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안전밸브 용량인증제도
1999년 어느 날 KEPIC 1995년 판을 개정하여 2000년 판을 발행하는 막바지 단계에서 KEPIC 개발 위탁용역을 수행하는 한기(주)에서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였는데 그 내용은 안전밸브 용량인증 요건에 관한 것이었다.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원자력기계(KEPIC-MNX)와 일반기계(KEPIC- MGX)의 내용에 안전밸브의 용량인증 요건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하기는 용량인증제도는 ASME 대로라면 기계전문위원회 소관이었고 기계전문위원회 간사가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했어야 하겠지만 관심이 없었고 "인증"에 관한 사항이니 인증심사실에서 주관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담당할 수밖에...
나는 내용도 모르면서 안전밸브 용량인증제도를 떠맡게 되었고 서서히 업무처리를 위한 워밍업을 시작했다.
물론 시행착오와 어려움을 겪을 각오도 단단히 하였다.
안전밸브에는 원자로를 과압으로부터 보호하는 안전밸브까지도 포함되므로 원자력 규제요건의 까다로움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그 업무의 민감도에 미리 주눅이 들었다.
우선은 급한 것은, KEPIC 1995년 판에 용량인증을 <협회 지정기관>이 수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을 <협회 지정기관> 또는 <ASME 지정기관>으로 개정하여 ASME 지정기관인 NBBI(미국 보일러 및 압력용기 검사자협회>가 수행하는 안전밸브 용량인증 기능을 그대로 수용도록 함으로 해결하였다.
<협회 지정기관> 대책은 그 후에 수립을 하기로 했다..
KEPIC 2000년 판이 발행되고 나서부터 나는 안전밸브 용량인증제도를 KEPIC 내에서 해결하기위한 검토보고서를 잇달아 작성하였다.
물론 안전밸브 용량인증은 국내에서는 수행이 불가능한 기술로서 정보의 입수에도 애로사항이 많았다.
먼저 나는 국내의 안전밸브 제조업체인 삼신, 삼양알카, 신우공업과 검사기관인 한국산업공단을 차례로 방문하여 현황파악과 정보입수를 하였다.
또한 NBBI 홈페이지를 검색하여 용량인증제도의 파악에 주력하였으며 또 안전밸브 용량인증 세미나를 거듭 개최하여 그래도 국내에서 전문가를 찾아 주제발표를 하도록 하고 문제의 제기와 전문가 상호 정보교환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이렇게 용량인증제도에 관련한 업무를 추진하는 나를 임 처장님은 매우 못마땅해 하시면서 격려와 지원보다는,
- 자네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 민감한 안전밸브를 손대려 하는가?
라면 업무중단 압력을 시사하기를 거듭하셨다.
- 협회는 KEPIC에서 규정한 요건이 잘 시행되도록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나의 답변이었고 또 지론이다.
만일 전기협회가 KEPIC에서 규정하고 있는 제도요건을 눈 뜨고 바라보고만 있다면 이는 바로 직무태만이며 여건이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상황에 따라서 최선을 다할 뿐이며 평가를 받는 것은 나중 일인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한수원에서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신고리 1,2호기는 기존 원전에서 채택한 스프링타입의 원자로안전밸브(주로 미국업체가 제조)가 아닌 파일럿붙이안전밸브(PORV/주로 유럽업체가 제조)로 전환하려고 하는데 이 PORV에 KEPIC을 적용할 수 있도록 급히 조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스프링 타입의 원자로 안전밸브는 그동안 국내원전에 설치하여 사용 중인데 밸브시트에서 누설이 잦고 또 고착의 우려까지 있어서 신뢰도를 많이 상실하여 신고리 1,2호기부터는 파일럿붙이안전밸브(PORV)로 대체하려는 것이었다.
이 PORV는 계통의 내압을 이용하여 밸브변을 누르고 있다가 내압이 일정이상으로 상승하면 파일럿장치에 의해 압력이 방출되는 것인데 작동시간이 스프링타입보다 다소 긴 것이 단점이나 작동자체가 확실한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한수원의 요구사항을 성공시키면 KEPIC에 대한 무한지원하겠다는 약속까지 곁 드렸다.
더구나 고무적인 것은 스위스의 술처사가 KEPIC적용에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ASME 코드를 적용하는 것보다 차라리 고객 측의 코드인 KEPIC을 적용하는 것이 고객에 대한 친절서비스(?)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나는 머리 속으로, 술처사를 심사(최초 해외심사)하여 KEPIC 자격인증서를 발행하고 PORV(신고리 1,2호기 원자로안전밸브용)를 제작하도록 한 후 그 제품을 독일의 지멘스(프라마톰)시험실에 가지고 가서 용량인증시험을 완료하도록 한다는 국제적인 Plan을 세웠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
내가 전기협회에 와서 이런 꿈까지 꾸게 되다니...
나는 KEPIC을 담당하는 엔지니어로서 최고의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튼 한수원의 이런 요구는 나의 안전밸브용량인증 대책수립 프로젝트(?)에 탄력을 주었다.
나는 그 당시 안전밸브에 관하여 문외한으로 출발을 했지만 어느덧 나는 국내 원전에 사용될 안전밸브의 용량인증에 관하여 한수원, 국내외 메이커, 시험기관의 의견을 조율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이렇게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나는 모처럼 해외출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출장 대상기관으로 미국 NBBI와 프랑스 원자력공사(EDF) 시험실과 독일의 지멘스(프라마톰사에 합병됨)를 선정했고 거기에다 출장파트너로 결정된 윤석찬 부장의 의견을 따라 안전밸브 제조업체인 프랑스 세빔사와 스위스 술처(CCI사로 합병됨)을 더하여 5개 기관/회사로 정했다.
나는 영어실력도 부족한데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는 출장계획이었으나 윤 부장 영어실력을 믿고 출발해보자.
업무를 분담하여 나는 회의자료를 준비했고 윤 부장은 방문기관과의 섭외 및 여행일정을 맡았다. 나는 5개 기관/회사와 협의할 회의자료와 심지어 양해각서 초안까지 미리 작성해갔다.
우리의 영어실력을 고려하여 회의자료를 읽고 상대방으로부터 Yes, No로 결론을 유도할 수 있도록 철저한 준비를 하여 색지로 표지를 하여 제본까지 해두었다.
이렇게 출장준비가 무르익고 있는데 그만 전력기준처장이 바뀌는 인사발령이 있었다.
임 처장님이 정년을 한 달쯤 앞두고 근무발령이 되고 전기협회 법령연구실에 출근 중이던 김남하 위원이 전력기준처장으로 발령된 것이다.
김남하 처장님은 한기(주)에 근무시부터 KEPIC PM을 맡았으니 KEPIC에 대한 이해는 물론 우리 직원들도 피차 성격까지도 훤하게 아는 사이였다.
김 처장님은 우리의 출장계획을 보고 받고는 적극 지지하는 입장이었는데 그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어실력을 테스트 해보겠다고 벼르다가는 어느 날 나와 윤 부장을 불러 실제로 회화실력을 테스트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나는 김 처장님의 테스트에 속수무책이었고 그래도 윤 부장은 좀 낫게 답변을 했지만 김 처장님은 그 특유의 인상을 하고는 못 마땅해 하다가 내가 곱게 색깔이 있는 표지로 제본한 회의자료 5종을 내보이자 매우 만족해 하며 얼굴을 활짝 폈다.
- 아무튼 잘하고 오시오.!!
그런데 출발 하루직전에 한수원의 채송석 기술처장이 나에게 뜻하지 않은 전화를 걸어왔다.
- 박 실장, 내일 출장 가는 것을 보류하시오!
어!?
이것은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한수원 처장이 난데없이 전기협회 실장에게 출장을 가지 말라니 ? 아무 설명도 없었고 그저 <출장을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김 처장님에게 곧바로 이 사실을 보고했더니,
- 박 실장, 내가 책임을 질 테니 출장을 가서 일이나 잘보고 오시오!!
하여 나에게 힘이 되었다. 후일 김 처장님은 이일로 인하여 채송석 처장한테서 심한 질책을 받았다고 나에게 귀뜸을 해주었다.
아무려나 나와 윤 부장은 드디어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오는 해외출장을 출발하게 되었으니 가서 협의/조사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미국 보일러 및 압력용기 검사자 협회 (NBBI)
- KEPIC 소개
- KEPIC에 의한 안전밸브용량인증기관으로 지정의사 타진
- 전기협회와 상호 양해각서 체결의사 타진
- 한국에서의 ASME 코드 교육방안 협의
- 시험설비 확인
2. 프랑스 원자력공사시험실(EDF Lab.)
- KEPIC 소개
- KEPIC에 의한 안전밸브용량인증기관으로 지정의사 타진
- 전기협회와 상호 양해각서 체결의사 타진
- 시험설비 확인
3. 프랑스 세빔사(EDF에서 합동회의)
- KEPIC 소개
- 세빔사 제작 PORV 소개
- 전기협회가 유럽에 안전밸브용량인증기관을 지정시 의사 타진
- KEPIC 적용의사 및 KEPIC 자격인증서 취득 의사 타진
4. 독일 지멘스(프라마톰)사
- KEPIC 소개
- KEPIC에 의한 안전밸브용량인증기관으로 지정의사 타진
- 전기협회와 상호 양해각서 체결의사 타진
- 시험설비 확인
5. 스위스 술처(CCI)사
- KEPIC 소개
- 술처사 제작 PORV 소개
- 전기협회의 유럽 안전밸브용량인증기관 지정방안 소개
- KEPIC 적용의사 및 KEPIC 자격인증서 취득 의사 타진
이번 출장은 단순히 유람을 떠나는 것이 아니었다.
한 기관/회사에 가서 4-5시간을 머물면서 회의와 협상과 조사를 해야하는 참으로 어께가 무거운 발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