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 사극 장르도 천만 관객을 동원할 수 있다. 2005년 12월 <왕의 남자>가 개봉했을 당시 이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동원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화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 역시 천만은 꿈도 꾸지 않았다. 손익분기점만 넘기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만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왕의 남자>는 당당하게 천만 고지를 밟았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태풍>,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청연>, <해리포터와 불의 잔>의 관객수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관객이 <왕의 남자>를 선택했다. 당시 같은 시기에 개봉한 경쟁작들보다 적은 스크린수에서 개봉한 <왕의 남자>는 그야말로 ‘기적’을 일으켰다.
박흥용 화백의 동명만화를 각색한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두고 하는 이야기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그가 이전에 만든 사극 <황산벌>, <왕의 남자>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권력자들의 이야기가 아닌, 그들의 정치 논리에 휘둘려 희생당한 약자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그렇다. 역사의 재현에 머무르지 않고,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는 '이준익표 사극'의 매력을 이번에도 느낄 수 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왜구의 침입과 지독한 파벌 싸움으로 국운이 기울어 가던 16세기 조선을 배경으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간다. 평등 세상을 꿈꾸는 검객 황정학, 왕족 출신의 반란군 이몽학, 세도가의 서자, 기생의 신분을 가진 백지, 네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준익 감독이 보여줄 강렬하고 뜨거운 드라마를 다시 한번 기대하게 만든다. 선 굵은 드라마, 삶의 페이소스가 묻어나는 유머, 인간사의 희비극이 교차하는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표현하는 이준익 감독의 연출력이 더욱 풍성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장면들이 이 영화 안에는 즐비하다. 전국의 비경을 담은 로케이션과 역동성 넘치는 액션 장면은 이준익 감독의 영상미학이 한층 성장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왕의 남자> 속편?
역사적 상식이 풍부하지 않은 사람도 알 수 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왕의 남자>와 시대적으로 멀지 않은 배경의 작품이다. 비슷한 신분, 비슷한 시대의 인물들과 같은 장소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감독으로서 굉장히 힘든 일이다. 그래서 이준익 감독이 택한 방법은 차별성이다. 감독이 자기 복제를 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지는 순간, 감독으로서의 생명이 끝난다고 생각한 이준익 감독은 <왕의 남자>와는 다르게 가려고 노력했다. <왕의 남자2>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는 관객들은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이준익 감독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찍은 장면들을 가지고 승부를 걸려고 했다.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했다.”라는 이준익 감독의 말은 믿어도 좋다.
이준익 감독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아도 좋다. 사극은 그 시대와 그 사회상을 담게 되어 있다. 전세계 모든 훌륭한 사극들이 그렇다. 사극이 지닌 미덕이 있다면 정치적인 소용돌이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개인의 신념을 그리기에 적합한 장르라는 것이다.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이 지금을 사는 나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점, 사극장르만이 할 수 있는 매력 중 하나다.
감정이 충돌하는 칼싸움, 관객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맹인 검객 황정학은 대동 세상을 함께 꿈꿨던 이몽학의 야망을 막기 위해 칼을 들고, 반란군 이몽학은 오로지 자신의 꿈을 좇아 피도 눈물도 없이 칼을 휘두른다. 세상 앞에서 무력하기만 했던 서자 견자는 황정학을 만나 검술을 익히며 비로소 내면의 성장을 경험한다.
상황은 다르지만 칼을 휘두를 수 밖에 없는 인물들을 카메라 안에 담을 때 이준익 감독은 그 장면이 단순한 액션 장면에서 끝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칼의 대화’였다. 그들의 칼이 칼집에서 꺼내지는 순간과 칼과 칼이 서로 부딪히는 찰나, 그들의 사연과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두 발을 땅에 디딘 채 몸과 몸이 맞부딪히는 사실감 있는 액션을 통해 이러한 의도를 더욱 살렸다.
“인물이 보이는 이야기를 찍고 싶었다.” <왕의 남자> 때도 그랬지만 이준익 감독은 처해 있는 신분과 입장에 따라서 신념이 다른 인물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전달한다. “네 명의 신념이 이 영화의 매력”이라고 말한 바 있는 이준익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와이어 액션을 배제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칼과 칼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드라마였다. 시대의 모순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 사람, 꿈을 이야기한다. 나라의 운명에 등 돌린 채 당파 싸움만 일삼는 무능한 정권, 그 틈바구니 속에서 좌절된 꿈을 껴안고 살아야만 했던 인물들의 상황이 현재에 와서도 되풀이된다는 점이 보는 이의 감정을 씁쓸하게 만든다.
상상 만으로 흥분이 전해지는 연기
진심을 다하는 연기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황정민, 다양한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로 자리매김한 차승원이 만났다. 두 배우는 혹독한 무술 연습도 마다하지 않고 대역 없이 모든 연기를 소화해 냈다. 실제 맹인이 된 듯한 디테일한 연기를 선보인 황정민과 냉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차승원의 연기 대결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홍일점이자 처음으로 사극 연기에 도전한 한지혜는 독기 어리면서도 도발적인 기생 백지를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이준익 감독이 선택한 백성현의 활약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아역 시절부터 쌓은 탄탄한 연기력으로 기라성 같은 배우들 앞에서도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낸다. 관객을 사로잡을 네 배우의 연기, 상상만으로 흥분이 전해 진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원작과 무엇이 다른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원작으로 삼은 만화는 해외에서도 인정받은 박흥용 화백의 작품이다. 미술과 문학의 완벽한 만남으로 기존의 만화를 넘어선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선 굵은 스토리와 사회적 메시지가 조화를 이룬 만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한국형 그래픽 노블’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성을 자랑한다. 오래 전부터 원작 팬들이 영화화를 꿈꿔 왔고, 단연 그 적임자로 이준익 감독을 손꼽았다.
이준익 감독은 5년 간의 기획 기간을 거치면서 원작을 해체하고 재조립했다. 만화와 영화는 매체 자체가 틀리기 때문에 이준익 감독은 원작자와 많은 의견을 주고 받았다. 원작으로부터 자유롭게 찍어 달라는 박흥용 화백의 말에 이준익 감독은 용기를 얻고 만화의 이미지를 깨는 데 중점을 뒀다. 무엇보다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장점을 살리는 데 주력했다. 고심 끝에 이준익 감독이 택한 것은 황정학과 이몽학, 견자, 백지 네 사람의 다층적 내러티브. 신분 차별에 대한 울분을 갖고 있던 견자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성장한다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시대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