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에서의 하루
청산도 가는 길을 포스팅 한 후 이제서야 두번째 포스팅을 하게되었다.
첫째 날, 서울을 출발해 청산도 도청항에 발을 디딘 시간은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먼저 부두 매표소를 들어가니 입구에 40대 중반의 아주머님께서 관광안내를 하고 있었다.
아주머님께서는 펼쳐놓은 관광안내 지도에는 숙소, 배편, 청산도내 교통편, 식사할 곳, 주요기관 등과 전화번호 등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었다.
이미 걸어서 여행하기로 마음 먹었으니 교통편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주의할 점은 도청항을 벗어나면 식당이 전혀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라는 아주머님의 말씀과 점심은 인근 식당에 부탁해 도시락을 준비할 수 밖에 없다고 안내해 주셨다.
그리고 오늘코스는 시간상 당리의 "서편제"와 "봄의 왈츠" 촬영지, 화랑포, 새땅끝(지도상 1,2,3,4,12)을 돌아 올 수 있을 것 같고 날씨가 매우 화창해 멋진 석양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씀을 듣고 인근 숙소를 찾았다.
그리고 여장을 풀고 작은 배낭에 마실 물과, 지도, 카메라만을 둘러메고 드디어 길을 나섰다.
이때 시간이 정확히 4시 1분이다.
숙소 앞을 나서며 바라 본 도청항
먼저 청산도의 유래를 살펴보면
청산도는 전남 완도군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 도서이다.
일명 선산(仙山) 선원(仙源)이라 불리우는 이 섬은 고려시대에는 현재의 강진군에 속해 있었다.
그후 임진란을 계기로 정부의 도서금주령(島嶼禁住令)에 의해 한 때 사람이 살지 않았으나, 16C말엽 다시 주민이 이주하여 정착하고 1681년(숙종7) 수군만호진이 설치된 이후부터는 서남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 1896년 완도군이 설군되어 완도군에 편입되었다.
청산도는 완도군으로부터 약19.2km 떨어진 다도해 해역에 위치하며, 주변에 동쪽으로 거문도, 서쪽으로 소안도, 남쪽으로 제주도, 북쪽으로는 신지도를 바라보고 있다.
화랑포를 지나 새땅끝에서 해가 지는 방향으로는 보길도,소안도,노화도가 바라 보인다.
청산면은 5개의 유인도와 9개의 무인도로 형성되어 있으며, 해발 343.4m, 총면적 42.7㎢ (5개 유인도 면적), 해안선길이 84.6㎞(5개 유인도 길이)로 둥근 소라형 모양으로 이루어진 천혜의 관광자원 및 청정해역으로서 수산자원이 풍부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간직한 다도해해상 국립공원지역으로 2008년 12월 31일 현재 1,319세대 인구수 2,613명(남 1,250명, 여 1,363명) 13개 법정리, 23개 행정리, 79개 반으로 이루어진 인정이 많고 인심이 훈훈한 반농 반어촌이다.
도청항에서 당리 방향을 바로 보았다. 언덕 넘어가 당리이다.
가운데 나지막한 곳이 서편제와 봄의 왈츠 촬영지이다.
봄에는 유채꽃이 만발하는 곳이다.
제주도에 유채꽃밭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협소한 밭이다.
앵글에 맞춰진 사진으로 보면 매우 아름답게 보일 수 있을 수 있으나 협소한 유채밭을 둘러보고 간 어느 여행객이 비난의 여행후기를 남겨 둔 것이 생각난다.
사람의 눈도 시야가 좁건만, 렌즈로 바라 본 세상이야....
당리로 가는 길에 돌아 본 도청항 모습
당리로 오르는 길에 바라 본 도락리 해안 경치
서편제 및 봄의 왈츠 촬영지에서 내려다 보이는 도락리 해안.
바다에 떠있는 것들은 전복 양식장이다.
아침 시간, 오후시간, 저녁시간에 바라 본 모습.
3장을 합성하니 해상도가 너무 떨어져 아쉽다.
당리 입구. 우측길로 돌아가면 영화 촬영지, 화랑포 가는 길이다.
멀리 보이는 산이 보적산이고 그 우측 자그마한 혹이 범바위다.
당리는 청산도 유일의 성터가 있던 곳으로 최초의 지명은 알 수 없으나 1759년의 여지도서 및 강진현에 청산도가 속할 당시의 호구총수(1789년)에 의하면 당리라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고종3년(1866년) 당리진을 설치하여 당리에 관망대와 봉화대를 설치하고 외곽에 성을 쌓고 각각 동문, 서문, 남문을 두어 고종 32년 1895년 파진될 때까지 인근 신지면, 소안면, 고금면 약산을 관할하였다하여 일면 진말이라 하였고, 덩라잔우나 1895년 22僉使 김재흥재직 당시 里名이 "鎭里"라 나오며 당시 이장은 김권숙(22대)이였다.
1914년 행정구역 일람표를 보면 당리와 도락리를 합구시켜 당합리라 하였고, 1896년 2월 3일 완도가 군으로 됨에 따라 당리로 명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인근에는 "화랑포"(化郞浦)라 하여 진의 설치와 동시에 역대 진수(鎭守, 僉使)와 무사, 선비들은 따뜻한 봄이나 가을이면 기생들을 데리고 산과 바닷가를 찾아 풍월을 즐기게 되었는데 서남쪽 1.5㎞지점 산등성이에서 화창한 봄날 오후쯤에 바다물결이 꽃과 같이 아릿다운 낭자와 같아 취홍에 못 이겨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냈었다고 한다.
이후부터 이곳 지명을 화랑포(化郞浦)라 전해오고 있으며, 또한 이곳은 아름다운 물결, 바둑알처럼 크고 작은 갯돌, 신비스런 바위, 연애바탕이 있어 지금도 여름철이면 피서객 및 낚시꾼들이 찾아드는 유명한 관광지로 변하여왔다.
당리에는 당시 사형장(死刑場)터가 있었다고 하며 청산도에 당리진이 설치되었을때 서남포(모래남)에 설치하여 죄수의 사형 및 처형시 이용하였다. 한편 남문지로부터 약 20m 북쪽의 골목길 근처에는 마을공동우물로 사용하고 있는 우물이 남아있다.(鎭때 사용하던 우물).
당리 마을에 들어서자 옛날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옛날 모습을 잃은 부분에는 복원하기 위한 공사가 진행중이다.
서편제 촬영세트장
지금은 청산면에서 매입하여 보존하고 있다.
봄의 왈츠 촬영장소.
영화에 나오는 할머님께서 현재 홀로 살고 계신다고 한다.
서편제와 봄의 왈츠 촬영장
우측 경사진 쪽이 도락리 해안이다.
봄의 왈츠 촬영장과 세트장 내부이다.
빨간우체통이 시선을 잡는다.
바다 건너오는 님의 사연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일까?
뭍으로 떠난 아들의 소식을 기다리는 것일까?
화랑포로 낙조를 바라보기 위해 가는 길목.....
촬영장 주변 유채꽃밭이다.
경사진 다랭이 밭을 일구는 농부의 모습에 숙연해진다.
시 화랑포 가는 길의 아름다운 자연 모습이다.
인적 드문 길을 아내와 걸으며 일군 밭을 보며 유채밭이다. 메밀꽃 밭이다. 티격댔다.
메밀꽃으로 보기에 키가 너무 적었다.
봉평에서 본 메밀꽃보다 키가 절반수준이다.
그러나 아내의 판정승...
유채밭을 금년에 처음으로 메밀꽃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화랑포 해안의 모습
화랑포 새땅끝에서 바라본 석양 1.
멀리 보이는 섬이 보길도와 노화도이다.
화랑포 새땅끝에서 바라본 석양 2.
화랑포 새땅끝에서 바라본 석양 3.
석양을 뒤로하고 새땅끝을 돌아 나섰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여 이내 어두웠다.
아내와 인적없는 산길을 돌아 나오는 길에 뜻밖에 소형 화물차가 다가온다.
화랑포에 세워두었던 차량이다.
이곳은 막다른 길이라 나오는 차량을 만나리라 기대할 수 없었다.
당리에 사시는 분께서 어린 아들과 바다낚시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나를 발견하고 차를 세우신다.
당리 서편제 촬영지 바로 앞에 사시는 분이시다.
돌아 나오는 길은 편히 나오는 행운을 잡았다.
이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