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유은재(柳隱齋) 농부(農夫) 유은(柳隱) 정현락(鄭鉉洛)이 살아온 삶 이야기이다.
휘(諱)는 현락(鉉洛)이고, 자(字)는 광식(光植)이며, 호(號)는 유은(柳隱)이다. 본관(本貫)은 초계(草溪)다. 1912. 음 4.22(양 6.7)에 태어나서 1995. 음 2.2(양 3.2) 향년 84세로 졸(卒)하였다. 출생과 생멸지는 경남 함안군 군북면 유현리 331번이다. 고향에서 크고 자라 줄곧 농부로 사셨다.
배위는 함안조씨 간송당공파(조임도:趙任道) 후예 조복희(趙福熙)로 창녕군 남지면(현 남지읍) 용산리에서 출생하여 함안군 대산면 서촌리 1156번지에서 성장하여 시집왔다. 1912. 음 2.6(양 3.24)에 태어나서 1993. 음 3.11(양 5.2) 향년 82세로 졸하였다.
용산리 바로 남쪽 낙동강 건너편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 용화산 기슭에는 조선 인조 때 학자 간송당(澗松堂) 조임도(趙任道)의 합강정(合江亭)이 있다. 부모님의 택호(宅號)는 어머니 조복희의 친정(父의 처가:妻家) 출생지 고향 이름을 따서 용산댁(龍山宅)으로 50여 년간 불리워졌다.
부(父)는 정임규(鄭任圭)로 자는 도익(道益)이고, 호는 농파(農坡)이며, 모(母)는 김해김씨 김대금(金大今)으로 함안군 군북면 사도리에서 시집왔다. 정임규의 윗대는 모두 여항산(艅航山)의 줄기인 미산(眉山) 아래 함안군 가야읍 혈곡리에 살았고, 묘소도 그 주변에 소재한다. 15세 무렵에 위의 형님들을 따라 함안군 군북면 유현리로 첫 이주 정착하였다. 정임규는 4형제 중 막내이다.
조부는 정연일(鄭演溢)로 자는 주백(周伯)이고, 호는 계암(溪岩)이며, 조모는 밀양박씨다.
양조부는 정연류(鄭演流)로 자는 주견(周見) 이고, 호는 해암(海岩)이며, 양조모는 김해김씨와 은진송씨다. 정연류는 정연일 3형제 중의 2째이다. 딸만 4자매여서 조카(정임규)를 양자로 들였다. 그 후 은진송씨에서 아들 정기규가 났으나 2~3살 무렵에 노환으로 별세하면서 양자는 파기하지 말고 그대로 둘 것을 유언했다.
증조부는 정배민(鄭培民)으로 자는 인칙(仁則)이고, 호는 춘강(春岡)이며, 증조모는 경주김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갑(어머니가 2달 16일 먼저 났다)으로 1926년 15세에 결혼하여 18세 때인 1929. 음 11.27에 장남 정영조(鄭永祚, 1929. 음 11.27~2006.12.4, 음 10.14, 78세 졸)를 낳은 이후로 모두 7남2녀를 두었다.
부모님은 1944년 33세에 장남 정영조를 결혼시켜 순흥안씨 안맹수(安孟守) 며느리를 보았다. 그때 정영조의 나이는 16살로 함안농업중학교(5년 학제, 1948년부터는 6년 학제) 3학년이었다. 요즈음으로 치면 만혼으로 33살이면 장가도 안 갈 나이에 며느리를 본 것이다.
큰 며느리 안맹수는 순흥안씨(1928. 음 5.7~2019.12.4, 음 11.8, 92세 졸)로 1년 6개월 20일 연상으로 의령군 지정면 득소리 228번지에서 17세에 시집왔다. 친정의 부는 안갑중(安甲中)이고 모는 김재수(金才守) 이다.
며느리 안맹수가 시집올 때 5째 아들 정창영(鄭昌永 ; 1943. 음 11.20 생)은 2살이었고, 조복희 시어머니는 1944년 며느리를 본 이후에도 정필남(鄭必南), 나 정봉영(鄭奉永), 정태영(鄭泰永)의 2남 1녀를 더 낳았다.
큰 며느리 안맹수는 시어머니 조복희와 딸 2명을 같은 연간(연대)에 낳았는데 하나는 호적부 미등재 여아(홍역으로 1~2살 무렵 잃음)와 정윤선(鄭允先)이다.
차남 정영만(鄭永萬 ; 1933. 음 1.1생(호적부 : 2.9)~1961. 음 4.17, 29세 조졸)은 20살에 재령이씨 이을순(李乙順) 18살(1935. 음8.22~)과 결혼으로 며느리를 봤는데 1952년으로 아버지 나이는 그때 41세이다.
장녀 정을남(鄭乙南 ; 1935년생 음 6.23~)은 19살에 순흥 안정숙(安正肅 ; 1930. 음 7.28 생)~1998. 음 12.22, 69세 졸) 24살(1953년 장가)과 혼인으로 사위를 봤는데 1953년은 당시 아버지 나이는 42세 때이다.
3남 정삼영(鄭三永 ; 1937년생 음 9.10~2003년 3.4, 음 2.2, 67세 졸)은 24살에 함안조씨 조정자(趙靜子) 21살(1940. 음 4.9~)과 결혼으로 며느리를 봤는데 1960년으로 49세 때이다.
그러니까 조혼풍습으로 33세에 큰며느리를 본 후, 49세 이전에 며느리 3명과 사위 1명, 합 4명을 본 특이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요즈음은 만혼 풍습과 초저출산율(1.17~1.25명으로 OECD 꼴찌수준)과 대비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알게 기록으로 남긴다.
아버지 정현락은 장남 정영조를 1929년 낳은 후인 그 다음해인 1930년(19살) 도일하여 1933년(22세)까지 3년간 오오사카 인근 철도건설 공사장 자갈까는 등의 노무자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20대의 어린 나이에 도일하게 된 것은 살림을 일구기 위한 것과 일본의 신진 문물에 대한 동경에다 아버지보다 일찍 일본에 진출하여 자리를 잡은 3종형(8촌형)되는 정현대(鄭鉉大, 일명 ; 정화수:鄭和守, 기해생:己亥生, 1899년생)의 주선하는 연줄이 있었다.
정현대는 아버지보다 13살 연상으로 당시 함안의 들난 건달(놀음꾼:노름꾼)로 날쌔기도 하고 대가 차고 재치도 있고 교우도 넓어 언제 배웠는지 일본말도 유창했다 한다. 정화수 아들 정인영(鄭寅永, 병인생:丙寅生, 1926년생)과 그 후손들은 재일본 오사카 거주로 귀화했다. 정화수는 사업에 성공하여 생존시에 고국에 거금을 보내 고조부의 재실을 짓기도 했다.
장남 정영조와 차남 정영만(鄭永萬, 계유생:癸酉生, 1933년생)과 터울이 4살이 된 것은 아버지의 3년 도일 기간에 연유된 것이다.
차남 정영만과 장녀 정을남(鄭乙南, 을해생:乙亥生, 1935년생 ) 2살 터울, 정을남과 3남 정삼영(鄭三永, 정축생:丁丑生, 1937년생) 2살 터울이고 아래로 4남 정갑영(鄭甲永)부터는 모두 3살 터울이다.
26살 때인 1937년 3남 정삼영을 낳은 후 다시 2차 도일을 한 후 1939년 28살까지 2년간 일본에 들어갔다가 올망 졸망만 아이들을 보고싶은 처자식과 향수(鄕愁) 때문에 2년만에 돌아왔다고 한다.
29세 때인 1940년에 부(父) 정임규의 회갑연에 소 한마리를 잡아 남주(南州)의 선비들을 초청하여 큰잔치를 베풀었다. 당시의 회갑연 사진 2장과 농파원운(農坡原韻) 시 39편이 전한다. 때는 일제강점기로 민초들의 생활이 곤궁한 시대였다.
진주시 수곡면 출신으로 진주에 거하는 근세 한학자 성주(星州) 이장한(李章漢) 선생이 기(記)한 한문 번역본의 유은(柳隱) 정현락(鄭鉉洛)의 호기(號記)로 대동문헌보감(大東文獻寶鑑)에 수록된 글은 이러하다.
《빈우들을 초청하여 선고(先考 ; 농파:農坡 정임규:鄭任圭의 1940년 회갑연 때다)의 원운(原韻 ; 농파원운:農坡原韻 빈우:賓友의 시 39편이 전한다)을 지어 그 뜻을 보이니 남주(南州)의 선비들이 화답하여 많은 글을 얻었다. 이것으로 군의 풍류(風流)가 보통이 아님을 보였다. 군의 나이 그때 29살이었다.》
2번의 도일로 철도건설 노동판에서 일했지만 그 무렵에 선진문물에 일찍 눈을 떠 돈벌이로 일본인이 제작한 가마니틀을 유현리에서 가장 먼저 구입하여 짜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가마니틀 2대로 가족이 동원되어 벼 공출용 가마니 생산량이 유현리에서 일등이었다. 당시에 조선에서는 가마니는 없고 볏짚 섬을 사용하던 시대였다. 아버지는 그후 농사용 탈곡기나 양수기에 사용하는 진주 대동공업사에서 제작한 발동기, 보리탈곡기, 경운기 등도 유현리에서 가장 먼저 사용한 농부이다.
일본인이 제작한 가마니틀을 조선인 기술자들이 보니, 별 것이 아니어서 강 철사만 있으면 짝퉁으로 쉽게 만들 수 있었다. 짝퉁 가마니틀은 머리 좋은 조선인이 선진 일본을 따라잡는 하나의 시발점이었다. 유현리 거주의 인천이씨 이태식(李泰植)과 옥천육씨 육경문(陸敬文) 2인이 함안 군북면에서 법수면으로 가는 통신선 전봇대 양 버팀줄(벗줄)을 몰래 잘라 조선인 기술자에 의뢰하여 일제보다는 반값 수준의 가격으로 가마니틀을 만들었다.
1940년 경에는 의열단의 독립운동 활동이 치열했던 시기로 각처에서 일제의 요인 암살과 관청 습격과 폭파 사건의 극성기였다. 1941년 3월에 일제는 사상범 예방구금령을 공포하여 대대적인 단속 체포령을 발동하던 시기였다.
그해 태풍, 강풍으로 유현의 전신주가 15여 개 이상이 쓰러져서 사상범 예방 구금령 사건으로 여겨서 일본경찰에서 마을을 샅샅이 뒤지는 과정에 아버지 집에도 철사 토막이 나와서 3인이 동시에 긴급 체포되었다.
일경의 취조실 수사과정에 이태식(아버지보다 15세 연상이다), 육경문(아버지보다 10세 연상이다) 2인은 전신주 버팀줄로 가마니틀을 만들었다고 순순히 자백하며 그들이 몰아간 진술조서를 처분대로 달게 받겠다고 하였으나, 아버지의 생존시 증언에 의하면 집 고방에서 발견된 철사는 전신주 버팀줄이 아니고, 군북면 소재지 바로 아래의 석교천 소터(沼:못 ; 하천이 직각으로 꺽이면서 매년 침식되는 깊은 물구덩이 지명이 있었다 함)에 일본인이 바위돌을 묶은 그물망 철사에 인근의 군북면 소재지 사람들이 먼저 많이 손된(잘라간) 자리에 철사가 귀하던 시대라 군북장날에 다녀오면서 농기구 조임용 등에 사용하려 한 3~5가닥(토막)을 잘라 왔는데, 일경의 유현리 일대 마을의 탐지 색출작전에 아버지의 철사 몇 가닥도 걸렸다 한다.
일경은 1941년 일제의 사상범 예방 구금령 공포에 체포 실적 공로를 세우기 위하여 하지도 않은 전신주 벗줄 파괴에 대한 억지 자백을 강요하는 과정에 실토하라고 혹독한 고문을 가해왔다고 한다. 일본에 2번이나 도일 내왕한 기록에다 나이도 젊기에(당시 30세) 실토하라며 조선독립 의열단 사상범으로 몰아갔다.
5년간의 도일 시기 철도건설 현장에서 당했던 조선인 차별에 대한 항일정신이 평소 내재되어 있는 차에, 아무리 아니라도 해도 일경의 고문에 견디다 못하여 당시 아버지는 젊은 시절 힘이 좋았기에(일본 철도 노동판과 농사일로 단련된 근육질 체질) 고문당하는 과정에 박차고 일어나 순사 2명을 냉동댕이로 조사실 바닥에 둘러메치고, 다시 합류하여 달려드는 1명까지 3명의 순사를 순식간에 내친 사건이다.
나중에는 함안경찰서(조사받던 당시에는 함안경찰서는 함안면 소재로 현 군청소재지 가야읍이 아니다) 문초실의 일경 전부가 몰려들어 ''야~! 이 놈 봐라 힘이 장사네~!'' 하며 잔인한 폭력(가혹한 린치)를 가하며 순사를 엎어친 공무집행방해죄가 가중되어 하지도 않은 통신선 벗줄 절단까지 덮어씌워 사상범 의열단원으로 몰린 사건이다. 그해 재판을 받아 8개월의 징역을 산 사건이 있었다. 취조(取調)받은 기간 합산시 10개월이 된다.
갑짜기 긴급 구속된 사건이라 가족들은 걱정이 되어 조사받는 경찰서와 형무소(현 교도소) 등에 알아보려 부(父)되는 할아버지 정임규(鄭任圭)도 걱정이 되어 몇번 갔고, 2살 아래인 작은 아버지 정현중(鄭鉉中, 갑인생:甲寅生, 1914년생)과 어머니(사건 당시 30세)가 사흘들이로 면회를 갔지만 면회가 계속 거절되어 되돌아와야만 했다.
어쩔 수 없어 면회라도 하게 주위의 권유가 있어 일경에 어머니가 손수 길삼한 광목 1필과 삼베 1필을 받친 이후에야 면회가 가능했다고 한다. 그후 자주 면회를 가니, 경찰서 일경 순사들이 ''이 놈 자식 예쁜 마누라 하나는 잘 두었네~!''라는 투의 여럿 뒷 얘기는 생전에 조복희 어머니로부터 들은 야사이다.
아버지는 생전에 당시 ''내가 자식들이 많이 나지 않았다면(당시 30세에 4남 정갑영까지 낳아 2살배기로 자식 5명을 둔 가장이었다) 일경이 몰아간 처벌대로 만주나 상해로 피신하여 독립운동 의열단에 들어가 활동했을 것이다'' 라고 소회하기도 했다.
2번의 돈벌러 도일 후에 귀국할 때는 양복을 입고서 들어오기도 했으나, 일경의 철사 고문 사건 후 출옥 뒤에는 일제의 양복은 농사 작업복으로 사용후 사랑채 소죽 가마솥 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렀다고 한다. 평생 동안 우리 고유 전통 한복만을 착용하며 사셨다. 나라의 독립운동도 식솔이 여럿 딸리면 수신제가(修身齊家)가 우선이 될 수 밖에 없었음은 일제강점기 당시대 민초 백성으로선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할 것이다.
김영삼 문민정부(1993.02~1998.02) 시대 후반기에 '역사바로세우기'를 할 무렵에 부산시 동래구 사직동에 있는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을 찾아가 당시 재판기록이나 당시 보도된 신문 등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반나절을 찾았으나 정광식(족보 항렬명 ; 정현락) 아버지의 당시 사건 기록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시 정부문서보관소에는 스캔으로 떠서 환등기(마이크로필름)로 넘겨가며 돌려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찾아간 무렵 아버지는 1995.3.2 작고하여 고인이 된 시기로 정확한 날짜와 사건 제목을 증언 받아 기록해두지를 않아 고증할 수 없어 안타깝게 돌아서야만 했다. 소(沼)터 방천(防川) 철사 줄 3~5가닥(토막) 사건으로 독립운동 사상범 의열단으로 처벌 받았다. 지금도 그 사건 기록을 찾아내면 보훈처 자료 제출로 광복절에 대통령 표창은 받을 수 있지만 그만 두기로 했다.
왜냐하면~?, 광주5.18민주화유공자에 혈기방장(血氣方壯)한 젊은이들에 선동을 하고선 몰래 뒤로 빠져 숨었거나, 5.18 민주화 시위대 군중 속에 한 두번 들어가고선 민주화유공자가 된 다수의 둔갑 허위 가짜 명단이 포함되었다는 내용의 카카오톡 정보들을 접하고선 너무나 실망했기 때문임을 이 기회에 야사로 밝혀두고자 한다.
의열단의 반일 사상범으로 몰려서 처벌받은 사건 내용은 찾을 수 없으나, 별세하신 이후 1995.10.7 세운 묘비석의 이 부분 해당 내용 일부만 인용하며 이 글을 맺으려 한다.
《공은 기상이 헌걸하고 풍채가 늠름하였으며, 성격은 온화하면서도 강직하여 누구에게도 거만하거나 비굴하지 않았다. 그 옛날의 장수의 모습이 남아 있는듯했다. 불의를 참고 보지 못하였으니, 악질 왜놈 순사를 둘러메쳐 의열단원으로 몰려 7개월간의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고을의 젊은이들이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바로잡아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했다. 공이 비록 초야의 농부로 한 평생을 보냈지만 그 인품이나 행신은 어느 누구에게도 손색이 없었다.》
묘비는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문학박사 김해(金海) 허권수(許捲洙) 근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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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 일제강점기 36년(1910~1945) 시대는 주권을 상실하였기에 가난을 벗어나기 위하거나 일제에 저항하여 만주를 비롯한 중국 본토, 하와이등 해외로의 이주가 많았다. 구한말 의병,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항일 독립운동의 법통을 계승했지만, 나머지
90% 이상의 민초들은 일제에 체제속의 한반도 국내에 살면서 차별에 대한 저항 속에 피지배 민족으로 일제강점기의 체제속에 순응하며 살 수 밖에 없었다. 과거의 식민침탈과 침략전쟁에 동원된 일제 식민의 주요 관직, 징용, 징병, 위안부 등 체제속에 살았다고 무더기금 친일로 매도하는 편견된 역사관은 잘 못된 것이라 본다. 민초들은 체제 속 국가권력(총칼 앞)에 대한 해바라기성 지향은 인류 민족의 보편적인 인간 본성이라 생각한다. 인간 본성을 어찌 친일로 몰아부친다는 말인가?
진보 좌파들의 친일 단죄 역사관(친일인명사전)에 의문을 갖는다.
국권상실의 시대에 주권을 잃고서 일제의 체제 속의 그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친일도 선의와 악의를 구분할 수는 있을지라도 건국을 위하여 모든 죄는 포용하고, 잘한 것, 좋은 것만 선양하여 공과 상만 반듯하게 현창하면 역사는 바로 서게 되며 나라와 민족의 독립정신과 투쟁의 정통성과 정체성은 주류로 살아 유유히 맥을 이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조선시대 임진왜란의 《선무공신녹권》이나 《선무원종공신녹권》처럼 광복후 《항일독립 애국열사 사전(녹권)》같은 것을 만들지 못했다. 부정적인 사고의 《친일인명사전》보다는 긍정적인 사고와 미래지향적인 《항일독립공훈인명사전》이라도 제대로 조사 규명하여 만드는 것이 우선이 돠었어야 했다. 잘한 것, 좋은 것도 제대로 들추어내지 못하면서 나쁜 것 들추어내어 무엇에 쓰겠다는 건지? 국민 분열만 자초할 뿐이다. 70여년 전의 '친일과거사'의 친일 분류로 그 집안의 후손들까지 더 쪼개어서는 미래의 조국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래 세대 국민에게 희망과 통합의 상징적 비전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7년간의 임진왜란 때도 왜군에 부역한 백성에 대하여 선조 임금과 조정에서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군주로서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피신)한 군왕의 무한 책임으로 어진 백성을 탓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잃어 일제강점기 체제가 된 것도 선조 임금의 의주 피난과 시대는 달라도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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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록한다.
2021.2.15 함안군 법수면 우거리 귀향하여 거주하는 안호영 선생이 정영만 형님에 대하여 물어왔다. 정영만 형님은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61년에 조졸하신 분이다.
《참, 農溪선생!
仲兄 永萬씨는 어떤 분입니까?》
8남매 7남 1녀 중 2째 형님이 되시는 정영만(鄭永萬 ; 1933. 음 1.1생~1961. 음 4.17, 29세 조졸)은 20살에 재령이씨 이을순(李乙順) 18살(1935. 음 8.22~)과 1952년에 결혼했습니다. 정을남(1935생) 누님의 2살 위 오빠가 됩니다. 혼인한 1952년은 아버지 정현락의 연배는 그때 41세였다 합니다.
동아대 정치학과를 졸업했으며 한학과 필적이 좋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사람을 모우는 친화력과 사교성이 뛰어나 주위에 친구들(이장호 선생, 이원형 유현교장 등 등)이 많았습니다. 친구 많은 것이 호사다마로 물반 고기반이라는 유전늪 민물회 간디스토마 지병으로 조졸했습니다. 당시에 간디스토마는 약(지스토시드정)이 없는 불치의 풍토병이었습니다.
20세 조혼했기에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나 장녀 정숙희(鄭淑姬)는 5살(1955.8.6~1961.3.5, 호적부상 6세 기록) 때 홍역으로 잃었고(실제는 5세로 기억), 아들 정승표(1958년생)와 딸 정정숙(1961년생)을 남겼습니다. 마망인인 이을순(李乙順) 형수님은 정을남(鄭乙南) 누님과 87세(1935년, 乙亥生) 동갑으로 이름에도 '乙'자가 똑같이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5살에 잃은 정숙희 아이는 사진 1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첫댓글 앨범에 들어있는 옛 사진들을 찾아보니 위로 휘어져 있어, 다시 사진 위에 무거운 것을 올려 놀러서 바르게 펴서 다시 스마트로 촬영하여 게재할 예정입니다.
여러가지 일로 바빠서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註 ; 1971.1.11 발급한 김대금(金大今)할머니의 주민등록증은 제5~9대 대통령 박정희 시대(1963.12~1979.10)입니다.
김대금 할머니는 주민등록 상(호적부 상) 출생일이 1881.7.11입니다.
1881년은 신사생(辛巳生)으로 조선시대 고종 18년이 됩니다.
93세까지 장수하다보니, 대한민국 박정희 9년 연대의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기에 역사 사진 자료로 등재한 것입니다.
註 ; 조정자 형수(78세, 정삼영 형님 배우자)의 증언에 의하면, 4남 정종대가 1972년 음 12.11(1973년 양 1.15)에 태어났는데, 정종대가 태어나고 3개월 후 김대금 할머니는 태어난 아이를 보고서 1973년 음 3.1에 별세 했다. 김대금 조모의 제사는 음 2.30(졸한 하루 전이 된다)입니다.
김대금 조모가 별세한 1973. 음 3.1 당시, 나는 1972년 2월에 ROTC 10기로 임관되어 광주보병학교에서 16주간 병과학교 군사교육을 받고, 그해 7월에 경기도 가평군 하면 율길리 수도기계화사단 예하 99연대를 거쳐서, 경기도 양주군(현 양주시) 덕정면 회암리(현 회암동) 회암사지 아래 제2기갑여단 예하 기계화보병대대 소대장으로 군복무할 시기였습니다
註 ; 이미지 사진 중 4번째 사진은 어머니 조복희의 43세 때의 사진입니다.
6.25한국전쟁(1950.6.25 발발~1953.7.27 정전협정) 후인 1954년 법수면 우거리 자형 안정숙(1932년생, 생존시 86세)이 카메라를 가져와 찍은 사진입니다.
6.25전쟁 후라 곤궁하여 여름에는 한옥 창문에 창호지가 떨어지고, 겨울에 가서야 딱종이 한지를 바르는 시대입니다. 발도 맨발입니다. 신발도 고무신입니다. 조복희 어머니의 6.25사변 후의 어려웠던 시절을 증명하는 귀중한 사진입니다. 당시 9명을 출산한데다 먹을 것이 없는 시대라 바짝 야윈 얼굴입니다.
註 ; 정지용(1902~1950) 시인의 시 향수(鄕愁)는 김희갑 작곡, 이동원, 박인수의 노래로 더 유명시가 되었습니다. 정지용 시인은 연륜을 대조해보니, 일제강점기로 아버지 정현락(1912년생)보다 10년 연상의 동시대 사람입니다.
향수 시의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같은 검는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