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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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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률, 정책, 투자, 평가 |
- 現 수원대 교수 - 세인종합법률 사무국장 - 각 부동산포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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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가 문을 열었습니다. 이에 맞춰 요즘 부동산 사이트나 신문지상에는 향후 부동산시장에 대한 금과옥조의 정보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양도세률 인하에서부터 지분형 주택분양제도는 어떻게 될 것이다, 오피스텔이나 상가가 주목 받을 것이고 특히 재개발이나 재건축쪽에 무게가 실릴 것이다.
대운하의 길목을 선점하라, 양도세 6억 원의 기준선은 어떻게 될 것이다, 새 정부는 안정에 기틀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규제완화는 없을 것이고 대출규제도 쉽게 완화되지 않을 것이니 무리한 투자를 조심하라는 등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귀한 정보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겨우 돈 1억 원을 쥐고 내 집 마련을 하고자 하시는 서민들께서는 우선 자신들에게 별로 해당사항이 없는 정보들이라 이게 무슨 재활용 정책인것 같기도 하고 꼭 이모작 정책인것 같기도 하여 시큰둥하고 있는 실정일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필자가 내 집을 마련했던 경험담을 엣세이식으로 기술해 보고자 합니다. 부족한 글이나마 다른 고수님들이 후속 글을 준비하는 동안 막간을 이용하여 올리는 글이오니 그리 아시고 많은 이해와 성원을 부탁 드리는 바입니다.
1부는 내 집 마련의 경험담, 2부는 부동산과 세월의비례로 나뉘어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필자는 한 폭의 산수화가 펼쳐지는 산 좋고 물 좋은 시골에서 태어났었고 또 그시골에서 올챙이와 매미를 잡으며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4키로미터 떨어진 면소재지에 있는 학교를 다녔었는데 검정고무신을 아끼려는 마음으로 언제나 맨발로 학교를 다녔습니다.
시골오지라 비행기는 가끔 볼 수 있었으나 자동차는 구경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어쩌다 괴물같은 자동차 한 대가 시골길에 먼지를 일으킬때면 달리기 잘 하는 놈은 자동차 뒤에 매달려 공차를 타보기도 했었는데 자동차에서 늘 떨어지는 바람에 지금도 무릎에 흉터가 보기 싫게 남아 있기도 합니다.
뽕밭에서 금순이와 있었던 거시기한 얘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내 집 마련에 대한 경험담을 써야 하기 때문에 집 마련했던 경험을 솔직히 털어놔야 하겠네요.
맨발로 학교를 다니다보니 맨발로 청춘을 맞이하게 됐었는데 집 없는 회원들이 이 글을 읽으신다면 아마 2년 안에 모두 집을 마련하게 되실 겁니다.
가난은 자랑이 아닌데
누가 가난을 대물림이라 했던가! 그러나 필자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그게 현실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네요. 젠장, 누구는 어렸을 때부터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사람도 있지만 필자는 타고난 복이 없었는지 중학교 때 까지도 도시락을 가지고 다닐 형편이 아니었으니 그 가난함을 말로 다 해 무엇 하겠는지요.
초등학교 때부터 꼴머슴살이도 해 봤고 나무장사를 하면서 학교를 다녔었기 때문에 그 눈물겨운 배고픔을 생각하노라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아무리 가난했어도 집 걱정은 하지 않았으니 그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런지요.
제대복 입고 급한 마음에 공무원 시험을 봤더니 덥석 붙었습니다. 장남으로서 노무보 모셔야 하고 거기에 딸린 동생들이 셋이나 됐었기 때문에 멀리 가지 못하고 고향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 했습니다. 박봉이었지만 자전거로 출근했던 그 때가 그렇게 좋은 시절이었음을 이제 새삼스러게 느끼게 하네요.
그 당시 장남은 개도 안 쳐다보는시절이었습니다. 더구나 쪽 째지게 가난한 집 장남에게 누가 딸을 주겠는지요. 포기하고 있었는데 짚신도 짝이 있다고 하던가요. 장남도 좋다면서 손들고 오는 처녀가 있었습니다. 앞 뒤 돌아보지 않고 얼른 결혼을 해 버렸지요. 결혼은 한 번 하게 되면 부동산 계약과는 달리 해약하기가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서울에 와 보니 갈 곳은 없고
그 후 국가공무원 시험을 선호직급과 상위직급별로 여섯 번 가량 합격했었는데 마지막 인사발령장을 거머쥐고 옷 보따리를 내렸던 곳은 영등포역 광장이었습니다. 영등포에 있는 어느기관으로 발령을 받았으니까요.
이불보따리와 무지렁이 살림살이는 화물에 붙이고 간단한 옷 보따리를 이고 진 체 네 사람이 영등포역 광장에 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곳이었지만 아무도 반기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영등포역 광장에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갈 곳을 찾았으나 글쎄요, 우리 가족이 갈 곳은 아무데도 없더라니까요.
네 살 된 큰 애는 제 손을 잡고 있었지만 두 살 된 작은 놈은 영등포역 광장이 신기한지 자꾸 손을 놓고 빠져 나가는 바람에 그 놈을 잡느라고 여러 번 토끼몰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좀 창피한 얘기지만 그때 마누라 뱃속에는 또 하나가 들어 있었거든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는 왜 애들까지 많은지,
서울이라면 일선에서 휴가를 나올 때 서너 번 거친 적은 있으나 어디가 어딘지 모르기 때문에 근무처를 확인한 후 영등포 부근에서 월세 방이 제일 싼 곳이 어디냐? 고 물었던바 봉천동이라고하더군요.
그날은 이미 땅거미가 내려 알아보지 못한 체 국밥으로 저녁을 때우고 여인숙에서 신세를 지긴 했지만 제 근본이 원래 촌놈이라 앞으로 과연 서울생활을 잘 하게 될지 불안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처도 걱정이 되는지 그냥 시골에 있을 걸 아무래도 무섭고 불안하다는 걱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할 수록 잘 사는 동네로 간다
다음 날 월세 방을 얻으려고 봉천동 무허가 판자촌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을 받아 줄만한 곳은 단 한 곳도 없더군요. 그래도 살만하다 싶으면 어린애가 둘이라는 이유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고 그나마 있을만한 곳은 방이 너무 작고 부엌도 없어서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월세보증금으로 쓰려고 돈 6천원을(1970년대 중반 그 당시 필자의 월급이 1만 2천원 정도 됐으니까 한 달 월급의 절반 되는 돈입니다)가지고 왔었으나 우선 그 돈이 축날까 걱정이 가더군요. 그러나 어차피 그 돈으로 서울에서 월세 방을 구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사람들이 많이 산다는 안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안양에 들어서자 마자 동네 이름도 모른 체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부자동네인지 새로 지은 단독주택들이 수 백 채 널려 있었는데 참 살기좋은 동네로 보였습니다. 동네 입구에 담장이 없는 집이 있엇는데 마당 한쪽에 수도꼭지가 있었습니다.
그 수도꼭지에 목이라도 추기고 애들 손이라도 씻어주려고 마루에 걸쳐 앉았습니다. 어느 나이 드신 어르신이 필자와 가족들을 지켜보더니 "뉘시요?" 하고 묻더군요. 그래서 월세 방을 구하려 왔다는 말과 함게 필자의 딱한 사정을 하소하듯 말 해버렸습니다.
그 어르신은 이 생각 저 생각 하시더니 "실레지만 젊은이의 공무원 인사발령장을 보여줄 수 있겠우?" 하더군요. 필자는 호주머니에 들어있던 발령장을 보여 드렸습니다. "이 어른이 왜 발령장을 보여 달라고 할까?" 이상하기도 하였지만 못 보여줄 만한 이유도 없었기에 그냥 보여 줘 버렸습니다.
"젊은이 월세 방을 얻을 필요 없이 이 집에 사시구려, 지은지 3년 된 집인데 큰 방도 두 개나 있고 부엌도 넓고 마루도 넓기 때문에 애들 데리고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거요, 보증금도 필요없고 월세도 받지 않을테니 이 집에서 부담없이 살다가 나중에 집 사거든 나가시구려"
그 어르신은 그 동네 촌장이셨고 그 집은 그 동네 마을회관이라는 겁니다. 가정집으로 지어 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필자로서는 마다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 어르신 말씀대로 그날부터 그 집에다 둥지를 틀고 몸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세상 인연이라는 게 참, 묘 하더군요.
월세 방 구하러 다니다가 마을회관에다 살림을 차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세상 죽으라는 법은 없더군요. 그 어르신은 필자의 구세주가 되신 겁니다. 그래서 그 회관을 먼지 하나 없이 언제나 깨끗한 집으로 관리하는데 최선을 다 하기도 했었습니다.
담장이 없었기에 그 대신 줄장미를 사다가 빙 둘러 심었더니 아름다운 정원이 되었고 마당 빈 곳을 일구어 꽃도 심고 해바라기도 심었더니 그야말로 아름다운 전원주택이 돼 버린 것입니다.
필자의 집을 "마을회관댁"으로 호칭 하더군요. 동네 아낙네들은 시장에 다녀오다가 필자의 집에서 쉬어가기도 했었고 파도 한 단 내려놓고 가기도 했습니다. 배추도 한 단 내려놓고 가기도 했고 과자도 한 봉지 주고 가는 일이 보통이었습니다.
명절 때는 돼지고기를 한 근씩 주고 가기도 했었고 조기도 슬쩍 한 마리 빼놓고 가기도 했었는데 그러다보니 인심 좋은 그 부자 동네에서는 제일 가난한 필자가 가장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게 돼 버린 것입니다. 사람팔자 시간문제라니까요.
내 집 마련은 꼭 한 번 겪어야 할 일
며칠 후부터 필자는 바로 내 집 마련의 계획을 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는 격이었으나 도시에서는 직장이 있고 건강하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므로 우선 집을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 하기로 마음먹고 빌려서라도 은행 세 곳에 적금을 넣기 시작했습니다.
은행을 세 곳으로 정한 이유는 나중에 대출을 받을 때 적금대출과 신용대출을 더블로 받고자 신용도를 높이기 위함이었습니다. 발을 붙이지 못하고 쫒겨났던 서울로 다시 입성하기 위하여 각고의 세월을 보내기로 스스로 다짐했던 것이지요.
선풍기 한 대를 사지 못한 체 무더운 여름밤이면 모기와 씨름을 하면서 물수건으로 어린 자식들의 몸을 닦아냈던 그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네요. 라명땅이라는 과자가 있었는데 애들이 그걸 먹고 싶어 징징 울었으나 그 싸구려 과자 한 봉 사주지 못했던 지난날의 못난 부모의 심정은 지금까지도 가슴이 아려오기만 합니다.
신발도 언제나 재래시장 입구에 널려있는 싸구려 신발을 신었고 의복도 재래시장 브랜드로 살다보니 수 년 동안 백화점에는 가 본 사실 조차도 없게 되었습니다. 평소 고기 한 점 먹고 싶었지만 명절과 제삿날 외엔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멍청하게 살았느냐고요? 그 당시 필자의 생각으로는 내 집 마련은 빨리 끝내야하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일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는데 지금도 그 생각에는 전혀 후회가 없습니다.
도시사람으로서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은 바로 내 집 장만입니다. 출생. 결혼과 더불어 인륜지대사라고 할 수 있는 일이지요.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므로 그저 앞만 보고 2년 6월을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중개업소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
1970년 중반기에 서울에는 이태리식 단독주택이 대 유행이었습니다. 지붕이 뾰쪽한 아름다운 디자인이었는데 그런 집이 많이 지어진 동네는 부촌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우연히 금천구 시흥동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시는 최 사장님이라는 분을 친히 사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 분에게 지금 시흥동에는 이태리식 단독주택 건축 붐이 일어나 많이들 짓고 있던데 그런 집은 한 채에 얼마나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최 사장님은 500만원에서 800만원 정도 하는데 지금 그런 집 한 채 사놓으면 평생 후회하지 않을거라는 대답을 하시면서 한 채 사드릴까요?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최 사장님을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사장님! 지금 제가 적금대출과 신용대출을 포함하여 최대한으로 끌어 모을 수 있는 돈은 120만원(요즘 1억 2천만원 정도)정도 됩니다. 이 돈으로 집을 한 채 사주시오, 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최 사장님은 원체 돈이 부족하다는 눈치를 보이면서 계속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이곳저곳으로 전화를 하더군요.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따라 오라고 하여 그를 따라갔던바 어느 이태리식 단독주택 신축현장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구경한 주택은 이태리식 신축 2층집이었는데 상당한 재력이 있는 사람이라야 거주할 수 있는 양옥집이었습니다. 2층에는 방이 2개와 주방, 마루, 욕실이 있었고, 1층에는 주방과 방 2개가 있었으며 또 한쪽에는 별도로 방 1개와 주방을 설치하여 세를 놓게 돼 있었습니다. 마당 한쪽에는 별도 1층 세대용 공동화장실이 있었고,
최 사장님은 주판을 들고 다니면서 분주히 계산을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최종적으로 돈 30만원이 부족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필자로서는 계산내용이 너무 복잡하여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사고 싶고 갖고 싶은 집이었기에 30만원이 부족하면 집값에서 깎으면 될게 아니냐? 고 하였던바 최 사장님은 집 주인을 물고 늘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그 집은 다음 날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총액은 520만원, 2층 전세금 160만원, 1층 전세금 140만원, 은행대출 120만원, 필자 부담 100만원으로 정하되 전세와 대출에 대하여는 집 주인과 최 사장님이 알아서 처리하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럼 필자는 그 집 어디에서 살아야 될까요. 살만한 부분은 모조리 전세로 주고 1층 한쪽에 있는 방 1개와 부엌을 쓰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집 주인과 세입자는 "주객이 전도" 된 입주를 하게 돼 버렸다고 봐야지요. 쪽방이면 어떻습니까. 내 집을 마련했는데, 그 기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모를 겁니다.
다음 날 어린애들과 처를 데리고 그 집에 다시 구경을 하게 됐지요. 이 집을 샀다고 하자 처는 놀라서 입을 딱 벌리고 말았는데 그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여 지금도 늘 입을 벌리고 삽니다.
대지가 120제곱미터(36평 정도), 건평이 140제곱미터(40평 정도)정도 되는 집이었기에 3세대가 살아도 별로 불편함은 없는 집이었습니다. 그 집 사놓고 대출금 못 갚고 경매 당할까 봐 스스로 걱정하다가 꿈을 꾸면서 가위를 눌렸던 사실도 여러 번 있었네요.
시흥동에 첫 주택을 마련한 그 기쁨은 지금도 두고두고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등기권리증이 나오던 날 밤새도록 그 권리증을 뒤적이며 행여 틀린 글자가 없는지 확인하고 나서 장롱 깊숙히 넣어두고 잘 간수하라는 당부를 했었습니다.
여기까지 1부의 글을 마칩니다.
돈 100만원으로 배짱 좋게 520만원짜리 고급단독주택을 마련한 후 그 집 한쪽에 빌붙어 사는 신세가 됐었지만 그래도 내 집을 마련했다는 뿌듯함을 안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2부에서는 위 단독주택을 시발점으로 하여 1980년경부터 2004년까지 약 25년 사이에 단독-단독-아파트-아파트-아파트로 다섯 번을 갈아탔는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될런지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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