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2사무 15,13-14,30; 마르 5,1-20 / 연중 제4주간 월요일; 2024.1.29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왕국에서 다윗 임금의 큰 아들 압살롬이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일어난 혼란상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수많은 마귀가 들러붙은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죄악은 마귀를 불러들여 지옥을 초래하는 부마현상(付魔現狀)을 일으키는데,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그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창조하는 기운입니다.
다윗에게는 그와 그의 왕조가 영원하리라는 말씀이 나탄 예언자를 통해 주어졌지만, 시온의 계약이라고도 부르는 이 말씀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다윗의 믿음과 삶 그리고 통치 행위가 시나이 계약에 입각해서 하느님의 법으로 이끌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어렸을 적에 사무엘 예언자를 통해 기름부음을 받고 장차 왕위에 오를 가능성을 약속 받았고 골리앗을 돌팔매질로 물리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워 백성으로부터 신망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을 해치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덕행을 쌓기는 했습니다. 거기에 사울 왕의 아들 요나탄 왕자의 우정까지 힘입었습니다. 그런데 왕위에 오르고 난 말년에 충직한 부하 우리야의 아내 밧쎄바를 취함으로써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의 벌은 그로 인해 태어난 아기가 죽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밧쎄바에게서 태어난 두 번째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을 눈치챈 맏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왕자의 난이 벌어진 것은 물론이고, 이 후유증이 계속 커져서 솔로몬이 왕이 되고 난 다음에는 아예 왕국이 두 동강이로 쪼개져버린 것입니다. 죄로 인한 벌이었습니다.
개인이 지은 죄도 벌을 초래하기 마련이지만, 임금의 죄로 인한 벌은 백성 전체와 나라의 운명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된 것은 물론, 분열된 두 왕국에서도 경쟁하다시피 하느님을 멀리하고 주변국들의 우상숭배 풍조를 받아들인 탓에 결국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등 주변 강대국들에게 멸망당하고 포로로 끌려 가야 했습니다.
결국 다윗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말씀, 즉 시온 계약은 훨씬 더 후대에 다윗의 후손인 요셉에게서 실현되게 되는데, 그 실상은 이스라엘의 어느 누구도 상상도 못 했던 방식과 과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것인데, 그것이 성령으로 인한 잉태와 동정녀 출산입니다. 이제 이렇게 하여 태어나신 예수님에 의해서 다윗에게 주어졌던 말씀, 즉 시온 계약은 이스라엘 왕국이 아니라 그리스도 왕국으로 더 보편화되어 실현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동안에 도처에서 저항의 기운과 마주치셨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사람들 영혼 안에 들어가 암약하는 악령의 존재였습니다. 악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아주 흉하고 더럽고 비참하게 망가뜨려 놓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의 경우에는, 이미 죽은 사람들의 무덤 속에서 살고 있다고 나오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괴력을 발휘하여 난동을 부리기 때문에 쇠사슬로 묶어 두기도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어서 아예 공동묘지로 쫓아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만 해치려 드는 것이 아니고 제 몸도 돌로 치는 등 자해행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성을 상실한 비인간이었습니다. 이는 그 자신이 지은 죄와 다른 이들이 그에게 저지른 죄의 종합적인 결과로 주어진 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더러운 영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그런 원의를 보시고 더러운 영들의 손아귀에서 그를 구해 주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젖혀 두고 그 더러운 영들과 대화를 시도하셨습니다. 그 영들은 영적인 차원에서 훨씬 더 높은 차원에서 존재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반항적으로 소리질렀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마르 5,7).
이 순간까지 예수님께서는 그 더러운 영들을 그저 대면하기만 하셨을 뿐인데도 더러운 영들은 쫓겨날까봐 두려운 나머지 발악적으로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들이 감히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님께 말한다는 것이 그들 역시 영적인 존재임을 말해주고, 또한 그들이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말한다는 것이 그들이 갖게 된 공포를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더러운 영들과 그 영이 들린 사람을 구분하시려고 영들에게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 점은 구마 행위로써 치유를 할 때에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과 그를 괴롭히는 마귀를 구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영들이 수가 많아서 ‘군대’라고 대답을 하면서 자신들이 쫓겨나기에 이른 상황을 알아채고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마르 5,12) 하고 청하자 예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결국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마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렸던 그 사람도 그제서야 제정신이 돌아왔는데,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하시자, 그는 가족과 동네 이웃들에게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어 주신 기적의 사연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실 수 있는 신적인 능력을 지니고 계신 하느님이심을 알리는 선포였습니다.
이상 독서와 복음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자면, 죄는 악을 불러들이고 그 악은 마귀들이 암약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는 것과 그 결과로 사람들은 하느님과 멀어진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부마현상은 가장 취약한 개인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고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 마귀들이 조장하는 부마현상과 정면대결을 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세워진 교회와 그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뜻과 함께 부마현상에도 민감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 선포 즉 선교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여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넓은 의미의 치유 행위와 부마현상과 대결하여 마귀를 쫓아내는 구마 행위로 이루어지며 이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교우 여러분!
치유와 구마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행하신 대표적인 기적이었습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며 병자를 고쳐 주신 치유의 기적과 마귀 들려 고통받는 이들에게 구마의 기적을 아울러 행하시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선교가 오늘날 보편교회와 아시아교회의 교도권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를 들려 드립니다. 직접적이고 대결적인 보도 대신에, 종합적이고 직관적이면서도 포용적이고 점진적인 접근방식입니다.
“교회사에서 보면 선교 열의는 언제나 교회 활력의 표지였으며, 반대로 선교 열의의 감퇴는 신앙 위기의 표지였습니다. … 선교 활동은 교회를 새롭게 하고, 신앙과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강화시켜 주며, 새로운 열정과 새로운 자극을 줍니다. … 그리스도를 모르고 교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의 수는 지속적으로 늘고 있으며, 공의회 폐막 이후 사실상 거의 두 배나 늘었습니다. … 참으로 세속화된 현대 세계에서 ‘구원의 점진적인 세속화’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사람들은 인간의 선익을 위하여, 그러나 그저 수평적 차원으로 전락해 버린 온전하지 못한 인간의 선익을 위하여 애쓰고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 2-4.11항).
“아시아의 주교들은 복음화와 관련해서 ‘삼중대화’ 곧 선교란 아시아의 가난한 사람들, 그 지역 문화, 타종교 전통과의 대화를 뜻하며, 그러한 ‘삼중대화’의 주체로서 토착화된 지역 교회 건설을 교회의 새로운 존재양식이라고 지속적으로 강조하면서도, 복음 선교의 중심이자 우선적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라는 점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예수를 선포한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증거하는 것이며, 이는 ‘그리스도를 닮은’ 행위를 통해 선포해야 하며, 아시아 교회의 첫 소명으로서 대화와 행위를 통한 선포라는 점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황경훈, ‘새로운 복음화’와 아시아 교회’, 신학전망, 2013.3.).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5,8).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