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버지
아버지께서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지 두 달이 되었다.
병환 중에 계신 노모는 여동생이 잠시 무급휴직을 자처하고 고향집에 돌아와 정성껏 돌보고 있다. 아버진 힘겨운 재활 중에도 집으로 돌아와 예전처럼 엄마를 돌보며 살아갈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다. 뇌출혈의 후유증은 출혈로 인해 죽어버린 뇌세포가 재생되지 못해서 이차로 발생하는 신체기능장애에 속한다. 뇌출혈이 어느 부위에서 발생했느냐에 따라 언어장애, 행동장애가 나타난다. 아버진 불행 중 다행히 언어 쪽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오른 팔과 오른 다리에만 장애가 왔을 뿐 흔히 뇌출혈로 오는 안면마비도 없다. 후유증으로 인한 행동장애는 본인의 노력여하에 따라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다고 의사는 말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그것도 한계가 있어서 어느 정도 좋아지다 더 이상 회복이 안 되면 그 상태로 남은 생애를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고령임에도 여전히 기름진 음식을 좋아해서 고깃국 없이는 식사를 잘 안할 정도다. 사실 고깃국이라고 해봐야 고단백질의 비싼 쇠고기나 돼지고기 같은 것은 아니다. 흔히 도축 후 부속고기라고 불리는 내장이나 비계, 머리고기 같은 것을 좋아하셨다. 어쩌다 고향집에 갈 때마다 먹어보라며 손수 부속고기로 요리해주시는 걸 참 좋아하신다. 군대시절 취사병으로 근무하셨다는 얘길 여러 번 들었다. 그래서인지 평상시에도 어지간한 요리는 당신이 손수 만들어 잡수신다. 기름진 음식 섭취에도 불구하고 저혈압 쪽에 가까운 혈압을 유지하셨다. 게다가 위장에 아무 문제가 없었고 당뇨 같은 다른 지병 없이 팔순을 넘기신 분이시다. 다만 술을 너무나 좋아하셔서 그런지 수전증이 좀 있으셨다. 그것도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파킨슨 증세로 판명 났다. 파킨슨 질병은 현재 의술로는 치료가 불가능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뇌출혈은 혈압이 높은 사람에게만 오는 줄 알았지 아버지처럼 저혈압에 속한 사람은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함정이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쓰러지던 날 혈압이 무려 180에 가까웠다. 결국 아버지의 뇌출혈은 고혈압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것이 언제부터 왔는지는 모르지만 미리 예측을 했었더라면 쓰러지는 일은 막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평상시 저혈압에 가까우니 아버진 혈압으로 쓰러지진 않을 것이라 막연히 안심하고 지낸 것이 화근이다. 세상에 ‘막연한 안심’이란 없다는 걸 그때 절실히 깨달았다. 담배 피우는 사람에게 그만 금연하라고 하면 의례히 따지듯이 항변한다. 아무개 아무개는 평생 담배를 피웠는데도 멀쩡하게 천수를 누렸다고 막연히 안심하며 계속 담배를 피운다. 그 사람의 천수가 어디까지였는지는 몰라도 담배를 피우지 않았더라면 더 오래 살 수 있었을지 누가 알까. 사람이 똑똑한 것 같지만 자기술수에 스스로 잘 속는다.
자식들이 한 자리에 모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였다. “이제 어떻게 하지, 엄마는? 돌아오실 아버지는? 요양시설에 보내야 하나 집에서 모셔야 하나? 모신다면 누가 모시지?”
오늘날 자식 된 도리로서 부모님께 효도하며 산다는 게 어떤 것일까. ‘효도란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사실 부모님이 건강할 땐 그런 말을 아무 생각 없이한다. 막상 부모님 대소변 받아내고 24시간 케어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선뜻 “내가 모실 게요” 하며 나설 사람 과연 몇이나 될까. 21세기의 삶은 60~70년대처럼 한 지붕 아래 또는 지근거리에 삼사 대가 함께 모여 살던 때와는 너무나 다르다. 그땐 힘들어도 조부모, 양친부모, 형제 동서지간 할 것 없이 함께 공동으로 집안의 대소사를 감당하였다. 살아있는 한 어지간한 병수발을 들어 줄 수 있었던 시대다. 그러나 지금은 부부 위주로 살아가는 세상이다. 게다가 맞벌일 해야 겨우 살 수 있는 상황으로 변했다. 그뿐인가 부모 자식이 멀리 떨어져 사는 세상이다. 부모님이 병들면 병원이나 요양시설에 의지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 되었다.
어찌어찌하여 부모를 모실 수 있다 해도 부모 스스로 대소변 가리고 부추겨 움직일 수 있을 때는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보호자는 자신의 삶을 모두 반납하고 부모를 케어 하는 일에 매달려야한다. 중증치매와 심한 골다공증으로 혼자서는 일어서지도 못하며 심지어 숟가락 움켜잡을 힘도 없는 엄마를 당장 누군가 곁에서 지켜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게다가 걸음을 옮기는 것이 불편한 아버지까지 함께 모신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아버지의 고집이다. 부득부득 당신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엄마를 요양원에 절대로 보내지 말라며 수화기 너머로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셨다. 늙었으나 아버지의 목소린 여전히 화통을 삶아 먹은 듯 귀가 멍멍할 정도로 크다. 성치 않은 몸으로 어찌 와상환자인 엄마를 때마다 일으켜 세우고 대소변을 가리고 음식을 떠먹여 주겠다고 하는 건지 견디다 못해 자식들이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하면 아버진 그 즉시 전화를 끊어버리고 한동안 전화를 받지도 않는다.
열흘 후면 아버진 병원에서 퇴원해야 한다. 현재 입원한 병원이 재활병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 병원은 치료 목적을 달성했거나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면 바로 퇴원을 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환자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을 잘 알면서도 보호자의 간곡한 요청으로 아버진 한 달 가까이 병원에 더 머물러 계셨다.
자식들은 여태껏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일로 인하여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가족회의를 통해 돌파구를 찾아보았지만 딱 부러진 답을 얻지 못하였다. 이런 때 돈이라도 넉넉히 보유하고 있었다면 24시간 간병인을 두고 수고로움을 덜 수 있었을 텐데, 노인들을 위한 돌봄이(요양사)들이 시골 구석구석 찾아가는 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본인들이 감당할 만한 곳만 골라 가지 케어가 힘든 집은 아무도 지원하는 사람이 없다. 요양사란 직업도 소위 말해 3D 업종(일은 힘들고 지위와 보수는 밑바닥이며 좀처럼 개선될 가망이 없는 일자리)에 속해서 그나마도 젊은 사람들은 지원을 꺼린다. 그러니 70대 노인이 80~90대 노인들을 돌보는 실정이다.
오랜 장고 끝에 아버진 겨울 동안만이라도 다른 재활 병원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하고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보내드리기로 입을 모았다. 그게 현재로선 최선의 방법이다. 돈은 형제들이 1/M로 분담하기로 하였다.
부모 모시는 문제로 고민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부모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와 비슷한 연배마다 한 집 걸러 한 집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걸 알았다. 어떤 부모는 스스로 알아서 요양원으로 보내 달라 하고 어떤 부모는 두 분 중 한 분이 상태가 나빠서 요양시설로 가셨는데 남아계신 한 분이 매일 눈물 바람으로 지내고 계신다는 등 각자 상황이 구구절절 했다. 아!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다들 나름 고만고만한 상황에 처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좀 위안이 되었다.
피할 수 없는 진실은 지금 부모세대가 겪는 일이 곧 나의 일이 된다는 점이다. 나중에라도 나 역시 지금의 부모처럼 생떼(?)를 쓰면서 네들이 날 모셔라 할까. 아니면 스스로 알아서 먼저 요양시설로 걸어갈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프다. 조금 젊었을 땐 전혀 몰랐다. 우리가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이후에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를...
아버지 마음이 한편으론 이해가 간다. 자식들 마음도 그렇고 아버진 요양원에 한 번 들어가면 사람이 죽어야 나온다고 말씀하신다. 거기에 갈 정도면 결국은 모두가 죽어야 나오는 곳이니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 사실보다 아버지의 걱정은 그곳 생활이 고역이란 걸 지레짐작하고 억지소리를 하신다는 게 고민스런 상황이다. 사실 초창기 요양시설에서 노인들을 생으로 죽게 할 정도로 처우를 제대로 해주지 못한 사례가 있기는 했다. 그래서 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매일 티브이만 끼고 사는 노인들에게 그 얘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누군들 요양시설에 가는 걸 좋아할까. 아무리 좋은 정책을 세우고 실행단계로 들어가더라도 자리를 잡는 동안은 부작용이 어느 정도는 생기는 법이다. 법이 그만큼 소홀하며 충분치 못하단 증거다. 거듭되는 부작용은 곧 새로운 법으로 제압된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건강한 사람들도 요양시설은 때가 되면 들어가야 할 보편적인 장소로 인식되었다. 시설마다 경쟁하듯 노인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으며 좀 더 나은 시설로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집에서 부모를 모시는 것도 어느 정도 케어가 가능할 때까진 가능하지만 정도가 심해 감당하기 힘들면 집에 있는 것이 오히려 악이 될 수 있다. 상황 따라 대처할 간호사가 대기하고 있고 의사가 곁에 있으며 의료용 도구들이 준비되어 있으면 환자 입장에선 집에 있는 것보다 시설에 머무는 것이 훨씬 유익이다. 다만 집이 아닌 공동체 시설에서 낯선 사람들과 살아가야 하는 것이 부담되고 정든 집을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은 누구나 극복해야 할 과제다. 시설에 들어갈 정도면 거의 생을 포기하는 전단계로 보아야 한다. 그런 상황에선 본인은 어쩌면 거기가 더 좋다고 여겨질지도 모른다. 물론 겪어봐야 알겠지만...
사람이 자신의 때를 알고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부모님을 통해 조금은 알겠다. 그렇지만 평생 좁은 시골 동네에 살다가 생면부지 사람들과 집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시설에서 남은여생을 그것도 침대 위에 누워서 보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나 역시 끔찍한 생각이 드는 건 마찬가지다. 아버지 없는 집에 동생과 엄마 둘이서 지내고 있다. 혼자 엄마를 돌보는 것에 지쳐있을 동생을 위로하고 엄마의 얼굴도 뵐 겸 해서 들렸다. 창밖이 보이는 곳에 엄마의 의자가 있다.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엄마는 그 자리에 눕듯이 앉아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보기도 하고 가끔 오고가는 고양이를 유심히 바라보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 들어와선 그것마저 시큰둥해졌는지 아니면 점점 의식이 희미해져 바깥 풍경에 신경을 쓰지 않는지 그저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계셨다. 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엄마는 가끔씩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셨다. 엄마의 의식 속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동생이 타 준 커피를 마시지만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한참을 그렇게 엄마 곁에 앉아 있다가 어둑해질 무렵 한옥으로 내려왔다. 마당에 혼자 서서 부모님의 현실과 나의 미래를 생각하는데 눈물이 앞을 가린다. 사람 사는 게 너무 허무하고 쓸쓸하여져 또 눈물이 고이고 고인 눈물이 민망하여 또 눈물이 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