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실이 용산에 있는 국방부 청사로 이전한다는 발표가 나오자 바로 그곳이 둔지산인데 천하의 명당이라는 글들이 인터넷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둔지산? 그냥 야산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름이 있었어?”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찾아보니 둔지산은 대동여지도에도 나오고 관련된 기록이 여럿 눈에 들어온다.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가지 추측이 있는데 둔덕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어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는 설명도 대할 수 있었다. ‘그럴 것 같네!’ 했다. 이곳의 이름이 둔지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먼저 ‘여길 어떻게 산이라고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예전 모습을 모르는 사람들은 더 그럴 것이다. 예전에는 그래도 나무가 우거진 곳들이 있었고 초여름이면 아카시아 꽃향기도 맡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경사가 완만한 지형에 크고 작은 건물들이 이어진 평범한 시가지가 되어 있다.
둔지산에 대한 기록들 가운데는 대통령실 이전 문제가 거론되기 훨씬 이전에 용산구청이로 둔지산에 대한 학술세미나를 열었다는 기사가 있었는데 그 세미나의 주제는 “사라진 둔지산의 역사를 찾아서”였다. 둔지산의 존재가 사라진 것은 1900년대 초기라고 한다 일제가 지도와 각종 기록에서 이 이름을 뺐다는 것이다.. 기록과 기억에서 사라졌던 둔지산이 대통령실 이전 덕분에 다시 나타난 둔지산이 되었다.
『서울지명사전』에는 둔지산이 이태원과 용산동에 걸쳐있는 산이라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둔지산인지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지만 잘 살펴보면 서쪽으로는 이태원동에서 내려와서 한강으로 가는 큰길까지인 것 같고 동남쪽으로는 서빙고동까지인 것 같다. 예전에 얼음을 보관하던 서빙고와 동빙고가 둔지산 자락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니까 말이다.
이태원과 용산동 중간에 나의 본적지이면서 성장지인 한강로동이 자리잡고 있다. 결혼 후 분가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곳은 서빙고 부근이고 졸업한 초등학교,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출석하고 있는 교회, 그리고 사무실이 모두 둔지산 자락이나 주변에 있다. 둔지산은 네 삶의 큰 터전이라고 할 수 있다.
둔지산에는 일제 때 파놓은 방공호들이 여럿 있었다. 6‧25 때 동네 주민들은 폭격을 피해 그 방공호에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비행기 소리가 나면 우리 또래들은 굴밖으로 나와 멀리서 비행기가 폭탄을 떨어뜨리고 고사포탄이 폭격기 가까이에서 팍, 팍 작렬하는 광경을 보며 재미있어 하다가 어른들에게 끌려 굴 안으로 들어가 혼이 나곤 했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피난민들, 집 잃은 사람들이 그 방공호에서 살았다. 둔지산 남쪽에 미군들이 사용하던 집들이 여러 채 있었다. 그들이 급하게 철수를 하자 주민들이 빈집에 들어가서 두고 간 살림살이들을 많이 꺼내왔다. 포크, 나이프, 그 때 처음 본 이런 것들을 들고 ‘이걸로 어떻게 밥을 먹어?했다. 포크를 그때는 삼지창三枝槍이라고 했다.
국방부와 대통령실이 있는 자리는 예전에는 빈터였다. 우리들은 거기에서 전쟁놀이를 자주 했다. .편을 갈라 소리를 지르고 주먹과 막대기를 휘두르고 돌도 던졌다. 동네 동무들끼리 편을 가르기도 하고 이웃 동네와 싸우기도 했는데 이때는 규모가 좀 커졌다...전쟁놀이를 한 다음날이면 교실은 무용담으로 왁자지껄 했다. 그때 왜 그렇게 전쟁놀이에 열을 올렸을까? 이건 우문이다. 6‧25 전쟁의 영향 때문이었다. 둔지산에는 이렇게 전쟁과 가난에 얽힌 아픈 기억도 담겨 있더.
대통령실이 들어온 이후 둔지산 끝자락은 시위를 자주 하는 곳이 되었다. 큰 이슈가 있을 때는 한 주 내내 시위가 벌어진다. 시위를 할 때 대통령을 지지하는 쪽, 이른바 우파는 대통령실을 바라보면서 오른쪽, 지하철 삼각지역 1번 출구 앞에 모이고 진보진영, 이른바 좌파는 왼쪽, 전쟁기념관 후문쪽에 진을 친다. 사무실이 그 중간지점에 있는데 지금 사무실에서 시위 소음을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어렸틀 전쟁놀이를 하던 모습이 저절로 머릿속에 퍼져나가고 있다.
지명사전에는 둔지산의 정상부가 65m라고 되어 있다. 정상부가 어디일까? 아마도 이태원 언덕 어디일 것 같다. 산마다 정상에는 산 이름과 높이를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둔지산 정상부였던 곳을 찾아내서 그런 것을 하나 세워졌으면 좋겠다. 아니 지금은 산이라는 이름이 적합하지 않은 모습이 되었으니까 둔지산의 내력을 새긴 표지석을 세우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용산우체국 왼쪽길로 조금 올라가면 대통령실 입구가 나오는데 그 오른쪽 언덕위에 국군중앙교회가 있다. 그곳은 둔지산의 높은 봉우리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지금은 거기에 군인들을 위한 성당과 사찰이 함께 있는데 예전에는 교회만 있었다. 그때 그 교회의 이름은 육본교회였다. 용산에 높은 건물들이 없던 시절이라 십자가가 달린, 육본교회의 뾰죽한 지붕이 은 사방에서 잘 보였다. 다니던 초등학교가 그 곳에서 조금 떨어진 삼각지에 있었는데 한번은 미술시간에 밖에 나와서 보이는 풍경 가운데 하나를 택해 그리게 되었다. 학교 건물을 그리는 학생들이 많았고, 학교 건너편에 있는 용산소방서의 감시탑을 그리는 학생들도 있었고 학교 옆을 지나는, 용산역에서 서울역으로 가는 경부선 철로를 그리는 학생들도 있었다. 나는 멀리보이는 그 교회를 그렸다. 담임선생님이 잘 그린 그림들을 뽑아서 벽에 붙였는데 내가 그린 그림도 거기 들어 있었다. 예능과는 거리가 먼 내게 특별한 체험이었다. 그래서 그 일이, 특히 십자가의 모습이 지금도 잘 기억되고 있다. 국군중앙교회에 설교 하러 간 일이 있었는데 벽에 옛 교회당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국군중앙교회는 오래 전에 새 건물을 지었는데 지붕 위에는 독특한 형태의 십자가가 서 있다. 잘 알려진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고 한다. 잊혀진 이름이었다가 지금은 나라의 중심지가 된 . 둔지산의 높은 곳에 십자가가 서서 아주 가까이에 있는 대통령실을 내려다 보고 있다는 사실이 무언가 의미 있게 여겨진다
대통령이 집무하고 기거하는 곳에는 오랫동안 ‘대臺가 붙어 있었다. 경무대, 청와대, 대통령의 별장은 청남대, 지금은 그저 대통령실이라고 하는데 웬일인지 허전하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혹시 앞으로 오랜 습관을 따라 둔지대屯之臺로 바뀔지도 모르겠다. 아니 바뀌었으면 좋겠다. 어감 때문인지 듬직하게 여겨지서이다..
앞에서 명당 이야기가 나왔다. 여러 해 전 기독교 유적 답사를 나갔는데 해설자가 부근에 우리나라에 으뜸가는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 있으니 들려가자고 했다. 어느 대학의 박물관장을 지낸 분인데 그곳에서 그 분은 여기를 왜 명당이라고 하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명당이라고 하면 집안이 잘 되는 곳을 생각하는데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곳이 정말 명당이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만 그런 것이 아니고 풍수지리의 대가로 알려진 분이 쓴 글에서도 같은 내용을 읽었다. 그렇다면 둔지산은 명당이다 왠지 모르게 정이 가고 마음을 끄는 곳이어서 이렇게 긴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둔지산에 있는 분들이 하는 일도 그랬으면 좋겠다. [한국크리스천문학 제99호(2024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