 반역자라고 해임
1951년 미국-영국 38도선 이북 진격에 합의
1949년 제1회 서울시 예술상 시상
1947년 철도경찰청 발족
1946년 처칠 영국 수상, 미 대학연설에서 `철의 장막` 표현 첫 언급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 경이 1946.3.5 미국을 방문하고, 미조리주 풀턴의「웨스트 민스터」대학에서 행한 연설 중 소련을 가리켜「철의 장막」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사실은 1945년 2월, 얄타 회담 직후에 나치의 선전상「겟벨스」가 영․미 양국에게 소련 위협에 대한 감정을 일으키기 위한 이간책으로서 『만약에 독일 항복하면 소비에트는 독일의 대부분과 유럽의 남부 및 동부를 점령하여 이「철의 장막」을 내릴 것이다.』 라고 말한 연설 중에 있었다.
그 때는 아무런 반향도 없었는데, 처칠이 이 말을 쓰자 대단히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 ‘발트해에서 아드리아해까지 대륙을 가로질러 철의 장막이 드리워졌습니다.’
미국을 방문한 전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1946년 3월5일, 미주리주 풀턴시 웨스트민스터대학에서 행한 연설의 골자다.
‘철의 장막’이 언급되는 순간 장내가 조용해졌다.
장막을 친 소련이 동맹국으로 여겨졌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처칠은 용의주도하게 움직였다.
명예학위를 주겠다는 숱한 제의 가운데 굳이 이 학교를 고른 것도 풀턴시가 트루먼 대통령의 고향이라는 점을 의식해서다.
처칠은 ‘평화의 힘’으로 이름 붙여진 이날의 연설에서 ‘용감한 러시아 국민과 전쟁의 동지였던 스탈린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면서도 ‘(철의 장막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과 미국이 힘을 합치자’고 역설했다.
이튿날 신문에 대서 특필된 ‘철의 장막’이라는 표현은 소련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전세계는 냉전체제로 빠져들었다.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이던 괴벨스가 소련의 팽창 야욕을 일컬으며 처음 사용했다는 ‘철의 장막’이라는 용어도 처칠이 연설에 인용한 뒤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처칠의 기대대로 트루먼 대통령은 영국과 군사ㆍ정치동맹을 강화했다.
영미의 협력에 의한 새로운 패권체제의 탄생이 처칠의 세치 혀로 앞당겨진 셈이다.
처칠의 연설로부터 63년이 지난 오늘날 새로운 ‘철의 장막’이 쌓여가고 있다.
동유럽 경제위기 탓이다.
헝가리의 주르차니 페렌츠 총리는 최근 ‘서유럽의 지원이 성사되지 않으면 동서를 가르는 새로운 철의 장막이 드리워질 것’이라며 유럽의 동서분열 가능성까지 들고 나왔다.
자본의 힘으로 무너져 서방세계에 편입된 동구권이 자본주의가 불러온 경제위기로 떨어져 나가는 아이러니를 맞은 형국이다.
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토지개혁법령` 공포(무상 몰수·무상 분배의 원칙).
1946년 3월 5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을 공포했다.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노동자와 토지없는 농민에게 무상분배하고, 농민의 지주에 대한 부채를 취소하며 관개시설, 산림 등을 몰수해 국유화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토지개혁 수행을 저해하는 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해 `토지개혁 실시에 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하여 부동산과 농기구 등의 매매, 처분 등을 금지시켰고, 3월 8일에는 `토지개혁에 관한 세칙`을 공포해 3월 말까지 짧은 시간에 정부매수를 완료했다. 이어 토지분배는 `도인민위원회`가 `토지소유권에 관한 증명서`를 교부, 이를 토지대장에 등록하는 식의 절차를 따랐고 6월 20일까지 증명서를 교부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아 토지개혁은 절차상으로는 6월 말에 모든 개혁작업이 끝나는 것으로 했다.
북한은 토지개혁 결과 66만 농가에 1백6만6천ha의 농지를 분배해, 한 농가에 평균 0.15ha(4백50평씩) 돌아갔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북한과 국내 일부 학자들은 북한의 토지개혁을 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주체적으로 추진했다는 주장을 고수해왔으나 러시아 공식문서에 따르면 구 소련이 토지개혁에 깊게 관여했고, 목적이 최대 걸림돌인 지주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것으로 드러났다.
1941년 미국-파나마 방위협정 조인
1936년 영국의 최신예 전투기 스피트 파이어 처녀비행
영국의 최신예 전투기 스피트 파이어가 처녀비행을 나섭니다.
2차대전에서 명성을 날린 전투기 스피트 파이어
영국군 조종사들은 스피트 파이어를 이상적인 전투기라며 만족감을 표시합니다.
스피트 파이어는 1940년 영국과 독일간의 공중전에서 진가를 발휘하며 영국의 승리에 결정적인 공을 세웁니다.
1922년 경성우편국 용산전화분국(용산전화국 전신) 설치
1920년 조선일보 창간
“조선일보 창간이오! 조선일보 나왔습니다!” 1920년 3월 5일 해질 무렵 서울 시내 곳곳에서 때아닌 요란한 방울 소리와 함께 배달원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날 창간된 조선일보는 일제강점 후 10년 만에 처음으로 맞이하는 순수 민간 신문이었다.
조선일보의 탄생은 1919년 3ㆍ1운동의 피로 얻은 우리 민족의 성과였다. 우리민족의 독립의지에 놀란 일제는 조선 통치 정책을 종래의 가혹한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했고, 조선인의 민간 신문 발행도 허가했다. 그러나 총독부에 접수된 신문 발행 신청서만 십수 통에 달하자 이에 총독부는 조선일보ㆍ동아일보ㆍ시사신문 3개의 신문 발행만을 허가했다.
조선일보의 발행장소는 경성부 관철동 249번지로, 1916년 조선 실업인들이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만든 경제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가 발행을 맡았다. 조선일보 창간의 진용은 사장 조진태, 부사장 겸 발행인 예종석, 편집인 겸 편집국장 최강으로 주요 간부를 포함한 발기인 중 11명이 대정실업친목회 사람들이었다.
석간으로 발행된 창간호는 배대판(倍大版ㆍ지금의 신문 크기)으로 모두 16면이 발행됐다. 당시 조선일보의 문체는 국한문 혼용체로, 제호에 봉황과 꽃무늬의 바탕위에 붓글씨로 ‘朝鮮日報’라고 썼다. 머리기사로는 ‘조선일보가 탄생하다’라는 논설을 썼고, 조선 무역 상황에 대한 분석 기사와 연재소설 ‘춘몽(春夢)’ 등을 실었다.
10년 만에 나오는 ‘우리 신문’에 대한 독자들의 호응은 뜨거워 수만 부를 찍어내고도 부족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조선일보 창간호는 일부 지면 이외에 완전한 형태가 전하지 않고 있다.
1912년 프린시프 드 오스트리아호 세바스티안부근서 좌초, 500명 사망
1897년 장제스(장개석) 전 대만 총통의 부인 송미령 여사 출생
장제스(장개석) 전 대만 총통의 미망인이자 중국 현대사의 산 증인 쑹메이링(송미령) 여사가 1897년 3월 5일 청 말기 중국의 3대 부자로 꼽혔던 절강 재벌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쑹 여사는 기독교로 신문명에 일찍 눈을 뜬 아버지의 도움으로 1910년 열한 살의 어린 나이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미국에서 웰슬리 여대를 졸업한 뒤 10년 만에 귀국, 기독교 활동 등 각종 사회활동 경험을 쌓았다.
그러던 1927년,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장제스 전 총통과의 결혼은 쑹 여사의 인생을 바꾸고 그를 중국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시켰다. 쑹 여사는 장제스가 서구의 문화와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왔으며, 1930년대 일본 침공을 비난하는 중국의 입장을 세계에 알리는 외교관이자 대변인으로 서방세계에 이름을 날렸다.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모택동)에 패해 대만으로 탈출한 뒤 대미 교섭에 진력, 공산화된 중국으로부터 대만을 보호할 방패로 미국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1975년 장 전 총통이 작고한 후 미국으로 이주, 롱아일랜드의 저택에서 살다가 1998년 맨해튼으로 거처를 옮겨 지냈다. 대외활동이나 인터뷰를 일절 거절한 채 도교식 생활 습관을 유지하며 조용한 만년을 보내다 2003년 10월 23일 10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다. 이로써 각각 당대 최고 재벌 쿵샹시(공상희) 및 중국의 국부로 추앙받는 쑨원(손문)과 결혼해 중국대륙은 물론 서방세계에서도 명성을 날렸던 두언니 쑹아이링(송애령)ㆍ쑹칭링(송경령)과 함께 이들 ‘쑹씨 세 자매’의 시대도 그 막을 내렸다.
1895년 러시아 소설가 레스코프 사망
1891년 국문학자 가람 이병기 출생
1871년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출생
1827년 이탈리아 물리학자 볼타 사망
이탈리아의 물리학자이며 전기 개발의 선구자인 알레산드로 주제페 볼타가 1827년 3월 5일 사망했다. 1745년에 태어난 볼타는 처음에는 문학에 취미를 가졌지만 프리스틀리가 쓴 전기연구의 역사에 관한 책을 읽은 뒤부터 전기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볼타는 두개의 다른 금속을 소금 용액내에서 접촉시킬 때 전류가 흐른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이 실용 배터리(전지)의 시초가 됐다. 볼타는 여러 개의 소금용액 그릇에 전기줄을 이 용액에 담아놓아 하나씩 순서대로 소금 용액 그릇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전기줄 한쪽 끝은 구리판을 또 다른쪽은 아연판을 연결시켜 이 양끝을 접촉시키면 전류가 흐르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볼타의 이름을 따서 볼타전지라 이름지어졌고 따라서 전기를 발생시키고 저장하는 전기 저장소, 즉 전지를 세계최초로 발명함으로써 인류에게 지대한 공적을 남기게 됐다.
프랑스의 지도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볼타의 연구에 감동을 받아 백작의 작위를 주었다. 볼타는 세상을 떠난 뒤에도 추앙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기전력을 측정하는 단위에 볼트(V)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1815년 근대적 최면술의 선구자 독일의 메스머 사망
1776년 조선 영조 임금 세상 떠남
영조 대왕(英祖大王 ; 1694 - 1776.3.5) : 조선 제21대왕.
1699년 (숙종 25) 연잉군에 봉하여지고, 1721(경종1)년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경종이 죽자 노론, 소론의 당론에 처하여 생명의 위협까지 받은 뒤 1724년에 즉위한 영조는 바로 탕평정국의 서곡인 붕당의 폐해를 거론하였다.
당쟁을 몸소 겪고 왕위에 오른 영조는 당쟁의 해를 막고, 양반 계급의 세력 균형을 위해 각 당파의 인재를 고루 뽑아 썼으며, 유생들에게 당론을 금했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소론의 영수 김일경, 남인의 목호룡 등 신임옥사를 일으킨 자들을 숙청했다.
그리고 1725년(영조 1)에는 을사처분(乙巳處分)으로 노론을 다시 정계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영조가 의도했던 탕평정국과는 달리 노론 내 강경세력인 준론자(峻論者)들은 소론에 대한 공격을 일삼는 등 또다시 노론․ 소론의 파쟁으로 흘러가자 1727년에는 노론 내 준론세력들을 축출했다.
곧이어 1729년에는 기유처분(己酉處分)으로 노론․ 소론 내 탕평세력을 고르게 등용, 초기의 탕평정국을 이루었다.
1742년(영조 18년)에는 성균관 입구에 탕평비를 세워 유생들에게 한 편에 치우치지 않고 자기 당파를 이루지 않는 군자의 도를 익히게 권했다.
탕평이란 <서경(書經)>의 ‘탕탕평평(蕩蕩平平)’이라는 데서 나온 말로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다.
탕평책의 실시로 당쟁의 폐해를 어느 정도 없앴으나, 사도 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시파(時派)와 벽파(辟派)의 대립 이후 외척과 연결되면서 당쟁은 다시 세도 정치로 이어졌다.
1770년 영국군, 보스턴 주민 살해, `보스턴 학살의 날`
미국의 보스턴,「콘코드」항전이 있기 5년전이고, 필라델피아의 독립 선언이 있기 6년전이요, 영군의 항복으로 완전히 독립 전쟁이 끝나기 무려 13년전의 사건 !
보스턴 급진파의 두목이자 당대 일류의 선동가이던「새뮈얼 아담스」는「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이란 단체를 꾸며 조직적으로 영국군에 대항했었다.
이른바「보스턴 대학살」사건이 터진 것,
반대 시위를 하던 시민 일부가 세관 경비병에 얼음 덩이를 던진 것이 발단이 되어 영군의 총에 5명의 시민이 쓰러져 죽었다.
그 첫 희생자가 다름아닌「크리스퍼스 아턱스」라는 이름의 흑인이었으니 이 아니 아이러니컬한 시단(始端)이 아니었었던가 !
1637년 삼학사(三學士)의 절의(節義)
병자 호란 때에 척화론자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을 세칭 삼학사라 하는데 심양에 잡혀 가서 청태종이 백방으로 달랬으나 끝끝내 절조를 굽히지 않고 인조 15년(1637년) 3월 5일 그곳에서 참혹한 형벌을 받아 죽었다.
1454년 조선 단종2년, 세종실록 163권완성
1106(고려 예종 1) <해동비록>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