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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후에 지하주차장을 한 대의 승용차가 빠져나왔다 운전석
에는 이영태가 앉아 있었고 시치미를 뗀 얼굴로 됫좌석에 앉은 사
내는 민용수이다. 그리고 그의 발밑에 팔다리가 묶인데다 입에 테
이프를 붙인 박태신이 길게 엎드려 있었다
1시간쯤후에 그들이 탄차가들어선 곳은 수원 교외의 이층 양
옥집 안이었다. 차에서 끌려내려진 박태신은 곧장 건물의 현관 안
으로 끌려 들어갔다.
불을 환하게 밝힌 응접실에는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앞쪽의
소파에 밀려 앉혀진 박태신의 입에 붙어 있던 테이프가살갗을벗
길 듯한 기세로 몌어졌다.
「데려 왔습니 다. 」
민용수가 말하자 오석흥이 박태신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마치
오물을 보는 것 같은 시선이다
「나라 팔아먹는 놈이구만.」
그가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박태신의 얼굴에 대고 뿜었다.
「기다려라, 네가 뵐 분이 계시다. 」
「이것 보시오. 도대체 무슨 일로‥‥?.
겨우 배에 힘을 준 박태신이 입을 연 순간 민용수가 성큼 다가
섰다 주먹에 관자놀이를 맞은 그가 모로 쓰러졌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 .」
민용수가 으르렁대듯 말했다.
「네 주제를 파악하란 말이다. 」
「난 이반강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
박태신이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자정이 넘어 있었다. 담배를
피워문 윤재성이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이봐, 우리 러시아 마피아를 우습게 보는 것 같은데.」
이미 3시간이 넘도록 심문하고 있었지만 윤재성은 조금도 지친
것 같지 않았다.
「CIA는 이반강이라는 가공인물을 내세워서 마약공급과 테러를
일으켜 왔어. 작전 책임자는 CIA의 부국장보 에릭 월슨이고 한국
연락책은 메이슨이라는 놈이다. 」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껐다
「월슨은 CIA가 압류한 마약을 이반강을 통해 팔았다. 물론 포섭
된 로스토프를통해 한국내의 마약 루트를 훤히 례고 있었지.마
약을 팔아CIA의 해외자금을 조달한 거야. 그것도 우방국가에 말
01야.」
윤재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고 적절하게 그것을 노출시켜 한국인의 1표)러 감정을
증폭시켰지 , 러시아 제품의 불매 분위기를 조성한 거야.」
「나는 깊은 내막은 모릅니다. 」
「넌 미국 군수업체의 대리인인 게이트무역의 2인자다. 네가 모
를 리가 없어 .」
윤재성이 넥타이의 매듭을 거칠게 풀었다.
「이반강에 대한 정보를 대라. 그러면 살려서 돌려보내 준다. 」
「사장이 그쪽 일을 맡고 있었소. 나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
「우리가 이반강을 찾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냐?.
눈을 치켜뜬 윤재성이 손끝으로 박태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놈의 사진이 수천 장 뿌려졌고 현상금이 일억이다 네가 토
를 리가 없어 .」
「러시아 쪽에서 찾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쪽 내부 사정인 줄
로만 알았소.」
「기가 막혀서 .」
턱을 든 윤재성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시치미를 는지 두고 보겠다. 넌 나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이곳을 살아서 못 나간다. 」
자리에서 일어선 윤재성은 지하실을 나와 위층의 응접실로 들
어섰다. 소파에 앉아 있던 김한이 궁금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저놈은 군출신이기 때문인지 호락호락하지가 않아요.」
윤재성이 이제는지친 표정으로 앞자리에 앉았다.
「군수업체 로비의 실무만 하고 있었다는 거요.」
안기부 과장인 윤재성은 지금 러시아 마피아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밤을 꼬박 새우고 나면 달라질 겁니다. 아는 대로
털어놓지 않고는배겨내지 못할테니까.」
윤재성이 자신있게 말했다. 새벽 1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실종은 확실합니다. 정원호텔의 일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지
하차고로 내려왔다가 실종된 것이오.」
이정일이 초조한 표정으로 에릭 월슨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을
림픽대로를 달리는차안에 앉아 있었다.
「국방부 행정실에 다니는 친구하고 차고로 같이 내려왔는데 현
관 앞에서 아무리 기다려도나오지 않더라는 거요.지하차고에서
일이 일어난 것 같소.」
오전 열시 반경이어서 올림픽대로의 교통량은 많지 않았다 승
용차는 속력을 내어 김포 쪽으로 달리는 중이다. 이윽고 월슨이
입을 열었다.
「박전무는 어디까지 압니까?.
「깊은 내막은 모릅니다. 」
「김한에 대해서는 어때요?.
이정 일이 머리를 저었다
「말해주지 않았으니 모를 겁니다. 」
「이반강에 대해서는 알겠지요?.
「소문이 퍼져 있으니 당연히, 하지만 김한과 동일인물이라는
건 모를 겁니다. 」
「러시아 쪽 소행이겠지요?.
「글쎄 .」
「그자들이 눈치를 챈 것이 아닐까요?.
「어떻게 말이오?)
불쑥 그렇게 물었던 월슨이 등받이에 상체를 기댔다.
「하긴 김한이 그자들한테 러막을 폭로했을 가능성도 있지. 우 ,
리쪽 추적을 막으려면 러시아를 보호막으로‥‥ 이용할지도 모르겠
군.」
「패트리어트 도입 결정이 갑자기 보류된 것도 석연치가 않아
요.」
그러자 월슨이 쓴운음을 지었다
「미스터 리. 그건 그렇게 간단히 괄날 일이 아니오. 그렇다고
한국정부는 러시아제 S-300으로 구입선을 쉽게 바꿀 수도 없을 겁
니f.」
눈을 치켜뜬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한테 시급한 문제는 김한 그놈을 잡는 일이오. 나는 아무
래도 그놈이 요즘 일련의 사건들의 배후에 있다는 심증이 갑니다. 」
「사장님 , 전화왔습니다. 」
사무실을 나와 계단을 내려가던 최기수는 부하가 건네주는 수화
기를 받았다. 오전 열한시 반이었다. 최기수의 시선을 받은 부하가
어깨를 움츠렸다.
「친구분이라고만 해서 ‥‥」
이맛살을 찌푸린 그는 수화기를 귀에 붙였다.
「전화 바찐습니다. 」
「최사장. 나 이반강이오.」
숨을 들이마신 최기수가 걸음을 멈췄으므로 일행들은 모두 계단
의 중턱에서 모여섰다.
「이 반강이 라구?.
최기수가 되묻자 사내들은 일제히 긴장을 했다.
「그렇소, 아마 내 얼굴까지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당신 부하들도
모두 내 사진을 들고 다닌다고 들어서 .」
「용건이 뭐냐?.
「용건없이 전화할 것 같나?.
수화기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한테 현상금을 1억이나 걸다니, 네가 마약장사를 해서 돈깨
나 모은 모양인데 ‥‥」
「네놈은 내 손에 잡힌다. 」
최기수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그가 담배를 꺼내 물자 옆에 선
부하가 재빠르게 불을 켜 올렸다.
「네 껍질을 모조리 벗겨줄 테니까.」
이반강의 배후라고 알려진 로스토프는 실종 상태였다. 러시아
안에서는 흔적도 찾을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반강도 목소리
를 가라앉혔다.
「내가 먼저 경고를 한다. 그래서 네 정부이자 클럽의 3류 가수인
배경미를 모시고 왔다. 」
눈을 부릅뜬 최기수의 귀에 그의 목소리가 다시 스며들었다
「1차 경고야, 내 뒤를 캐지 마라 날 잡을 생각도 말고.」
전화가 끊겼으므로 최기수는 머리를 들었다. 두 눈이 충혈된 험
악한 모습이어서 부하들은 몸을 굳혔다.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
수화기를 내려놓은 부하가 최기수를 바라보았다. 사무실 안이었
다. 점심 약속을 취소한 그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있었다 머리
를 돌린 그가 옆쪽의 부하를 바라보았다. 수화기를 귀에 댄 이쪽
부하는 열심히 배경미의 핸드폰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는 중이었
다. 사무실 안은 무거운 정적에 덮여 있었다
배경미는 집에 있지 않는 것이 분명했고 잘 가는 의상실이나 커
피숍에도 없었으며 핸드폰의 전원도 꺼놓은 상태인 것이다.
「아 여보세요.」
갑자기 수화기를 든 부하가 소리치듯 말했으므로 방안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것. 배경미 씨의 핸드폰이 아닌가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숨만 죽
였다. 이윽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부하가 최기수를 바라보았다.
「이반강이라고 하는데요, 사장님 .」
「연락을 때까지 기다리라면서 끊었습니다. 」
「내가 기다릴 줄로 아는구만.」
최기수가 잇새로 낮게 말했으나 방안의 사내들은 모두 들었다.
담배를 비벼끈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점심이나 하러 가자.」
부하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러나 선뜻 입을 여는 사람
은 없다.
「사장님 , 어떻게 할까요?.
최기수가 차에 앉았을 때 옆자리에 오른 조철환이 초조한 표정
으로 물었다. 그는 최기수와 배경미와의 관계를 가장 잘 아는 심복
이었다.
「장사장님이나 저쪽에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저쪽이라면 러시아 대사관을 말하는 것이다. 최기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놈의 목표는 나다 그리고 내 개인적인 일로 도움을 받고 싶
지 않아.」
「그놈의 요구조건이 있지 않겠습니까?.
「있겠지.」
등받이에 상체를 기댄 최기수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놈은 계산을 잘못했어. 난 협상할 생각이 없으니까 말이
야.」
「지금부터 놈의 연락은 철저히 무시하도록. 전화를 받을 필요도
없다. 」
머리를 돌린 최기수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조철환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난 걔가 어떻게 되건간에 상관하지 않겠
단 말이다. 」
「이봐 루. 어떻게 처리했나?.
다가선 월슨이 묻자 루스박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내일쯤이면 시체가 발견될 겁니다. 하루쯤 시간을 주는 것이 낫
지 요.」
그들은 제각기 골프채를 들고 있었지만 한가로운 표정이었다.
오산 교외에 위치한 미군전용 골프장 안이었다. 골퍼들은 서넛밖
에 보이지 않았는데 평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눈을 가늘게 뜬 월슨이 100야드쯤 떨어진 흘을 바라보았다.
「최기수가 만사 제쳐놓고 김한을 찾아나서겠구만. 아마 제 정부
의 시체를 보고 나면 이를 갈겠지 .」
그는 공은 저만큼 둔 채로 헛스윙을 했다.
「러시아 마피아와 정보국 조직을 모두 가동시킬 거야.」
최기수의 정부 배경미를 납치하여 살해한 것은 루스박인 것이
다. 그리고 그는 이반강이라면서 최기수에게 전화를 했다. 루스박
도 멋진 자세로 스윙을 했다.
「보스, 아무래도 박태신은 러시아측에서 데려간 것 같지가 않습
니다. 」
「그렇다면 누구란 말이야!」
골프채를 지팡이처럼 짚고 선 월슨이 정색을 했다.
「그럼 김한이란 말인가?.
「우리쪽과 적이 된 이상 잡아서 정보를 빼낼 목적인지도 모르지
「그놈이 한국기관에 도움을 요청할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놈은 정보국을 이용하는 데 익숙한 놈입니다. 」
「그렇군.」
「지난번 오석홍을 잡지 못한 것도 김한을 배후에서 돕는 세력이
있다는 증거지요.」
「안기부를 움직였을지도 모르지 .」
혼자소리처럼 말한 월슨이 어금니를 물었다.
「이놈이 우리 뒤통수를 치려고 하는지도 몰라.」
「이미 패트리어트 미사일 도입이 보류된 상황인데 러시아측에서
박태신을 잡아갈 이유가 없단 말입니다. 」
「김한이 박태신을 통해서 우리쪽 사정을 자세히 알려고 그랬을
수도 있어 .」
「그렇다면 그놈은 헛고생을 한 것이지요. 이정일은 우리쪽 작전
에 대해서 박태신한테 말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안기부가 변수로군.」
골프칠 마음이 달아난 듯 월슨이 골프채를 어깨에 둘러멨다
「놈이 더 이상 일을 벌이지 못하도록 해야 돼, 루. 우리의 목이
걸려 있는 일이야.」
박태신이 들어온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날 밤이었는데 아침에 게이트무역에 태연한 모습으로 출근하자
이정일은 놀란 나머지 한동안 입도 열지 않았다. 만 사흘을 실종되
었던 사람인 것이다
「이봐,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겨우 입을 연 이정일이 박태신의 위아래를 훌어보았다. 놀라움
이 가셔지자 와락 짜증기가 얼굴에 떠오르고 있다.
「바닷가에 가서 며칠 쉬었습니다. 」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은 박태신이 이정일의 머리 위쪽에 시선
을 주었다.
「제 장래 문제도 생각할 겸해서요.」
「아니 , 그렇다고 연락도 없이‥‥」
「걱정하실 건 알았지만 그랬다간 제대로 쉬지도 못할 것 같아서
요.」
「이 사람이 도대체?.
「그래서 집에도 연락을 안 했지요.」
그러자 이정일이 눈쌥을 치켜세웠다.
「우리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기나 해? 이 사람아, 우리는 최악의
경우도 생각했단 말이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박태신이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최악의 경우라니오? 누가 저를‥‥?.
「아, 주차장에서 갑자기 실종되었으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밖
에 .」
「그 친구하고는 주차장에서 헤어졌는데‥‥」
혼자말처럼 중얼대던 박태신이 정색을 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 」
「미국 쪽에서도 잔뜩 긴장하고 있단 말이야.」
뱉듯이 말한 이정일이 생각난 듯 수화기를 들었다.
「요즘은 왜 이렇게 일이 꼬이나 모르겠군 그래.」
「시체로 발견되었어?.
미하일손이 소리치듯 묻자 이영균이 머리를 끄덕였다.
「강간당하고 나서 목이 졸려 죽었습니다. 」
러시아 대사관의 소회의실 안이었다. 방에는 그들 둘뿐이었지만
주위를 둘러본 미하일손이 목소리를 낮췄다
「경찰은 최사장과 배경미와의 관계를 파악한 것 같나?.
「배경미의 아파트는 이미 최사장이 청소를 했습니다만.」
이영균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둘의 관계가 왜 길고 깊었거든요.」
「잔인한 놈이 다. 」
흔자소리처림 말한 미하일손이 먼 시선으로 이영균을 바라보았
다.
「최사장이 물불을 가리지 않겠는데.」
「겉으로는 무시하겠다고 했지만 아마 가만 있지 않TA지요.」
방안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그것을 미하일
손이 깨뜨렸다.
「어쨌든 그놈을 잡는 것이 우선이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말이야.」
안기부 1차장 엄효석이 앞에 앉은 윤재성을바라보았다. 점심시
간이 되어갈 무렵의 사무실 안이었다.
「그 여자가 최기수의 애인이었다니 이건 상황이 심각한데.」
이맛살을 찌푸린 그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뭔가 냄새가 난다. 」
「제 생각입니다만 분명히 음모가 있습니다, 차장님 .」
「최기수에 대한 원한 관계 때문일까?.
「최기수 주변에 정보원을 풀었지만 아직 특별한 움직임이 없습
니 다. 」
윤재성이 부스스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리고 최기수는 병원 영안실에도 나타나지 않더군요.」
「당연하지 . 숨겨진 여자일 테니 살았다면 몰라도 죽었는데 뭐 하
러 나타나.」
뱉듯이 말한 엄효석이 머리를 들었다.
「우리가 김한을 토르고 있었다면 김한의 소행으로 짐작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제일 적극적으로 김한을 잡으려고 하는 놈이 최기
수였으니 까요.」
「우발적인 강간살인은 분명 아니야.」
「경찰은 원한관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한동안 방안에 정적이 흘렀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엄효석이다.
「분명 음모가 있군 그래.」
혼자소리처럼 말하자 윤재성이 머리를 11덕였다
「아마 최기수는 김한을 용의자로 지목할 것 같습니다. 」
「그래서 하는 말이야.」
「김한에게 알려걸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되겠군.」
다시 한동안 앞쪽의 벽을 바라보던 엄효석이 이윽고 윤재성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제 작전상황이 된 것 같군 그래. 우리도 말이야.」
「오랜만에 쇼핑을 했어요.」
유영화의 얼굴은 밝았다 한아름이나 되는 종이봉투를 탁자 위
에 내려놓은 그녀가 김한을 바라보았다.
「우습죠?갇혀 산 덕분에 이런 보통 외출도 큰 혜택같이 느껴진
다니까.」
성남의 안가에 머문 지 일주일째였다. 한적한 주택가에 세워진
아담한 단독주택이었는데 임시로 사는 집이었지만 유영화는 마음
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안기부요원의 경호를 받고 시
내에 나가 쇼핑까지 한 것이다. 유영화가 쇼핑한 물건을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집안에는 그들 둘뿐이어서 마치 신혼부부의 살림 분
위기였다.
「오늘밤에 일이 있어서 나가야 돼.」
가볍게 말한 김한이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후 다섯시 반이
었다.
「내일쯤에나 돌아을 것 같아.」
「무슨 일인데요?,
종이백을 내려놓은 유영화가 정색을 했다. 성남에 온 후로 김한
은 외출하지 않았던 것이다.
「윤과장이 조긍전에 다녀갔어 .」
「최기수의 정부가 피살되었다는 거야. 그런데 최기수는 그것이
내가 한 짓으로 믿고 있다고 했어 . 최기수가 나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데.」
「누구 짓이래요?)
「그건 아직 알 수가 없어 . 다만 어떤 음모가 있다는 것밖에.」
「나가서 윌 하려구요?.
「그건 다녀와서 .」
부드럽게 말한 김한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이젠 미국과 러시아 양쪽의 모든 정보원들이 내 꽁무니를 따라
다니게 되었어 .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이곳에서도 카이로와 마찬가
지 신세로군.」
「이제 이곳은 당신의 조국이고 한국 정부가 당신을 돕고 있어요.
난 지금은 마음이 놓이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다행이야.」
현관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민용수가 들어섰다. 그는 둘이를 향
해 허리를 꺾었다
「형님 , 모시러 왔습니다. 」
승용차는 4차선 도로에 진입하자 속력을 냈다. 저녁 8시여서 하
행선은 차들이 밀렸지만 서울 쪽은 한산했기 때문이다. 핸들을 쥔
민용수는 말이 없었다. 본래 무뚝뚝한 성격이기도 했지만 김한 앞
에서는 굳어지는 것이다.
「넌 고향이 어디냐?)
불쑥 김한이 묻자 그가 백미러로 시선을 맞췄다.
「예, 광주올시다. 형님.」
「전라도 광주?,
「예 , 형님 .」
「서울에는 언제 올라왔어?.
「고등학교 마치고는 바로.」
민용수의 말소리가 갈수록 조심스러워졌으므로 김한은 등받이
에 상반신을 기댔다. 이미 그의 인적사항은 모두 알고 있는 것이
다. 광주에 어머니와 형이 살고 있었는데 형은 문방구점을 한다.
민용수는 월급을 몌어 매달 어머니에게 50만원씩을 부쳐주고 있었
다.
「넌 꿈이 무엇이냐?.
다시 불쑥 그가 묻자 민용수가 차의 속력을 줄였다. 백미러에 비
친 그의 눈이 여러번 깜박였다.
「예, 어머니한테 식당을 하나 차려드리는 것입니다. 」
「그게 다야?네가 하고 싶은 건 없어?.
「지 금은 그것뿐입 니 다. 」
「효자구나.」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거든요.지금 형 집에 얹혀 살고 계
시는데 식당을 차리면 나오실 수 있지요.」
「그렇게 되겠군..
「형 식구가 넷인데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살거든요.」
강남으로 들어서면서 길이 막혔다. 김한은 손목시계를 내
려다보았다. 밤 아홈시 반이었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올랍니다. 」
박태신은 술기운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휘청이며 일
어난 그는 미닫이 문을 열고 방을 나갔다. 논현동에 있는 일식집
대원의 밀실 안이다. 이미 정종을 주전자로 두 개째 비우고 난 후
여서 이정일도 기분이 좋을 만큼은 취해 있었다. 오늘은 가라앉은
회사 분위기도 살릴 겸해서 이정일이 마련한 술자리였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시중드는 사람을 앉히지 않았는데 두 사람 모두 여색
에 대해서는 담백한 성품이었다. 방문이 열렸으므로 이정일이 머
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당신들 누구요?.
낯선 사내 두 명이 방안에 들어선 것이다. 눈을 치켜뜬 그가 다
시 입을 벌렸을 때 앞선 사내의 발길이 날아왔다
「어 이쿠.」
무지막지한 발길질이었다. 턱을 차인 이정일이 벽에 머리를 부
딪치며 넘어지자 다시 주먹이 날아와 관자놀이를 쳤다.
「그만하면 됐다. 」
오석홍이 민용수의 팔을 잡았다-
「어서 떠메고 나가자.」
그들은 늘어진 이정일의 팔을 한쪽씩 걸치고는 방을 나왔다
「과음하시면 언제나 이 모양이야.」
복도에서 종업원과 부딪치자 오석홍이 투덜대듯 말했다. 그는
여종업원에게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오늘은 일찍 끝나서 다행이야.」
이정일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쯤 후였다. 아주 기
절을 한 것은 아니어서 흔들리는 정신 속에서도 자신이 차에 태워
져서는 어디론가 달렸고 다시 들려 내려져 건물의 지하실로 끌려
왔다는 것은 알았다. 그리고 이제는 눈에 초점이 잡힌 것이다
지하실 안에는 세 사내가 둘러앉아 있었는데 모두 낮선 얼굴이
었다. 테이블 하나에 의자만 너덧 개 놓여진 썰렁한 구조였고 창문
도 없는 시멘트 방안이다 철제 의자에 앉혀진 이정일은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이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자신의 운명이 절대
절명의 기로에 세워진 것은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택시에서 내린 박태신은 길가의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섰다. 밤
11시가 넘어 있어서 상가는 거의 문을 닫았고 거리는 한산했다. 다
이 얼을 누르자 곧 신호가 갔다.
「여보세요.」
전화의 목소리는 게이트무역의 김길호 부장이다.
「응, 집에 들어와 있었군 그래.」
「아니 , 전무님 웬일이십니까?.
김길호가 놀란 듯 목소리가 팽팽해졌다.
「웬일이긴, 내가 지금 사장님하고 부산출장을 가는 길이야.」
「부산이오? 갑자기 부산은 왜‥‥?)
「업무 문제로 부산에서 약속이 있어 .」
「아 fl .」
「내일 다시 전화하TB지만 이 일은 비밀로 하도록. 중요한 상담이
라 일부러 부산에서 약속을 한 거야.」
「잘 알겠습니다. 」
수화기를 내려놓은 박태신은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니만치 김길호는 은밀한 로비작업인 줄로 알 것이
다. 기간이 이틀이 될지 사흘이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김한
에게 시간은 만들어 주었다.
전화박스를 나온 그는 길가에 서서 빈 택시를 기다렸다. 부산행
열차는 열두시 반 출발이었으므로 시간은 충분했다. 부산의 조용
한 호텔에서 묵고 있으면 김한이 연락을 해을 것이다 그때 올라가
면 된다. 빈 택시가 왔으므로 그는 택시에 올랐다. 김한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도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역으로 갑시다. 」
던지듯 말한 그는 시트에 등을 기댔다 그는 군출신인 것이다.
김한으로부터 미국측의 행태를 샅샅이 듣고 난 후에 마음을 굳힌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밤 이정일을 납치하는 데 그들에게 협조
하는 일쯤이야 이제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러시아대사 드미트리 이바노비치가 주름진 얼굴을 펴고 웃었다.
「장관, 러시아 정부가 이제까지 남북한 관계에 대하여 방관자 입
장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잘 아시겠지만미국이 4자회담이니 뭐니 하면서 법석을피워도
우리는 가만 있었지요. 그것이 우리하고 이해관계가 없어서 그런
줄 아십니까?.
외무장관 이규현은 찻잔을 들었다. 이바노비치가 찾아온 용무는
한러문화교류에 관한 일이었지만 본론이 다른 줄은 알고 있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 도입이 보류된 것은 그에게 고무적인 일일 것
이다 그리고 노련한 이바노비치는 원거리에서부터 차츰 본론으로
접근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
「장관. 북한 정부는 우리에게 군사교류를 요청해 왔습니다. 이것
은 동맹국간의 합동군사훈련과 상호간 교환훈련 등이 포함되어 있
지 요.」
찻잔을 내려놓은 이규현이 그를 바라보았다. 북한과 러시아는
동맹관계였지만 옐친 시대에 와서는 군사교류가 끊겨 있었던 것이
다. 이바노비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국정부의 행동을 이해할수 없습니다 러시아를 무시하고 미
국하고만 밀착되면 한반도의 평화가 유지될까요? 4자회담만 성사
되면 끝난다고 보십니까?.
「대사, 그것은‥‥」
「북한은 미국과 러시아 양쪽을 쥐고 있습니다. 중국도 마찬가지
고.」
「대사, 본론을 말씀하시지요.」
말을 자른 이규현이 웃음 띤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우리가 여러 번 이야기했던 내용 같은데요. 물론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러시아와 한국간의 우호증진을 강조하려는 져니다 그러기 위
해서는 경제협력이 우선이 되어야지요.」
정색한 이바노비치가 말을 이었다.
「S-300은 패트리어트보다 월등하고 가격조건과 기술이전 등 모
든 것이 한국에 유리합니다. 그 동안 미국의 숱한 방해와 음모가
있었지만 이제 한국정부는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습니다. 」
「청와대에 보고해 주십시오. 북한의 군사교류제의 문제도. 러시
아와 북한의 군사동맹이 다시 체결되면 미국의 전함대가 몰려와도
남침은 저지 못합니다. 」
「틀림없이 이번에 보류된 미사일 도입문제를 꺼냈을 거야.」
창가에 선 미국대사 제임스 퍼거슨이 피트 맥거번에게 말했다.
「놈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아.」
「김대통령은 안기부장과 단독면담이 끝난 후에 미사일 도입을
보류시켰습니 다. 」
피트 맥거번 영사는 30대 중반으로 국무부의 정통관료 출신이
다 그가 잿빛눈으로 대사를 바라보았다.
「대사님, CIA는 요한슨이 실수로 추락사했다고 결론을 낸 것 같
습니다. 」
「그랬다면 다행이야. 죽은 요한슨에게는 불행한 롤이지만.」
테이블로 다가간 퍼거슨이 컴퓨터의 키를 눌러 자신의 일정을
체크했다.
「피트, 외무장관과 면담일정을 잡아주겠나? 다음주 월요일쯤이
좋겠는데.」
「연락하겠습니 다. 」
「한국언론에 조금 정보를 흘리도록 해. 내가 패트리어트 문제로
외무장관을 방문한다고 말이야.」
「알겠습니 다. 」
「이건 장난도 아니고 몇 번째 보류시키는 거야?이젠 정면으로
부딪쳐 야겠어 .」
입맛을 다신 퍼거슨이 찌푸린 얼굴로 맥거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도대체 내막을 알 수가 있나 말이야. CIA는 요즘 무얼하
고 자빠져 있는 거야?.
「김한은 안기부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
루스박이 탁자 위에 사진을 펼쳐놓았다.
「안기부 제3과장 윤재성이 담당입니다. 」
사진을 훌어보던 월슨이 한 장을 집어들었다.
「이건 누군가?.
「김한의 부하인 민용수입니다. 그 뒤쪽에 세워진 승용차에 안기
부 요원들이 타고 있지요. 철저히 보호받고 있습니다. 」
「개자식들.」
월슨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이놈들이 우리 뒤통수를 쳤군.」
「사태가 심각하게 되었습니다. 김한을 통해 정부 고위층에까지
사건이 보고되었다고 봐야 됩니다. 」
사진을 내려놓은 월슨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패트리어트 도입이 보류된 것도 그놈 때문이었어.」
「아마 그렇겠지 요.」
「한국정부는 지금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하고 있겠구
만 그래.」
쓴웃음을 지은 월슨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확실한 증인은 김한 한 명뿐이야, 그렇지 않나?.
「예 . 하지만‥‥1
「김한을 접촉한 사람은 메이슨과 나뿐이야. 그렇지 , 이정일이 있
군.」
월슨이 탁자 위의 사진을 둘러보았다 루스박의 노련한 정보원
들이 민용수와 이영태, 오석홍을 미행하여 찍은 사진들이었다. 그
들은 모두 안기부 요원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요원들의 얼굴
도 확대되어 찍혀져 있다. 이윽고 월슨이 머리를 들었다.
「지난번 이미 안기부 차장 엄효석에게 김한이 CIAB위장한 마
약업자라고 말해 놓았어. 저쪽이 어떻게 나오건간에 일단은 밀어
붙여야 돼.」
그러나 한국 안기부는 이미 김한과 손발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방안에는 한동안 무거운 정적이 덮여졌다.
이정일의 실종이 알려진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박태신과 함께
부산에 내려갔던 그가 종적을 감춘 것이다. 실종사실은 박태신의
연락으로 알려졌는데 연락을 받은 사람뜬 대사관의 피트 맥거번
영사였다 그는 대사관의 회의실에서 월슨과 마주앉았다.
「계속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상황이라 대사도 걱정하고 계십
니다. 」
맥거번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담당자인 메이슨이 점심무렵에 갑
자기 미국으로 떠났기 때문에 월슨에게 상의하고 있는 것이다 대
사관은 게이트무역의 이정일과 공식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다. 모
든 일은 CIA의 메이슨이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게이트무역의 박태신이 대사관으로 전화를 해오는 바람에 맥거번
은 당황했다. 연락 루트를 모르는 박태신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었
지만 짜증이 난 것이다. 월슨이 천천히 머리를 』1덕였다.
「내가 박태신을 만나지요. 염려하지 마시오, 맥거번 씨 .」
「메이슨은 언제 돌아옵니까?.
「중요한 업무를 맡아서 당분간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
「중요한 업무라니 .」
다시 맥거번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쪽 상황이 심상치가 않은데 도대체 어떤 일로?.
「이보다 중요한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
월슨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대사께도 내가 말씀을 드리지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
「이정일의 실종은 사고 같습니까?.
「실종인지 잠적인지도 아직 모르지 않습니까?조사를 해봐야지
요.」
「박태신도 며칠간 실종되었다가 나타났다고 들었는데‥‥」
퍼뜩 시선을 든 월슨은 대답하지 않았다. 맥거번이 자리에서 일
어섰다.
「별일이 아니기를 바라겠습니다. 요즘은 한국정부와의 관계도
심상치가 않아서_S_.」
「김형 , 이것을 보시오.」
성남의 안가를 찾아온 윤재성이 봉투에서 오려낸 신문을 꺼내더
니 탁자 위에 펼쳤다. 점심 무렵이어서 유영화는 주방에 있었고 응
접실에는 그들 둘뿐이었다.
「여기를.」
윤재성이 손가락으로 신문의 한쪽을 짚었다가 었다. 응접실에
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주방에서는 도마 위로 칼날이 메마른 소리
를 내며 부딪치고 있었다. 이윽고 김한이 머리를 들었다 그의 입
가에는 웃음기가 띠어져 있다.
「놈들이 잘못 짚었는데요.」
무슨 말이냐고 묻는 듯한 윤재성의 시선을 받자 김한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
「최기수가 한 짓 같소.」
「글쎄 누구건간에 .」
그러자 윤재성이 가늘게 숨을 뱉었다. 신문의 내용은 춘천 근교
에서 강변도로를 달리던 승용차가 강물로 추락하여 두 사람이 익
사했다는 것이었다. 운전사와 됫좌석에 타고 있던 여자였고 여자
의 이름은 이정옥이었다.
윤재성이 입을 열었다.
「이정일의 진술은 고위층까지 보고가 되었어요.모두 김형의 덕
분이오.」
「제가 살려고 한 짓입니다. 덕분이라고 말씀하실 것 없습니다. 」
「이정일은 우리가 당분간 보호하고 있을 계획이오. 본인도 그것
을 원하고 있습니다. 」
정색한 그가 김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같은 수단으로 대응할 거요.」
「물론 공식적은 아니겠지요?)
「그럴 수는 없지 . 우리는 비공식 조직을 운영할 겁니다. 」
그가 목소리를 낮친다.
「긴형, 당·진이 그것을 맡아』시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
시선을 내린 김한이 다시 신문을 바라보았다. 물에 빠져죽은 이
정옥은 그를 프랑스로 쫓아낸 새어머니였던 것이다. 김한이 신문
을 접어 봉투에 넣었다.
「이 여자는 영문도 모르고 죽었군요.」
「트럭이 뒤를 받았소.」
「날 쫓아내지 않았다면 그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최기수는 그분이 김형의 양토인 줄은 몰랐던 모양이오.」
「하긴 호적에는 어머니로 되어 있으니까요.」
김한이 퍼뜩 시선을 들었다.
「과장님은 양모인 줄 어떻게 알았습니까?.
「조금 깊게 조사하면 금방 알 수 있지요.」
머리를 끄덕인 김한이 시선을 돌렸다.
「그놈은 눈이 뒤집힌 내가 부딪쳐 오기를 기다리고 있T?l군요.」
「이제 갈 모양인데요.」
부하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본 서태욱이 머리를 』1덕였다. 논
현동의 길가에 세워진 차안이었다.
「저 새끼. 대통령같이 경호를 받는단 말입니다. 」
이영태의 뒤쪽에는 시치미를 뗀 세 사내가 제각기 딴전을 보며
서 있었다
「개업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그런지 손님이 별로 없어요.」
부하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서태욱은 이영태를 바라보았다.
길 건너편의 커피숍 앞에는 대형 화분이 서너 개 놓여져 있었는데
이영태는 그 옆에서 여자와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여자는 이은미
로 그의 여동생이었고 개업한 커피숍의 주인이었다.
서태욱이 핸드폰을 들었다. 11시가 되어가고 있어서 2차선 도로
에는 행인이 드물었고 주차된 차들만 가득했다. 신호가 울리자 곧
부하의 목소리가 났다.
「여보세요.」
「잡아라, 뒤쪽 세놈부터 쳐야 된다. 」
서태욱이 사내들의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하들은 뒤쪽 골
목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선이 커피숍 앞쪽의 승용차
에 머물렀다.
「차에 타고 있는 놈도 함께 처리해, 도망치면 안 된다. 」
핸드폰을 접은 서태욱이 운전석에 앉은 부하의 어깨를 손바닥으
로 쳤다.
「준비해.」
세 번이나 놓쳤으니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영태를 잡
아갈 작정이었다. 네 사내는 분명 경찰이 아니면 기관원이었다. 그
러나 지금 그것을 가릴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가 머리를 든 순간
골목에서 쏟아져나온 10여 명의 사내들이 그들을 덮쳤다. 모두 야
구배트나 쇠파이프를 들고 있었는데 그들은 순식간에 목표물을 에
워 쌌다. 배트가 내려쳐지고 그 사이로 여자의 자지러지는 듯한 비
명 소리가 울려나왔다.
「가자!」
서태욱이 소리치자 승용차는 앞쪽과 뒤쪽의 주차된 차를 받으면
서 도로로 꾑겨나왔다. 커피숍 앞에 멈춰선 것은 금방이었고 그 동
안에 상황은 이미 끝나 있었다. 늘어진 이영태가 됫좌석으로 던져
졌다. 차에 타고 있던 사내는 쇠파이프에 앞유리가깨지는 바람에
차에서 뛰어나온 것이 잘못이었다. 배트에 맞아 쓰러진 사내는 손
에 권총을 쥐고 있었다.
「모두 뛰어! 시간이 없다!」
소리치듯 말한 서태욱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은미를 바라
보았다.
「이년을 실어라, 쓸모가 있을 것 같다. 」
이은미를 데려갈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준비 되었어?」
김한이 묻자 유영화가 트렁크를 들고 일어섰다. 화장기 없는 얼
굴에 긴 머리는 묶였고 코트의 허리끈을 단단히 졸라맨 모습이었
다. 유영화와 시선이 마주치자 김한이 다가와 섰다
「미안해. 이곳에서도 당신을 편안하게 해주지 못했어 .」
그는 유영화의 허리를 가볍게 안았다.
「우리 둘이서 마음대로 살 수 있는 날이 꼭 올 거야 그때까지
만.」
「누가 당신 탓을 했어요?.
그의 허리를 마주안으면서 유영화가 운었다.
「내가 오히려 당신을 끌어들인 것 같은데요 뭘.」
제각기 트렁크를 든 그들은 대문 앞에 세워져 있는 승용차에 을
랐다. 새벽 1시였다. 주위는 조용했고 근처 주택들의 불빛도 거의
꺼져 있었다. 차가 주택가를 빠져나갔을 때 앞좌석에 앉아 있던 사
내가 몸을 돌렸다. 안기부 요원이다.
「과장님은 아침에 오신다고 합니다. 」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는 김한을 유영화가 바라보았다.
「무슨 일예요?.
그녀는 아직 영문을 모르는 것이다.
「최기수가 이영태를 끌고 갔어 .」
김한이 시트 위에 놓인 그녀의 손을 쥐었다.
「이영태의 여동생하고 같이 말이야. 여동생의 커피숍 개업식에
갔다가.」
「사건은 30분 전에 일어났지만 이영태는 이곳 위치를 알고 있거
든 .」
차는 속력을 내어 달려가고 있었다 앞뒤로 바짝 붙어 달리는 두
대의 승용차에는 안기부 요원들이 타고 있을 것이다.
「이틀 전에 춘천 근교에서 나를 프랑스로 보냈던 여자가 교통사
고로 익사했어 .」
시선이 마주치자 김한이 쓴웃음을 지었라.
「어제 알게 되었어 , 신문을 보고.」
「놈들은 나하고의 관계를 모르고 그랬던 모양이야. 최기수가 애
인의 복수를 한 것 같아.」
‥‥‥‥1
「돌아가신 아버지가 어떤 얼굴을 하실지가 궁금하군 그래 .」
김한이 어두운 창밖으로 머리를 돌렸다.
「요즘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나서‥‥」
「아버지도 원망했거든.」
유영화가 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이제 그만 잊으세요.」
「그 여자가 데려온 딸이 있었어. 나보다 네살 아래였는데 아버지
그애를 무척 귀여워했지.」
처음 듣는 가족 이야기였으므로 유영화는 긴장을 했다. 김한이
는 초점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애는 나를 따랐어 .」
「이젠 그애도 나와 같은 신세가 되었구만 그래.」
「그 동생이 무슨 죄가 있어요?.
유영화가 힐난하듯 말했다.
「당신을 따랐다면서· .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몰랐을 텐데.」
「난 안 어렸나?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 말도 통하지 않는 땅으로
보냈냔 말이 야.」
언성을 높였던 김찬이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좌석에 등을 기댔
다.
「그래, 걔가 안됐어. 착하고 영리한 애였는데‥‥ 위로해주고 싶지
만 그럴 입장이 아니야.」
눈을 치켜뜬 최기수는 앞에 앉은 사내들을 노려보았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 나는 그 시간에 식당에서 저
녁을 먹고 있었단 말이오. 증인이 열 명도 더 됩니다. 」
최기수의 사무실 안이었다. 그의 앞에는 두 명의 사내가 앉아 있
었는데 안기부의 수사관들이다.
「그건 우리도 압니다. 소공동의 일식집 오양에서 밤 11시까지 계
셨더구만.」
수사관 하나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 알리바이쯤이야 기본 아니오? 일이야 애들을 시키는 것이
고.」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요. 의심만 간다고 무조건 잡아갈 수는 없
을 텐데.」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최기수가 말을 이었다.
「예전에야 그냥 데려갔겠지만 지금은 힘들 거요.」
「이봐, 까불지 말어 .」
잠자코 있던 다른 수사관이 버럭 소리쳤다
「당신도 알겠지만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 긴말하지 말고 끌고 간
사람들이나 내놔.」
「허어 , 사람 환장하겠군.」
최기수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도대체 내가 누굴 끌고 갔단 말이오? 증거가 있다면 영장을 가
져와요. 법으로 해결합시다. 」
「조용히 끝내려고 했는데 할 수 없구만 아예 요절을 내야지 .」
수사관이 손가락으로 최기수의 콧등을 가리켰다.
「우리가 그냥 끝낼 것 같으냐? 오늘부터 네 사업은 끝장이야. 네
부하들은 모조리 잡아간다. 」
그가 최기수처럼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뭐? 영장을 가져와? 이 새끼 정신 나간 놈인데. 이 새끼야, 영장
없이 지금 널 데려가겠다. 」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옆의 수사관에게 말했다.
「김형.모두 들어오라고 해. 일단사무실에 있는 놈부터 데려간
다. 」
그가 턱으로 최기수를 가리켰다.
「이 새끼부터 우선 수갑을 채워 .」
「이것 보시오.」
최기수가 입을 연 순간 수사관이 집어던진 재떨이가 날아왔다.
재떨이는 최기수의 볼을 스치고 뒤쪽 볕을 맞아 박살이 났다. 수사
관이 가슴에서 권총을 빼들었다.
「이 새끼가 민주국가에서 너무 오래 살아온 것 같구만 그래. 이
빨갱이 새끼 .」
수화기를 든 박태신은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전 11시 정각이
었으니 시애틀은 6시가 될 것이다.
「박태신입니다. 」
「미스터 박, 난 월리엄이오.」
블루데잉사의 중역인 월리엄 크레이튼이었다. 전화가 온다는 연
락을 받은 터여서 박태신은 테이블 위에 서류를 펼쳤다.
「월리엄 본사에서 가격을 내릴 수도 있는 겁니까?.
「그것이 각 부속별로 체크가 되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오.」
크레이튼의 목소리는 언짢게 들렸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가격
을 내리거나 기술이전을 얼마라도 해주지 않으면 러시아제 S-300
미사일에 비하여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이제까지 줄곧 해온
소리였지만 블루데잉 본사에서는 무시하고 있었다. 한국정부에 의
하여 도입이 보류되자 이렇게 나서고는 있으나 가능성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크레이튼이 말을 이었다.
「박,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상태인데, 그렇다고 한국정부는 선뜻
러시아제 S-300의 구매결정은 내리지 못할 거요.」
「글쎄요, 상황이 불투명해서‥‥1
「그래서 말인데 당신이 시애틀로 와주었으면 하는데,우리의 조
건을 실무자인 당신과 같이 검토해야 될 것 같아서.」
「내가 말입니까?)
「이사장이 실종된 상황 아니오?당신 아니면 누구하고 이 일을
상의합니까?.
맞는 말이다. 잠자코 있는 박태신의 귀에 그의 목소리가 다시 울
렸다
「오늘중으로 출발해 주시오. 관련 서류를 모두 가져오시고, 회장
께서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
첫댓글 즐~감!
ㅎ 늘 감사히 잘읽고 갑니다
잘~~~감상~~~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