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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對話,諧謔,諷刺) 스크랩 옛날 생각.초심
김희우 추천 0 조회 43 07.07.19 12:27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옛날 생각.초심

 

2001년 여름이었어.


내가 직장을 때려 치고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도서관을 들락거리던 시절이었지.
막연히 공부를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하고

한동안 손을 놓았던 책을 다시 보기 위해

봄부터 영어소설책을 들고 도서관을 왔다 갔다 했지.

(꼴값을 치고 있었던 거지.)


 

6월쯤이었던거 같은데

어느날 부터 인가 내 앞자리에

벙거지 모자에 아주 허름한 옷을 입고 묵직한 가방을 들고 와서

전기기능사 책을 펴놓고 보는 40대초반의 사나이를 보게 됐어.
행색으로 보아 하니 노가다를 다니는 사람이었어.

(나도 노가다를 해봐서 첫눈에 알아 봤지.)

이 사람이 책을 펴놓고 열심히 정말 진지하게 숙독을 하는데

한시간이 지나고 두시간이 지나도

책장이 몇장 넘어 가지 않더란 말이야.
그래서 나는

 

"저 사람 정말 머리가 나쁜 사람인가 보다"

하고 생각하고 또

 

"며칠 저러다 안나오겠지. 잠깐 바람이 불었겠지."

하고 생각했어.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저녁때만 되면 도서관에 와서 책을 보고

도서관 폐관시간인 밤 10시가 되면 집에 가더군.

 

그렇게 8월이 왔어.
어느날 아침에는 무척 더웠는데

점심경부터 비가 막 쏟아 지기 시작했어.
그 날 그 사람이

온몸에 시멘트와 먼지를 미처 털어 내지 못하고

여느때와는 달리 대낮에 도서관에 나타난거야.

특유의 벙거지 모자에

가방에는 몇개의 망치자루가 거꾸로 꽂혀진 채로.

(아마 아침에 날씨가 맑아서 노가다를 나갔는데 비가 와서 도중에 온거 같더라구. 씻지도 못하고.)


그 때 벌써 그 사람을 본지가 두달이 다 되어 가고 있건만

여전히 그사람의 책장은 30페이지를 넘지 못하고 있었어.
우린 매일 마주 치다 보니까 인사를 안했을 뿐이지

얼굴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지.


우연히 휴게실에서 커피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가게 됐어.

 

그 사람은 고아였어.
나이는 37이고.
초등학교도 다니는둥 마는둥 하다가 겨우 졸업하고
중학교는 고아원에서 보내줘서 다녔는데 도중에 그만 뒀데.
학교에서 애들한테 놀림을 받아서.

해서 떼돈을 벌어야 겠다고 결심하고

여기저기 떠돌다가 목수일을 배우게 됐대.
당시 정식으로 목수일을 한지가 꽤 돼서

일당이 12만원쯤 된다는 걸로 기억해.


한동안은 돈 모으는 재미에 빠져 있어서 시간가는줄 모르다가

그 해 초에 여자가 생겼는데 도서관에 오기 시작한 6월쯤

여자와 헤어 졌다는군.

돈도 어느 정도 벌어놔서 아파트 한채 얻을 만한 전세금도 있고

결혼자금도 충분했는데

여자가 상고를 졸업하고 전문대를 졸업했다는군.

 

결론은

여자쪽 집에서 중학교도 못나온 사람한테는 딸을 줄수 없다는 거였고 직장도 노가다 목수는 곤란하다는 복합적인 거였지.

거기다가 현장에서도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새파랗게 젊은 기사들이 반말 비스무리하고 무시하니까

그것도 싫었다는 거야.


그래서 검정고시를 봐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엄두가 안나서 일단 자기가 옛날에 해봤던 전기일을 바탕으로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려고 마음 먹었다더군. 
해서 내가 물어 봤지.

 

"생각보다 어려운가 봐요. 진도가 잘 안나는거 같던데.."

그 사람이 대답하길

 

"저 사실은 한글을 잘 몰라요...."

 

"지금도 포기 하고 그냥 일이나 하러 다니고 싶은데.. "

 

"평생 노가다 막일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지 않아서요. 자격증을 가지고 잡부가 아닌 기술자로 불리고 싶어요. 그리고 남들처럼 결혼도 하고 싶고. 고아라고, 학교를 못나왔다고, 노가다 한다고 무시 당하고 싶지 않아서 포기할수 없어요."

 

그랬던 거야.

그 사람이 똑 같은 페이지를 그리 오래도록 보고 있었던 것은

글을 잘 몰라서 그랬던 거야.

자신과 부닥치면 옷에 때가 묻을 까봐

애들도 피하는 시립도서관의 복도를 아랑곳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그렇게 묵묵히 걸어 가더군..

도서관에서 남들이 쳐다 보던지 말던지

그사람은 시멘트 가루를 날리면서,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로,

책한권 외에는 모두 장도리며 망치며 톱 같은 것들이 들어 있는

그 연장가방을 들고.....

포기하지 않고....

 

<나는 고아도 아니고, 중학교를 못나온 것도 아니고, 막일을 해서 먹고 사는 절박한 상황도 아니고, 여자가 날 버리고 떠난 것도 아닌데 왜 이러고 있지? 지금 나는 뭘하고 있지? >


그 때 부터 나는 미친듯이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그 해에 4개월 만에 14개의 자격증을 따는 기록적인 결과를 얻었지.

하지만

 

내가 딴 자격증들이 그 사람이 그렇게 따고자 했던 "전기기능사" 하나의 값어치만 할까.....

 

<당신에게 부끄럽습니다.>

<그 자격증 꼭 취득하셨길 바랍니다.>

<그리고 검점고시도 십년이 걸리든 이십년이 걸리든 꼭 이루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행복한 가정도....>


<<요즘의 내가 맘에 안들어.>>

<<지금 나는 또다시 배가 부른 것 같아>>

 

                                                            by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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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7.19 12:57

    첫댓글 좋은 글...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케하는 글. 계속 기대합니다.

  • 07.07.19 13:47

    배 부름을 걱정하는 걸 보니... 자신을 맘에 들어해도 될 것 같은데요. 샬롬*^^*

  • 07.07.20 10:39

    생각을 많이 하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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