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보시오!"
그러자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보시오!"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쉽지 않은 게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증명은 과학적인 검증, 즉 감감적이고 반복적인 경험의 결과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하느님은 그렇게 경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존재 여부에 대해 토론할 수는 있겠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원하는 과학적인 방식으로 그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무신론은 기본적으로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신앙을 거부하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극적인 형태의 무신론은 신이 없다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없어도 상관없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하지만 적극적인 형태의 무신론은 신의 자리에 다른 무언가를 놓고 그것으로 신을 대신하게나, 그것을 신격화합니다.
예를 들어, 인간중심주의나 과학의 힘을 절대화하여 그것으로 신의 역활과 위치를 대신합니다.
무신론자들의 질문과 주장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이 계시는가?
만일 계시다면, 세상과 인간이 왜 이 모양인가? 왜 착하가ㅔ 사는 사람이 고통받고, 악하게 살아도 별 문제가 없는가?
하느님은 전지전능하다고 하지 않는가?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복음서의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은 우리의 머리카락 개수도 아실 만큼 우리에게 관심이 많다고 하지 않았는가?
둘째 다른 신은 없는가?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하느님이 계시다고 치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신들도 존재하고, 혹은 다른 신들이 더 힘이 세고 위대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지금이야 그리스도교가 가장 큰 종교이지만, 예전에는 다른 종교와 다른 신이 더 많았고, 지금도 수많은 종교와 신이 존재하지 않는가?
셋째 반드시 종교를 가져야 하는가?
다 좋다! 하느님도 계시고, 그 하느님이 전능하시고,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최고의 하느님이라고 치자.
그런데, 그 하느님을 믿지 않아도, 성당에 다니지 않아도, 매ㅏ주 미사에 가지 않아도 별 상관없는 것 아닌가?
하느님은 꼭 성당에 다녀야만 은총과 구원을 주시는가? 성당에 다니지 않아도 잘사는 사람이 많고, 성당에 다녀도 힘들게 사는 사람이 너무 많다. 신앙생활이 반드시 꼭 필요한가?
사실 위의 세 가지 질문을 받았을 때, 명확하게 답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어렵고, 특히 살다 보니 이해 안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고 믿자니 이해 안도는 상황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하고 살기에도 이해 안 되는 일은 여전히 많습니다.
하느님에 부르심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는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 지난 2쳔 년 동안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텨온 교회, 우리가 기도하고 살면서 일상에서 체험하게 되는 하느님의 손길과 은총 등.
하느님의 존재를 눈에 보이게 증명할 방법도 없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이미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사랑이나 우정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곁에 존재하고,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그 존재와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무신론의 질문과 주장에 반대하고, 하느님의 존재를 확신합니다.
성경에서 주장하는 무신론은 대개 온갖 형태의 우상숭배를 의미합니다.(시편14,1: 10,4: 36,2: 지혜13,5; 로마1,18: 사도 14,14:17,26-29등)
성경은 하느님의 존재를 확신하고 절대적 무신론을 부정하는 신관을 보여줍니다.
성경의 신관은 그 당시 다신론적인 신관을 고려하여 무신론이란 마치 우상숭배처럼 현실의 사물을 신격화하는 것 정도로 이야기합니다.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적극적 의미의 무신론은, 신앙의 내용을 철학적이고 자연과학적으로 검증하려는 시도를 통해 더 확고해집니다.
그 이후 무신론적인 경향은 더욱 견고해지고, 다양한 형태로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무신론적 경향은 어떨까요? 사실 한국처럼 종교적 심성이 강한 나라도 드뭅니다.
한국인의 종교 심성에서 기복적 내지 샤머니즘적 경향이 강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이러한 경향은 한국인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성향입니다.
섬이나 반도처럼 자연재해가 많았거나 혹은 전쟁이 빈번했던 지역이나 나라들을 여행하다 보면 마을 곳곳에 종교적인 상징이나 표징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한국 역시 지난 시간 어려운 상황을 많이 겪었고 여러모로 종교적인 활동이 매우 활발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인은 종교적 심성이 강하면서도 무신론적 경향도 매우 강합니다.
한국인 중에 무신론자의 비율이 (약15%)이 중국, 일본, 체코, 프랑스에 이어 세계 5위라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월간중앙 2017년 2월호)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무신론에 대한 교호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즉 공의회 이전까지 무신놀은 그 자체로 배척과 파문의 대상이었는데, 이제는 무신론을 현대의 지극히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더 치밀하게 검토할 주제로 다룹니다.(사목헌장 19-22항)
무신론과 관련하여 파문에서 대화까지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가톨릭교회는 당연히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왜곡된 주장에 맞서 싸웁니다.
그리고 무신론이 제기하는 문제가 결코 무신론의 주장을 통해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히 합니다.
하느님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는 무신론의 주장에 대해 가톨릭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떤 태도를 지니고 어떻게 답변해야 할까요?
당연히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것을 찾고, 재발견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계시를 통해 당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셨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신비에 이르는 많은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 교부들의 가르침과 영성, 그리고 2천년 동안 교회가 믿어온 바를 성실하게 따르며 산다면 그리스도교는 더 그리스도교다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과 교회를 통해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많은 진리의 말씀을 귀와 마음으로 잘 듣는 것, 그 가르침대로 사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다는 누군가의 말을 잘 생각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닮고, 그분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인이 제자리를 찾고,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면, 과학이나 철학을 통해 이론적으로 하느님을 부정하는 경향은 분명 감소할 것입니다.
아직 세례 받지 않은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오기 위한 외적인 복음화도 중요하지만, 이미 세례 받은 사람들을 교육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내적 복음화 역시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