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강원심리상담연구소
 
 
 
 

회원 알림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 가입
    1. 꿈지기
    2. 끝없는사랑
    3. 함희숙
    4. 이정화
    5. 강주원
    1. 조 덕호(원주시민..
    2. 신문지
    3. 가람님
    4. 송남두
    5. 후크성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노인상담 스크랩 웰다잉 Well-Dying ① 웰다잉의 철학적 성찰② 의학적 측면에서 본 웰다잉 ③ 웰빙과 웰다잉
운영자 추천 0 조회 94 16.03.06 21: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웰다잉 Well-Dying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죽음을 피하거나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철학에서는 죽음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인다. 얼마나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이다. 죽음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 들이느냐에 따라 현재 삶의 양식이 결정된다고 한다.

품위 있고 의미 있게 사는 것이 웰다잉의 조건인 것이다. 의학적인 측면에서의 웰다잉 문제는 정확한 의학적 판단을 통해 말기환자들이 신체적?정신적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음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 연명치료와 뇌사판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헌법에 인간의 존엄한 죽음이 보장돼있다고 하지만 전통적 유교사상이 여전히 존재하는 우리사회에서 죽음에 대한 솔직한 대화와 논의는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이번호 특집에서는 죽음과 웰다잉에 대한 솔직한 논의를 담아본다.

 

-------------------------------

글 싣는 순서

 

① 웰다잉의 철학적 성찰
② 의학적 측면에서 본 웰다잉
③ 웰빙과 웰다잉
④ 웰다잉과 노인복지
⑤ 호스피스?완화의료
⑥ 고령화 사회와 웰 다잉
⑦ 한국은 왜 웰다잉 지침이 없나

--------------------------------

 

 

 

 

 

① 웰다잉의 철학적 성찰

 

품위 있고 의미 있게 사는 것이 웰다잉의 조건

 

죽음은 일반적으로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것이 과학적으로는 ‘살아있는 유기체에 있어서 생명 과정이 중지되는 현상’으로 정의되고, 특히 분자 생물학에서는 ‘생명 현상에 필수적인 분자구조의 해체’로 규정된다. 이에 비해 종교에서는 영혼의 행방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생명과정이 갑자기 중지되므로 그 과정의 주체인 영혼이 계속 살아남아서 구원을 받거나 해탈한다는 등 종교에 따라서 설명이 다양하다.

 

철학에서는 죽음도 삶의 일부분

 

한편 철학에서는 죽음이라는 현상을 규정하고 영혼의 행방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만 오히려 그 의미를 음미하는 데 더 많이 관여한다. 러셀이 지적한 바와 같이 철학은 과학과 신학 사이에 위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과학 쪽에 관심을 갖는 철학자는 죽음이라는 현상의 의미에 더 천착하는 편이지만, 종교 쪽에 관심이 많은 철학자는 구원이나 해탈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조명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은 과학이 아닌 것처럼 신학의 한 분야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어떠한 경우든 철학자라면 죽음을 반드시 삶과의 연관 속에서 규명하고자 노력한다. 삶과 죽음을 한 동전의 양면으로 이해하고 그 한계 안에서 다루는 것이다.

 

요즈음 행복 개념의 한 변형으로 ‘참살이’ 혹은 ‘웰빙’ 이라는 말이 유행하더니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품위 있는 죽음’ 혹은 ‘웰 다잉(Well-Dying)’ 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것은 주로 의학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오늘날 의학이 발달하여 불필요하게 혹은 무의미하게 생명을 연장시킨다든지 가난과 불운에 짓눌려서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인간으로서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도록 돕는데 그 목적이 있다. 호스피스운동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호스피스’는 손님을 환영하고 그들에게 선물을 주는 경향, 혹은 관습의 의미로서 그리스와 라틴 어원을 갖는다. 원래 이 말은 여행자를 보살핀다는 뜻을 가졌지만 후에 환자에 대한 보살핌으로 발전하였다.

중세에는 순례자들을 간병하고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는 여행자들의 안식처럼‘호스피타’라는 말이 사용되었
다. 오늘날 호스피스는 죽어가는 환자와 그 가족의 심리적 불안과 육체적 고통을 덜어줄 목적으로 행해지는 간호 행위이다. 특히 환자의 남은 인생을 가능한 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

가족 과 더불어 주변의 모든 것을 즐기도록 배려하고 그 동안의 삶을 정리하여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삶을 연장시키거나 단축시키는 치료보다는 죽음에 직면함으로써 나타나는 증상들을 완화시키는 데 주력한다.

여기서 철학적으로 특별히 의미 있는 부분이 바로 죽음을 ‘삶의 일부분’ 으로 인식하게 한다는 점이다.

 

‘교육’ 통해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철학자들은 삶과 죽음을 매우 유기적으로 다룬다. 사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죽어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령 어떤 아이가 3년밖에 못 살았다는 것은 3년 만에 죽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아이는 3년 동안 죽어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몇십 년 동안 여행한다고 생각하고 철학의 임무가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넓은 의미의 ‘호스피스’ 라고 볼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죽는 연습’ 이라고 한 것을 우리는 이러한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양 철학에서는 죽음에 대한 탐구가 매우 심층적이며 광범위하다. 소크라테스에서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죽음에 대해 깊은 식견을 피력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크라테스의 죽음관과 죽음에 임하는 태도는 그것이 전형적으로 ‘철학적’ 이라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며 깊은 감동을 준다.

그는 말하자면 철학적 ‘웰 다잉’ 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나라에서 인정하는 신을 믿지 않으며, 따로 새로운 신령을 만들어 믿고 있다 ”는 이유로 법정에 섰다. 그는 여기서 사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혜가 없으면서도 마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지적하며 ‘파이든’ 에서 이렇게 말한다.

 

“죽음이란 다음 둘 중의 하나이다. 즉 아무것도 아닌 것이어서 죽은 사람은 어떤 대상에 대하여 아무런 감각도 없는 것, 혹은 전해 내려오는 바와 같이 영혼이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자리를 바꾸어 옮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죽음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죽음의 시간 전체는 하룻밤보다도 더 길지 않으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는“죽는 자와 산 자 중에 누가 더 좋을지는 신만이 알 뿐” 이라는 말을 남기고 결국 독배를 마신다. 죽음을 택하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친구의 배려로 사실 탈옥의 기회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자율적이고 합리적이며 도덕적인 맥락에서 깊은 성찰에 몰입한 다음 마침내 친구의 권유를 뿌리친다. 탈옥하면 동포들을 배반하고 준법의 약속을 어기며 그토록 사랑하는 조국을 능멸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후 당국에서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면을 제의했으나 이번에도 사양하였다. 자기가 살아온 방식대로 살수 없다면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의 경우 이와 같이 ‘참살이’ 야말로 ‘참죽음’ 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그에게는 ‘얼마나’ 사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스토아 철학자인 에픽테투스에 의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사건들이 아니라 사건들에 관한 그들의 판단” 이다. 죽음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교설’ 에서 이렇게 말한다.

 

“죽음이란 전혀 두려운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그것은 마치 소크라테스가 생각했던 것과도 같은 것이다. 참으로 죽음에 관하여 두려운 것이 있다면 죽음이 두렵다고 하는 인간의 생각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두려움에서 헤어날 수 있는가. 그는 이른바 ‘교육’ 에 의해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자기가 불행하게 된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비난하는 것은 교육을 받지 못한 증거이다.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그 사람의 교육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기 자신도 남들도 비난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교육이 완전해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교육이 완전해졌다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터득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우주의 운행 법칙을 완전히 깨달을 때,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감정이나 의지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다고 굳게 믿을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법칙에 다만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슬픔이나 기쁨, 노여움이나 안타까움, 갈등이나 불안 따위는 모두 자연의 섭리를 깊이 깨닫지 못했을 때 나오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죽음에 임해서 경험하는 그러한 감정들도 예외가 아니다.

 

에픽테투스에 의하면 모든 사물과 현상은 우리의 능력 안에 있는 것과 밖에 있는 것으로 나누어지는데, 인간이 욕망을 다스리는 방법은 이것을 분별함으로써 비롯된다. 안에 있는 것은 의지적인 활동으로서 의욕이나 욕망의 소산이며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밖에 있는 것은 사회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서 재산이나 평판, 혹은 육체나 양친 등 우리가 책임질 수 없는 부분이다. 그는‘안에 있는 것’만 해냄으로써 우리는 ‘부동심’ 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죽음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죽음을 피하거나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도 죽음을 면할 길은 없다.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극복하고 영생을 얻는 방법이 있다고 믿으면 나는 무지하거나 자신을 기만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죽음을 숙연한 마음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한편 죽음에는 의지적이고 주관적인 측면이 있다. 죽음에 임하는 마음의 자세가 그것이다. 그것을 공포로 느낄 수도 있고 환희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른 바 ‘교육’ 이 완성된 부동심의 철학자에게 죽음은 환희가 아닌 것처럼 공포의 대상일 수도 없다. 그것은 섭리에 따라 ‘탄생’ 처럼 조용히 다가올 뿐이다.

도대체 잘 모르는 그 무엇에 대해 기뻐하거나 슬퍼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웰다잉은 품위 있고 의미 있게 죽는 것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웰다잉’은 편안하게 죽는 것보다 의미있게 죽는 측면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셈이다. 하이데거는 그의 ‘존재와 시간’에서 죽음에 임해서도 소크라테스처럼 실존적 자세를 유지할 것을 주문한다. 인간은 단순히 한 잎의 낙엽이 아니라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는 동안 견지했던 존재 이유와 역사적 사명과 사회적 역할 등이 결말을 고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존재이다. 그러한 의미로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실존적 죽음을 죽을
뿐이다. 그는 ‘존재와 시간’ 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죽음을 대신 떠맡을 수는 없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을 수는 있다. 그러나 누가 자기를 위해서 죽는다고 해서 자신의 죽음이 결정적으로 제거되었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각기 항상 자기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떠맡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므로 철학자들은 자신의 정신력과 인격 전체를 걸고 결단을 내려야 하며 실존적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은 철학자들에게만 국한된 임무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이 소중하고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권리이며 의무이기도 하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품위 있고 의미있게 사는 것은 더욱 소중하다. 그것이, 즉 품위 있고 의미 있게 죽는 것, 곧 ‘웰다잉’ 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글 | 엄정식 _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글쓴이는 서강대학교 철학과 졸업 후 웨인주립대학에서 석사학위를,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철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② 의학적 측면에서 본 웰다잉

 

정확한 의학적 판단이 고통 없는 죽음 도와

 

인간의 죽음이나 탄생은 원래 의학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의학은 오로지 살아있는 생명을 보호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 왔으며 죽음과 탄생에 대해서는 단지 필요한 경우 이를 ‘확인’ 하는 일을 해 왔을 뿐이다. 즉, 죽음이 가까웠다고 판단되면 의사는 그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려주는 일이 전부였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인간의 탄생과 죽음이 주로 집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는 점으로도 이해가 되는 일이다.

그만큼,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일은 굳이 의학의 영역이라고 할 필요도 없는 극히 자연스런 현상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유기체로서의 인체의 종말을 말하는 죽음은 사실 모든 세포가 다 소멸되는 상태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 어느 한 시점을 정해서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죽음 인식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연명술?소생술 발달로 심폐사설 재조명

 

이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까지 의사나 일반인 모두가 확인할 수 있는 호흡과 심장의 정지상태를 죽음으로 판단해 온 소위 심폐사도 따지고 보면 그 상태를 죽음으로 정하는 것이 편리해서 일뿐, 그것이 절대적인 죽음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심장은 멎었다가도 다시 소생한다는 사실에 유념하라’ 는 기록이 기원전 1세기경에도 있었다든지, 호흡과 심장이 멎은 것을 확인하고도 당장 매장이나 화장을 하지 않은 오랜 장례 전통 또한 이런 이유에서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흡과 심장이 멎는 것을 의학적 죽음으로 판단하는 것은 일단 이 일을 정확히만 판단하면 다시 죽은 사람이 회생하는 경우가 없다는 오랜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런 죽음에 관한 심폐사설이 도전을 받기 시작한 것은 역시 생명을 연장하고 소생시키는 소위 연명술과 소생술같은 의학기술이 발달되면서부터이다. 인위적으로 멎었던 호흡을 어느 정도 연장시키고 정지된 심장박동을 다시 뛰게 하는 기술이 생기면서 인간의 죽음을 판단하는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이 일은 역시 의학의 몫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학적 측면에서 본 웰다잉의 본질은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 없는 편안한 죽음을 말한다. 물론 몇 살에 죽느냐 하는 것도 의학의 문제이기는 하다. 아주 어린 나이에 죽는 것을 웰다잉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학적인 측면에서의 웰다잉은 최소한 평균수명은 사는 경우를 전제로 하고 여기서는 죽음 자체가 의학적으로 어떤 경우에 고통 없이 편안한 상태일 것인가 하는 것에 관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이렇게 볼 때 의학적 측면에서의 웰다잉의 문제는 의학의 발달과 함께 가능해진 연명술이나 소생술이 과연 죽어가는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주느냐에 관한 문제로 접근해 볼 수가 있다. 그것은 이런 기술을 통해 죽을 사람이 살아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오히려 편안하게 죽어가는 환자에게 많은 고통만을 주는 경우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대병원이 최근 말기 암환자가 연명치료 중단을 원할 경우 법적절차를 거쳐 이를 허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확인됐다. 5월 18일 서울대병원은 최근 열린 의료윤리위원회에서 ‘말기 암환자의 심폐소생술 및 연명치료 여부에 대한 사전의료지시서’ 를 공식적으로 통과시켰다고 밝혔다.

사진은 서울대학교병원 중환자실 모습

 

뇌사환자의 인공적 생명연장과 웰다잉

 

연명술과 소생술의 발달은 우선 전통적인 죽음의 정의였던 심폐사설을 부정한다. 심장이나 폐의 기능이 소실되는 과정에 연명술과 소생술이 개입함으로써 죽음 과정을 멈추게하거나 어느 정도 생명을 연장하는 일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은 심장과 폐 기능이 완전히 멈춘 상태는 물론, 이보다 시간적으로 다소 앞서는 시기, 즉 뇌의 기능이 비가역적으로 소실된 상태 또한 죽음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곧 뇌사설이다.

 

뇌사를 죽음으로 판단하는 의학적 근거는 일단 뇌의 모든 기능이 소실되면 이어서 호흡과 심박동이 불가역적으로 기능정지되기 때문에 결국 심장사로 이행이 된다는데 있다. 자연 상태에서 심장사와 뇌사 사이에는 시간차가 짧기 때문에 종래에는 뇌사상태라는 것이 명확히 인식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것을 죽음의 정의로 이용할 하등의 가치가 없어 뇌사에 대해서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러나 심장마사지 같은 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 부착같은 연명치료기술이 발달되면서 많은 경우 죽어가는 사람을 다시 되살리는 일이 가능해 졌고, 심지어 뇌의 기능이 불가역적으로 정지된 후에도 이런 연명적 치료 장치를 사용하는 경우 길면 약 10일 정도까지 심장을 박동 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뇌사와 심장사의 시간차를 이용하면 아직 죽지 않은 장기를 떼어내어 이를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는 장기이식도 가능하다.

이렇듯 소생술이나 연명치료기술은 죽어가는 사람 자신을 살리기도 하고 뇌사자로부터는 장기를 떼어내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도 하지만 이것은 또 죽어가는 환자의 웰다잉을 저해하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종교적이나 철학적 측면에서 보면 이런 죽음이 더 없이 ‘잘 죽는 일’ 이겠지만 고통 없이 죽게 도와주어야 하는 의학적 측면에서 보면 이 일이 반드시 환자에게 웰다잉이 된다고 말할 수 만은 없기 때문이다.

 

원래 뇌사를 개체사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에는 뇌사상태에 빠진 환자를 인공적으로 연명 조치하는 것이 오히려 환자에게 무익한 치료를 하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환자의 웰다잉을 저해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도 뇌사를 인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가톨릭교회가 뇌사를 사망으로 보는 것에 동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뇌사를 죽음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심장사만큼 오래되지는 않지만 의학사에서 보면 결코 최근의 일은 아니다. 즉, 이미 1800년에 프랑스의 해부학자이며 외과 의사인 비샤가 인간의 생명을 뇌 활동이 중심이 되는 동물적 생명과 폐와 심장이 중심이 되는 유기체적 생명으로 나눈 바 있다. 이 때 그는 전자, 즉 뇌가 손상되면 죽음이 시작되며, 이것이 후자에도 영향을 미쳐 필경은 유기체적 생명도 죽게 된다는 이른바 순환-호흡-뇌기능 정지라는 생명의 고리현상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의학계에서 뇌사를 죽음의 판단기준으로 하자는 의견이 나온 것은 1968년 하버드대학교 의학부 뇌사특별위원회가 뇌의 영구적 기능 상실, 즉 회복 불가능한 혼수상태의 기준안을 발표한 뒤부터이다. 그 이후, 이것은 국제뇌파학회, 미국 대통령위원회의 죽음 판정 가이드라인, 스웨덴 보건사회성의 죽음 판정에 관한 위원회보고, 일본뇌파학회 뇌사위원회의 뇌사판정 기준, 영국 보건성 연구반의 이식 장기 채취 실시규칙, 대한의학협회 뇌사연구특별위원회 뇌사판정 기준안 등 각국이 뇌사판정 기준을 만드는데 있어서 거의 공식적인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한국에서도 뇌사문제는 1970년대 초부터 계속해서 논의되어 왔다. 그간 대한의사협회 뇌사특별위원회와 각 학회 등에서 관련 세미나와 심포지엄 등을 개최하면서 그 의학적, 법적, 그리고 윤리적 문제들을 토의해 왔으며, 1980년대 말에는 대한의사협회가 꽤 까다로운 뇌사판정기준을 제정하기도 했다.

즉, 원인질환이 확정되어 있고 치료될 가능성이 없는 기질적인 뇌병변이 있어야 하는 등 몇 가지 선행조건을 만족시켜야 하고, 외부자극에 전혀 반응이 없는 혼수상태로 자발적인 호흡이 완전히 소실되고 양쪽 눈의 동공이 확대된 상태로 고정되어 있어야 하며, 뇌간반사가 완전히 소실되어야 하는 등을 뇌사판정 기준으로 정하고

엄격하게 관리하도록 하고 있어서 이론적으로는 이런 조건만 확실하게 확인하면 뇌사판정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뇌사를 사망 시점으로 보는 의학적 판단에는 뇌사와 심폐사 사이 기간에 아직 혈액이 흐르는 장기를 적출해서 이를 이식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실용적 의도가 없지 않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이것이 죽는 사람 개인에게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병원에서 임종 맞는 ‘죽음의 의료화’ 보편화

 

의학적 웰다잉의 문제와 관련해서 연명적 치료기술이 갖는 두번째 문제는 그 기술이 죽어가는 환자에게 모든 경우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문제다. 요즘 큰 병원 중환자실에 가보면 많은 환자들이 인공호흡기를 포함해서 수액이나 영양제, 그리고 약물주입을 위한 많은 튜브를 부착한 채 누워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환자 스스로 호흡이 어렵고 음식을 섭취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배설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기기나 튜브들은 모두가 중환자실 환자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들이지만 특히 스스로 호흡을 할 수 없는 환자들에게 있어서 인공호흡기는 없어서는 안 되는 의료기기이다. 그것은, 만일 인공호흡기가 없이도 스스로 호흡을 할 수 있는 상태로 호전되는 환자가 아닌 경우 이들 환자에게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면 당장 또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호흡이 멈추게 되고 호흡이 멈추면 결국 심장도 멈추게 되어 사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중환자실에서 환자들에게 인공호흡기를 부착하는 것은, 말하자면, 환자 상태가 호전되어 더 이상 인공호흡기가 필요하지 않을 때까지만 환자의 호흡을 도와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큰 수술을 받고 나서 전신 상태 회복을 위해 잠시 중환자실에 머무는 환자들의 경우가 좋은 예다. 그러니까 병원 중환자실은 죽어가는 환자가 머무는 곳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잠시 호흡 등이 불편한 환자들이 집중적인 치료를 받고 병세를 회복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이미 여러 가지 치료에도 회복되지 않고 단지 인공호흡기와 수액 등에 의존해 생명만을 유지해 가는 죽음 직전의 환자들이 중환자실 병상을 차지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어서 대부분 병원들에서 중환자실 환자관리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만큼 요즘은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이 늘고 있으며 이 중에는 인공호흡기 등이 갖추어진 중환자실에서 사망하는 환자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 단지 인위적으로 생명만을 연장할 뿐인 임종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 의사의 어려움은 물론 무엇보다 환자 가족들이 겪는 정신적, 경제적 고통이 여간 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의료기술과 기기의 발달, 그리고 병원에서 임종을 맞는 소위‘죽음의 의료화’현상이 보편화된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는 거의 아무도 병원에서 사망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대에는 벌써 약 50%의 사람이, 그리고 최근에는 무려 80%의 사람이 병원에서 사망을 하고 있는데 이들 중 1/3이 사망 전에 평균 10일 정도를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며, 그 중 절반이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아직 미국 수준은 아니지만 한 조사에 의하면 2004년에 이미 이 비율이 48% 수준이어서 이런 추세라면 우리나라에서도 멀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이 집이 아닌 병원에서 사망을 맞게 될 것이 분명하고, 이 경우 죽음을 앞 둔 환자에 대한 인위적 생명연장과 이로 인한 법적, 윤리적, 그리고 사회경제적 문제는 더욱 증가할 것이 분명하다.

 

연명치료?뇌사판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 필요

 

의학적 측면에서의 웰다잉 문제, 즉 죽어가는 사람이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의학적 대처는 연명치료와 뇌사 판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연명치료 여부의 경우, 죽음을 앞둔 환자들에 대한 의학적 대처는 일반적으로 다음 3가지로 요약이 된다.

즉, 인공호흡기 같은 인위적 생명연장의료기기에 의존해서 환자가 사망할 때까지 치료를 계속하는 경우와 임종이 가까웠다는 의사의 판단에 따라 가족이 환자를 집으로 모셔가서 집에서 사망하는 경우, 그리고 아직은 인위적 생명연장 의료기기의 도움을 받아 더 치료를 해야하는 환자를 가족들이 병원 치료를 포기하고 집으로 모셔감으로써 사망시기를 앞당기게 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 경우, 첫 번째는 어쩌면 환자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무의미한 치료를 계속함으로써 환자의‘인간적인 존엄성과 평화롭게 죽을 수 있는 권리’ 를 빼앗는 일이 된다는 종교적?윤리적인 문제가, 두 번째는 임종이 가까웠다는 의사의 판단이 얼마나 정확한 판단이냐하는 과학적?윤리적 문제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즉 ‘의사지시에 반하는 퇴원 ’의 경우에는 회복될지도 모르는 환자를 적극적으로 치료하지 않은 것에 대한 법적?윤리적 문제가 발생될수 있다. 따라서 의학은 회복 불가능한 환자에 대한 무의미한 치료중단을 포함한 임종환자들에 대한 보다 윤리적이고 인간적인 치료에 양심적이고도 과학적인 노력과 실천을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이다.

 

아울러 의학은 죽음의 시기를 판단하는 일에 있어서도 추호의 오류가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장기이식 등의 유혹으로 의식이 없는 환자들의 죽음을 앞당기거나 연명장치를 이용해서 불필요하게 생명을 연장하는 일은 죽어가는 사람의 ‘잘 죽을 수 있는’ 권리, 즉 웰다잉을 방해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어가는 사람의 웰다잉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정확한 의학적 판단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모든 의학적 죽음은 전통적인 심폐사, 즉 맥박과 호흡이 멎는 경우로 판단되어 왔기 때문에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도 별다른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으며, 지금도 대부분의 죽음은 심폐사로 판단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최첨단 시설이 갖추어진 중환자실내에서 인위적으로 맥박과 호흡을 연장하는 일이 가능해지면서 사망을 뇌의 기능 소실상태, 즉 뇌사상태로 판단하는 새로운 의학적 사망판단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지금 뇌사인정이 법적?윤리적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굳이 뇌사가 새로운 의학적 사망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장기이식을 위해서라기보다 뇌사자에 대한 불필요한 연
명이나 소생을 금지시킴으로써 고통 없이 위엄 있게 죽음을 맞도록 도와주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글 | 맹광호 _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글쓴이는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후 동대학원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및 하와이대학 대학원에서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대한예방의학회?한국역학회? 한국의학교육학회?한국의료윤리학회 회장, 한국저술인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삶과 죽음은 존재의 필연적 사건이다

 

 

③ 웰빙과 웰다잉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참된 삶 이끈다

 

-----------------------------------------

“태어나는 것이 삶이듯 죽음도 삶입니다.
드는 발도 걸음이고 내딛는 발도 걸음입니다.”


(타고르,‘ 길잃은새들’ 286장)

-----------------------------------------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가장 분명한 사건은 태어난다는 것과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죽음은 가장 확실한 사건이지만, 그 때는 가장 불확실한 순간이다. 죽음이란 생명에 있어 결코 비켜갈 수 없는 사건이지만, 또한 죽을 수 있는 것은 살아있는 것에게만 가능한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생명이란 죽음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이며, 삶이란 죽음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삶과 죽음은 존재의 필연적 사건

 

인간이란 생명 역시 그러하다. 비록 일상의 삶에서 잊히고 감추어져 있으며, 멀리 밀쳐나 있을지언정 죽음은 인간 존재에게는 가장 분명한 사건이며, 우리를 에워싸고 삶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그러기에 죽음이 있기에 삶이 존재하는 것이며, 다가올 사건인 죽음에 대한 생각이 현재의 삶을 방향 짓게 된다.

삶과 죽음은 이중적이며, 서로에 의해 서로가 결정되는 상호 관계에 놓인 하나의 사건인 것이다. 삶과 죽음은 존재의 필연적 사건이다. 그러기에 죽음에 대한 생각이 없을 때, 삶의 의미란 애초에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회피하고, 어쩔 수 없는 삶의 종결 정도로 생각할 뿐이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우리가 지닌 모든 관계가 단절되며, 인간 행동의 모든 가능성이 남김없이 부서진다는 데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생을 꿈꾸거나 죽음을 감추고 회피하기도 하며, 가능하다면 죽음과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불로장생에 대한 오래된 갈망이나,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동방삭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이고, 우리 속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는 말 등은 이런 마음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지 않는가. 죽음은 무서운 것이고, 그래서 피해야만 할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현대 문화에서도 우리는 어김없이 죽음을 감추고 회피하며, 음울한 파멸로 표상하여 마치 죽음이 없는 듯이 끊임없이 현재에 몰입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우리의 절대적 운명이라면 죽음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 역시 없어서는 안될 일일 것이다. 올바르게 살기 위해 우리는 올바르게 죽음을 생각해야 하며, 좋은 죽음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좋은 삶을 이끌어가야 할 것이다.

 

죽음은 그 유일회성으로 인해 인간에게는 가장 모호하며 결코 알 수 없는 사건이다. 가장 확실하면서도 가장 불확실한 사건, 그러기에 죽음에 대한 이해 없이 삶은 의미 있게 존재하지 못한다.
다시금 이 치명적 사건을 존재론적으로 해명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죽음은 미래 어느 순간에 닥쳐올 사건이지만, 그 사건이 현실이 되는 순간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최종의 것으로 자리한다. 그러기에 종말적 사건인 죽음은 지속적으로 현재의 인간 존재를 뒤흔들어 놓으며, 우리의 희망과 꿈, 사랑과 행복은 물론 미래에의 기획을 헝클어 놓는다. 다가오지 않은 죽음이 지금의 우리 실존을 끊임없이 침입하는 것이다.

미래 사건인 죽음이 현재의 실존을 결정하고 현재를 뒤바꾸어 놓는 것이다. 나아가 죽음은 우리의 모든 인간적 관계를 철저히 무(無)로 바꾸어 놓는다.

 

일반적으로 죽음은 삶의 종말로 이해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말에서 죽음이란 ‘끝장, 죽는 일,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 세포내의 연속적인 생리적 변화가 불가역적으로 되어 정지되는 상태’(한국어 대사전) 정도로 표현된다.

이것은 다른 언어권에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는 죽음을 ‘동식물에서 소생의 가망이 없는 모든 생체기능의 영구적 정지, 생명의 종결, 또는 그러한 사실이나 행동 및 과정’ (웹스터 사전)이라고 말하거나, ‘생명의 부재. 유기적 생명체가 급격하고 철저하게 파괴되고 그 기능이 정지되는 현상’(브리태니커 대사전) 등으로 정의한다. 죽음은 말 그대로 생명의 기능이 되돌릴 수 없도록 정지하여, 삶이 절대적으로 종말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죽음은 이처럼 살아있는 것과 반대되는 것, 생명의 끝을 의미하며, 죽음으로 우리 삶은 끝장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죽음은 절대적인 무의 체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불가역성과 연관되어 있기에 죽음은 삶을 절대적으로 무로 돌리는 절망적 사건으로 이해한다. 죽은 자는 결코 말이 없고, 성서의 말처럼 죽었다가 살아난 자는 이제까지 없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 사람들은 침묵하거나 알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이런 생각은 동아시아 사유에서도 자주 접할 수 있다. 공자는 제자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해 물었을 때, “사람도 능히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라는 말로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을 회피
한다(論語, 先進). 또한“아직 삶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며 죽음에 대한 불가지론적 대답으로 죽음의 문제를 회피하기도 한다.

 

이에 비해 도가에서는 삶과 죽음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자연의 이치로 이해한다. 장자는 기(氣)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으로 생명을 설명하고 있다.

“삶은 죽음의 길을 따르는 것이며 죽음이란 삶의 시작이니, 어찌 그 근본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생명이란 기가 모이는 것이니, 기가 모이면 곧 살아있는 것이요, 기가 흩어지면 죽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란 서로 뒤따르는 것이니 어찌 두려워할 까닭이 있는가.”(莊子, 知北遊)라고 말한다.
죽음과 삶을 실로 한 무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죽음은 무엇보다 먼저 자연적인 죽음, 즉 생물학적 측면에서 다가오지만, 죽음은 또한 문화적인 측면과 실존적 측면을 지닌다. 삶의 끝이 죽음으로 드러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미래의 사건인 죽음을 앞당겨 지금 생
각하고 성찰하면서 죽음을 현재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것이 죽음에의 성찰이라면, 이러한 성찰의 과정을 통해 이해되는 죽음은 역설적으로 현재의 삶을 결정한다.

 

 

 

 

죽음은 삶의 거울이며 삶은 죽음의 얼굴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며,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오히려 삶을 결정하고, 삶의 길을 이끌어간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좋은 죽음은 그 삶이 아름답고 선했다는 하나의 표징이 된다. 이 말은 결코 철학적이거나 어떤 종교적인 선언이 아니다. 삶과 죽음은 필연적으로 얽혀있는 한 사건의 두 얼굴인 셈이다.
삶은 죽음이 있기에 삶으로 자리하며, 죽음은 삶의 길에서 자신의 모습을 결정짓게 된다. 죽음은 삶의 거울이며, 삶은 죽음의 얼굴이다. 좋은 죽음은 올바른 삶을 내비추이며, 좋은 삶은 아름다운 죽음을 보여준다.

 

“모든 생명의 목적은 죽음” 이라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죽음이야 말로 생명의 필연적 조건이다. 우리들의 삶이란‘죽음의 충동’과‘생명의 충동’이 투쟁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과정의 것이다.

죽음의 충동은 모든 생명을 비생명의 상태로 돌리는 것이지만 에로스는 끊임없이 생명의 모든 요소를 통합하여 삶 안에서 유기적 통일성을 지니면서 드러난다. 생물학적으로도 유성생식을 하는 생명체에게서 개체의 죽음이 생겨나게 된다. 단성생식을 하는 생명체에게 개체의 죽음이란 무의미한 발언일 뿐이다. 그들은 환경과 그 적응도에 따라 분열과 통합을 이룩하기에 개체의 죽음이란 의미없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생명학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죽음은 성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성은 죽음을 이해하는 중요한 짝이 된다. 또한 죽음은 한 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 생명의 공간을 준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생물학적으로는 죽음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생명체는 전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며, 궁극적으로 현재와 같은 인간의 생명과 삶도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죽음이 없다면, 별들의 죽음과 유기적 생명체의 계속되는 세대들에서 죽음이 없다면, 당신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우주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바우커는 말한다.

 

죽음에 대한 해석이 현재 삶의 양식 결정

 

죽음은 육신의 종말이 아닌, 정신과 몸의 분리 인간의 존재론적 전환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는 이것을 영혼과 육신의 분리로 이름하였다. 죽음을 존재론적 전환으로 이해하는 것은 인간존재란 삶과 죽음을 거쳐 성숙을 향해 가는 전인적 과정에 놓여있음을 자각하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에드가 모랭은 인간만이 죽음을 맞이한다고 말한다. 죽음은 인간만의 사건이다. 동물은 사멸할 뿐 죽지는 않는다. 죽음을 죽음으로 의식하면서 인간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죽음은 인간을 동물과 동일시하는 동시에 동물로부터 인간을 구분지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생명체이기에 인간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지만 인간만이 예외적으로‘저 세상’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에 단순히 머리 숙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한다.

 

죽음을 영성의 과정, 영혼의 성숙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죽음은 다만 육신의 종말만을 의미할 것이다. 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죽음을 이해하고 죽음을 어떻게 수용하는가 하는 것, 죽음의 해석이 지금의 삶과 인간의 존재 양식 전체를 결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생을 추구하는 온갖 미혹된 행동이나 현대 생명과학에서 보듯이 복제를 통한 영원한 삶에의 꿈은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 없는 단순한 삶의 영원한 지속이란 축복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불행한 삶에 불과한 것이다. 영화 ‘하이랜더’에서 보듯이 자신이 사랑한 모든 사람이 죽은 뒤 여분으로 사는 몇 백년의 삶이란 한갓 저주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기능을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연장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의 의미와 생명의 존귀함이 지켜지지 않는 단순한 생명 연장이란 무의미할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독일의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 역시“그 누구도 타인에게서 그의 죽음을 빼앗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죽음을 향한 존재’이기에 인간만이 죽을 수 있다. 그러기에 죽음이 없는 것이 좋은 삶이 아니라 그 사건을 우리의 존재에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 삶은 의미있고 가치있게 된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죽음은 인간을 종말로 이끌지만,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를 참된 삶으로 이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을 마주하고, 죽음을 현재화할 때 비로소 삶으로서의 자각이 주어진다. 죽음에의 자각은 참으로 우리의 삶을‘인간적’이게 하는 것이란 의미이다. 이제 말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성찰하고 거기서 죽음의 의미를 찾아 우리 삶을 성숙시키는 것이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가진 우리들의 인간학적 과제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다만 죽음을 더 이상 죄악이거나 회피해야 할 악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 이상으로 죽음의 가치를 회복하고, 죽음에 근본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야 말로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성찰적 작업일 것이다.

 

죽음은 일생 동안 배워야 할 ‘삶의 예술’

 

문화인류학적으로 죽음에의 성찰은 죽은 자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난다. 매장과 장례 의식, 죽음에의 제례, 죽은 자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 등 인류의 문화는 죽음의 의식에서 시작되며 그것은 문화에 따라 달리 드러난다. 중세세계에서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기에 죽음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폭군이나, 피해야 할 불길한 절대적 운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을 기억하고 죽음을 기념함으로써 삶의 무의미함이 사라지고, 세계의 의미와 우리 생명의 전체적 진리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그럴 때 죽음의 예술은 삶의 기술이 될 것이다.

 

인간은 단순하게도 영원한 삶, 죽음 없는 삶을 원하지만 그것은 사실 공허하기 그지없는 생각일 뿐이다. 삶의 맥락을 상실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생물적 생명이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며, 존재의 종말과 무의미, 공허에 직면하게 만드는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죽음에의 무지, 죽음에의 무관심은 삶을 절대화하고 죽음을 피해야 할 악의 원천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결코 절대화할 수 없는 삶, 지나가버릴 물질과 이름에 허덕이는 것은 죽음을 절대적 무로 이해하는 태도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다가올 죽음에 대한 앞선 이해 때문에 죽음이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면, 의미있는 삶을 위해 우리는 다시금 진지하게 죽음을 앞당겨 생각하고, 죽음사건을 성찰하며 되돌아보아야 한다. 죽음에 대한 성찰과 이해가 없다면 삶의 의미는 그만큼 축소될 것이다.
죽음에의 거부나 은폐, 왜곡은 삶을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삶과 죽음은 인간의 존재론적 결단에 따라 결정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한 축의 두 원점이다. 죽음이 있기에 인간의 존재가 가능한 것이다. 아쉬움과 후회, 두려움 속에서 죽지 않기 위해 우리는 지금의 삶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에 대한 의식을 만들어 가는지가 궁극적으로 삶의 성숙함을 결정하게 된다. 다가올 죽음에의 이해가 지금의 삶의 의미를 규정하고 삶을 틀 지우게 된다. 죽음에의 이해 없는 삶은 무의미하며 공허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죽음의 의미를 성찰하는 것은 모건에 의하면 죽음의 영성이라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의 영성은 모든 것을 무화시키고 절대적으로 소멸시키는, 전혀 무의미해 보이는 사건인 죽음에서 우리 삶의 의미와 세계의 의미를 성찰해내는 의미론적 행위를 말한다. 그것은 내일의 사건인 죽음과 초월의 세계를 지금 이 자리에 살아있는 것으로 만드는 내재적 행위를 의미한다. 그래서 죽음의 의미를 성찰하는 과정은 삶의 과정이며, 죽음의 의미가 삶의 영성을 드러낸다.

죽음은 금기의 대상이 아니라 일생 동안 배워야 하는 하나의 예술 행위이며, 그것은 곧 삶의 예술이다. 죽음은 삶의 얼굴이며, 삶은 죽음의 거울이다. 삶의 길은 죽음을 통해 드러나고, 죽음의 의미는 삶을 통해 결정된다. 아름다운 죽음은 좋은 삶의 표징이며, 아름다운 삶은 좋은 죽음을 드러낸다.

 

 

글 신승환 _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글쓴이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부 졸업 후 레겐스부르크 대학에서 철학?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가톨릭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위원, 한국하이데거학회 회장 등을 겸임하고 있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지해달라며 식물인간 상태인 김 모 할머니의 가족이 세브란스 병원을 상대로 낸 상고심소송에 대한 공개변론이 2009.4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렸다.

 

 

⑦ 한국은 왜 웰다잉 지침이 없나

 

국민적 공감대 부족해 법제화 지지부진

 

미국의 어지간한 서점에 가면 어김없이‘죽음’에 관한 책 코너를 발견하게 된다. 한국 사람에게는 전혀 뜬금없는 서가로 여겨진다. 10여 권도 아니고 100~200여 권의 관련 서적들이 비치되어 있다. 큰 서점에 가면 500권 이상의 책들이 꽂혀 있다. 그뿐 아니다.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는 책들도 수두룩하다.

‘개들도 하늘나라에 가요’,‘ 유령이 된 할아버지’,‘ 내가 함께 있을게’ 등도 진열되어 있다.

 

미?일, 각급 교육기관?시민단체에서 ‘죽음’ 교육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10년 전에 펴낸 ‘세상을 바꾸는 아이들의 33가지 이야기’ 를 들여다보면 미국 어린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죽음 교육을 어떻게 받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국에서도 번역된 이 책은 어린이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어려움을 이겨내는 여덟 가지 내용을 끼워 넣었다.
애완견이 자동차에 치여 죽는 장면을 목격한 소년이 충격에서 헤어나면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사람은 태어나고 죽는 생명의 방식이 있으며 개들도 어김없이 이를 따르는 것 같다는 것이다.

 

중소 도시나 대도시의 공공 도서관에 가면 서점보다 더 많은 죽음 관련자료들이 비치되어 있다.‘ 말기질환의 여행’이나 ‘아동의 상실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죽음의 법적 미개척 분야’,‘ 호스피스 완화 의료지침’등 수도 헤아릴 수 없는 책과 논문들이 수두룩하다.

 

미국의 죽음 교육의 축은 학교와 도서관이다. 대통령 선거 이야기가 뜨겁게 달구어졌던 2007년 여름. 미국의 청소년들은 고등학교 사회과 과목 시간에 유방암 말기 판정을 받은 민주당 대통령 경선 후보(존 에드워드)의 아내에 대한 토론을 시작했다. 그 녀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 그런 아내를 두고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선 정치인의 생각은 옳은 거냐는 것이었다. 청소년 시절부터 삶과 죽음을 둘러싼 사생관 이야기를 꺼내고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에 대해 가치관을 갖도록 도와주는 교육이었다.

 

미국은 1970년대 중반에 카렌 퀸란 사건을 계기로 자연사법(존엄사법)이 세계 최초로 만들어지고 1989년에 미국의 모든 주에서 생전유언을 인정하는 표준말기환자권리법이 제정된 것도 이 같은‘생과 사’교육을 통한 사회의식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생전유언은 말기환자의 임종시기가 가까워졌을 때 또는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연명치료를 중단하도록 요청하는 제도이다.

 

세 명 중 한 명이 암으로 사망하는 일본의 죽음 교육은 미국과 사뭇 다르다. 종교적 기반과 문화적 배경이 서로 다르므로 미국처럼 존엄사 관련법이 마련되어 있지 못하다. 그러나 존엄사와 안락사, 호스피스에 관한 책과 논문의 수는 미국의 절반 수준에 이르고 있다. 말기환자와 식물인간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각급 교육기관과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죽음교육이 실시되고 있는 것이다.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는 어린이들도 급격히 늘어나고 어린이 사건?사고도 증가해 아동의 정서적 장애 현상이 심각하다는 판단에서 각 지방 교육위원회가 시민단체와 손을 잡고 삶과 죽음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거나 검토 과정을 거치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에게 나눠준 지도요령 교재는 나팔꽃 씨앗이 자라 싹이 트고 꽃이 피다가 얼마 후에 시들어 버리는 과정을 삶과 죽음의 교육으로 연결시켜 설명한다. 애완견도, 할머니도 언젠가는 우리 곁을 떠나며 그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말한다.

 

이 같은 죽음교육은‘마음 교육’또는‘생명존중 교육’의 학습지도 요령에 포함돼 있다. 특별활동 시간에 교사나 교장의 판단에 따라 이뤄진다. 교재는 미국이나 유럽의 것을 일본인 감성에 맞게 편집한 것이지만 공교육 교재는 아직 출판되지 않았다.

 

우리 정부, ‘단계적 접근에 의한 제도화 추진’반복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말기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본격적인 죽음 연구에 관한 자료들은 극히 적다. 한국 국회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관련 서적은 80여 종뿐. 그것도 외국 원서이거나 번역서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교육 받을 기회가 없었고 관련 자료도 부족할 뿐 아니라 죽음을 준비할 마음의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불치병으로 인한 인간의 존엄은 지켜지기 어렵고 환자 가족이 붕괴되거나 해체되는 일이 부지기수로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도 죽음 교육을 실시하자거나 호스피스?완화의료 제도가 필요하다고 문제를 제기하면 여론은 이를 무시하거나 사실을 왜곡했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공공연하게 ‘죽음 클럽’ 이 만들어지고 실제로 자살까지 이어지는 황당한 사태가 발생해도 우리는 ‘생과 사’ 에 관한 학교 교육을 기대할 수 없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주요 지방자치단체의 다양한 문화공간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모임’ 을 통해 ‘좋은 삶,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등에 관한 강연과 토론이 열리고 교회와 사찰이 ‘죽음 준비교육’ 을 실시한다는 플래카드를 내걸기 시작했다. 최근 몇 년 동안의 일이다. 이 같은 현장에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존엄사 또는 죽음교육이라는 내용의 현수막이 내 걸려 우리들의 눈길을 끈다. 서울과 지방에 있는 큰 병원들도 앞을 다투어 존엄사와 관련한 호스피스 교육을 실시하는가 하면 돈을 내고서라도 교육을 받겠다는 자원 봉사자들이 많다.

죽음은 생각하기조차 싫다는 사람들의 이중 구조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각종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환
자가 증가하면서부터이다. 몇몇 병원들이 호스피스 병동을 만들며‘우리도 국민의 삶의 질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강조한 것은 문제의 심각성을 지나쳐보지 않는 의료기관임을 알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젠 내놓고 죽음의 질을 논의해보자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는 가톨릭 관계자들에 의해 50여 년 전 아시아에서 맨 처음 호스피스 시설이 운영되어 왔다. 그로부터 거의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호스피스 사업은 크게 활성화되지 못했다. 이를 제도화하기 위한 정부의 법제화 지원은 계속 더디어 지고 있다. 이 제도의 쟁점은‘국민적 공감대 형성’이다.

정부는 국민과 의료진들을 설득하는데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 재원확보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보건복지가족부는 ‘단계적 접근에 의한 제도화 추진’ 을 연례행사 처럼 되풀이하고 있다.

 

그나마 말기 환자에 대한 호스피스 지원사업이 현재 80여 군데에 이르게 된 것은 국립암센터를 비롯한 관계자들의 노력에 따른 것이다. 그들은 말기 환자들에게 남은 생을 어떻게 준비하는 게 의미 있는 일인지, 고통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방법은 어떤 것인지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홍보하는데 10여 년의 세월을 보냈다. 전국에 있는 국립대학 병원의 지역암센터 관계자들에 대한 현장 교육을 지도해 왔으며, 의료진들이 말기환자의 질환을 사전에 통보하는 방법이나 환자 및 가족에게 의미 있는 삶에 대해 함께 논의해 왔다.

 

그러나 교육 당국의 초?중등 학생들에 대한 죽음 교육은 아직도 우리 현실과 먼 거리에 있다. 이미 9년 전에 존엄사 관련제도를 도입한 대만은 1997년부터 초?중등학교에서‘생명 교육’ 이라는 틀 안에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교과 과정을 만들었다. 2000년에 자연사법(존엄사법)을 통과시킬 만큼 사회적 여건이 성숙되었다.

 

최근‘인공호흡기 제거’법원 판결로 존엄사 관심 집중

 

우리나라 정부는 지나치게 조심스럽다. 존엄사를 안락사로 몰아 세우려는 일부의 편견과 오해가 엉뚱한 부작용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존엄사 관련 법안이 국회에서 의원 입법으로 처리되기만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죽음의 문제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1998년이다. 그 해 국회에서 열린 세미나를 통해서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법적 제도화를 촉구하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쏟아졌다. 임종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을 둘러싼 법률적?의료적 문제나 호스피스 제도의 실시에 따른 재정부담 문제 등이 살얼음판 걷듯 논의되었으나 모든 것은 시작과 함께 끝이 났다. 아무도 더 이상 이 문제를 들고 나오지 않았다.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작년 가을부터 여?야 국회의원들이 경쟁적으로 이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암관리법개정안’또는‘호스피스?완화의료법안’,‘ 존엄사 법안’등을 만들기 위한 입법 공청회가 이어졌다. 국회의장이나 여?야당의 대표들이 참석해서 관계자들을 격려까지 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정치인들은 말기환자들의 고통과 이들의 치료를 둘러싼 지역 주민들의 힘든 생활을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정치인들도 죽음을 둘러싼 인간의 존엄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법안들은 아직까지 제대로 심의조차 받은 바 없고 언론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말기환자나 임종환자들의 고통과 그들의 존엄은 여전히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다.

 

최근 죽음과 관련해 세간의 이목을 독차지한 것은 존엄사 사건을 다룬 사법부이다. 1997년 보라매 병원 사건에 대한 최종심은 8년이나 지난 2004년에 이뤄졌다. 뇌출혈로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던 환자가 퇴원한 사건에 대해 담당 의사를 살인방조죄로 처벌했다. 판결 내용이 의료 현장에 어떤 충격을 줄 것인지 가늠하는데 소홀했을 뿐 아니라 사건 심리에 지나치게 오랜 세월을 소비했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법원은 2008년 식물인간 상태에 빠져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는 한 환자의 치료 중단 소송에 대해서는 이전과 전혀 다른 빠른 속도로 재판을 진행했다. 1심과 2심이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는 판결을 이미 내렸으며 대법원의 최종심을 기다리고 있다. 이 사건이 지난해에 사법부에 접수되면서부터 1, 2심이나 대법원의 관계자들이 존엄사에 대한 토론회나 연구 모임을 통해 사전 검토 작업을 거친 것은 이 사안이 그만큼 중대하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일, 대다수 병원서 ‘존엄사 선언서’ 인정

 

일본의 경우 2005년 6월 존엄사법 제정을 주장하는 지지자 14만 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청원서를 냈다. 2007년 현재 90여명의 여?야의원들로 구성된‘존엄사 법제화를 생각하는 의원연맹’을 중심으로 입법 활동을 추진하고 있으나 아직 이렇다 할 진전이 없다. 그러자 일본 정부의 후생노동성과 전국 의사들의 모임인 일본의사회, 일본구급의사회 등이 각각 가이드라인을 발표해 말기 의료 결정 과정에 관한 지침을 공표했다.

 

후생노동성은 병원에서 말기환자들에 대해 생명 연장치료를 중단할 것인지의 여부를 충분한 논의를 거쳐 결정하도록 가이드 라인을 만들었다. 원칙론에 관한 것이다. 환자 본인의 의사결정이 기본적인 사항이라고 못을 박았다. 말기 의료 행정에 대해 국가가 가이드라인을 통해 명확히 밝혔다는데 의미가 있다. 일본의사회나 구급의사회 등은 각각의 의료현장에 맞는 절차를 만들어 임종환자의 인공호흡기를 뗄 수 있는 기준을 만들었다.

 

30여 년 전에 발족한 일본존엄사협회는 국민들이 존엄사 선언서를 작성하도록 캠페인을 벌여온 민간조직이다. 이 선언서는 자신이 임종 과정에 있을 때 의사들이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중요한 판단 자료가 된다.

협회가 마련한 존엄사 선언서 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가 불치병에 시달리며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를 대비해서 저의 가족과 저를 담당하는 의료진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이 선언서는 제가 건전한 정신상태에서 작성한 것입니다.

 

따라서 건전한 정신상태에서 제가 이 문서를 파기하거나 철회하지 않는 한 선언서는 계속 유효합니다.

 

첫째, 현재의 의학에서 볼 때 제가 불치의 상태에 있으며 죽음이 다가왔다는 진단이 내려진 경우에는 제 생명을 연장시키는 조치를 일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 단지 이 경우에는 저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최대한의 조치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셋째, 제가 수개월에 걸쳐 이른바 식물상태에 빠졌을 때는 일절 생명유지 조치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상 제가 선언서에서 요청한 바를 충실히 이행해 주신 여러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행위에
대한 일체의 책임은 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여기에 덧붙여 적습니다.”

 

 

이 선언서의 마지막 부분에는 본인의 이름과 주소를 쓰고 인감도장을 날인해야 존엄사를 공식 요청한 것으로 인정된다. 존엄사협회 회원은 자신이 말기환자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경우 이 선언서를 의료진에게 제출한다. 환자가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고 현대의학에서 볼 때 더 이상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이 내려지면 대부분이 본인의 희망대로 생명연장 중단 요청이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시골의 작은 병원에서는 아직도 존엄사 선언서 등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의사들이 있으며, 이런 경우에는 관련협회 측에서 의료진을 설득하는 일을 도맡아 한다.

 

우리나라가 미국?유럽처럼 생전유언을 인정하는 입법활동이나 ‘생과 사’에 관한 기초적인 교육을 검토하는 것마저 지지부진한 것은 아직도 중요한 시점을 잡지 못해서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등이 좋은 계기의 하나가 될 수 있으나 추진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좋은 죽음, 품위있는 죽음이 좋은 삶의 마지막이라는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각 분야 지도층에서 존엄사의 본보기가 될 만한 인물이 드문 현실 때문에 큰 울림도 없고 따라서 되울림도 적다. 서구와 다른 문화적 종교적 차이를 인정하더라도 이것은 우리나라만의 특이한 현상이다.

웰빙 시대에 걸맞은 웰다잉 지침을 내걸 수 있는 지도층 인사들이라도 모인다면 보통의 국민들이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다. 오랫동안 우리나라 전통사회가 집착해 왔던 장례문화가 묘지에서 화장장으로 바뀐 것도 이 사회 주요 인사들이 앞장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글 | 최철주 _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실장

글쓴이는 중앙일보 일본특파원, 경제부장, 편집국장, 논설실장, 논설 고문과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객원 교수 등을 지냈다.

 

 

출처 :

THE SCIENCE & TECHNOLOGY

과학과 기술

 

 

 

 

 

 

 

 

TIME OF DEATH What are the final weeks, days and very moments of life really like?

This groundbreaking documentary series offers an unflinching, intimate look at remarkable people facing their own mortality

 

http://www.sho.com/sho/time-of-death/home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