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fun Ryu
晉州 柳門 累祖行狀
글 류 태희
서문
가족의 역사
나는 오늘 고향의 숲에서 들리는 매미 울음소리를 듣는 가운데 가족의 역사를 쓰기로 마음을 내었다. 조부님을 생각하면 뼛속까지 스미는 그리움이 삶의 정수처럼 무르익어 터지는 여름이 더 서러워지는 오늘이다.
- 고향을 그리는 시
江 碧 鳥 逾 白 강이 푸르니 새가 더욱 희고
山 靑 花 欲 然 산이 푸르니 꽃은 더욱 붉고자 하고
今 春 看 又 過 지금 봄이 또 지나가는 것을 보니
何 日 是 歸 年 돌아갈 날은 언제인가
두보 [杜甫, 712~770]
조부님(호 錦雲 諱 觀浩)께서 내가 초등학교 무렵 일 년에 한 번씩 서울에 사는 가솔家率들이 궁금하시어 상경하시면 내가 나이가 제일 많은 손자이기에 서울의 근교 수색, 행신리 ‘번되뫼’나 고향의 어른들의 산소를 데리고 다니시며 이런저런 말씀으로 교육을 시키셨다. 그 어린 시절의 나는 무척이나 싫었지만 이제 나도 곧 회갑을 맞이하는 때에 이르니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 광인狂人의 만행으로 남대문이 불에 타고 그 현액인 ‘숭례문崇禮門’이 뉴스에 잘못 회자되는 것을 보고 우리 조상님들의 역사가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조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원래 역사는 이긴 자, 승리한 자들의 전유물이라는 말들이 있기도 하지만 역사는 부당한 고통을 잊지 않으며 기꺼운 전통을 잃지 않는 시간과 공간의 사실기록이라는 것임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부모님께 살을 빌고 뼈를 빌어 이 세상에 나와 가족이라고 하고 그것이 확대되어 집안이라 한다. 더구나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이던가? 우리나라 최고最古 오래된 족보를 가지고 있으니 규장각에 소장하고 있는 “영락보永樂譜(아래 * 참고1. 2. 3. 4)”는 최고最高의 그것이다.
사회학이나 역사학의 학자들은 한때 가족을 씨족(氏族)의 분해와 함께 발생한 역사적 집단형태로 본 적도 있으나, 지금은 모든 인류를 통하여 볼 수 있는 기본적 사회사실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가족은 역사적 집단이며, 대가족에서 소가족으로 분해(分解)하였다고 하는 사회진화론적 견해가 지배적이라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모두 흩어져 살며 겨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일 년에 한두 번 벌초에 참석하거나 조부님 제사에 참석하는 것도 결국은 대가족의 분해에서 시작된 것이다.
스위스의 인류학자 J.J.바호펜의 《모권론 Das Mutterrecht》(1861)은 널리 사회적인 관심을 자극하였으며, 동시에 H.메인의 《고대법(古代法)》, 퓌스텔 드 쿨랑지의 《고대도시》, J.F.매클레넌의 《원시결혼》 등 고대 또는 미개사회에 있어서의 가족에 대한 연구가 1860년대에 잇달아 발표되고, 나아가 77년에 공간된 L.H.모건의 《고대사회 Ancient society》의 연구는 그 후 F.엥겔스 기타의 유물론적 가족이론을 전개하는 기초가 되었다.
사회진화론적 견해는 가족에 대한 실증적 관심을 자극하는 데 이바지하였으나, 그 후의 실증적 연구, 특히 20세기에 들어선 후의 인류학적 연구는 미개사회에 대하여 엄밀한 직접적 검토를 가함으로써 가족의 변화를 단순히 인류진화의 한 계열에 놓고 설명하려는 가족진화론적인 여러 견해의 비(非)과학성을 지적하였다.
G.P.머독이 쓴 《사회구조 Social Structure》(1949)는 새로운 방법에 의한 인류학자의 뛰어난 업적이며, 현대가족의 연구에도 커다란 시사를 주고 있다.
현재 부부단위의 가족으로부터 더 나아가 시설이나 개인으로의 분해를 강조하는 사람도 없지 않으나, 사회학이나 사회인류학 등의 실증적 연구의 입장에서는 가족의 구조나 기능의 변화를 자연적 ·사회적 여러 조건의 변화에 적응하려고 하는 인간의 문화적 소산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특정 남녀의 지속적 결합과 그 자녀의 양육감호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의 기본 형태는 인류의 모든 역사를 통하여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견해가 일반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현대 가족에 관한 실증적 연구는 이미 19세기 중엽에 프랑스 학자 르 플레의 가계(家計)에 의거한 조사방법 등의 제안으로 시도되었으나, 가족진화론만큼 일반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였다.
현대가족의 여러 문제와 그 분석방법 등이 사회학의 분야에서 다시 다루어지게 된 것은 1920년 이후의 일이다. 시카고학파라고 불리는 미국 사회학자들의 연구 가운데 가족 해체(解體)와 흑인가족의 문제를 다룬 내용이 보였으며, 다시 30년대에는 결혼의 예측에 관한 연구 등이 잇달아 시도되었다. 이 무렵 유럽에서도 독일을 중심으로 한 가족의 권위구조 조사가 국제적 연구에 대한 방향을 시사하는 등 새로운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족사회학의 이름 아래 다채로운 연구가 전개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이다. 그것은 미국에서 가장 활발히 진행되었으며 국제적 비교연구에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아 독일에서도 50년경부터 권위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 가족의 실증적 연구가 갑자기 활발해졌고, 영국에서는 노인문제 ·모자문제 등 개별적인 문제에 대하여 견실한 업적을 나타내었다. 한국의 경우, 광복 전에는 가족문제에 관하여 이렇다 할 연구가 없었으나, 1948년 김두헌(金斗憲)의 《조선가족제도연구》를 효시로 다각적인 연구가 꾸준히 전개되고 있다.
* 참고
1.
족보(族譜)의 기원(紀元) 우리나라의 족보(族譜)는 1000여 년 전인 신라 말과 고려 초기에 중국(中國)의 성씨제도 (姓氏制度)라 할 수 있는 한족제도(漢式氏族制度)를 근본으로 삼고 발전,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부터는 귀족 사이에서 가첩(家牒)이나 사보 (私報)로 기록하여 왔는데, 이러한 가계기록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중기에 오면서 족보(族譜)형태를 갖추는 가승(家乘), 내외보(內外譜), 팔고조도(八高祖圖)로 발전하게 된다. 족보의 발행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조선초기인 세종 5년(1423년)의 문화 류씨 영락보(文化柳氏永樂譜)부터 간행되기 시작했고, 그 후 1476년(성종 7년) 안동 권씨 성화보(安東 權氏 成化譜)가 체계적인 족보 형태를 갖추었으며, 현존하는 최고(最高)의 족보로는 문화 류씨 두 번째 족보인 1562년(명종 17년 간행의 10책)의 가정보(嘉靖譜)이다.
2.
문화 류씨 수보(修譜)연혁
족보는 그 씨족의 계보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처음 우리 류문에서 발간되었으니 이른바
영락보(永樂譜)이다.
◎ 영락보(永樂譜)
◎ 가정보(가정보)
◎ 기사보(기사보)
◎ 경신보(경신보)
◎을유보(을유보)
◎정사보(정사보)
◎ 갑자보(갑자보)
◎병인보(병인보)
◎갑인보(갑인보)
◎ 병진보(병진보)
◎세계보(세계보)
◎ 보감(보감)
族譜의 種類/刊行
종류로는 族譜, 大同譜, 派譜, 世譜, 家承系譜, 家譜, 家牒 等이 있다.
族譜의 刊行 時期와 수보(修譜) 간격
조선 초기에는 130년(年)∼200년(年) 사이를 두고 초간(初刊)과 재간(再刊)이었는데, 조선 중기[50년(年)∼60년(年)]와 조선 후기[20년 (年)∼30년(年)]를 지나면서 수보(修譜)간격이 점점 좁아진다. 우리 류씨는 옛 부터 고향을 지키며 세거하였으나 지금은 세태의 변화로 말미암아 거의 이행한 실정이다. 다음은 해방 전 왜정시대 국세조사 통계에 의한 자료로서 당시 30호 이상 거주 동족부락을 파별로 열기하였으나 지금은 더욱 많은 분가가 이루어져 그 모습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사랑공파
안악군 대향면 생근리, 영덕군 오보면 삼계리, 청주군 남이면 금대리, 남일면 가중리, 북일면, 북이면, 보은군, 탄부면 매화리.
▼문숙공파
이천군 모가면 송곡리, 제천군 금성면, 청풍면.
▼하정공파
강화군 선원면 신정리, 염암군 신북면 모산리, 여수군 율촌면 가장리, 정읍군 덕천면 달천리, 충주군 노은면 안락동, 광주군 오포면 양벌리, 연백군 유곡면 식현리 시흥군 의왕면 오전리, 양평군 양평면 회현리, 안악군 서하면 덕일리, 신천군 초리면 홍학리, 장단군 강상면 마성리
▼장령공파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곤산군파
달성군 해안면, 경산군 안심면 신서동,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 칠곡군 약목면, 석적면, 밀양군 삼량진면 청학동
▼문평군파
괴산군 사리면 중흥리, 청주군 사주면 신봉리, 오창면 양청리, 보은군 산외면 산대리
▼지후사공파
담양군 창평면 유곡리, 임실군 삼계면 강촌리, 순창군 금과면 남계리, 군위군 효령면 오천동, 병호동, 중화군 양정면 대내리, 부여군 충화면 만지리, 복금리, 진천군 행정리, 시흥군 군자면 군자리
▼좌상공파
포천군 서면 자작리, 양산군 읍내면 산 막리, 울산군 서상면 양정리, 나주군 본양면 덕림리, 동호리, 칠곡군 칠곡면 죽전리, 영천군 북안면, 부여군 현내면 영창리, 양주군 진접면 팔야리, 진양군 수곡면 원당리, 산청군 시천면 천평리, 합천 함안군 가야면 신음리, 사천군 서포면 자혜리, 강화군 송해면 신당리, 김해군 진례면 청천리, 김해면 외동리,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여주군 북내면 주암리, 홍천군 화촌면 외삼포리, 천안군 성거면 석교리, 성진군 학상면 왕덕동, 공주군 우성면, 탄천면, 신풍면, 부여군 초촌면 응평리, 정읍군 소성면 중광리, 진양군 금곡면 송곡리.
▼검한성공파
가평군 하면 신상리, 화순군 동면 언도리, 온양군 탕정면 동산리, 연천군 백학면 노곡리, 옥천군 옥천면 구일리, 진양군 대평면 당촌리, 김제군 공덕면 황실리, 존걸리, 백산면 상정리, 홍사리, 전주군 초포면 송전리, 장성군 북이면 여률리, 촌천군 신북면 지내리.
▼정숙공파
평산군 세곡면 수동리, 문암리, 옥천군 군복면 추소리, 무주군 적상면 삼류리.
▼판사공파
칠곡군 동명면 학정리.
▼수사공파
평택군 서탄면 봉남리
▼부윤공파
고양군 중면 백석리, 양평군 개군면 계전리, 당진군 고대면 당진포리, 제주군 대정면 인성리, 안덕면 사계리, 화순리.
▼충경공파
곡성군 곡성면 신기리, 연기군 대평, 축산리, 논산군 두마면 향한리, 연산면 백석리, 임리, 가야곡면 삼전리, 해남군 해남면 해리, 시흥군 수암면 와리, 고잔리, 선산군 구미면 사곡리, 포천군 가산면 금현리, 영광군 묘량면 덕흥리, 거장군 주상면 금현리, 영광군 묘량면 덕흥리, 거창군 주상면 거기리, 청주군 강서면 휴양리, 보은군 내북면 창리, 회북면고석리, 서산군 부석면 가사리,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 합천군 야로면 묵촌리, 함양군 안의면 봉산리, 보은군 회남면 서탄리, 합천군 대양면 덕정리, 고성군 고성읍 대평리, 곡성군 죽곡면 봉정리 오곡면 오지리, 남원군 수지면 초리, 구례군 광의면 대산리, 익산군 함염면 흘산리. 와리, 무안군, 청계면 사마리, 영암군 덕진면 장등리, 장성군 삼서면 수해리, 광주군 오치면 오치리. 여주군 강천면 도전리, 거창군 고제면 궁항리, 옥천군 군북면 대정리, 대덕군 탄동면 방현리, 천원군 성남면 신덕리, 석곡리, 대흥리, 대정리, 완주군 비봉면 수선리, 공주군 사곡면, 남해군 설천면 분항리, 서면 정포리 서천군 마산면 벽오리, 예산군 신양면 가지리, 임천군 세도면 화수리, 부안군 하서면 장신리, 달성군 다사면 방천동, 장수군 계남면 화양리, 무주군 무주면 당산리.
3.
우리 족보의 맨 앞머리에 헌원이 언급되어 있어 여기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것에 대한 문제는 차후에 학문적 접근과 직관적 방법이 양립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수없이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자료가 없어지거나 접근하는 것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
황제 /황제
이름은 헌원(軒轅). 문명을 발전시켰으며 도교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BC 2704년경에 태어나 BC 2697년 제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통치기간중 목조건물·수레·배·활·화살·문자를 만들어냈고, 자신이 직접 지금의 산시[山西] 지방에 있는 어떤 곳에서 야만족을 물리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승리로 황허 강[黃河] 평원 전역에 걸쳐 그의 지도력을 확립할 수 있었다. 또한 몇몇 전설들에 의하면, 그는 통치기구와 동전의 사용법을 도입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아내는 비단을 발명해서 여인들에게 누에를 치고 비단실을 뽑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으로 유명하다. 몇몇 고대 사료에 의하면, 황제는 그의 통치 기간이 황금시대로 불릴 정도로 지혜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꿈에서 백성들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조화롭고 미덕을 갖춘 생활을 하는 이상적인 왕국을 보았는데, 이것은 도교의 믿음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황제는 백성들 사이에 질서와 번영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왕국에 이러한 덕을 심으려고 했다. 그는 죽어서 신이 되었다고 믿어졌다.
4.
손상태씨가 2009년 2월 26일 르포기사의 내용을 올린다.
제호는 “진주류씨(晋州柳氏) - 이류계(移柳系)” 였다.
[명문가 종친회를 찾아가다]
진주류씨(晋州柳氏). 문무에 뛰어난 많은 인재 배출, ‘소수정예’ 명문
‘한국성씨총감’에 의하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류(柳)씨 인물은 적어도 신라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목종 때 평장사를 지낸 전주인 류방헌(柳邦憲)의 묘비문에 그의 증조부가 신라 말의 각간 벼슬을 했으며, 조부가 백제 우장군(右將軍)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또 사서에 918년 염주(연안)에서 크게 세력을 떨친 호족 류긍순이 궁예에게 귀순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진주류씨의 비조는 앞선 두 사람의 류씨보다 기록 면에서는 후대이지만 그 자취가 좀 더 뚜렷하다. 고려 개국에 있어 큰 공을 세우고 대승(大丞)에 오른 삼한공신 문화인 류차달(柳車達)로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등 사서에 나타난다. 류차달은 고려 태조 왕건이 남방을 정벌할 때 수레를 내어 군량을 공급하여 큰 공을 세웠던 인물.
경기도 향토문화유적지로 단장된 진주류씨 선영.
그런데 진주류씨 비조의 이름자 차달(車達)이 눈길을 끈다. 남방을 정벌할 때 ‘수레를 내었다’는 말의 뜻과 이름자가 완전히 똑같다. 이름자에 그가 세운 공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러 추측이 가능한데, 당시 기준으로 대단히 앞선 문명이라 할 수 있는 수레를 제공하고 그 공을 인정받을 정도라면 왕건의 세력권 안에서 상당히 부유한 실력자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왕건의 고려 건국 과정에서 그런 활동을 했으므로 류차달의 조상이 후삼국은 물론 신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얘기다.
진주류씨의 중시조, 즉 관조(貫祖)는 류차달의 9세손인 판시사공(判寺事) 류인비(柳仁庇)다. 비조 류차달의 6세손인 정당문학 류공권, 류공권의 아들 상장군 류언침, 류언침의 아들 밀직사 류 순의 막내(季子) 아들이다. 류인비는 비조 류차달로부터 9세손이 되며 벼슬이 판시사 제학이며 상호군으로 치사했다.
류인비가 관향을 진주로 쓴 것은 진산군(晉山君)으로 봉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대종회의 입장이다. 문화류문의 영락보(1423년), 가정보(1565년) 기록을 근거로 이렇게 보고 있다.
여기에 또 한 가지가 얽힌다. 즉 진주를 본관으로 하는 류씨가 또 있다. 본 지면에서 보는 진주류씨는 이류-문화류씨계(移柳- 文化柳氏系)로 이른바 토류(土柳)계와 구분된다는 것이다. 토류계와 관계나 연원도 복잡하여 이 부분은 아직 미싱링크로 남아있다.
그러나 한 가지 참고할 사항이 있다. 본관지인 진주에 진주류씨의 세거지는 물론 집성촌도 없다는 사실이다. 진주류씨의 유래를 단순하고 도식적으로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지도 모른다. 어느 성씨든 그 본관지가 되는 곳에는 집성촌을 이룬 세거지가 있게 마련인데 그게 없는 것이다.
진주류씨가 시대적으로 크게 앞서 생겨난 본관지가 아니라는 점에서 의아한 일이다. 그보다는 문화류씨의 발원지가 되는 황해도 신천을 비롯한 고려의 심장부를 중심으로 세거하다 점차 외곽지역으로 퍼져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류인비의 할아버지인 류언침이 먼저 진주를 봉작으로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실제 진주에 가서 살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너무 멀어서 관리가 소홀했던 그 봉작지를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손자 중에서 가장 막내(季子)인 류인비가 떠맡은 것으로 보인다.
형제들과의 경쟁에서 밀려 어느 한 시기 잠시 진주에 가 있다가 다시 벼슬을 얻어 상경 종사했을 수도 있다. 진주에 그러한 연고가 있어 류인비가 진산군으로 봉군되었다고 보아야 아귀가 맞다. 이것이 류차달의 9세손인 진산군 류인비가 진주류씨의 관조가 되는 이유다. 한림학사 류 순의 아들 중 막내(季子)로서 위의 형들과 관적을 분리하고 선긋기를 할만한 사유가 충분하다. 진주류씨가 번성하는 계기를 맞은 것은 류인비의 손자 대부터였던 것 같다. 손자는 둘이었는데 모두 고려조에서 중용되면서 후사를 크게 열게 된다.
류인비의 큰손자인 류혜방은 지영광군사를 역임했으며 증손자인 류 구(1335~1398)가 홍건적의 난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익양이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류 구는 정몽주와 문재를 다투었던 문신. 정몽주가 장원급제한 문과에 급제하고 홍건적의 난 때 개성수복 2등 공신으로 책록되었다.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했으며 명나라와의 외교분쟁 때 18개월 동안 억류되었다가 귀국하여 세상을 떠났다. 사관이 실록에 “근검절약 불무외식”이라 평했으며 후에 청백리로 녹선됐다. 류 구의 아들 류 겸도 1380년 문과에 급제한 문신. 조선 태종대에 광주 목사, 좌우 사간대부, 형조참의를 거쳤다. 청백리로서 ‘썰어놓은 옥에는 검은 붕어들만 덤비고, 내가 놀리는 수저에는 기장만 있다’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아들 4형제를 두었으며, 위 3형제 류 이(柳怡), 류 열(柳悅), 류 척(柳 ?)은 진주류씨 이판공파, 북부령공파, 시윤공파 등으로 분파하면서 오늘날 진주류씨 대종회를 구성하는 4대 파 중의 3대 파로 번연했다.
한편 중시조 류인비의 둘째손자인 류혜손은 판첨의평리 밀직사를 역임한 인물로 일찍부터 학문이 높고 절의가 있던 인물이다. 딸이 목은 이색의 며느리로 출가했고, 본인은 안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성계가 조선태조로 즉위하던 때에 아들과 함께 옥고를 치르며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켰다. 안간공 류혜손은 현재의 진주류씨 대종회를 구성하는 4대 파종회 중 하나로 번연하고 있다.
고려 말을 지나 조선조에 이르면서 진주류씨는 문무 양면에서 명실상부한 벌열 가문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대종회를 구성하는 4대가 각각 세거하는 지역은 지역적으로 연관성이 별로 없이 완연하게 분리가 되고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다. 본관지인 진주에 세거지가 없는 것과 비유할만하다.
즉 한 곳의 세거지에서 조금씩 인근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해가는 것이 아니라 연관성이 별로 없는 먼 지역에서 동떨어져 각각의 집성촌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조선조에 문과 77명, 무과에 380명이 급제한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즉 문무를 통틀어 많은 인물이 배출되고 지방 관직에 나갔다가 그곳을 세거지로 삼아 집성촌을 이루었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진주류씨의 파조(派祖)가 되는 주요 인물들을 고양시 행신동 향토문화유적지 한 곳에 모시고 있다. 이중 류 구, 류 겸 류진동, 류 형, 류 림 등의 묘소와 석물은 문화재〈사진〉로 지정돼 전국의 유림, 대종회 사람들이 견학 및 벤치마킹을 하고 있다.
이 묘역에는 자료가 없는 시조 이하 후손들의 단을 함께 마련하여 이곳에 건립한 제실 명인각에서 배향하고 있다. 4대 파종회 하부에 43개 지파가 대종회에 등록돼 있다.
4파 42지파
吏判公派:副正公 忠定公 僉使公 茂長公 晉溟君 孝成公 文成公 庶尹公 僉知公 / 北部令公派:連山公 結網窩公 奉事公 忠毅公 仁川公 野堂公 裁寧公 雲山公 兵使公 浦翁公 僉使公 經歷公 佐郞公 忠壯公 / 寺尹公派:參奉公 參議公 承旨公 / 安簡公派:素齋公 謙齋公 江陰公 承旨公 節度使公 東岩公 監察公 直長公 持平公 大司憲公 僉使公 忠靖公 大司成公 兵使公 伴鷗堂公 菁陽君
역사속의 진주 류씨 인물
고려·조선조 상경종사 인물 많이 배출. 문과 77명 무과 380명 급제한 충신 다수
상신, 대제학, 청백리, 절의, 공신, 통제사 등 문무총신들이 다수 나타나고 있다.
고려와 조선조에서 발견되는 역사인물을 살펴본다. 고려의 삼은으로 꼽는 목은 이색의 집에 딸을 며느리로 보낸 안간공 밀직사 류혜손은 목은과 교류한 시가 남아 있다.
류 구는 정몽주와 같이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여 공양왕 때 명나라와의 외교분쟁으로 18개월 동안 억류돼 있었을 만큼 고려조의 중신이었다. 류 염은 성균관 대사성에 오르고 세종조에 청백리에 녹선됐다.
류 겸은 류구의 아들로 형조참의를 역임하고, 변계량, 허 해, 이 원 등과 교유한 시가 남아 있고, 청백리로 녹선됐다.
조선시대에는 초기에는 주로 문신들이 이름이 높고 중기 이후에는 무관들의 이름이 두드러진다. 조선중기 이후 병란이 많이 발생하는데 그때마다 진충보국의 정신으로 활약한 탓이다. 따라서 원종공신, 원종훈에 봉해진 인물이 많다.
류순정(柳順汀)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중종반정 당시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정국공신 일등으로 책록되었고, 중종묘(中宗廟)에 배향된 문무 겸비한 공신이다.
류진동(柳辰仝)은 도승지 대사헌 오위도총부도총관 등 문무 겸비한 인물로 대나무 그림으로 유명하다. 류 빈은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경기관찰사로 재임중 순직한 문신이다.
그 외 류 형은 류진동의 손자로 무과에 급제했으며 임진왜란 때 노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뒀고, 이순신 장군도 생전에 후임자로 지목해두었을 만큼 진충보국의 공신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으며 황해병사로 재직 중에 순직했다. 해남 용정사, 공주 충렬사에 배향되고 있다. 이후 류 림, 류경종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됐다.
진주류씨 대종회에서 제시한 역대 인물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시호 생략).
大提學(2명):류 구, 류 염 / 淸白吏(4명):류 구, 류 겸, 류 염, 류 빈 / 相臣(2명):류순정, 류 부 / 書畵(4명):류진동, 류시정, 류혁연, 류덕장 / 節義(5명):류용근, 류 정, 류취장, 류후장, 류풍노 / 功臣(7명):류 구, 류순정, 류계종, 류 영, 류 홍, 류순익, 류효걸 / 享祠(4명):류순정, 류 형, 류 림, 류지화 / 統制使(10명):류 형, 류 림, 류혁연, 류비연, 류성채, 류성추, 류진항, 류효원, 류화원, 류상경/ 孝行錄(14명): 류 의, 류기수, 류동진, 류선기, 류홍원, 류현장, 류희노, 류석남, 류석원 김병만, 윤씨(유영석처), 이씨(유익형처) / 登壇錄(4명) 류 림, 류혁연, 류상량, 류상필
(문과 급제자 77명, 무과 급제자 380명(병사 15명, 수사 13명)
현대의 진주 류씨 인물
현대의 진주 류씨의 명사들도 문·무 양 분야에서 두루 활동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부터 60여년이 흐르는 기간 동안 무신이 많았던 집안답게 장성출신이 6명이나 된다. 그런가 하면, 진주류씨 대종회에서 집계한 결과 대학교수가 33명이나 되고 현역 국회의원이 2명이다.
진주 류씨 명사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류근창(대종회장, 육군중장), 류근환(육군소장), 류근무(육군중장 재향군인회부회장), 류수희(육군준장), 류홍규(공군준장), 류희인(공군준장), 류선호(변호사, 국회의원), 류근찬(방송인, 국회의원), 류근일(조선일보 주필), 류희락(한겨레신문 편집국장), 류상렬(건설부차관), 류창무(중소기업청장), 류래윤(동서울대학교이사장), 류석영(수원대학교대학원장), 류석성(부천신학대학교 부총장), 류석렬(외교안보연구원교수), 류희수(화인화학회장), 류성호(국제제과회장), 류방희(풍산건설회장) 등(지면 관계상 명망 있는 다수의 관료, 대학교수, 기업인 등 생략함).
진주 류씨의 인구분포
경기·충청도 두 곳에 집성촌 집중 현상. 柳氏중 진주류씨 6만104명 10%차지
류(柳)씨를 쓰는 성씨는 총 60만 3084명으로 우리나라 성씨별 인구 순위는 상당히 상위에 올라가 있다. 이중에서 진주류씨는 6만104명으로 10%정도에 이른다.
진주류씨는 이류(移柳- 문화류씨계)와 토류(土柳)계로 구분되지만 그 연원은 달리 하고 있다. 이 구분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따라서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상의 성씨 본관별 인구분포 조사 결과로는 이류(移柳- 문화류씨계)와 토류(土柳)계의 인구가 각각 몇인지 구분이 안 된다.
이류(移柳- 문화류씨계)나 토류(土柳)계 대종회가 각각의 집계방식으로 인구수를 확인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파악이 안 될 것으로 보인다.
족보나, 성씨관련 모든 자료에서는 이류(移柳- 문화류씨계)와 토류(土柳)계를 구분하지만 통계청 자료는 아직 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류-문화류씨계 진주류씨 대종회에서 파악한 집성촌의 내역과 전국 인구분포를 파악해 보면 그 윤곽이 대충 드러난다.
이농현상으로 서울, 부산, 수도권 등으로 인구가 집중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어서 유서 깊은 진주류씨의 집성촌이 사라지고 있지만 2000인구주택 총조사 지역별 분포 현황을 보면 그 흔적이 발견된다. 진주류씨 대종회에서 제시한 파별 집성촌 자료에 따르면 파별로 확연하게 구분이 된다.
파별 집성촌
이판공파=경기도:남양주, 안성, 용인, 부천, 강화 / 경상도:상주 / 황해도:연백
북부령공파=충청도:공주, 보령, 당진 / 전라도:영암
시윤공파=경기도:파주, 강화 / 충청도:천안 / 강원도:원주
안간공파=경기도:여주 / 충청도:부여, 논산 / 전라도:김제 / 강원도 철원 등이다.
인구분포로 보면 경기도에 집성촌이 많은 편이고, 충청도가 다음으로 많다. 주요 성씨본관과 세거지가 영호남에 집중하는 데 비해 특색이 있는 성씨 본관이라 할 수 있다.
수도권 인구는 최근에 급격히 증가하여 본관별 인구분포 자료가 될 수 없으므로 제외하고 충청권의 집성촌 인구밀도를 살펴보면, 토류 진주류씨와 일부 섞여 있다고 해도 아직 집성촌으로서의 자취가 남아 있다.
공주 675명, 보령 156명, 당진 166명, 천안 1112명, 부여 123명, 논산 163명 등이다. 충청권 시군 단위에서 이정도 인구분포는 밀집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인터뷰-진주류씨 류 근 창(柳根昌) 대종회장
‘40년 저력’ 중시조묘역 사적지화
류근창 진주류씨 대종회장은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1970년 육군중장으로 예편하고 국방부 차관, 원호처장, 한국 토지공사 사장, 한국 주택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올해 83세이고 진주류씨 대종회장을 비롯하여 류관순열사 기념사업회 회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 을지무궁훈장 등 훈포장과 대통령표창 등을 다수 수상하기도 했다. 서울시 제기동 류관순기념사업회회장실에서 류근창 회장을 만났다.
매년 5월 200여명에 장학금 지급. 현조들 한분 빠짐없이 찾아 자료화
류근창 진주류씨 대종회장은 20년쯤은 젊어 보였다. 군 생활을 하던 때의 생활리듬을 깨뜨리지 않고 바쁘게 활동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주류씨 대종회를 맡은 것은 1965년부터였다.
올해까지 하면 42년. 진주 류씨 대종회 사업을 수행하는 실무진 3명이 배석하여 대종회가 1942년에 조직됐다고 말했다. 고양시 화전에 있던 진주류씨 선영이 1934년에 일제의 탄약창고 군용지로 징발 수용되어 수년 동안 고심을 하던 끝에 전국의 진주류씨 후손들이 모여 ‘진주류씨 종회’를 만든 것. 그러나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진주류씨 대종회의 기반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보다 못한 대종회 임원들이 1965년에 류근창 당시 5군단장에게 류씨 집안의 중심을 잡고 대종회 조직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기를 부탁하며 만장일치로 대종회장으로 추대했다. 대종회를 무려 40여년을 이끈 저력이 무엇일까. 군 경력, 국방차관, 원호처장, 한국토지공사 사장 등 요직에 오른 인물이라는 점이 컸을 것 같다. 류 회장 체제에서 족보를 두 번 편찬하고, 고양시에 있던 선영을 경기도 향토문화유적지로 정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토당 근린공원내에 선영이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고민했습니다. 중시조 할아버지부터 9세손까지의 묘역이 어린이들이 밟고 뛰고 쓰레기 버리는 곳으로 될지 몰라서요. 하지만 관리가 잘되고, 부속건물들을 갖추어 어느 문중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게 됐습니다.”
전국의 주요 성씨 본관 대종회에서 이 묘역을 벤치마킹해 가고 있다고 배석한 실무진이 말했다. 묘역에 제실, 강당 등 여러 부속 시설을 구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묘역은 호화스럽지가 않고 중부지방, 특유의 전통 분묘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석물이나 봉분의 돌로 화려하고 크지 않게 단장한 것이다.
▷장학금도 넉넉하다고 들었습니다. 재원은 대종회 건물임대수입에서 나오겠지요?
“매년 5월에 선영 묘역에서 200여 명의 후손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합니다. 부모까지 하면 500여명이 모이는 종중의 큰 행사입니다. 매년 1억 2000~3000만원 정도를 지급하며 올해 19회째입니다. 작년까지 2000명이 혜택을 받았어요.”
▷숭조의식을 고취시키는 조상 찾기 자료 발굴사업도 하시지요?
“그렇습니다. 진주류씨 문집도 내고 진주류씨 인물 283명에 대한 인물집도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전자족보와 CD로 만든 자료집 등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사서나 각종 문집, 비문 등에 기록되어 있는 우리 진주류씨 현조들을 한분 빠짐없이 찾아 자료화할 생각입니다.”
▷종택과 사당은 어떻게 관리가 되고 있는지요?
“대종손 종택 유지를 못하고 4개 파별로 종택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현조를 배향하는 사당, 제실은 전국에 수도 없이 많습니다. 사당 서원은 대원군 시절 대부분 혁파됐으나 공주 충렬사, 김제 남산서원, 해남 용정사 등 몇몇 사당이 있습니다.
▷대종회를 운영하는 원칙이 있다면? 그러고 4대파종회와의 관계는 어떠신가요?
“우리는 대종회가 독주하지 않습니다. 파종회장들과 수시로 만나고, 총회나 종중에서 중지를 모아야 할 사안이 생기면 함께 의견을 나눕니다. 각 파에서 이런저런 의견을 내면 그것을 공론화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그게 확실한 구심점이 되는 것 같습니다. 43년 동안 이렇게 했습니다.”
▷행사 때에는 종회원들이 많이 모이는가요?
“봄 장학금 지급행사 때 500여명, 음력 10월 1일에 하는 세일사 시양 때 400~500명 정도 모입니다. 이때는 조상에 대한 산 교육장이 되지요. 10월 1일 이후 각 파별로 전국에서 시제를 지내는데, 보통 20일이 걸려 끝이 납니다.”
▷진주류씨의 가풍이나 성향은 어떻다고 보는지요?
“인물전을 보면 알겠지만 어느 종중 못지않게 인물이 많습니다. 효행자, 문과 장원 급제자도 많은데 군인 계통이 특히 많았던 것 같아요. 내가 살던 공주에서는 류대장집이라고 어영대장 포도대장, 훈련대장 등 무관의 가문으로도 알려졌지요.”
배석한 실무진 중 한 명이 파별로 조금씩 다를 것이라고 거들었다. 조선시대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 무려 77명에 이르니 충분히 나올만한 의견이다. 그러나 무과 급제자 수는 380명에 이른다. 병사와 수사를 지낸 사람이 수두룩하다.
한편 류근창 회장은 대종회 일 말고도 류관순열사 기념 사업회회장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올해 도하 매스컴에서 보도된 바와 같이 교과서에 실린 류관순열사 초상화가 18세 소녀의 모습으로 수정됐는데, 류근창 회장이 4년여간의 공을 들여 이룬 성과였다.
본관은 류관순 열사와 다르지만 같은 류씨를 쓴다는 점에서 22년째 기념사업회장을 맡은 인연이 있는 듯하다. 한편 파주 통일동산 조성 때는 초대 고려선양회장으로 고려통일 대전 건설공사를 진두에서 지휘하기도 했다. 고려에서 발원한 성씨이니 우연은 아니다.
백제, 고구려, 조선의 역사문화가 되살아나는 데 비해 고려 역사문화가 침체돼 있어 앞장섰다는 류근창 회장. 일정이 바빠 연신 시계를 보면서도 사진 촬영을 위해 편히 입던 점퍼를 벗고 풀어두었던 넥타이를 맸다.
이렇게 바쁘지만 대종회에 보내는 시간이 많다면서 “내 나이 여든 세 살. 우리 대종회가 앞으로도 화합하고 발전하는 대종회가 됐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 아울러서 진주유씨 대종회에는 강동구 천호동 성심병원 근처에 있으며 종훈宗訓은 다음과 같다.
서울특별시 강동구 길동 454번지 일성오피스텔 503호. 02)473-0485. 474-0485
順天應命 천리天理를 따라 사명을 다한다.
繼志述事 조상의 뜻과 사업을 계승한다.
敎子有方 자손을 도의로서 교육한다.
親親愛人 일가 간에 화목하고 이웃을 사랑한다.
그렇다면 역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간이 경험한 과거 또는 인간의 행위를 탐구하고 구성하는 역사의 연구·서술 또는 역사학. 역사는 관념상으로는 있을 수 있어도, 실제로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역사와 관계를 갖는 것은 역사의 연구·서술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역사의 연구·서술의 역사에 대하여 기술(記述)한다. 역사는 과거에 있어서의 인간의 행위를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그 대상은 직접 우리들이 지각(知覺)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남아 있는 기록문서, 즉 사료(史料)를 매개로 하여 인식된다. 물론 사료는 문헌사료뿐만 아니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남은 모든 것이 사료이다. 고古문서·고古기록을 비롯하여 책·신문·일기·서한 등의 문헌은 물론, 가요·구비전설(口碑傳說)에서 문자에 의한 전승, 예를 들어 금석문·족보·연대기·회화, 유물로서의 인골(人骨)·석기·도기·집터[住居址]·언어 등이 모두가 사료이다. 그러나 사료 가운데서 문자에 의한 기록문서가 가장 우위를 점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이씨조선왕조실록에서 아래의 자료들을 조사하게된 것이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사료에 의해 사실을 인식·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역사연구의 기술을 필요로 하게 된다. 사료의 탐사·수집·정리·음미·해석 등의 기술론은 역사 연구법으로서 독일의 근대사학에서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어 역사학을 실증적 기초 위에 선 과학으로서 발달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역사 연구법은 일반적으로 사료학(史料學)과 사료비판(史料批判)으로 나누어 설명된다. 사료학은 사료의 수집법과 정리 분류법을 내용으로 한다. 사료비판은 외적 비판과 내적 비판으로 나누어지며, 외적 비판이란 사료 그 자체에 관해, 그것의 진위(眞僞) 여부, 원사료(原史料)에 대한 타인의 첨가 여부, 필사(筆寫)인 경우의 오류의 문제, 혹은 사료가 만들어졌을 단계에서 작자·장소·연대 및 전거(典據) 등에 관해 사료의 가치를 음미하는 것이다. 한편, 작자가 사료로서 전하는 것이 반드시 역사적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이러한 사료 진술의 신뢰성에 관하여 음미하고, 사료의 성격을 밝히는 작업이 내적 비판이다. 즉, 내적 비판은 사료의 기술(記述)을 분석하고 기술의 개개의 점에 관해 신뢰할 수 있는 이유의 유무를 조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 연구법이란 본질적으로 사료의 비판과 해석에 의해 이루어진다. 사료는 인간생활의 모든 측면에 걸친 다양한 것이기 때문에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다른 제반 과학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보조과학이라고 한다. 인간생활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려면, 인간생활의 모든 분야에 관한 전문지식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서, 철학·문학·정치학·사회학·경제학·법학 등의 학문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가의 일반적인 학문적 교양으로서 필요한 것이며, 그런 뜻에서 일반적 보조학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특수보조학이라 불리는 것은 사료를 정리하고자 할 때 요구되는 실제적인 기술적 지식이며, 보통 역사연구법에 있어서는 언어학·서체학(書體學)·인장학(印章學)·고전학(古錢學)·계보학(系譜學)·문장학(紋章學)·고고학·지리학 등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어느 것이 연구자에게 필요한 보조인가는 연구 주제에 따라 결정된다. 또한 역사연구를 위하여 역사가가 반드시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이용할 필요가 있을 때 전문적 학자에게 의뢰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인간생활의 제반 분야에 있어서 분업체계가 발달되어 있는 오늘날, 보조과학이라 불리는 것에는 그 자체가 독립된 과학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있다. 여기에 역사가와 다른 전문가와의 협력관계가 필요하게 되어 종합연구가 탄생하게 된다. 역사를 어떻게 파악하는가 하는 데서 역사의 이론과 법칙이 생겨났다. 역사인식은 제국주의·자본주의 등 무수한 개념과 봉건제도의 붕괴라든가, 시민계급에 의한 근대화 등의 일반적 명제를 이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인식에 있어서 이론적·법칙적 인식이 수행하는 역할은 불가결한 것이지만, 이에 대하여 일부 역사가들은 이론과 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실증적 연구를 해야 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론의 사용법에 대하여는 그다지 문제가 없으며, 예를 들어 K.H.마르크스, A.토인비, M.베버, H.피렌 등의 이론 등이 일반적으로 널리 승인되어 있다. 한편 법칙에 있어서는 논쟁이 끊이지 않아, 자연과학의 법칙이 그 사용 기준이 되었다. 자연과학적 방법에 의하여 자연과학과 유사한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역사에 있어서도 역시 똑같이 학문의 목적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이래로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크게 변화하여왔다. 거기에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의 영향이 깊어, 인간생활의 물질적 생산을 사회의 기초라 하고,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보았으며 인간의 역사를 한 개의 자연사로서 파악하려 한 점이다. 이 마르크시즘의 법칙관은, 일반적으로 역사에 있어서의 법칙성의 인식이 문제로 될 경우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런 의미로서의 자연과학적 법칙의 도입에 의하여 역사학의 과학화를 꾀할 수는 없다. 역사에 있어서의 법칙이란 고도의 개연성(蓋然性)·가능성·경향의 별명(別名)으로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역사는 인간의 자기인식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일 것이다. 이 말은 자기의 개인적인 특수성을 아는 일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기의 본질을 안다는 의미이며,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를 아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이를 시도(試圖)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그 가능성을 아는 유일한 길잡이는 과거에 있어서 우리 조상들이 무엇을 해왔는가라는 점에 있다.
따라서 역사의 가치는 조상님들이 무엇을 해왔는가? 그리하여 우리가 그것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우리나 자손들에게 가르쳐주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왜 역사를 배워야 한다는 것은 선조들의 발자취와 그 전통을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족들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 발자취가 언제부터 이어져왔는가, 혹은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정체성 부각을 일으키기 위해 배우는 것이다. 충청도 산골 축산리라는 행정구역에 옛 지명인 꿩말(꿩이 많이 나오는 마을)에서 태어난 나도 그 정체성을 배우는 것이 역사를 배우는 것, 즉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터넷의 발달로 학자나 연구자들 아니면 더 이상 한자로 이루어진 “옛 문헌이나 족보들을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노파심도 한몫을 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경종 때 부총관 諱 취장(就章) 할아버님( 맨 뒷부분에 *참고만 달았다) 등 많은 분들을 조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후일을 기약하며 마음에 다짐을 다시 해본다. 금년 봄부터 자료를 조금씩 준비하여 이번 여름 한 철에는 이조왕조실록에서 본문을 찾아 첨삭도 하고 참고와 주석을 달았다. 하지만 본문은 그대로 두어서 이견이 없이 明明하기를 원칙으로 삼았다. 원래 문장의 재주가 남다르지 않은지라 흠결이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조부님께서는 나의 작은 노고에 흡족해하시리라 믿는다. 후일 아랫대에서 훌륭한 학자와 문장가가 나와 올바른 재고와 교정이 있기를 바라마지않는다.
2009년 서울 안국동에서 무우武愚 류태희柳 台熙 쓰다.
* 참고
“프랑스의 사회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의 기본구조”
프랑스의 사회인류학자, 구조주의의 선구자. 벨기에 브뤼셀 출생. 1927~32년 파리대학교에서 철학과 법률을 공부한 뒤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장 폴 사르트르 등과 지적 교제 관계를 맺었다. 브라질 상파울루대학교에서 사회학교수로 재직 중(1934~37) 브라질 원주민을 현지 조사했다. 뉴욕 시의 사회연구학교 객원교수로 있는 동안(1941~45)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의 저작을 접하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50~74년 파리대학교 에콜 프라티크 데 조트제튀드(École Pratique des Hautes Études) 연구지도교수를 지냈으며, 1959년 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회인류학 학과장이 되었다.
1949년 최초의 주요저서인 <친족의 기본구조>(1949)를 출간했으며, 1955년 문학적이고도 지적인 자서전 <슬픈 열대>(1955)를 통해 유명해졌다. 그 밖의 저서로는 <구조인류학>(1958) <야만적 사고>(1962) <오늘날의 토테미즘>(1962) 등이 있다. 방대한 규모의 저서 <신화>는 <날것과 요리된 것>(1964) <꿀에서 재까지>(1962) <식사예절의 기원>(1968) <벌거벗은 인간>(1971)의 4권으로 출간되었으며, 1973년 <구조인류학> 제2권이 나왔다. <가면을 쓰는 법>(2권, 1975)은 미국 북서해안 인디언의 예술ㆍ종교ㆍ신화를 분석한 책이다.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문화체계에 관련된 엄청난 양의 정보를 그가 핵심적인 것이라고 파악한 요소들 사이의 형식적 관계들로 환원시키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문화를 커뮤니케이션 체계로 보았으며 그 체계들을 해석하기 위해서 구조언어학·정보이론·인공두뇌학에 기초를 둔 모델을 설정했다. 문화체계를 이루는 요소들의 구조적 관계라는 관점에서 문화체계(예를 들어 친족 및 신화체계)를 분석하는 데 쓰이는 구조주의는, 20세기 사회과학뿐만 아니라 철학·비교종교학·문학·영화 등 여러 분야에 영향을 끼쳤다. 구조주의에 입각한 그의 연구 업적은 3가지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1) 친족구조
혼인규제와 친족체계를 일종의 언어, 즉 개인 간, 집단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매체가 되는 것은 여성이며, 친족 집단 간에 말과 동일하게 순환된다고 논한다. 그는 혼인규제의 다양성의 배후에서 몇 가지 원리를 추출해 냈으며, 친족 체계에서는 출신보다도 혼인규제가 한층 중요함을 제시하였고, 혼인규제와 친족 명칭과의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명백히 하였다. 나아가 그는 친족체계를 경제적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신구조에 의해 설명하려고 하였다. 다만 여성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친족구조를 친족의 일반이론으로서 확대시키는 점에 대해서는 후에 J.T.니덤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2) 분류의 논리 또는 야생의 사고
아직 인간이 과학기술 문명의 사고에 영향 받기 이전의 인간의 사고를, 미개인의 동식물 분류 등을 통하여 파악하려고 했다.
특정 동식물을 집단의 시조로 여기고, 이를 먹는 것을 금하는 토테미즘이라는 제도에 관한 종래의 기능주의적인 해석이 타당치 못함을 지적하고, 특정 동식물이 자연계로부터 선택되는 것은, 그것이 경제적으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회의 구분이나 관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라고 논하고, 토테미즘의 원리는 대립하는 것의 통합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M.포테스 등의 비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토템연구는 종래 설명되지 못했던 현상의 해면에 시사하는 바가 컸다.
(3) 신화의 구조
아메리카대륙 원주민의 800개가 넘는 많은 신화를 연구하여 4권의 저작으로 정리하였다. 남아메리카 원주민의 신화에서는 자연으로부터 문화로의 추이는 날것으로부터 불에 익힌 것 요리된 것으로의 추이에 의해 상징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북아메리카의 신화에서는 자연으로부터 문화로의 추이는 의류, 장식품의 발명과, 그것에서 유래되는 물품의 교환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첫댓글 방대한 글을 작성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노고가 크십니다.
에고...고맙습니다![므흣](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8.gif)
책은 완성을 했것만...누가 비용을 낼꼬...![ㅠㅠ](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9.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