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다는 보통의 안부전화같은 거였다. 그렇게 시작된 통화는 각자 자신에게 없는 성향을 가진 타인을 동경하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타인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게 구는 게 점점 지친다며 타인에게 무심한 내 성격이 좋아보인다는 말을 덧붙였다. 자신도 타인에게 무심하고 싶지만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구에 지속적으로 밝은 에너지를 보여주려 애쓴다고 했다.
내가 평소에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려는 노력을 별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심한 것도 괜찮지만 다른 사람에게 좀 더 밝아보이게 노력하면 더 좋겠다는 말을 덧붙인다. 나는 돈 버는 일 아니고 취미로 모이는 모임에서까지 타인에게 밝은 이미지를 남기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쓸만큼 에너지가 많은 편이 아니다.
충고라는 단어를 생각해본다. 충고는 대체로 권위가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고싶은 말을 하는 것을 말한다. 국어 사전에는 남의 결함이나 잘못을 진심으로 타이른다고 되어있지만 ‘남의 결함’을 어디까지 범주로 볼 지 참으로 모호할 때가 많다. 충고라는 단어를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쓰는 경우는 잘 없다.
유교 문화에서 유독 정내는 단어처럼 포장된 ‘충고’라는 의미의 대화법을 나는 어떻게 쓰고 있는지 가끔 내 언어 습관을 체크하게 된다. 혹여라도 나는 충고라는 말로 포장된 권유는 없었는지 생각해본다.
타인의 말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자신에게 그런 성향이 있어서라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타인은 곧 나’다. 그러니 충고는 다양한 대화법으로 포장되어 전해진다. 한국에 살면서, 특히 대구에 살면서 때로 카프카의 ‘다정한 무관심’이 그립다.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되 타인의 개성을 존중하는 마음이면 좋겠다. 다름과 틀림은 비단 국어책에서만이 아니라 문화를 받아들이는 마음에서 시작되면 좋겠다.
영화 <은교>에서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밝은 성격이 당신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조용한 성격 또한 당신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되지 않으려면 타인에게 관심은 가지되 조금은 무관심하고 시크해져도 좋겠다.
밝다고 다 좋은 면만 있지 않고, 어둡다고 다 나쁜 면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나에게 있고 너에게 없는 그것대신 너에게만 있고 나에게만 있는 그것을 빛나는 시간으로 잡아두는 편이 낫다.
전화를 끊으며 생각한다. 나를 생각하는 시간을 잠시라도 가졌을 그 분과 무심한듯 다정하게 커피 한잔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