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릉 강진 개성 거창 경기 경남 경주 고령 고성 곤양 공산 공주 관상 광산 광양 광주 구례 금성 김포 김해 나주 남양 남원 남평 남포 남해 낭야 능성 단양 담양 대구 대전 돌산 동래 동명 동해 문의 문화 밀양 보령 보성 봉래 봉화 부안 삼척 상극 서경 서산 선산 성산 송강 수원 순천 순흥 안동 야성 양평 연백 연안 연일 연흥 연희 영광 영덕 영성 영월 영일 영정 영주 영천 예산 예천 오천 옥구 옥천 온양 옹진 원양 원주 월성 의령 의안 인동 장기 장성 장흥 전주 정산 정선 정주 제주 죽산 진양 진영 차영 창원 천안 청산 청송 청주 초계 최계 최기 충주 파평 팔계 팔송 평산 평택 평해 풍기 하동 학성 한양 함양 함창 함평 합천 해남 해주 행주 현풍
총 122개의 본관과 1,780,648명이 있다.(1985년)
- 경주정씨(慶州鄭氏)
- 시조 지백호(智伯虎)는 신라 초기 6부 가운데 진지촌(珍支村)의 촌장이다.
- 시조(중시조) 문정공 정진원(鄭珍原)은 지백호의 42대 손으로 고려 시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평장사(平章事) 등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고 월성(경주의 옛이름)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경주를 본관으로 하고 있다.
- 경주정씨가 전체 정씨(鄭氏)의 큰집 격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묘소는 경북 월성군 내남면 로곡리에 있으며 음력 10월 10일에 향사한다.
- [ 대표적 인물 ]
고려시대의 인물로는 정극온(鄭,정이기(부마), 정현영(鄭玄英. 호부상서), 정휘(鄭暉. 문하평리)) 등이 고려사에 올라있다. 정휘의 아들인 양경공(良景公) 정희계는 이성계의 조선개국에 참여, 조선이 들어서자 개국공신 1등으로 봉해지고 좌참찬,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 들어 경주정씨는 15명의 문과급제자 30명의 무과급제자를 배출했다. 정희계(鄭熙啓)가 잘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때 장렬하게 전사한 정발(鄭撥)은 정희계의 5대 손인 군수 정명선(鄭明善)의 아들이다. 이 밖에 세종 때 좌찬성이 추증된 정지년(鄭知年), 명종 때 성리학의 대가 정지운(鄭之雲)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 벽두에 장렬하게 전사한 유명한 흑의장군 정발(鄭撥)은 25살에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 훈련원부정을 역임. 임진왜란이 나기 직전에 부산진 첨절제사가 되었는데, 그해 4월 왜군이 처음으로 부산에 상륙하자 다른 장수들은 모두 도망갔으나 그는 끝까지 분전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항상 검은 군복을 입고 진두에 나서 군민을 지휘하는 장군의 모습에 왜병들이 "흑의장군"의 명칭을 붙였다. 장군의 용전사실은 왜란이 끝난 후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황신(黃愼)이 왜군 平調信(평조신)으로부터 무용을 극찬하는 회고담을 듣고 돌아와 조정에 알려져 뒤늦게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사당 충렬사(忠烈祠 : 부산 동래구 안락동)을 지어 배향했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300,731명이 있었다.
- 고성정씨(固城鄭氏)
- 시조 정가물(鄭可勿)은 고려(高麗) 때 사람으로 여러대에 걸처 철성(鐵城. 고성의 고려때 이름)에서 살아온 호족(豪族)의 후손 이다.
- 그의 후손들은 선조(先祖) 때 부터 고성에 살면서 본관을 고성으로 하고있다.
- [ 대표적 인물 ]
정가물의 아들 정몽송(鄭夢松)이 동정(同正)을 역임했고, 후손 정세웅(鄭世雄)은 훈도(訓導)를 지냈다. 정세웅의 아들 4형제가 모두 관직에 올라 가문을 빛냈는데 그 중에서 장남 정개청(鄭介淸)이 뛰어났다. 정개청은 어려서 중이 되어 풍수설(風水說)을 배웠고 역학(易學), 율려(律呂) 등에 정통했으며 박순(朴淳)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조선 선조(宣祖) 때 교정청(校正廳)의 낭관(郎官)을 거쳐 곡성 현감(谷城縣監)을 지냈으며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 때 그와 교분이 두터웠던 탓에 경원(慶源)으로 유배도중 죽었다. 그외 인물로는 참봉(參奉)을 지낸 정대청(鄭大淸)과 별좌(別坐) 정응청(鄭應淸)이 있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296가구, 10,853명이 있었다.
- 공산정씨(公山鄭氏)
- 시조 정응규(鄭應圭)는 '정묘보'(丁卯譜)에 의하면 본래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왕으로 옹립한 신라 6부 진지촌장(珍支村長) 지백호(智伯虎)의 후손이라고 한다.
- 조선의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병조판서(兵曺判書)를 지낸 정비(鄭庇)가 공산군(公山君)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본관을 공산으로 하였다.
- 정비는 공산군에 봉해 지면서 거주지를 공산으로 옮겼으나, 선대에 대한 문헌이 없어 정응규를 시조로 하고 있다.
- 공주정씨는 공산정씨를 호적상에 기록이 잘못된 것이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공산 652명, 공주 232명이 있었다.
- 광주정씨(光州鄭氏)
- 시조 정신호(鄭臣扈)는 광주에 세거한 토족 신라 6부 촌장의 한 사람인 지백호(智伯虎)의 후손이다.
- 정신호는 고려 충선왕과 충숙왕 때 봉은사 진전직(奉恩寺眞殿直), 판도사사(版圖司事), 상호군(上護)을 지내고 삼중대광 문하찬성사(三重大匡門下贊成事)에 추봉되었다.
- [ 대표적 인물 ]
정만종(鄭萬鍾)은 1516년(중종 11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정언, 지평, 장령, 우부승지, 형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1539년 예조참판으로 진위사(陳尉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한성부좌윤을 거쳐 충청도, 함경도, 경상도 등의 관찰사를 지냈다. 정사호(鄭賜湖)는 이조참의,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후 황해도관찰사, 이조참판, 동지춘추관사, 한성부윤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정사위(鄭士偉)는 156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여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그후 도승지, 전라부윤 등을 거쳐 1591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참의로 왕을 평양에 호종(扈從)했고, 세자를 따라 강계로 가던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또한 정이주(鄭以周)는 1568년(선조 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로 급제 1570년 예조좌랑으로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고 그후 정언, 지평, 정주목사 등을 지냈다. 그리고 한말에 정춘수(鄭春洙)는 3.1 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문에 서명하고 옥고를 치른 뒤 독립운동과 종교운동에 종사했다. 영조 때 화가로 이름난 정선(鄭敾)은 한국 산수화의 독자적인 특징을 살려 강한 농담(濃淡) 대조위에 청색(靑色)을 주조(主調)로 한 새로운 화풍( 風)을 개척하여 심사정(沈師正), 조영석(趙榮 )과 함께 삼재(三齋)로 일컬어졌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4,922명이 있었다.
- 금성정씨(鄭氏)
- 시조 정성(鄭盛)은 하동정씨의 시조 정손위(鄭遜位)의 둘째 아들 정세유(鄭世裕)의 12세손으로 1330년(고려 충숙왕 17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랐으며, 금성군(錦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하동정씨로부터 분관하여 본관을 금성으로 하고 있다.
- [ 대표적 인물 ]
정성의 아들 정이(鄭履)가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를 지내고 도첨의사(都僉議事)에 증직되었으며,정지(鄭地)는 고려 공민왕 때 전라도 안무사(按撫使)를 거쳐 1377년(우왕 3년) 순천도병마사(順天道兵馬使)가 되어 순천, 낙안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소탕하고 전라도 순문사(巡問使)에 올랐다. 그후 남원, 남해 등지에 침입한 왜적을 격퇴한뒤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서 해도 도원수(海道都元帥), 양광(楊廣), 전라, 경상, 강릉도 도지휘치사(江陵道都指揮置使)가 되고, 1384년 문하평리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에 정종(鄭種)은 병조판서에 올랐고 정서는 현감, 정우직(鄭友直)과 정우현(鄭友賢)은 부호군 정팽은 도호부사를 역임하였다. 또한 정진석(鄭鎭石)은 선전관이 되었고 정우설(鄭友卨)은 호조판서 정민은 목사, 정태로(鄭泰老)는 좌승지가 되었고 정재실(鄭在實)은 사헌부감찰가 되어 가문의 번성을 누렸다. 정충신(鄭忠信)은 1592년(선조 25년) 무과에 급제했고, 1621년(광해군 13년) 만포첨사(滿浦僉使)로 국경을 경비했다. 그는 1623년(인조 1년) 안주목사로 방어사(防禦使)를 겸임했고, 다음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 이괄의 군사를 크게 무찔러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이 되고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평안도병마절도사에 올라 영변대도호부사(寧邊大都護府使)를 겸임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 부원사(副元師)를 거쳐 그후 포도대장(捕盜大將), 경상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천문, 지리, 의술 등에 능통했고 청렴하기로 명성이 높았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8,978명이 있었다.
- 나주정씨(鄭氏)
- 시조 정해(鄭諧)는 고려 중엽 때 벼슬을 지내고 군기감(軍器監)에 추증되었다.
- 그의 후손들이 나주에 정착하여 살면서 본관을 나주로 하였다.
- [ 대표적 인물 ]
- 시조 정해의 증손자 정가신(鄭可臣·1224~1298년)은 나주 사람으로 자는 남헌, 호는 설재(雪齋),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 정가신은 나주 동강면 시중동(지금의 인동리)에서 향공진사(鄕貢進士) 정송수(鄭松壽)의 아들로 태어나 금안동에서 자랐다.
- 어려서 승려 천기(天琪)를 따라 상경하여 1259년(고려 고종 46년) 문과에 급제하여 충열왕 3년(1277년)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가 되고 정녕공에 봉해졌다.
- 이어 좌사의대부를 거쳐 추서윤으로 필적이 되고 1280년(충열왕 6년) 승지가 되었다.
- 1284년(충열왕 10년) 밀직학사로서 정조사가 되어 원에 다녀 왔으며, 1287년 감찰대부·판삼사사를 역임한 후 1290(고려 충렬왕 16년)년 정당문학정당문학(政當文學)으로 사의(師儀)가 되어 세자를 따라 재차 원에 들어갔다.
- 그 후 성절사로서 3차례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세자이사가 되었으며 그 후로 벼슬이 여러번 승배되었는데 특히 그는 명문장가로서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 저술하기도 했으며 청렴결백하였다.
- 삼불의헌공(三不義軒公) 정초(鄭初. 1344~1423년)는 정가신의 증손으로 태종 5년(1405)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 호조판서를 지냈다.
- 조선 시대에 와서는 정가신의 5세손 정식(鄭軾. 1407~1467년)이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로 야인정벌(野人征伐)에 공을 세워 자헌대부 (資憲大夫)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 그 밖의 인물로는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정국(鄭菊)과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낸 일헌(逸軒) 정심(鄭諶. 1520~1602년). 부사(府使)를 역임한 정상(鄭詳. 1533~1609년) 등이 이름났고, 임진왜란 때 용맹을 떨쳐 비장군(飛將軍)으로 일컬어진 정여린(鄭如麟. 1564~1640년)이 뛰어났다.
- 또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사정(司正)과 용양위부호군(龍 衛副護軍)을 지낸 정기수(鄭麒壽)와 수군방어사를 지낸 정봉수(鄭鳳壽),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된 정응(鄭應), 죽우당(竹友堂) 정란(鄭瀾. 1583~1656년), 묵재공(墨齋公) 정눌(鄭訥) 등이 가문을 대표하는 후손들이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55,648명이 있었다.
- 낭야정씨(瑯야鄭氏)
- 시조 정선갑(鄭先甲)의 자는 시인(始仁)으로 명나라의 진사를 지냈으며 중국 낭야에서 출생했다.
- 정선갑은 명나라 세종 때 문연각 태학사(文淵閣太學士)를 지낸 정문겸(鄭文謙)의 증손자로 1617년 산동성(山東省) 낭야에서 출생하여 진사(進士)로 있다가 1644년 명(明)나라가 청(淸)에 멸망되자 나라를 구하려 의거(義擧)를 하려다가 청군(淸軍)에게 포로가 되어 심양(瀋陽)에 끌려갔다.
- 수용중인 그 심양에서 풍삼사(馮三仕), 황 공(黃功), 왕이문(王以文) 등 9의사(九義士)와 함께 동지(同志)로 결합(結合)하였는데, 이 때 병자호란 (丙子胡亂)의 볼모로 심양에 와 있던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에 효종) 일행을 만나 함께 힘을 합칠것을 약속하였다.
- 이듬해 봉림대군을 따라 조선에 들어와 조양루(朝陽樓) 남쪽 황조인촌(皇朝人村 :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 1번지 부근)에 살면서 효종(孝宗 : 봉림대군)과 비밀리에 북벌할 계획을 추진중 1659년(효종 10년) 왕(王)의 급서(急逝)로 북벌 계획이 좌절되고 그리던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게 되자 조선에 귀화하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 그 후 후손들은 150여 년간 황조인촌에 집단거주하면서 조정에서 베푸는 특별 후대(厚待)를 받아왔고, 임진왜란 때 원군(援軍)을 보내준 명(明)나라 신종(신宗)의 은의(恩義)를 추모하기 위해 숙종(肅宗)이 비원(秘苑) 내에 대보단(大報壇)을 만들어, 배향할 때 시조 정선갑을 포함한 9의사(九義士)를 함께 배향하는 은전(恩典)이 내렸고, 대보단 수직관직(守直官職)을 9의사 자손에게 대를 물리도록 하였다.
- 후손들이 시조의 출신지를 따라 본관을 낭야로 하였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94가구, 871명이 있었다.
- 돌산정씨(突山鄭氏)
- 시조는 정응통(鄭應通)이라는 사실만 전할 뿐 문헌이 없어 본관의 유래 등은 알 수 없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0명이 있었다.
- 동래정씨(東萊鄭氏)
- 동래정씨는 신라의 6부촌장 가운데 자산진부 촌장 지백호(智白虎)의 후손이다.
- 시조는 신라 때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정회문(鄭繪文)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문헌기록이 없는데다 그의 후손으로 고려 때 보윤호장을 지낸 정지원(鄭之遠) 역시 그 이후의 혈연계보가 불확실해 정지원을 1세로 하고 그후 안일호장을 지낸 정문도(鄭文道)를 중시조로 한다.
- 현재의 부산 동래를 세거지로 삼은 까닭에 동래를 본관으로 쓰게 됐다.
- [ 대표적 인물 ]
- 조선시대에 상신 17명, 대제학 2명, 호당(湖堂) 6명, 공신 4명, 판서 20여명과 문과 급제 1백98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 그중에서도 14세손 정난종(鄭蘭宗)에 이르러 동래 정씨는 명문의 반석을 더욱 굳혔다.
- 성리학자인 그는 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이르고 세조실록과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 성종 14년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외교가로도 수완을 보였으며 서예에도 뛰어나 원각사비 글씨는 바로 그의 솜씨다.
- 그의 네아들 중 정광필(鄭光弼)은 중종때 영의정에 오르고 당시에 어진 정승으로 추앙된 인물이다.
- 그의 손자 정유길은 대제학, 좌의정을 지냈으며 정유길의 자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 일제침략의 난세 속에서 5천년간 이어온 조선의 얼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운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그는 금세기 정씨가문에 또 하나의 산맥을 이룬다.
- 유학자이자 사학자인 그는 해방 이전에는 연희전문(연세대), 이화여전(이화여대) 등에서 국문학을 강의했고. 시대일보,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국학 발굴에 힘썼다.
- 그는 1892년 서울토박이로 태어나 한때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을 왕래하며 상해에서 항일독립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 해방후 초대 감찰 위원장을 지내며 저술활동에도 힘을써 <조선사연구>, <양명학연표> 등의 저술을 남겼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414,782명이 있었다.
- 보령정씨(保寧鄭氏)
- 시조 정형서(鄭衡瑞)는 정상규(鄭尙奎)의 아들로 정주(定州)사람이며 영조 26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했다.
- 그밖의 유래 등에 대해서는 문헌이 전하지않아 알 수 없다.
- [ 대표적 인물 ]
시조를 포함하여 정종현(鄭宗顯), 정현박(鄭顯璞) 등 3명의 식년시 병과 급제자가 있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58명이 있었다.
- 봉화정씨(奉化鄭氏)
- 시조 정공의(鄭公義)는 고려 초기에 정의대부 호부령(正議大夫戶部令)을 지내고 983년(성종 2년) 전국에 12목을 두게 되면서 호장이 되었다.
- 그의 5 세손 정도전(鄭道傳)이 창왕을 폐하고 공민왕을 추대하여 좌명공신이 되고 봉화현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으며, 태조 이성계의 조선개국에 공이 커 다시 봉화백에 봉해졌다.
-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봉화로 하였다.
- [ 대표적 인물 ]
- 고려 때 정영걸(鄭英桀)은 밀직부사가 되었으며 정균(鄭均)은 검교군기감정(檢校軍器監正)이 되었고, 정운경(鄭云敬)은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충혜왕 때 지밀성사(知密城事)을 거쳐 복주판관에 전임되고 공민왕 때 전주목사를 거쳐 검교밀직제학(檢校密直提學)에 이르렀다.
-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도복(鄭道復)은 한성판윤이 되었고, 정진(鄭津)은 세종 때 충청도 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판한성부사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1423년 공조판서, 1425년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 정문형(鄭文炯)은 세종 29년 여러관직을 거쳐 이조, 형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연산군 때 우의정에 승진했다.
- 정도전(鄭道傳)은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태조 3년 한양천도를 실현하고 이듬해 명나라와 실력으로 항쟁할 것을 주장하고 군비확보에 전력하였다.
- 또한 그는 척불숭유(斥佛崇儒)를 국시로 삼게 하여 유학의 발전을 기했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 이외에도 정숙은(鄭叔垠)은 부사, 정국로(鄭國老)는 군수, 정효종(鄭孝宗)은 현감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서 이름을 떨쳤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0,468명이 있었다.
- 서경정씨(西京鄭氏)
- 시조 정지상(鄭知常)은 고려 예종 9년 문과에 급제하고 1127년(인조 5) 좌정언(左正言)으로 척준경(拓俊京)을 탄핵하여 유배케 했으며, 1129년 좌사간(左司諫)으로서 윤언이(尹彦 ) 등과 함께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 묘청(妙淸), 백수한(白壽翰)의 음양비술(陰陽秘術)을 깊이 믿어 한때는 세 사람을 삼성(三聖)이라 칭했으며, 도읍을 서경으로 옮길 것과 북쪽의 금(金) 나라를 정벌하고 고려의 왕을 황제로 칭할 것을 주장하였다.
- 1130년 지제고(知制誥)로서 왕명을 받아 곽여(郭輿)를 위해 "산재기(山齊記)"를 지었으며, 그 후 기거랑(起居郞)이 되었다.
- 묘청의 난 때 김부식(金富軾)에 의해 살해 당했다.
- 역학(易學)과 시(詩), 서(書), 화(畵)에도 뛰어나고 노장철학(老莊哲學)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 [ 대표적 인물 ]
정응린(鄭應麟)은 조선 중종 5년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郡守), 지평(持平), 장령(掌令), 동부승지(同副承旨), 대사간(大司諫) 등을 거쳐 부평부사(富平府使)를 지냈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307명이 있었다.
- 서산정씨(瑞山鄭氏)
- 시조 정인경(鄭仁卿)의 선조는 중국 금화부 포강현 절강사람 鄭應中(鄭應中)으로서 그는 송나라에서 判將作監(判將作監)을 지냈고 그의 증손 신보(鄭臣保)는 송나라에서 尙書刑部 員外郞(尙書刑部員外郞)으로 있다가 나라가 망하자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로 망명하여 서산에 정착하였다.
- 정신보의 아들이 곧 정인경이다. 그는 1254년(고려 고종 41년) 문과에 급제하고려 충열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머물때 호종했고 그후 1299년(충렬왕 25년)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어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에 다녀오고, 도검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거쳐 중찬(中贊)으로 은퇴하였다.
- 그래서 후손들 이 시조의 정착지인 서산을 본관으로 하였다.
- [ 대표적 인물 ]
- 고려때 정신유(鄭信柔)와 정수는 상서(尙書)가 되었으며 정세충(鄭世忠)은 지제교(知製敎) 정달한(鄭達漢)은 수랑장(首郞將)을 지냈다.
- 또한 정윤홍(鄭允弘)은 군기부정(軍器副正)이 되었고 정윤장(鄭允壯)은 중랑장에 올랐다.
-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순은 판서에 올랐으며 정방형(鄭邦衡)과 정주, 그리고 정성검(鄭成儉)과 정희(鄭僖)는 현감이 되었으며 , 정사인(鄭斯仁)과 정성양(鄭成良)은 군수, 정견은 시평, 정언좌(鄭彦佐)는 판관이 되었고 정내언(鄭耐言)과 정천언(鄭踐言)은 부호군(副護軍)이 되어 가문을 번성시켰다.
- 정인홍(鄭仁弘)은 선조 때 대북파(大北派)의 영수(領袖)로서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항전하여 영남의병장의 호를 받았고, 대사헌과 동지중추부사, 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 또한 정인영(鄭仁榮)은 판관이 되었으며, 정인함(鄭仁涵)은 정랑(正郞), 정의열(鄭義烈)은 중추부사가 되어 이름을 떨쳤고, 정차주(鄭次周)는 효자로서 세상의 귀감이 되었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3,819명이 있었다.
- 야성정씨(野城鄭氏, 영덕)
- 시조 정가후(鄭可侯)는 고려 희종 때 대사도(大司徒)가 되었으며 일본을 정벌할 때 많은 공을 세웠으므로 야성군에 봉해졌다.
- 그러므로 후손들은 본관을 야성으로 하였다.
- [ 대표적 인물 ]
- 고려 때 정교(鄭交)는 이부상서를 지냈으며 정언국(鄭彦國)은 교위(校尉), 정당유(鄭唐裕)와 정자피(鄭自皮)는 중랑장, 정송(鄭松)은 문하시중 야성백(野城伯)에 봉해졌다.
-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을현(鄭乙賢)은 군수를 지냈고, 정태진은 랑장(郞將), 정득화(鄭得和)는 현감을 역임하였다. 또한 정자함(鄭自咸)은 판관, 정창국(鄭昌國)은 부사과(副司果)가 되었다.
- 정담(鄭湛)은 경서에 통달하였고 병서를 습득하였다.
- 1571년 24세 때 신립 장군의 휘하에서 돌격장(突擊將)이 되었고, 1589년(선조22) 무과에 급제하여 도호부판관(都護府判官)이 되었으며 1591년 청주목사, 1592년 김제군수, 같은해 4월 13일 왜적과 싸워 전사를 하였다. 1593년(선조 26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병조참판(兵曺參判)에 추증되었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976명이 있었다.
- 연일정씨(迎日鄭氏, 영일, 오천)
- 연일정씨는 시조를 다르게하는 두개의 파가 있다.
- 이 두파는 신라 6부시대의 지백호의 후손으로 그 중간 계보를 잃어버려 서로 촌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족보 및 종친회를 각각 다르게 하고 있다.
- 신라 때 간관(諫官) 정종은(鄭宗殷)을 도시조로 하고 그 후손인 정습명(鄭襲明)을 1세조로 하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와 정극유(鄭克儒)를 1세조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가 있다.
- 정습명은 고려 의종때의 중신으로 추밀원지주사를 지냈으며, 그의 선대에 정의경이 연일호장을 지냈고, 다시 연일현백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연일(현 영일)로 하였다.
- 그러나 본고장인 오천(烏川)마을 이름을 따서 오천으로 쓰기도 했으나 지금은 연일로 통일해서 쓰고있다.
- [ 대표적 인물 ]
- 연일정씨는 조선시대에 5명의 상신과 3명의 대제학을 배출하였다.
- [감무공파]
조선시대 중엽 송강 정철(鄭澈)은 시조의 윤선도와 함께 우리 고전문학의 쌍벽으로 불리는 가사의 최고봉이다. 그는 당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당쟁에서 서인의 영수로 동인세력과 끝까지 맞서 싸운 투사였고 좌의정의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다. 그의 아들 홍명은 인조때 대제학을 지냈으며, 정철의 현손인 정호는 영조때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정호 손자 역시 대제학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증손 정이환은 참판과 제학을 지냈다. 그밖에 고려 공민왕 때 오천군(烏川君)에 봉해진 정사도(鄭思道)와 조선 인조 때 대제학을 지낸 정홍명(鄭弘溟), 영조 때 영의정 정호(鄭澔), 영조 때 우의정 정우량(鄭羽良) 등을 들 수 있다.
- [지주사공파]
충신, 효자, 의인으로 일컬어지는 포은 정몽주(鄭夢周)는 나면서부터 어깨에 북두칠성처럼 검은점 7개가 박혀있어 이웃사람들도 모두 큰인물이 될것이라고 기대했다고 한다. 9세때 집에서 부리는 여종이 군에 나간 남편에게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그자리서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고 달은찼다 이지러지지만 첩의 마음은 항시 변치 않습니다"라고 써주었다. 짧은 한시로 남편을 그리는 아내의 마음을 표현한 소년의 재능에 글방 스승도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는 24세에 과거에 급제, 56세로 일생을 마칠때까지 기우는 민생을 구하는 일에 열과 성을 쏟았다. 그밖에 현종 때의 우의정을지낸 정유성(鄭維成)과 정유성의 손자인 양명학의 거성 정제두(鄭齊斗), 선조 때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킨 정대임(鄭大任), 효종 때 학자 정극후(鄭克後), 고종 때 산수화에 능했던 정문승(鄭文升) 등이 있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연일 237,218명, 영일 46,922명, 오천 22,033명이 있었다.
- 야성정씨(野城鄭氏, 영덕)
- 시조 정가후(鄭可侯)는 고려 희종 때 대사도(大司徒)가 되었으며 일본을 정벌할 때 많은 공을 세웠으므로 야성군에 봉해졌다.
- 그러므로 후손들은 본관을 야성으로 하였다.
- [ 대표적 인물 ]
- 고려 때 정교(鄭交)는 이부상서를 지냈으며 정언국(鄭彦國)은 교위(校尉), 정당유(鄭唐裕)와 정자피(鄭自皮)는 중랑장, 정송(鄭松)은 문하시중 야성백(野城伯)에 봉해졌다.
-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을현(鄭乙賢)은 군수를 지냈고, 정태진은 랑장(郞將), 정득화(鄭得和)는 현감을 역임하였다. 또한 정자함(鄭自咸)은 판관, 정창국(鄭昌國)은 부사과(副司果)가 되었다.
- 정담(鄭湛)은 경서에 통달하였고 병서를 습득하였다. 1571년 24세 때 신립 장군의 휘하에서 돌격장(突擊將)이 되었고, 1589년(선조22) 무과에 급제하여 도호부판관(都護府判官)이 되었으며 1591년 청주목사, 1592년 김제군수, 같은해 4월 13일 왜적과 싸워 전사를 하였다. 1593년(선조 26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병조참판(兵曺參判)에 추증되었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976명이 있었다.
- 영일정씨(迎日鄭氏)
- 영일정씨는 시조를 다르게하는 두개의 파가 있다.
- 이 두파는 신라 6부시대의 지백호의 후손으로 그 중간 계보를 잃어버려 서로 촌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족보 및 종친회를 각각 다르게 하고 있다.
- 신라 때 간관(諫官) 정종은(鄭宗殷)을 도시조로 하고 그 후손인 정습명(鄭襲明)을 1세조로 하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와 정극유(鄭克儒)를 1세조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가 있다.
- 정습명은 고려 의종때의 중신으로 추밀원지주사를 지냈으며, 그의 선대에 정의경이 연일호장을 지냈고, 다시 영일현백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영일로 하였다.
- 그러나 본고장인 오천(烏川)마을 이름을 따서 오천으로 쓰기도 했으나 지금은 영일로 통일해서 쓰고있다.
- [ 대표적 인물 ]
- [감무공파]
- 조선시대 중엽 송강 정철(鄭澈)은 시조의 윤선도와 함께 우리 고전문학의 쌍벽으로 불리는 가사의 최고봉이다.
- 그는 당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당쟁에서 서인의 영수로 동인세력과 끝까지 맞서 싸운 투사였고 좌의정의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다.
- 그의 아들 홍명은 인조때 대제학을 지냈으며, 정철의 현손인 정호는 영조때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정호 손자 역시 대제학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증손 정이환은 참판과 제학을 지냈다.
- 그밖에 고려 공민왕 때 오천군(烏川君)에 봉해진 정사도(鄭思道)와 조선 인조 때 대제학을 지낸 정홍명(鄭弘溟), 영조 때 영의정 정호(鄭澔), 영조 때 우의정 정우량(鄭羽良) 등을 들 수 있다.
- [지주사공파]
- 충신, 효자, 의인으로 일컬어지는 포은 정몽주(鄭夢周)는 나면서부터 어깨에 북두칠성처럼 검은점 7개가 박혀있어 이웃사람들도 모두 큰인물이 될것이라고 기대했다고 한다.
- 9세때 집에서 부리는 여종이 군에 나간 남편에게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그자리서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고 달은찼다 이지러지지만 첩의 마음은 항시 변치 않습니다"라고 써주었다.
- 짧은 한시로 남편을 그리는 아내의 마음을 표현한 소년의 재능에 글방 스승도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 그는 24세에 과거에 급제, 56세로 일생을 마칠때까지 기우는 민생을 구하는 일에 열과 성을 쏟았다.
- 그밖에 현종 때의 우의정을지낸 정유성(鄭維成)과 정유성의 손자인 양명학의 거성 정제두(鄭齊斗), 선조 때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킨 정대임(鄭大任), 효종 때 학자 정극후(鄭克後), 고종 때 산수화에 능했던 정문승(鄭文升) 등이 있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연일 237,218명, 영일 46,922명, 오천 22,033명이 있었다.
- 영정정씨(永定鄭氏)
- 시조 정의(鄭誼)는 조선시대에 감무(監務. 현감)를 지냈음을 알 수 있을 뿐 문헌이 전하지 않아 유래 등은 알 수 없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46명이 있었다.
- 영천정씨(永川鄭氏)
- 시조 정차공(鄭次恭)은 조선조에 예문관직제학(藝文官直提學)을 지냈음을 알 수 있을 뿐 문헌이 전하지 않아 유래 등은 알 수 없다.
- [ 대표적 인물 ]
정차공(鄭次恭)이 조선 세종 14년 식년시(式年試)에 급제 진사(進士)를 지냈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391명이 있었다.
- 예천정씨(醴泉鄭氏)
- 시조 정소유(鄭小遊)는 고려시대에 지면주사(知沔州事)를 지냈다.
- [ 대표적 인물 ]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병마사(兵馬使)를 지낸 정남진(鄭南鎭)을 파조로 하는 파가 있다고한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648가구, 2,931명이 있었다.
- 연일정씨(迎日鄭氏, 영일, 오천)
- 연일정씨는 시조를 다르게하는 두개의 파가 있다.
- 이 두파는 신라 6부시대의 지백호의 후손으로 그 중간 계보를 잃어버려 서로 촌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족보 및 종친회를 각각 다르게 하고 있다.
- 신라 때 간관(諫官) 정종은(鄭宗殷)을 도시조로 하고 그 후손인 정습명(鄭襲明)을 1세조로 하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와 정극유(鄭克儒)를 1세조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가 있다.
- 정습명은 고려 의종때의 중신으로 추밀원지주사를 지냈으며, 그의 선대에 정의경이 연일호장을 지냈고, 다시 연일현백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연일(현 영일)로 하였다.
- 그러나 본고장인 오천(烏川)마을 이름을 따서 오천으로 쓰기도 했으나 지금은 연일로 통일해서 쓰고있다.
- [ 대표적 인물 ]
- 연일정씨는 조선시대에 5명의 상신과 3명의 대제학을 배출하였다.
- [감무공파]
- 조선시대 중엽 송강 정철(鄭澈)은 시조의 윤선도와 함께 우리 고전문학의 쌍벽으로 불리는 가사의 최고봉이다. 그는 당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당쟁에서 서인의 영수로 동인세력과 끝까지 맞서 싸운 투사였고 좌의정의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다.
- 그의 아들 홍명은 인조때 대제학을 지냈으며, 정철의 현손인 정호는 영조때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정호 손자 역시 대제학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증손 정이환은 참판과 제학을 지냈다.
- 그밖에 고려 공민왕 때 오천군(烏川君)에 봉해진 정사도(鄭思道)와 조선 인조 때 대제학을 지낸 정홍명(鄭弘溟), 영조 때 영의정 정호(鄭澔), 영조 때 우의정 정우량(鄭羽良) 등을 들 수 있다.
- [지주사공파]
- 충신, 효자, 의인으로 일컬어지는 포은 정몽주(鄭夢周)는 나면서부터 어깨에 북두칠성처럼 검은점 7개가 박혀있어 이웃사람들도 모두 큰인물이 될것이라고 기대했다고 한다. 9세때 집에서 부리는 여종이 군에 나간 남편에게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그자리서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고 달은찼다 이지러지지만 첩의 마음은 항시 변치 않습니다"라고 써주었다.
- 짧은 한시로 남편을 그리는 아내의 마음을 표현한 소년의 재능에 글방 스승도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는 24세에 과거에 급제, 56세로 일생을 마칠때까지 기우는 민생을 구하는 일에 열과 성을 쏟았다.
- 그밖에 현종 때의 우의정을지낸 정유성(鄭維成)과 정유성의 손자인 양명학의 거성 정제두(鄭齊斗), 선조 때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킨 정대임(鄭大任), 효종 때 학자 정극후(鄭克後), 고종 때 산수화에 능했던 정문승(鄭文升) 등이 있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연일 237,218명, 영일 46,922명, 오천 22,033명이 있었다.
- 온양정씨(溫陽鄭氏)
- 시조 정보천(鄭普天)은 고려 때 은청광록대부 호부상서(銀靑光祿大夫 戶部尙書)를 지냈고 그의 선조에 대한 기록은 없어서 고증 할 수 없다.
- 전하는 바에 의하면 탕정군(湯井. 온양의 옛이름)은 백제지역으로 고려 태조가 유금필(臾黔弼)과 함께 이곳 탕정군에 왔을 때 고을 관리에 공이 있음을 보고 정씨에게 관을 제수(除授)하고 그 후손들은 그 군의 향직(鄕職)인 호장(戶長)이 되게 했다고 한다.
- 그래서 후손들이 온양을 본관으로 했다.
- [ 대표적 인물 ]
- 조선시대에 2명의 상신과 43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 정순붕(鄭順朋)은 연산군 10년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 병조판서 등을 거쳐 중종 때 호조판서를 역임, 지중추부사가 되었을 때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소윤(小尹)으로서 대윤(大尹)을 제거하는데 적극 활약했다.
- 그 공으로 보익공신(保翼功臣) 1등이 되고 우찬성겸지경연사(右贊成兼知經筵事)에 승진하여 온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이해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 정순붕의 7대손인 정만석(鄭晩錫)은 평안도에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평안도위사(平安道慰使)로 나갔고 난후에는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민생을 잘 돌보았으며 1829년에 우의정에 올랐다.
- 정현은 1545년 을사사화 때 윤임(尹任) 일파를 제거한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에 올라 사섬사직장(司贍寺直長)이 되었으며 1551년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가 되고 다음해 대호군을 거쳐 성천부사(成川府使)에 이르렀다.
- 정창순(鄭昌順)은 1757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지평(持平)을 거쳐 1763년 호서감운어사(湖西監運御史)로 나갔으며 이어 正言(正言), 금천도찰방(金泉道察訪)을 지냈다.
- 그후 부교이수찬(副校理修撰) 등을 거쳐 정조 때 대사간, 대사헌, 함경도와 경상도의 관찰사 선혜청제조(宣惠廳提調) 등을 역임하고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 그밖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정유(鄭裕) 등이 있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4,134명이 있었다.
- 옹진정씨(瓮津鄭氏)
- 정대신(鄭大臣)이 시조라고만 전해올 뿐 유래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1명이 있었다.
- 의안정씨(義安鄭氏)
- 정선(鄭瑄)은 고려시대에 내전숭반(內殿崇班)을 지냈다.
- 문헌이 전하지 않아 유래 등은 알 수 가 없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3명이 있었다.
- 장기정씨(長기鄭氏)
- 시조 정자여(鄭子與)의 시호는 문경(文敬)으로 고려 현종(顯宗) 때 문과에 올라 나라에 공을 세우고, 추충진국공시(推忠鎭國功臣)로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에 올라,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 등을 지냈고 장기백에 봉해진 후 식읍(食邑)을 하사받았다.
- 장기정씨의 선대는 경주정씨이고 영일정씨로 분관되었다가 정자여가 장기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장기를 본관으로 하였다.
- [ 대표적 인물 ]
- 정자여의 아들 정극겸(鄭克兼)이 직학사(直學士)를 지냈고, 손자 정희경(鄭希景)은 순검사(巡檢使)를, 증손자 정구(鄭球)는 낭중(郎中)을 지냈다.
- 직제학(直提學)에 오른 정천룡(鄭天龍)과 봉산군(蓬山君)에 봉해진 정천봉(鄭天鳳)은 사간(司諫)을 지낸 정수(鄭需)의 아들로, 6세손 정승주(鄭承周)와 함께 가문을 빛냈다.
- 학자로 이름을 날린 정규한(鄭奎漢)은, 조선 정조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화산집(華山集)"을 저술하였다.
- 그 밖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한 정동엽(鄭東燁), 별제(別提)를 지낸 정습 등이 가문을 빛냈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795명이 있었다.
- 장흥정씨(長興鄭氏)
- 시조 정운붕(鄭雲鵬)은 조선시대에 강원도사(江原都事)를 지냈다고 한다.
- 그러나 전하는 문헌이 없어 유래 등은 알 수가 없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73명이 있었다.
- 전주정씨(全州鄭氏)
- 시조 정원흥(鄭元興)은 원래 연일정씨로 고려 때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낸 정작의 세째 아들로 고려 예종(禮宗) 때 장례원(掌隷院)의 판결사(判決事)를 지내고 뒤에 전주(全州)에 유배(流配) 되었다가 그 곳에서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 연일(延日)에서 분관하여 본관을 전주하고 있다.
- [ 대표적 인물 ]
정광엽(鄭光葉)이 도승지(道承旨)를 역임했고, 그의 맏아들 정제홍(鄭齊弘)은 정랑(正郞)을, 둘째 정제운(鄭齊云)은 찰방(察訪)을 지냈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538가구, 6,957명이 있었다.
- 정산정씨(定山鄭氏)
- 시조 정치형(鄭致亨)은 정종아(鄭從雅)의 아들로 1476년(성종 7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315명이 있었다.
- 정주정씨(貞州鄭氏)
- 시조 정문청(鄭文淸)은 고려 현종(縣宗) 때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낭장(郎將)에 이르렀다.
- 연일(延日)에서 분관하여 본관을 전주하고 있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3,024명이 있었다.
- 진양정씨(晋陽鄭氏, 진주)
- 진양정씨는 동성동본이면서도 각각 시조를 달리하는 8개파가 있어 흔히 진양(현재의 진주) 8정이라고들 일컫는다.
- 원조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 6촌장 중 한 사람인 자산진부의 촌장 지백호(智伯虎)이며, 그의 후대에서 정씨의 분관, 분파가 이루어졌다.
- 충장공파(忠莊公派), 은열공파(殷烈公派), 공대공파(恭戴公派), 어사공파(御史公派)등은 진양정씨의 4대 봉우리로, 현재의 진양정씨는 이들 후손들이 주류을 형성하고 있다.
- 본관지 진양은 고려시대에 선조들이 살아오던 곳이다.
- [ 대표적 인물 ]
- 고려 때 양관대제학을 지낸 정시양(鄭時陽), 병부상서를 역임한 정신열(鄭臣烈), 판도판서인 정임덕(鄭任德), 예의판서의 정유(鄭愈), 대제학을 지낸 정수(鄭需), 평장사를 지낸 정록, 찬성사를 지낸 정을보(鄭乙輔) 등이 있다.
- 공민왕 때 전객령(典客令)을 지내고,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文益漸)의 장인으로 목화종자를 재배하고 보급하는데 큰 공적을 남긴 정천익(鄭天益)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 조선시대에 상신 1명(그의 아들이 정지산(鄭之産)이다), 대제학 2명, 문과 급제자 59명과 정척(鄭陟), 정성근(鄭誠謹) 등의 청백리를 배출해냈다.
- 조선 인조 때 대제학을 지낸 정경세(鄭經世), 서애 유성룡(柳成龍)의 수제자였던 그는 나이 스물셋에 문과에 급제하고 호당(湖堂)에 뽑혔던 수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공을 세웠고 성리학 뿐만아니라 예학에도 밝아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예학파를 형성했다.
- 임진왜란의 명장 정기용(鄭起龍)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상주성 탈환, 정유재란때의 성주, 초계, 의령성 탈환 전투에도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 광해군 9년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올라 남해안을 방어하던 중 통영진중에서 숨졌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31,289명이 있었다.
- 창원정씨(昌原鄭氏)
- 시조는 정지각(鄭之覺)은 고려시대에 호장(戶長)을 지냈다.
- 문헌이 전하지 않아 유래 등은 알 수가 없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811명이 있었다.
- 청산정씨(靑山鄭氏)
- 원조 정금강(鄭錦綱)은 고려말 문하시중 평장사로 조선개국 공신으로 좌의정에 오르고, 청산군에 봉해졌다.
- 그후 세계가 실전됨으로써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대사헌으로 연산군에게 직간을 하다가 종성부교수(鍾城府敎授)로 좌천된 정운결(鄭雲潔)을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청산으로 하였다.
- [ 대표적 인물 ]
- 조선시대 현감을 지낸 정희한(鄭希漢)을 비롯하여 주부(主簿)를 지낸 정필(鄭弼), 목사(牧使)를 지낸 정익(鄭翼), 교위의 정여해(鄭汝偕), 부사과(副司果)의 정문우(鄭文祐), 판관(判官)을 지낸 정효성(鄭孝誠) 등 관직자들을 배출하였다.
- 정빈(鄭賓)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고, 정종주(鄭宗周)는 부호군을 지냈으며, 정봉상(鄭鳳祥)은 호조정랑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정여흠(鄭汝欽)은 경서에 밝아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3,656명이 있었다.
- 청주정씨(淸州鄭氏)
- 시조는 정극경(鄭克卿)은 고려 의종(毅宗) 때에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 정극경의 6세손 정책이 고려 충숙왕 때 충주 목사(忠州牧使)를 역임하고, 통헌대부(通憲大夫), 판선공사(判繕工事)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러 청하군(淸河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본관을 청주로 하였다.
- [ 대표적 인물 ]
- 정극경의 손자 정의가 고려 고종 때 대장군(大將軍)을 지냈으며, 그의 손자 정해는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도첨의 찬성사 (都僉議贊成事)에 올라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 정책의 아들 정오는 고려 공민왕 때 공신(功臣)에 올랐다.
- 정탁(鄭擢)이 조선개국일등공신(朝鮮開國一等功臣)으로청성군(淸城君)에 봉해져 고려에서 명성을 날린 가문을 조선시대에 와서 더욱 빛냈다.
-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정이충(鄭以忠)의 아들인 대사헌(大司憲) 정탁(鄭琢)은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선조 때 춘추관(春秋館)의 기주관(記注官)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우찬성(右贊成)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외교적인 공적을 쌓았다. 천문 . 지리 . 상수(象數) . 병법(兵法)에 이르기까지 정통했으며 1604년 (선조 37) 호종공신삼등(扈從功臣三等)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고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 이 밖의 인물로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정곤수(鄭琨壽)와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된 정구(鄭逑)가 뛰어났고, 선조(宣祖) 때 이름난 학자(學者) 정사성(鄭士誠)은 태릉 참봉(泰陵參奉)을 거쳐 현감(縣監)을 지낸 후 벼슬에서 물러나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 판결사(判決事)를 지낸 정사신(鄭士信),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와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역임한 정장(鄭樟),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정옥(鄭玉)은 병조참판(兵曹參判),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한 정내성(鄭來成)과 함께 청주정씨 가문을 더욱 빛냈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8,802가구, 36,308명이 있었다.
- 초계정씨(草溪鄭氏)
- 시조 정배걸(鄭倍傑)은 초계성산에 정착해 살았으나 그 선조에 대해서는알 수 없다.
- 그는 1017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문종 때 예부상서, 중추원부사를 지냈으며 사학을 창시하여 홍문공도(弘文公徒)를 이루었는데 12공도 중 문헌공도(文憲公徒)와 함께 최성(最盛)하여 유가(儒家)의 대가요, 백세의 존사(尊師)라 일컬었다. 홍문광학 추성찬화공신(弘文廣學 推誠贊化功臣)으로 문하시중 상주국 광유후(門下侍中 上柱國 光儒侯)에 이르고 초계군에 봉해졌다.
- 그래서 후손들이 초계를 본관으로 삼았다.
- [ 대표적 인물 ]
- 조선시대 57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였다.
- 고려 때 예부상서를 지낸 정문(鄭文)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우참찬의 관직에 오른 정엽(鄭曄), 우찬성 정종영(鄭宗榮), 한성부좌윤 정기광(鄭基廣), 대제학 정선등을 그대표적 인물로 꼽는다.
- 우참찬(右參贊) 정화는 158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고 1587년 감찰, 형조좌랑을 거쳐 1593년 광주판관으로서 왜군을 격퇴한 공으로 중화부사(中和府使)가 되었다. 그후 대사간, 공조참판등을 역임한 뒤 1617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양양부사로 나갔다가 1년만에 사퇴하였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 대사성(大使成) 겸 동지경연(同知經筵)이 되었고 대사헌, 우참찬 등을지냈다.
- 대표적 인물은 이조참판 정온(鄭蘊)이다.
- 그는 성품 이 곧고 절개가 높기로 유명하여 광해군 6년에 강화도에 귀양가있던 영창대군이 죽음을 당하자 그 하수인 강화부사 정항의 처형을 주장, 광해군의 비위를 거슬려 10년 동안이나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겪었다. 귀양생활 중에 지은 "망북두시(望北斗詩)", "망백운가(望白雲歌)" 등은 그의 애군우국(愛君憂國)의 뜻을 토로한 것이었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경상도 관찰사, 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이조참판에 이르러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상헌(金尙憲) 등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했으나 마침내 화의가 성립되자 벼슬을 버리고 덕유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83,311명이 있었다.
- 팔계정씨(八溪鄭氏)
- 시조 정승(鄭丞)의 시호는 낭평(浪平)으로 고려 시대에 국자박사(國子博士)를 지냈다.
- 정승은 초계정씨 시조 정배걸(鄭倍傑)의 손자로 고려시대에 내급사(內給事)를 지낸 정복경(鄭福卿)의 후손이다.
- 따라서 팔계정씨는 초계정씨에서 분관되었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886명이 있었다.
- 평해정씨(平海鄭氏)
- 시조 정자함(鄭自咸)은 신라초에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왕으로 옹립한 진지촌장(珍支村長) 지백호(智伯虎)의 40세손이며 평부상서(刑扶尙書) 정세유(鄭世裕)의 아버지로 고려시대에 사성(司成)을 지냈다고 한다.
- 문헌이 전하지 않아 유래 등은 알 수 없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84명이 있었다.
- 풍기정씨(豊基鄭氏)
- 시조 정의는 고려 말기에 영정(풍기의 고호)의 감무를 지내고 영정으로 관적하였는데 그의 아들 기가 문하시랑을 지내면서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으로 풍기군에 봉해지고 풍기로 사관되어 풍기로 이관했다. 그 후 어느 조상 때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광주로 옮겨 살았는데 15세 형이 아주 어릴 적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편모를 모시고 영남으로 피란하다가 모든 문헌을 산실했다고 한다.
- 그래서 우리 나라 모든 정씨의 원조인 지백호의 원손이라고만 짐작할 뿐 시조의 선계는 물론 분관된 연원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시조의와 수관조 기의 묘소는 모두 실전되었다.
- [ 대표적 인물 ]
.정기(고려 관직:문하시랑) 고려 말에 벼슬하여 문하시랑에 오르고 삼한벽상공신의 호를 받았으며 풍기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수관조로 받들고 있다. .정균(고려 은청광록대부) .정정(고려 관직:검교상서) .정덕상(조선 자:지겸 관직:현감) 일찍이 진사시에 급제. 관직이 현감에 이르렀다. .정국창(조선 자:사언 관직:절제사) .정몽호(조선 관직:주부) .정태제(조선 원종공신) 1728년(영조4)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구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정유호(조선 자:군민 관직:숙천대도호부사) .정치운(조선 자:선우 호:송은 관직:봉사) .정익화(조선 자: 효직 관직:부호군) 1773년(영조49) 증광무과에 급제, 동부삼군에 기용되고, 참하 참상 등을 거쳐 선전관이 됐는데 1779년(정조 3) 고성으로 유배되었다. 1784년 사면되고 1792년 용양위부호군에 승진되었다. .정시영(조선 자:군초 호:진예 학자) .정만선(조선 관직:참봉) 1872년(고종9) 광주두회추무에 진사에 합격, 영릉, 태릉, 혜릉의 삼봉을 역임했다. .정연성(조선 초명:해명 자:성좌 호:대현 관직:판관) 1891년(고종28) 산릉참봉에 제수되고, 기기국사사 성균관사예를 거쳐 한성부판관을 역임했다.
- 항렬
20세부터 29세까지 좌측은 덕상계, 우측은 덕승계이고 30세부터 양계 단일화한 항렬자이다. 20세(載·相·華/ 21세(錫·始)/ 22세(濟·奎)/ 23세(相·善) / 24세(炫·淵)/ 25세(世·植)/ 26세(鍾·熙)/ 27세(漢·培·重) / 28세(模·鎭·克)/ 29세(燁·泳)/ 30세(鎔)/ 31세(永) / 32세(來)/ 33세(然) / 34세(敎)/ 35세(會)/ 36세(求)/ 37세(和) / 38세(爀)/ 39세(五)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693명이 있었다.
- 하동정씨(河東鄭氏)
- 하동정씨는 본관을 같이하면서 계통이 다른 3파가 있다.
- [밀직공 국룡파(密直公 國龍派)]
평장사에 오른 정도정(鄭道正)을 시조로 하고 그후 후손의 기록이 없어 고려때 문하시중을 지낸 후손 정석숭(鄭碩崇)을 1세조로 10세 정인지(鄭麟趾), 12세 정여창(鄭汝昌)등으로 이어져 왔다.
- [정승공 응파(政丞公 膺派)]
고려 덕종때 문과에 급제하고 김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도첨의 좌정승(都僉議左政丞)등을 지낸 정응(鄭膺)을 시조로 하고 6세 정희(鄭熙), 7세 정초(鄭招)로 이어져왔다.
- [지부사공 손위파(知部事公 遜位派)]
고려 숙종때부터 명종등 5왕조에 걸쳐 벼슬을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 지례부사(知禮部事), 응양대장군(膺揚大將軍),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하동백에 봉해진 정손위(鄭遜位)를 시조로 하고 있다.
- [ 대표적 인물 ]
- 조선시대에 들어와 상신(相臣) 1명, 대제학(大提學) 1명과 58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였다.
- 대표적인 인물로 정초, 정인지 등을 들 수있다.
- 정초는 1405년 문과에 급제, 140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좌정언(左正言)이되었다.
- 그후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를 거쳐 함길도도관찰사, 예조, 형조, 이조의 참판등을 역임하고 이어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정인지와 함께 역법(歷法)을 개정했다.
- 정인지는 1414년 문과에 장원 1425년 직제학에 올랐으며 1427년에는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한 수재였다.
- 1453년 계유정난에 수양대군을 도와 우의정에 승진하고 정난공신 1등으로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455년 세조 즉위 후 영의정에 올랐다.
- 정택뢰(鄭澤雷)는 1617년 이이첨(李爾瞻)이 폐모론을 제기하자 그부당함을 논하다 화를 입게된 이지익(李之翼)을 극력 변호, 이이첨 일당을 죽일것을 상소하여 어머니 강(姜)씨와 함께 남해에 유배되어 죽음을 당하고 1623년 인조반정 후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 정봉수(鄭鳳壽)는 1592년 무과에 급제하고 이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전관(宣傳官)으로 왕을 모신 뒤 1605년 무안현대장(務安縣代將)으로 흑산도 앞바다에 침입한 왜군을 섬멸하였으며 1627년 정유호란 때에는 철산의 의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워 그 공으로 철산부사에 특진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42,418명이 있었다.
- 학성정씨(鶴城鄭氏)
- 시조 정송(鄭松)은 초계정씨 시조 정배걸(鄭倍傑)의 손자로 고려조에 시중(侍中)을 지냈다고 한다.
- 문헌이 전하지 않아 유래 등은 알 수 없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75명이 있었다.
- 함평정씨(咸平鄭氏)
- 시조 정언겸(鄭彦謙)은 신라의 6부촌장의 한 사람인 지백호(智伯虎)의 38세손이다.
- 그는 고려 때 병부상서, 문하시중을 역임 하였고 1126년(고려 인종 4년) 탁준경(拓俊京)의 난 때 모평(牟平 : 함평의 옛 이름)으로 이사하여 후손들이 살면서 본관을 함평으로 하였다.
- [ 대표적 인물 ]
함평정씨은 주로 고려시대에 관직자를 배출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평장사를 지낸 정형(鄭炯)을 비롯하여 문하시중에 오른 후 영풍부원군(永豊府院君)에 봉해진 정현수(鄭賢守), 예부상서 정신양(鄭臣良), 그리고 문하시중을 역임, 함평군에 봉해진 정함(鄭緘), 대제학 정을용(鄭乙龍) 등과 대제학의 관직에 오른 정안의(鄭安義)와 호조전서(戶曺典書) 정지유(鄭知遊), 1404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선공감판관(繕工監判官)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이른 정구명 등의 인물들이 있었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6,425명이 있었다.
- 해남정씨(豊基鄭氏)
- 시조 정공유(鄭公裕)는 조선시대에 생원을 지냈다고 한다.
- 그의 아들 형제가 조선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현달하게되자 후손들이 본관을 해남으로 하였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433명이 있었다.
- 해주정씨(海州鄭氏)
- 시조 정숙(鄭肅)의 선조는 문헌이 전하지 않아 알 수 없고 다만 그의 조상이 해주 수양산 밑에서 살았던 선비집안으로 고려 때 정씨를 하사받았다고 전해온다.
- 그는 고려 신종 때 전법정랑(典法正郞)을 지내고 혈통을 이어왔으나 전쟁로 문헌이 소실되어 2, 3대의 계대를 밝히지 못하고 고려 말기에 정숙의 후손 정언, 정초(鄭礎)형제를 각각 1세조로 하여 2파로 분류하고 본관을 해주로 했다.
- [ 대표적 인물 ]
- 조선시대 60명의 문과급제자와 많은 관직자를 배출하여 가문의 융성을 누린 해주정씨는 대표적 인물로 찬성(贊成)을 지낸 정이를 비롯, 이조참판 정석견(鄭錫堅),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정효준(鄭孝俊) 등을 꼽을 수 있다.
- 정이(鄭易)는 1383년 문과에 급제하고 좌정언(左正言), 사헌지평(司憲持平),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등을 역임하고 1411년 한성부윤으로 정조부사(正朝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이 되었다.
- 그후 충청도관찰사, 예조와 형조 및 호조의 판서, 대제학 등을 거쳐 1419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에 이르렀다.
- 정효준(鄭孝俊)은 1623년 인조반정 후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올랐으며 1656년 해풍군(海豊君)에 봉해졌다.
- 그후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 연산군 시절 난세에 종적을 감추어 버린 일화의 주인공 정희양(鄭希良)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서 연산군 초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거쳐 호당(湖堂)에 들었다.
- 그는 일찌기 왕에게 간언(諫言)하여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해로 유배되어 3년만에 풀려나왔다. 마침 모친상을 입어 고향에서 시묘(侍墓)살이를 하던 중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 그 후 갑자사화 때 선비들이 화를 당하게 되자 사람들은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했다고 한다. 그는 시문에 능했고 음양학(陰陽學)에도 정통하였다.
- 정희양 외에도 175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여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었고 그후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등을 거쳐 공조판서에 이른 정운유(鄭運維) 등이 있다.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34,736명이 있었다.
|
첫댓글 고려 의종이 태자때의 스승이신 정습명 조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더라면 정중부 등 무신으로부터 더러운 수모를
면할 수 있을 건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