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尹東柱.1917.12.30∼1945.2.16)
시인.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생. 아명은 해환(海煥). 기독교 장로인 조부의 영향을 받고 성장, 평양 숭실 중학을 다니다가 용정(龍井) 광명중학(光明中學) 전학, 졸업(38). 연희 전문 문과 졸업(41) 후 일본 입교대(立敎大) 영문과 입학(42), 동년 도오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 전학 중 1943년 여름 방학을 맞아 귀국 직전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검거되어(43) 2년 형을 받고(44)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감옥에서 복역 중 1945년 2월 29세를 일기로 옥사함. 당숙인 윤영춘(尹永春)이 확인한 죄목은 ‘사상 불온, 독립 운동, 비일본신민, 서구사상 농후’였다. 그의 유해는 그를 낳은 북간도 용정에 묻혀 있다. ‘부끄러움의 미학’으로 불린다. 1968년 시비가 모교 연세대학교 안에 세워졌다.
용정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연길(延吉)에서 발행되던 [가톨릭소년]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 <오줌싸개 지도> <무얼 먹구 사나> <거짓부리> 등을 발표했으나 정식으로 문단활동 한 적은 없었다.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도일하기 앞서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그의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비로소 알려지게 된 윤동주는 일약 일제강점기 말의 저항시인으로서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다. 주로 1938~1941년에 쓰여진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서시(序詩)>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십자가> <슬픈 족속(族屬)> 등 어느 한 편을 보더라도 거기에는 울분과 자책, 그리고 봄(광복)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져 있다. 연세대학 캠퍼스와 간도 용정중학 교정에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으며, 1995년에는 일본의 도시샤대학에도 대표작 <서시>를 친필과 함께 일본어로 번역, 기록한 시비가 세워졌다.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 생. (본관이 파평 윤씨의 한 파인 보령공파에 속하며 증조부인 윤재옥(1844∼1906)은 함북 종성군 동풍면 상장개에 살았으며 43세 때 4남 1녀의 어린 자녀를 거느리고 북간도 자동(子洞)이란 곳으로 옮겼다.
그 때 형제 중 맏아들인 윤동주의 조부 윤하현(1875∼1947)이 12세였다 하니 서기로는 1886년이었다. 성가(成家)한 뒤의 윤하현은 소지주였을 정도로 넉넉했으며, 동주의 부친인 윤영석은 자동에서 출생했다. 1900년 같은 간도의 명동촌에서 정착하였는데, 명동이 농촌이긴 하지만 1900년대에 들어와 교육, 종교, 독립 운동 등 여러 면에서 관북 일대의 중심지였다. 그것은 1899년 규암 김약연 선생이 그 고장을 중심으로 일으킨 혁신 운동의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땅을 사서 조선인 부락을 형성하고 규암재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을 일으켰으며, 명동서숙을 거쳐 명동 소학교와 명동 중학교로 발전시켰다.(명동 소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로는, 송몽규(고종사촌), 문익환(시인, 목사), 김정우(외사촌, 숭실고 교사, 시인) 등이 있다.)
1910년에 동주의 조부는 기독교를 믿게 되고, 같은 무렵에 입교한 다른 몇 가문과 더불어 규암 선생을 도와서 가풍을 고치고 신문화 도입에 힘을 썼다. 같은 해 동주의 부친은 16세로 규암 선생의 누인(김용)와 결혼하여 규암 선생은 동주의 외삼촌이 되었다.
동생 일주(아명. 달환)를 비롯 3남 1녀(아래 누이동생 혜원, 남동생 광주, 일주)
【작품 세계】
윤동주는 29세의 젊은 나이로 해방을 앞둔 1945년 2월 일본의 후쿠오카 감옥에서 안타깝게 순절한 저항 시인이다. 그가 옥사하고 3년 뒤에 나온 유고시집(遺稿時集)은 그가 연희전문 졸업을 기념하기 위하여 뜻깊게 남긴 자필시고(自筆時稿) 3부 중에서 1부를 유일하게 보관하던 친구 정병욱과 아우 윤일주에 의하여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로 출간되었다.
동주는 대부준의 작품마다 작품의 연대를 적어놓고 있는데 <자화상>이 1939년 9월로, < 별헤는 밤>이 1941년 11월 20일로 되어 있다. 이로 보아 자필 시고 3부를 만들 무렵에는 <별헤는 밤>이 가장 마지막 쓴 작품으로 추정된다.
동주는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의 제목에서 시사하듯이 하늘과 별과 바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것 같다.그에게 있어서 하늘과 별은 주로 그리움과 꿈의 대상으로 나타나 있다. 이 그리움과 꿈은 자신의 삶에 대한 외로움이며 슬픔이기도 하다. 그의 시세계는 그리움과 슬픔으로 점철된 세계였고 그러한 세계에 대한 지향은 하늘과 바람과 별로 투영되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은 동주에게 있어서는 현실의 괴로움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표상이었다.
윤동주는 해방을 눈앞에 두고 일제의 어두운 옥중에서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저항 시인이다. 그의 괴운 삶과 시편들은 오히려 어두운 밤하늘의 별처럼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이' 살다 간 윤동주, 그는 암흑기에 산 우리 민족을 가장 투철하고 아름답게 빛낸 별의 시인이었다. (권달웅)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정신적 고통을 섬세한 서정과 투명한 시심으로 노래한 시인이다. 그의 시의 특성은 고요한 내면세계에 대한 응시를 순결한 정신성과 준열한 삶의 결의로 발전시킨 데 있다.
초기 동시는 일상생활에 대한 애정어린 관찰과 화해의 세계를 구축하며, 산문을 통해 청년기의 내적 고뇌를 표현한다. 그의 시가 추구한 핵심적 문제는 현실적 존재의 슬픔이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소극적이고 자책적이며, 어떤 경우 자기 분열의 상태까지 이르기도 하지만, 윤동주의 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음을 가치가 있다.
그의 생애를 마감할 무렵인 일본 유학 시적의 시는 비로소 윤동주의 저항 시인으로서의 평가를 가능하게 해 준다. 그의 시는 근본적으로 그의 생애의 흐름과 일치하며 발전한다. 즉 개인적 자아 성찰에서 역사와 민족의 현실에 대한 성찰로 인식을 확대하는 것이다. 민족의 해방을 기다리며 자신의 부끄럼 없는 삶을 위해 죽을 때까지 잃지 않은 시인으로서 그의 시는 일제 강점기의 종말에 대한 희생적 예언으로서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는 그의 시세계의 정신적 기반으로서 기독교적인 원죄 의식과 종말관이 뒷받침되기도 한다.
▶ '부끄러움'의 미학 : 윤동주는 식민지 지식인의 정신적. 윤리적 고통을 섬세한 서정과 투명한 시심(詩心)으로 노래하였다. 그의 시에는 절박한 시대 상황 속에서 순교자적 신앙의 길을 선택한 한 청년의 끝없는 자기 성찰의 자세가 반영되어 있다.
이와 같은 자기 성찰은 항상'부끄러움'을 수반한다. 이'부끄러움'의 감정은 현실적인 문맥에서 이해하자면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성의 결여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만 이해하는 것은 그의 시를 단순화시키는 것이 된다. 왜냐 하면, 그의'부끄러움'은 좀더 근원적인 것, 말하자면 절대적인 윤리의 표상인'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소망하면서 부단히 자신의 삶을 채찍질하도록 만드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부끄러움'은 삶과 시를 지탱해 주는 근원적인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계기마다, 그리고 그의 시마다 가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면서'십자가' 같은 시에서 볼 수 있는 순결한 순교자 의식으로 수렴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부끄러움'을 이해하는 것은 그의 시가 지닌 아름다움과 그의 삶이 지닌 투명한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초기시에서는 화해로운 유년세계에서 자족적인 상상력을 보여준다. 습작기 동시에서 드러나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계는 이후 자기자신을 보다 명확하게 인식하기 위한 자아 응시가 이루어지게 됨에 따라 순수 동경의 세계와 현실의 갈등 관계로 분화된다. 내면적 인간의 자아 성찰과 이에 수반된 부끄러움의 미학을 통해 비극적 인식 속에서 자아의 윤리적 완성을 꾀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사후 출간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문에 정지용은 이렇게 썼다.
그의 시 세계는 한 마디로 식민지의 아들로서 슬픔과 탄압자에 대한 반항 및 조국 광복에 대한 신앙을 밑바탕으로 한 ‘순정과 지성의 노래’의 세계였다. 그는 피압박 민족으로서의 슬픔만을 노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끊어진 한국 시의 보루를 지키는 최후의 병사’로서 일제에 대한 철저한 반항을 외쳤으며, 조국의 광복을 신앙처럼 믿어 ‘앞으로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로서의 참회와 고독과 결의와 신앙을 노래했으되, 어디까지나 ‘민족적인 순정’을 지성적 수법으로 다루었던 것이다.
【윤동주 시에 나타난 저항 의식】
▶윤동주의 삶과 역사 인식
윤동주는 1917년 배일 의식이 강한 간도 명동촌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하고 개화된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가정, 지역적으로 민족 해방에 대한 자기 분열의 경험이 그리 크지 않았음에 반해, 서울, 일본 등지에서의 학창 시절에는 식민지적인 상황이 주는 고통에 몹시도 괴로워한다. 그리고 기독교적인 교육의 영향으로 평생 자신을 반성하고 내적으로 승화하고자 하는 자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1943년(27세) 경찰에 체포되어 1945년 꽃다운 나이로 옥사하기 전까지 그의 생애 대부분을 차지하는 학창 시절 동안 동주가 독립 운동을 참여했다는 기록이나 행적은 없다. 다만 그가 죽은 뒤 발표된 많은 시작품들을 통해서 그가 식민지적 상황 속에서 남다른 번민과 고통의 삶을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육사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동주는 육사처럼 역사 발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은 없었으나 자기 성찰로 자신의 역할을 찾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민족 해방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민족 해방을 가로막는 조건들을 변화시키기 위한 실천적이고도 적극적인 행동이 뒷받침되지 못함으로 인해서 자기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동주의 역사 인식은 미래 지향적이되 자기 속으로 침잠해서 문제의 실마리를 풀고자 함으로써 억압의 역사를 해방시키기에는 소극적인 것이었다.
▶윤동주 시 속에 나타난 저항 의식
민족성조차 말살시키고자 했던 식민지적 억압 속에서 동주 또한 일제의 아부함을 거부한 채로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 자기 성찰의 깊이를 더해가면서 자신의 역할,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부끄러워하며 민족 해방에 대한 확신을 갖기도 하나 힘찬 소리로 이어지지 못한 채 혼자의 고민에 그친 소극적인 저항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징】
▶이육사(李陸史)(1904∼1944.북경 감옥 옥사, 본명 活)와 더불어 일제말 대표적 민족저항 시인.
▶식민지의 아들로서 슬픔, 탄압자에 대한 반항, 조국 광복에의 신앙으로 참회, 고독, 결의, 자의식, 신앙 등을 순정과 지성으로 노래함.
▶외향적 저항시가 아닌, 식민지하의 홀로 눈뜬 자아의식, 역사 감각에 의거한 자아 성찰이 주조를 이루며, 생활과 시가 일체가 되었다.
▶비극적 속죄 의식을 지닌 ‘부끄러움의 미학’.
【문학 시기 구분】
(1) 습작기(1934∼1936) : 외부 현실의 시대적 상황과 자신의 내향적 성격의 정신적 마찰
(2) 발전기(1937∼1940) : 습작기의 유년적 향수나 단조로운 관념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소간 내향적이며 상황 관계를 가진 자취가 드러남 - <새로운 길>, <비오는 밤>, <자화상>
【윤동주 시의 가치】
동주는 20세를 전후하여 근 10년간에 전개된 그의 체험과 더불어 그의 시 역시 여러 가지 면에서 급격한 변화 및 갈등을 보인다. 초기시의 암울한 분위기, 동시(童詩)에 깃든 유년적 평화에의 지향, 다시 강화. 확장되는 방황과 어두운 세계상, 자아의 분열과 긴장, 이렇게 서로 인과(因果)하고 혹은 반발하는 주제의 흐름을 우리는 보았다. 이러한 시적 편력의 배후에는 두 가지 중요한 체험적 원천이 자리 잡고 있다.
그 하나는 청년기의 정신적 불안정성과 고독감 및 정신적 방황에 기인한 <개인적 어둠>이요, 다른 하나는 조국을 잃음으로써 역사적, 사회적 삶의 자리를 박탈당한 <집단적 어둠>이다. 이 두 어둠이 윤동주라는 하나의 정신 속에 결합하는 데서 그의 참모습이 드러난다. 그의 시의 가치는 ‘시대의 고뇌와 개인적 번민이 통일된 육체’로 느끼고 표현했다는 점이다. 곧, 그는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역사적 국면의 경험으로 확장함으로써 한 시대의 삶과 의식을 노래하였고, 동시에 그의 체험을 인간의 항구적 문제들과 연결함으로써 보편적인 공감에 도달하였다. - 김열규: <문학과 역사적 인간>(창작과비평사,1980) -
【평가】
- 윤동주의 시는 압박받은 불행한 조국의 최후를 수호한 민족의 혈서이다.(정병욱)
- 그는 민족의 아픔과 시대의 어려움을 개인적 고뇌로 형상화함으로써 궁핍(窮乏) 한 시대를 살다 간 시인 (정한모)
- 1942년대를 문단의 암흑기라 했으나, 동주의 시를 발견한 뒤, 암흑시대를 레지스탕스의 시대로 그 제목을 바꾸어야 하겠다. (백철)
- 그는 어쩔 수 없이 타의에 의해 저항 시인이 되고 만 슬픈 시인 (임헌영)
- 암흑 시대에도 조금도 절망하지 않고, 긍정과 희망과 밝음의 빛깔로 시를 쓴 사람 (박영준)
【시】*<자화상>(1939), *<새로운 길>(1941), *<별 헤는 밤>(1941), *<서시(序詩)>(1941), *<또다른 고향>(1941) *<길>(1941) *<십자가>(1941) *<참회록>(1942), *<쉽게 쓰여진 시>(1942)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유고시31편. 정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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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9세 때 명동소학교 입학
▶15세 때 김동환 <국경의 밤>을 졸업 선물로 받고 졸업
▶16세 때 용정에 위치한 미션스쿨인 은진 중학교에 입학
▶19세 때 은진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 중학교 3학년 2학기에 편입
▶20세 때 숭실 중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관에 접수되자, 항의 표시로 자퇴, 광명학원 중학부 4년에 편입
▶22세 때(38년)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 입학에서 수학
▶25세(41년) <서시>, <또 다른 고향>, <십자가>, <별 헤는 밤> <새벽이 올 때까 지> 등 여러 편의 원숙한 작품을 쓰는 한편, 연전 문과에서 발행한 [문우]지에 <자화상>, <새로운 길> 등을 발표. 키에르케고르, 도스토예프스키, 발레리, 지드, 보들레르, 프랜시스 잠, 릴케, 장 콕도 등의 작품과 정지용, 김영랑, 백석, 이상, 서정주의 시편에 심취
▶1942년 창시개명을 강요하고 고향 집을 계속 탄압하자 일본 도일 수속을 위해 성을 <히라누 마(평소,平沼)>로 개명. 1월 24일에 쓴 <참회록>이 고향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 됨
▶1942년 3월 도일한 윤동주는 도쿄 릿교 대학 문학부 영문과 입학(송몽규는 쿄토 대학 사학과 (서양사) 전공) 여름 방학을 맞아 귀국, 동북 제국 대학에 편입하기 위해 일본으로 다시 건너갔으나, 10월 1일 교토 도지샤 대학 영문학부에 편입
▶1943년 27세 때 일본의 징병제가 공포, 문과 대학, 고등 전문학교 학생으로 학도병 에 지원하지 않은 재학생 및 졸업생에게 일제의 징용 영장이 발부되자, 7월 14일 첫 학기를 마치고 귀향하려던 차, 송몽규와 함께 사상범으로 체포,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에 구금
▶1944년 28세 때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2년 형을 언도(言渡)받고 규슈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
▶1947년 2월 13일 광복 후 최초로 유작 <쉽게 씌어진 시>가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정지용의 소개문과 더불어 [경향신문]에 발표
▶1948년 1월 유고 31편이 정지용의 서문과 함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정음사)
【작품 연보】
1934. 12. 24 <초 한 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
1935. 1. 18 <거리에서>
1935 <공상(空想)>
1935. 10. 20 <창공>
(중략)
1938. 5. 10 <새로운 길>('문우'지)
1938. 9 <슬픈 족속>
1939. 9 <자화상>('문우'지)
1939 <소년>
1940. 12 <병원>
1941. 2. 7 <무서운 시간>
1941. 3. 12 <눈 오는 지도>
1941. <태초의 아침>
1941. 5. 31 <또 태초의 아침>
1941. 5 <새벽이 올 때까지>
1941. 5. 31 <십자가>
1941. 5. 31 <눈 감고 간다>
1941. <못 자는 밤>
1941. 6 <돌아와 보는 밤>
1941 <간판 없는 거리>
1941. 6. 2 <바람이 불어>
1941. 9 <또 다른 고향>
1941. 9. 31 <길>
1941. 11. 5 <별 헤는 밤>
1941. 11. 20 <서시(序詩)>
1942. 1. 24 <참회록>
1942. 5. 12 <흐르는 거리>
1942. 5. 13 <사랑스런 추억>
1942. 6. 3 <쉽게 씌어진 시>
1942. <봄>
【연보】
▶1917 :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明東村)에서 아버지 윤영석(尹永錫), 어머니 김용(金龍)의 맏아들로 출생, 아명은 해환(海煥).
▶1925 : 4월, 명동소학교 입학
▶1928 : 명동소학교 4학년 무렵에 서울에서 간행되던 [어린이] [아이생활] 등의 아동잡지를 정기적으로 구독.
▶1929 : 송몽규(宋夢奎) 등의 급우(級友)와 함께「새 명동」이란 신문 형식의 등사판 문예지를 만들고 동요, 동시 등을 지음.1931 : 3월, 명동소학교를 졸업, 명동에서 20리 떨어진 대납자(大拉子)의 중국인학교에 1년간 다님.
▶1932 : 4월, 명동에서 30리 떨어진 소도시 용정의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 은진중학 시절에 교내 잡지, 스포츠, 웅변 등 다방면으로 활동. 이해, 일가족이 용정으로 이사.
▶1934 : <초한대․삶과 죽음․내일은 없다.>(12월 24일)
▶1935 : 봄, 평양 숭실중학교로 옮김. 기숙사에 있으면서 독서와 시작에 몰두. <거리에서>(1월 18일), <공상>, <창공>(10월 20일), <남쪽 하늘>(10월), <조개껍질>(동시, 12월).
▶1936 : 봄, 숭실중학의 신사 참배 거부 사건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전입학. 북간도 연길(延吉)에서 발행하던 [가톨릭 소년]지에 ‘용주(龍舟)’라는 필명으로 동요, 동시를 발표하기 시작. <고향집> <병아리>(동시, 1월 6일) <오줌싸개 지도>(동시) <기왓장 내외>(동시) <비둘기> <이별> <식권>(3월 20일) <모란봉에서>(3월 24일) <황혼> <가슴1>(3월 25일) <종달새>(3월) <산상(山上)> <오후의 구장>(5월) <이런 날>(6월 10일) <양지쪽> <산림>(6월 26일) <닭> <가슴2>(7월 24일) <꿈은 깨어지고>(7월 27일) <곡간>(여름) <빨래> <빗자루> <햇비>(동시, 9월 9일) <비행기>(동시, 10월초) <가을밤>(10월 23일) <굴뚝>(동시) <무얼 먹구 사나> <봄>(동시,10월) <참새>(동시, 12월) <개>(동시) <편지>(동시) <버선본>(동시, 12월초) <눈>(동시, 12월) <사과>(동시) <눈>(동시) <닭>(동시) <아침> <겨울>(동시, 겨울) <호주머니>(동시, 12월)
▶1937 : <황호니 바닷가 되어>(1월) <거짓부리>(동시) <둘다>(동시) <반딧불>(동시) <밤>(3월) <할아버지>(동시, 3월 10일) <만돌이>(동시) <나무>(동시) <장>(봄) <달밤>(4월 15일) <풍경>(5월 29일) <한란계>(7월 1일) <그 여자>(7월 26일) <소낙비>(8월 9일) <비애>(8월 18일) <명상>(8월 20일) <바다> <산협의 오후> <비로봉>(9월) <창>(10월) <유언>(10월 24일)
▶1938 : 2월, 광명학원 중학부 5학년을 졸업. 의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르지 않고 4월에 서울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 고종인 송몽규도 함께 입학. <새로운 길>(5월 10일) <비오는 밤>(6월 11일) <사랑의 전당> <이적>(6월 19일) <아우의 인상화>(9월 15일) <코스모스>(9월 20일) <슬픈 족속>(9월) <고추밭>(9월 26일) <햇빛> <바람>(동시) <해바라기 얼굴>(동시) <애기의 새벽>(동시) <귀뚜라미와 나와>(동시) <산울림>(동시, 5월) <달을 쏘다>(산문, 10월)
▶1939 :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 학생란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 <달같이> <장미 병들어>(9월) <트르게네프의 언덕>(산문, 9월) <산골물> <자화상>(9월) <소년>(9월)
▶1940 : <팔복> <위로>(12월 3일) <병원>(12월)
▶1941 :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발행한 [문우(文友)]지에 <자화상>, <새로운 길>을 발표. 12월 27일, 연희전문 문과 졸업. 19편으로 된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졸업 기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무서운 시간>(2월 7일) <눈오는 지도>(3월 12일)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5월 31일) <새벽이 올 때까지>(5월) <십자가> <눈감고 간다>(5월 31일) <못 자는 밤> <돌아와 보는 밤>(6월) <간판 없는 거리> <바람이 불어>(6월 2일) <또 다른 고향>(9월) <길> (9월 31일) <별 헤는 밤>(11월 5일) <서시>(11월 20일) <간>(11월 29일)
▶1942 :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입교대학 영문과 입학. 여름 방학에 용정의 고향집에 마지막으로 다녀감. 가을에 경도 동지사대학 영문과 편입. 입교대학 시절의 시 5편이 마지막 작품이 됨. <참회록>(1월 24일) <흰 그림자>(4월 14일) <흐르는 거리>(5월 12일), <사랑스런 추억>(5월 13일) <쉽게 씌여진 시>(6월 3일) <봄>.
▶1943 : 7월 14일,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기 직전, 경도제국대학에 재학 중인 고종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됨. 경도 가모가와(鴨川)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는 동안 당숙 윤영춘, 외종 김정우(金楨宇)가 각기 면회.
▶1944 : 4월, 경도지방재판소에서 독립운동 죄명으로 2년형의 언도를 받고, 구주 복강 형무소에 투옥됨. 송몽규도 2년형의 언도를 받고 함께 투옥됨.
▶1945 : 2월 16일, 위의 형무소에서 옥사. 같은 해 3월 10일, 송몽규도 옥사. 3월초에 고향 용정의 동산에 묻힘.
▶1946 : 가을, 유작 <쉽게 씌여진 시>가 [경향신문]에 발표됨.
▶1947 : 2월 16일, 서울 풀로워회관에서 추도회가 열림.
▶1948 : 1월, 유고 31편을 모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펴냄.
▶1955 : 2월, 10주기를 기념, 유고전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펴냄.
▶1968 : 11월 2일, 연세대학교 구내에 윤일주의 설계로 ‘윤동주 시비’가 세워짐.
* 연대 및 게재지 미상 작품 : <종시>, <별똥 떨어진 데>, <화원에 꽃이 피다>(산문, 1941년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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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것을 찾아 방황했던 시인-윤동주>
민족정신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한 명동 마을.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명동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자랐다. 그곳은 나라 사람들이 건너가 마을을 이루고 사는 작은 도시였다. 여기에서 그는 나라 사랑의 정신과 우리말글 사랑을 온몸으로 배웠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명동 사람들은 북간도에 사는 우리 민족들과 힘을 합해 적극적으로 참가했으며 민족정신이 살아 숨쉬는 학교를 세워 배우고 가르치는데도 힘썼다.
동주의 증조할아버지 윤재옥은 함경북도 종성 땅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런데 그곳은 가뭄이 잦은데다 몇 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흉작까지 겹쳐 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다 일본과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노리고 있던 때에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농민들을 괴롭히던 한심한 관리들까지 판을 치고 있었다. 이런 괴로움을 피해 우리 농민들은 북간도로 이주했다. 동주 할아버지 윤하현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명동촌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마을 대표인 김약연과 함께 그 마을을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들기 위해 힘썼다. 김약연은 명동 소학교를 세운 사람이다. 윤하현은 교회 장로가 되어 교회 일에도 힘썼다.
이런 가운데 윤장로의 외아들 윤영석과 김약연의 누이동생은 혼례를 올렸고, 그들 사이에서 윤동주가 태어난 것이다. 윤동주의 삶의 큰 기둥이었던 민족정신과 기독교 정신은 바로 그의 집안에 이어 내려오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런 기풍이 살아있는 명동에서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냈기에 윤동주는 '민족시인'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이다. 명동의 어린 학생들조차 민족애로 똘똘 뭉쳐 있었고, 일본 경찰조차 명동촌에 오는 것을 꺼려할 정도였다고 한다. 나중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 윤동주와 함께 감옥에서 죽게 된 사촌 송몽규나, 더 나중에 우리 나라 민주화를 위해 애쓰며 살다간 문익환 목사 같은 분도 다 윤동주와 함께 명동소학교에서 공부했던 분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윤동주는 글쓰기와 책읽기를 즐겨했다. 그는 [아이생활]이라는 어린이 잡지를 구독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 어린이 잡지를 구독하는 일은 꽤 드문 일이었다. 송몽규도 [어린이]라는 잡지를 구독하여, 둘은 서로 바꿔가며 꼼꼼히 읽곤 했다. 이 책들은 반 아이들에게도 매우 인기가 높았다. 소학교 5학년이 되던 무렵 동주네 반 아이들은 월간 잡지를 만들어 등사로 펴내기로 했다. 아이들의 원고를 모아, 동주와 몽규가 원고를 일일이 손으로 옮겨 적었다. 밤잠을 설쳐 가며 만든 이 잡지의 제목은 [새명동]이었다. 아이들은 [새명동]을 몇 차례 더 발간했다.
명동 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진학했다. 그의 사촌 몽규, 친구 문익환도 같이 입학했다. 여기에서 이들은 우리 역사를 배웠고, 우리 민족이 독립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는 가운데 문익환이 평양 숭실중학교로 떠나고 몽규도 독립운동을 위해 북경으로 떠났다. 망설이던 윤동주도 부모님을 졸라 평양 숭실중학교로 편입했다. 이곳에서 시인들의 시를 읽고 동시를 쓰면서 문학 수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세상은 동주에게 그런 평화를 계속 누리도록 놔두지 않았다. 이 숭실중학교에도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기독교 학교인 이 학교에도 신사 참배의 바람이 불어닥친 것이다. 교장은 비장한 각오로 신사 참배 정책에 반대했고, 학생들도 함께 학교를 그만두는 것으로 신사 참배 거부의 뜻을 밝혔다. 윤동주도 입학한 지 7개월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부끄러움과 슬픔 속에서 길을 찾으며 1937년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일본 경찰에 잡혔다가 도망쳐 나온 몽규도 함께 입학했다. 1937년은 일제가 중국을 침략했던 때다. 1939년에는 우리나라 사람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라는 ‘창씨 개명령'이 내려졌다. 우리 민족은 더욱더 목을 죄어오는 일본 제국주의의 횡포 아래서 신음해야 했다. 윤동주도 어두운 조국의 어두운 현실을 온 몸으로 느끼며 괴로워했다.
그의 시에도 이런 괴로움이 조금씩조금씩 나타난다. 그 괴로움은 슬픔이기도 했고,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그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 <자화상>에서 -
윤동주 시에는 슬픔이란 말이 많이 나온다. 곱고 섬세한 심성을 지녔던 윤동주에게 그가 살던 세상은 슬픔이 밤비처럼 고요히 젖어오는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꼭 슬픔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쓸쓸함'과 '눈물' '설움'이라는 시어들은 그의 시를 읽다보면 자주 나타나 우리의 마음을 찌르곤 한다. 또 윤동주 시인은 왜 그렇게도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을까.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고‘(서시)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길)
‘딴은 밤을 세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별헤는 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참회록)
정말 그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부끄러울만치 깨끗하고 맑게 살고 싶었기에 갇힌 나라의 슬픈 족속으로 살며 공부하고 시를 쓰는 것이 부끄러웠는지도 모른다.
시대의 어둠과 민족의 슬픔을 자기 것으로 삼았기에 부끄러웠던 윤동주. 그랬기에 그는 잃어버린 조국을 사랑하고, 잃어버린 참된 자신을 찾으며 살았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린' 그는 <별헤는 밤>에서 어릴 때 친구들의 이름을 헤어보듯, 어린 시절의 추억을 헤어보듯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 대체 무얼 바라며 이렇게 홀로 깊은 생각에 빠져드는가 시인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 또다른 자아, 추억, 나라, 어린 시절… 이 모든 잃은 것을 찾고자하면서 스물아홉 해를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슬픔과 부끄러움을 가득 안고 자기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윤동주는 슬픔만을 노래하지는 않았다. 그는 다가올 희망의 날을 예언자처럼 노래하기도 했다.
『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 <별헤는 밤>에서 -
일본에 유학하던 1942년 6월에 쓴 <쉽게 씌어진 시>에서 그는 드디어 그 길을 발견했노라고 노래한다. 그 다음해인 1943년 7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 전까지 윤동주 마음 속에서는 수많은 시들을 썼다가 지웠을 테지만 우리가 지금 읽을 수 있는 그의 시 가운데는 가장 마지막 작품이다.
『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쉽게 씌어진 시>에서 -
'참된 나'의 모습은 내 안 깊숙이 있다. 그것은 '최후의 나'다. 슬픔 속에서, 어둠 속에서 등불을 치켜든 나는 나를 둘러싼 어둠을 다 내몰지는 못한다. 다만 자기 안의 양심의 불을 켜 이 어둠을 '조금 내몰고'밝은 세상을 기다리겠다는 결심이 담겨 있다. 그것이 외롭게 자기 길을 가는 시인의 몫인 것처럼. 이런 결심은 다른 시에서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참회록)'이며 '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조용히 흘리겠습니다(십자가)'라고 표현되고 있다.
1939년 <자화상>을 쓰면서부터 자신이 선 자리를 되돌아보기 시작했던 윤동주는 <길>에서 자기 삶의 이유를 물었으며 <참회록>을 통해서 자기 내면의 길을 발견하고, <쉽게 씌어진 시>를 통해 자신의 길을 확인했다.
1943년 7월 윤동주는 일본 경찰에 붙들렸다. 송몽규도 함께 잡혔다. 송몽규는 조선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중심인물이고 동주는 거기 가담했다는 것이다. 함께 잡혔던 고희욱이란 사람은 죄가 가볍다 하여 풀려났지만 동주와 몽규는 혐의가 뚜렷하여 재판을 받고 호카이도오 형무소에 갇혔다.
거기서 윤동주는 한달에 몇 번씩 이상한 주사를 맞았다. 이 주사는 생체 실험을 위한 주사였다. 윤동주를 비롯하여 감옥에 갇힌 우리나라 학생들이 바로 실험 인간이 된 것이다. 45년 2월 윤동주는 차디찬 감방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와 평생 기쁨과 고통을 함께 해온 사촌 송몽규도 윤동주의 장례 나흘 뒤 죽고 말았다.
윤동주의 무덤은 지금 용정에 있다. 그는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살다 죽었다. 너무나 맑고 아름다워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시인 윤동주의 잃어버린, 그러나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영원한 자화상으로 남아 있다.
<윤동주는 생체 실험으로 희생되었나?> - [동아일보](1980. 9. 17)
윤동주의 사인(死因)에 대해 새로운 추리가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윤동주는 일본 후쿠오까 형무소에서 옥사한 것으로만 알려져 왔으나, 사실은 일제가 2차대전 말기 자행한 생체실험의 제물이 되어 식염수 주사를 맞고 최후를 마쳤다는 한층 비극적인 해석이다.
이같은 내용은 동국대 대학원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일본인 유학생 코노에(鴻農映二)씨가 <윤동주, 그 죽음의 수수께끼>(‘현대문학’ 10월호)를 통해 발표한 것이다.
코노에가 생체실험 희생설을 내놓는 근거는 두 가지.「45년 2월 16일 동주 사망」이라는 전보가 가족들에게 배달된 데 이어 10일 늦게「시체를 찾아가지 않으면 구주대(九州大) 해부용으로 제공함」이라는 내용의 제2의 전보가 날아들었다는 것.
또 한가지는 윤동주와 감방 동료였던 송몽규(宋夢奎)란 사람이「매일처럼 이름모를 주사를 맞느라 피골이 상접해 간다.」고 시체를 찾으러 간 윤동주의 아버지에게 말하더니 동주의 뒤를 이어 3월 10일 숨져 버렸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코노에는 윤동주의 죽음을 ‘구주대 생체 해부 사건’과 연관시킨다. 1945년 5월부터 6월까지 구주대 의학부에서 B29의 탑승원 8명이 생체 해부당한 일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九州大 생체 해부 사건’이다.
생체 해부의 목적의 하나는 혈액 대신 식염수 주사가 가능한가를 알아보는 것. ‘전쟁에서는 자주 혈장이 부족되고 수혈이 필요한 환자에게 어느 정도 대용 혈장(식염수)을 주입해야 하는가를 알려면 생체 해부는 전쟁 의학상 필요악 중의 하나’였다는 코노에는 ‘이름모를 주사’, 전보 내용 중의「구주제대에 해부용으로 제공함」, 그리고 윤 시인의 죽음과 ‘구주대 사건’의 시기상 일치로 보아 윤동주의 죽음이 생체 실험에 의한 희생이라는 추정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윤동주 생체 실험 희생설에 대해> - 최도균(崔道均): [동아일보](1980. 10. 11)
나는 윤동주가 옥사한 1945년 2월 16일 당시 후쿠오카 형무소 독방에 재감 중이었는데, 당시 내가 겪은 일 몇 가지를 밝혀 「동아 일보」 9월 17일자 5면의 <윤동주씨 생체 실험 희생설>에 참고 자료를 제공하고자 한다.
① 내 동지 4명 중 한 명인 이원희(李元熙)군(一名 이원길)은 1944년 5월 동경 스가모(소압.巢鴨) 형무소에서 큐슈(九州) 후쿠오카형무소로 이감될 때 원인을 알 수 없게 행방불명이 됐으며,
② 박오훈(朴五勳)군은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되긴 했었는데 1945년 이른봄 어느 날 이유를 모르게 사망했다는 소식을 일본인 잡역수로부터 몰래 들었으며,
③ 1945년 봄을 전후해서 나는 피부병이 심해서 병동(病棟)엘 다녔는데, 그때 접한 형무소내 일본인 잡역수(우수한 모범수로 간수 보조격)로부터「조선인을 매일같이 몇 명씩 죽이는데 오늘도 몇 명을 죽였다. 너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라는 악의도 선의도 아닌 말투의 말을 들었다.
④ 또 역시 같은 무렵 내가 들어있는 감옥에 발광자가 속출하는 눈치였는데, 큰소리로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텐노 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天皇陛下萬歲)」하고 되풀이 울부짖는 것이 밀폐된 내 감방에까지 들려왔었다.
이상으로 미뤄 볼 때 일본인 당국자들이 법적 형량과 관계없이 어떤 필요에 의해 종류를 알 수 없는 가혹한 처치를 한국인 죄수에게 제한없이 가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①의 경우 이원희군을 알려지지 않은 어떤 특수 목적으로 빼돌렸다고 볼 수 있으며 ②의 경우 박오훈군이 어떤 생체실험에 희생됐다는 추측을 배제할 수 없고 ③의 경우 매일같이 법에 의하지 않고 이유 모르게 그것도 몇 사람씩 한국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생체 실험과 관계 있을 수 있다는 추측을 충분히 타당케 한다.
윤동주씨가 생체 실험에 희생되었을 가능성은 그 당시 형무소 분위기로 보아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발췌)
<윤동주의 처절한 최후> - [동아일보](1985. 12. 4)
윤동주는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에 일제의 춥고 어두운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고독한 최후가 옥중 동지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이 증언의 내용은 [여성동아] 12월호에 <시인 윤동주의 처절한 최후>라는 제목의 기사로 실려 있다.
윤동주는 항일 민족 운동을 벌인 사상범이라는 이유로 송몽규, 고희욱 등과 일경에 체포됐다. 재판 후 윤동주와 송몽규는 감옥에서 옥사했고 고희욱만이 당시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로 지금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체포 당시 상황과 감옥 생활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1943년 7월「경도(京都)에 있는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에 연루, 체포된 윤동주는 당시 동지사대 영문과에 재학 중이었다. 하숙집 친구 송몽규의 소개로 윤 시인을 만났던 고희욱은,
“마른 체격에 흰 얼굴, 목소리는 다소 쉰 듯했고 성격은 온화, 침착한 편이나 정열적이었다. 민족주의 색채가 농후한 사람”
이라고 윤동주를 회고했다.
5개월의 취조 끝에 1943년 12월 검사국으로 넘겨진 이들은 독방 생활을 하게 된다. 고씨의 증언에 따르면 사방이 모두 밀폐된 방으로 식사 투입구와 감시하는 구멍만이 문에 달려 있었다. 식사는 거의 꽁보리밥에 단무지 몇 쪽, 무 된장국이 전부였다.
1944년 재판에서 고씨는 기소 유예로 풀려났으나, 윤 시인은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감옥으로 이송, 복역 중 사망했는데, 죽을 때도 눈을 감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옥사한 윤동주의 시체를 찾으러 간 부친은 당시 송몽규를 면회,「우리들은 형무소 당국에 의해 이름모를 주사를 맞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 주사는 전시 의약품 생산을 위한 실험용 주사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윤 시인도 이 주사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윤동주 유적 일본 학자가 답사> - [한국일보](1987. 4. 14)
윤동주와 관련된 북간도, 용정, 명동 유적의 전모가 밝혀졌다.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한국문학과 중국문학을 연구하는 오무라 마쓰오(大村益夫) 교수는 지난 85년 4월부터 1년간 윤동주의 고향인 북간도 용정에 체류하면서 그의 생가, 묘지, 윤 시인이 다니던 간도의 학교들, 교회 그리고 간도에 아직도 살고 있는 윤 시인의 친척들의 주변, 윤 시인과 함께 일본에서 옥사한 고종사촌 송몽규의 주변 등을 답사한 결과를 <윤동주의 사적(事跡)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글로 일본 학계에 제출했다.
이 글은 윤동주의 문학을 논한 논문도 아니고 윤동주의 사적과 그의 문학과의 관련성을 규명한 연구문도 아니며, 나타나 있는 사적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문학평론가 김우종(金宇鍾-덕성여대 교수)이 입수, 월간문예지 「한국문학」 5월호에 소개할 예정인데 보고서의 윤동주 사적을 미리 간추려 본다.
▲ 묘비 : 우리나라에 ‘詩人 尹東柱之墓’라는 글자가 새겨진 전면 사진으로 소개된 바 있는 윤동주 묘비의 뒷면과 좌우 측면에는 윤 시인의 생애를 약술한 69자의 한자 묘비명이 음각되어 있는데 이 보고서는 탁본에 의해 묘비명을 판독하고 있다. 그 묘비명은 그의 짧은 생애를 사실적으로 기술해 나가다가 그의 젊은날의 죽음에 이르러 문장의 톤을 고조시키고 있다.
[학해(學海)에 파도가 일어 신체의 자유를 잃고 형설의 생애는 조롱 속에 든 새의 운명으로 바뀌었다. 그의 시가 세상에 울리려할 때 세상을 떠나니 그의 나이 29세. 춘풍무정(春風無情). 꽃이 피었으되 열매를 맺지 못하니 애석하구나‘
그의 묘비명은 해사(海史) 김석관(金錫觀)이 글을 짓고 그의 아우 일주(一柱), 광주(光柱) 두 사람이 세운 것으로 적혀 있다. 김석관은 윤 시인이 소학교 과정을 공부한 명동학교의 학감(교무주임에 해당)이었다.
▲ 학교 : 윤 시인이 소학교 6년 과정을 공부한 명동학교는 독립운동가 김약연(金躍淵)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김약연의 누이동생이 윤 시인의 어머니이다. 명동학교는 ‘혁명운동의 소굴’이라는 이유로 일경에 의해 방화(放火)되었으나 ‘명동학교’라는 한글 간판과 교직원 숙직실은 아직 남아 있고 숙직실은 살림집으로 쓰이고 있다.
교사 터에는 잡초만이 무상하고, 개울 건너편에 새 명동소학교가 세워져 있다. 윤 시인은 명동학교를 졸업한 후 화룡현립제일소학교, 용정 은진중학교, 용정 광명중학교에서 공부했다. 화룡현립소학교와 은진중학교는 모두 철거되었거나 건물 용도가 바뀌었다. 광명중학교(36년부터 38년까지 3년간 수학)는 지금 용정중학교로 통합되었다.
용정중학교는 옛 광명학교의 윤동주 기록을 보관하고 있다. 성적부에 따르면 윤 시인은 영어, 한국어, 한문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이고 있으나 일어 성적은 40∼50점 수준이이었다. 옛 광명학교 교사는 한 모서리만이 남아 있다. 윤 시인과 함께 옥사한 고종사촌 송몽규가 다니던 대성중학도 용정중학교로 통합되었으나 ‘대성중학’이라는 간판과 교사는 그대로 남아있다.
지난 85년 6월에 이 용정중학교에는 윤동주문학회가 결성되어 30여 명의 간도교민 학생들이 가입했다. 이 문학회는 작은 전시실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윤동주 시집, 철창 속에 갇힌 윤 시인을 그린 그림, 윤 시인에 대한 재판 판결문 등을 걸어놓고 있다.
▲ 생가 : 생가는 허물어져 버리고 그 터는 잠배밭이 되었다. 돌무더기가 군데군데 흩어져 있고, 부엌이라고 짐작되는 곳에 콘크리트 조각이 남아 있다.
▲ 교회 : 윤 시인이 다니던 명동교회와 동산그리스도교회는 건물이 다소 개수되었지만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종교 집회는 열리지 않고 창고나 공공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종루는 허물어져 내렸지만 남녀별 출입구가 따로 되어 있던 옛 건물은 세월에 의해 쇠락되어 가고 있다.
▲ 사람들 : 윤 시인의 아우 광주(光柱)는 연변에서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광주의 시는 순수 서정시다. 윤 시인의 학교 선후배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윤 시인의 스승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윤 시인과 같은 항렬인 친척 윤인주(尹仁柱)의 어머니는 윤 시인의 유해가 돌아오던 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장례식날 윤 시인의 아버지는 목관을 붙들고 동주야, 동주야 하면서 우셨다. 목관 안을 들여다본 사람이 있었는데, 동주는 흰 베옷을 입고 누워 턱수염이 자라서 가슴에까지 늘어지고 머리는 깎지 못해 허리 근처까지 자라 있었다고 했다.”
<암흑기 시인 윤동주> - [동아일보](1987. 10. 30)
연세대 이선영(李善榮) 교수는 30일 연세대 인문관에서 열린 윤동주 70주년 기념 연구발표대회에서 논문 <암흑기 시인, 윤동주 재론>을 통해 ‘지금까지 윤동주 시에 대한 작품연구가 시대적 맥락에서 분석돼 저항성의 유무를 밝히는 데 주력했기 때문에 시의 본질, 그 시대적 의미 파악에 있어 다소 미진함을 가지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윤동주의 의식 형태를 그의 독서 경향, 친척 등의 회고담, 일본경찰 조서, 재판 판결문을 통해 면밀히 조사하고 이러한 요소가 어떻게 한 편의 시로서 구체화되고 있는지를 분석했다. 논문에 따르면, 윤 시인의 핵심적 의식 형태는 고향 지향성, 내성적이고 실존주의적 경향, 기독교 신앙, 민족의식 등 네 갈래로 나눠지는데, 이들은 곧 작품의 주제적 특징과 매우 흡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맥락에서 이 교수는 ‘윤동주 시가 강한 저항 의식, 시적 행동성을 가지고 있거나 포괄적인 역사의식 혹은 민족의식을 실천적 차원에서 보여 주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 교수는 ‘일제말기 상황에서 한국의 시인으로 부끄럽지 않고 깨끗한 민족시를 순수하고 아름다운 우리 고유의 언어로 남겨 놓았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일제에 대한 문학적 저항이요, 대단한 민족의식의 실천’이라고 강조했다.
<김송씨 집에서의 윤동주의 하숙 생활> - 일화
그의 하숙 생활은 매우 질서 있는 일과로 짜여져 있었다. 아침 식사 전에는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의 중턱까지 산책하고 집으로 돌아와 방청소를 끝내고 조반을 마친 다음 학교로 갔다. 하학 후에는 조선은행 앞까지 전차를 타고 들어와 책발을 두루 돌아다녔다. 지성당, 일한서방, 마루젠, 군서당 등의 신간 서점과 고서점을 돌고 나면 '후유노야도'나 '남풍장'이란 음악 다방에 들러 음악을 즐기면서 우선 새로 산 책을 들춰 보기도 했다. 극장에 들르지 않으면 명동에서 걸어서 을지로와 청계천을 거쳐 관훈동에 있는 헌책방을 다시 순례했다. 거기서 또 걸어서 적선동 유길서점에 들러 책들을 훑고 나면 거리에는 전깃불이 켜져 있을 때가 되었다. 누상동 9번지 하숙집으로 돌아오면 주인 조 여사가 손수 마련한 저녁 밥상이 기다리고 있었고, 저녁 식사가 끝나면 김송의 청으로 대청마루에 올라가 한 시간 남짓한 환담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는 방으로 돌아와 자정 가까이까지 책을 보다가 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 김수복 : <영원한 별의 시인 윤동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