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일본 호송선단 신화
일본은 경제강국답게 세계적인 기업, 금융기관을 ㅁ낳이 보유하고 있다. 매년 세계 기업의 순위를 매기는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천이 2000년에 선정한 세계5백대 기업(매출액 기준에는 미쓰이(6위) 등 18개 일본기업, 금융기관이 50위 안에 들어있다.
어느 나라나 기업과 금융기관은 경제의 중추다. 특히 일본의 기업, 금융기관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해 잿더미로 변한 일본을 경제대국으로 키워낸 일등공신이다. 정부, 금융기관의 막강한 지원을 받은 제조업체들이 고품질의 가전제품, 자동차 등 상품을 만들어내면 미쓰이불산 등 종합상사들이 부지런히 내다 팔았다.
19세기 메이지(明治)유신 때부터 지금까지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정부 관료조직도 교모하게 수입장벽을 만드는 등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일본 정부, 금융, 기업이 세계 경제 지배를 위해 끈끈한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세계는 이를 '일본주식회사'라고 불렀다. 세계 최강 미국마저 1980년대에는 이에 밀려 세계 경제 1위의 자리를 일본에게 내줄 뻔 했다.
소니, 도요타자동차 등 국내에서도 널리 알려진 일본기업들은 이제 세계적인 다국적기업이다. 근대적인 일본기업의 역사는 1백년이 넘는다. 군국주의시절 러, 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을 치를 때 이를 뒷받침한 것도 미쓰이, 미쓰비시 등 일본기업들이었다. 2차대전 이후 일본땅에 진주한 미 군정이 대대적인 재벌해체 작업에 나섰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 대표적인 일본기업들은 각자 보유하고 있던 은행을 중심으로 재결함, 회생에 겅공했다. 이쑤시개부터 비행기까지 모든 상품을 만들어 파는 계열사들이 자금줄인 은행을 정점으로 똘똘 뭉치는 '호송선단'방식은 오랫동안 일본 기업의 최대 강점으로 꼽혀왔다.
이런 일본의 기업, 금융기관들은 90년대 중반 이후 무더기로쓰러지고 통폐합되는 등 2차대전 이후 최대의 시련기를 맞고 있다. 장기간 경기침체에 허덕이는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신경제, 경제의 글로벌화 등 경제 여건이 급속히 변화하면서 일본주식회사도 이제 한계에 이른 것 아니냐는 시각이 많다. 이에 따라 일본의 업계, 금융계에서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구조조정이 한탄이고, 일본정부도 대대적인 수술작업을 진행 중이다.
◈중병 앓는 일본기업
일본의 산업계는 90년대 후반에 초밥전문점인 교타루, 보석 장신구 제조업체인 코코 야마오카, 의류업체인 스즈야 등 유서 깊은 유명기업들을 잃었다. 2000년 7월에는 한때 연간 매출액이 1조엔을 넘었던 창업1백3년의 소고백화점이 1조 8천 7백억엔의 부채를 견디지 못해 무너졌다.
일본 민간신용조사기관인 데이코쿠 데이타맹크에 따르면 일본기업의 부도추세는 99년 10월 이후 계속 증가하고 있다. 2000년 7월의 부도 규모는 사상 최대인 4조 2천억엔에 이르렀다. 불행히도 일본기업의 3대 과잉볍(과잉설비, 과잉인력, 과도채무)때문에 상황은 더 자빠질 전망이다.
상당수 일본기업들은 80년대 호황기에 번 돈을 부동산, 주식 등에 투자했다. 그러나 90년대 거품이 꺼지면서 심각한 자금난에 부딪쳤다. 일본기업들은 과열 경쟁으로 인해 무리한 중ㅂ고투자도 많이 했다. 이때문에 일본 기업들의 부실자산 규모는 85조엔에 이른다. 평균 부채비율도 4백 50%로 미국(2백%), 독일(3백%) 등에 비해 상당히 높다. 일본기업의 자기자본수익률은 80년대 7.5%수준에서 98년에는 2.8%로 떨어졌다. 서구기업들은 외형보다 이익을 중시하는 반면 일본기업들은 자산규모, 매출액 등 외형 위주의 경영을 해온 탓이다.
그 결과 일본기업들은 매출액은 많지만 실제 이윤은 적은 '속빈 강정'인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종합상사인 마루베니의 99년 매출액 대비 경상수익률은 0.24%에 불과했다. 그 결과 82개 일본기업은 98~99년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로부터 신용등급을 강등당했다.
서구기업들의 자금 조달은 대체로 증권발행 등 직접 금융으로 이뤄진다. 반면 일본기업들은 금융기관에서 돈을 꿔오는 간접금융에 주로 의지한다. 계역사 간 상호지급보증과 주거래은행 제도 덕분에 대출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기업의 어려움은 자연스럽게 금융기관으로 전가됐다. 일본 금융계에서는 90년대 후반 닛산 생명보험(97년), 일본장기신용은행(98년) 등 꽤 이름있는 금융기관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2000년 들어서도 아이햐쿠생명보험(5월), 다이소생명보험(8월), 지요다생명보험(10월), 교에이생명보험(10월) 등이 무너졌다. 일본 금융기관들의 부실자산은 여전히 많아 부도사태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일본 금융감독청은 98년 일본 금융기관의 부실자산 규모를 전체 여신의 13.8%인 44조2천억엔으로 집계했다. 이는 일본 금융기관, 기업 간의 밀착금융과 정부의 과도한 보호 때문이다. 치열하게 경쟁하는 서구 금융기관들은 자연스럽게 수익성이높은 사업을 개척해왔다. 그러나 일본 금융기관들은 정부의 규제, 보호로 퇴출될 걱정없이 방만한 대출과 무사안일한 기업의존형 영업에 머물러왔다. 이러다 거품경제가 꺼지면서 막대한 부채를 안게 됐다.
일본 대형은행들의 자산규모는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총자산이익률은 미국은행들의 30~50% 수준에 불과하다. 또 일본 장기신용은행은 유령회사 설립, 편법 회계까지 동원해 부실을 숨기다가 쓰러지는 등 일본 금융기관, 기업의도 덕성마저 무너지고 있다.
◈결국은 수술대로
일본 정부는 경제의 핏줄격인 금융부문의 개혁을 서두르고 있다. 일본정부가 본격적인 금융개혁에 나선 것은 96년이다. '미스터 엔'이란 별명을 갖고 있는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전(前)대장성 재무관은 "98년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가 2001년까지 도쿄를 뉴욕, 런던과 맞먹는 국제금융시장으로 키운다는 목표 아래 금융개혁, 부실채권에 초점을 맞춘 금융 빅맹안을 만들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금융개혁안은 '2F, 1G'의 3원칙, 즉 'Free(자유경쟁), Fair(공정, 투명), Global(국제화)'을 골자로 했다.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보다 더 폐쇄적이었던 유럽 금융계는 마냥 허우적거리고 있어 이대로는 안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75년 미국의 월가, 11년 뒤인 86년 영국의 금융가에 '규제완화, 경쟁시대 돌임'이란 금융빅뱅이 일어난지 10년만에 일본 금융가도 금융빅뱅시대를 맞게된 것이다. 일본 정부는 98년 금융감독청(FSA)을 설립, 금융기관에 대한 관리, 감독을 대폭 강화했다. 60조엔 규모의 공적 자금을 투입해 장기신용은행, 일본채권신용은행(NCB)을 궁유화했다. 은행의 뮤추얼펀드 영업허용, 증권거래세 폐지, 비은행 금융기관의 채권발행 허용, 자회사를 통한 은행의 증권업 진출 허용 등 획기적인 조치가 잇따라 나왔다. 2002년 4월에는 예금보호한도 제도도 없어질 예정이다. 이렇게 되면 경쟁력 있고, 안전성이 인정된 금융기관만 살아남는 완전 경쟁시대가 ㅇ려린다. 이같은 변화에 맞춰 일본 스미토모은행과 사쿠라은행이 2001년 4월 합병키로 하는 등 금융기관들도 지주회사도입, 대형화, 업무제휴 등 다양한 전략으로 생존의 길을 찾고 있다.
산업계의 구조조정은 금융계에 비해 늦은 편이다. 그러나 달라져야 한다는 인식은 널리 확산하고 있다. 마쓰시타전기는 2000년 정기 주주총회에서 마쓰시타일가가 모두 경영마인드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도켜주식시장 상장업체인 외식업체 글로벌 다이닝은 임시직이라도 능력만 인정되면 점포장으로 임명하는 등 철저한 실적주의로 단기간에 급성장하고 있다. NEC는 채무경감, 구조조정을 위해 2002~2003년 일본, 미국 증권시장에 상장하고, 3개 산업분야별로 독립채산제를 도입키로 했다.
정보통신(IT) 및 벤처 열풍도 일본의 산업구조를 뒤바꾸고 있다. 일본판 실리콘밸리인 도쿄시부야의 '비트밸리'에는 일본 벤처업계의 신화를 일궈낸 소프트뱅크와 같은 '재패니즈 드림'을 실현하려는 젊은 인재들로 넘쳐흐르고 있다. NTT도코모는 적극적인 인수, 합병 전략으로 세계 시장에 진출하고있으며, 도요타, 도시바 등 일본의 대표적인 '굴뚝기업'들도 빠르게 정보통신과의 접목에 성공하고 있다.
일본 정부도 과잉설비처분과 같은 구조조정에 적극적인 기업에게는 세제혜택을 주는 등 산업계의 경쟁력 회복을 적극지원하고 있다. 2000년 9월에는 젊은 정부관료들로 구성된 'IT선진국 시찰단'의 후손인 셈이다. 일본 정부와 산업계는 또 50년만에 상법을 개정, 미국과 같은 최고경영자(CEO)제도를 도입하려 하고 있다.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이사회의 감독기능을 강화해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넘어야 할 산은 여전히 많다
일본 정부, 금융계, 산업계의 이같은 움직임에도 불구, 걸림돌은 여전히 곳곳에 널려있다. 일본 내에서는 구조조정 속도가 늦다는 비판도 많다. 업종 전문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크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2000년 정기 주총에서 미쓰비시화학, 미스비시중공업, 오릭스9리스금융업체), 세이부가스는 각각 전력사업, 샤프는 태양전지사업, 히타치, 한큐백화점은 간병서비스업, 소니는 투자사업, 도요타는 증권, 투자자문, 신용카드업, 노무라증권은 대금업을 새로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업종 전문화와는 거리가 먼 결정이다. 한국이었다면 문어발식 확장이라고 비난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언론은 '수익과 장래를 겨냥한 다각화 전략'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업종 다양화에는 너그러운 편이다.
지식, 창의성이 핵심자본인 신경제에서 일본의 '모방식 상품'이 과거와 같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지도 미지수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일본 상품의 전망에 대하 '유전공학, 환경 등 새로운 분야에서는 열세이며, 전자쪽은 어느 정도 경쟁력이 있긴 하지만 기업간 과열경쟁으로 수익성이 문제'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미국에 크게 뒤져 있는 유전공학분야의 경우 과거와 같이 '응용상품화 저략을 채택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본내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미국이 특허권을 내세워 적극 대응할 것이 뻔해 예전만큼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벤처산업도 미국에 비해 크게 낙후한 금융기법과 여전히 산적한 정부규제에 부딪쳐 있다. 미국나스닥에 상장한 일본 벤처기업이 일본금융기관의 신용평가에서는 대출억제 업체로 평가받는 경우도 있다. 미국에 비해 벤처기업 등록비용이 훨씬 비싸고, 절치도 복잡하다. 게다가 일본기업의 전통적 장점이던 평생고용, 연공서열 문화도 이제는 짐이 되고 있다. 일본 경제기획청은 일본기업의 투자수익률이 80년대 수준으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전체 종업원의 15%가 정리돼야 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기업문화로 볼 때 이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끄덕끄덕 세계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