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1년 8월 9일 목요일 흐림, 맑음, 비, 바람.(프랑스)
아침 식사를 오랜만에 집에서처럼 먹었다. 김치에 무말랭이, 그리고 소고기 갈비찜, 빵빵하게 배를 채웠다. 여행 중에는 식사를 거의 본능적으로, 동물적으로 먹는 것 같다. 민박집의 좋은 점도 있구나. 바쁜 주방의 환경 속에서도 염치없이 우리는 밥을 할 수 있게 부탁해서 아침에 점심을 준비했다. 기상은 오전 6시, 출발은 오전 7시 30 분경에 숙소를 나섰다. 차는 로뎀의 집 마당 안에 안전하게 주차시켜 놓고 발과 전철로 여행을 시작한다. 파리 시내는 운전하는데 좀 복잡하다. 그리고 주차가 문제다. 차 없이 발로 다니는 것도 맘 편하고 좋다. 배낭에 카메라와 기초적인 것만 넣어서 등에 지고 나섰다.
지하철을 이곳에서는 메트로라고 하는데, M자로 표시되어있다. 파리 시내 남쪽 7호선 Villejuif - Louis Aragon이 우리의 출발역이다. 지도에서 보면,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파리 오를리 공항(Aéroport de Paris-Orly)이 나온다. 전철 표를 10장 한꺼번에 사면 61프랑(10,980원)이다. 거의 7 장 값으로 사는 것이다. 표를 구매해서 전철을 탔다. 전철은 서울보다 쉬운 것 같다. 전철 문은 자동이 아니라 내리거나 타는 사람이 스위치를 누르거나 당겨서 문을 열어야한다. 수동이다. 의자는 우리와 다르게 마주 보거나 기차 의자 같이 생겼다. 우리는 일률적인 의자 배열인데 이곳은 다양한 배열이다.
오래되어서 약간 낙서와 지저분함이 있다. 전철 안에는 출근 시간인데 모두 다, 거의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 나라가 선진국인지 아닌지를, 문화인인지 아닌지를, 전철 속의 책 읽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교하면 알 것 같다. 우리는 파리 중심을 향해 간다. 샤틀레역(Châtelet)에서 내려서 시테(Cité)섬으로 가려한다. 출구는 SORTIE이다. 드디어 파리 중심에 섰다. 신형 빌딩은 눈에 보이지 않고 모두 오래된 건물들이다. 도로도 오래되었고, 가로등, 거리의 사람조차도 모두 오래된 듯하다. 아침 일찍 나섰다. 말로만 들어오던 센 강, 감격과 동시에 실망이 온다. 생각보다 강이 좁고 작다. 내가 파리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감격이다. 오성쥬(Pont au Change)교를 건너 시테 섬으로 들어갔다.
앞에도 다리, 뒤에도 다리, 다리가 많은데 각각 이름이 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이 콩시에르주리(Conciergerie)에 있는 시계탑이다. 시테 섬 궁전 시계탑(Tour de l'Horloge du palais de la Cité)이라고 한다. 콩시에르주리의 입구, 동쪽 끝, 빨레 거리의 모퉁이에 있는 네모진 탑이다. 높이 47m의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시계탑이란다. 궁전 시계탑(de l'Horloge du palais de la Cité). 이 탑에 설치된 시계는 1370년 파리 최초의 공공 시계로 세워졌다. 하단부에 라틴어로 아래와 같은 문구가 적혀 있는데 의미가 인상적입니다. MACHINA QVAE BIS SEX TAM JVSTE DIVIDIT HORAS JVSTITIAM SERVARE MONET LEGES QVE TVERI 우리말로 번역하면 "이 기계는 시간을 열둘로 나눔으로 정의를 보호하고 법을 수호하는 것을 가르친다". 지금의 것은 1852년에 개축된 것이란다. 센 강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조차도 분주함이 없다. 베르갈랑 광장(Square du Vert Galant)에 있는 앙리4세 기마상(Statue Equestre d'Henri IV)을 만났다. 시테 섬은 센 강에 떠 있는 작은 섬인데 파리 발상지로 기원전부터 골(갈리아Gauls)인들의 교역지로서 거리가 형성되었다. 파리라는 이름도 BC 60년 경 이 섬에 살고 있었던 파리시(Parisii)족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단다. 그래서 파리시의 문장(紋章)에서 영원히 가라앉지 않는 돛단배는 이 시테 섬을 상징한다고 한다. 앙리4세 기마상 앞에는 자크 드 몰레 기념동판이 있다. 자크 드 몰레(1243년경-1314년 3월 18일)는 성전기사단의 최후의 총장이다. 마지막 총장이라는 점에서 가장 유명한 십자군 중 하나로 꼽힌다.
자크 드 몰레는 십자군이 기울어가는 시대에 성지의 상황을 타개하고자 기사수도회의 내부 개혁을 꾀했다. 그러나 유럽 세계의 십자군에 대한 지지는 이미 쇠락해 있었고, 십자군 기사단의 부를 탐낸 무리들이 십자군 기사단을 해산시키려 드는 내우외환의 상황이었다. 결국 1307년 십자군 기사단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던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자크 드 몰레를 비롯한 프랑스 십자군 간부들을 긴급 체포했고 고문을 동원해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드 몰레는 나중에 재판에 가서 고문에 의한 자백을 번복했지만 기사단은 1312년 해산당하고 드 몰레 자신도 1314년 노트르담 대성당 앞 센 강의 시테 섬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도핀 광장(Place Dauphine)으로 길을 건넜다. 이 광장은 앙리 4세가 1607년에 왕자를 위하여 건조하였는데 양쪽으로 벽돌과 흰 돌로 지은 똑같은 모양의 4층 건물이 줄지어 있었단다.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14번지, 26번지의 집들 뿐 이란다. 도핀 광장에서 길을 더 걸어가니 웅장하고 묵직한 건물, 최고 재판소(팔레 드 쥐스티스Palais de Justice)가 나타난다. 이곳은 옛날부터 정치와 행정, 군사의 중추부가 있던 곳으로, 로마인들도 그들의 본거지를 이곳에 두었고,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도 이곳에 궁전을 짓고 살았다. 구내에는 역사적 건조물로 샹트 샤펠(Sainte-Chapelle예배당)과 콩시에르주리(Conciergerie) 등이 있다. 하늘은 맑고 깨끗하나 기온은 약간 쌀쌀하다.
샹트 샤펠(Sainte-Chapelle)예배당으로 갔다. 이 교회는 최고 재판소 안뜰에 서 있는 고딕 양식의 예배당이다. 1239년에 콘스탄틴노플 황제 보두앵 2세가 기증한 그리스도의 가시면류관과 십자가를 보관하기 위해 루이 9세가 세운 것이다. 높이 75m의 첨탑이 솟아있는 동쪽에 십자가를 안고 있는 아름다운 천사상이 있다. 워낙 오래되 무너질 것 같고 부서질 것 같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스테인드글라스가 내부에 있다는데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만큼 끌리지 않아 입구에서 살펴보고 돌아섰다. 콩시에르주리(Conciergerie)의 입구로 걸어간다. 프랑스 혁명에 이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이다. 옛 궁정의 “관리자”라는 이름을 가진 콩시에르주리는 왕궁의 관리인들이 생활하던 곳으로, 중급과 하급의 재판소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때는 혁명재판소의 대기실로 사용되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2,600여명의 귀족과 혁명가들이 최후의 한때를 보낸 곳이다.
동물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이 속담이 절실하게 동의되는 "이름의 방"이 있다. 2층에 있는 공간으로 1793~1795 사이에 혁명재판소에서 심판받은 4,000여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공포 정치 밑에서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최후의 나날을 보냈던 독방은 이제 속죄의 예배당이 되었다. 대혁명 당시 공포 정치(Reign of Terror)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로(Maximilien Robespierre)의 흉상도 있다. 흉상 상단에 적힌 글귀는 "미덕을 결여한 공포는 치명적이고, 공포를 결여한 미덕은 무기력하다"라는 의미로 혁명의 토대가 미덕과 공포라는 그의 연설중의 일부란다. 결국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콩시에르주리에서 처형을 당했다고 한다.
건물은 고딕양식의 탑 3개와 3개의 홀로 되어있으며 동쪽에서부터 세자르의 탑, 온의 탑, 봉베크의 탑이다. 입장료는 36프랑이다. 길을 건너니 상사 재판소가 있고 레핀 광장 왼편에는 꽃 시장이 있다. 이곳은 1808년 이래 온갖 꽃과 화분, 구근 등이 파리 시민의 마음을 화려하게 꾸며 놓았고 관광객에게도 인기가 있다고 가이드북이 소개하고 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시장이 닫혀 있는 시골 장터 모습이었다. 파리 경시청 건물을 지나간다. ‘레옹’이라는 영화와 ‘태양은 가득히’ 라는 영화의 주연배우 ‘아랑드롱’이 생각났다. 경시청을 돌아 시립병원 앞으로 걸어가니 노틀담 대성당의 멋진 모습이 눈앞에 보인다. 정면 광장에는 포앵 제로라는 8각형 모형이 있다. 프랑스에서 모든 거리의 측정은 이곳을 기점으로 한다.
오른쪽 센 강 편에는 샤를마뉴의 기마상이 있다. 서구의 기독교인들을 통합한 샤를마뉴는 768년에 황제로 즉위했다. 노트르담 광장 지하에 있는 크립트 아르케올로지크라는 고대 지하 유적이 있는데 고고학 박물관이다. 2,000년 전부터 내려오는 고대 건축의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다. 광장(파르비 광장)에는 사람들이 어디서 왔는지 바글바글 거린다. 움직임이 분주하다. 시계를 보니 오전 9시 45분이다. 생각은 현실이 된다. 라는 말이 떠오른다. 외부도 감격적인 모습이지만 내부의 모습도 궁금했다. 줄을 따라 밀려서 맨 오른쪽 성녀 안나의 문으로 들어간다.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 그냥 내부로 들어섰다. 유럽 성당들이 그러하듯이 웅장하고 무게 있는 고딕양식의 어둡고 답답한 성당 기둥에 스테인드그라스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9,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란다. 길이 129m, 폭 44m, 높이 35m의 내부 구조가 가득하다. “주는 곧 빛이다”라는 성서의 구절은 성당 건축에 응용한 쉬레드 신부의 생각에 따라 많은 창을 내서 외부의 빛을 내부로 끌어들이고 있다. 허약한 벽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양편에 5m 간격의 원주들이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고 있다. 이 기둥들로 인해 답답해 보인다. 대부분이 개조되었지만 현존하는 부분은 나무 부조 판으로 예수님의 탄생, 동방박사, 최후의 만찬, 발 씻기시는 예수님, 겟세마네의 기도 등이 조각되어있다. 회당 중앙에는 좌우로 장미의 창이 있고 성모 마리아를 그린 북쪽의 장미의 창은 1270년, 그리스도를 주제로 한 남쪽의 창은 18세기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이 장미의 창은 신약성서의 내용을 주제로 해서 천사에 둘러싸여 사도들과 순교자들에 축복을 내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성가대의 개조는 루이 13세 시절에 되었단다. 결혼해서 23 년 동안 아이를 갖지 못한 루이 13세가 어느 날 왕비의 임신 소식을 듣고 이곳에 와서 기도하기를 ‘만약에 주께서 아들을 주시면 성당의 성가대 부분을 아름다운 고전주의로 꾸며드리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단다. 아들을 얻은 5년 후에 루이 13세는 사망하고 후대 왕인 루이 14세가 선왕의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 건축가 로베르드꼬드에게 성가대의 장식을 맡겼다. 이때 중앙의 피에타 상이 들어서고 좌우로 루이 13세와 루이 14세의 상이 자리 잡게 되었단다. 성당 안은 온통 조각으로 가득하다. 성당 전체를 ‘돌로 된 성서’라고 한다. 성당 안에는 건립 이래 기증된 보물과 성전을 전시해 놓은 보물관이 있다. 그리고 6,100개의 파이프가 달린 파이프 오르간이 인상적이다.
프랑스의 역사 교과서라고 알려진 노틀담 대성당이 건설되기 이전에는 시대적으로 골 족과 로마인의 신전, 그리고 르네상스 양식의 성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800 여 년 동안 파리와 함께 살아 파리의 상징이며 프랑스의 초기 고딕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노틀담이란 성모 마리아를 지칭하는 말로서 카톨릭 신자의 성지의 하나가 되었다. 이 성당은 거의 3세기에 걸쳐서 완공되었다. 1160년에는 국왕 루이 16세의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명실 공히 왕가의 대성당으로 자리를 굳혔다. 이후 1430년에는 영국 왕 헨리 6세의 프랑스 왕 대관식, 1558년 프랑수아 2세와 앙리 4세의 결혼식 등 수많은 국가적 행사가 이곳에서 치러졌다. 프랑스 혁명 때에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파괴와 철거의 운명에 직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1802년 나폴레옹에 의해 다시 이루어졌고 1804년 12월 2일 황제 나폴레옹도 이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 대관식 광경은 다비드의 그림으로 훌륭하게 그려져 루브르 박물관과 베르사유 궁전에 전시되어 있다.
성당은 어느 각도에서 봐도 멋있다. 정면에서 바라보아 오른쪽이 남 탑, 왼쪽이 북 탑이며 똑같이 69m이다. 두 탑 사이에 높이 90m의 첨탑이 있고 그 밑 중앙에 서쪽 장미창이 있다. 성당 외부는 13세기 고딕양식의 백미이다. 성당 정면은 수직 수평으로 3단계로 구성되어있다. 맨 아래층은 3개의 문으로 구성되어있다. 그 바로 위에 28개의 이스라엘 왕을 상징하는 입상이 나열되어 있다. 제 2층은 중앙의 장미창 앞에 천사에 둘러싸인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을 안고 있고 좌우에 아담과 이브상이 자리 잡고 있다. 3개의 문이 있는데 오른쪽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나온다. 3개의 문에 조각된 성서 이야기는 건축될 당시 대부분의 신도들이 문맹이었기 때문에 성서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성자들의 전설과 성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중앙에 자리 잡은 최후의 심판 문이 걸작이다. 세 단계로 구성되어있는데 맨 윗부분은 천사 장 미카엘에 저울질 된 영혼의 무게에 따라 천당과 지옥으로 구분되어지는 모습이 있다. 죽어서 3일 동안 연옥에 있다가 심판대에 나가기 위해 천사들의 트럼펫 소리에 깨어나고 있는 모습으로 각자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기록부들을 가슴에 앉고 있는 모습이다.
중앙 기둥에는 19세기에 복원된 예수상이 자리 잡고 있다. 좌우측에는 12명의 사도상이 12가지 선과 12가지 악을 상징하는 부조물 위에 서 있다. 왼쪽의 문은 성모 마리아에게 바쳐진 문으로서 그 구성과 표현방법이 가장 뛰어나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상 바로 위를 보면 맨 아래에 언약궤를 둘러싸고 있는 예언자들이, 중앙 부분은 마리아의 죽음, 맨 윗부분은 성모마리아의 대관 모습이다. 성모 마리아상과 같은 높이의 왼쪽 조각들 중에는 천사의 부축을 받고 있는 성자 드가가 로마군에 의해 잘려진 자신의 목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른쪽 문은 성녀 안나의 문으로 위쪽은 성모마리아가 루이7세와 이 성당을 건설하는데 주역을 맡았던 파리 대주교 모리스 쉴리에 둘러싸인 모습이다.
가운데 부분은 성모 마리아의 생애를 이야기 하고 있다. 맨 윗부분은 마리아의 부모인 요하임과 안나에게 바치는 부조물이다. 문의 중앙 기둥은 5세기 파리 주교인 성자 마르셀이 괴물로부터 파리를 구하는 전설을 이야기 하고 있다. 짧은 시간에 정면을 아무리 자세히 봐도 부족하다. 귀동냥과 책을 펴서 하나하나 실체를 읽어가니 너무 재미있고 신기했다. 따로 구경하던 아내가 없어졌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참을 걱정하며 기다려서야 아내를 만날 수 있었다. 아내도 대단한 발견을 한 탐험가 같은 표정이었다. 성당 뒷면을 구경하기 위해 오른쪽으로 돌았다. 센 강 주변에는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이젤을 놓고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뒤에서 보는 성당의 모습은 또 다르다. 정면은 사각형의 웅 장, 단순한 모습인데, 뒤편의 모습은 첨탑을 중심으로 여성적이며 섬세하고 복잡해 정 반대의 느낌을 준다.
우리가 서 있는 광장이 요한 23세 광장(Square Jean XXIII)이다. 노트르담의 뒷모습을 아름답게 감상할 수 있는 광장이다. 노트르담 대성당 옆의 센 강변에서부터 대성당 뒷부분까지 연결되어 있는 이 광장은 파리 주재 교황청 대사를 지내다가 259대 교황이 되었던 요한 23세에게 바쳐진 광장이다. 원래 이곳에는 17세기 주교의 관저가 있었지만 1831년 폭도들에 의해 약탈당한 후로 건물을 철거하고, 1844년 파리의 장관이었던 랑뷔토(Rambuteau)에 의해 광장으로 재건되었다. 혁명 당시에는 재현 의회가 자리 잡고 성직자 재산 몰수 법령 등을 의결한 곳이기도 하다. 광장 중앙에는 네오고딕 양식의 성모 마리아 분수가 있고 쟝라비의 작품인 15m 높이의 조각이 자리 잡고 있다.
계속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정면으로 오니 탑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의 입장이 보였다. 광장 차 길 옆에 줄을 서서 번호표를 받고 안내양의 인도를 따라 10명씩 입장하고 있다. 건물의 안전과 질서를 위해 올라가는 인원과 내려오는 인원을 조절해서 입장시키고 있다. 우리도 줄을 섰다. 서양인들은 편하고 자연스럽게 줄을 잘 서고 있는데 우리는 줄 서는 것이 체질화되질 않아서 약간 답답하다. 줄 옆 찻길에는 다양한 소형차들이 주차되어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가끔 경찰이 주차단속을 나와 딱지를 끊는다. 가만히 보니 택시만 댈 수 있는 공간인 것 같다. 거리에는 2층 대형 버스에서 티코보다 작은 소형차, 마차, 오토바이까지 다양하게 다니고 있다. 복잡한 거리의 모습도 기다리는 우리에겐 심심치 않은 구경거리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관광객의 분주함이 더 재미있다.
약 40분을 기다려서야 겨우 번호표를 받아 입장하게 되었다. 입장료는 2명이 59프랑(국제교사증 소지자는 10프랑 정도 할인)을 내고 북 탑의 나선형 계단으로 387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계단은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달아서 움푹 패여 있다. 다리가 아파올 정도에 기념품을 파는 곳에 잠시 들러 숨을 고른 후 또 오르기 시작한다. 다리가 아프고 어지럽다. 체력이 약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세월이 흘러 늙었다는 느낌도 든다. 드디어 옥상에 이르렀다. 멀리 에펠탑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개선문도 보이고 가까이는 루브르 박물관도 보인다. 빗물받이로 만들어 놓은 괴수 시메르의 조각이 벽에 붙어있다. 왜 성당에 이런 형상을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했다. 멀리 몽마르트 언덕과 하얀 대성당이 보인다. 망원경으로 보니 현대식 개선문도 보인다. 시원하게 파리 시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와 좋았다.
바로 밑 센 강에는 유람선이 유유히 가고 있다. 파리는 센 강이 가르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는 어느 망명 한국인 택시기사가 쓴 책 제목이 떠오른다. 회색빛 건물들 속에 간간히 악센트가 있고 센 강도 회색에 원색 유람선이, 회색빛 구름에 파란 하늘이 보인다. 남 탑에 이르니 나무 계단이 있고 큰 종이 있다. 망치로 한번 때려보니 은은히 울린다. 이렇게 큰 종이 이곳 위에 있으니 그 무게를 지탱하는 것도 힘들 것 같다. 옛날에는 어떻게 이 무거운 종을 이곳에 올렸을까? 이 종의 무게가 13톤이란다. 또 이곳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에 등장하는 주인공 콰지모도가 울렸다는 종이다. 북쪽 종탑에는 작은 종들이 있어서 현재 이 성당에서 사용하고 있다. 몇 달 전에 별세한 안소니 퀸이라는 영화배우가 이곳에서 곱추로 분장해서 훌륭하게 연기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마침 시간이 12시 정오가 되어 파리 시내의 여러 성당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철 구조물의 퐁피두 문화센터, 소르본느 대학 등 파리의 동서남북을 모두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아쉬움을 갖고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 중간 중간 관광객이 내려가는 것을 서로 보고해서 적정한 인원을 올려 보내고 있었다. 생루이 교(Pont Saint-Louis)를 건너서 생루이 섬으로 들어섰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배가 고팠다. 오를레앙 강변에 내려가 강둑 벤치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침에 숙소에서 양해를 구해 겨우 밥을 해서 비닐봉지에 담아와 배낭에 넣고 다녔다. 김과 김치, 청어 알을 반찬으로 해서 맛있게 먹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약간 눈치가 보였다. 이렇게 준비해야만 시간절약, 경비 절약이 된다. 파리에 왔으니 파리의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좋은 여행이라고 생각된다.
생루이 섬에는 그렇게 우리의 관심을 끌만한 관광지가 없었다. 쇼팽의 연인 조르주 상드의 원고 초본과 괴테의 편지 등 유럽 문학의 귀중한 자료가 전시되어있다는 미츠키에비치(Adam (Bernard) Mickiewicz) 기념관을 지난다. 볼테르와 루소 등이 머물렀고 19세기에는 쇼팽, 들라쿠루아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드나들었다는 랑베르 관도 만났다. 보들레르와 릴케가 살았으며 위고, 발자크, 뒤마 등이 어울려 마리화나 파티를 열기도 했다는 로쟁 관에서 잠시 사진을 찍고 마리 교를 건너 바스티유 광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로쟁 관(Hotel de Lauzun)과 랑베르 관(Hotel Lambert)은 베르사유 궁전의 설계에 참여한 르보가 건축한 것이다. Rue st Antonie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노천카페와 식당이 있어 흥겹고, 냄새도 구수하고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만날 수 있어서 걷기에 좋은 길이다.
생 폴 생 루이 교회(Paroisse Saint-Paul Saint-Louis)가 무겁게 자리 잡고 있다. 1627년 루이 13세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하여 1762년 프랑스에서 예수회가 금지될 때까지 예수회가 지녔던 영향력의 상징이었다. 이 교회의 회중석은 로마에 있는 예수회 교회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졌다. 60m에 달하는 돔은 앵발리드와 소르본느 대학의 보기가 되었다. 이 교회가 가지고 있던 많은 보물들은 프랑스 혁명기를 비롯한 역사적 격동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들라쿠루아의 걸작인‘올리브 정원의 그리스도’는 보존되어있다. 회색 기둥과 퇴색된 벽은 오래되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문이 열려있어서 들어가 잠시 구경했다. 좀 어둡고 무게가 느껴지는 분위기지만 제법 크고 웅장한 교회였다.
차가 복잡하게 빙빙 돌아가는 바스티유 광장(Place de la Bastille)에 도착했다. 거리에는 식당, 은행 등으로 활기차다. 바스티유 광장은 프랑스 전제 정치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스티유 감옥이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광장이다. 바스티유는 샤를 5세 때 만들어진 성채였다. 루이 13세 때부터 국사범을 가두는 악명 높은 감옥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당시 군중은 이 감옥을 점거, 파괴하여 혁명을 성공시켰다. 이날이 1789년 7월 14일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날을 혁명 기념일로 경축하고 있다. 광장 중앙에는 높이 52m의 7월 혁명비가 서 있다. 그 밑에는 혁명 때 쓰러진 사람들 504명의 유골이 안치되어있다. 청동으로 만든 기둥에 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꼭대기에는 새로운 프랑스를 상징하는 <자유의 천사 상>이 금빛으로 눈부시게 햇빛을 반사하고 있다.
광장에는 1989년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오페라 바스티유 극장이 건설되어있다. 현대적인 외관이 주변의 고풍스러운 거리에 어색하지 않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현대식이며 획기적인 오페라 극장으로 손꼽힌다. 이‘국민을 위한 오페라 극장’은 카를로 오트의 작품이다. 이 장중한 건물은 시내 중심에 자리 잡은 19세기 오페라 극장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거대한 원형 유리 건물로, 주 공연장에는 2,7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극장의 내부는 매우 기능적이고 현대적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다섯 개의 이동무대가 있단다.
갈증이 나서 광장에 인접한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프랑스 아이스크림은 워낙 유명하다. 특히 생루이 섬은 파리에서 가장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노트르담 옆에 있는 생루이 섬은 힘든 여행 중에 잠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쉬어 가기에 딱 좋은 곳이다. 그 명성 때문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생루이 섬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다. 그만큼 아이스크림 가게도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생루이 앙 릴 거리(Rue St-Louis en l’Ile)의 베르티옹(Berthillon)을 추천한다. 항상 긴 줄이 늘어서 있으니 찾기는 쉽다. 그 옆쪽으로 아모리노(Amorino)도 맛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먹는다. 아랍 계통의 주인장이 팔고 있는 아이스크림이다. 다양한 색깔의 다양한 맛의 아이스크림 20여 종류를 팔고 있다. 종류가 많아 고르는 것도 행복한 고민이다. 개당 12프랑(2,160원)이다. 아내와 다른 맛을 골라 바꿔 먹었다. 약간 비싸다고 생각했지만 맛은 아주 좋았다.
주변의 상가와 음식점의 모습을 보며 걸어내려 가다가 파리 시청 광장에 이르렀다. 인상적인 19세기 시청(Hôtel de Ville) 건물이다. 아주 고풍스럽고 큰 건물이다.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정면의 대형 시계 밑에 자유, 평등, 박애의 문자가 새겨져 있다. 17세기 시 공화당 건물이었다. 1871년 화재로 전소되었으나 그 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잘 다듬어진 정원과 정교한 석고상, 작은 탑, 동상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매우 인상적이다. 시청 앞에는 분수대가 있다. 이 광장은 한때 교수형, 화형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형이 집행된 곳이다. 이 광장에서 사형에 처해진 사람 중에는 1610년 앙리 4세를 암살한 라바일라도 포함되어있다. 그는 사지가 네 마리의 말에 묶인 채 처참하게 죽어갔다. 시청사 내부의 가장 멋진 곳은 긴 무도회장이란다. 장중한 계단, 샹들리에로 장식된 천장 그리고 수많은 동상과 여인모습의 기둥 등으로 화려하고 귀족적인 분위기를 더해주는 대 연회장은 각종 기념식이나 외국 국빈을 대접하기 위한 연회와 리셉션을 개최하기에 적당한 장소란다.
가을 날씨 같이 서늘한 바람이 광장에 분다. 노숙자들의 모습이 간간이 보이고, 개를 갖고 다니는 행인이 많이 보인다. 분수대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퐁피두 문화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위적인 분위기의 다문화 복합단지라고 조르주 퐁피두 센터(Le Centre Pompidou)를 소개하고 있다. 전위[前衛]적이라는 말은 예술 운동에서, 선구적이고 실험적인 작품 활동을 꾀하는 사람이나 단체를 말한다고 한다. 비슷한 말로는 아방가르드라는 말이 있는데 20세기 초 유럽에서 일어난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 따위의, 기성 예술의 관념이나 형식을 부정한 혁신적인 예술 운동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란다. 퐁피두 문화센터는 지상 6층, 지하 2층의 초현대식이라는 건물이다. 첫인상이 그렇게 멋져 보이지는 않았다. 공사 중인 건물 같이 외형이 철근으로 둘러싸인 보기 안 좋은 모습이다. 이 건물이 파리의 명물로 각광을 받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는다. 너무 파격적인 건물이라서 그런가보다.
1969년 퐁피두 대통령의 제창으로 1917년에 완성되었다. 국제 공모전에서 당선된 이탈리아의 피아노와 영국의 로저 등 젊은 건축가가 설계했단다. 4가지 색상의 파이프가 밖으로 드러난 외벽과 유리로 된 특이한 건물이다. 빨강은 관람객 통로, 푸른색은 환기 관, 초록은 수도 관, 노랑은 전기 관이란다. 건물 내부에 있어야 할 것들이 모두 바깥으로 나와 있는 특이한 구조의 건물이다. 4층과 5층에는 1905년부터 1960년까지의 작품 및 현대 예술품이 상설 전시된다. 1층과 6층은 현대 미술가들의 주요 전시회가 개최되고 2층과 3층에는 정보 도서관이 있다. 지하는 이른바 포럼으로 무용공연과 영화상영, 극장 및 어린이 워크숍 등을 위한 공공복합공간이 자리한다. 파리의 오래된 건물 속에 현대적인 건물이라 유명한가보다. 건물 광장의 넓은 분수대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조형물들이 원색의 각양각색으로 칠해져 건물과 어울렸다. 하트 모양, 모자, 동물 등 다양한 형상이다. 그리고 바닥에는 거리의 연예인들이 구경꾼을 모아놓고 재주도 부리고 노래도 들려주고 있다.
그 다음 도착한 곳이 쇼핑센터 포럼 데 알(Forum des Halles)이다. 지상에서는 별 특이한 모습이 없는 나무 조경으로 꾸며진 작은 건물이다. 그러나 이곳은 지하 4층으로만 되어있다. 최하층까지 태양광선이 미칠 수 있도록 설계되어있는 건축의 첨단을 보여주는 곳이다. 그냥 ‘레 알’ 이라고도 불리는 쇼핑센터는 많은 논란 속에서 1979년 과일과 채소 재래시장의 부지 한가운데에 세워졌다. 지하와 지상에 걸쳐있는 복합 건물로 엄청 넓다. 지하 2층과 3층에는 세련된 부티크에서 대형 상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상점들이 들어서있으며 지상에는 잘 가꾸어진 정원, 터널 모양의 작은 누각이 있다. 금속과 유리로 된 야자수 모양의 건물에는 미술의 집, 시인의 집, 올로그라피 박물관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미술의 집과 시인의 집은 현대 미술과 시를 접할 수 있는 일종의 문화센터다. 거리의 사람들이 제법 흥청거리는데 수준이하의 할렘가 스타일의 풀어진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떠들고 있어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
우리는 생 위스타슈 성당(Église Saint-Eustache)앞 등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었다. 성당이 규모도 크고 멋지다. 고딕 양식에 르네상스 양식의 장식이 가미된 교회로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중 하나다. 내부는 노트르담 대성당을 본 떠 만들어 다섯 개의 본당 회중석과 측면 예배당, 방사선형 예배당을 갖추고 있다. 이 교회의 공사는 105년에 걸쳐 진행되었고 장엄한 아치, 기둥, 원주 등에서 르네상스 양식의 화려함을 볼 수 있다. 성상 안치소의 창을 장식하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는 필립 드 샹파뉴가 디자인 했다고 한다. 몰리에르가 이곳에 묻혀 있으며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마르키스 드 퐁파도르와 리슐리외 추기경은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교회는 오래되어 보이고 웅장했는데 내부 수리 중이었다. 폐허 같다. 교회 앞에는 물이 흘러 정면에서 나와 시원한 느낌을 준다. 계속 걸어 다녔더니 지친다. 마음은 갈 길이 먼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재촉하듯이 아내를 데리고 걷기 시작했다.
원형 지붕의 상품 거래소 앞을 지나 팔레 루아얄(Domaine National du Palais-Roya)앞으로 갔다. 정원이 있는 17세기 아케이드 형 궁전이다. 귀족들이 모임이나 도박이 열리던 화려한 장소였다. 오늘날 궁전의 앞 광장에는 현대 작가들의 조각품들이 서 있다. 1632년 재상 리슐리외가 짓기 시작하여 1639년에 완성한 건물이다. 처음에는 팔레 카르디날이라 불렀으나 리슈리외가 죽은 후 왕가에서 인수하여 팔레루아얄(왕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긴 원형 기둥의 긴 회랑이 인상적이고 넓은 안뜰은 시민의 휴식처로 아이들이 즐겁게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있다. 르와얄 궁전 안으로 정원이 있다. 도심 속의 안식처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정원이다. 정원의 양편에는 레스토랑과 화랑 등이 늘어서있다.
콩코르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을 향해 걸었다. 왼쪽에는 튈르리 가든(Jardin des Tuileries)이 길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나무숲과 잔디 그리고 어린이 놀이 시설이 한가롭게 괴성을 내며 흥겨운 음악과 함께 돌아가고 있다. 거대한 기계 고릴라가 입을 크게 벌리며 아이들의 시선을 유혹했다. 기계에 몸을 싣고 순식간에 하늘로 올라가는, 간이 콩알 만해 지는 놀이기구 앞에서는 구경하는 관객들이 입을 벌리고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 튈르리 궁전에 달린 정원이었다. 이 정원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상젤리제 거리를 지나 개선문에 이르기 까지 센 강변을 따라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풍경의 일부다. 이 정원은 17세기에 루이 14세의 왕실 조경가였던 앙드레 르 노트르가 설계했다. 공원 끝에 오니 금색 뾰족한 사각기둥의 오벨리스크가 눈에 확 들어왔다. 차량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광장이 나타났다. 상젤리제 대로에 멀리 개선문이 눈에 들어와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이곳이 콩코르드 광장이다.
이 광장은 루이 15세의 기마상을 설치하기 위하여 18세기 후반에 조성되었다. 처음에는 ‘루이 15세 광장’으로 불렸다. 프랑스 혁명 때에는 ‘혁명광장’으로 이름이 바뀌고 루이 15세의 기마상도 철거되었다. 이대 이곳에 악명 높은 단두대가 설치되어 1793~1795년에 1,343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여기서 루이 16세,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당토, 로베스피에로 등이 처형된 대표적인 인물이다. 1795년 콩코르드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805년 이후부터 도시 계획에 의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아주 멋진 광장이다. 1770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을 축하하는 불꽃 축제 때 133명이 참변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던 곳이다. 콩코르드 광장 중앙에는 높이 23m, 무게 230톤으로 된 연분홍색 단 한 개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약 3,000년 전에 만들어져 고대 이집트의 룩소르 신전에 있던 오벨리스크가 있다. 이것은 똑같은 모양이 룻소르 신전에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이집트의 모하메드 말리부 왕이 프랑스 샤를 10세에게 기증한 것으로 1829년부터 4년이 걸려 배로 운반하여 이곳에 세워지게 되었다. 이 비석은 약 3,000년 전의 유물로 파리에서 볼 수 있는 유물들 중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비석에 새겨진 상형문자는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세 의 업적의 기록이란다. 이집트 고고학의 선구자 중에 하나인 쟝 프랑스와 샹뽈리옹이 1822년 이집트의 필레에 있는 한 오벨리스크의 상형문자를 완전해독한 후에 프랑스의 모든 이집트유물들의 기원을 판별해 냈다고 한다. 햇빛에 반사되는 끝 부분이 아주 인상적이다.
바다의 분수(Fontaine des Mers)라는 예쁜 분수 두 개가 양 옆에 있다. 그리고 광장에는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하여 프랑스의 8 지방 도시를 상징하는 여인상들이 서 있다. 샹젤리제 거리(Avenue des Champs-Élysées) 거리로 들어선다. 문 기둥 같이 도로 양 옆에는 마를리 궁전에서 옮겨와 세운 마를리의 말이 한 쌍 서 있다. 가로수 길의 시작을 알려준다. 도로는 4차선 보다 넓은데 옛날에 만들어진 돌길이다. 마리 드 메디시(Marie de Médicis)가 튈르리 정원에서 이어지는 산책길을 만들게 하여 만들어졌는데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 조성으로 유명해진 르 노트르(Le Nôtre)에 의해 조성되었다. 나중에 그리스 신화에서 낙원이라는 의미의 앨리제를 따서 ‘앨리제의 뜰’이라는 뜻의 샹젤리제로 불리게 되었다. 실제로 샹젤리제는 용사들의 영혼이 머무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장소 이름이다.
아스팔트 같이 부드럽지 않아 차들이 통행하는 소리가 시끄럽다. 속도가 빨라 건너려면 중앙 분리대에 잠시 멈추는 것도 괜찮다. 샹젤리제 거리는 플라타너스와 마로니에 나무들로 조성된 전체 약 2.3km, 폭이 약 70m의 거리로 개선문 쪽은 화려한 상점들로 이루어져 있다. 콩코르드 광장 쪽으로는 울창한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보기에 시원하다. 인도에는 사람들이 많이 왕래한다. 나폴레옹 3세 때인 19세기 후반 파리의 부호들과 정치인, 예술가들이 개인 저택을 갖게 되면서 세련된 취향과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레스토랑과 유명 브랜드, 카페, 항공사, 은행, 영화관, 화랑들이 들어서면서 유명해졌다. 특히 이곳은 파리하면 떠오르는 노천카페로도 유명하다. 크리스천 디오르, 입생로랑, 랑방, 모라비타, 라코스떼, 베네통 등 유명 브랜드 상점으로 화려했다.
프랑스인들에게 샹젤리제는 축구 경기나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몰려드는 곳 중 하나이고,1840년 나폴레옹의 유해가 이 거리를 통해서 지나간 후에는 승리의 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엘리제 궁전이 눈에 들어온다. 이 궁전은 루이 15세의 첩인 퐁파두르와 나폴레옹의 왕비 조세핀 등이 살았고,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당하기 직전 이곳에서 황제 퇴위 문서에 서명하기도 했던 곳이다. 지금은 대통령관저로 쓰이고 있단다. 눈으로 볼 때는 가까워 보이던 개선문이 제법 멀어 다리도 아프고 피곤하다. 개선문에 도착했다. 갑자기 바람이 돌풍으로 분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챙겨간 우산을 쓰고서 개선문 탐색을 시작했다. 그냥 보면 독립문이나 비슷한 개선문이다. 그 조각과 세워진 경위, 역사적인 관계를 보면 흥미 있는 개선문, 이야기가 있는 개선문이다. 공부한 만큼, 의미를 부여한 만큼, 재미있게 볼 수 있음을 다시 느낀다.
개선문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에뜨왈 광장으로 불리웠단다. 원래 18세기 초까지는 사이요 언덕의 가장 높은 자리로서 사방으로 다섯 개의 길이 나 있었단다. 이것이 마치 별빛에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서 유래됐단다. 1805년 오스터리츠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나폴레옹은 병사들에게 ‘너희들은 개선문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라고 약속했다. 건축가 쑤폴로가 원래 이 언덕을 5m 이상 깎아 내려 원만한 길을 터놓았고 현재의 개선문은 나폴레옹 명령에 의해 건축가 장 샬그랭이 1806년부터 공사에 들어갔단다. 우리는 지하를 통해 개선문 밑으로 갔다. 차량통행으로 지하가 아니면 접근할 수 없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 개선문의 크기에 비해 주변의 설계가 더 광대하고 치밀하다. 넓이에 비해 개선문은 한 점에 불과한 것 같은 넓은 공사다. 공사는 계획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갔고 공사의 진척도 매우 늦어져 기초 공사만도 약 2년이 걸렸단다.
나폴레옹은 조세핀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이혼한 후 1810년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제와 결혼하였다. 결혼식장인 루브르 궁전으로 가는 길에 개선문을 지남으로써 신부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으나 개선문은 미완성이었다. 건축가 샬그랭은 개선문을 통과할 때는 그것이 마치 완공된 것처럼 천과 석고 조각으로 치장하여 나폴레옹 부부를 환영했다. 나폴레옹의 몰락과 왕정이 복구되면서 공사는 아예 중단되었고 1836년 마침내 완공되어 1840년 나폴레옹의 유해가 쌩뗄렌스 섬에서 옮겨질 때 개선문을 통과하였다. 이 장례행렬에 끼었던 빅토르 위고가 1885년 사망했을 때도 개선문을 지나갔으며, 1919년 1차 세계대전 승리의 행진으로 개선문을 통과하였다. 광장 한 가운데서 바라보면 동서로 약 8km 일직선 거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동쪽으로는 샹젤리제를 지나 콩코르드 광장의 오벨리스크와 돌아가는 원, 그 뒤편의 뚤루리 공원과 루브르 박물관의 카루젤 개선문과 만나고 서쪽으로는 현대 건축의 아름다움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파리의 맨하탄인 라데팡스 지역의 건물 군들 중에 있는 현대식 개선문을 만난다.
개선문의 높이는 50m, 폭 45m의 기념물로 매년 국경일 축하 행사와 퍼레이드가 시작되는 장소가 되었다. 개선문은 앞과 뒤에 2개의 부조를 포함하고 있다. 샹젤리제 쪽의 부조는 오른편에 프랑소아 루테의 작품인 라마르세예즈, 조국을 지키기 위해 일어서는 시민들의 당당한 모습이 조각된 1792년 봉기가 힘 있게 표현되어있어 4개의 부조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왼쪽에 자리 잡고 있는 코르토의 부조는 1810년의 비엔나 조약의 체결을 기념하기 위한 것인데 승리한 나폴레옹을 표현했다. 뒤 쪽의 부조는 에텍스 형제의 작품으로 각각 평화와 저항을 나타내고 있다. 기념물의 상단에는 직사각형으로 6개의 부조가 자리 잡고 있다. 쇠르가 제작한 이집트의 아부키르 전투 장면은 나폴레옹이 1799년 터키 군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 그려져 있다. 그 다음은 마르소 장군의 장례식이 그려져 있다. 마르소 장군은 1795년 오스트리아 군을 물리쳤으나 다음해 전투에서 전사했다. 옆면의 장식은 제크터 작의 부조로 나폴레옹 군대가 수천 명의 적군을 익사시키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재챈 호수의 얼음을 깨는 오스터리츠 전투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 위 동쪽 면에는 프랑스 군대가 출정하는 모습을 그려놓았고 서쪽은 그들의 귀향을 묘사해 놓았다. 개선문 지붕 바로 아래의 30개의 방패에는 나폴레옹이 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전투의 이름이 적혀있다. 내부의 벽면에는 전투를 치렀던 전투 이름들이 큰 글자로 새겨져 있고 558명의 나폴레옹 휘하 장군들의 이름도 소개되어있다. 그중 밑줄 그어진 이름은 전투 중 희생되어진 자들이다. 개선문 앞마당에는 1920년 마련한 무명용사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무명용사들이 잠들어있다. 추억의 불길이라는 향불이 타고 있다. 개선문 꼭대기에 올라서서 보면 12개의 도로가 방사선 형태로 뻗어있다. 가장 넓은 길은 포쉬 거리로 폭이 120m나 된다. 이 길은 공원을 포함하고 있는데 매일 밤 20시 이후에 가면 ‘여인 바꾸기’를 할 수 있는 장소로도 유명하단다. 포쉬 거리 쪽에 프랑스의 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단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한 광장을 샤를 드골 광장이라 한다.
갑자기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개선문 밑에 제비처럼 나란히 앉아 비가 그치기를 기다린다. 개선문을 구석구석 여유 있게 구경할 수 있었다. 제일 멋있는 쪽은 샹젤리제 거리 쪽인데 저녁에 불이 켜지면 놀이기구의 원형과 오벨리스크의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다. 우산을 쓰고 우리의 여정을 재촉하여 가기로 했다. 개선문의 만남이 아쉬워 대로변 중앙에서 개선문을 배경으로 즐겁게 사진을 찍었다. 한적한 이에나 대로로 접어들어 에펠탑이 보이는 곳으로 걸었다. 건물 사이로 간간히 에펠탑이 보여 마음을 설레게 한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여행자의 흔적은 사진이다. 에펠탑이 모두 사진에 들어가려면 에펠탑 밑에서는 불가능하다. 적당히 떨어져야 파리의 명물인 에펠탑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 위치가 바로 사이요 궁전에서 바라보는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사이요 궁전을 향해 발걸음을 약간 우회전하여 걸어간다. 테라스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로 날개를 편 듯 구부러진 건물의 외관이 아름다운 사이요 궁전으로 걸어 올라갔다. 언덕 위에 나무는 없고 여러 개의 동상들과 분수로 구성된 궁전이지만 그런대로 아름다웠다. 이곳에서의 에펠탑이 멋지게 시야에 들어왔다.
파리를 전부 보지는 못하고 극히 일부분을 보았지만, 파리는 전체가 수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학적 사고와 예술적 감각이 조합된 곳이 파리인 것 같다. 개선문에서도, 파리의 에펠탑에서도 수학이 아니면 어렵다는 생각이다. 실로 아주 미세한 것에서부터 거대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학이 기초가 된 것 같다. 40명이 넘는 당대의 조각가들이 솜씨를 뽐낸 곳이 이곳 사이요 궁전인데, 궁전이라기보다는 종합 예술관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이곳에는 해양 박물관, 인류 박물관, 영화 박물관, 프랑스 문화재 박물관, 수족관, 국립극장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사이요 궁전이라고 불리지 않고 1827년부터 트로카데로(Place du Trocadero)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16세기 말에는 남편 앙리 2세를 잃은 카트린느 메디치가 이곳에 별장을 지어 머물렀고, 앙리 4세 때에는 원수 바쏭 피에르의 거처였다. 그의 수많은 연애행각으로 리슐리외 추기경에 의해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되면서 한때 수도원으로 변모하기도 했단다. 1824년 사이요 언덕은 트로카데로 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는데 이는 1823년 스페인에서 발생한 반란시기에 프랑스 군에 의해 스페인 남부의 트로카데로 성채가 함락되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란다.
1878년 만국 박람회 때는 이곳에 바로크 양식의 궁이 들어섰으나 박람회와 함께 철거되었다. 1937년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영구히 남는 오늘의 사이요 궁이 세워졌다. 이 궁은 전망대를 중심으로 하여 4개의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전망대 대리석 바닥에는 미테랑 대통령에 의해 ‘자유와 인권 광장’ 이라는 이름이 주었고, 이 이름이 1789년에 재정된 프랑스 헌법 제 1조 1항의 구문과 함께 세워졌다. 오후 늦게까지 이곳 계단에 앉아서 파리 에펠탑과 주변 경관을 내려다보며 휴식을 취했다. 대리석 바닥에는 젊은이들이 롤러브레이드 묘기를 보이고 있다. 간간히 박수 소리가 들려온다. 우리의 눈은 에펠탑에서 땔 줄 몰랐다. 감격과 감격이다. 서서히 마음을 추스르고 에펠탑을 직접만나보기 위해 내려갔다. 황금색 황소 두상에 분수가 솟았다. 분수 대포가 시원하고 멋지게 에펠탑을 향해 발사되고 있었다. 세느 강의 여러 다리 중에 이에나 교를 건넜다. 다리 입구에는 양 옆에 말 동상이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있다. 센 강에는 유람선이 매스컴을 통래 보던 그 모습 그대로 눈에 보였다.
드디어 웅장한 에펠탑의 4 기둥 밑에 다다랐다. 거대한 모습이다. 세밀하고 규칙적인 철 기둥의 크고 작은 이음들이 하나의 작품을 이루어 놓은 모습에 감격했다. 에펠 탑에 오르기로 했다. 에펠탑 모형을 파는 가난해 보이는 아랍계 장사꾼들이 경찰의 눈치를 보며 팔고 있다. 여름인데도 날씨가 추웠다. 저녁이 되어가는 데, 뱃속에서 신호가 온다. 샌드위치 빵 두 개를 샀다. 딱딱한 빵이라 목에 걸려 힘들게 넘어간다. 관광객이 엄청 많다. 입구는 여러 군데다. 단체와 개인 줄서는 곳이 달랐다. 에펠의 흉상이 있는 기둥 밑에 줄을 서서 표를 샀다. 표는 3등분으로 구분된다. 밑에는 24프랑, 중간은 46프랑, 꼭대기는 65프랑이었다. 한참을 기다려서 65 프랑짜리 표를 샀다. 떠밀려가듯이 입구로 밀려들어간다. 내려오는 인원에 맞추어서 일정한 인원을 올려 보내기 때문에 한참을 기다려야했다. 철 조각으로 된 작품 속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약간 겁이 난다. 중간층에서 내려 동서남북으로 돌아가며 파리 시내를 구경한다. 노틀담 사원 꼭대기에서 둘러보던 파리 시내의 모습과 비슷하다. 특이한 유네스코 빌딩이 눈에 들어왔고 나폴레옹의 석관묘가 있는 앵발리드 등이 눈에 들어왔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꼭대기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스릴이 있었다.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은 1889년 에펠에 의해 세워진 탑이다. 당시에는 언론과 예술가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단다. 1층은 지상 57m, 2층은 115m, 3층은 274m, 끝까지는 307m다. 철재 다리와 육교 건설에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던 토목가 에펠은 1889년 탑이 완성되자 ‘프랑스는 300m 높이의 깃대에 국기를 게양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에펠탑 건립에 반대한 지식인으로는 오페라 하우스를 지었던 건축가 가르니에, 음악가 구노, 작가 모파상 등이다. 아름다운 파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파리를 중심으로 68km까지 시야에 들어온단다. 드디어 제일 꼭대기까지 올랐다. 2층으로 이루어졌는데 유리 망이 있어 춥지 않았다. 화장실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화장실이 있었다. 파리 시내가 멋지지만 역시 몽마르트 언덕의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하얀 건축물이 눈에 들어오고 라데팡스의 건물 사이로 제 2의 개선문이 보인다. 개선문, 노틀담 사원, 앵발리드, 뤽상부르 궁전, 퐁피두 문화센터, 루브르 박물관, 콩코드 광장, 블로냐 대학 등 낯익은 건물들이 찾아진다. 하얀색으로 이루어진 파리 시내에 황금빛 지붕이 액센트로 보이고 초록의 숲들이 간간히 보이며 센 강이 동서를 가로질러 실처럼 흐르고 있다. 멋진 도시다.
전망대 내에는 에펠탑에서 서울가지의 거리가 8991km라고 태극기와 함께 기록되어있다. 평양은 8794km. 여러 나라의 수도와 거리가 전망대 내부에 국기와 함께 그려져 있다. 에펠탑을 내려온다. 엘리베이터로 쉽게 내려오는데 각층에 줄을 서야할 정도로 사람이 많다. 2층에 오니 걸어 올라가고 내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철 구조물 사이의 거친 사이사이를 내려오니 삭막해 보인다. 가까이서 보는 에펠은 거칠고 차갑고 딱딱하지만, 하나하나는 별 볼일이 없지만 하나의 탑으로 멀리서 보면 정말 멋진 작품이다. 사이요 궁전 쪽으로 걸어가서 전철을 타고 집으로 가기로 했다. 물대포가 시원하게 뿜어댄다. 아쉬움을 갖고 몇 번이고 에펠탑을 뒤돌아본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전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오니 정말 피곤하다. 숙소 식당에 양해를 구하고 밥과 우거지 국을 끓여서 고추 참치와 양파를 곁들여 저녁 식사를 했다. 숙소 지붕에 창문이 있어 별이 보인다. 피곤하여 대층 씻고 잠을 청했다. 오늘은 일행 모두 한 방에서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