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 연> - 나를 깨우는 짧고 깊은 생각 -
배철현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4부 용기, 자기다운 삶을 향한 첫걸음
몫; 당신의 마아트는 무엇인가
‘몫’은 신기한 단어다. 내게 맡겨진 절체절명의 임무이자 나만이 할 수 있고 나의 개성이 마음껏 드러나는 그 어떤 것이다. 몫은 ‘목숨’을 줄인 글자가 아닐까.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일생을 통해 추적하고 발견할 가치가 있는 어떤 것,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과업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의 몫은 무엇일까. 우리는 대개 학교에서 남의 이야기만을 학습하고 남의 길을 따라가거나 남이 만들어놓은 논리를 추종한다.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은 “남을 부러워하는 것은 무지이며 흉내 내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말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를 세우기전에 중요한 의식을 치렀다. 바로 타조깃털을 피라미드가 세워질 무게중심에 정확하고도 단호하게 놓는 것이었다. 이집트어인 성각문자에서는 이 깃털 모양을 ‘마아트(maat)’라고 했다. 이는 흔히 ‘정의/진리/조화/질서’ 등으로 번역되며, ‘도(道)’나 ‘샬롬’처럼 우주 삼라만상의 운행 원칙을 설명하는 철학적 개념이다.
마아트는 정사각형의 중심이 아니라 주어진 지형에서 전체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최적의 지점이다. 산술적으로 계산된 중간 장소가 아니라 그 순간의 지형에서 가장 알맞고 적당한 장소다. 이 유일무이한 장소가 230만개의 바위를 충분히 지탱할 수 있는 역동적인 오메가 포인트다.
마아트는 피라미드 건축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인간 삶의 궁극적인 비밀이기도 하다. 고대 이집트의 『사자의 서』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 사람의 모든 행위가 기록되어 있다고 믿었던 심장을 마아트와 저울로 달아 서로 평형을 이루어야만 영원한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영원한 세계로 진입하려면 자신이 꼭 행해야 할 마아트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마아트란 유일무이한 나의 몫이다. 그렇다면 나의 마아트는 무엇일까.
열정;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지와 상관없이 운명적으로 마주한 환경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 외의 세상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가 편협함을 깨닫고 그로부터 탈출해 다른 여러 세계를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핵심이다. ‘에듀케이트(educate)’는 자신이 처한 환경과 운명의 부족함을 절실하게 알아차려, 자신을 용감하게 ‘밖으로(e)’ ‘이끄는(duction)’ 행위다. 거기에는 황홀감이 기다리고 있다. 이 낯설고 불편한 시공간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견디는 노력이 교육이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를 자기답게 만드는 여정의 첫걸음이다.
‘열정’은 대개 자신이 지닌 상처나 콤플렉스를 채워 온전한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마음속 깊이 감춰져 있던 보물이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차츰 빛을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열정은 ‘속의 나’를 ‘겉의 나’로 거침없이 이끌어주고, 겉의 나를 통해 속의 나를 완성시키는 도구다.
그러나 열정에는 불안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내가 간절히 원해도 그 대상은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안하고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을 인내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패션passion’은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이해할 수 없고,낯설고,어렵고,불편한 현실을 어깨에 메는 행위’다. 그래서 열정은 위험한 모험이자 초인적인 용기가 따라야 한다.
열정은 자신의 성장을 막고 있는 콤플렉스를 깊이 성찰함으로써 민낯을 드러낸다. 자신의 약점을 깊이 응시하다보면 ‘몰입’ 상태로 진입한다. 스스로 자신의 콤플렉스를 직시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이 몰입의 과정 속에서 바로 나만의 열정이 솟아난다. 이 열정의 단계에 진입하면 내 삶에서 부차적이고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자연스럽고 과감하게 제거하게된다.
열정은 자기 혁신의 첫 걸음이다. 나에게도 나의 모든 것을 걸 만한 열정이 있는가. 그 열정이 너무 오래 잠들어 있지는 않은가.
믿음;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유일한 힘
안정과 편안이라는 유혹을 떨쳐내려면 불편하고 낯선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엑스터시(ecstasy)’는 어제의 상태로부터 자신을 이탈시키는 행위인데, 원래는 ‘자신의 과거나 사회가 부여한 수동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가려는 투쟁’을 의미한다. 무아(無我)의 상태로 진입하려는 마음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이다.
그러나 나만의 길을 가겠다는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기란 무척 어렵다. 이때 결심을 단단하게 여며주고 상기시켜주는 도우미가 바로 운동이다. “아침마다 달리십시오. 30초를 달릴수있다면 마라톤도 할수있습니다.”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반드시 강물을 거슬러 헤엄쳐 ‘갈 때까지 가보는 힘겨운 노력’이 필요하다. 일본에는 하늘로 올라간 물고기신화가 있다.
코이라는 물고기는 다른 물고기에게 없는 호기심이있다. 자신에 대한, 세상에 대한 그리고 자신과 세상의 기원에 대한 호기심. 강끝에 무엇이 있는지, 자신의원천(源泉)은 어디인지, 나아가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자신에게 강물을 거슬러 오를 용기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숱한 장애물과 맞닥뜨리면서도 오히려 그것들을 자신을 단련시키는 계기로 삼는다. 마지막에는 지느러미와 꼬리를 날개 삼아 폭포 위로 날아가기로 마음먹는다. 믿음은 확고했다. 그 순간 그는 한 마리 용이 되어 날아올랐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도 병자를 고쳤을 때 자신이 그를 고쳤다고 말하지 않고,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한다. 자기믿음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가이다.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것은 매순간 자기 확신과 그 확신을 지켜내는 인내다. 끊임없이 우리를 다른 무엇이 되라고 유혹하고 강요하는 세상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은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 그것이 참된 성공의 이미는 아닐까.
아우라; 당신의 아우라는 얼마나 숭고한가
숭고함은 흔히 아는 선과 악을 넘어서는 것으로, 그 자체로 감동을 자아낸다. 아름다움은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깨달아 알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 자신의 몸에 배어들기 시작하는 아우라’를 말한다.
아우라는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고유한 ‘진정성’의 표현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가 타인이 만들어놓은 우주 창조 신화나 종교의 교리보다 훨씬 숭고하다.
착함;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인내로써 지켜내는 행위
자립을 위한 첫째 조건은 편하고 익숙한 장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인생 최고의 가치는 자비(慈悲)다. 붓다는 상대방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 상대방이 사랑하는 것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마음인 ‘자(慈)’와, 상대방이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할 수 있는 마음, 상대방이 슬퍼하지 않는 환경에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마음인 ‘비(悲)’를 실천했다.
보살(菩薩)이란 자비를 깨닫고 묵묵히 실천하는 존재다. 붓다는 깨달음 직전에 열반의 희열로 사라지기보다 세상 고통의 한가운데로 돌아와 사람들과 함께 희로애락을 견디기로 결심하고 거침없이 행동으로 옮겼다.
이것이 붓다가 말한 ‘도덕적으로 사는 것’의 의미다. 도덕적이란 율법이나 관습적 규칙이 아니라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며 세상 고통의 한가운데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함께 희로애락을 경험하며 자기 삶의 의미와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가는 것이다.
종교인이란 무엇을 믿고 주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것을 알아차려 집중하고 행동하는 자다. 종교는 흔히 신념체계로 잘못 알려졌다. 하지만 종교에서 믿음이란 자신의 삶에서 소중한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그과정에서 습득한 행동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다.
성급하고 편협한 종교 간의 비교는 종교 간에 우열을 매기고 자기 종교의 기준에서 다른 종교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기 십상이다. 종교마다 나름의 독특한 상징체계와 행동 양식이 존재한다. 이것들을 깊이 연구해보면 각각의 종교에서 지향하는 ‘길’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착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브(tob)’는 ‘선하다’라는 뜻과 ‘향기’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착함이란 자신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찾아 인내로써 지켜내는 행위다. 그리고 ‘나는 향기로운 존재인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연습하는 삶이다. “그냥 좋아서.”
옳음; 양심을 용기 있게 행동으로 옮기는 것
고대 인도의 『마하바라타』에는 유디스티라 왕의 다섯 형제들과 아내 드라우파디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천상으로 들어가기를 꿈꾸며 히말라야를 정복하고자 한다. 이 산은 우리 마음속의 심연의 산이다.
아내드라우파디와 네 형제들은 집착과 욕망을 다스리지 못해서, 자신을 최고라고 착각하는 자만심(自慢心) 때문에, 자신의 외모에 도취되어 편견에 사로잡혀서, 자신을 위대한 영웅으로 착각해서, 혀끝의 자극에 탐닉해 무거워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서 결국 차례로 추락하고 만다.
유디스티라는 고행길에 만난 못생긴 개와 굶주림과 외로움을 함께 나누며 마침내 인드라 신을 만나지만, 개는 하늘로 오를 수 없다는 말을 듣고는 개와 함께 산을 내려간다. 그러자 인드라 신은 유디스티라에게 “그 개는 네 인격의 근원인 다르마다. 이제 너는 하늘로 올라갈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욕심을 버리고 의로움에 헌신하는 다르마! 늙고 못생긴 개가 바로 다르마, 즉 그사람의 근원인 것이다.
이슬람 사람들이 라마단기간에 금식하는 이유는 음식이 인간 욕망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동체안에 배고픈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이들과 같은처지에 자신을 던짐으로써 연민을 연마하는 것이다. 한 사회가 순리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게 그 사회의 약자를 인식하고 헤아리는 마음인 연민이다. 그래야 법이서고 사회가 순리대로 작동한다.
개로 상징되는 다르마는 다름 아닌 인간의 ‘옳음’이다. 옳음이란 유디스티라가 산 정상에 오르기까지 보여준 용기나 지혜, 정의가 아니라, 늙고 못생긴 개를 자신의 형제로 삼고 끝까지 지켜내는 힘이다. 자신의 양심이 자신에게 해가 되더라도 그 것을 용기 있게 행동으로 옮기는 내적인 훈련이자 원칙이다. 자신 속에 숨어있는 옳은 양심을 행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지상을 하늘나라로 만드는 고귀하고 위대한 힘이다.
빛의 축제; 자기 자신이 곧 별이다
샛별은 밤이 가장 깊을 때 떠오르는 별이다. 이 별은 누구나 그리고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별이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인생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수용할 때 비로소 나타나는 별이다. 이 별은 스스로를 깊이 관조할 때 슬그머니 빛나는 마음의 천사다. 자신을 세상의 빛과 소리가 들어오지 않는 거룩한 공간에 놓아둘 때에야 비로소 등장하는 이 별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1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이 동지(冬至)다. 동지는 어둠이 가장 깊은 때인 동시에 빛을 꿈꾸게 하는 때다. 어둠, 추위, 죽음을 상징하는 동지가 물러나면 빛, 따스함 그리고 생명이 약동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동지는 절망과 희망이 현묘하게 섞인 시간이자 죽음과 삶을 가르는 문지방이다.
고대 페르시아에 ‘빛의신’을 섬기는 ‘마기(Magi)’라는 사제가 있었는데, 이들은 천체를통해 자신들을 관찰했고 미래를 예측했다. 이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날이 바로 동지다. 『마태복음』에도 마기들이 ‘동방박사’로 등장하는데, 저자는 페르시아 사제인 마기가 바로 예수의 탄생을 감지한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누추하고 허름한 곳에서 태어났다. 메시아는 누구나 쉽게 예상하는 편안하고 안락한 장소가 아닌 누추하고 낮고 허름한, 그래서 삶의 심연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태어난다.
샛별은 가장 깊은 밤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 별은 자신이 거주하는 장소 안에서 깊이 몰입할 때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는 마음의 빛이다.
동방박사처럼 동짓날 샛별을 볼 혜안이 우리에게도 있을까. 스스로를 자신이 마련한 거룩한 경계 안에 가둘 수 있을까.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하늘 한번 쳐다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껏 그래왔던 나와 용기 있게 이별할 때 하늘은 내게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숭고하고 찬란한 별을 선물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머물 것처럼 행동하십시오.
그러나 내일 죽을 것처럼 영생을 준비하십시오.
- 무함마드
에필로그 이제는 나를 돌아볼 시간
배움이란 자신이 안주하고 있는 시공간에서 탈출해 자신에게 유일하고 진실한 자아를 발견하고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기꺼이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이다. 이 진실한 자아를 발견하고 장소가 바로 심연(深淵), 우리가 위대한 나를 만나기 위해 들어가야 할 심오한 ‘마음의 연못’이다.
이 심연 속에서 우리는 이익에 매몰된 오래되고 보잘것없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쏜살같은 세월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남들이 세워놓은 기준에 따라 살아간다.
또한 자신의 유일한 임무보다는 가족이나 친구 혹은 사회가 요구하는 그 어떤 허상(虛像)을 위해 맹목적으로 행동한다.
우리가 자신에게 유일한 임무와 길을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내를 가지고 자신을 응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심연은 바로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는 거룩한 공간이다.
위대한 개인은 매순간 자신을 독수리의 눈으로 관찰하고, 자신이 미래에 이루어야 할 임무를 위해, 지금 이 순간 자신의 혼과 영을 다해 최선의 경주를 하는 사람이다. 심연이 가져다준 자신의 고유한 임무가 그 사람의 호흡이며 몸가짐이다. 그 임무에 지속적으로 몰입되었을 때, 그 사람만의 숭고한 인격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오늘 아침도 나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마술의 공간이자 거룩한 공간인 심연 속에서 하루를 시작하자. 그리고 다짐하자. 나는 오늘 인생의 초보자가 되겠다고. 그리고 오늘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