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동영상은 홍콩에 남아있는동지들의 재판에 영향을 줄수 있으므로 귀국후 바로 올리겠습니다
홍콩투쟁일지 함안농민회 조병옥
2005년 12월 12일 13:30 인천발 홍콩행 비행기에 오른다. 인도비행기다. 스튜어디스도 아줌마에다 많이 늙어 보인다. 피부도 많이 검다. 우리나라 스튜어디스와 비교해보니 결국은 인간의 차별에 의해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이리라. 그들은 비록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의 직종에서 만족하며 평생직장으로 여길 것이다. 허나 우리네는 결혼을 한다든지해서 일을 그만두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은 아예 뽑지도 않을 것이다. 무엇이 잘된 것인가. 내 머리 속에 있는 고정관념 ‘스튜어디스는 젊고 예뻐야 한다.’ 이 차별의식과 성적인 담론을 누가 심어 주었나? 16:30 홍콩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홍콩 경찰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의외로 공항 내에서 정복을 입은 경찰들이 많고 우리 부경연맹 42명을 졸졸 따라다닌다. 우리나라 대사관에서도 직원이 나와 우리를 안내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숙소까지 갈까를 걱정한 것은 우려였다. 홍콩정부에서 나온 관료는 많이 친절하다. 부경연맹 42명 중 2명의 동지가 공항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가기 전에 몇 명에 대해서는 인터뷰가 잇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했는데 두 명의 동지는 한참만에 우리에게 얼굴을 보였다. 두 명의 동지뿐만 아니라 깃대도 나오지 못했다. 대사관 직원과 홍콩 정부사람이 가서 한참을 이야기한 끝에 깃대가 나온다. 아마도 불법시위용품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부경연맹 깃발이 올랐다. 홍콩국제공항 로비에 전농 부경연맹의 깃발이 나부낀다. 전국농협노조에서 환영을 나와 함께 농민가를 부르고 간단한 인사를 한다. 주위의 기자들과 공항내 시민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를 주목한다. 17:40 숙소로 출발한다. 기후는 가을 날씨로 활동하기가 좋다. 거리엔 열대식물이 자라고 공항주변은 녹음이 짙다. 산들은 가까이 있는데 능선이 우리네 산과는 다르다. 조금 뾰족하다고 할까. 홍콩섬을 벗어나는 듯 엄청난 현수교 두개를 지난다. 현수교도 야광이 아름답다. 18:30 숙소 포랭콕(po leung kuk)에 도착한다. 청소년 야외수련원 쯤으로 보이는 숙소는 깔끔하고 잘 단장되어 있다. 실내에는 2층 침대가 놓여있는데 홍콩사람 기준으로 맞춰서인지 우리가 눕기에는 조금 좁아 보인다. 저녁식사는 홍콩내 한인식당에서 온 도시락인데 영 입맛에 맞지 않다. 밥에는 표고버섯 몇 조각과 콩나물 몇 올이 얹혀져 있고 반찬으로는 김치와 소 천엽 찌게 비슷한 것인데 다들 고픈 배에도 쉬이 수저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지난해 인도네시아에서의 음식 경험이 있어 이 정도는 호사라 생각해 맛있게 먹는다. 인도네시아 쪽에 비하면 느끼한 향이 그리 많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마도 한국도시락 업체여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전체 일정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지만 전농의 실무력이 여기까지는 닿지 않는 모양이다. 전농 전체 대오는 지금 ymca숙소에 머물고 있다. 이곳 에는 전북과 부경연맹만 와 있어 현재의 상황과 흐름에 대해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이역만리 홍콩에서 중앙과 선도 끊어지고 5부능선의 산중턱에 갇힌 전북과 부경도연맹의 농민들은 어쩔 수 없이 끼리끼리의 문화를 만들어 낸다. 밤이 이윽해지면서 특유의 함안, 의령 사람들은 객기가 발동해 숙소를 벗어나 밖으로 나가보기로 한다. 의령 5명 함안 2명이 결합해 산 아래로 내려간다. 물론 걸어서다. 입구에서 수위와 몸짓, 발짓으로 몇 마디를 주고받고는 택시를 불러준다는 것도 마다하고 내려온다. 산 입구에 있는 식당에 들러 회가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한다. 마침 김해 정책실장과 하동 사무국장이 결합해서 음식을 시키려는데 주위에 있던 기자가 전화를 걸어 한국어 통역이 가능한 사람을 연결해 준다. 이 기자는 우리를 취재하기 위해 식당 아래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연맹의 방침이 일절 개인 인터뷰는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기에 그 기자는 취재는 하지 못하고 우리의 안주를 시키는 것에 동조하게 되었다. 우리는 장어소금구이를 일단 시켰다. 그러나 땅콩이 들어오고 돼지고기 수육같은 것이 들어오고 이후 닭 한 마리, 탕수육, 월척이 훨씬 넘는 잉어 한 마리까지 계속 음식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불안한 우리는 장어구이만 부탁했는데 자꾸 들어온다며 항의를 해도 영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결국 마지막으로 나온 장어 튀김을 먹고는 나머지 음식을 싸들고 돌아왔다. 그렇게 먹은 그날 음식비는 우리 돈으로 13만원 정도가 나왔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비싼 값은 아니었다. 숙소에서는 우리끼리 개별 행동했다며 난리들인데 우리가 가지고 온 음식을 내놓자 다들 좋아라하며 고국에서 가져온 소주를 꺼내 맛있게들 먹는다.
12/13 06:30 힘찬 아침구보와 함께 홍콩의 흐린 하루를 연다. 홍콩의 날씨가 원래 그러한지는 모르나 날씨가 우리를 반겨주지 않는 것 같다. 다들 한담들을 주고받은 뒤 수련원 내에 있는 식당으로 향한다. 어제 저녁을 다들 힘겹게 먹은 터라 식당에 많은 기대를 하고 갔으나 나온 음식은 기대 이하였다. 소고기 가루가 들어간 죽과 호빵 1개 그리고 잡채 비슥한 음식이 나왔는데 다들 제대로 먹지 못한다. 음식이 왜이리 맛이 없는지, 혹은 우리 입맛에 대해 조금의 고민은 한 것이지, 우리가 이 맛에 길들여져야 하는 것이지 참 난감하다. 그래도 최대한 많이 먹으려 노력한다. 잡채는 손도 대지 못하고 죽을 배불리 먹는다. 09:00 버스를 기다린다. 전북동지들의 풍물소리 특히 북소리가 온 산을 흔든다. 숙련된 솜씨는 아니지만 다들 신명나게 북을 두드린다. 홍콩의 버스가 들어왔다. 우리를 태워갈 버스인줄 알았는데 선생님들이 하루연수를 위해 들어온 것이다. 이들은 우리를 보며 같이 사진을 찍자며 달려들고 다들 반가운 얼굴로 맞이해 준다. 나는 조금 멀리 떨어져있었는데 선생님 두 분이 찾아와 같이 사진을 찍자며 휴대폰을 가져온다. 기꺼이 그들과 사진을 찍는다. 다들 밝고 순수해 보인다. 그리고 참으로 선하게 생겼다. 09:40 버스가 빅토리아 공원으로 출발한다. 낮에 보는 홍콩의 풍경은 밤과 다르다. 높은 빌딩과 아파트, 잘 만들어진 도로, 깨끗하다. 10:40 빅토리아 공원에 도착, 한국 민중투쟁단의 투쟁선포식이 열리고 있다. 세계의 기자들이 다 모인 것처럼 정말 엄청난 기자들이 모였다. 그리고 세계의 NGO사람들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FSPI의 테조를 만났다. 비아캄파니사 본부 천막에서 노트북으로 무언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알리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번 한국에 왔을 때 알리편으로 꿀을 한 병 보내 주었는데 그것 먹고 힘이 생겼다면서 대단히 고마워한다. 잘 안되는 영어로 몇 마디를 주고받고는 집회장으로 왔다. 한국민중투쟁단의 결의식 후 전농결의식이 열린다. 각 지역별 단장님들의 힘찬 결의와 자기 지역이 이번 투쟁의 선봉에 서겠다며 이야기한다. 다들 조금은 흥분한 듯한 표정들이다. 전농 결의식을 짧게 끝내고 비아캄파시나 결의대회가 열렸다. 먼저 인도네시아. 태국. 브라질. 일본. 아프리카. 스페인. 인도. 필리핀. 대만 순으로 대표자와 각 구성원의 발언이 이어진다. 브라질- wto 10년의 역사에서 자국 농민 1000만명이 농촌에서 몰려남. 전세계 농민의 단결 호소. 식량주권의 소중함과 그것을 지킬 의무에 대해 호소. 일본- 가족농연합에서 많은 사람들이 옴. wto협상이 진행될수록 우리 농민은 죽을 수밖에 없다. wto에 저항함으로써 우리는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데 고민해야한다. 아프리카- 아프리카 농민들은 다른 그 어느 나라들보다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것들은 가진 나라들과 wto 때문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대부분 농민이다. 아이들은 거의 아무런 교육의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다. 전세계 어느 농산물이든 공정한 가격이 책정되어야 한다. wto가 우리의 미래를 죽이고 있으며 문화를 죽이고 있다. 인도- 6억 5천만명이 농민이다. 인도는 개도국이라 농업을 교역물품으로 포함시키는 것에 반대한다. wto가 특히 농업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대만- 노동자만 왔다. 농민도 같이 오려했는데 한 농민이 소형 가제 폭탄을 만들었다고 해서 경찰에 잡혀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느라 오지 못했다. 한국 농민을 존경한다. 우리는 wto가 왜 나쁜지 왜 없어져야하는지 한 수 배우러 왔다. 점심식사 후 전세계 민중이 한자리에 모였다. 빅토리아 공원 내 운동장에 수많은 깃발과 각 나라 특유의 선전물이 쏟아진다. 언어도 각각. 피부색도 각각, 깃발의 글도 다 다르지만 wto가 민중을 죽이고 우리의 희망을 빼앗아가고 있으며, 이 wto가 없어져야 우리가 행복해 진다는 것에는 아무런 다름이 없다. 이제 가두행진이 시작된다. 이곳 공원 주병은 고층 빌딩들이 즐비하다. 높은 산과 그 산높이에 닿을 듯 오른 마천루들은 위압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오늘 이 높은 건물들 사이를 행진할 것이다. 우리의 길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괴물을 헤치며 투쟁하는 것과 흡사할 것이다. 아마 이곳 홍콩 사람들은 우리의 투쟁을 처음 접할 것이다. 너무나 많은 시민들과 언론이 우리에게 집중되고 있으며, 홍콩의 대학생처럼 보이는 사람은 우리를 존경한다고 이야기해 준다. 그들은 마지막 인사에서 우리말로 ‘사랑해요’라고 말한다. 중심가를 1Km정도 걸어오니 어마어마한 인파에 둘러싸였다.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특히 전북연맹의 풍물소리는 이 화려하고 웅장한 거리를 압도한다. 우리의 악기가 홍콩의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다. 그들도 우리를 처음 보겠지만 우리도 그들의 행동이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서로가 관심을 주고 받는다. . 우리가 국내에서 수많은 투쟁을 하면서 이런 관심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우리 국민들이 우리의 행진과 우리의 목소리, 우리의 유인물에 홍콩의 반만 가져주었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가야할 길이 먼저였고, 갈 길이 바빴으며, 그들의 일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나는 비교만 할 뿐 그들을 탓할 수가 없다. 홍콩의 시민들의 관심이 이국적이고 다름에서 오는 문화적 충격일 수 있으니. 홍콩 경찰들의 시선이 우리네와 다르다. 따뜻하다고 할까? 그들의 안내는 친절하며 물어보는 것에 성심성의를 다해준다. 전투경찰도 보이지 않으며 두터운 갑옷도 없다. 일단 그들의 대응에 안심을 해 본다. 나는 지금 홍콩섬의 바닷가에 섰다. 물론 갯바위가 있고 그것을 때리는 흰 파도의 낭만은 없다. 그러나 콘크리트로 방파제를 쌓아 만든 이 곳에서 절반의 절망과 그 이상의 희망을 느낀다. 멀찍이 바라보이는 저 웅장한 건물, 컨벤션센터 안에서는 말쑥한 차림에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149개국의 통상대표들이 모였을 것이다. 그들은 무역 장벽을 더 낮게, 혹은 부숴버릴 것에 대해 정말 열심일 것이다. 그곳엔 연대도, 정도, 믿음도 없이 오로지 이익과 자본의 재생산만이 논의되고 집중되어질 것이다. 사막의 하이에나처럼 두 눈을 번뜩이며 가면 속에 가린 채. 하지만 여기 홍콩의 바닷바람이 속을 파헤치는 이 방파제에는 전세계 민중이 한목소리로 외친다. ‘Down Down WTO. No To WTO' 'No Bush' 이들은 인종도, 계급도, 피부색도, 언어도 그 다르다. 하지만 우리의 다름은 WTO가 하나로 만들어 주었음을 몸소 느끼며, 깊은 연대로 똘똘 뭉쳤다. 나는 ’희망의 근거‘라는 모 시인의 싯귀를 애써 떠올려 본다. 그 시인이 외친 근거는 다름 아닌 사람일 것이며, 그 사람은 고리끼가 이야기한 ’산사람‘일 것이며, 산사람은 바로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집회과정에서 한 모녀를 만났다. 홍콩경찰에서 마련했을 것 같은 간이 화장을 다녀오는데 너무나 예쁜 딸아이가 집회장 뒤에서 아장아장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엘리사 미자와(Elisa Misawa)라는 이름을 가진 37살 먹은 아줌마와 에밀리 케이(Emily Kei)라는 18개월 된 아이다. 아이는 우연히 작은 돌을 주워 나에게 주었다. 그 뒤 내 주위를 맴돌더니 다른 사람에게는 가지 않고 오로지 나에게만 관심을 보였다. 엄마가 인도네시아 농민과 이야기하는 사이 아이는 나에게 안겨 바닷바람을 피했다. 엄마의 아버지는 일본인이고 엄마는 멕시코 사람이란다. 그녀의 남편은 잉글랜드계 사람인데 아이에게서는 동양적인 티가 하나도 나지 않는다. 그녀의 주소를 받아 적고는 연락할 수는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컨벤션 센터가 보이는 앞바다에 300여명의 투쟁단이 뛰어들었다. 이들은 추운날씨에 속옷만 입고 바다로 뛰어든 것이다. 이들은 헤엄쳐서 컨벤션센터까지 갔다가 되돌아 왔다. 몇 명이 연행되고 한 명이 심장발작을 일으켜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연행자들이 풀려날 때까지 우리는 집회장을 지키기로 한다. 고층건물에 불이 환하게 켜지고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현형색색의 네온사인이 빛나고 있다. 우리의 처지와 너무 대조되어 보인다. 밤이 깊었다. 연행된 사람들이 나오고 집회장은 정리되었다. 8시 40분 버스에 오른다. 홍콩 경찰이 우리의 투쟁에 대해 거의 이해를 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의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못 잡는다. 무작정 우리더러 기다리라 하고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그렇지 않아도 성질 급한 전농 식구들은 여기저기서 빨리 버스가 들어올 수 있게 하느라 분주하다. 그러나 홍콩 경찰은 너무 여유가 많다. 만만디라고 했던가?
10:00 늦은 저녁을 먹는다. 다들 피곤하고 배가 고플 텐데 별로 입맛이 당기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고픈 배를 위로하며 도시락 한 개를 다 비운다. 잠이 쉬이 들 것이다.
12/14 아침 7시 기상이다. 날씨는 쌀쌀하다. 다들 옷을 하나씩 더 껴입는다. 몇몇 회원은 벌써 감기가 걸려 기침을 해댄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이 곳에서 몸에 이상이 생긴다는 것은 큰일이다.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몸 상태를 제대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겪는 고생을 알만하다. 이곳 아침 뉴스에서는 우리 투쟁단 이야기가 톱뉴스로 나온다. 컨벤션 센터에 자리를 틀고 그 곳의 내용을 생중계하지 않는다. 우리네가 치른 에이펙 회담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그러나 언론의 한계는 분명할 것이다. 우리가 왜이리 먼 곳까지 왔으며, 왜 WTO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지 그 중심을 제대로 보도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빅토리아 공원에는 다시 여러 민족들이 각자의 모양으로 모였다. 나는 공원내 다른 장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집회에 왔다. ‘Regist imperialist plunder and war! A peoples forum on trade and war' 약탈과 전쟁의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과 전쟁과 무역에 대한 민중포럼이라는 주제로 열리고 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고 다들 열정적으로 연설한다. 한쪽에서는 ‘Food sovereignty symposium'이 열리고 있다. 식량주권에 대한 논의들이 주로 이야기되고 있다. 모든 오전 일정이 끝나고 점심식사를 한다. 밥은 똑같다. 힘들다. 14:30 아시아 민중 결의대회 전교조 투쟁단장: 교육, 의료, 공기 등은 절대 상품화되어서는 안 된다. 아시아 민중이 단결해서 반드시 wto분쇄하자. 필리핀 어민대표: 자신들의 조직 100여명이 홍콩에 왔다. 필리핀에는 200만 명의 어민이 있다. 전통적인 어업에 종사하는 어민에 아무런 지원이 없다. 정부는 wto에 적극적으로 협조한다. 정부는 자본의 편에서 일하며 소규모 어민들에게는 아무런 지원이 없다. 어민들의 삶은 자꾸 피폐해지고 있다. 인도네시아 농민단체 연합: 전세계에서 투쟁하는 여러분들을 만나 반갑다. 우리 연대를 더욱 강화하자. 우리의 몸속에서 피가 흐르는 동안 우리는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시아시아 이주노동자 포럼: 전세계 민중들에게 연대의 인사를 보낸다. wto체제하에서의 이주노동자는 이중의 설움을 받고 있다. wto는 이주노동자를 인간이 아니라 단순한 상품으로 만들고 있다. 저 밀실협상에 우리들의 인권은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 풀뿌리 민주주의단체: 이곳에 와서 행복하다. 일본은 9월에 새 내각이 구성 되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신봉자다. 자국의 자본이 전세계에 무차별 침투하는 것에 대해 만족하며 고이즈미를 지원하고 있다. 일본은 평화헌법을 가지고 있다. 해외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고이즈미는 평화헌법을 개정하려 한다. 반드시 막아내야 세계평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 16:00 아시아 민중결의대회를 마치고 전농민이 버스에 올라 우카이샤 YMCA캠프로 간다. 그곳에서 비아캄파시나 우정과 단결의 밤이 열린다. 전용철 열사와 WTO에 저항하다 돌아가신 농민열사들의 명복을 빌며 농민가를 힘차게 부른다. 각국에서 참가한 회원들의 인사와 한총련 학생들의 율동 공연이 벌어진다. 홍천댁의 구수한 입담도 분위기를 띄우는데 손색이 없다. 각국의 농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춤도 추고 노닐다 저녁을 함께 먹는다. 우리 지역에는 태국의 농민들이 같이 앉았는데 피부색만 다를 뿐 농민의 표시는 똑같다. 주름진 이마, 거친 손, 이야기도 거의 농사이야기가 주종이다. 또한 그들의 얼굴은 농사짓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성이 그대로 녹아있다. 참으로 가슴 따듯한 만남이다. 그들과 술도 한 잔하고 닭싸움도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나는 애써 우리를 찾아온 홍콩 중문대학 학생들을 만나 몇 마디를 주고받는다. 그들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이곳 캠프의 개구멍으로 들어왔단다. 정문에서는 다른 사람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다. Wong Hon Pang 홍콩 중문대학 학생회장과 그의 친구 Mak Ka Lui다. 그들은 한국 농민들의 모습에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하며 직접 만나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개구멍으로 들어왔단다. 우리나라 대학생들과는 차이가 많았는데 일단 권하는 술이라도 절대 입에 대지 않는다는 것과 남학생은 담배도 피우지 않는데 맥가뢰라는 여학생은 어른들 앞에서도 담배를 자연스럽게 피운다는 것이다. 얼굴은 맑아 보였으며 대단히 순수하고 순진하게 보였다. 그들과 여러 가지 연행을 즐기다 9시 넘어 모든 일정이 끝났다. 다음날 만나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12/15 오늘은 함안군농민회 후원의 날이다. 준비는 잘되고 있는지 여러모로 걱정이 된다. 간부들이 알아서 잘하겠지 하고 생각이 되는데 벌써 일에 묻혀 홍콩에 있는 우리들은 잊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 오전은 한가하다. 이른 아침을 먹고는 다들 실내 운동장에 모여 탁구와 베드민턴 그리고 중국식 당구 비슷한 것들을 하며 즐겁게 논다. 그것도 잠시 오늘 계약된 어린이들을 위해 장소를 비워달라는 요청에 의해 숙소로 올라왔다. 많은 유치원생과 초등학생들이 수련원에 왔는데 전부 순수해 보이고 착하다. 아이들은 아직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일상적인 대화도 불가능했다. 숙소에 와서 이런저런 것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우리 숙소 바깥에서 점심을 먹던 놈이 나에게 자기가 싸온 것을 먹으라고 내민다. 이것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 栗子(율자)라고 수첩에 적는다. 밤을 그렇게 부르는 무양이었다. 삶은 밤을 한 개 집어 먹었다. 아이들이 싸온 도시락은 밤, 고구마, 샌드위치, 삶은 계란, 과자, 초콜릿, 꿀과배기(농심), 동원 맛김 등 거의가 외국산들이었다. 자체에서 생산하는 공산품이 적다는 것이 아이들의 도시락에 그대로 나타났다. 나에게 밤을 건넨 이 어린 친구는 이름이 문호현(文浩賢)이며 나이는 9살이었다. 매우 상냥하고 얼굴이 무척이나 잘 생겼다. 이 친구는 계속 자신이 싸온 도시락 속의 먹을거리들을 가져다주었는데 내가 목이 막혀 물을 달라고 하니 그것은 주지 않았다. 아마도 위생상 그러한 것 같았다. 자신이 입을 댄 것을 남에게 주자니 좀 그렇지 않은가? 점심을 먹지 못하고 숙소를 출발했다. 빅토리아 공원에 도착해 늦은 점심을 먹는다. 이곳 공원에는 아프리카 민중의 고통을 나타내는 큰 조형물이 서 있다. 하나는 아프리카 민중의 어깨에 거인이 올라타 있는데 거인은 한 손엔 지팡이와 한 손엔 저울을 들고 있다. 아마도 고혈을 짜는 wto와 북반구 나라들에 대한 상징성을 조형물로 표현한 것 같다. 다른 하나는 어마어마하게 큰 저울인데 한쪽 저울엔 소가 한 마리 메어져있고 다른 쪽엔 아프리카 민중 5명이 올라타 있다. 근데 저울은 소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통역하는 사람에게 어떤 내용이냐고 물으니 유럽에서 소 한 마리에 지원하는 보조금이 2달러인데 아프리카 민중 5명이 하루에 쓰는 것보다 소가 더 많다는 것의 표현이란다. 나는 조형물에서 상징하고자하는 기울기에 어느 쪽에 서있는지 반문해 보았다. 아마도 전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나는 소 쪽이 아닐까? 예전에 어느 글에서 보니 아프리카의 청소년 두 명이 파리행 비행기 안에서 얼어 죽은 사건이 있었다. 물론 이들은 아프리카에서 출발하는 파리행 비행기표가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 공항으로 들어가 비행기 바퀴가 들어가는 그 칸에 몸을 숨겼단다. 처음엔 그들이 밀항을 하려는 것으로 알았으나 시체에는 편지가 있었다. 그 내용은 유럽의 부국들이 아프리카 민중들의 고통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 현재의 고통을 함께 나눌 것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었다. 물론 이 뉴스를 접한 유럽의 나라들에서는 대책을 마련한다고 했겠지만 그것이 언발에 오줌 누기보다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죽음에는 역사적 연원이 너무나 깊다는 생각을 그 당시에 느꼈다. 그들은 그들의 엄청 오래된 할아버지대로부터 내려오는 그 모순과 착취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까? 지금의 북반구 나라들이 쌓은 부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결국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강제노예화, 식민지 종속국, 제국주의적 침탈에 의한 착취로부터가 아닌가? 또 나는 두 소년의 죽음에서 과연 북반구 부국들만 탓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자문한다. 과연 나는 정량으로 살고 있는가?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의 근거가 혹시 정량을 넘어서는 것은 아닌가? 나의 작은 욕심들이 결국은 어느 한 쪽에선 사람의 명운이 달린 문제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미처 하지 못했던가? 많은 고민들을 하며 조형물을 머리에 담는다. 15:00 드디어 홍콩 투쟁의 최절정판 삼보일배가 시작된다. 다리가 아프기는 하지만 이 곳에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내가 얼마 전에 교통사고가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젊은 내가 그 이야기를 했다가는 얼마나 많은 눈치를 받겠는가? 그리고 어른들도 다 참석하는 이 투쟁에 젊은 내가 못할 것은 없다. 대열의 후미에서 부경연맹이 출발한다. 세 발자국을 떼고 절을 한 번 한다. 그것도 전체가 합일하기 위해 옆에는 고수 한명을 두고 북을 한 번 치면 절하고 세 발자국을 떼고, 또 절하고 그렇게 두 시간 반이 지나서야 컨벤션 센터가 보이는 행사 지점에 도착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온 몸이 땀으로 젖었다. 처음해보는 투쟁방식인데 그런대로 효과가 있었다. 홍콩 시민들의 반응이 너무 뜨겁다. 나는 그들이 너무 고마울 지경이다. 거창에서 가져온 소주를 내민다. 홍콩에서 술을 최대한 절제하겠다는 나의 계획은 오늘 삼보일배를 통해 무너진다. 일단 한 모금을 마신다. 이 좋은 것을 누가 마다하리. 땀이 식으며 한기가 파고든다. 벗었던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방송차가 3시간 동안이나 경찰에 억류되어 있다가 들어왔다. 정리 집회가 시작된다. 민주노총의 발언과 청년들의 율동공연이 있고, 홍콩민중동맹의 대표자가 나와 발언한다. 그는 오늘 3보 1배 투쟁에 자신과 홍콩시민들이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며 이런 힘든 투쟁이라도 wto가 없어진다면 계속하겠다는 발언을 한다. 비아캄파시나 헨리사라기 사무총장은 3보1배의 최선봉에서 투쟁한 한국여성농민들에게 감사하며, 대지는 우리의 어머니다. 그 어머니는 저들은 돈으로 값을 매겨 처리하려 한다며 강력하게 투쟁하자고 이야기한다. 지금 이 집회장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기자들이 취재경쟁을 벌인다. 아마도 컨벤션센터 안에 있어야 할 기자들이 전부 여기로 온 것 같다. 반세계화 투쟁이라는 것이 이 기자들을 모았다면 우리가 가는 길은 결코 헛된 길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승리의 길로 가고 있다면 저들은 분명 패배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 홍콩 언론에서는 우리의 3보1배 투쟁을 경이적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그들이 우리들의 모습, 우리들의 구호를 보며 wto란 무엇인가? 과연 우리에게 이로운 것인가? 악인가에 대해 한 번 더 숙고한다면 우리들의 투쟁은 헛된 일이 아닐 것이다. 이런저런 글들을 쓰고 있는데 찬콕밍(Chan Kok Ming)이라는 홍콩주간지 기자를 만났다. 그는 자신의 잡지를 내보여 주었는데 거기엔 ‘NEXT MAGAZINE'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는 지난번 11월에 평택에 와서 취재를 했다고 한다. 왜 평택에 왔느냐고 물으니 미군기지 문제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한국에 왔으며 당시 추워서 얼어 죽는 줄 알았단다. 그리고 우리 집회의 동시통역을 담당하는 신미교라는 사람도 만났는데 그는 강원도 홍천이 고향이며 홍콩에 거주한지 3년쯤 되었다고 한다. 홍콩이 좋으냐고 물으니 한국보다 살기가 좋고 생활비가 한국보다 적게 들어서 좋다고 한다. 많이 젊어 보여서 미혼인줄 알았는데 나이가 42살이며 두 아이의 엄마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한 기자가 와서는 나의 여행기과 관련된 인터뷰를 하자고 한다. 전농의 방침이 개인인터뷰는 안되는 것이어서 정중하게 거절했더니 일상적인 질문만 하겠으니 제발 인터뷰를 부탁해 어쩔 수 없이 응한다. 그 기자는 나이가 25살의 여자인데 나에 대해 상세하게 물었다. 가족관계, 홍콩까지 오는데 든 경비, 어떤 농사를 짓는지, 한국농민의 삶은 어떠한지, 가정경제는 어떠한지 등 나는 최대한 나의 기준과 한국 농민의 평균적 기준에서 여러 가지 답들을 해준다. 집회가 끝이 났다. 인터뷰가 오래 걸려 마치고 가니 이미 저녁은 다 먹었고 도시락은 내 것만 남았다. 밥을 우격다짐으로 쑤셔 넣고는 버스에 오른다. 수소에 도착해 부경연맹 단결의 밤 행사가 열린다. 홍콩의 돼지고기와 홍콩의 쌈장, 그리고 홍콩 술로 다함께 한잔씩 한다. 이 곳 지배인과 일하는 친구는 우리식 돼지고기를 몇 점 먹더니 맛있다고 자리를 뜰 줄 모른다. 다들 몇 잔 먹지도 않았는데 피곤한지 숙소로 들어간다. 12/16 어제 과음한 탓인지 아침을 먹지 못한다. 홍콩술 그것이 도수도 높은데다 피곤한 몸에 부었더니 속이 성할 리가 없다. 몇몇과 남아 나눈 대화들의 진정성에 의문이 인다. 내가 던진 말들도 그러하리라. 오늘은 햇빛이 찬란하다. 홍콩의 날씨가 아름답다. 우리나라의 가을의 높은 하늘과 닮았다. 짙은(겨울이라 약간은 우중충하지만) 녹음에 따뜻한 햇볕이라. wto를 반대하는 투쟁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을 수 있지만 높은 하늘에 내 얼굴을 맞대본다. 아침 신문을 펼치니 온통 우리의 삼보일배 기사가 거의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황우석교수 관련 기사가 눈에 띤다. 한문이라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지만 분명 문제가 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사실 mbc의 진정성에 대해 결코 의문을 품지 않았다. 미국에서의 인터뷰도 이후에 일어날 것을 감지한 결과로 던진 질문일 것이다라고 판단했다. 미래를 내다보는 나의 눈을 천리안 정도는 안 되지만 십리안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언론에서 떠들은 세계 최초, 최고의 줄기세포에 대해 사실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호주에서 줄기세포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한국 유학생이 인터넷에 올린 글을 보면 세계적으로 그렇게 유명한 학자에 대해 호주의 과학계에서는 이야기도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본 것이다. 나는 주류 언론이 만들어 낸 이 이상한 과학자에 대해 우리국민이 실망할 것이 적이 걱정스럽다. 오마이뉴스나 mbc가 승리한다는 표현이 맞을까? 아니면 또 다른 반전이 있을까. 고국에 돌아가면 이 소식부터 확인하고 싶다. 오늘은 일정이 강연으로 채워져 있다. 12시 20분 YMCA(본대 숙소, 우리 숙소와는 차로 30분 정도 떨어져 있다)숙소 강당에 전농 전 식구들이 모였다. 먼저 보성부회장의 발언이 있다. 보성부회장은 한 40쯤 되어 보이는데 처갓집이 홍콩이란다. 자신이 본 홍콩 언론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우리의 투쟁이 홍콩시민들에게 큰 공감을 얻고 있으며 한 차원 높은 시위문화라고 언론에서 평가하고 있단다. 그리고 WTO의 폐해와 모순에 대한 칼럼과 사설들이 실려 홍콩 시민들이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오늘 강연은 브라질 농민운동조직 MST(무토지 농민운동조직)의 투쟁과 성과에 대한 이야기다. 조직구성원은 140만 명이며 전체 27개 주 가운데 23개 주에 자신들의 조직이 있다고 한다. 총연맹에서 각 주에 2명의 실무자를 파견해 활동하고 있으며, 주요 투쟁은 농민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 한다. 브라질은 50년 동안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시절을 겪었으며 포르투갈 식민지 시설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자체 조직을 구성해 종주국 정부에 대항해 싸웠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는 토지를 사고 팔 수 있게 법제화 되었지만 땅을 살 수 있는 세력은 일부 기득권 밖에 없어 농민은 아예 토지를 소유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와 비교할 때 해방의 과정에서 토지의 문제는 어느 나라나 똑같았을 것이다. 한반도도 마찬가지로 일제로부터 해방될 때 이 문제가 핵심이었을 것이다. 당시 사회구조로 볼 때 농민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그러나 당시 브라질의 민중운동은 우리와는 달랐을 것이다. 나는 이북에서 실행한 무상몰수 무상배분과 이남에서 실시한 유상몰수 유상판매에 대해 나의 사고가 깊지 않음을 아쉬워한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농민들의 토지개혁에 대해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것이 위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근데 이남에서는 어떻게 해서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정부에서 보전해주는 금융혜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방법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브라질과 별반 다를 게 없이 토지확보 투쟁을 지금도 전개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기본적인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결국 가장 시급한 문제이다. 노동계급과는 다르게 농민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면 결국은 농업노동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결국은 대자본의 잉여를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고혈을 바치는 수밖에. 그러나 나는 이남에서 농민이 토지소유가 가능했던 내용은 잘 모르지만 그 배경은 결코 정부의 시혜가 아니었을 것에 대해 확신한다. 당시 해방정국에서 주류계급인 농민들이 요구한 내용을 보면 첫째 친일청산, 둘째 토지개혁, 셋째 미군정반대였다. 가장 중요한 이 슬로건들에 대해 집권자들은 어떻게든 무마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성향의 탄탄한 농민조직들은 그 결속력에 있어 결코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힘들이 모여 결국 완결적인 것은 아니나 어느 정도는 토지문제에 대해 농민의 요구가 반영된 것은 아닐까? 그러나 브라질은 우리와는 정말 상황이 다르다. 특히 1964년 군부쿠테타로 군인이 통치하면서 모든 민중운동은 탄압을 받게 되었다. 민중운동 지도자는 고문, 투옥, 사형을 당했다. 20년 동안 모든 민중운동은 지하로 잠적해 버렸다. 군부의 무단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1979년 무토지 농민들이 조직화되기 시작했고 1984년 MST가 탄생했다. 이들의 투쟁방식은 1,000여명의 농민이 조직화되면 어떻게든 토지에 침입해 점령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살아남기 위한 결사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브리질 시민의 지지를 받게 되고 이 문제가 사회화되기 시작했다. 이들이 요즘 고민하고 있는 운동방식은 농민이 사회운동의 주체로 서는 것에 대한 문제, 토지점령 뿐만 아니라 농업 전반의 개혁의 문제, 보조금 및 제도, 정책에 대한 문제까지 고민 진행 중. 그러나 현재의 자본주의 제도로는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은 없다고 판단. 자본주의를 엎어야 한다고 판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전세계 농민들과 연대해야 한다. 조직운영영의 방식은 모든 문제는 조직적으로 대중적으로 푼다. 조직운영 핵심 4가지는 늘 대중과 함께한다. 대중에서 답이 나오고 그들에 의지할 때 승리할 수 있다. 투쟁은 지속적이며 끈질기고 다양해야한다. 농업생산방식에서는 우리 이후의 세대에게 물려줄 것이라는 기본관점에서 출발한다. 훈련과 교육은 핵심이다. 사상교육 뿐만 아니라 의료, 기술 등과 같은 자체 학교를 운영한다. 이 학교의 수강생은 가장 기층에서부터 지도부까지 포괄한다. 브라질 MST의 강연을 들으며 우리 전농의 많은 과제들은 떠올린다. 그들은 지금도 목숨을 걸고 투쟁하며 실질적으로 1년에 10여명은 죽임을 당하고 있다고 한다. 경찰에 의해서, 지주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그들은 자신들의 최소한 생활을 보장받고자 했을 것이다. 남아메리카의 빛나는 문명을 파괴한 스페인, 포르투갈 등등의 나라는 지금 이 문제들에 대해 원죄의식을 가지고 있을까? 아즈텍, 잉카, 마야 그 찬란한 문명을 파괴한 이들이 지금은 북반구의 선진국이라는 혜택에 대해 자기반성이나 있을까? 나는 얼마 전 본 ‘모타싸이클 다이어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철들면서 가장 존경하게 된 인물이 체게바라였다. 그의 일대기에서 게바라가 남아메리카 민중들의 삶을 둘러보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이 여행을 통해 혁명가로 다시 태어나는 그를 그렸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게바라는 심한 천식을 앓는다. 나는 어쩌면 이 천식이라는 병에 의한 동질감에서도 그를 더 존경했는지 모른다. 영화에서 그가 천식으로 심한 발작을 할 때에는 나 또한 옛날의 고통이 떠올라 내가 앓는 것 같은 착각을 할 정도였다. 아르헨티나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의학도였던 그가 남미 민중들의 피폐한 삶을 보면서 느꼈던 그 감정들 하나하나가 오늘 이야기한 MST회원들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쿠바 혁명을 성공한 뒤 제 2인자의 자리를 박차고 아프리카 콩고의 혁명운동을 전개하고, 볼리비아 혁명에 뛰어들어 미 CIA의 첩보에 의해 살해된 게바라. 누군가 그를 ‘20세가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 했다. 내가 닮고자 했던 게바라, 그의 후신들이 지금 내 앞에서 자신들의 조직과 자신들의 투쟁에 대해 이야기한다.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하라. 16:00 우카샤 캠프를 출발해 시내 구경에 나선다. 함안 4명은 무작정 거리로 나왔다. 홍콩 최고 번화가라는 몽콕이라는 곳으로 간다. 택시를 타려했지만 한 여성분이 택시비는 비싸니 기차를 타라한다. 기차역에는 왔지만 어떻게 타는지 차비는 얼마인지 알지 못한다.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학생에게 물었더니 차표도 타주고 상세하게 가는 길을 안내해 준다. 짧은 영어에 대충 알아듣고는 기차에 오른다. 기차 안에서는 홍콩 시민이 우리가 내릴 역에 대해서는 상세히 안내해 준다. 우리가 한국농민이어서 인지 아니면 원래 천성이 친절해서인지 궁금하다. 하마도 후자일 것이다. 규모가 큰 시장에 들어왔다. 한국의 재래시장쯤으로 보이는데 사람이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사람에 떠밀려 다녀야 할 정도다. 이런저런 곳들을 구경하지만 아무것도 사지 못한다. 선물이라도 하나 사 가야하는데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고 공항에서 면세점에서 사면된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몽콕 중심가에서 아픈 다리를 만지며 한국음식점으로 왔다. 뷔페식인데 우리 소주도 있다. 어떻게 음식을 먹는지 몰라 옆의 학생에게 물으니 상세하게 안내해 준다. 그는 오례현(吳禮賢)이라는 학생인데 17살 먹은 자기 애인과 저녁을 먹으러 왔단다. 오늘 우리 안내를 부탁하니 비디오 촬영을 해야 한다며 정중히 거절한다. 한참 저녁을 먹고 있는데 김해 회원 3명과 밀양 부회장이 들어왔다. 홍콩 좁다며 서로 한자리에 앉아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한다. 일단 밖으로 나와 이리저리 눈요기를 하고는 숙소로 들어가기로 한다. 9시가 조금 넘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조끼를 보고는 공이 사이마를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2층버스를 탄다. 안전성에는 무리가 없을 정도로 코너링이 원활하다. 2층버스 맨 뒷자리에서 종중형과 형진형의 목소리가 커진다. 취기가 약간 오르는 듯하다. 숙소 입구까지 오는 버스에서 내려 등산을 하려는데 종중형이 맥주 한 잔만 더하고 가자고 난리다. 첫째 날 음식 먹었던 식당에 들러 맥주 몇 병을 시켜 마신다. 계산을 하려니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오늘 먹는 술값은 공짜란다. 주인은 웃으며 그냥 올라가라고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시키는 건데. 숙소에 도착하니 의령농민회원들이 야단이다. 그들은 오늘 강연을 듣지 않고 아침에 홍콩 시내로 나갔었다. 그들은 오늘 점심과 저녁을 공짜로 먹었다고 한다. 그것도 아주 고급 식당이었는데 홍콩 시민들이 대신 식대를 지불해 주었다고 한다. 3보일배 투쟁의 후과인 듯하다. 어제 투쟁의 후과로 온 몸이 로봇처럼 움직인다. 이 몸으로 홍콩 시내를 돌아다녔으니 몸이 천근만근이다. 히터가 나오지 않는(홍콩의 가정집이나 숙소에는 난방장치가 없다)숙소에 지친 몸을 부린다.
12/17 오늘 지침을 숙지한다. 오늘 투쟁이 거칠 것이라는 것에 대해 다들 결의를 다진다. 경찰이 정해놓은 길이 아니라 중간지점에서 저지선을 뚫고 컨벤션 센터까지 진격하는 텍이다. 잡혀가거나 노숙 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두툼한 옷을 준비한다. 만약 달렸을 시에는 철저하게 묵비권을 행사하며 변호사 요청을 한다. 오늘 컨벤션센터까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진격한다는 지침이 떨어진다. 숙소에서 겨울옷과 몇 가지 준비물을 챙긴다. 11;30 한국농민투쟁단 결의대회를 시작한다. 전농, 전여농, 카돌릭농민회, 낙농육우협회, 한농연, 한여농, 농민단체협의회 순으로 결의를 다진다. 오늘 집회에서 특이한 것은 한농연 서정의 의장이 투쟁사를 하는데 몇몇 농민이 일어나 ‘막살해라’ ‘홍콩와서 뭐했노’등 야유가 쏟아졌다. 지난 칸쿤 투쟁에서도 이경해 열사가 돌아가셨지만 당시 한농연 투쟁단은 촛불집회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고 호텔에서 술만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번도 마찬가지 인 것 같았다. 그들은 첫째 날 집회에서 상여를 준비했는데 상여를 메고 가다 경찰에 막히자 상여를 버려두고 가 버렸다고 한다. 그 뒤 그들은 집회장에 보이지 않았다. 아래 3보 1배할 때에도 한농연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한농연은 출국한 줄 알았다. 근데 오늘 대오를 갖추어 제일 앞자리에 앉아 카메라 세례를 받고 있으니 전농 회원들이 화낼만도 하다. 서정의 의장은 우리가 분열하면 안 된다. 함께 싸우자고 이야기하지만 그 말을 고지대로 듣는 사람은 없다. 하여튼 홍콩에서 벌어진 우화쯤 될 것이다. 홍콩시민들의 반응을 여기에 적지 않을 수 없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손을 흔들어 주고 엄지를 세운다. 박수와 환호성도 있고 악수하자는 사람도 있다. 고생한다며 물을 한 차나 가져다주었고, 시내 선전전을 다녀온 사람들은 먹을 것을 한아름 안고 들어온다. 수많은 투쟁과정에서 우리가 한 번 이라도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우리의 집회문화와 관련된 많은 토론들을 보았을 때 항시 편향적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언제 평화적인 집회를 하지 않았는가? 과연 우리가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야기 할 때 그들이 과연 우리에게 박수를 쳐주었는가?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주었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없이 그저 폭력집회에 대해서만 문제점을 부각시키는 일은 정말이지 아전인수 격이리라. 그러나 조금 불안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오늘 투쟁이 정리된다면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오늘 투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결국 우리는 한국의 방식으로 이곳에서도 진행할 수밖에 없는 부분인가? 주위의 많은 농민들이 먼 곳까지 와서 경찰과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돌아가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부분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많은 고민들을 뒤로 한 채 어쨌든 지도부의 결정에 힘찬 투쟁으로 화답하리라. 서정길 부의장의 결의가 이어진다. 집회는 짧게 투쟁은 길게. 그의 결의는 간단하다. 점심식사를 간단하게 마친다. 오늘 토요일이라 유난히 많은 홍콩시민들이 보인다. 특히 아이들을 데리고 온 시민들이 많다. 집회장 사이사이엔 홍콩의 대학생들과 가족과 함께 나온 아이들이 유난히 눈에 띤다. 내 옆에도 5살짜리 계집아이가 앉았는데 귀엽게 생겼다. 많이 수줍어해서 말도 못 걸겠는데 이름을 써 보라고 하니 이귀태(李貴抬)라고 쓴다. 아버지는 오늘 아이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교육적으로 많은 효과가 잇을 것이라고 판단해 버스를 타고 왔다고 한다. 주위에는 홍콩의 대학생들이 한국 농민을 환영한다. 한국농민을 지지한다라는 글을 대자보에 써서는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함께 사진도 찍고 음식도 나눠 먹는다. 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을까마는 꿀로 된 음료수와 빵, 과자 들을 사가지고 와서는 먹으라고 한다. 다들 감사히 먹는다. 그러나 점심을 먹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먹을 것을 너무 많이 가져다주어 다 먹지 못하고 가져온 가방에 집어넣는다. 집회는 막바지로 달리고 부경과 전북은 수경을 사놨으니 챙기라고 한다. 최루액을 피하기 위해 랩을 각자의 주머니에 챙겨 넣었는데 그것이 필요 없게 되었다. 수경을 쓰고 첫날 입었던 구명조끼도 입으니 홍콩의 기자들이 전부 우리 쪽으로 와서는 사진을 찍는다. 오늘 구명조끼를 착용한 이유는 경찰에게 혼돈을 주기 위해서였는데 홍콩 기자들은 또 바다에 뛰어들거냐며 여러 가지 물음을 던진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을 그들은 듣지 못했다. 드디어 출전이 시작되었다. 깃발과 새로 준비한 상여, 대표단, 풍물 들이 앞서고 몇 몇 나라 민중들, 그리고 경남, 전북이 뒤따른다. 오늘 시위엔 뚜렷하게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 시위대 사이사이에 홍콩시민들이 결합ㄹ한 것이다. 또한 인도를 따라 수많은 시민이 우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함께 구호도 외치고 박수도 친다. 정말 한국에서 한 번 해보고 싶은 투쟁이다. 이런 투쟁이 정말 올바른 집회와 시위의 완성된 형태가 이런 모습이 아닐까? 그들은 처음에 WTO와 미국에 대해 신자유주의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많은 부분에서 의식변화가 일어난 모양이다. 언론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많은 부분을 이야기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언론은 세계화를 찬양하기에 바쁘고 양의 탈을 쓴 늑대의 모습은 제대로 짚지 않았다. 분명 차이가 있으리라. 본대가 중간쯤 갔을 때 와 하는 소리와 함께 부경과 전북의 농민들이 우회하지 않고 직진으로 내달렸다. 경찰 바리케이트를 넘어 한참을 뛰어가니 경찰차 두 대가 우리의 길을 막고 있다. 싸움의 시작이다. 어느 순간 나는 대열의 맨 앞에 와 있다. 지독한 최루액을 뒤집어쓴다. 수경을 쓰고 있어 다행히 눈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목과 팔은 화상을 입은 듯 화끈거린다. 그러나 아무런 대비책이 없다. 누군가의 머리에서 피가 흐른다. 그 옆 사람은 어깨를 맞은 듯하다. 나는 싸움의 과정에서 떨어진 인도네시아 삼각모자를 쓴다. 머리를 보호해야겠다는 본능이 발휘한다. 다시 몸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계속 최루액과 곤봉 세례다. 머리가 띵하다. 두 번이나 맞았다. 그들은 방패로는 가격하지는 않았지만 곤봉은 3단으로 되어있어 길게 뻗쳐 멀리까지 가격할 수 있게 되어있다. 사정거리를 짧게 잡았다가는 오산이다. 싸움이 길어지면서 경남대오는 어디로 갔는지 없다. 나는 경남대오를 찾아 뒤로 나왔다. 어느 순간 본대가 들고 갔던 다 찌그러진 상여를 부경이 메고 있다. 부경부의장이 앞쪽 상황을 알아보라고 해 가보니 별다른 이상이 없다. 순간 우리는 어디로 갈지 몰라 우왕좌왕이다. 회원들은 지도부를 바라보고 지도부는 여기저기 알아본다. 일단 가보자고해서 달려간다. 길이 막혀있다. 싸움이 시작되었다. 상여를 밀치니 상여를 뺏어가려 난리다. 겨우 다시 찾아 불을 지른다. 불을 지르니 바로 소화기를 뿌린다. 소화기 가스를 한 모금 깊게 들이키니 참으로 환장할 노릇이다. 이상한 가스가 폐부를 찌르는 것이 내 폐에 가스 가루가 달라붙는 느낌이 난다. 불탄 상여를 혼자 들어 경찰 쪽으로 밀고 나간다. 순간 또 방망이가 날아든다. 이번엔 팔이다. 다행히 세게 맞지는 않았다 상여는 빼앗기고 말았다. 이제는 어떡하지? 순간 많은 회원들이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다행히 경찰이 통제를 해서인지 차는 없다. 고속도로를 지나 컨벤션센터가 보이는 지점까지 왔다. 많은 대오가 들어와 있는데 그들은 어떻게 해서 왔는지는 모르겠다. 싸움은 정말 힘들게 하며 사선을 넘어왔는데 그들의 옷은 깨끗하다. 부경이 들어오자 바로 싸움을 하란다. 부경이 선봉에 서겠다는 이야기는 했지만 뭔 고역이란 말인가. 그러나 또다시 싸움은 시작된다. 그러나 최루액과 곤봉에 당할 수가 없다. 우리에게 무기만 들려 있어도 상황은 다르지만 지도부에서는 절대로 무기를 들지 말라고 한다. 어느 순간 수경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가 없다. 최대한 눈은 피한다고 했지만 최루액이 눈 안으로 파고든다. 아예 눈을 뜨지 못한다. 정말이지 눈을 깜박이지도 못할 정도로 아프다. 누군가 나를 부축해 뒤로 물린다. 누가 왔는지 영어로 눈을 떠라 한다. 뜰 수 없는 눈을 어찌하랴. 식염수가 뿌려지고 담배연기를 불어넣고 물을 넣고 야단이다. 하지만 나의 눈은 정확하게 15분 정도는 쓸모가 없었다. 계속 식염수를 부오 겨우 진정이 되었다. 싸움은 장기화되고 날은 어두워 졌다. 내 옷은 이미 다 젖어 버렸다. 잠시 소강상태가 되자 부경이 축면을 뚫으란다. 측면으로 가니 민주노총사람들이 와있다. 무슨 호텔 앞인데 경찰병력이 일렬로 서 있고 안심하는 듯하다. 싸움이 시작되었다. 경찰 바리케이드가 우리 수중에 들어왔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다쳤다. 순간 호텔 쪽 가건물에서 각목이 나왔다. 바로 각목과 방패가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나오자 펑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린다. 번쩍번쩍 섬광이 일더니 온 천지가 하얗게 변한다. 또한 경찰은 총을 쏜다. 10년 만에 최루가스를 본다. 사람이 쓰러진다. 최루가스가 온 몸속으로 파고든다. 내 옆에 쓰러진 사람은 총에 맞았다. 나는 그것이 진짜 총인줄 알았는데 고무총탄이었다. 그러나 아예 다리를 쓰지 못했다 최루가스 속을 뚫고 그 사람을 부축해 뒤로 물러난다. 곳곳에서 가스가 날린다. 이미 뒤쪽에선 사람들이 장속의 것을 꺼내고, 눈물 콧물 범벅이다. 나 또한 가스가 눈에 들어가 고통이 심하다. 그러나 최루액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많은 기자들이 내 주위에 최루가스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촬영한다. 고속도로 점거가 길어진다. 모든 대오는 고속도로에 집결했다. 형진형과 종중형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니 다쳐서 병원에 갔을 것이라 한다. 부의장님은 하동 사무국장과 사천회원이 머리를 다쳤으니 병원에 다녀오라고 한다. 이곳 홍콩에서는 우리를 후원하기 위해 많은 대학생들이 나왔는데 그중엔 치료를 위해 나온 이들도 있다. 그들은 팔에 스위스 국기를 만들어 감았는데 식염수와 간단한 치료가 가능한 것들을 가방에 넣고 응급처리를 해준다. 그들에게 엠블런스를 불러달라고 이야기하니 알았다고 한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엠블런스에 오른다. 그때 경찰이 우리와 같이 가겠다고 한다. 우리는 홍콩경찰을 믿을 수 없다며 내리려고 했지만 막무가내다. 한참을 실랑이하다가 우리는 엠블런스에서 내려 본대로 돌아왔다. 다시 본대에 있다가 홍콩 시민이 가져다주는 술과 안주를 마시는데 다시 병원에 갈 사람은 모이라는 통지가 온다. 아까 우리를 안내해 주었던 대학생이 와서는 왜 병원에 가지 않았냐며 묻는다. 사정을 이야기하니 이번에는 그들이 직접 엠블런스까지 안내해주면서 엠블런스에 같이 탔다. 이번에도 경찰이 우리 차에 타려해 강제적으로 내리고 병원으로 간다. 병원은 이미 많은 부상자들이 와 있다. 학생들은 잘 안내를 해주고는 병원을 떠나고 나는 두 사람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이리저리 분주하게 뛰어 다닌다. 병원에서는 무료로 치료를 해주었다. 한국의 병원과는 다른 것이 많았는데 응급실을 이리저리 다니고 의사가 치료하는데 옆에 있어도 아무런 제지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의사나 간호사는 자신이 무슨 특권이라도 있는 양 곁에도 있지 못하게 규제하는데 그런 일은 없다. 다들 친절이 몸에 착 달라붙어 있다. 사람 한 사람을 찾는데 그 이름을 영어로 써서 내 보이니 간호사가 만사를 놔두고는 나와 같이 다니며 그 환자를 찾아 준다. 물론 외국인이라는 프리미엄이 붙어서일 수도 있지만, 나는 병원에서 고마워 해 본 경험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황당하기까지 하다. 여하튼 한국의 병원 정말 무턱을 낮추어야 한다. 잠깐 동안 드는 생각이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세상을 폐기할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몰라 물어물어 빅토리아 공원까지 오니 우리 사람은 보이지 않고 경찰만 가득하다. 우리를 보던 경찰이 오더니 잠깐 보잔다. 이리저리 내 형색을 보더니 모자를 벗긴다. 바지를 올리고 양말을 벗기더니 내 발에 난 작은 상처를 보고는 연행한다. 두 사람도 어쩔 수 없이 따라 간다. 아! 적들의 소굴로 들어왔구나. 그들은 이미 우리를 연행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다 해놓고 있었다. 잡히자마자 수갑을 뒤로 채우고 플라로이드 사진을 찍는다. 간단한 조서를 꾸미더니 호송차에 태웠다. 내 수갑번호가 00007번, 내 앞에 6명의 동지들이 잡혀와 있다. 전부 민주노총 동지들이다. 전농으로 치면 내가 1번이다. 경찰들의 눈빛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 경찰서로 저 경찰서로 끌고 다니며 새로 조서를 꾸미고 사진을 찍고 몇 번을 반복한 끝에 유치장에 갇혔다. 수갑을 4시간 이상 뒤로 찬 상태라 어깨뼈가 빠질 것 같다. 손에 피가 통하지 않아 손목을 움직여 보지만 더 아플 뿐이다. 정말 지옥이 따로 없다 싶다. 한국 통역에게 정말 아파 죽을 것 같다고 하소연 했더니 4시간이 넘어 겨우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앞으로 수갑을 채웠다. 호래자식들. 정말 이 놈들 죽이고 싶다. 화장실에도 보내주지 않고, 물도 한 모금 주지 않는다. 당연히 먹을 것은 엄두를 못낸다. 새벽 4시에 유치장에 갇혀 겨우 잠에 든다. 모포가 모자라 달라고해도 들은척만척이다. 추위에 떨며 겨우 잠이 든다. 새벽에 시끄러워 깨니 형진형과 중중형이 들어왔다. 그들은 치료를 받고난 뒤 본대와 합류하러 갔다가 합류하지 못하고 나머지 사람들과 시위하다 잡혀왔다고 한다. 예상했던 대로 형진형은 머리를 많이 다쳤다. 중중형은 무사하다. 21개소에 분산 배치된 상황에서 함안농민 3명이 같은 감방에 들어왔으니 이것도 우연치고는 희한하다. 우리 방에는 민주노총 공공연맹 사람 13명과 전농 회원 8명이 총인원이다. 서로 인사하며 잘 지내보자고 서로를 격려한다. 그러나 다들 많이들 피곤해 금방 곯아떨어진다. 나는 제주도연맹 고창건이라는 갑장 놈 옆에 누웠는데 이놈의 코고는 소리가 탱크 지나가는 소리보다 커 선잠을 잔다. 이제부터는 감방 투쟁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는데 50시간 갇혀 있었는데도 별 할말이 없다. 그들이 주는 대로 먹고 자고 싶으면 잤다. 먹을 것은 정말 고역이어서 도시락에서 3-4숟가락을 먹고는 거의 다 버렸다. 맛도 맛이지만 화장실에 갈 수가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좁은 감방 안에 서로 얼굴보며 똥을 눈다는 게 한번도 해본 경험이 없는 나는 화장실에 갈 자신이 없었다. 작년 인도네시아에서 겪은 화장실의 경험이 떠올랐다. 거기는 화장지 대신 씻게 되어 있었다. 물로 씻어 보니 그런대로 깔끔했는데 홍콩 깜방 화장실은 정말 고역이다. 거기다 화장실 바닥에 물이새서 그 냄새가 또한 정말 가관이었다. 여하튼 깜방에서의 50시간은 곤역이었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12월17일 저녁 10시 55분에 잡혀 20일 시 30분에 풀려났다. 그러나 우리 방에서 다 나온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형진형이 같이 나오지 못한 것이다. 19일 오후 병원에 간다며 나갔는데 돌아오면서 경찰 조서를 받아야한다며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공공연맹 양경규위원장이 나오지 못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버스에 오르니 우리가 막차다. 제일 먼저 잡혀 제일 늦게 출감했다. 홍콩 법상으로 따지면 그들은 위법을 저질렀다. 구류 48시간을 넘긴 것이다. 버스에 올라 나오니 경찰서 앞에 많은 홍콩 시민들이 환호를 해준다. 그들은 우리가 나올 때까지 밤을 새우고 있는 중이었다. 너무 고마웠다. YMCA숙소로 돌아왔다. 포랭콕 우리 숙소는 계약이 종료되어 이곳으로 왔단다. 그러나 어디에도 내 짐은 없다. 잡혀있는 동안 길자와 부산총무부장만 남아 짐을 정리했다는데 나는 가방을 들고 나와 버려 제대로 챙기지 못한 모양이다. 숙소에 여권까지 놔두고 왔는데 큰일이다. 이리 저리 찾아보니 형진형 가방이 나온다. 일단 그것부터 챙긴다. 여러 가지 짐들 속에 내 양말과 고무신을 겨우 찾았다. 새벽까지 짐을 찾아 헤매다 다음날 찾기로 하고 잠이든다.
12/20 아침 일찍 일어났다. 일단 전북도연맹에 가보기로 한다. 전북에서 하는 말이 부경연맹 짐을 하나 챙겨왔는데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한다. 아침 내내 짐을 찾으러 다녔는데 전농 상황실 한 귀퉁이에 부경연맹이라고 쓰여져 있는 박스가 하나있다. 급하게 풀어보니 내짐이다. 다행이다. 여권문제로 많이 걱정했는데 어쨌든 출국은 할 수 잇게 된 것이다. 도연맹에서는 급한 사람은 먼저 출국할 수 있게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는데 언제 출국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란다. 또한 전북의 한 농민은 자신의 축사가 눈에 무너졌다고 울분을 토한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눈이 얼마나 왔기에 축사가 무너졌단 말인가? 그러면 비닐하우스는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경남은 눈이 오지 않았는지?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무작정 기다린다. 형진형 소식은 점점 어둡게 들리고 내가 제대로 챙기지 못해 자책한다. 다행히 비행기에 좌석이 남는 모양이다. 급한 사람 몇몇은 짐을 꾸려 공항으로 출발한다. 나는 종중형을 보내고 형진형이 나올때까지 홍콩에 잔류하기로 한다. 그러다 하동의 김형곤씨가 나를 부리나케 찾는다. 피곤해서 조금 쉬려했는데 무조건 끌고 간다. 정문으로 가니 늙은 아저씨 한분과 50대로 보이는 아줌마가 서 있다. 그들은 알로에를 키우는 분인데 한국농민의 어려움에 도움을 줄까하고 이 곳까지 찾아 왔다고 한다. 이집트알로에인데 제일 효과가 좋은 것이라며 이걸 재배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한다. 나는 한국은 추워서 겨울에 얼어 죽거나 아니면 불을 떼야 하는데 난방비가 많이 들어 적합하지 않다고해도 그들은 막무가내다. 일단 알로에를 의령사람들에게 맡기고 그들은 요기나 하자고해서 따라간다. 조그마한 식당에 들러 샌드위치에 맥주를 한 잔 한다. 한 병, 두병을 혼자 먹으니 취기가 동해 잠이 쏟아진다. 늙은 농부는 허브로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인데 참으로 인상 좋게 보인다. 아줌마는 통역으로 온 사람인데 친구쯤 되는 모양이다. 농부는 나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우리 뒷자리에 앉은 사람과 이야기하고 아줌마는 알로에 재배법을 여백에 옮긴다. 전화 한 통화 할 수 없냐고 했더니 기꺼이 건넨다. 한국으로 전화를 돌리니 전화가 걸리지 않는다. 아줌마전화기는 국제전화가 안 되는 거란다. 뒷자리에 앉은 아저씨가 전화를 빌려준다. 집사람과 처음으로 통화한다. 아이들이 아파 병원에 있단다. 별 탈 없기만을 멀리서 빈다. 날이 많이 어두워져서 식당을 나선다. 숙소에 오면서 알로에 저 놈을 어떡하나 걱정이 태산이다. 늙은 농부는 2년 뒤에 기술 전수하러 한국에 오겠다고하는데 내가 저것들을 키울 수 있는 조건은 아닌데. 그러나 별로 걱정할 게 없다. 부경 회원들이 전부 알로에를 나눠가졌다. 내 몫은 하나도 없다. 하동의 김형곤형에게 부탁해 몇 개 얻어 가방에 넣어둔다. 다음에 어떻게 인연이 될지 모르지만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하며. 거창의 회원들과 가까운 곳에서 맥주를 먹고는 잠이 든다.
12/21 갑자기 비행기가 준비되었다면서 짐을 꾸리라 한다. 나는 23일까지 머물기로 했는데 비행기가 갑자기 계약되어 떠나야 한단다. 도연맹 전정책실장 한정현동지만이 마카오로 입국했기 때문에 이번 비행기에 탑승할 수가 없단다. 그래서 한동지가 남고 나는 출국하란다. 어쩌겠는가? 그리고 내가 있으나 한동지가 있으나 역할에 있어서는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다. 버스가 YMCA숙소를 벗어난다. 고층아파트 사이를 달려 엄청나게 큰 현수교를 건넌다. 상록이 우거진 도심을 벗어나고 늘 그렇듯 홍콩 또한 어제와는 다른 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본다. 그러나 비행기 예약에 문제가 있는지 비행기 시간은 다가오는데 비행기 표가 나오지 않는다. 다들 걱정이다. 삼삼오오 모여 홍콩 투쟁을 정리하고 또 고국에서의 투쟁을 결의한다. 특히 홍덕표 어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늦게 접한 나는 가슴속 깊이 우러나는 명복을 빌었다. 68세의 노인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경찰 방패에 곤봉에 맞아 죽어야하는지 참으로 서글프다. 이 죽음을 경찰은 어떻게 바라보는지 의문이다. 비행기가 이륙한다. 홍콩에서의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분들의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비행기에서 받아본 신문엔 추가기소까지 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렇게 되면 재판이 길어질 것이다. 년내에 어떻게든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랬는데 무리가 따를 것 같다.
첫댓글 순천사랑님!!!멀미나요~어지럽고~속도 미시꺼리고요~참말 이당께요~지가요 책도 한꺼번에 여러페이지는 못 읽는디.....쬐금씩 나눠서 읽고요 후제 몬말이라도 해야제 둑겠구만요~좀 눠야 겠네유~겁나게 지송하구만요~미와도 이쁘게 봐주셔용~~~^.~
시간날때마다 실실 읽어보세요.고맙쑤다
매일 하나씩 올려주셨으면 좋았을걸...
이글 쓰시느라고 엄청 고생 하셨구만요~~수고하셨네요
쑤고 하셨읍니다..
순천사랑님 이글 쓰시느라 수고를 많이 하셨네요....농촌에 대해서 또다른 애착을 가지게 되네요..
ㄴ넘~~~~~길당~~ㅎㅎ
순천사랑님 이글 쓰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농민들 마음 원활하게 해결됩니다.
저도 농촌출신으로서 공감.... 순천 사랑님 힘내세요~~~ 제 동생도 시골에서 열심히 살면서...우리랑 만나면 이런저런 농촌사정이야기 자세히 나눔니다...올해는 농촌에모든분께 좋은 일만 있었으면 하네요~~
출발에서 가셔서도 넘 고생 많으셨어요~그랴도~힘든일 잇엇지만~무사히 돌아 오심에~...
순천 사랑님 넘 많이 수고 하셧 습니다
순천사랑님 너무 머리 아파서 다 못 읽고 갑니다..내일 시간내서 읽을 께요..죄송~~
어짜든가 자우든간에 수고 많으셨네요..존경합니다..
즐감했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셔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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