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도 고규철 선생님은 1942년 1월 21일 청주시 수동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유년시절 가정형편은 넉넉하진 않았지만, 매사에 엄격한 부친 고일환 님과 자식사랑에 남달랐던 김동각 여사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당당하게 청소년 시절을 보내었다. 할아버지께서 어린 선생님을 데리고 늘 붕어 낚시를 자주 하였다고 한다. 조부께서는 잡은 붕어를 고아서 주거나 매운탕을 끓여서 선생님에게 보약처럼 드시게 했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선생님의 강철 같은 체력과 남들보다 월등히 건강하였던 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 조부의 몸보신에서 온 것이 아닌가 싶다.
선생님은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인정이 많고, 악의가 없었으며, 평소 싫은 소리를 잘 안하고 하더라도 바로 보듬어주어 뒤끝이 없었다. 제자들에게는 아주 엄격하여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직선적으로 혼쭐나게 나무랐지만, 밖으론 아주 세심한 배려와 온화하고 정을 많이 주어 전국 검도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선생님은 집안일보다는 검도 일을, 가족들보다는 검도제자와 검도인들을 더 가까이 하였다. 생을 마치는 그 순간까지도 일생을 검도와 검도인을 위해서 살았다. 이 역시 내 것보다는 다른 사람을 더 중히 여기는 충청도 선비정신으로 반듯한 집안의 가풍에서 연유한 것 같다.
그래도 선생님은 자녀들이 올곧고 바르게 성장해준 것에 대하여 선생님께서 못 다한 자식사랑을 사모님이 애쓰신 덕에 모두 잘 되었다고 고마움을 표하였고, 못난 남편과 아빠를 위하여 늘 기도해주는 사모님과 아이들에게 늘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씀하였으며 자랑스러워하였다.
선생님은 청주기계공고 1학년(1957년) 시절에 처음 검도를 접하게 된다. 그 당시 흔하지도, 인기도 없었던 검도를 배우게 된 것은 서양의 기사도를 소재로 한 '스카라무슈'(Scaramouche, 1952)라는 영화 중 '펜싱' 장면에 넋이 빠졌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검도를 수련할 수 있었던 곳은 청주경찰서 '상무관'으로, 고(故) 이교신 선생님(충북 초대 지도사범)의 지도하에 검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시절 검도를 하는 사람은 '경찰관'이나 '학생' 이 전부였다고 한다. 경찰관으로는 김승태, 김유섭, 장인철, 조병설, 이상춘 선생님이 계셨고, 학생 선수로는 오세억. 오세철, 함태식, 오방사, 박상호 등 선배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새로 입문한 학생들은 선배들이 따뜻하고 자상하게 한가족같이 지도해주는 것이 전통이 되었으며, 선·후배의 정(情)이 돈독하였고, 이것이 충북 검도인의 특징이 되었다고 선생님은 늘 말씀하였다.
선생님들이나 선배들의 지도와 격려로 입문 5개월 만에 부산에서 개최되는 제38회 전국체육대회에 검도부 후보로 데려가겠다는 이교신 선생님의 말씀에 너무도 좋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합 가는 날 제일 먼저 가방을 들고 상무관에 도착하니 아무도 오질 않았고, 예산부족으로 데려가지 못하는 소식에 북받치는 설움과 절망속에서도 다음날부터 아무도 없는 텅 빈 도장에서 미친 사람처럼 하루 종일 죽도를 들고 연습하였다고 한다. 그 이튿날 또 이튿날, 대회가 끝나서 선수들이 올 때까지 혼자서 죽기살기로 연습하며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다음부터 후보는 필요 없다. 정선수로 뛸 것 이다."하고 수없이 되새겼으며,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날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을 해서 그 다음해 제39회 전국체전을 시작으로 29년을 연속으로 전국체전에 출전하는 대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30년 연속출전을 하고 싶었지만, 당시 서정학 선생님께서 8단 승단을 포기하려면 출전하라는 말씀으로 전국체전 연속출전 30년 중 1년을 채우지 못한 채 아쉬움을 많이 남기고 1989년 10월 1일 8단으로 승단, 1997년 10월 1일 범사 칭호를 수칭하였다.
충북체육회 60년 창립일 기념식장에서 이원종 충청북도 도지사께서 선생님의 후보선수 이야기를 듣고, "이 진실한 사건이야말로 충북체육의 일부분이 아니냐!"며 감탄하고, "학생 신분으로 얼마나 좌절감이 심했겠느냐!"라며 그 자리에서 당시 기차요금에 해당하는 상징적인 격려금 1만원을 선생님에게 준 일화가 충북체육회 일화로 남아 있다.
선생님은 1962년 청주대학교 3학년 시절 체육부장일 때 주위의 권유로 2개월의 연습기간을 거쳐 국회의사당에서 개최되었던 제2회 전국 신인 펜싱선수권대회에 샤브르에 출전하여 당당히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당시 청주대 체육과 권영원 교수와 심판진들은 검도에서 펜싱으로 전향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이미 검도의 길(당시 검도 3단)로 마음을 굳힌 선생님께서는 정중히 사양하였다고 한다. 선생님의 전국 신인 펜싱선수권대회 개인전 준우승을 계기로 청주대 펜싱부가 창단되어 현재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청주대 및 충북 펜싱의 효시는 고규철 선생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 싶다.
선생님의 검도 실력은 자타가 인정할 것이다. 가장 전성기는 1979년도 제4회 및 제5회 세계검도 선수권대회 국가대표 시절이며, 특히 제4회 삿포로 세계검도선수권대회에서 전일본선수권대회 우승자인 오노 선수와 16강 경기에서 빠른 움직임을 통해 상대를 우왕좌왕 만들어 2:0으로 승리하여 일본 및 세계 검도인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하였다. 선생님께서는 일본식의 검도가 아닌 한국식 검도, 정적인 검도가 아닌 동적인 검도를 추구하면서 선 체력, 후(後) 기술을 강조하였다. 다음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복도를 지나가는데 오노 선수와 마주치게 되어 미안하다." 하며 악수를 청하자 손을 뿌리치는 것을 오노 선수의 두 손을 붙들고 흔들었다는 일화는 많은 검도인은 알고 있을 것이다. 가장 강한 자와 맞서서 그것도 일본 땅에서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이긴 그 순간을 선생님은 평생을 두고 영원히 잊지 못할 날이었다고 말씀하였다.
그 해에 제1회 대통령 하사기 전국검도선수권 대회 개인전 우승으로 선수로서는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다. 전국체전 40회, 41회, 42회 대회에 연속 3연승, 45회, 47회, 48회, 49회 전국체전 일반부 우승, 전국 단별선수권대회 3단부, 4단부, 5단부, 6단부 개인전 우승, 그리고 국가대표 선발 및 세계 선수권대회 준준결승에서의 석패의 아쉬움 등 29년간의 선수생활은 한마디로 감동의 연속이었다.
그 후 제6회 트레이너, 제7회, 제8회 코치, 제9회 여자부 감독, 제10회 남자부 감독, 제14회 남자부 감독으로 참여하여 한국검도의 역사를 몸으로 직접 체험한 선생님은 그 중 일본 교토에서 개최된 제10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에서 단체전 결승에서 주장전까지 대접전을 벌인 끝에 아쉽게 준우승을 차지하였으며, 그 대회에서 제자인 박상섭(현 청주시청 감독)이 9년 만에, 그것도 일본 적지에서 개인전 3위를 차지하여 큰 성적을 거두었다. 선생님의 강인한 승부사 기질과 지략, 선수들의 강인한 투지가 이뤄낸 합작품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난날 선수로서 시합장에 서면 40대에 무슨 선수란 말인가, 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래 묵을수록 맛이 나는 포도주처럼 검도도 연륜이 깊어질수록 도(道)의 그 깊은 경지가 트이는 운동이라고 늘 선생님은 말씀하시곤 하였다. 선생님은 운동이 끝나면, 검도는 목이 타는 운동 이라면서 술 한 잔을 기분 좋게 좋아하였고, 술 한 잔 마시면서 검도와 인생뿐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많은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소주는 화학주야. 건강에 좋지 않아. 가능하면 맥주나 양주를 마셔라."라고 하였다. 약주를 드시면서 선배, 제자들과 같이 어울려 노래를 즐겨 불렀으며, 배호, 문주란, 오기택 가수의 노래를 좋아하였다. 그 중 가장 좋아 하는 애창곡은 돌아가는 삼각지며, 매혹의 저음으로 불러주는 주옥같은 음성이 지금도 생생한데, 이제 더 이상 그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 현실이니 참으로 세월이 믿어지지 않는다.
선생님이 1969년 단양여자중학교에서 교편을 시작으로 2004년 서원중학교 교장선생님으로 36년간의 공직자로서 삶을 마칠 때까지, 그 누구보다도 정열과 혼을 다하여 인생을 멋지게 살았다. 정년 퇴임하는 그 순간까지도 검도와 인연을 함께하였고, 바로 문무겸전의 삶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부임하는 곳마다 검도부를 창단하고, 아낌없는 지도와 후원으로 창단되는 학교마다 검도의 명문교가 되었다. 부강중학교, 주성중학교, 서원중학교에서의 검도부 창단이 현재 충북검도의 근간이 되었으며, 그 명맥이 부강공고, 청주농고, 충북공고로 이어져 충북검도의 역사가 되어버렸고, 각 학교에서 배운 선수들이 현재 충북 검도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선생님이 서원중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임하는 날, 하늘도 얼마나 감동하고 서운했으면 3월 봄날에 때 아닌 50년만의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다. 청주뿐만 아니라 전국의 교통이 마비가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축하해주러 오는 청주 손님들과 제자들도 10분 거리를 3시간 동안 걸어서 행사에 참석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축하하러 오다가 고속도로가 막혀서 그냥 돌아간 선생님들도 많이 있었다. 우리 선생님의 정년퇴임을 하늘도 감동하였는지 하늘에 구멍이 났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선생님께서는 1970년도부터 오후에는 매일같이 청주 상무관으로 나와 중·고·대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전국체전 일반부 선수로 출전하곤 하였다. 늘 하던 말씀이 "검도는 검도를 하는 사람이 주인이다. 검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검도인이 아니다." 하면서, 직장과 검도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주저없이 검도를 선택하겠다고 말씀하곤 하였다. 후배 검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며, 검 도에 대한 애정은 그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을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충북검도 행사시 이종림 회장님과 전영술 선생님에 대한 예찬론을 자주 피력하였다. 이종림 회장께서는 검도의 논리에서 한국과 일본 검도인들이 꼼짝을 못한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의 어느 지역을 가도,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모르는 게 없으신 팔방미인이라고 하였으며, 이종림 현) 회장님을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였다. 또한 전영술 선생님은 "한국에서 가장 검도기술이 좋고, 고단자 제자들을 가장 많이 배출하여서 부럽다"고 늘상 말씀하곤 하였다.
지난 2018년 인천 세계검도선수권 대회장에 불편한 몸으로 직접 참석하였을 때 이종림 회장님께서 참 잘 왔다고 하면서 건강해야 한다고 덕담을 나누며 선생님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두 분이 손을 마주잡으며 눈가에 맺히는 잔잔한 모습에서 지난날 어렵고 힘들었던 환경과 세월 속에서도 현재의 대한검도회를 반듯하게 일구어낸 우정의 역사가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듯 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사범들 모두는 감동의 한 순간이었다.
선생님의 제자로는 김국환(8단 범사), 이규호(8단 범사), 오정영(8단 교사 전(前) 법무연수원 검도교수), 김영학(7단 교사, 용인대 교수), 민창기 (7단 교사. 전(前) 공군사관학교 검도교수), 김민환(8단 교사, 유원대 교수), 이상문(7단 교사, 한국중고등학교 검도연맹 전무), 배명환(8단 교사. 대한검도회 이사), 박종철(7단 교사. 칠금중학교 감독), 강태원 (8단 교사, 전(前) 충북도의원), 조재성(7단 교사. 괴산군청 감독), 김재중(7단 교사. 청주농고 감독), 박상섭(7단 교사. 청주시청 감독), 임근배(7단 교사. 충남체육회 감독), 강용만, 박홍범, 이준규, 민병주, 김대성 등 수많은 검도 제자들을 양성하였으며, 이외에도 대한검도회 이사 유재봉, 윤경중, 강준희, 김태영, 신학경, 김은중, 김건일, 채희준, 김영배, 정정택 등이 있다.
국가대표 충북 출신 제자로는 김건일(제1회 청소년 세계검도대회 출전), 이춘복(제5회 세계검도 선수권대회 단체 3위), 조재성(제8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 개인전 출전), 박상섭(제9회~제12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 단체 2위, 제10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 개인 3위), 임근배(제12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 개인 3위) 감독이 있다.
선생님께서는 강습회 때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호국의 정신과 인격완성의 길을 심어주는 무도야말로 검도라고 강조하였다. 후진 양성의 길이 이 땅에 정의를 구현하는 또 다른 일임을 잊지 말라고도 말씀하였다.
검도 지도자의 길은 선수생활이나 그 어떤 길보다 더 어렵고 힘든 길이며, 그 길은 외로운 길이지만 검도인이 가야 할 의로운 길이요. 사명감이라고 한결같이 강조하였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울리고 있는 것만 같다.
충북검도회에서는 충북검도의 발전과 대한검도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노력한 선생님의 검도사랑을 기리기 위해 생존해 계시던 2017년 3월 3.1절기념 회장기 검도대회 겸 제1회 일도(道) 검도대회를 개최하였고 , 2020년 제4회 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선생님께서는 2020년 1월 4일(토) 00:19분 만 79세로 운명하시고, 1월 6일(월) 화장 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연청로 소재 선영에서 전국 검도인들과 유가족, 충북체육 및 충북검도인들의 비통한 애도 속에서 충북검도회장으로 엄수되고 영면에 들어가셨다.
그 동안 전국 검도인들의 많은 관심과 협조 속에 마지막 편히 모실 수 있게끔 열과 성으로 도와주심에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전국에서 보내주신 선생님들과 사범님들의 따뜻한 정성과 뜻을 모아 향후 일도(道)장학회를 설립하여 운영할 계획으로 있다. 특히 선생님 영면 이후 이종림 대한검도회 회장님께서 더 많은 애정과 열정을 쏟아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끝으로 선생님의 일생에 대한 수 많은 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이유로 미리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부족하나마 선생님을 그리워 하며 글을 쓴다는 것이 몹시 부끄럽고 죄송할 따름이다. 많이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넓은 관용을 베풀어 주시고, 이 글을 보는 모든 분들에게 충북검도인의 마음을 담아 고맙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린다.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오직 대한민국 검도발전을 위하여 수호신처럼 항상 돌보아주고 지켜주실 줄 믿으며, 불꽃처럼 정열적으로 살다 하늘나라에 가신 우리 선생님의 평안한 안식을 기원한다.
** 출처 대한검도회 2020년 여름호 발행통권 제 124호 "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