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比 큰스님의 천수경 법문 (18)
참회진언 (懺悔眞言)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3번)
준제공덕취 (准提功德聚)
적정심상송(寂靜心常誦)
일체제대난 (一切諸大難)
무능침시인 (無能侵是人)
그 다음, 참회진언(懺悔眞言), 참회진언입니다. 참회를 하는 참말이다.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이렇게 돼 있죠.
옴 자는 저 앞에서도 이야기 되어졌듯이 온갖 진언의 왕입니다. 진언으로서는 최고죠. 그리고 온갖 부처님 법문이 이 옴에서 나왔다. 또 온갖, 상대를 지극히 찬탄하는 극찬의 의미가 있다. 또 상대를 섭복하는, 항복받는, 어떤 악을 물리치는 그런 항복의 의미도 옴에 있고 또 이 우주의 핵심이다 하는 그런 의미가 옴입니다. 살바는 ‘사르바’ 라고 하는데 ‘일체’란 말입니다. 못자는 또 표기상의 문제, 또 우리가 읽어온 습관의 문제, 그런 것들이 복합적인 일이 포함이 되어서 ‘붓다’ 가 못자 가 됐습니다. 모지는 ’보디’, 사다는 ‘사트바’ 사트바죠. 야는 ‘에게’라고 하는 위격입니다.
그래서 일체 부처님 보리 살타, 일체 불보살에게, 하는 그런 뜻입니다.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를 일체 불보살에게. 옴 일체 불보살에게. 그리고 사바하, 성취, 길상, 또 그런 일들이 완전하게 되어지이다. 원만성취 되어지이다 하는 그런 뜻에서 ‘사바하’ 라고 그러죠. 그러면 참회의 진실한 말은 뭡니까. 모든 부처님과 보살에게 내 모든 죄를, 내 모든 업을 던집니다. 그리고 내가 그리로 귀향합니다. 부처님께 그리고 보살에게 내가 돌아갑니다 하는 돌아간다고 하는 ‘나무’라고 하는 의미는 없습니다마는 끝에 ‘에게’ 라고 하는 ‘야’가 있기 때문에 내 모든 마음과 몸은 불보살로 되어지이다, 불보살에게 하나가 되어지이다, 하는 그런 의미가 이 속에 포함되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확실하게 성취되어지이다. 그것이 ‘사바하’ 겠죠.
그래서 이 진정한 참회는 뭡니까. 내가 불보살과 하나가 되는 것, 부처님과 보살과 하나가 되는 것, 일체 부처님과 보살과 하나가 되는 그것이 바로 진정한 참회다, 그런 말입니다. 앞서 마음이 소멸하고 또 죄가 따라서 소멸한다 하는 그 자리, 텅 빈 자리, 그 텅 빈 자리에는 우리의 진실 생명이 현현한 자리, 진실 생명은 뭡니까. 바로 부처님이요 보살이다, 하는 그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참회 진언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소멸할 때 그 마음 위에 떠 있는 죄 또한 소멸한다 이렇게 참회법을 말씀드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참회다 라고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을 좀더 우리가 이해하고, 이해를 돕는 뜻에서 예화를 몇 가지 말씀드릴까 합니다.
부처님 당시 유마거사가 있었고 또 우바리라고 하는 계행(戒行)이 아주 철저한 부처님의 제자가 계시죠. 우바리 존자, 아주 지계제일(持戒第一)이죠. 계행을 가지는 데는 제일인 부처님의 제자입니다. 그런데 '도흠'이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마는 어떤 수행자가, 두 사람이 산 중에서 수행을 하다가 잘못해서 큰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뭐 살인까지 범했다고 하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이 자신이 참회를 하고 뉘우치고서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서 지계로서 제일인 우바리 존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죄를 전부 설명을 하고 참회를 빌었습니다.
우리가 이러이러한 살인까지 저지른 그런 큰 죄인입니다. 참회를 부탁드리고 새롭게 수행할 수 있도록 새로운 사람으로 출발할 수 있도록 참회를 받아주십시오 하니까 이 부처님 제자인, 계행을 털끝만치도 범하지 아니하는 우바리라고 하는 철두철미한 부처님 제자는, 그런 일을 저질렀으면은 지옥이나 갈 수 밖에 없고 도저히 참회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불통참회(不通懺悔)라. 전통적으로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들의 죄는 불통참회다, 참회가 통하지 않는 죄다. 이렇게 해서 내쫓았습니다.
그랬을 때 이 사람들의 그 절망감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래서 참으로 크게 실망을 했습니다. 참회를 하고 뉘우치고서 새롭게 인간으로 출발하려고 그 훌륭한 성자 우바리에게 참회를 부탁드렸는데 참회를 받아주지 않았죠. 그래서 이제 우리는 몹쓸 사람이 되었는가보다, 참으로 지옥에나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인가보다 하고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하던 끝에 다시 최후로 유마거사(維摩居士)라고 하는 그런 훌륭한 거사분에게 가서 한번 이러한 문제를 상의해 볼 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두 사람은 그 유마거사에게 갔습니다.
유마거사라고 하면 아주 참 부처님 당시에 훌륭했던 그런 거사분이죠. 중국의 방거사(龐居士), 우리나라의 부설거사(浮雪居士)와 아울러 삼대(三大) 거사로 손꼽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유마거사를 찾아가서 우리가 이러이러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도저히 참회로써 새롭게 출발할 수가 없는지요, 우바리 존자에게 갔더니 도저히 참회가 안된다고 이제는 그 죄의 보(報)를 받는 그길 밖에 없노라고 이야기를 해서 마지막으로 유마거사를 찾아왔노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유마거사의 말이 이렇습니다. 그대들이 참으로 그런 큰 죄를 지었다면은 그 죄를 한번 가지고 오너라. 죄를 가지고 오면은 내가 그대들의 참회를 받아주겠다. 그대들에게 참으로 그 죄를 소멸해주는 참회의식을 치뤄주겠다.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도흠이라고 하는 이 사람, 그리고 또 한 사람, 두 사람이 가만히 죄, 죄의식때문에 사실은 그야말로 밤잠을 못 이루고 큰 절망과 비탄에 빠져서 있었는데. 그 죄가 너무나도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 죄의 무게는 천근 만근 같았습니다. 그 천근 만근 같이 너무나도 확실한 죄가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아질 수가 없었습니다.
유마거사는 분명히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그 죄를 가지고 오면은 참회시켜 주겠다 라고 이렇게 했기에 그 말 따라서 참으로 죄를 가지고 가려고 찾아봤던 거죠. 그래서 아무리 찾아보아야 사실은 죄가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이리 궁리하고 저리 궁리하고 끙끙대면서 몇 날 몇 일을 죄를 찾았습니다. 이제는 죄의 어떤 무게,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아니하고 죄를 참으로, 우리가 그렇게 고민해하고 그렇게 무거워하고 정말 이 생을 하직해버릴까 하는 그러한 마음까지 냈던 그러한 죄의 무게, 그렇게도 분명했던 죄의 무게를 아무리 이제는 찾을래야 그 죄의 실체를 그 실체를 찾을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찾을 길이 없어서 유마거사에게 가서 ‘거사님, 도저히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죄가 그토록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죄의 실체를 아무리 찾아보아야 찾을 길이 없습니다’ 하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마거사가 있다가 ‘그래, 그렇다면 나는 그대들의 참회를 이미 다 받았고 그대들은 이미 참회해 마쳤다. 그대들의 참회는 이미 끝났다’ 라고 이렇게 유마거사는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이 사람들은 마음이 환히 밝아졌고 그야말로 미몽에서 깨어났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이고 진실한 생명에 눈뜸이라고 우리가 표현할 수 있겠죠. 정말 상상치도 않던 그런 세계가 벌어진 것입니다. 환~히 밝아지고 몸과 마음은 날듯이 그렇게 가벼웠다고 하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가 스님이 노래한 영가 증도가(證道歌)에도
유이비구범음살(有二比丘犯淫殺)에 파리형광증죄결(波離螢光增罪結)하고
유마대사돈제의(維摩大士頓除疑) 유여혁일소상설(猶如赫日銷霜雪)이라,
이런 한시를 적을 수도 없는 입장에서 일러드려서 죄송합니다마는 두 사람이 범한 그 죄는 참으로 너무나도 큰데 그 죄를 참회하기 위해서 우바리 존자에게 찾아갔는데 우바리 존자의 반딧불과 같은 그 소견, 그 고집, 그 원리원칙은 오히려 사람을 더욱 더 절망에 떨어지게 한다, 그래서 반딧불과 같은 그런 소견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지요. 오히려 사람을 더욱 더 절망에 떨어지고 더 몹쓸 곳으로 몰아넣는 그런 일을 하고, 유마 거사는 그야말로 유여혁일(猶如赫日)이 소상설(銷霜雪)이라, 혁혁하게 빛나는 태양과 같은 그런 뜨거운 햇볕에 서리를 녹이는 것과 같이 그렇게 시원하게 죄를 풀어주더라. 그야말로 뜨거운 햇볕에 한 점의 서리가 거기 어디 남아 있겠습니까. 한 순간, 한 순간 그 서리는 녹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이 그와 같이 이 두 사람의 죄를 말끔히 참회시켜줬다 라고 하는 그러한 노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죄의 자성, 또 그 죄는 망령된 마음에서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 이러한 이치를 우리가 제대로 깨달음으로 해서 진정한 참회가 되는 것입니다. 또 이 참회라고 하는 것은 단순하게 죄의 문제 뿐만이 아니고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온갖 부정적인 그런 마음들, 부정적인 어떤 그런 생각들, 어두운 먹구름, 뭐 어떤 일을 할려고 할 때 또는 어떤 인간관계에서 어떤 어두운 측면들, 그런 어두운 측면들을 말끔히 불어버리고 아주 시원하게, 그야말로 깨끗하게, 밝은 삶을 펼쳐가는데 대한 마음 자세, 그 마음 자세를 갖는 아주 좋은 열쇠가 바로 이 구절에, 이 가르침에, 이 참회법에 담겨 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달마대사와 혜가대사의 관계도 역시 유사하죠. 혜가가 마음이 참 불안해서 정말 인생의 근본 문제 때문에 마음이 불안해서 달마대사를 찾아 갔습니다. 그래서 끙끙대고 그 불안한 인생의 문제를 들고 달마에게 ‘나는 이와 같이 인생의 근본문제 때문에 자꾸 불안하고 불안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죠. 그러니까 달마 대사가 말씀하시기를 ‘그 불안한 마음을, 그대가 그 불안해 하는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렇다면은 내가, 가져온다면은 내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겠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역시 혜가도 그 불안한 마음, 그토록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불안해 하던 그 마음, 천근 만근의 머리를 짓누르던, 마음을 짓누르던 그 마음, 그 불안한 마음을 찾아보았지만은 가져갈려고, 그야말로 달마에게 갖다 바치기 위해서 찾아보았지만 끝내는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역시 혜가의 말이 ‘역심불가득(亦心不可得)입니다, 그 불안한 마음 찾아보아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달마대사가 역시 있다가 ‘그렇다면 내가 이미 그대에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줬다. 이미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줬다’ 이렇게 달마대사가 말씀했죠. 그러니까 그 말을 듣자 마자 그야말로 혜가는 마음이 시원~하게 풀려버리고 날아갈듯이 가벼워졌고 그 불안한 마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야말로 온 우주와 인생의 근본이 환~하게 밝아졌다 라고 하는 그러한 기록이 있습니다. 달마와 혜가와의 관계에서 혜가의 눈을 뜨게 해준 그런 대목이 되겠죠. 앞서 유마거사와 두 비구와의 대화와 꼭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불교의 ‘죄무자성종심기’라고 하는 우리 <천수경>에서 외우는 이러한 대목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그런 이치가, 말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들의 일상에서 가능한 것이고 또 그런 이치는 우리의 마음의 이치이기 때문에 당연히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그런 이치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이런 예화를 통해서 또 그런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서 꼭 믿고 또 우리가 실천에 옮길 수도 있는 그런 내용이 되겠습니다. 참회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말씀 드리고 그 다음,
준제공덕취 (准提功德聚) 적정심상송(寂靜心常誦)
일체제대난 (一切諸大難) 무능침시인 (無能侵是人) 을 설명드릴까 합니다.
준제공덕취(准提功德聚)는 , 이 준제라고 하는 것은 관세음보살을 다른 이름으로 준제보살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또 ‘찬띠’라고, 정확한 발음을 하면 그렇게 되는데 ‘청정(淸淨)’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관세음보살을 또 다른 이름으로 하면 청정한 보살, 이렇게도 표현이 되겠죠. 준제보살이라고 하면은. 여기서 이제 준제보살의, 또는 준제주문의 공덕의 무더기, 준제공덕취라고 하는 것, 뭐 이것은 여의주, 뒤에 나오는 여의주, 우차여의주라고 하는 여의주의 의미와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청정한 공덕의 무더기, 여의주,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본래로 우리가 갖추고 있는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 지혜, 자비, 뭐 이러한 본성, 이것은, 이렇게 보면은 좋겠습니다.
어떤 주문, 또는 대다라니 이런 것을 여기서 지칭하기도 합니다마는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본래로 갖추어 있는 불보살의 위덕과 같은, 그런 지혜와 자비와 같은 우리의 본성을 여기서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은 되겠습니다.
적정심상송(寂靜心常誦), 적정한 마음, 고요한 마음으로 항상 외우라. 그러면은
일체제대난(一切諸大難). 적정한 마음으로 항상 외우라 라고 하는 게 뭐겠습니까. 우리의 본래의 진실 생명,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 그것을 항상 쓰고 항상 표현하고 그것을 항상 나의 참 생명으로 그렇게 활용을 하고 내것으로 그렇게 할 때, 이렇게도 우리가 해석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진언을 외우고 다라니를 외우는 그런 설명이, 글자대로 우리가 표현을 하면 액면적인 해석은 그런 것이 되겠습니다마는 궁극적으로는 앞서 설명한 그런 내용입니다. 일체제대난, 일체 모든 큰 난들, 어려움들, 재난들, 액난들, 이런 것들이 무능침시인 (無能侵是人)이다. 이 사람을 능히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온갖 어려움과 불행과 고통과 이런 어두움과 먹구름, 이런 것들이 난(難)이겠죠.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불행과 어두움, 먹구름, 온갖 부정적인 그런 면들 이것이 우리들의 삶에 침범하지 않을려면은 침범하지 않고 항상 그야말로 참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본성으로서의 삶을, 지장보살이나 관세음보살과, 또 부처와 같은 그런 삶을 펼칠려면은 우리들에게 갖춰져 있는 준제공덕취, 여의주, 그야말로 온갖 부처님의 무량공덕생명,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무량공덕생명을 한껏 내 것으로 발휘할 때 그것이 가능하겠죠.
그렇지않고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어떤 먹구름도 그 어떤 어두움도 조금이라도 당하지 않고 그런 불행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을 우리가 화택(火宅)이라고 하고 고해(苦海)라고 합니다. 그 화택의 어려움, 고통스러움, 고해, 괴로움의 바다, 괴로움의 바다에 빠져서 옷 젖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다 고통과 불행과 아픔과 좌절과 어려움, 이런 것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다 겪고 당하면서 살아간다라고 하는 그런 뜻이 되겠죠.
그런데 그런 것을 우리가 물리치고 그런 것 없이, 참으로 온갖 밝음으로, 정말 행복으로, 진정한 평화와 행복으로 삶을 누릴려면은 결국은 우리 본성의 어떤 공덕과 본성의 위덕을 내 것으로 활용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 벌어진 어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고 또 어떤 하나의 이로움을 내 것으로 만들고 이렇게 해서 완전한 삶으로 이끌어 간다 라고 하는 것, 이것은 어려운 일이고 또 그것은 불교의 이치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어떤 어려움과 불행이, 무능침시인, 우리들의 삶을 침범하지 않게 하는 길은 바로 우리들에게 가지고 있는 여의주, 뒤에 나옵니다마는 그리고 준제공덕취, 이 훌륭한 공덕의 무더기를 우리가 나의 진실 생명으로 알고 쓸 때 가능하다고 하는 그런 말씀이 되겠습니다.
오늘 공부 여기까지입니다.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