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지순례.......
순례의 여정은 구세주의 발자취를 따르며 지나온 삶들을 회상하고, 자신의 복음화로 진리를 따라서 오늘을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빛바랜 순례사진들을 다시 보면서 진지한 성찰의 여정을 시작하며 주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이미 순례를 다녀오신 분들에게는 회상을 통한 자신의 복음화에 도움이 되고, 다녀오시지 않으신 분들에게는 참고자료가 되면 좋겠습니다.
★ 마산교구성지5. 순교복자 윤봉문(尹鳳文) 요셉 성지
* 위치 : 경상남도 거제시 지세포3길 69-22
♥ 순교복자 윤봉문 요셉(1852~1888년)
* 요약
[윤봉문 요셉 순교복자. 거제도 진목정(眞木亭, 현 玉浦)에서 윤사우(尹仕佑)의 2남으로 출생. 거제의 사도(使徒)로 형 경문(景文) 베드로와 함께 회장직을 맡아 교우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며 전교에 힘쓰는 한편 열심히 수계하였다. 1888년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가 판공성사(判功聖事)를 주기 위해 거제를 방문하자 자신이 가르치던 예비자 15명을 영세시켰다. 로베르 신부가 거제도를 떠난 지 약 한 달 뒤, 진수부(陳壽富), 주남이(朱南伊), 한상필(韓祥弼) 등과 함께 체포되어 매와 대창으로 고문을 당했으나 홀로 굴복하지 않자 통영(統營)으로 압송되었고, 그 곳에서 다시 진주(晋州)로 이송되어 2월 20일(음) 진주옥에서 교살(絞殺)되어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진주의 비라실[長在里]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유족들에 의해 거제도 옥포의 족박골(足泊谷) 산에 이장되었고, 2013년 4월 20일 지금의 지세포 순교복자 윤봉문 성지에 봉안되었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 상세내용
거제도의 장승포와 옥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몸을 누이고 있었던 순교 복자 윤봉문(尹鳳文, 1852-1888년) 요셉은 초기 한국 교회의 박해가 얼마나 극심하고 광범위하게 일어났었는지를 후손들에게 전해 준다.
거제 옥포지역에 복음이 전래된 시기가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1801년 신유박해의 영향으로 두 명의 신자가 거제도로 귀양 왔다는 사실만이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 하나는 ‘백서’(帛書)로 유명한 황사영의 모친 이윤혜이다. 기록에 의하면 황사영의 처 정난주(본명 정명련) 마리아는 제주도로, 아들 경한은 추자도로 그리고 모친 이윤혜는 거제도로 귀양을 떠났다. 하지만 이윤혜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또 한 사람은 1801년 전주 감영에서 순교한 유항검의 막내아들 유일석이다. 유항검의 부인 신희와 큰아들 유중철, 며느리 이순이, 차남 유문석은 순교했고, 당시 9살 딸 유섬이는 거제도 관비로 유배되고 6살 아들 유일석은 흑산도로 유배, 3살 아들 유일문은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신유박해로 맺어진 거제도와 천주교의 인연은 병인박해를 지나면서 선교로 이어졌다. 복음의 씨앗이 처음으로 거제도에 떨어진 것은 병인박해 직전으로 리델(Ridel, 李福明) 신부와 복사였던 순교 복자 구한선(具漢善) 타대오가 거제도 전교를 위해 다녀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병인박해 중인 1868년경 경상북도 영일군 기계면 지촌리가 고향인 윤사우(尹仕佑, 스타니슬라오)가 거제도로 들어왔다. 그는 할머니의 입교로 가족 모두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윤사우의 가족은 양산 대청(현 부산시 기장면)에 숨어살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신앙생활이 비교적 자유로운 대마도로 피신할 목적으로 거제도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거제도에서 버드내[柳洞內, 현재 柳湖里], 박개[外浦], 덕개[德浦] 등을 거쳐 진목정(榛木亭, 현 거제시 옥포 2동 국산)에 정착한 후 활발한 전교 활동을 펼쳤다.
윤사우는 날품팔이와 필묵 행상을 하며 몰래 신앙생활을 하던 중 옥포에서 동수(洞首)로 있던 진진부(陣進富)를 알게 되어 열심히 권면하여 입교시켰다. 신자가 된 진진부 요한은 윤사우의 둘째 아들인 윤봉문 요셉을 사위로 맞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다. 윤봉문과 부인 진순악(陳順岳) 아녜스 사이에서 아들 학송(學松) 루카와 딸 송악(松岳) 카타리나가 태어났다.
1852년 경주 인근에서 윤사우와 막달레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윤봉문 요셉은 나중에 부친이 함안 지역으로 가서 정착했지만 형 윤경문 베드로와 함께 거제도에 계속 남았다. 그는 ‘거제의 사도’로서 형과 함께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에 힘쓰는 한편 자신의 수계(守戒)에도 열심이었다. 1887년 겨울 병인박해 후 처음으로 당시 대구 본당 초대주임이었던 로베르(Robert, 金保綠) 신부가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거제도를 방문했을 때 윤봉문은 로베르 신부를 안내하고 교리교육과 공소예절을 도왔다. 로베르 신부는 그를 회장으로 임명했다. 그 해 거제도에서는 윤씨 형제가 가르친 15명의 어른이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
그런데 로베르 신부가 거제도를 떠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이듬해 봄 거제도에서 박해가 일어났다. 당시는 한불수호조약으로 인해 공적인 박해가 끝났지만 지방 일부에서는 사사로운 탄압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박해는 통영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를 체포하여 개인적인 탐욕을 채우려고 일으킨 것이었다. 이때 윤봉문은 다른 교우 두 명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그 혼자만 통영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하지만 대담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비열하게 자유를 얻느니 감옥이 더 낫다며 배교를 거부했다. 그는 몸값으로 100냥을 내라는 요구를 거절했음에도 다행히 풀려날 수 있었다. 그 후 이웃에 살던 잔반(殘班) 하나가 돈을 갈취하려고 그를 잡아 돈을 요구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포졸들에 의해 읍의 진영으로 이송되었다. 80냥을 주면 풀어주고 새 신자들이 평온히 살도록 해주겠다는 말로 유혹해 할 수 없이 돈을 주고 풀려났다. 그러나 얼마 후 부사의 체포령을 갖고 포졸들이 다시 왔고, 이에 형 경문이 관아로 끌려가 곤장을 맞고 이틀 후 읍 밖으로 쫓겨났다. 그러자 처음에 윤봉문을 체포하고도 돈을 빼앗지 못한 통영 관리가 영장을 찾아가 윤씨 형제에 대한 체포령을 받아냈다. 결국 윤봉문은 다른 두 명의 신자와 외교인 몇 명과 함께 체포되었고, 가옥은 약탈당하고 소 22마리도 빼앗겼다. 영장 앞에 끌려간 그는 천주교인임을 고백하며 외교인은 풀어주도록 요청했다. 수차례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내 배교하지 않자 영장은 대구 관찰사로부터 “천주교인은 모두 도둑들이니 진주로 보내어 처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진주로 끌려가는 동안 굵은 칡으로 발뒤꿈치를 꿰어 살이 뭉개지는 고통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는 큰 소리로 천주십계와 성교사규(聖敎四規)를 외웠다. 결국 1888년 4월 1일(음력 2월 20일) 진주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순교자의 시신은 진주 비라실[長在里] 공소회장이 거두어 공소 뒷산에 안장했다. 이 소식을 들은 로베르 신부는 교구장에게 이렇게 보고하였다. “저는 운 좋게도 이 거룩한 순교자를 친밀하게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열심한 교우였으며, 비신자들의 회개를 위한 열성이 가득하였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벌써 그에게 눈길을 주어 여러 섬에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서 저를 돕게 하려고 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제게서 빼앗아 가셨지만, 그것은 당신의 충실한 벗들에게만 주시는 영광을 그에게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1898년 옥포 교우이며 부산 본당 우도(Oudot, 吳保綠) 신부의 복사로 있던 성낙진 바오로는 유족들과 함께 순교자의 유해를 진주에서 거제도로 모셔와 진목정 족박골(足泊谷)의 선산에 안장했다. 그 후 진목정의 외교인들은 천주학쟁이가 죽은 동네 이름이라 해서 ‘진목정’을 ‘국산’(菊山)으로 고쳤고, 후에는 지금의 옥포(玉浦)로 다시 변경되었다.
거제도의 신자들은 1978년 9월 24일 거제의 사도 윤봉문 요셉 순교 90주년을 맞이하여 순교자의 무덤에 순교 기념비를 세웠다. 이렇듯 그는 자신의 피와 땀으로 거제도에 믿음의 씨앗을 뿌렸고 오늘의 신앙인들이 그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거제ㆍ통영 지역의 본당들은 윤봉문 순교자에 대한 현양 사업과 함께 묘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윤봉문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 접근성이 떨어지는 협소한 산중인 관계로 순례자들이 찾기 어렵고, 후손들의 선산이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가 묘소를 이장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마산교구 거제도의 성당들은 2000년 9월 순교자의 묘소를 이장하기 위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장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여러 후보지를 검토하고 또 여러 이유로 유보되는 과정을 반복하다가 일운면 지세포리가 선정되었다. 이 부지는 본래 서울대교구가 신협 연수원으로 사용하던 곳으로 마산교구에 기증한 곳이었다. 진입로가 없어 포기했던 곳이었지만 인근 농로를 매입해 시의 도움을 받아 진입로를 만들면서 성지 조성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거제도의 신자들은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탓에 대나무와 편백나무로 뒤덮인 성지 조성 부지를 찾아 직접 나무를 베고 길을 만들며 헌신적인 봉사를 계속하였다. 그 결과 울창한 숲 사이로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 길을 우선 조성했고, 중앙 부분에 순교자 현양비도 건립하였다. 순교자 현양비는 죄인들에게 씌우던 형틀인 칼을 형상화한 것이다.
마산교구는 순교자 유해 이장에 관한 거제지구 사제단과 신자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교구장 교령과 훈령을 발표하고 2013년 4월 20일 순교자 유해를 옥포에서 지세포리로 이장하여 순교자 현양비 뒤편에 모셨다. 이장을 위한 발굴 작업을 통해 온전히 보존된 순교자의 유골을 확인하고, 의학전문가로부터 오른쪽 골반에 장독(杖毒)에 의한 골절로 추정되는 상처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순교자 윤봉문 요셉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마산교구는 2015년 12월 30일부터 거제지구 성지전담 신부님을 발령하여 지세포리의 순교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에 순교자 기념성당과 교육관, 사제관과 수녀원, 피정의 집과 식당 등을 건립하여 누구나 쉽게 찾아와 순교자의 영성을 본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개발해 나가고 있다. [자료출처 : 천주교마산교구청]
* 2016년 3월 비 올듯이 흐렸던 날 전화기에 담았던 지세포의 순교복자 윤봉문 요셉성지 .......
* 경당
* 기도방
* 대나무 숲길과 십자가의 길
* 죄인들에게 씌우던 형틀인 칼을 형상화한 순교자 현양비. 하단 부분에 순교복자 윤봉문 요셉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 야외 제대
♧ 지세포리로 이장하기 전 옥포의 산중에 있었던 거제의 사도 윤봉문 요셉 순교자의 묘소 / 2013년 4월 20일 순교자의 유해가 이곳에서 지세포로 이장되었다.
~ 빛바랜 사진 : 2006년 12월 ME쉘링팀들과 윤봉문 요셉 순교자의 옛묘소를 찾아서........
★ 거제지구의 다른 성지들.......
1. 순교자 유항검의 딸 유섬이 묘소 : 경상남도 거제시 거제면 내간리 산 53-2번지 송골마을
2. 순교자 김기량펠릭스베드로 순교터 : 게섬(현 경남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체포, 통제사인 세병관 감옥 순교터(통영)
* 순교자 김기량펠릭스베드로의 현양비는 제주도에 있음
★ 순교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 인근에 천주교 신자 노부부의 삶터 공곶이가 있다. 천주교순례길로 연결되는 곳이다.
* (2016년 3월 20일 사진)
수선화가 피는 바닷가에서
봄날은 익어가고 있다.
거룻배의 궁둥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공곶이라고 불리는 그 길가에
순례길을 함께 걷는 이들의 이야기가 꽃 피고 있다.
★ 거제 지세포성당
* 2007년 1월 27일
결혼 전의 두 아들과 함께
가족들 거제나들이 갔을 때
지세포성당에 잠시 들렀는데......
아래 사진의 신부님이 아마도
지금 산청필립보주임신부님?
* 2016년 3월 지세포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