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주님 오실 때까지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순교역사 스크랩 <한국교회사25> 신사참배 반대로 최초 순교자가 된 강종근 목사와 철원제일교회
푸른세상 추천 0 조회 88 16.01.09 05: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5. 신사참배 반대로 최초 순교자가 된 강종근 목사와 철원제일교회

 

 

▲ 강종근 목사(1904.9.26-1942.6.3)

 

철원제일교회는 1905년 웰번 선교사가 설립한 장로교회였으나 1907년 선교지역을 분할할 때 감리교회가 되었다. 철원제일교회는 한때 강원도 북부의 선교와 교육, 사회봉사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면서 성장을 거듭했던 모범교회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웅장하고 자랑스럽던 옛 모습은 간곳이 없고 무너진 돌덩어리만 뒹굴며 옛날을 회상하게 한다. 2006년에 비로소 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결의로 유적지를 보존하기 위한 복원건축 계획이 수립되었다. 한편 철원지방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함으로 근대문화유산 제23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므로 철원제일교회는 기독교유적지 뿐만 아니라 조국평화 통일의 염원을 상징하는 기념관이 돼야할 것이다.

철원지역은 철원제일교회 박연서 목사를 중심으로 1919년 3월 10일 강원도에서는 가장 먼저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또한 철원제일교회를 중심으로 ‘철원애국단’이 조직되어 국내 독립운동 상황을 중국 상해 임시정부에 보고하고 임시정부에서는 그 문서를 반포하는 등의 활동을 비밀리에 전개하기도 했다. 이로 보건대 1920년대 철원지역에서는 기독교 선교활동뿐만 아니라 애국애족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들어서 철원제일교회는 더욱 부흥 성장하여 1933년도에는 새 신자가 50명이나 늘었고, 주일학생이 300여 명씩 모였으며 한때 교인수가 500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철원지역의 대표적인 교회였으면서도 교회건물이 작았던 관계로 예배당 세우는 일을 서두르게 되었다. 마침내 1920년에 붉은 벽돌로 세워졌던 건물을 헐고 현무암, 화강암의 서양식 건물로 신축하게 되었으며 건축설계와 시공은 일본 오사카예술대학에서 활동하며 이화여대 본관건물을 건축했던 미국인 건축가 보리스(W.M. Voris)가 맡았다. 연 건평 1,200평 규모로 지하 1층, 지상 3층의 웅장한 석조 건물로 지어진 예배당은 착공 1년여 만인 1937년 9월 30일에 드디어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층에는 1개의 소예배실과 10개의 성경공부방이 있었고 2층은 대예배 실이었다. 당시 한강 이북, 영서북부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미를 자랑하는 교회로 손꼽히기도 하였다.

 

 

▲ 옛 철원제일교회 모습

 

▲ 철원제일건축13.3.25

 

▲ 철원제일교회 옛터의 잔해

 

한편 1939년 강종근 목사는 철원제일교회를 섬기는 가운데 주일설교를 통하여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속박에서 구출해 냈듯이 한국도 일본의 속박에서 구해낼 수 있는 모세와 같은 청년이 필요하다는 등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설교를 자주 하였다. 그는 설교에서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면서, 민족정신의 혼을 교인들과 지역 주민들에게 불러일으키면서 독립정신을 일깨워 준 독립투사의 삶을 살았다. 그는 신사참배는 곧 우상숭배라고 단정하고 단호히 거부하였다. 강종근목사의 신사참배거부가 노골적으로 들어나자 일본 조선총독부의 “사상범 예비검속 령”에 의해 무자비하게 잡아다가 고문으로 회유를 획책했으나 실패하자 구속시켜 버렸다.

강종근목사는 신사참배 거부했다는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1년형을 선고 받고 1941년 7월 3일 철원경찰서에서 서울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일본 형사는 강종근 목사에게 용수(죄수 얼굴을 가리는 대나무로 만든 갓)를 씌우고 두 손을 노끈으로 묶어 철원경찰서 유치장에서 밤에 철원역으로 끌고 나갔다. 당시의 험악한 상황으로 볼 때 철원역 구내에서 교회임원과 교인들이 찬송가를 부르며 눈물로 강종근 목사를 전송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적인 일이었다. 그의 부인 윤희성여사와 교인들은 눈물어린 찬송가를 부르며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가는 강종근 목사의 앞길을 배웅하였다.

한편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된 강종근 목사는 형무소 안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앙의 끈을 놓지 않고 정신을 차려 기도와 찬송을 부르면서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고 주장하고 유일하신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이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높으냐? 일본 천황이 높으냐? 네가 설교에서 말한 모세는 누구냐? 애국자냐, 아니냐? 너도 민족성을 갖고 있느냐?" 강종근 목사는 일본 형사들로부터 30여 가지의 심문을 받는 등 심한 고문과 모진 체형을 당하였다. 고문을 견디지 못해 기절하면 추운 겨울에도 찬물을 끼얹으면서 다시 깨어나게 하여 몽둥이로 때리고 극심한 고문을 가했다.

그렇게 극심한 고문에 만신창이가 되었던 1942년 6월 1일 철원경찰서로부터 윤희성 사모에게 당장 서대문형무소로 가보라는 연락이 왔다. 밤 10시경 서울에 도착하여 서대문형무소 감방에 들어가니 강종근 목사는 홑이불에 덮여 있었다. 손을 만져보니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지만 아직 숨을 거두지는 않은 것 같아서 병원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일본 경찰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윤희성 사모가 "목사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처럼 죽게 때렸느냐”고 소리를 지르자, 강종근 목사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표시를 했다고 한다.

다음날 오후 두 사람이 강종근 목사를 들것에 떠메고 윤희성 사모가 머물고 있는 집 대문에 내던지듯 버리고 갔다. 황급히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도록 회생하지 못하고 아내 윤희성 사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주를 따라간다. 마음이 기쁘다”는 희미한 음성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때가 1942년 6월 3일이었다. 그는 한창 젊음을 불태워 일할 나이인 38세를 일기로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 하나님 나라로 갔다.

 

- 주소: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100-2번지

- 글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02-2230-5151)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