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하루가 거의 끝나갑니다. 시간은 오후 5시30분. 주섬주섬 이것저것 손가방에 넣기도 하고 손에 들기도 하고 가족과 함께 차에 오릅니다. 여느 때처럼 두 아이들은 깽깽대며 좋아라 웃어대고 아이들과 함께 나서는 아내와 저의 마음도 다소 가볍고 들떠있습니다. 집에서 차를 타고 잠깐 내려가면 괴산군에서 만든 레포츠 공원이 경치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바로 그곳입니다. 레포츠 공원. 차가 채 서기도 전에 아이들은 실린 자전거를 내려달라고 칭얼대면 이내 버릇처럼 엄마와 아빠의 정겨운 훈시가 떨어집니다. ‘아이구,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봐~아’ 배드민턴 라켓, 축구공과 아이들이 차고 노는 탱탱볼을 꺼내 풀어 놓았습니다. 첫째 5살 그리고 3살짜리 둘째 아이가 아직 늦은 해의 미동아래서 공을 이리 저리 차면서 넘어지기도 하고 다시 일어나서 차기도 하며 노는 동안에, 우리 부부는 배드민턴 공을 핑계삼아 하루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합니다. 생각해보니 하루에 아내와 눈을 맞추어 이야기하는 시간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평생 함께 살 사람과 눈을 바라보며 대화하는 시간이 적었다는 것은 그간의 시간속에서 알게 모르게 서로에 대해 소원한 감이 적잖았다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나름대로 시골 생활의 고즈넉함을 맛보며 살고 있는 우리도 이럴진대, 도시에서 맞벌이를 하며 살아가는 부부들이야 오죽할까 생각해봅니다. 부부간에 ‘금슬이 좋다’는 말은 ‘금슬상화’(琴瑟相和)에서 나온 말이지요. 즉 작은 거문고와 큰 거문고를 함께 연주할 때 둘의 음조가 잘 어울려 화락한 모습을 빗댄 말입니다. 악기를 연주해본 사람이라면 이 고사성어가 뜻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만 보자면, 같은 악보를 놓고 연주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마는 어떤 악기를 연주하건 간에, 연주자들에게 있어서는 약간의 조율의 흐트러짐이나, 연주 속도, 그리고 개개인의 주법에 따라서 동상이몽의 연주가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을 줄여보고자 연주자들은 소위 ‘리허설’(rehearsal)이라는 것을 하는 것이겠지요. ‘rehearsal’이라는 말은 실제 연주에 앞서 상대방과 자신의 연주를 다시(re) 들어보는(hear) 시간이겠지요. 그것은 재청취를 통해서 서로간의 간극을 좁혀보고 이해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어떻게 상대방에게 맞추어 연주해야 하는지를 알아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또한 ‘rehear’라는 말은 법률용어로 ‘재심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한번 잘못되었으면 다시 한번 고려하고 준비해서 재기하는 시간을 뜻하기도 합니다. 군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연습은 실전처럼! 설전은 연습처럼!’이라는 말에서와 같이 연주자들은, 군인들은, 그리고 운동선수들은 그들이 하는 한 동작 한 동작에도 최선을 다하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 말은 연습 자체도 실전과 다를 바 없다는 뜻입니다. 실제 경기에서 힘을 다해 경기하는 선수들의 모습은 다름 아닌 연습을 얼마나 했는가를 그대로 보여주는, 즉 실제 경기는 그동안 연습한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연습과 실전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겠지요. 저와 아내가 하루, 그리고 이틀, 그리고 횟수를 거듭할수록 공이 손에 착착 달라붙기도 하였지만, 이것은 그저 운동이 아니라, 우리 인생을 함께 호흡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배드민턴을 치면서 ‘미안’이라는 말로 실수를 숨겨보기도 하면서 상대방의 표정을 읽는다든지, 전과 다르게 스윙이 폼나게 보인다든지, 빈틈으로 공을 살짝 찔러 넣는 기술을 저절로 배운다든지 하면서 우리 부부는 일상에서의 금슬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에게 조금 여유가 생기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한참을 땀을 내고 있자면 이제 아이들이 자연스레 등장합니다. 첫째 아들 녀석이 짜증을 부리며 동생이 자기 공을 자꾸 뺏으려 한다고 옆으로 옵니다. 그러면 아직 잘 알아듣지 못하는 찬이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툴툴대면서 엄마에게 달려들어 배드민턴 공을 빼앗습니다. 그것으로 배드민턴 대회는 막을 내립니다. 이제는 아이들과 함께 운동장으로 가서 4인 축구를 합니다. 엄마 아빠와 함께 하는 공놀이에서 아이들은 언제나 영웅이 되기마련입니다. 아빠는 엉뚱하게 미끄러지듯 넘어지면서 골을 허용하고 엄마는 아이들을 부축이며 ‘히야호~’ 탄성을 자아냅니다. 아이들은 마냥 좋아하면서 자신이 넣은 골에 만족하며 또 해보기를 졸라댑니다. 공을 주워다가 주고 다시 골을 허용하기를 반복하다가 이번에는 아빠가 ‘괘씸한’ 인물로 역할 합니다. 아이들에게 공을 주지 않고 이리저리 몰고 다니면서, 턱없이 헉헉대다가도 싱글싱글대며 쫓아오는 아이들을 피해 도망을 다닙니다. 결국 뭐가 뭔지 모르는 둘째 녀석은 철없이 계속 쫓아다니고 있지만, 뭔가 감 잡은 첫째 아들은 이내 짜증을 내버립니다. 아차! 하는 순간 엄마는 옆에서 강도를 높여 제게 면박을 줍니다. 그제서야 아내의 말이 귀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만회를 위해 시간을 조금 더 냈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첫째 아이를 달래기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운동장을 10바퀴 돌고 놀이터에 있던 가족들과 함께 수돗가로 갔습니다. 수돗가에서 아이들은 저마다 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벌컥벌컥 마셔댑니다. 현대인들에게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먹는다는 것은 위험한 장난일 것입니다. 제 기억으로 이처럼 물을 마셨던 마지막 기억이 1980년 어느 초등학교 시절 점심시간이었습니다.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실컷 뛰어 놀다가 수돗가로 달려가 꼭지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5학년 때부터인가는 ‘끓인물 먹기’와 관련된 갖가지 포스터와 표어가 나돌고, 그 후로는 학교 선생님들께서 번갈아 수돗가를 지키고 서 있는 희귀 풍경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그것은 뭔가 이상하고 불편한 장면이었지만, 햇수를 거듭하면서 수돗물은 끓여 마셔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지요. 아직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은 물이 깨끗하답니다. 수질검사를 위해 나온 직원들도 놀랄 정도라는군요. 수안보에서 장사하는 분들이 꼬박꼬박 우리 마을에 와서 물을 떠가는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한참을 놀았습니다. 이제 집에가서 아이들과 샤워를 하고 밥을 먹고 재워야지요. 그리고 나서 몇가지 정리해야 할 일들이 생각이 납니다. 매일 이렇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운동을 오랫동안 하지 않다가 몇 주 전부터 이런 시간을 틈틈이 갖고 있다는 것에 저 스스로도 놀라고 대견스럽기까지 합니다. 몸이 제게 좋은 신호를 보내며 잘하고 있다는 말을 하는 것만 같습니다. 놀이는 즐거움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듯 합니다. 누구든 함께 어울려 목적없는 놀이에 참여하다 보면 도리어 애써 달음박질 할 때보다도 삶의 달콤한 열매를 더 깊이 맛보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속도와 과중한 업무가 우리의 시간을 먹어치워 버리고 있는 요즘, 즐거운 일이나 일출, 친절한 말 한마디, 아이들과의 술래잡기 놀이나 공놀이, 그리고 냄비 속에서 끓고 있는 구수한 찌개냄새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일이 점점 사라져 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합니다. “행복은 시간이라는 비옥한 토양 속에서만 자라난다”는 라니에리의 단순한 일상에서의 진리를 되새겨 봅니다. 나 어릴 때 우울해지면 울아버지 슬며시 내게 오셔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해주시던 말씀이 있지 항상 실망할 필욘 없어 너무 많은 꿈들이 네 앞에 있는 걸 중요한 그 날이 올 걸 기다리며 마음을 편하게 가져 노는 게 남는 거야 어렸을 땐 뛰어 놀아라 튼튼해지도록 젊었을 땐 나가 놀아라 신나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높은 뜻을 알 것만 같아 있는 실력 발휘 하려면 긴장해선 되는 일 없어 너 자신을 몰아치지마 그런 딱딱한 마음만 늘 가지고는 매일 똑같은 생각만 네 머리속에 맴돌고 있는 거야 노는 게 남는 거지 어려서는 뛰어 놀아라 튼튼해지도록 젊었을 땐 나가 놀아라 신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