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짜 : 2002년 2월 27일
구 간 : 우물목고개 ~ 서운산 ~ 옥정현
날 씨 : 맑음
도상거리 : 21.7km, 산행시간 : 7시간 40분
뭐니뭐니해도 봄은 모든 만물이 눈을 뜨는 계절이다. 겨울의 죽음과도 같던 침묵을 깨고 일어나 기지개를 켜는 계절이기에 봄을 영어로 ‘Spring’이라고 한다. ‘Spring’이란 ‘튕겨 오른다’, ‘터져 나오게 한다’, ‘뛰어 넘다’, ‘터뜨리다’ 등의 뜻을 가진 낱말로, 원래 온천물이 땅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것을 생각한데서 온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Spring’이라 할 때 그것은 청춘, 탄력, 기운, 원동력, 근원, 샘 등의 뜻으로 해석된다.
겨울 내내 입었던 두꺼운 옷들을 벗어버린다. 이제 금북정맥도 막바지, 오늘이 고비인 것 같다. 우물목고개에서 옥정현까지, 도상거리가 20km가 넘는 당일 종주로는 조금 어려운 구간이다.
09시 40분 20여일 만에 다시 만나는 우물목고개에서 동북방향으로 오르막으로 시작되는 정맥은 철탑이 서있는 산판길을 따라 오르내림이 이어지다 10분 후 만나는 좌우로 내려설 수 있는 십자로 안부를 통과하고 이어 산판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정맥 날 등으로 오른다.
09시 54분 참나무 숲을 뚫고 긴 오르막으로 줄기차게 올라선 곳이 공터가 있는 480봉이다. 이정표(유성농장:2.5km, 우물목고개:1.5km, 위례산:0.9km)가 서있다. 지난번 내려섰던 성거산의 시설물, 부천이 집이라는 친절했던 하사관이 생각난다. 두충차도 좋았었지... 정맥은 왼쪽(북)으로 한차례 뚝 떨어지는데 겨울이 봄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기 싫은지 빙판길이 정맥꾼들의 발목을 붙잡는다.
바위지대를 지나고 이정표(우물목고개:2.2km, 군단이:2.1 km, 위례산:230m)가 서있는 안부에 내려선다. 불청객에 놀란 청설모 한 마리가 곡예를 하듯 이 나무 저 나무를 오르내리고 있고, 3분 가량 오른쪽으로 틀며 올라선 곳이 위례산이다.
10시 15분 비스듬히 세운 표지석이 태조산, 성거산에 것과 똑 같은데 참나무 숲과 억새풀이 무성한 넓은 공터에는 천안 성거산 위례성지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524m의 위례산은 천안시 입장면과 북면 경게에 있는 산으로 토축의 위례성지는 둘레 1,690척 높이 8척이라고 한다. 백제 시조 온조왕이 고구려로부터 남하여 처음 건국 도읍한 곳이다. 이때 따라 온 신하가 오간, 마려 등 열 명의 신하가 되므로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가 BC 14년에 한산으로 옮겨 백제가 되었다 한다. 가끔 오색구름이 끼는 산이라 신산이라고도 부른다.
성내에는 성지가 있고 큰 우물과 돌구유가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위례성우물은 위례성 안에 있던 백제시조 온조왕이 밤이면 용이 되어 우물로 들어가서 부여 백마강에서 놀다가 날이 밝으면 이 우물로 나와서 왕 노릇하다가 처남의 꾀임에 빠져 죽었다 다나...
구수바위(돌구유)는 돌을 다듬어 만든 것이 구유처럼 되었는데 백제 온조왕이 사용하던 것이라 하며 비 받침이라고도 하고 반쪽밖에 없는데 또 반쪽은 굴러 내려 그 밑 고랑에 묻혔다고 한다.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 할 당시 시장이 섰다고 하는데 장생이 또는 새 절터라고도 하며 군단이 서쪽 골 위에 있으며 절이 있었고 장승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이정표(가로리: 3.3km, 우물목고개: 2.4km, 부수문이고개: 2.4km)가 서있는 정상에서 정맥은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며 조금 올라선 곳에 작은 돌탑 두 개와 삼각점(44, 재설 78.10 건설부)을 확인할 수 있다. 이어지는 정맥은 좁은 날 등으로 내려서다 바위지대를 넘으면서 참나무숲길이 이어진다.
10시 25분 능선분기점이다. 직선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뚝 떨어지다 안부에 내려서고 밋밋한 봉을 넘고 다시 봉을 우회하며 이어나간다. 참나무 숲 사이로 진달래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솔잎과 낙엽이 어우러진 정맥길, 완만하고 뚜렷한 길은 산판길이 나타나고 내리막길은 삼거리 갈림길에서 산판길을 따르다가 왼쪽으로 잡목 숲으로 들어선다.
10시 50분 691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부수문이고개에 내려선다. 부소문령 이라고도 하는 이 고개는 입장면 양대리에서 북면 운용리로 넘나들던 고개로 백제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했을 때 이곳에 부소문을 달았다고 하며 소나무산 고개의 뜻을 지녔다고 한다.
도로를 가로지르고 이어 올라선 곳엔 통신시설이 나타나고, 오른쪽으로 틀며 잡목 숲으로 고개를 숙이며 뚫고 나간다. 묘지를 끼고 올라서는 정맥은 잡목이 대단하다. 진달래와 싸리나무가 이어지는 정맥길을 달리던 김수남씨가 땅 한 평 사고 훌훌 털며 일어나는데 한쪽에선 새들이 시끄럽게 소란을 피며 나르고 있다.
11시 12분 가파르게 오르다가 방향을 오른쪽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던 정맥이 긴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선 곳에서 헬기장을 만나고, 다시 2분 뒤 조금 더 올라선 458.8봉에서 삼각점(314 78. 10 건설부 재설)을 확인한다. 참나무와 싸리나무가 무성하여 조망은 신통치 않다. 왼쪽으로 내려서던 정맥길이 6분 뒤 만나는 능선분기점에서 왼쪽으로 우측 아래로 넓은 잔디밭에 묘지를 보면 완만하게 이어나간다. 좌측 아래로 엽돈재로 오르는 도로가 보인다. 엽돈재는 예전 도적 떼들이 지나는 길손들의 엽전만 빼앗았다고 엽돈재라나... 믿거나 말거나...
한차례 단풍나무 군락을 통과하는데 오늘따라 산새들의 싸움이 대단하다. 정말이지 부럽다. 저렇게 다시 사랑이나 한 번 해보았으면... 좁은 날 등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는 정맥엔 사각사각 낙엽 밟는 소리가 정겹고, 우측 아랫마을에서는 컹컹 컹 개 짖는 소리... 연이어 봉을 넘다가 왼쪽으로 틀며 가파른 경사길로 떨어진다.
11시 35분 충청남북도를 가르는 34번 국도가 지나는 엽돈재에 내려선다. 해발 323m의 엽돈재에는 ‘아름다운 충남으로 어서 오세요. 열린 미래 희망찬 충복’ ‘환영합니다. 여기는 천안시입니다.’ 어떻든 환영받으며 내려선 곳엔 ‘생거진천"이라고 음각된 표석이 서있다. 도로를 가로지른다 그리고 왼쪽으로 한차례 길 아닌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오름길, 숨을 몰아쉬며 날 등에 올라서고 이어 오른쪽으로 틀며 아름드리 참나무와 소나무사이로 완만하게 이어나간다.
11시 56분 몇 개월 동안 같이 해오던 충청남도와 헤어진다. 순간 지나온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충청남도, 힘은 들었어도 들대로 정이 들었는데... 그리고 한발은 경기도 땅을 밟으며 연이어 봉을 넘다가 능선분기점에서 왼쪽으로 팍 꺾으면서 3분 뒤 또 능선분기점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1분 뒤 왼쪽으로 그리고 만나는 십자로 안부를 통과하며 오름길은 단풍나무 군락이다. 금남, 금남호남정맥 종주 시에는 늘 오도균선배와 김수남씨가 동행이 되어주었는데, 오선배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오늘따라 그가 보고 싶다.
12시 05분 능선분기점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1분 뒤 왼쪽으로 내려서면서 밋밋하게 연이어 봉을 넘다보니 우측으로 소터골마을이 좌측으론 청룡저수지인가? 뿌연 하늘 덕으로 그리 밝은 모습은 아니다. 고즈넉한 정맥길, 수북히 쌓인 낙엽길, 물푸레나무군락이 이어진다. 쭉쭉 뻗은 아름드리 참나무 숲도 볼만하다.
12시 16분 능선분기점에서 왼쪽으로 내려서면서 이어지는 정맥의 오르내림, 깊은 산중 새들의 합창소리는 즐겁고, 두 군데의 하산길을 보며 이어지던 정맥이 묘지를 통과하면서 능선 홈통길을 따라 올라선 봉에는 아름드리 소나무 한 그루가 고사목이 되어 정맥길을 지키고 있다. 뒤돌아보는 지나온 능선들, 뿌연 하늘 아래지만 그래도 지나왔다는 사실만으로 친숙해 있었다.
12시 37분 한차례 가파르게 올라선 능선 상에는 좌우로 산줄기가 분기되어 흐르고 있고 정맥은 좌우 다 버리고 사면길로 내려서는데 역시 조금 내려서면은 완연한 능선 날 등이 나타나겠지 늘 그랬으니까... 그런데 뚝 떨어지는 길이 진흙밭이 되어 쭉쭉 미끄러진다. 이럴 때 미안하지만 좌우로 있는 애꿎은 나무들만 수고를 해야지...
12시 45분 450봉인 능선분기점에 올라 뒤늦게 허기를 메꾼다. 오곡밥까지 짊어지고 올라온 김수남씨 그리고 장성인 선배, 먹는 시간이 제일 행복한 것... 시간은 쉼 없이 흐른다. 어제는 저만치 멈춰있고, 오늘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그리고 또다시 내일은 어디까지 날라 가버릴까? 가슴 따듯한 불씨나 하나 안아 보았으면...
13시 10분 짐을 챙기고, 450봉인 능선분기점에서 오른쪽으로 뚝 떨어진다. 안부를 지나면서 만나는 이정표(청룡사: 2.2km, 서운산: 0.9km), 그리고 긴 오르막...
13시 24분 등산안내판이 서있는 헬기장에 올라선다. 헬기장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두 곳의 배티고개 이정표를 통과하며 2분 뒤 멈춘 곳이 군데군데 바위가 자라잡고 있는 선운산 정상이다. 546.4m 서운산 표지목이 서있고, ‘산지정화’라고 음각된 표석이 서있다. 나무에 가려 조망을 별로 지만 바위에 올라서니 황사현상인가? 뿌연 하늘 아래 자리잡고 있는 안성시 일대를 내려다 볼 수 있다.
경기도와 충청남도의 경계 지역에 위치한 서운산은 아담하고 바위도 거의 없는 유순한 산으로 청룡사와 석남사가 자리잡고 있고 서운산성등 문화유적지가 많은 곳이다. 서운산성은 서운산 꼭대기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임진왜란 때 우찬성 이었던 홍자수 대감과 서자 홍계남 장군, 생질 이덕남 장군이 이곳을 발판으로 3,000여명의 의병과 함께, 북진하는 왜군을 무찔러 전략적 요충지인 안성 고을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성의 위쪽에는 숲이 우거져 있고, 성문은 없으며, 남문과 북문 터로 추정되는 곳만 남아 있다. 경기도 기념물81호인 이 산성 안에는 높이 2m,폭 1m의 석불이 있고, 남문 아래쪽에는 약천암, 토굴암 등의 암자가 얼마 전에 세워졌으며, 남동쪽으로 1km거리에는 청룡사가 있다.
되돌아 내려오다 만나는 배티고개를 가리키는 이정표를 확인하고 왼쪽(동)으로 들어서면서 조금 올라선 곳에서 표고가 547.4m의 삼각점(진천 21, 84년 재설)을 확인한다.
13시 35분 다시 만나는 이정표(배티고개: 1.5km, 석남사: 1.3km), 정맥은 명산의 등산로답게 고속도로가 되어있다. 2분 뒤 다시 만나는 이정표(배티고개: 1.4km), 정맥은 여기서 직선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팍 꺾으며 떨어진다. 능선 곳곳에 푸른 소나무 숲, 5분 뒤 다시 정맥은 직선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또 한차례 팍 꺾으며 내려서는데 아름드리 고사목 한 그루가 애처롭다.
계곡마다 봄에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봄은 우리 곁으로 바짝 다가와 겨울을 저만큼 밀어내고 있다. 금년에는 꽃샘바람이란 단어도 잊어버렸는지 자연의 순환은 어김없다. 때가 되면 스스로 물러날 줄 아는 겸손함! 연이어 봉을 넘는다.
13시 58분 이정표(배티고개: 07km, 배티성지충정묘)가 서있는 능선분기점이다. 왼쪽으로 내려섰다 올라서니 100m 지점에 또 무명순교자의 묘지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서있고 바로 오른쪽 아래로 십자가의 묘들이 나란히 잠들어 있다.
웅덩이가 있는 봉우리를 넘고 다시 봉을 넘기 직전 정맥길은 오른쪽으로 사면길로 뚝 떨어진다. 역시 능선길에는 정맥꾼들이 다닌 흔적이 없어 자연히 정맥꾼들은 이 길을 따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만나는 절개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14시 10분 해발 330m의 배티고개에 내려선다. 동네어귀에 도래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란 말이 생겨났고 이것이 순수한 우리말로 배티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조선 영조 때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을 때 백곡을 지나다 이 마을 노인 이순곤이 이끄는 주민에게 패한 뒤 다시 안성 쪽으로 향하다 오명황이 이끄는 관군에게 진압 패전하였다는데서 패치라 불리우다 바뀌었다는 설도 있는 배티고개는 고갯마루 좌우로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도계 표지판이 서 있고,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배티성지 2km’, ‘안성시 금광면’, 경기도 안성시입니다. ‘아름다운 충북으로 어서 오세요’ 등 경기도와 충청북도를 가르는 고개임을 알 수 가있다. 백곡번영회가 세운 ‘생거백곡’이라고 음각된 표석 서있고, 우측으로 중앙컨트리클럽을 알리는 표지석을 만난 수 있다.
골프장 진입로를 따르다가 언덕을 넘으면서 왼쪽으로 능선에 붙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맥은 다시 정맥의 본성을 들어내며 잡목과의 한판 승부를 걸어야 한다. 오르고 내림이 이어진다. 우측 아래로 골프장 진입로와 나란히 이어가는 정맥길, 편한 길도 있는데 왜 능선을 고집하며 고생을 할까? 반문하며 간다.
14시 37분 통신시설과 하얀 시설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골프장 건설 당시 설치했음직한 삼각점과 비슷한 측량 점을 만나면서 한차례 가파르게 수북히 쌓인 낙엽을 가르며 올라선 곳이 헬기장이다. 이어 드넓은 중앙컨트리클럽의 골프코스가 내려다보이고, 주중인데도 한가하게 필드에 나와 골프를 즐기는 무리들...
14시 51분 홈통길에 이어 산판길를 따르다가 산판길을 버리고 올라선 봉우리에서 급사면을 떨어지다 산판길을 다시 만나고, 우측으로 골프장 클럽하우스를 내려다보며 내려선 장고개는 내리고 오름이 만만치가 않다. 내려서던 길처럼 급사면을 올라서니 시야에 송전탑이 나타난다. 장송숲 아래 잡목들이 극성을 부리고 구물망을 끼고 잠시 이어나가는 정맥길...
15시 No, 57번 송전탑을 통과한다. 다시 또 하나의 송전탑을 겨냥하며 이어나가는 솔밭길에는 금북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인 수미산악회의 파란색 리본이 자주 눈에 띈다. 두 번째 송전탑을 지나 올라선 봉우리가 고도가 430m의 능선분기점이다. 정맥은 왼쪽(북)으로 그리고 연이어 봉을 넘는다. 봄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오는 정맥길, 멀게 보이는 우뚝 솟은 밋밋한 봉까지 서서히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는 정맥능선을 확인할 수가 있다.
15시 21분 능선분기점에서 오른쪽으로 팍 꺾어야하고, 4분 뒤 왼쪽으로 다시 오른쪽으로 계속 바뀌는 정맥길은 마치 백두대간의 1000m 능선길로 착각할 정도로 울창한 장송 숲... 바위군을 통과하고 이어지는 능선길은 서서히 오른쪽으로 틀며 나가다가 올라선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꺾으며 올라선 봉우리에는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쉼터와 사각의 측점... 다시 왼쪽으로 팍 꺾으며 내려선다.
15시 55분 파란지붕의 마을들, 그리고 한동안 이어지는 오솔길, 갈 길이 바쁘지만 좀 여유를 부리며 올라선 봉우리가 넓게 자리잡고 있는 470.8봉 헬기장이다. 삼각점을 찾았지만 판독은 불가능하다. 동남쪽으로 무제산(575m)을 확인할 수가 있고, 멀리 지나온 서운산이 마치 황사 현상처럼 뿌연 하늘아래 겨우 형체만 나타난다. 송전탑이 있는 봉에서 원을 그으며 걸어온 수많은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맥은 헬기장으로 올라섰던 곳에서 곧바로 왼쪽으로 틀며 내려서야 하는데 뚝 떨어진다. 시야에 들어오는 가야할 수많은 봉우리들이 어서 오라 재촉하는 것 같다.
16시 04분 능선분기점에서 다시 왼쪽으로 팍 꺾으면서 이어나가다 보니 정맥능선이 벌목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겹겹이 쓰러져 쌓인 잘려나간 줄기와 가지들, 오랜 세월을 정맥길의 울타리가 되어주었는데 끝내는... 이리저리 고생 끝에 우측으로 천수답을 보며 십자로 안부에 내려선다. 역시 쓰러진 나무들을 피해가며 가로지르다보니 정맥길엔 통나무로 엮어 만든 간이 쉼터가 허물어져 가고 있다.
긴 오르막 능선상의 밋밋한 묘 1기가 있는 능선분기점에서 오른쪽으로 틀며 오르다 만나는 홈통길, 다시 수북히 쌓인 낙엽을 가르며 오르는 길엔 버림을 받은 나무와는 달리 죽은 나무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있다.
16시 25분 힘겹게 올라선 봉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정맥은 연이어 방향을 바꾸다가 송전탑을 겨냥하며 이어나간다. 수많은 정맥의 갈림길, 어쨌거나 지금은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는 길목이다. 새해의 각오를 다진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많은 날들을 그냥 흘러보내고 있다. 인생의 실패는 어쩌면 처음의 마음을 망각하는데 있는지 모른다.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진리와 같은데,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한번 마음의 각오를 다지며 간다.
16시 39분 잠시 허기를 채우고 물 인심도 쓴다. 잠시 내려서는 듯 하다 송전탑을 향해 힘차게 오른다. 백두대간에서 먹음만큼 간다며 먹기를 권했던 김종국 대장, 잠시 쉬며 김수남씨가 준비한 튀긴 닭고기 한 조각이 힘이 되었는지 막힘 없이 오른다. 급경사로 이어지던 오름길이 평탄해지면서 만나는 능선분기점에 서있는 송전탑, 정맥은 왼쪽으로 내려선다. 반대방향이 무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인가?... 좌측으로 우뚝 서있는 송전탑을 보며 내려서는 길이 마지막 발악하는 겨울의 흔적이 괴롭힌다. 우측으로 천룡CC의 넓은 코스 사이사이에 있는 조성된 연못과 수목의 어울림이 아름답다.
아름드리 참나무 숲, 오르내림이 이어진다. 그저 가파르지 않아서 좋고, 좌우로 깊은 계곡이 그저 좋아만 보인다. 좌측으로 송전탑과 임도를 내려다보며 오르는 수북히 쌓인 낙엽길을 올라서니 멀리 옥정현으로 오르는 도로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수남씨 이제 고생 끝” 좋아하는 수남씨...
17시 05분 409.9봉이다. 삼각점(진천 412, 79년 ?)을 확인한다. 옥정현 너머로 덕성산이 우뚝 솟아있다. 잠시 내려선 곳에서 만나는 헬기장을 통과하고, 이어 능선분기점에서 왼쪽으로 이어나간다. 발아래 임도가 정맥과 나란히 따르고 있다.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더니 순간 코앞에 닿아와 어서 오라 재촉하는 옥정현, 능선 바로 밑에 임도가 나타나며 유혹하지만 뿌리치고 능선을 고집하며 잡목을 헤치며 내려선다.
17시 15분 옥정현이다.이월고개라고도 부르는 옥정현에 싸움에서이긴 개선장군이 되어 내려선다. 안성시와 진천군을 잇는 387번 지방도가 지나는 2차선 아스팔트포장도로다. 그리고 고갯마루에 늘어 서있는 표지판과 안내판들이 경기도와 충청북도 경계가 됨을 알 수가 있다. 한복차림의 남녀 상이 보고 좋고, 그것보다도 최경섭씨가 준비한 만찬이 기다리고 있어 주린 배를 채우고 나니 부러울 게 하나도 없다. 흥에 겨운 정맥꾼들, 잊었던 옛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니 옛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생거진천(生居鎭川)
언제부터인가 진천지방에는 생거진천 사거용인 (生居鎭川死去龍仁)이라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그 하나는 옛날에 진천과 용인에 추천석이라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살고 있었다. 진천의 추천석은 양순하고 농사만 짓고 사는 사람이었던 반면 용인의 추천석은 부자로 살면서 심술이 많아 동네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다고 한다.
염라대왕이 용인의 추천석을 괘심 하게 여겨 사자(使者)로 하여금 잡아오도록 하였으나 사자가 실수로 진천의 추천석을 데려가 다시 돌려보내려 하였으나 이미 장사를 지낸 후인지라 용인의 추천석을 잡아들이고 그 시체에 진천 추천석의 영혼을 넣어 환생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서는 진천에 살고, 죽어서는 다시 환생하여 용인에서 살았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은 옛날 한 여자가 용인으로 시집을 가서 아들 낳고 단란히 살다가 남편 이 세상을 떠나자 진천으로 개가하여 아들을 낳고 평화롭게 살았다고 한다. 그 후 용인 아들이 성장하여 진천의 어머니를 모시고자 하였으나 진천의 아들이 극구 반대하여 결국 관가에 소장(訴狀)을 내었다. 관가에서 판결하기를 "너의 어머니가 살 고 있는 동안에는 진천에서 살고, 죽은 후에는 용인에서 모시고 제사도 모시도록 하라"고 하여 살아서는 진천에서 살고, 죽은 후에는 용인으로 간다는 전설인데, 위 두 가지 이야기가 모두 근거가 없는 전설일 뿐이다.
세 번째 이야기는 진천 지방은 옛날부터 평야가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산물이 풍성하고, 한해와 수해가 별로 없어 농업경영이 순조롭고 사람들의 인심이 좋아 살만한 곳이 기에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 하였고, 용인은 산세가 순후(順厚)하여 사대부가 (士大夫家)의 묘소가 많기에 사거용인(死去龍仁)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으로부터 60년전에(1932) 만든 진천군의 역사책이라 할 수 있는 상산지(常山誌) 토산(土産)편에는 조선시대 진천에서 년 간 6만여석의 쌀을 생산하였다는데, 당시 전국(全國) 통계가 단보 당 평균 수확량이 9말3되에 비해 진천은 11말5되나 수확되어 곡향(穀鄕)으로 유명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의 고적조(古蹟條)에는 동호(東胡 - 덕문이방죽)가 조선 중종조 이전부터 관개용 저수지로 활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듯 진천은 예로부터 저수지 등 농업용 관개시설이 일찍 발달 돼 있어 품질 좋은 쌀을 생산해 오는 등 산물이 풍성하였고, 또 산물이 풍성하다보니 자연 인심도 좋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니 그야말로 살기 좋은 고장이었음이 짐작되고도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