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대구향교신문에 연재 중인 '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2022.3.14자, 제51호 원고입니다.
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24. 시지 세거 600년 아산장씨, 덕산재
송은석 (대구향교장의·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대구와 경산 사이 지역을 대구사람들은 흔히 고산 또는 시지라 부른다. 고산이란 지명은 고산서원(서당)이 자리한 고산에서, 시지는 조선시대 이곳에 있었던 시지원(時至院)에서 유래됐다. 이 지역은 청동기시대부터 지금까지 줄곧 사람이 거주해온 지역이다. [심지어 욱수동에는 공룡 발자국도 남아 있다] 고대에는 압독국이란 고대국가가 있었고, 고려·조선·근대기까지는 경산에 속했다가 1981년 대구광역시 수성구로 편입됐다. 이 지역 천을산 자락에는 여말선초부터 세거한 세 성씨가 있다. 옥산전씨·아산장씨·밀양박씨다. 이번에는 이중 아산장씨와 덕산재에 대한 이야기다.
아산장씨 경산[시지] 문중 내력
우리나라 장씨는 한자로 ‘張·蔣·莊·章’ 등이 있다. 아산장씨는 ‘蔣’자를 사용하는 장씨로 중국에서 건너온 성씨다. 문헌에 따르면 ‘蔣’씨는 주공(周公)의 셋째아들인 백령(伯齡)이 봉해진 장국(蔣國)이라는 나라 이름에서 유래된 성씨다. 중국에서 ‘蔣’씨로 이름난 인물로는 전한시대 ‘삼경(三逕)’ 고사 주인공인 장후(蔣詡), 삼국시대 제갈량 후임인 장완(蔣琬) 등이 있다.
우리나라 ‘蔣’씨는 아산장씨 단일본이다. 시조는 북송 휘종 때 금자광록대부 신경위대장군을 지낸 ‘장서(蔣壻)’다. 그는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강력한 주전론(主戰論)을 펼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려 망명을 택했다. 망명길에 오른 그의 배는 지금의 충남 아산 바닷가에 닿았고, 이 사실은 고려 조정은 물론 송나라에까지 알려졌다. 송나라 조정에서는 그가 비록 망명을 했지만 충절만큼은 인정해, 그를 후하게 대접해 줄 것을 고려 조정에 요청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장서를 아산군에 봉했고, 이를 연유로 그의 후손은 아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시조 장서의 묘는 8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에 있는데, 지역에서는 ‘장릉(蔣陵)’ 또는 ‘장장군묘(蔣將軍墓)’로 불린다.
아산장씨가 영남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4世 천산재(天山齋) 장숭(蔣崇) 때부터다. 판군기감사 겸 도총사를 역임한 장숭이 의성김씨 중시조 김용비의 셋째 사위가 되어 의성에 터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의 현손 대에 이르러 현손 5형제가 영달해 모두 전서(典書)를 지냈는데, 이를 연유로 지금도 의성군 점곡면 교동(橋洞)은 ‘오전서마을’로 불린다. 참고로 아장장씨 족보에 의하면 세종조 천재 과학자인 장영실은 오전서 형제 중 셋째인 장성휘의 외아들이고, 대구 시지 아산장씨는 둘째인 장성발의 후손이다.
아산장씨 시지 입향조는 10世 ‘장흥부(蔣興膚)’다. 그는 아산장씨 영남파 세거지인 의성 점곡리 출신으로 젊은 나이에 동래부사를 지냈다. 시지 입향은 고려 때부터 경산에 세거해온 옥산전씨(玉山全氏) 문평공(文平公) 전백영(全伯英)의 누이에게 장가들었기 때문이다.
장흥부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문도(蔣聞道), 장방도(蔣方道), 장유도(蔣有道)다. 현재 경산·시지·청도를 연고로 하는 아산장씨는 대부분 조산대부 남부령 군자감직장을 지낸 진사 장방도 후손이다. 장방도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간(蔣竿)과 장림(蔣霖)이고, 장남 장간 역시 아들 둘을 두었으니 장자원(蔣自元)과 장자형(蔣自亨)이다.
장서(시조)→장숭(4세)→→장흥부(10세)→장방도(11世)→장간(12世)→장자원(13世)
【영남입향조】 【시지입향조】 【덕산재】
덕봉 장자원을 기리는 덕산재(德山齋)
장자원은 자(字)가 성인(性仁), 호는 덕봉(德峰)이며, 1471년(성종 2) 사마시에 입격하고 한성부 참군을 지냈다. 하지만 그는 무오사화가 일어나기 전에 고향으로 낙향, 시지 대덕산 아래에서 처사로 여생을 보냈다. 그는 조선 사림의 종장이었던 점필재 김종직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는데 당시 서로 주고받은 시가 지금까지 전한다. 시는 점필재가 함양군수로 있을 때 한 해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모두 잃은 것에 대한 슬픔과 위로를 나눈 시다. 이 시는 시판으로 제작돼 현재 덕산재에 걸려 있다.
덕산재는 덕봉 장자원을 기리는 재실로 몇 번에 걸친 위치 이동과 재호(齋號) 변경이 있었다. 덕산재는 1740년(영조 17) 곡계(曲溪) 장해붕(蔣海鵬)이 건립한 ‘곡계정사’로부터 시작됐다. 처음 위치는 현재 대구스타디움이 있는 대흥동[내곶이·안곶이·내환동]이었다. 그 뒤 1824년(순조 24) 곡계정사를 지금 위치인 서당골로 옮기고 ‘이로재(履露齋)’라 이름했다. 그런데 서당골에 호환(虎患)이 있자 1870년(고종 7) 이로재를 대흥동으로 다시 옮기고 ‘덕산재’로 재호를 바꿨다. 이후 1917년 아산장씨 선영 아래 서당골로 다시 옮겼으니, 고산초등학교 뒤편으로 직선거리 100여m에 자리한 지금의 덕산재다.
덕산재 대문 옆에 표지석이 하나 있다. 이곳이 아산장씨 경산문중 성지(聖地)임을 알리는 표석이다. ‘시지종족의귀소 화수화화요세덕’(是知宗族依歸所 花樹華華耀世德·이곳은 우리 종족이 귀의할 곳이며, 후손은 영화를 누리고 세상에 덕을 밝히리라) 덕산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건물로 전면으로 반 칸 퇴를 두었다. 정면에서 마주 보았을 때 좌측 2칸은 방, 우측 1칸은 마루다. 건물 대청과 전면 네 개 기둥에는 덕산재기·재실연혁·영과이진(盈科而進)·근심지목(根深之木) 등 10여 개의 현판과 주련이 걸려 있다. 이중 특별히 눈에 띄는 현판이 하나 있는데 앞서 잠깐 언급한 점필재와 덕봉 두 선생이 주고받은 시를 새긴 시판이다.
천을산 주변 아산장씨 문중벨트
덕산재 뒤편 약 50m 거리에 덕양단(德陽壇)이 있다. 이곳에는 ‘덕봉선생장공유허비각’과 선조 제단이 있으며, 덕양단 뒤 증심사 쪽으로 200m쯤 더 가면 아산장씨 시지 입향조 장흥부와 그의 아들 진사 장방도의 제단이 있다.
덕산재가 자리한 천을산 자락에는 과거 아산장씨 문중 재실이 두 개 더 있었다. 계술재(繼述齋)와 연호재(蓮湖齋)다. 고모령 입구 가천마을 계술재(繼述齋)는 양옥으로 업그레이드해 현존하지만, 연호동 연호재는 안타깝게도 10여 년 전 사라졌다. 덕산재·계술재·연호재를 연결하는 천을산 산책로를 걷다 보면 지금도 아산장씨 묘역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누가 뭐래도 천을산 일대는 분명 아산장씨 문중벨트라 할 수 있다.
에필로그
시지에는 아산장씨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성씨 두 개가 있다. 옥산전씨와 밀양박씨다. 조선 초부터 지금까지 시지를 대표하는 성씨인 이 세 성씨는 지금도 계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바로 시지 세거 600년 인연을 자랑하는 ‘강선계(講先契)’다. 그럼 이 세 성씨 중 진짜 시지 토박이 성씨는 누구일까? 옥산전씨다. 아산장씨 시지 입향조 동래부사 장흥부와 밀양박씨 시지 입향조 솔일재 박해는 둘 다 옥산전씨 문평공 전백영의 누이들에게 장가들면서 시지와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