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로 일천리 25 팔조령~우록
경북 청도군 이서면을 지난 영남대로는 팔조령을 넘어 대구광역시 달성군 경계로 들어선다. 대구(大邱)는 조선 정조 이전 문헌에는 '大丘' 로 쓰였다. 영조실록에는 이와 관련한 사실 기록이 있다. 대구부의 이양채(李亮 采)라는 유생이 구(丘)자는 공부자(孔夫子)의 이름자이므로 고을 이름에 붙여 부르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상소문을 쓴 내용이다.
당시 영조는 "아! 근래에 유생들이 신기한 것을 일삼음이 한결같이 어찌 이와 같은가? 3백여 년 동안 본부(대구부)의 많은 선비들이 그만 못해서 말없이 지내왔겠는가?" 하고 질책했다. 어쨌거나 다음 임금부터 구(丘)자 옆에 우부방(○)이 붙었으니 유생들의 고루한 뜻이 관철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달성(達城)은 신라 때 달구화현(達句火縣)으로 불리다가 대구현으로 고쳐진 뒤 고려 초에 지금의 수성구 일대에 자리했던 수창군(壽昌郡)에 속했다. 조선 숙종 이후 대구부는 오늘날 달성군을 포함한 대구광역시 전역 중 북구 칠곡지구, 동구 안심동, 수성구 고산동을 제외한 지역으로 권역이 넓어졌고 청도의 각북면, 풍각면, 각남면 등 3개 면까지 포함했다.
이러한 대구부역은 1906년 지방 구역 정리에 의해 청도군 4개 면이 청도로 빠져나갈 때까지 계속되다가 1913년 달성군이 독립하면서 급격히 축소된다. 그러나 달성군은 대구시역 확장으로 조금씩 편입되다가 급기야 1995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구광역시의 유일한 농촌군으로 완전히 포함됐다.
팔조령을 넘어서면 같은 경북권이면서도 청도와 언어, 습속, 문화가 다소 다르다. 청도문화는 차라리 밀양에 접근해 있다. 이에 대해 고지도 연구가 이우형씨(63)는 "행정 편의에 따라 마구잡이로 경계선을 그어 놓은 지금의 지도는 산줄기 중심의 우리 문화와는 거리가 멀다" 며, "백두산과 지리산을 등뼈 삼아 사이사이의 산맥 공간을 한 문화권으로 파악하는 것이 맞다" 고 지적한다.
팔조령과 팔공산 사이를 금호강 문화권으로 본다면 그 남쪽은 밀양권, 북쪽은 안동권으로 나눌 수 있고 방언이나 농요, 기후 등에서 이 주장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같은 경상도라도 산맥으로 나뉘는 경남 구포와 기장, 울산 말씨가 다르고, 강원도 속초까지 경상도 방언이 퍼져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 '너거 집에 모심고 이틀 있다가 우리 집에 와라. 우리도 모심어야지'라는 조상들의 말은 산맥 중심으로 파악한 국지 기상권을 나타내는 말이다." 산맥을 넘으면 언어, 습속뿐만이 아니라 기후도 달라진다는 것이 이우형 씨의 당연한 주장이다.
팔조령은 대구 달성군 가창면과 경북 청도군 이서면의 경계를 이룬 삼성산~봉화산~상원산을 잇는 해발 3백60m의 고도에 위치해 있다. 고려대 최영준 교수의 말을 빌리면, 팔조령 고갯길은 대부분 길이 진흙길이었던 것과는 달리 넓적한 돌들로 깔아 틈새를 흙으로 메운, 당시로는 보기 드문 박석(薄石) 포장길이었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기 힘들다.
팔조령 산장휴게소 서쪽 뒷산 1백m 정도 지점에는 봉수대 흔적이 희미한 석축과 함께 남아있다. 팔조령 봉수대는 한반도의 각 방면에서 한양에 이르는 5개 간선봉로 중 부산 다대포에서 출발한 제2직봉선상의 봉수로, 밀양 추화산성~청도 남산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 대구부 남쪽 수성현의 법이산 봉수대로 넘겨주는 봉수대이다.
봉수는 횃불과 연기 신호가 여의치 않을 경우, 봉졸이 육로로 달려 신호를 전달해야 해 대부분 대로변에서 멀지 않은 산정에 위치한 점을 살펴볼 수 있다.
팔조령 고개 정상에는 현재 지방도 911호가 통과한다. 동래를 출발한 길손이 이곳에 당도하는 데는 대략 6일 정도가 걸린다. 대구읍성을 벗어나면 한양까지 8일 정도를 남겨놓은 셈이다.
팔조령에서 수성구에 이르는 영남대로는 대체로 911호 지방도를 벗어나지 않지만 팔조령에서 산을 내려서는 약 1.5km는 구간이 크게 다르다. 911호 지방도가 산허리를 구불구불하게 돌아내린 반면, 영남대로는 곧장 계곡을 타고 내려 현재의 석주사 뒤편 산등성이를 타고 현재 팔조령 터널 공사가 진행 중인 산 중턱에서 2백m가량 아래쪽에 위치한 대원개발주 채석장 입구로 빠져나간다.
열악했던 조선의 도로 사정을 다시금 느끼게 하는 구간으로, 사람들이 많이 다닌 길이 아니었다면 1년만 묵혀도 길의 흔적이 없어질 판이다. 인근 마을에 사는 이태재씨(38)는 "이 길은 지금도 묘소 벌초 등의 목적으로 청도 이서로 넘어가는 길로 쓰이고 있다" 고 말했다.
두어 곳의 음식점과 5~6채의 가옥이 남아 있는 산기슭 도로 좌우에는 짐터라는 지명이 남아있어, 산길을 오르내리는 길손이 짐을 내려놓고 쉬어 간 자리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팔조령 터널이 뚫리면 911호 지방도를 중심한 팔조령 고갯길은 완전히 전설에 묻힐지 모른다.
짐터에는 신천의 한 발원지인 팔조령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이 장마철에는 제법 물길을 이루고, 지금은 6m가량의 짧은 다리가 옛길과 911호 지방도를 연결해 준다. 대구읍성 방면으로 1.2km 정도 더 가면 녹문으로 불리는 '주막껄' 이 있다.
녹문은 왼쪽 산 계곡의 우록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으로, 팔조령을 지나온 길손이 이곳에서 허리춤을 풀고 막걸리 잔술이나 걸치기 좋은 지점이다. 한때는 이곳에 기생들의 치맛바람도 제법 불었다는 마을 주민들의 말이 전해진다.
녹문삼거리에서 우록골까지는 3km 정도. 팔조령에서 여기에 이르는 길가에는 소위 러브호텔로 불리는 장급 여관이 14개, 대형음식점이 40여 개나 자리해 과거의 영화(?) 를 잇고 있다.
산 사이로 난 계곡길이어서 길손은 지금도 이 시설들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옛날 신선들이 내려와 사슴과 노닐었다는데서 이름 붙여진 우록(友鹿) 주변에는 사슴 농장이 4개나 자리해 땅이름이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 취재기
권영철(대구효성가톨릭대). 김택규 명예교수(영남대)가 동행한 6월 말 어느 하루. 청도~대구 구간 취재 도중 청도군 각남면 전주 이씨 재실 뒷산에서 산불이 나자 두 교수는 아는 사람이 그곳에 산다며 핸들을 돌리게 했다.
산불 구경까지는 좋았으나 좁은 시골 들길로 밀려드는 소방차량들 덕분에 예정에 없던 밀양까지의 비포장 산길을 한 시간가량 걸려 넘어야 했다. 곳곳에 우거진 밤나무 숲을 지날 때, "춘향이도 밤나무 숲 아래에서는 속옷을 벗는다" 는 권 교수의 걸쭉한 입담에 한바탕 웃고.
일행은 산불 덕분에 청도~밀양 구간의 말로만 듣던 옛길을 답사할 수 있었다. 밀양에 내려섰는데도 청도면이라는 지명이 있고 청도초등학교가 있어, 주민 생활권을 무시한 일제의 자의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실감했다.
특별취재팀
997-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