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살던 고향 꽃피는 산골 - 입실리(入室里)
회원님들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필자는 우리 카페 ‘영지초등동창회’방에 필자의 모교인 영지초등학교, 그리고 원래의 영지초등학교 관할이었던 괘릉초등학교 관내 법정리(法定里)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사연들을 ‘나 살던 고향 꽃피는 산골’ 시리즈로 소개드린바 있습니다.
그러나 입실․모화․석계․연안초등학교 관할 리동(里洞)에 대한 소개를 빠뜨리고 보니 여간 서운하지가 않습니다.
이에 이들 리동에 대해서는 지난 2006년도에 수록한 ‘외동이야기’방의 ‘지명유래’를 다소 보완하여 같은 방에 수록해 드리고자 합니다.
게재 순서는 외동읍 법정리(法定里) 건제순(建制順)에 상관없이 입실․모화․석계․연안초등학교 관할인 입실리, 모화리, 석계리, 문산리, 녹동리, 구어리, 연안리, 냉천리, 개곡리, 말방리, 죽동리 순서로 게재하고자 하오니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해당 사연 중 필자와 직접적(直接的)으로 관련이 있는 부분은 필자의 위치에서 개인적 사연(事緣)과 주관적 감회(感懷)를 추가하고자 하오니 넓으신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혹시 게재 기사나 사연에 오류가 있거나, 누락된 부분이 있으면, ‘답글’로 바로잡고 보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용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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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외동읍사무소(外東邑事務所) 소재지인 ‘입실리(入室里)’는 마을 동편에 있는 동대산(東大山)의 산골짜기가 마치 병풍을 세운 것 같다 하여 ‘입곡(立谷)’이라 하던 것이 변해서 ‘입실(入室)’이 된 것이라고 한다.
이 마을을 ‘입실(入室)’이라 한 것은 또 신라(新羅) 때 불국사와 모화리(毛火里)의 원원사(遠願寺) 사이에 작은 절 78개가 있어 절과 절 사이의 통로를 마치 복도(複道)와 같이 만들었다는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불국사(佛國寺)에 들어갈 사람은 미리 이곳의 작은 절로 들어와 삭발(削髮)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는데, 이렇게 불도(佛道)를 닦으러 오는 사람들이 실내(室內)로 들어오는 문이라 하여 ‘입실(入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입실리(入室里)는 옛적에 연안리(淵安里)에 있었던 당시의 외동면사무소(外東面事務所)를 입실리로 옮겨옴으로써 그때부터 외동읍 소재지가 되었으며, 읍사무소와 입실초등학교, 외동중학교, 입실우체국, 외동농협, 경주경찰서 외동파출소, 외동소방파출소, 입실역, 입실시장 등 모든 일선기관(一線機關)이 이 마을에 위치하게 되었다.
지금의 입실리
그리고 지금의 경주경찰서 외동파출소(外東派出所)는 1910년 1월 20일, 구어리(九魚里)에서 주재소(駐在所)로 출범했는데, 이로부터 11년간 구어리에 주재하다가 이웃 연안리(淵安里)에서 입실리로 이전하는 외동면사무소를 따라 1921년 6월 19일 지금의 입실리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입실시장(入室市場)도 원래는 구어리(九於里)에 있었는데, 외동주재소(外東駐在所)와 함께 입실리로 옮겨왔었다.
이 시장(市場)이 구어리(九魚里)에 있었던 1919년 3월 13일 밤에는 전국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의 기운에 따라 면민(面民)들이 그곳 거주 일인(日人)들에게 “가옥을 명도(明渡)하고 속히 본국으로 물러가라”고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인바 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외동주재소(外東駐在所)에서는 기독교인(基督敎人)인 주동 인물(성명 미상) 1명을 검거하여 구속하는 등 탄압을 가했었다. 이때 시위(示威)를 벌이던 외동면민들을 구속하고 탄압하던 주재소 경찰관은 조선인(朝鮮人) 출신 악질 순사(巡査)들이었다.
경상북도 경찰부(警察部) 대구국(大邱局) 외동주재소(外東駐在所) 소속 김기정(金起正) 순사와 이윤호(李允好) 순사가 그들이었다.
‘입실(入室)’과 ‘장터’가 입실1리, 본동·수북·갓밑·신기·토점이 입실2리, 순금·관거리가 입실3리를 이루고 있다. 입실1리는 읍소재지(邑所在地)로 상가중심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입실리(入室里)를 소개하려면 무엇보다 유서 깊은 입실초등학교(入室初等學校)를 먼저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입실리(入室里) 1039번지에 소재하는 입실초등학교는 1925년 4월 22일 입실공립보통학교(入室公立普通學校)로 개교한 이래 경주(慶州) 남부지역 중심학교로서 위상을 다지며, 100여년의 역사를 향해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개교 당시의 입실공립보통학교
입실초등학교(入室初等學校)는 지난해까지 85회 졸업생을 배출하여 졸업생만 9,989명이 이른다. 1941년 4월 1일 입실공립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지금까지 배출한 1만여 명에 이르는 졸업생들은 경향각지(京鄕各地)에서 모교의 찬란한 역사와 전통(傳統)을 가슴에 담고 사회발전(社會發展)에 이바지하고 있다.
옛적 입실초등학교(入室初等學校)의 명물(名物)은 무엇보다 교문 양쪽에 가꾸어져 있던 교재원(敎材園)이었다.
교재원이란 문자 그대로 학생들의 자연과 가사교육에 필요한 동식물을 사육(飼育)하고 재배하여 학생들이 관찰할 수 있게 한 곳으로 당시로서는 입실초등학교만큼 잘 가꾸어진 교재원을 보유한 초등학교도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필자가 영지초등학교 상급반에 재학하던 어느 해 여름에는 담임선생님의 인솔로 이 교재원(敎材園)을 견학하기도 했었던 기억이 난다.
1942년의 입실초등학교
(군복같은 국민복을 착용한 교사가 일장기(욱일승천기)를 들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해마다 개최하던 입실초등학교(入室初等學校)의 가을운동회 날이다. 옛적 시골 초등학교의 가을 운동회(運動會)는 그야 말로 잔칫날이었다. 일 년 내내 나들이 한 번 갈 수 없었던 그 시절에는 초등학교 운동회만큼 기다려지는 날도 없었다.
특히 입실초등학교(入室初等學校)의 운동회는 외동읍 전체의 명절이었다. 오일장인 ‘입실장’이 서는 날을 운동회 날로 잡으면, 장도 보고 운동회도 볼 겸 읍내(그때는 ‘면내’였지만)의 거의 모든 주민들이 모여 들었다.
아침나절에 시장통에 자리 잡은 엿장수와 ‘오다마’장수도 점심때가 가까워오면 아예 목판과 좌판을 학교운동장으로 옮겨왔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운동장 이곳저곳에는 오전 수업을 마친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학생들도 함께 진을 쳤다.
1942년의 입실초등학교
(지금의 교문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1학년 입학생들)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의 경우 입실초등학교와 담장을 같이 잇대고 있어 입실초등학교의 운동회가 있는 날이면, 입실초등학교 학생들과 학부형은 물론 구경꾼들까지 1,000여명이 합세하여 함성을 지르는 통에 도무지 공부가 될 리도 없었다.
게다가 입실초등학교(入室初等學校) 출신 학생들은 어머니들이 입실초등학교에 재학하는 동생들을 위해 집에서 싸온 팥 넣은 찰밥(참쌀밥)을 먹고 싶어 안달이 나면, 선생님들께서도 눈치를 채시고 오전수업만 하고 하학종을 치셨다.
입실초등학교(入室初等學校)에 다니는 동생이 없거나, 다른 초등학교 출신 외중생들은 학교에서 부리나케 도시락을 까먹고, 입실초등학교로 자리를 옮겨 운동회가 끝날 때까지 턱을 고이고 각종 경기관람에 몰입하곤 했었다.
그때 입실초등학교(入室初等學校) 운동회 때는 해마다 단골로 듣는 안내방송(案內放送)이 있었다. 안내방송 책임자인 듯한 선생님이 “해방 1회 졸업생들은 교재원(敎材園)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라거나, “해방 3회 졸업생들은 철봉대 옆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방송이 해그름까지 이어지곤 했었다.
은근히 자기 학교의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이라도 하듯 하는 그 안내방송이 부럽기도 했고, 영지초등학교(影池初等學校) 출신인 필자로서는 얼마간 심정적인 위축을 경험하기도 했었다.
당시의 말로 약간 ‘야꼬’가 죽기도 했었다는 얘기다. 어쩌면 얄궂기도 했던 그 시절 그 안내방송(案內放送)도 이제는 추억의 그림자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여기에서 말하는 ‘야꼬(やく)’란 ‘기(氣)’를 말하는 일본어로 주로 ‘죽다’라는 말과 함께 쓰여 “니가 아부지가 엄나, 엄마가 엄나, 히가 엄나, 와 ‘야꼬’가 죽노(네가 아버지가 없나, 어머니가 없나, 형이 없나, 왜 기가 죽느냐)”라는 용례(用例)가 있다.
1960년대의 입실초등학교 구교사
(앞줄에서 3번째 줄, 우측에서 3번째 학생이 이 학교
제32회 졸업생 우희곤 재경 외동향우회 전임 회장이다)
지금의 입실초등학교(入室初等學校)는 어린이들에게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여 꿈을 가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체력(體力)과 학력(學力)을 기르며, 아름다운 삶을 가꾸기 위해 지·덕·체를 겸비한 인격체를 기르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2005년도부터 특수시책(特殊施策)으로 추진하고 있는 ‘꿈·힘·삶 가꾸기 운동’은 ‘꿈 가꾸기’를 위해서 1인 1특기(特技) 신장이라는 슬로건아래 전교생(全校生)이 각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아울러 ‘힘 가꾸기’를 위해서는 ‘1인 1운동’과 독서(讀書)에 주력(主力)하고 있으며, 특히 ‘1인 1운동’에는 매달 ‘줄넘기왕 선발대회’를 개최하여 시상하는 등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또한 학교에서 도서(圖書)를 구입하여 경상북도교육청(慶北敎育廳)의 시책인 ‘e-아침독서시간’에 가입하여 아동 스스로 책을 읽고 독후감(讀後感)을 탑재(搭載)하도록 하고 있으며, 독후감 우수 아동에게는 시상을 하여 아침 독서시간을 더욱 알차게 운영하고 있다.
한편 ‘삶 가꾸기’를 위해서는 학교홈페이지에 ‘칭찬합시다’ 배너를 만들어 폭력(暴力)과 체벌(體罰), 따돌림이 없는 3무운동, 약속 잘 지키기, 바른말하기, 차례 지키기 등 ‘정직 3운동’등 지속적인 인성교육(人性敎育)을 전개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삶을 가꾸기 위해 꾸준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입실초등학교(入室初等學校)는 이러한 학교당국의 노력으로 경상북도(慶尙北道) 과학명품 경진대회에서 교육감상(敎育監賞) 은상을 수상했고, 경북소년체육대회(慶北少年體育大會)에서는 여자초등학교 육상 80m경주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는 등 여러 분야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입실초등학교(外東中學校) 출신 주요 인사로는 해군사관학교를 거쳐 단국대학교와 동 대학원,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기계공학 석․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단국대 공과대 공학부 기계공학전공 교수로 재임하면서 재경외동향우회 회장을 역임한 배신철(裵信徹) 교수, 한국전력 연수원 부교수와 동(同) 정보통신연구부장 등을 거쳐 역시 재경외동향우회장을 역임하고,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임 중인 우희곤(禹熙坤 : 32회) 박사 등이 있다. 우박사는 외동향우회 카페의 카페지기이기도 하다.
전 부산시의회 의장을 지낸 우병택(18회)씨, 제14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상두(23회, 외동중 5회) 전 의원, 경주JC 회장과 경주문화원장, 통일주체국민회의 제2대 대의원을 역임한 정길화(21회)씨, 남북경협국민운동본부 이사장과 아시아사회과학연구원 원장을 지낸 이장희(34회) 전 한국외국어대 부총장, 이용걸 정형와과 이용걸 원장, (주)ATPM컨설팅 대표컨설턴트로 재직 중인 권오운(41회) 박사, 전 재경외동향우회 홍춘표 회장(41회), 영남대 권오옥 교수 등이 모두 이 학교 출신이다.
그리고 중앙일보(中央日報) 영남사업본부 본부장을 거쳐 현재 중앙일보 미디어기획실 미디어기획팀 편집고문과 고충처리인(苦衷處理人 ; 부국장) 등을 역임하고 있는 이범락(李範洛)씨, 이해길(전 도의원), 이한수(전 대구 북구 경찰서장), 김두봉(전 경주시의원), 최상군(예비역 육군대령), 이명철(울산경찰청 보안계장), 김순직(전 디자인서울시본부장), 김일헌(경주시의회의장), 이진락(경주시의회 부의장) 제씨 등도 입실초등학교 출신이다.
지금의 입실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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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실리를 소개하려면, 다음 순서는 당연히 필자의 모교인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가 된다. 입실초등학교와 담장을 같이 하고 있는 입실리(入室里) 443-1번지에는 필자의 모교인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가 자리하고 있다.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는 1947년 9월 20일 외동고등공민학교(外東高等公民學校)로 출범하여 1951년 9월 20일 사립 외동중학교로 개교하였으며, 1956년 7월 20일에는 공립학교로 전환하면서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불국사중학교 당시의 외동중학교
이듬해인 1957년 3월 15일, 다시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로 교명(校名)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필자의 경우 1955년도에 입학하여 1958년도에 졸업함으로써 외동중학교와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를 모두 다닌 셈이 되었다. 외동중학교는 1947년 개교해 2013년 62회 졸업식까지 1만4,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외동읍 입실리에 중학교(中學校)가 설립된 배경은 여느 중학교의 경우와 비슷했었다. 해방 이후 지역 내 중등교육기관(中等敎育機關)의 부재로 초등교육을 마친 학생들은 경주(慶州)와 울산(蔚山) 지역으로 원거리 통학을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이에 지역 주민들이 뜻을 모아 1947년 9월20일 외동고등공민학교(外東高等公民學校) 설립인가와 함께 1학년 1학급으로 편성, 수업을 시작하여 4년간 운영해 오다가 1951년 8월 8일 재단법인 외동중학교 유지재단 설립인가를 받아 사립 외동중학교를 개교 했다.
초대 재단이사장(財團理事長)에는 제2대 국회의원(國會議員)을 역임한 안용대(安龍大) 선생이, 초대교장으로는 권영해(權寧海) 전 안기부장의 부친인 권태훈 선생이 취임하고, 4학급을 인가받아 출범한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는 외동읍 유일의 중등교육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3층 당시의 외동중학교
권영해(權寧海) 전 국가안전기획부장(國家安全企劃部長)의 경우 1949년 경남 양산군 하북면 신평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외동읍으로 이주하여 1952년도에 사립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를 제1회로 졸업했다.
1951년 9월부터 5년 여간 사립중학교로 운영되던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는 1956년 7월 20일 사립중학교에서 공립중학교로 전환하면서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위에서 말한 안용대(安龍大)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재단이사장은 제2대 국회 당시 당시의 우리 고향 외동면(外東面)을 관할하던 경상북도 제17선거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었다.
초대 재단이사장 안용대 선생(1999.5.6 작고)
당시의 선거에는 경주군 외동면(外東面)에 거주하던 김영락(金榮洛)씨 등 12명이 입후보하여 열전을 벌인 결과 경주군 경주읍(慶州邑) 출신인 안용대(安龍大) 이사장이 당선되었다. 안용대(安龍大) 의원의 약력을 소개한다.
대수
및
임기 |
2대 |
1950. 5. 31 ~ 1954. 5. 30 |
선 거 구 명 |
경주군 갑선거구(경주읍, 감포읍, 외동면, 내동면, 양남면, 양북면) |
이 름 |
안용대(安龍大) 1913년1월13일생 |
소 속 정 당 |
무 소 속 |
주 요 학 력 |
일본 ‘주오(중앙)’대학 법학전문부 졸업
일제의 고등문관시험(高等文官試驗, 고문시험) 합격 |
주 요 경 력 |
경상남도 사천․함안․창원․거창군수(일제당시) 국회전문위원, 외동중학교 재단이사장 |
비 고 |
1999년5월 6일 별세
제2대 국회의원(경주갑)무소속 |
안용대(安龍大) 의원은 이후 제3대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에 집권당인 자유당후보로 입후보했으나 낙선했고, 4.19혁명으로 자유당(自由黨) 정권이 몰락하자 민주당(民主黨) 치하의 제5대 국회의원선거에는 무소속으로 입후보했으나, 역시 인정받지 못했다.
일제 당시 일본(日本) 일본 ‘주오(중앙)’대학교 법학전문부를 졸업하고, 일제의 고등문관시험(高等文官試驗, 고문시험)에 합격한 후 경상남도 사천․함안․창원․거창군수를 지내면서 일제의 식민통치(植民統治)에 앞장 선 전력이 문제가 된 것이다.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를 설립하는 등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이 있기는 했으나, 일본천황(日本天皇)에게 충성을 맹세한 일제의 앞잡이 역할을 한 매국노적 친일행위(親日行爲)를 외동읍민들이 더 이상은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서울에서 신세계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사무실을 개업한바 있는 안용대(安龍大)의원은 ‘安田龍大’라는 일본식 이름도 갖고 있었는데,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親日)인명사전 관료부문에 수록되어 있다.
얘기가 나온 김에 당시의 일본 ‘고등문관시험(高等文官試驗, 고문시험)’을 좀 더 소개하기로 한다. 그 시절 ‘고문시험’은 1894년부터 1948년까지 실시된 일본과 그 식민지인 조선과 대만에서 시행된 고등관 채용시험으로 만주국(滿洲國)에서도 같은 이름의 시험이 있었다.
고등문관시험(高等文官試驗)의 원형은 1887년 일본에서 제정된 ‘문관시험시호실천견습규칙(文官試験試補及見習規則)’이다. 이 규칙에 의해 관리 임용시험은 고등시험과 보통시험으로 나뉘었고, 전자는 주임관을, 후자는 판임관을 선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1893년 문관임용령(文官任用令) 제정에 따른 개혁에 의해 고등문관시험(高等文官試驗)이 처음 실시되었으며, 1899년 동령의 재개정을 통해 칙임관의 정치임용(추천임용)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이후 많은 고등문관시험에서 많은 수의 칙임관이 배출되었다.
고등문관시험(高等文官試驗)에 합격하면 신분과 출신성분에 관계없이 고등관에 임명될 자격을 득했으며, 이 시험의 난이도는 매우 높았다.
이 시험제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8년 명목상 폐지되었지만, 내용상 동일한 시험이 일본에서는 인사원에서 실시하는 국가공무원 1종 시험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행정고등고시, 외무고등고시, 입법고등고시, 사법고시로 이어지고 있다.
당시의 고등문관시험(高等文官試驗)에는 동경제국대학 출신이 주로 합격했으며, 동경제국대학 출신의 고등문관시험 합격자에게는 일제의 천황(天皇)이 은시계(銀時計)를 하사했기 때문에, 이들을 ‘은시계조(銀時計組)’라고도 불렀다.
고등문관시험(高等文官試驗)에 합격하면, 문관(행정관), 외교관, 영사관, 판사, 검사에 임명되는 자격이 주어졌다.
또 고등문관시험에서 합격하면 일본에서 시행 중이던 각종 국가자격시험의 무시험 검정자격이 주어지기도 했으며, 고등문관시험 합격은 대학졸업과 동등한 학력(學力)으로 인정되었다.
1930년대 말에는 고등문관시험(高等文官試驗)의 예비시험이 추가되었는데, 일본의 고등학교 고등과 졸업생, 대학 예과 이상 수료자나 대학으로 승격된 구제(舊制)의 전문학교 졸업자는 이 예비시험을 면제받았다.
원래 이 고등문관시험(高等文官試驗)에는 행정과와 사법과가 있었으나, 1940년대 들어 외교과가 추가되었으며, 당시에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사법과(司法科)에 합격해야 했다.
그리고 고등문관시험(高等文官試驗)은 임용시험이 아니라 임용될 자격을 부여하는 자격시험이었기 때문에 합격이 관리임용과 직결되지는 않았다. 대개 합격한 후 1년에서 길게는 6년 정도를 기다려야 임용발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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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얘기로 돌아간다. 여기에서는 필자의 모교 외동중학교가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로 교명이 변경된 사연을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동족상잔(同族相殘)의 6.25전쟁이 휴전으로 끝났지만, 거리에는 거지들이 우글거렸고, 어려운 살림살이에 당시의 시골 어린이들은 국민학교(초등학교)에도 제대로 다닐 형편이 못되었다.
월사금(月謝金)으로 내는 사친회비(師親會費)를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민들의 자녀들은 중학교의 진학이 그만큼 어려웠고, 고등학교(高等學校) 이상의 진학은 꿈도 꿀 수 없는 시기였다.
때문에 중학교(中學校)에 진학하는 학생들도 적었지만, 다니던 학생들도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특히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가 그랬다.
때문에 요즘은 ‘중중퇴(中中退)’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를 정도지만, 그 당시에는 ‘중학교 중퇴’도 대단한 학력으로 인정받기도 했었다. 어쨌든 사정이 이렇고 보니 그 당시 사립학교(私立學校)를 운영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없어진 1960년대의 별관
(재학생이 급증하자 별관을 지어 3학년을 수용했다)
그런데 마침 이 시기에 불국사역(佛國寺驛)이 소재하는 당시의 내동면(內東面) 구정리의 구정국민학교(지금의 불국사초등학교)앞 남천(南川 ; 형산강의 지천) 개울가에 있던 공립중학교인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가 문을 닫게 되었다. 학교가 홍수(洪水)에 떠내려 가버렸기 때문이다.
당시의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는 1955년 가을에 흙벽돌로 지은 4칸짜리 교사(校舍)였는데, 이듬해인 1956년 홍수에 형산강의 지류인 남천(南川)이 범람하여 흙벽돌 교사가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의 불국사중학교 건물은 필자의 향리인 괘릉리(掛陵里) ‘자미산’에서 보면 가깝게 건너다보이기도 했었다.
1980년도에 개교한 지금의 경주시 시래동 206번지에 소재하는 ‘불국중학교(佛國中學校)’와는 전혀 다른 중학교다. 경주시 시래동에 자리 잡고 있는 지금의 ‘불국중학교(佛國中學校)’를 현지에서도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으나, ‘불국사(佛國寺)’가 아니고 ‘불국(佛國)’이다.
어쨌든 학교가 홍수(洪水)에 흔적 없이 사라지고보니 당시의 교육당국에서도 전쟁후의 교육재정(敎育財政)이 바닥이 난 상황이었고, 개울가에 다시 재축을 한다 해도 거듭 홍수피해(洪水被害)를 당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학교를 폐교하기로 했다.
이 때 사립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에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공립중학교(公立中學校)로의 전환을 목표로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 측과 협의하여 경상북도 교육위원회(敎育委員會)에 사립인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에 대한 폐교를 신청하고, 공립중학교인 불국사중학교의 소재지를 외동중학교의 소재지인 입실리로 변경하는 ‘위치변경승인’을 신청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경상북도(慶尙北道) 교육위원회에서는 1956년 7월 20일 이들 두 가지 신청을 동시에 인가(認可)하였고, 이로써 사립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는 없어지고, 공립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로 발족하게 되었다.
불국사중학교의 ‘위치변경승인 자료’
1. 경북지사가 문교장관에게 신청한 불국사중학교 위치변경인가 요청 품의서
※ 관련 공무원이 ‘폐교’를 ‘페교’로, ‘타개’를 ‘태개’로 오기하고 있다.
2. 불국사중학교 위치변경인가 신청에 대한 문교부장관 지령문
3. 불국사중학교 위치변경인가 재결에 따른 문교부장관 통첩문
이때 당시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에 다니던 학생 몇 명이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로 편입해 왔고, 재직하던 선생님 서 너 분도 함께 옮겨 오셨다.
실제로는 위의 통첩문에서와 같이 외동중학교 재학생 300여명 전원이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에 편입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에서 전근오신 선생님들이 동료 교사들과 학생들로부터 지금의 용어로 ‘왕따’를 당하고, 놀림을 당하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당시의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3학년생들은 15세에서부터 21세까지의 연령이 분포되어 있어 덩치가 큰 학생들이 많았고, 이 때문에 갓 전입(轉入)해 오신 선생님들이 여간 거북해 하지 않으셨다.
당시에는 이렇게 고령 중학생이 많아 중학교 3학년생에게 징집영장(徵集令狀)이 발부되기도 했었다. 전쟁 중에는 물론 휴전(休戰)이 되고 난 뒤에도 언제든지 전쟁이 다시 시작될 상황이어서 징집영장을 받은 중3년생들은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당시의 문교부(文敎部)에서는 1952년도부터 중고등 학생 중 징집연령에 해당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매주 토요일마다 4시간씩 군사교육(軍事敎育)을 실시하고, 군사교육을 받은 학생들에게는 문교부장관 명의로 전시학생증(戰時學生證)을 발급해 주고 군복무를 연기해 주었다.
당시 발급했던 전시 학생증
어쨌든 이런 우여곡절을 거친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는 제7회 졸업생의 경우 2학년 1~2학기 통신표(通信票)는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 교장선생님 명의로 발급되었고, 제6회 졸업생 역시 3학년 통신표와 졸업장은 불국사중학교 교장선생님 명의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물론 8회 졸업생은 1학년 통신표가 그랬을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통신표(通信票)’는 지금의 ‘생활 통지표’의 이전 말로 방학하기 전 종업식(終業式)이 되면, 담임선생님께서 매학기 말에 학과성적 등을 기재한 통신표를 나눠주셨다.
그 시절 통신표(通信票)를 살펴보면, 교과발달상황은 학업 성취도에 따라 ‘수(秀)’, ‘우(優)’, ‘미(美)’, ‘양(良)’, ‘가(可)’로 나타냈는데, 이를 점수로 나타내면, 수(90~100), 우(80~89), 미(70~79), 양(60~69), 가(60 미만)가 된다.
그리고 행동발달상황은 ‘가’ ‘나’ ‘다’로 표기 되어 있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가(잘함)’ ‘나(보통)’ ‘다(노력요함)’가 된다.
‘수우미양가(秀優美良可)’는 우리나라 건국 초기, 일제(日帝) 강점기의 학적부(學籍簿)를 생활기록부로 바꾸면서 함께 사용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학생을 성적과 석차(席次) 위주로 평가한다는 문제점이 지적되어 기술식 평가방법이 제안되기도 했었다.
이 평가 방법은 일제(日帝) 강점기 때 일본 국민학교(國民學校)에서 쓰던 방식을 들여온 것으로, 일본 전국(戰國)시대에 ‘사무라이’들이 누가 적의 목을 많이 베어오는가에 따라 ‘수우양가(秀優良可)’를 매긴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기도 했었다.
그 시절 서울 수학여행 온 외중 여학생들
본론으로 돌아간다.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로 9개월 동안 운영되던 외동중학교는 제7회 졸업생들이 졸업반으로 진급한 며칠 후인 1957년 3월 15일 공립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로 교명이 다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우여곡절로 필자를 비롯한 제7회 졸업생들은 사립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에 입학하여 공립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를 거쳐 공립 외동중학교를 졸업함으로써 세 곳의 중학교를 동시에 다닌 셈이 된다.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는 원래 남자중학교였으나, 1956학년도부터 여학생을 모집하여 남녀공학(男女共學) 중학교가 되었다. 당시의 여학생은 입실국민학교(入室國民學校) 출신 5명이 필자가 소속한 1학년 A반에 편성되기는 했으나, 1학기가 지난 후에는 3명인가로 줄어들더니 2학년이 되었을 때는 한사람도 남지 않았다.
1년 만에 남녀공학(男女共學)이 해체된 것이다. 짓궂은 머슴애들 틈바구니에서 견뎌낼 수 없어 모두들 당시의 경주읍내 용강동에 소재하는 근화여중(菫花女中)엔가로 전학을 갔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기의 외동중학교 교직원과 학생들
(선생도 학생도 모두 그 시절에 유행하던 나팔바지 차림이다.
불행하게도 이 유행은 필자들이 전승한 전통이기도 하다. 필
자들이 3학년 때 '맘보바지'가 들어가고, '나팔바지'가 유행했
는데, 쑥색 하복 나팔바지 바지 가랑이를 무려 23인치나 늘여
입고, 입실리 황토길과 7번국도 비포장도로를 쓸고 다녔다.)
이후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에서는 필자가 졸업한 2년 후인 1960학년도부터 본격적인 남녀공학(男女共學)이 재개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알고 있다.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의 재학생 수는 지난 1979년에는 22학급 1천525명의 재학생으로 규모가 팽창하기도 했으나, 1990년 이후 이농현상(離農現象)으로 점차 감소해오다 근래에 들어 다시 증가하고 있다.
지금은 13개 학급에 374명의 재학생을 수용(收容)하고 있으나, 전성기(全盛期)에 비하면, 4분의1에 불과하다.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는 지난해까지 제62회 졸업식을 가져 총 14,21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지금의 외동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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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실리(入室里)의 명소로는 또 지금은 폐역(廢驛)이 되었으나, 입실역(入室驛)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입실역은 동해남부선 기차역으로 입실과 ‘순금’의 경계지점에 있다.
경주시 외동읍 입실1리 962-2번지에 소재하는 입실역은 1920년 3월 10일 역사(驛舍)를 신축하고, 1921년 10월 25일 보통역(普通驛)으로 영업을 개시하였다.
1967년 9월 이전의 입실역 플랫폼과 역사전경
(학생들은 외동중학교 여학생들이다)
입실역(入室驛)은 일제시대(日帝時代)인 1920년 경주와 울산 간에 부설된 협궤선 경동선(慶東線) 시대를 거쳐 부산(부전)과 포항을 잇는 총 길이 147.8 ㎞의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 32개 역중 하나로써 한때 경주읍내(慶州邑內)로 통학하던 학생들과 울산(蔚山) 경주(慶州) 등지의 번개시장에 농산물(農産物)을 수송하던 완행열차의 정거장이자 그 시절 외동읍민의 삶의 애환이 담겨있던 곳이기도 하다.
1920년 3월10일 경동선(慶東線) 당시 최초로 역사(驛舍)를 신축하고, 이듬해인 1921년 10월 25일부터 보통역(普通驛)으로 영업을 개시해 오다가 1936년 12월 1일에는 역사를 다시 신축하였고, 1967년 10월 15일에는 구내를 확장하고, 다시 단장한바 있다.
그러나 그 이후 도로교통(道路交通)의 발달과 자가용 승용차의 증가로 하루 이용객이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들어 간이역(簡易驛)으로 전락했다가 지금은 여객수송을 취급하지 않는 폐역(廢驛)이 되고 말았다.
전원 카페와도 같았던 입실역 전경
그동안 입실역(入室驛)은 몇 번의 개보수가 이루어지기는 하였으나, 1930년 전후로 만들어진 표준형 농촌지역 간이역사(簡易驛舍)의 건축양식(建築樣式)을 잘 반영한 역으로써 건축사적, 철도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부속시설로는 화장실과 수하물 창고, 관사(官舍) 등이 있었다.
여기에서 잠시 동해남부선이 탄생된 배경을 소개한다. 동해남부선은 지난 1930년 당시의 부산진역(釜山鎭驛)에서 동해남부해안을 따라 포항역(浦項驛)까지 이어지는 길이 145.8km의 철도의 이름이다.
이름 그대로 동해남부(東海南部) 지역, 즉 부산진역에서 출발하여 해운대(海運臺), 기장, 좌천, 울산(蔚山), 경주(慶州), 안강(安康)을 거쳐 포항까지 이어지는 철로였다.
동해남부선은 일제(日帝)가 울산을 군사적 요충지(要衝地)로 개발하기 위해 1921년 10월 25일 협궤선(挾軌線)으로 개통한 조선철도주식회사(朝鮮鐵道株式會社) 소유 사설철도였던 울산~경주간 41km의 경동선(慶東線)을 매입하여 1930년 10월 1일 지금의 광궤선(廣軌線)으로 교체하여 확장함으로써 태어났다.
따라서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 철도는 1910년대에 개통된 경편철도(輕便鐵道 : 협궤철도)로서의 경동선(慶東線)을 그 모태로 한다. 당시의 ‘경동선’은 대구(大邱)에서 경주(慶州)를 거쳐 울산(蔚山)을 왕래하는 철도였었다.
폐역 직전의 황량한 입실역 플랫폼과 명패
당시의 ‘경동선(慶東線)’은 경편철도, 즉 협궤철도(挾軌鐵道)로 나중의 표준궤도 또는 광궤(廣軌)라 불리던 폭 1.435미터의 선로보다는 훨씬 좁았다. 따라서 이 선로를 달리던 열차 역시 소형 협궤열차(挾軌列車)였다.
둥해남부선의 연혁을 조금 더 구체적(具體的)으로 알아본다. 위에서 말한 ‘경동선(慶東線)’은 처음 1912년 7월에 부산진(釜山津)과 동래(東萊) 간의 사설철도(私設鐵道)를 운영 중이던 조선가스전기주식회사가 동래에서 울산, 경주, 대구, 포항을 잇는 철도부설 허가신청에서 시작되었으나, 당시의 경제불황(經濟不況)에 따른 자금부족으로 1915년에 그 허가는 실효되고 말았다.
그러던 중 1916년 2월 1일에 조선중앙철도주식회사가 경부선(京釜線) 대구역(大邱驛)을 기점으로 동해안 학산역까지 연장하는 65.1km를 비롯하여 서악에서 불국사, 울산, 동래까지 그리고 울산에서 장생포간을 연결하는 총 연장 131.8km에 걸친 궤도 폭 2자 6치(78cm)인 증기기관차용 철도부설을 신청하여 동년 2월 15일에 허가를 받았다.
이 노선은 1917년 2월에 대구(大邱)에서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1월에 대구와 ‘하양’간, 다음해인 1918년 11월에는 하양-포항 간이 개통되었다. 이를 동해중부선(東海中部線)이라 했다.
이 노선의 개통 배경에 대해 ‘조선교통사(朝鮮交通史)’는 “이 철도는 경상북도 남부의 웅도 대구(大邱)의 경제력을 배경으로 하여 연선의 농업, 기타 산업의 개발에 영향을 미침과 동시에 동해안의 울산(蔚山), 포항(浦項)의 항만을 연결하여 해산물의 내륙수송 및 내륙물산의 일본, 조선 내 각 항(港)으로의 이출입에 활력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 경주(慶州), 불국사(佛國寺)에 있는 신라 2천년의 고대유적을 세상에 알리는데 큰 편리를 제공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결국 이 노선(路線) 개설의 목적은 경주관광(慶州觀光)과 내외 물자수송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노선공사는 그리 쉽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즉, 국유철도(國有鐵道)가 아닌 사설철도(私設鐵道)이다 보니 언제나 자금부족으로 공사가 순조롭지 못했다.
당시 동아일보(東亞日報)의 다음 보도는 이런 추측을 뒷받침해 준다. 당시의 보도를 당시의 철자법(綴字法) 그대로 소개한다.
1920년 5월 17일자 동아일보는 ‘울산철도공사 기공확정’이라는 제목으로 “카시이(香椎) 부산상업회의소 회두(會頭)가 대구(大邱)를 방문해서 조선중앙철도회사의 타케(武), 사토(佐藤) 양 전무와 스즈키(鈴木) 지배인과 회견하고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격의 없이 협의한 결과 현지 측량까지 필하야 공사에 착수할 계획이 확립되었는데, 작금 경제가 어려워 자본에 여유가 없어서 공사가 진척되지 못하고 있지만, 이 노선의 필요성을 잘 알기 때문에 그냥 간과하지 않고 부산(釜山) 및 조선가스에 대해 정식으로 교섭을 개시 할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드디어 1921년 10월 25일에 조선중앙철도 울산-불국사(佛國寺) 구간이 개통되었다.
동아일보(東亞日報)는 개통일자를 한 달 앞두고 ‘중철 울산선개통기’라는 제하에 “조선중앙철도의 불국사 울산간(18리 6분)신설 선로는 불원간 준공되겟슴으로 내 10월 25일부터 운수영업을 개시할 예정으로 목하 전혀 차의 준비 중이라더라”라고 보도하고 있다(1921. 9. 24).
이어서 개통일인 동년 10월 25일자 동 신문에서는 ‘중앙철도 개업-불국사 울산간’이라는 제목으로 “예히 공사 중이던 조선중앙철도선로 불국사 울산간 18리 6분, 조치원 청주간 14리 1분은 각기 준공되어 전자는 내 25일부터 후자는 11월1일부터 영업을 개시한다는데, 경관국에서는 개통의 당일 각 신역(新驛)에 대하야 연대수송을 행한다하며, 대구로부터 울산에 지(至)하는 각역의 이정운임은 좌와 여하다더라”라고 보도하고 있다.
이 보도에 따르면 불국사, 일실(一室), 모화(毛火), 노계(老溪), 울산(蔚山)이라는 역명이 보이고, 이 가운데 대구(大邱)에서 울산(蔚山)간의 철도운임은 거리 68.7리에 1등석이 4원83전, 2등석은 3원95전으로 되어 있다.
‘일실(一室)’과 ‘노계(老溪)’는 ‘입실(入室)’과 ‘호계(虎溪)’의 오자(誤字)로 보인다.
당시 울산과 경주역을 운행하던 협궤열차
입실역 얘기로 돌아간다. 90여년의 역사를 가진 입실역(入室驛) 주위에는 지금도 미약하나마 지난 1920년대의 경동선(慶東線) 협궤선로의 흔적이 남아 있어 철도기행(鐵道紀行)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지금은 폐역(廢驛)된 입실역(入室驛)에는 또 약 100여m 남쪽 동해남부선 철로 변에 역무원(驛務員) 관사(官舍)로 만들어진 일본식 연립 목조주택 2동이 있다. 이 관사는 1990년 초까지도 역무원이 거주했으며, 최근까지는 민간인이 거주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건물은 건축초기의 외형(外形)을 충실히 간직하고 있으며 창고와 우물 등의 부속시설(附屬施設)까지도 잘 보존되어오고 있는데, 얼마 남지 않은 일제시대(日帝時代) 목조 연립주택으로 추정된다.
토지(土地)는 개인소유 토지로 알고 있으며, 주변은 보일러 시설을 갖추기 위한 콘크리트 구조물(構造物)을 만드는 등의 약간의 변형(變形)이 있고, 현재는 거주자가 없는 빈집으로 방치되어 있다.
때문에 시설물(施設物)이 파손되고 쓰레기가 방치되고 있으며, 목조라는 특징으로 부식(腐蝕)이 여러 곳에서 발생되고 있는 상황이다.
어쨌든 오랜 역사와 아담한 모습을 갖춘 입실역 역사(驛舍)는 이제 영원히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한국철도공사(韓國鐵道公社)와 한국철도시설관리공단이 지난 2009년부터 총 2조 500여억원을 투입하여 동해남부선 울산-포항간 단선 73.2 ㎞를 이설(移設)하는 복선전철(複線電鐵)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계획에 따르면 기존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의 모화(毛火), 죽동(竹洞), 불국사, 동방, 나원, 경주, 사방, 양동, 청령, 부조 등 10개 역은 폐지되고, 입실(入室)과 부조, 나원, 안강역은 이전되도록 되어 있다.
이로 인해 1920년 개통된 이래 당시의 건축양식(建築樣式)을 잘 갖추고 있는 경주역(慶州驛) 증기기관차 급수탑, 불국사역, 입실역(入室驛)과 철도관련 건축물 등이 모두 사라진다.
복선전철사업의 연계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인 경주 역사지구(歷史地區)를 효과적으로 보전하기 위해서는 그 중심지를 관통하고 있는 현재의 철로 이설(移設)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선로이설(線路移設)이 불가피하다 해도 유구한 역사를 간직해 온 입실역(入室驛) 역사(驛舍)와 역무원 관사 등에 대해서는 그 보존방법이 동시에 강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업주체인 한국철도공사(韓國鐵道公社)와 한국철도시설공단에 대한 철저한 사전 문화재(文化財) 및 현상 조사를 요청해야 함은 물론, 그 보존(保存)을 강력하게 권고해야 할 것이다.
가칭 『동해남부선 철도역사관』등의 공익(公益)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한국철도공사(韓國鐵道公社)의 동참을 이끌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역무원 관사 전경
마침 문화재청(文化財廳)은 등록문화재 제도를 통하여 사라져가는 철도시설 상당수를 근대문화유산(近代文化遺産)으로 보존하기 위하여 문화재로 지정하고 있다.
경남의 진해역, 원주 반곡역, 남창역, 군산 임피역, 익산 춘포역, 순천 원창역, 구 곡성역, 서울 신촌역 등과 다수의 증기기관차 급수탑(給水塔)이 철도사적(鐵道史的), 건축사적(建築史的) 가치를 인정받아 소유 당사자(대부분 한국철도공사)와의 합의가 이루어져 근대문화유산(近代文化遺産)으로 등록되었다.
입실역(入室驛) 역사(驛舍)와 역무원 관사는 반드시 문화재로 보존되어야 한다. 이상의 주장은 입실리(入室里) 출신 어느 향우가 최근에 관련 단체에 제기한 것으로 필자의 생각을 가미한 것이다.
지난 90여 년 간 수많은 외동인(外東人)들의 애환과 추억을 담아 온 또 하나의 고향으로서의 정취(情趣)를 영원히 간직할 수 있도록 철도공사와 경주시(慶州市) 당국의 특별한 배려를 기대하여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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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동해남부선 복선전철 노선은 경부고속철도(京釜高速鐵道) 신경주역사(新慶州驛舍)가 들어선 건천읍 화천리 마을구간을 터널로 통과하고 모량리, 고란들 구간은 교량을 건설하며, 광명동 구간은 터널로 지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이 계획에 따라 기존의 정거장 중 앞서 말한 대로 외동읍 구간의 모화(毛火), 죽동역(竹東驛), 경주시내구간의 불국사(佛國寺), 동방(東方), 경주역(慶州驛)은 폐지된다.
그리고 입실(入室), 부조, 나원, 안강역은 이전(移轉) 신설되도록 되어 있지만, 지금의 역이 없어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외동읍(外東邑) 구간 동해남부선의 경우 복선전철(複線電鐵)로 형태를 달리하여 이설(移設)함으로써 남아 있게는 되나, 지금의 역사(驛舍)마다 수북하게 담겨있는 외동읍민들의 애틋하고 정겨운 추억들은 이제 그 역사(驛舍)들과 함께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동해남부선 복선전철화공사 외동읍 구간
(내남면 이조리에서 제내리의 '사일고개'와 냉천리, 구어리를 거치고,
입실리, 모화리의 동대산 기슭을 거쳐 울산의 태화강역으로 이어진다.
구체적인 전체 노선은 후속 파일인 모화리 편에서 참고하시기 바란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그어진 청색대각선은 포항-울산고속도로 노선으로
감포읍과 양북면, 말방리의 '동대산맥'을 거쳐 말방리, 죽동리, 연안리,
냉천리, 석계저수지, 치술령을 관통하여 울주군 두서면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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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향리 괘릉리(掛陵里)는 마을 가운데를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이 관통(貫通)하고 있으나, 열차(列車)가 정거하는 정거장은 없다.
그래서 향리에 살 때는 매일같이 기차(汽車)와 기찻길은 접했지만, 외동중학교 재학 당시의 ‘도둑차’를 탄 것을 제외하고는 기차를 타 본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1960년에 그 동해남부선 완행열차(緩行列車)를 타고 무작정 상경을 해버렸기 때문에 다시는 그 철길을 가보지 못했다. ‘도둑차’ 얘기가 나왔으니 그에 얽힌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한다.
입실역 이남에서 경주읍내로 통학(通學)해 본 회원님들은 아시겠지만,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 구간 중에는 외동읍 괘릉리의 ‘웽고개(왼고개, 웬고개 또는 원고개라고도 한다)’가 가장 가파른 고개이기도 했다.
지금도 일본제 ‘미카’ 증기기관차가 20여량의 곱배(유게 또는 무게화차)를 달고, 죽동리(竹洞里)에서부터 불국사역(佛國寺驛)을 향해 숨을 헐떡이며 기어오르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부산-포항간 동해남부선을 운행하던 그 시절 완행열차
(괘릉리 '웽고개'를 숨을 헐떡이며 기어오르고 있다)
당시에는 기관차(機關車)의 수가 적어 기관차마다 20여량의 화물열차(貨物列車)를 끌고 다녔는데, 군수물자(軍需物資) 등을 과도하게 적재한 열차의 경우 ‘웽고개’에 이르면 거의 바퀴가 돌지 않다시피 하는 서행(徐行)이 이루어진다.
이 때문에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에 다니던 학생으로 괘릉리(掛陵里), 신계리(薪溪里), 방어리, 북토리, 제내리, 불국사 앞 진현동 등지에 살던 학우들과 경주중학교(慶州中學校) 등 읍내로 통학하던 당시의 영지국민학교 관내에 거주하던 통학생들은 수시로 이곳에서 ‘도둑차’를 타거나, 뛰어내리곤 했었다.
외동중학생들은 하교할 때 입실역(入室驛)에서 개구멍으로 몰래 열차(주로 유개화차로 ‘곱배’라고 했다)를 타고, ‘웽고개’에 이르러 열차가 서행하면 뛰어 내리고, 경주읍내 통학생들은 아침마다 등교할 때 잽싸게 뛰어 올라타곤 했었다.
외중생(外中生)의 경우 뛰어내리는 시기를 놓쳐 낭떠러지나 마찬가지인 언덕에 굴러 다치기도 하고, 무서워서 뛰어 내리지 못하고 불국사역(佛國寺驛)까지 그냥 실려 갔다가 역무원에게 잡혀 곤욕을 치르기도 했었다.
지친 모습으로 입실역 플렛폼으로 들어서는 그 시절 미카 증기기관차
그런데 이제 그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이 자취를 감추려하고 있다. 수많은 외동읍 주민들과 출향인사들의 정겨운 추억도 함께 껴안고 영겁의 피안으로 사라지려는 것이다.
복선전철로 다시 태어나는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은 경주역(慶州驛)에서 모화역(毛火驛)까지 우리들 외동인(外東人)들의 애환과 꿈이 서린 정겨운 정거장들의 모습마저 흔적 없이 지워버리고 있다.
포항(浦項)과 울산(蔚山)을 잇는 동해남부선 철도 복선전철화공사(複線電鐵化工事)는 지난 2009년 4월 23일 이미 착공되어 완공(完工)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 사업은 현재의 포항~울산간 단선(單線)을 폐쇄하고, 포항~경주~울산간 76.5㎞에 걸쳐 복선(複線)으로 연결하는 것으로 8개 공구로 나눠 단계별로 공사를 시행하고 있다. 복선 노선은 KTX가 통과하는 신경주(新慶州) 역사로 변경되어 기존 단선과 완전히 다르게 건설된다.
포항-울산 복선전철화공사 기공식(2009.4.23)
복선전철화공사가 완공되면 편도(便道) 기준 선로용량이 2009년 현재 기존 하루 34회에서 132회로 늘어나고, 포항~울산간 열차운행시간(무궁화호 기준)도 기존 76분에서 59분으로 17분 단축된다.
또 수도권을 출발한 KTX의 승객은 신경주역(新慶州驛)에서 일반철도로 환승, 포항 등 동해안(東海岸)을 갈 수 있게 된다. 이 공사가 완공되면 부산, 울산 등 동남권과 포항 등 동해중부권(東海中部圈)과의 철도 연계체제가 크게 개선될 전망이다.
우리들에게서 떠나는 우리들의 또 다른 고향,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 기찻길의 왜소(矮小)한 뒷모습을 마음의 손사래로 배웅하면서 김창근 시인의 ‘동해남부선’으로 석별의 정을 나누어 본다.
동해남부선
김창근
바다를 끼고 흐르는 시월의 창변(窓邊)
옛 코스모스 꽃길을 따라 익은 가을이 떠 내리고
젊은 날의 흐린 갈증을 일깨워
미련처럼 길게 누운 그림자
동해남부선 그 외진 철길 위로
후줄근히 젖어 남루한 우울이 밀리면
가버린 시절의 간이역 어느 시간표에도 없는 슬픔이
기적 소리에 실려 자꾸만 아득히 멀어지는데
행선지가 없어 더욱 막막한 어둠의 궤적에 올라
오늘은 누가 그렇게 또 떠나가는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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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외동중학교에 재학할 당시의 외동읍사무소(外東邑事務所)는 입실초등학교 옆 입실리(入室里) 1042번지에 소재하던 단층(單層) 기와집이었다.
어쩌다 이웃 어른들의 심부름으로 ‘민적초본(民籍抄本 ; 호적초본)’이나 ‘기류계(寄留屆 ; 주민들록등초본)’를 떼려 가면, 그다지 넓지도 않은 사무실에 10여명의 면서기(面書記)들이 옹기종기 앉아 집무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리고 1977년에는 그 기와집을 뜯어내고 그 자리에 2층 슬라브 철근콘크리트 건물을 지어 사무실을 확장(擴張)했었다.
외동읍사무소 구청사
이후 건물이 낡고 비좁은데다 외동농협조합(外東農協組合) 건물 등 읍소재지 내 주요기관 밀집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주차난(駐車難)등 주민들의 이용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다시 이전신축(移轉新築)하였다.
지난 2009년 11월, 입실리(入室里) 525번지 일원 외동중학교 동측에 부지매입비 17억원과 건축비 55억원 등 총사업비 72억여원을 투입하여 지상 2층 2동과 지상1층 1동의 건물 연면적, 666㎡로 읍사무소(邑事務所), 주민자치센터, 농업인상담소, 창고 등을 갖춘 매머드 청사(廳舍)를 마련하였다.
고향마을에 온갖 기능을 갖춘 초현대식(超現代式) 청사를 마련한 것은 반갑기도 하지만, 모두가 떠나고 있는 시골 마을에 웬만한 도시의 시청(市廳) 건물에 버금가는 초대형(超大型) 청사가 과연 필요한 건지는 곰씹어볼 일이 아닌가 한다.
지금의 초현대식 외동읍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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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읍 입실로 81에 소재하는 외동파출소(外東派出所)는 1910년 1월 20일 구어리(九魚里)에서 주재소(駐在所)로 출범하였다.
외동지서(外東支署)는 이로부터 11년간 구어리에 주재하다가 이웃 연안리(淵安里)에서 입실리로 이전하는 외동면사무소를 따라 1921년 6월 19일 지금의 입실리로 이전하면서 외동지서(外東支署)로 승격되었다.
외동파출소
그리고 지난 2003년부터는 지구대(地區隊) 체제로 전환했다가 2010년 3월부터는 파출소(派出所)로 전환되었다. 지구대 당시에는 경감(警監) 급의 지구대장 휘하에 경위(警衛) 급으로 보하는 지구대(地區隊) 제1사무소장에서 제3사무소장까지 두고 있었다.
필자가 외동읍에 거주할 당시에는 경사(警査)가 지서장(‘지서주임’이라고 했음)이었는데, 어느새 경위(警衛)를 넘어 경감(警監)이 지구대(地區隊) 대장(隊長)이 되고, 파출소장(派出所長)이 되는 시대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경장(警長)’이라는 계급이 없을 때였기 때문에 경사(警査)는 순경(巡警) 바로 위의 계급이었다. 최근에는 미모의 여성 경감(警監)이 외동파출소장으로 전임(轉任)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외동파출소장 윤경애 경감
지구대(地區隊)가 파출소로 변경된 요인은 지구대(地區隊) 체제가 집단화, 흉포화 된 범죄대응력에는 장점이 있으나, 도농복합지역의 경우 넓은 관할구역 탓에 신고출동 지연(遲延) 등 주민들의 체감치안이 약화되었다는 문제점이 지속적(持續的)으로 제기된데 따른 조치였다.
앞에서 소개한 대로 구어리(九魚里)의 외동주재소(外東駐在所) 당시에는 친일 조선인 경찰에 의해 면민들의 3.1독립운동과 일본인 추방시위가 제재당하기도 했었다.
당시의 조선인(朝鮮人) 경찰관이었던 경상북도 경찰부 대구국 외동주재소 소속 김기정(金起正) 순사와 이윤호(李允好) 순사가 그들이었다.
당시에는 지금의 오일장인 입실시장이 외동면(外東面) 구어리(九於里)에 있었는데, 당시의 구어리 시장에서는 1919년 3월 13일 밤, 주민들이 그곳 거주 일인(日人)들에게 가옥을 명도하고 속히 본국(本國)으로 물러가라고 요구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외동주재소(外東駐在所)에서는 기독교인인 주동 인물(성명 미상) 1명을 검거하여 구속한바 있다.
당시의 외동면민들이 면내(面內)에 거주하는 일본인(日本人)들에게 ‘소유 가옥을 명도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한 것은 일제 통치기관에 대한 항거가 아닌 거주 일본인들에게 직접적(直接的)이고 현실적으로 ‘한국을 떠나라’는 것을 강요한 것으로 타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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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에는 면(面) 단위 행정구역의 3대 유지(有志)는 지서주임(支署主任)과 면장(面長), 국민학교(國民學校) 교장이었다.
때문에 관내 학교 운동회(運動會)나, 특별한 기념일에는 가장 높은 상석(上席)에 이들 세 사람이 항상 자리하였다. 어떤 때는 우체국장(郵遞局長)이 끼어들 때도 있었다.
요즘엔 국회의원(國會議員)과 도의원(道議員), 군의원(郡議員)들이 진을 치지만, 그때는 이들 세 사람 이외의 유지(有志)는 없었다.
그 시절 3대 유지
그 시절 외동지서(外東支署)는 입실초등학교 옆 7번국도 건너편에 조그마한 단층 기와집이었는데, 일제 때는 악질(惡質) 왜놈 순사(巡査)들과 그 왜놈들보다 더 악질적인 조선인(朝鮮人) 순사들 때문에 대다수 주민들은 가까이 가거나, 그 앞을 지나다니지도 않아 그 구조를 제대로 아는 이들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해방(解放) 후에도 그때의 조선인 순사(巡査)들이 그대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자들도 가급적(可及的)이면 접근하지 않았다. 여차하면 징용(徵用)으로 끌어가고, 죄 없는 사람을 잡아다 족친다는 나쁜 인상 때문이었다.
그 시절 외동지서(外東支署)를 떠 올리면, 필자의 외동중학교 시절, 작달막한 키에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지녔던 지서장(支署長)이 떠오른다. 당시에는 지서장을 ‘지서주임(支署主任)’이라고 했었다.
옛적 외동읍(外東邑) 연안리(淵安里)에 위치한 7번국도의 ‘연안교(淵安橋)’는 외동읍 관내에서 가장 긴 다리였다.
그런데 필자가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에 다닐 때는 거의 해마다 한 번씩 홍수에 이 연안교 다리가 끊어져 차량(車輛)과 사람들의 통행에 많은 고생을 안겨주었고, 이때마다 이 ‘다리’와 개울에는 심심찮은 구경거리가 등장하여 하학길마다 넋을 잃고 구경에 몰입하곤 했었다.
무너진 교량(橋梁) 옆 둑을 파헤쳐 임시로 만든 ‘방천길’로 버스나 화물차(貨物車)가 물가에 내려서면 육중한 ‘지에무씨 도라꾸’(GMC 트럭)가 이들을 쇠줄로 묶어 개울을 건너 건너편 둑 위에까지 끌어내 주고 적절한 수고료(手苦料 ; 견인비)를 받아 챙기곤 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에무씨 도라꾸’는 미국(美國) GM사에서 제작하여 군용트럭으로 사용하다가 6.25전쟁 후 민간에서 불하(拂下)받아 화물트럭으로 사용하던 트럭을 말한다.
곡예와도 같았던 GMC의 견인작업(牽引作業)도 볼만 했지만, 파란색 경찰복(警察服) 상의에 일본제 ‘당꼬즈봉’을 입은 외동지서(外東支署) 지서장이 인부들을 동원하여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교량보수(橋梁補修) 작업을 지휘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게 비친다.
그때는 도로와 관련된 업무의 상당부분을 경찰(警察)에서 담당하고 있을 때였다. 땅딸한 지서장(支署長)이 자전거를 타고 와서 끊어진 다리 아래 하천바닥에서 긴급복구(緊急復舊)를 하고 있는 인부들에게 악을 쓰며 욕설을 퍼붓자 인부(人夫)들도 무슨 방법으로도 자신들에게 내려올 수 없는 지서장을 향해 같이 삿대질을 하며, 욕설(辱說)을 퍼붓던 모습도 함께 클로즈업된다.
필자는 지난 1958년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를 졸업하면서 이 땅딸한 지서장이 대독(代讀)하는 경주경찰서장(慶州警察署長)의 표창을 수상한바 있다.
1953년도 ‘지에무씨 도라꾸’
(휴전이 된 후 잉여 군용 ‘지에무씨 도라꾸’를 민간에게 불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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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외동읍 입실리 525-3번지 외 2필지에 새로이 건립한 외동 119안전센터는 1,650㎡의 부지에 건물 2층 연면적 644㎡ 규모로 2009년 12월 18일 준공되었다.
외동119안전센터는 지난 1991년 7월, 외동소방파출소(外東消防派出所)로 개소하였으며, 새로이 이전신축(移轉新築)한 지금의 외동119안전센터는 총 사업비 14억1900만원을 들여 부지 1650㎡에 지상 2층, 연면적 643.92㎡ 규모로 건립되었다.
외동119안전센터 준공식
(가운데 여성경찰관이 외동파출소장 윤경애 경감이다)
안전센터의 확장 이전으로 중소기업(中小企業)이 밀집하고 있는 외동지역공단은 물론 주민들에게도 한층 더 높은 소방서비스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외동119안전센터는 소방공무원(消防公務員) 14명과 펌프차 1대, 물탱크차 1대, 구급차 1대가 24시간 출동체제로 근무하고 있다.
외동119안전센터는 지난 2014년 2월 17일, 경주시 양남면(陽南面) ‘마우나오션 리조트’ 내 체육관(990㎡) 지붕 붕괴사건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전개한바 있다.
신고 접수 후 현장에 구조대(救助隊)를 급파했지만, 리조트가 해발 500m의 산 정상에 있는데다 도로가 좁고 눈이 쌓여 진입이 어려웠고, 사고 당시 눈발이 날려 구급차량(救急車輛)의 출동이 늦어지기는 했으나, 밤샘 구조작업(救助作業)을 벌이는 등 최선의 노력을 다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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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읍(外東邑) 입실로 98(입실리 443-3번지) 입실초등학교 뒤에는 지난 1988년 4월 20일, ‘월성군 외동도서관 설치조례(경상북도 조례 제1005호)’에 근거하여 월성군(月城郡) 외동도서관으로 발족된 경상북도립외동공공도서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 도서관은 1989년 1월 1일자로 경주군(慶州郡) 외동도서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1991년 3월 26일에는 경상북도립외동공공도서관(慶尙北道外東公共圖書館)로 다시 명칭이 변경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지난 2003년 3월 1일에는 ‘경상북도 평생학습관 운영에 관한 조례’ 제2조에 의하여 평생학습관(平生學習館)으로 지정되었고, 2013년 2월 28일에는 제45회 한국도서관상 단체상(團體賞)을 수상하기도 했었다.
경상북도립외동공공도서관
도서관은 대지(垈地) 2,121㎡(624평)에 건평(建坪) 284평의 2층 철근콘크리트 슬라브 건물 1동으로 300석의 좌석을 갖추고 있다. 도서자료(圖書資料)와 시청각 및 전자자료(電子資料)는 아래 표와 같다.
[도서자료]
(단위: 권) (2014.01.01. 현재)
구 분 |
총류 |
철학 |
종교 |
사회
과학 |
자연과학 |
기술과학 |
예술 |
언어 |
문학 |
역사 |
합계 |
합계 |
3,243 |
4,574 |
2,175 |
12,083 |
6,505 |
5,753 |
5,310 |
2,943 |
46,794 |
8,022 |
97,402 |
일반
도서 |
1,756 |
3,410 |
1,550 |
7,774 |
1,752 |
4,454 |
3,780 |
1,683 |
26,693 |
3,883 |
56,735 |
아동
도서 |
1,165 |
1,153 |
579 |
3,999 |
4,634 |
1,212 |
1,200 |
1,119 |
20,070 |
3,880 |
39,011 |
참고
도서 |
322 |
11 |
46 |
310 |
119 |
87 |
330 |
141 |
31 |
259 |
1,656 |
[시청각 및 전자자료]
(단위: 종, 점) (2014.01.01 현재)
구
분 |
시청각자료 |
전자자료 |
계 |
CT |
CD |
VTR |
DVD |
계 |
e-book |
e-learning |
계 |
계 |
190 |
766 |
53 |
2,341 |
3,350 |
8,172 |
2 |
8,174 |
11,504 |
경북도립외동공공도서관은 앞에서 소개한 대로 2013년 2월 28일, 국립중앙도서관(國立中央圖書館)에서 열린 '제45회 한국도서관상 시상식'에서 단체상(團體賞)을 수상했었다.
외동도서관(外東圖書館)은 또 작은 도서관을 개설해 운영하면서 지역 도서관 간의 업무 협력에 힘을 쏟는 등 지역민의 독서문화(讀書文化) 활성화와 평생교육 증진을 위해 노력한 점을 인정받고 있다.
또 각종 공모사업(公募事業)을 유치한 뒤 다양한 특화(特化) 프로그램을 개발해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등 도서관(圖書館)의 교육적 기능강화에도 힘써 온 점을 높게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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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읍 입실리(入室里) 1046-13에는 지난 2002년 6월, 신축한 외동보건지소(外東保健支所)가 최신장비와 주민편의시설을 갖추고 진료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외동읍민(外東邑民)들의 숙원사업이었던 외동보건지소(外東保健支所) 신축사업은 지난 2001년 10월에 착공해 3억8천5백 여 만원을 투입하여 2002년 5월에 완공했다.
신축한 외동보건지소(外東保健支所)는 1층에 진료실(診療室)과 민원실, 2층에는 보건교육장소로 활용하는 회의실을 갖추고 있다.
외동보건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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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실리(入室里) 1020번지에는 매월 끝자리 수가 3, 8일로 끝나는 날, 즉 매월 3, 13, 23, 8, 18, 28일에 열리는 5일장인 입실장(入室場)이 있다.
얼마 전 주변에 모화(毛火) 중소기업공단이 들어오면서 농민들이 하나 둘씩 고향을 떠나 5일장이 한때 자취를 감출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경주시(慶州市)가 ‘입실오일장’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현대식(現代式) 장터로 개조한 후부터 하루 평균 5,000여명의 손님들로 북적거리면서 상권(商圈)이 되살아나고 있다.
‘입실장’은 1천4백여 평의 넓은 장터로 1984년 개조하여 외형(外形)은 다른 재래장터와는 달리 현대식(現代式)이다. ‘입실장’을 ‘외동장(外東場)’이라고도 하고, 현지에서는 ‘장테(장터)’라고 한다.
원래 구어리(九魚里) 철로변에서 열리던 장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온 것인데, 이곳의 주거래(主去來) 품목은 농·축·해산물로 바다가 가까워서인지 유난히 싱싱한 해산물(海産物)이 많고, 축산농가(畜産農家)가 많아 쇠고기 거래량이 많은 편이다.
가까운 모화(毛火)에 불고기단지가 형성되어 있을 정도로 질 좋은 고기를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장터의 주변엔 유난히 정육점(精肉店)과 불고기집들이 많다.
좁은 골목에 진입하면, 먼저 건어물전(乾魚物廛)이 시작된다. 건오징어, 문어, 멸치, 꼴뚜기 등 없는 것이 없다. 붕어의 치어를 말려 놓은 듯한 멸치인 ‘띠풀이’를 살 수 있다.
‘띠풀이’는 남해안산(南海岸産) 멸치로 국물 맛을 내는 용도이기 때문에 가격도 저렴한 편이다.
자연산(自然産) ‘미역귀’와 양식(養殖) ‘미역귀’도 함께 구할 수 있는데, ‘귀다리’(미역귀)는 미역을 따고 난 후 남는 뿌리 쪽의 덩어리진 부분으로 자연산은 동글동글하게 서로 붙어 있지만 양식(養殖)한 것은 힘이 없어 낱장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떼어 팔수밖에 없다.
산나물을 파는 채소전(菜蔬廛)에선 고사리 비슷한 ‘꾀치미’(‘깨치미’라고도 한다)를 가판(架板)마다 수북이 올려놓고 있다. ‘꾀치미’는 짧고 통통한 고사리처럼 생겼지만 맛은 고사리를 훨씬 능가한다.
생긴 것은 고사리와 비슷하나 고사리는 좀 더 가늘고 ‘꾀치미’는 순(筍)이 말려들어간 끝부분이 더 크고 굵다.
이름조차 신기한 건어물(乾魚物)에서 산나물까지 자연공부 하듯 둘러볼 수 있는 재래장이 바로 ‘입실 5일장’이다. 그래서 더 토속적(土俗的)인 느낌과 사람 사는 구수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특별한 곳이기도 하다.
‘입실장’은 필자의 경우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재학 3년 동안 장날마다 순회공연을 하다시피 하는 약장수들의 풍악(風樂)에 정신이 팔려 넋을 빼앗기기도 했었다.
그 시절 입실장에 주로 나타났던 약장수
(약장수 주위에는 언제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지난 1950년대 중반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재학 당시 ‘입실장(入室場)’이 열리는 날이면 점심도 걸러 배가 고프기는 했지만, 윗녘내기 약장수 아저씨들이 떠벌이는 사기극(詐欺劇)을 장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턱을 고이고 구경하던 때가 지금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옛적 읍사무소(邑事務所) 정문에서 50m쯤 직진하면 시장입구가 있었고, 그 입구 왼쪽 공터가 약장수들의 지정석(指定席)이었다.
그 시절에는 지금과 같은 상가건물(商街建物)은 없었고, 여느 오일장과 마찬가지로 널따란 사각형 공지(空地)였다. 밭뙈기를 대충 고르면 그대로 시장(市場)이 되었고, 거기에 멍석을 깔거나 좌판(坐板)을 늘어놓으면 점포(店鋪)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약장수들은 북과 나팔, 피리에 가수(歌手)까지 동원한 악사(樂士)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팀도 있었고, 두 세 사람이 등에 짊어진 북과 바이올린을 울리고 켜며,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도사(道士)’라는 건장한 사내를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도 했었다.
북과 피리, 나팔에 노래까지 부르는 약장수들의 출현은 입실장은 물론 대다수 오일장(五日場)들을 한바탕 흥겨운 난장과 신명나는 축제(祝祭)의 장을 만들기도 했었다.
평소엔 좀체 들어보기 힘든 생음악(生音樂) 연주에, 약장수들의 걸쭉하고 구수하고 거침없는 언변(言辯), 그 자체가 하나의 볼만한 거리공연이기도 했었던 것이다.
당시의 약장수 악단
(이 팀은 제법 구색을 갖춘 악단에 속한다)
예나 지금이나 약장수의 입담은 청산유수(靑山流水)에 다름없었다. “계룡산에서 10년, 지리산에서 10년간 무술을 닦은 도인이십니다.” 지난 70년대 말까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약장수들이 데리고 다니는 가짜 도사(道士)를 내세워 호기심을 자극시키던 대사(臺詞)였다.
그들 약장수들이 선전하는 무술(武術)은 자동차를 이빨로 끌기, 장풍, 이마빡으로 못 박기 등 거의가 황당한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한번 약장수의 현란한 말발에 말려들면 좀처럼 헤어나지 못했다.
필자가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에 다닐 때는 6교시 수업이 끝나고 교문을 나서면, 약장수들의 선전과 노래판이 절정(絶頂)에 달해 있곤 했었다. 그 좋은 볼거리를 두고 그냥 귀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풀빵가게에서 풀빵 두어 개로 요기를 하고, 북을 짊어진 약장수 우두머리 정면에 모자나 책보(당시의 시골학교에는 책가방이라는 것이 없었다)를 깔고 아예 퍼질고 앉아버린다.
북을 짊어진 약장수 우두머리가 오만가지 사설(辭說)과 재담(才談)을 늘어놓으면서 이따금 옆에 있는 검은 색 ‘도사’를 손가락질하며, ‘자동차를 이빨로 끌고, 이마빡으로 못 박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줄기차게 너스레를 떨고 있으니 일어설 수도 없어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턱을 괴고 앉아 있곤 했었다.
그러나 약장수를 둥그렇게 둘러싼 사람들은 진득하게 기다리지만, 무술(武術)은 금방 펼쳐질듯 하면서도 여간 감질나게 만드는 게 아니었다. 마이크를 잡은 약장수는 ‘무술을 보여 드리겠다’고 수없이 되풀이하지만 언제나 ‘잠시 후’였다.
그리고는 구경꾼들이 지루해한다 싶으면, “애들은 가라, 뒤쪽에 서계신 아주머니들 앞으로 나오세요.”라고 농을 걸며 적당한 허풍(虛風)과 음담패설(淫談悖說)을 늘어놓아 사람들을 붙들어 둔다.
이때 검정색 도복을 입은 ‘도사(道士)’는 근엄한 자세로 한켠에 앉아있거나, 약장수 주위를 돌며 분위기(雰圍氣)를 잡는다.
언뜻 보기에도 허우대만 그럴듯한 사이비(似而非) 같지만, 선전한 무술이 워낙 구미를 당기는 내용이라 사람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한다.
때로는 ‘기왓장 깨기’ 등 간단한 무술(武術)을 실제로 보여주는 경우도 있고, 데리고 다니는 여가수(女歌手)를 내세워 간드러진 유행가(流行歌) 몇 곡씩을 들려주기도 한다.
이때가 되면 도사의 무술(武術)보다는 ‘구리무’와 ‘분’을 덕지덕지 바르고, 인조 속눈썹을 단 여가수(女歌手)의 간드러진 목소리와 꿈틀대는 미끈한 다리에 넋이 나가 있기도 했다. 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발사같이 매초롬한 젊은 사내가 잔가락으로 기타를 치면 볼록한 ‘젖 가리개’를 하고, 뽀얀 스타킹으로 가린 미끈한 다리를 배배 꼬아가며 춤을 추듯 노래 부르는 아가씨의 자태(姿態)는 며칠 동안 꿈속에 나타나기도 했었다.
온갖 허튼소리를 하던 약장수가 거친 숨을 내뿜으며 절정(絶頂)을 향해 치달을 무렵이면, 으레 그날의 ‘본론(本論)’인 약 얘기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과정이 도무지 ‘구렁이 담 넘어가는’식인 데다 구경꾼들은 이미 약장수의 최면(催眠) 아닌 최면에 걸려들었기 때문에 무술(武術)은 더 이상 큰 관심사(關心事)가 아니다.
이 시절의 약장수가 팔았던 약은 대개 만병통치약(萬病通治藥)이다. 신경통, 위장병, 간장병, 당뇨, 간질 등 그의 입에서 나오는 병 이름은 무슨 병이든 다 특효(特效)가 있다고 떠벌인다. 만병통치약이 아닌 것이 있다면 회충약(蛔蟲藥) 정도다.
“이거 한 병만 있으면 배앓이, 속앓이, 두통, 치통, 관절염, 사마귀, 변비, 통풍... 모든 병이 싸그리 낫습니다요, 다 팔고 시방 얼마 안 남았응게 자아 빨리빨리덜 사가시요~~잉!”
전라도(全羅道) 출신인 듯한 약장수는 알고 있는 병명은 모조리 읊어나간다. 그리고는 하얀 탈지면(脫脂綿)에 무엇인가를 듬뿍 발라 옆에 있는 구경꾼을 불러 충치(蟲齒)를 깨끗이 고쳐주겠다면서 입속에 넣어 준다.
5분쯤 지난 뒤에 그 구경꾼에게 입에 있는 솜을 토해 내라고 한다. 솜은 어느새 시뻘건 피로 물들여져 있었다. 사람들의 탄성(歎聲)이 터져 나온다.
이빨 속에 있던 충치(蟲齒) 벌레가 모두 죽어 솜이 검붉은 피투성이가 되었다면서 “이것 보라”고 소리를 지르고, 솜을 뱉어낸 구경꾼은 그렇게 아프던 이빨이 시원해졌다고 멀쩡한 이빨을 약장수에게 보여주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한다.
모두가 한패들이 연출하는 사기극(詐欺劇)이었다. 솜 속에 숨겨 넣은 포도주(葡萄酒) 캡슐을 깨물어 검붉은 포도주가 솜에 베이게 하여 뱉어낸 치졸한 사기극이었지만, 순박(淳朴)하기만 했던 무지렁이들은 약장수의 거짓말을 그대로 믿었다.
이 정도의 분위기(雰圍氣)가 되면, 약장수는 마지막으로 “약(藥)은 거저 드리는데 단 경비(經費)조로 조금만 받는다”고 강조한 뒤 주문(注文)을 받는다. 오랜만에 술국과 탁배기로 거나하게 취한 구경꾼들은 약장수의 사기극에 속아 넘어가 여기저기서 약(藥)을 달라고 손짓을 한다.
물론 이 가운데는 약장수와 한패인 ‘바람잡이’들도 있었지만, 어수룩한 시절(時節)이라 그런지 약은 제법 팔려나갔다. 이때 쯤 되면 그때까지 그토록 근엄(謹嚴)하게 앉아있던 도사(道士)도 본분(?)을 잊은 채 양손에 약(藥)을 들고 이리저리 설쳐댄다.
그러나 약(藥)이 다 팔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약장수 일행은 다른 곳으로 떠날 채비를 서두르지만, 수없이 ‘곧 보여 주겠다’던 무술(武術)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구경꾼들 또한 누구 하나 “왜 무술을 보여주지 않느냐”고 따지지 않고 뿔뿔이 제갈 길을 간다. 도사가 신경 쓰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약장수의 얄팍한 ‘법칙’을 양해(諒解)하지 못할 만큼 세월이 각박(刻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번번이 속으면서도 언제나 약장수가 오면 반가운 듯이 주변(周邊)으로 몰려들었다. 지금과 같이 TV나 라디오, 그리고 별다른 오락(娛樂)이 없던 시절이라 구수한 입담으로 색다른 재미를 제공하는 약장수가 싫지 않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 시절 풍각쟁이
그러나 이런 형태(形態)의 약장수는 이제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요즘은 한물 간 가수(歌手)들을 동원해 실내체육관(室內體育館) 등에서 무료공연을 가진 뒤 정수기(淨水器)와 가전제품(家電製品) 등을 파는 ‘현대판’ 약장수가 성행하고 있다.
현대판 ‘약장수’들이 약(藥)을 팔지 않고 엉터리 가전제품을 팔고 있음에도 이들을 ‘약장수’라고 지칭하는 것은 공통적(共通的)으로 약간의 ‘사기성’을 지니고 있다는 연상작용(聯想作用) 때문일 것이다.
그때 그 약장수들의 희미한 자취는 지금의 전철(電鐵)에서 큰 소리로 자질구레한 물건(物件)들을 파는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판소리가락을 방불케 하고, 포복절도(抱腹絶倒)하게 만드는, 그리고 한도 끝도 없이 이야기를 엮어내던 옛 약장수들의 입심과 내공엔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그때 그들 약장수들은 나름대로 출중한 그 시대의 재인(才人)들이었고, 예인(藝人)들이었던 것이다.
비록 가난한 서민(庶民)들의 푼돈으로 연명하는 남루한 삶, 이따금씩 찾아오는 초라한 서커스단이 풍기던 서글픈 삶의 냄새처럼 먹고 사는 일의 엄정함과 처연(凄然)함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약장수였지만, 그 남루함과 초라함도 엄연히 우리들 삶의 일부였던 것이다.
약장수들이 보따리를 싸서 허름한 트럭에 싣자말자 떠난 뒤에는 구경꾼들이 깔고 앉았던 ‘돌가리푸대’ 조각이나, ‘따뱅이’같이 틀어 만든 짚 뭉치만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 입실장에도 어김없이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치술령 산등성이에 해가 걸리면 얼른 정신(情神)을 차리고, 서둘러 장터를 빠져나가는 구경꾼들과 함께 비포장 7번국도를 따라 뜀박질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비지땀이 흐르는 귀 바퀴에는 약장수 악단(樂團) 아가씨의 흐느끼듯 애절한 유행가(流行歌) 가락이 메아리가 되어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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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시절 그 ‘입실장’에는 조금은 무식하고 교양없는 어른들 때문이기도 했었지만, 이 장터 북동쪽 코너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입구에 말 교미장(交尾場)이 있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고향 말로 설명하면, 암말과 숫말을 ‘헐레’ 붙이는 장소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헐레’란 회원님들께서도 잘 아시는 대로 사람의 경우 남녀(男女)가 ‘거시기’하는 것을 말하고, 가축(家畜)의 경우 암수가 교미(交尾)하는 것을 말한다.
입실리(入室里) 어느 농가에서 사육하고 있던 수컷 우량종마(優良種馬)에게 외동읍 지역과 울산 북부지역의 모든 암말을 끌고 와서 아침마다 교미(交尾)를 시킨 것이다.
말 교미장
다만, 오일장 장날은 너무 복잡(複雜)하여 피하고, 장(場)이 열리지 않는 날을 골라 교미(交尾)를 붙이곤 했었다. 그리고 교미시간은 주로 아침시간을 이용했는데, 이 시간을 선택한 것은 이 시간쯤에 수말이 가장 성욕(性慾)이 왕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때문에 ‘헐레’는 주로 오전 10시경에 붙였는데, 그 당시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1학년 A반 교실 창 쪽 줄에서는 그 광경(光景)이 역력하게 바라보였다. 옛적 개교당시의 교사(校舍)를 말한다.
1학년 A반 교실 창 쪽 줄에 앉은 학생들은 수업시간(授業時間)에 그 교미 광경(光景)을 보고 키득거리고 웃다가 선생님으로부터 머리통에 꿀밤을 먹기도 하고, 쥐어 박히기도 했었다.
거리가 좀 멀기는 했지만, 수말의 ‘거시기’가 워낙 거대한 ‘영천대○○’이라 그 장면이 제법 생생하게 보였다. 때문에 당시의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1학년 A반 교실 창문 쪽 줄 학생들은 그 ‘영천대○○’과 장쾌한 교미(交尾) 장면을 쳐다보느라 수업시간에 창밖으로 시선(視線)을 못 박고 키득거리다가 이런 사정도 모르는 선생님으로부터 머리를 쥐어 박히곤 했던 것이다.
나중에는 선생님까지 그 광경을 목도(目睹)하고는 학생들에게 책을 읽게 하고, 창 쪽 줄을 왔다 갔다 하면서 흘끔흘끔 쳐다보곤 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교무실(敎務室)에까지 파다하게 소문이 퍼져 필자의 학급에 수업을 들어오는 선생님들(당시는 모두 남자 선생님이었음)은 한결같이 창문 쪽 통로(通路)를 왕복하면서 그 광경을 훔쳐보곤 했었다.
그러나 당시 5명밖에 없었던 1학년 여학생(女學生)들은 교실 북편 복도(複道) 쪽 줄에 앉았기 때문에 이 광경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후 전체 학교에 소문이 퍼져 다른 교실에서 수업(授業)을 받고 있던 상급생(上級生)들이 수업시간에 변소(便所)에 다녀오겠다는 핑계로 교실을 빠져 나와 1학년 A반 교실 창문 쪽 화단에 숨어 그 광경을 훔쳐보는 등 말썽이 그치지 않았다.
일부 상급생(上級生)들은 아예 등교시간을 늦추면서 교문 부근에서 시간을 끌며 얼씬거리다가 끝내 그 교미(交尾) 광경을 오리지널로 감상(感想)한 뒤 학교 뒤 철조망(鐵條網) 울타리를 뚫고 들어오곤 했었다.
이에 학교 측에서는 이의 심각성(深刻性)을 간파하고, 당시의 외동면사무소(外東面事務所)와 외동지서(外東支署) 등 관련기관과의 협의를 거쳐 그 ‘교미장(交尾場)’을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만들었다.
어쩌면 오랫동안 기념될 수 있었던 외동중학교만의 특별활동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것이다. 기왕에 얘기가 나왔으니 그 시절 ‘영천대○○’에 대한 얘기를 조금 더 보탠다.
회원님들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영천(永川)’이란 도시는 옛 신라시대 때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때문에 이러한 지정학적(地政學的) 특징 때문에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던 농산물 집산지(集散地) 또는 물물교환 장터가 번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이들 영천시장에서 곡물(穀物)을 사고 팔 때 사용했던 도량기구(度量器具)는 여느 시장과 마찬가지로 “되 와 말”이었다. 여기에 영천(永川) 사람들의 인심도 좋아서 ‘영천장’에 가면 “되도 좋고 말도 좋다”는 말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 말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되 좋고 말 좋고”로 변했다가 다시 “되말좋고”로 변했다가 “대말○”으로 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입실장터’ 얘기가 어쩌다 “대말○” 얘기가 되고 말았다. 본론으로 돌아간다.
지금의 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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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교정에는 ‘청운정(靑雲庭)’이라는 뜰을 만들고, 재학생들에게 청운(靑雲)의 기개를 고취하는 격문(檄文)을 새긴 비석을 세워놓고 있다. 비문(碑文)을 소개한다.
외동의 건아들이여!
봉서산 너머
바다 건너
청운을 펼치면서
한 없이 솟아오르자
|
외동중학교 청운정 비석
비문에서 말하는 ‘봉서산(鳳捿山)’은 외동중학교 교가에 나오는 ‘동대산(東大山)’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서의 ‘동대산’은 울산광역시 농소면에 소재하는 ‘동대산(東大山 ; 442m)과는 다른 산이다.
교가에 등장하는 ‘동대산’은 토함산 북쪽에 있는 ‘동대봉산(東大封山)’에서 모화리 원원사(遠願寺) 뒤쪽 삼태봉(三胎峰)을 거쳐 건대령(建大嶺)까지의 ‘동대산맥’ 구간 중 개곡리에서부터 모화리까지의 산을 해당 지역 주민들이 모두 ‘동대산’이라고 부른데서 연유한다.
따라서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교가의 ‘동대산(東大山)’은 학교 바로 동쪽 입실1리에 우뚝 솟은 이른바 ‘533봉(峰)’을 말한다.
지금은 숲이 우거져 있지만, 옛날에는 헐벗은 민둥산으로 5.16 이후 대대적인 사방사업(砂防事業)을 실시하여 오늘과 같이 우거진 수풀이 되었다.
동대산 사방사업(砂防事業) 얘기가 나왔으니 이 사방사업을 실시하게 된 배경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한다. 1960년대 후기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이었다.
그때는 비행기로 일본 동경(東京)에서 서울을 오려면, 처음 거치는 곳이 당시의 경남 울주군 농소면과 경북 월성군 외동면(外東面)에 걸쳐 있는 동대산(東大山) 상공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에는 온 나라가 민둥산 투성이라 비행기(飛行機)에서 내려다보이는 동대산도 시뻘건 민둥산이었다.
왜놈들이 비행기의 가솔린으로 사용한다고 소나무라는 소나무는 모조리 베어내 버렸고, 그리고 당시의 연료(燃料)는 나무나 풀 뿐이었기 때문에 민둥산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던 당시의 시골 주민들은 소나무의 송기(松肌)를 볏겨 주린 배를 채웠기 때문에 소나무가 제대로 자랄 수도 없어 모든 산들이 헐벗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동경(東京)에서 귀국하면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수행하고 있던 당시의 내무부(內務部) 새마을담당관이었던 고건(高建) 전 총리에게 “저기 좀 녹화(綠化)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후 고건(高建) 새마을담당관은 외동면(外東面)에 내려와 직접 십장(什長 ; 일꾼을 직접 감독하는 우두머리)노릇을 하면서 바짝 마른 민둥산에 물기를 머금게 하려고 특수사방사업(特殊砂防事業)을 전개하였다.
그때의 특수사방사업은 당시의 용어로 ‘심박기’라고 했는데, 철근(鐵筋)이 들어간 콘크리트 수로(水路)를 만들어 나무를 심는 방법으로 당시의 동대산에는 이 방식으로 사방사업을 전개하여 오늘의 동대산(東大山)을 만들었다.
그 시절 동대산에서 사방사업으로 식목하던 박정희 대통령
동대산(東大山)은 원래 화강암지대로 사질토(砂質土)인 탓에 홍수가 지면 급류가 흘러 토석류(土石流)가 발생하곤 해서 식생의 착생(着生)이 매우 어려웠던 곳이다.
그래서 이 지역에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인 1945년 이전에 이미 498헥타르의 사방(砂防)사업을 한 적이 있으나 실패했고, 1946~1966년까지 2,322헥타르를 추가로 실시하는 등 도합 2,820헥타르의 사방사업을 실시했으나 실패한 곳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67년 9월부터 경상북도와 당시의 경주군(慶州郡)은 정부의 지시와 지원으로 군부대(軍部隊)까지 동원하여 사방(砂防)공사를 실시했다.
사방(砂防)공사의 사업량은 1967년 9월에서 12월 사이에 산지 기초공사 110헥타르, 그리고 1968년 2월에서 6월 사이에 산지 기초공사 140헥타르, 기존 사방지 보수 100헥타르, 산지 파식(播植) 250헥타르, 임지 비배(肥培) 70헥타르를 실시하였고, 이어서 야계 사방을 실시했다.
이때 하루에 동원된 인부는 1,000~2,000명에 이르렀고, 기술지도를 담당한 직원은 1967년 9월부터 1968년 6월까지 9개월 동안 거의 귀가(歸家)하지 못했다고 했다.
1960년대의 '동대산'의 민둥산 모습과 사방공사 현장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특수사방공법으로 연암(軟岩)지대에 식혈(植穴)작업을 하고 객토(客土)를 충분히 한 끝에 드디어 5~6년생 해송(海松) 식재에 성공함으로써 지금과 같이 울창한 숲이 조성되었다.
외동중학교 청운정의 봉서산(鳳捿山) 얘기로 돌아간다. 봉서산은 해발 533m의 산정으로 지도에는 제대로 표시되어 있지 않으나, 모화리 원원사(遠願寺) 뒤쪽부터 삼태봉까지의 능선을 일부에서는 오래 전부터 ‘봉서산’이라 칭하고 있다.
봉서(鳳捿)란 그 유래가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일설에 의하면 큰 새를 연관지어 높이 솟은 산악(山岳)이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 ‘봉서산(鳳捿山)’을 ‘동대산(東大山)’의 별칭으로 보기도 하는데, 외동중학교 교정에 조성한 ‘청운정(靑雲庭)’의 비문(碑文)에 적힌 ‘봉서산’은 학교 동쪽 ‘동대산’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에서 입실리 소재 ‘동대산’을 ‘봉서산(鳳捿山)’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모화리에 소재하는 원원사(遠願寺가 소재하는 ‘봉서산’과 같은 산줄기에 연이어 있는 산정(山頂)이라 여기까지도 ‘봉서산(鳳捿山)’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그 바탕으로 보인다.
한편, 모화리의 일부 주민들은 자기 마을에 소재하는 ‘봉서산(鳳捿山)’을 ‘동대산(東大山)’으로 호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의 모화리 원원사(遠願寺)에서는 주민들의 호칭과는 달리 그 표지석(標識石)에 ‘봉서산 원원사’라고 칭함으로써 제대로 된 표지(標識)를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외동중학교 교가에 등장하는 ‘동대산(東大山)’은 입실리에 소재하는 입실초등학교와 외동중학교 동편의 산정을 말하고, ‘봉서산(鳳捿山)’은 모화리 원원사(遠願寺가 소재하는 모화리 동편의 산정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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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실리(入室里) 서쪽 ‘동몽산’ 등성이에는 큰 바위 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크고 높은 바위들이 서로 얽혀 10여m 높이로 솟아 있어 마치 하늘에 닿은 마천루(摩天樓)처럼 보인다.
석양(夕陽) 때면 바위 봉우리가 붉게 물들어 더욱 신비스럽게 보인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꼭 이루어야 할 소원(所願)이 있거나, 집에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면 이 바위에 치성(致誠)을 드린다. 이 바위들이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교가(校歌)에 등장하는 ‘아기봉’이다.
아기봉
‘아기봉’ 정상(頂上)에는 ‘아암(兒巖)’이라는 기암(奇巖)이 있는데, 이 바위는 까마득한 옛날에 하늘의 선녀(仙女)가 내려와서 산아(産兒)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아기봉’은 외동읍 입실리(入室里), 연안리, 냉천리, 구어리에 걸쳐 있는 높이 227m의 산으로 정상에 마치 아기처럼 생긴 신령스런 바위가 있어 ‘아기봉’, ‘아기봉산’, ‘아암산(兒岩山)’이라고도 한다.
이 바위에는 ‘옛날 아기 울음소리가 나서 가보니 아기장군이 집채만 한 큰 바위를 짊어지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울고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그래서 이 산을 ‘아기봉산’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일제시대(日帝時代)부터 경주(慶州)의 일부 선비들을 중심으로 해마다 음력 9월 9일이면 ‘아기봉’에 모여서 나라 잃은 안타까운 심정을 한시(漢詩)로 발표하는 문학활동이 있었으나, 언젠가부터 그 전통(傳統)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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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에서는 입실리(入室里)의 자연부락(自然部落)과 중요 지형지물(地形地物),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와 그에 얽힌 내력(來歷)을 알아보기로 한다.
[본동(本洞)]
입실리(入室里) 동쪽 산비탈에 위치하고 있어 ‘번덕마을’이라고 하던 것이 ‘본동(本洞)’으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마을이 위쪽에 있어 ‘웃마을’이라고도 하는데, 안동권씨(安東權氏) 집성촌이다. (주)ATPM컨설팅 대표컨설턴트로 재직 중인 권오운 박사가 이 마을 출신이다.
본동마을과 동대산
[봉서정(鳳棲亭)]
입실2리 ‘본동(本洞)’ 동대산 기슭에 소재하는 정자로 안동권씨 잠재(潛齋) 권영(權嶸)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세운 정자다. 권영(1602~1664)은 임란공신 권순의 손자로 권진경의 아들이며 도원수 권율(權慄) 장군의 조카였다.
권영(權嶸)은 강화에서 출생하여 인조(仁祖) 때 경주로 왔으며, 통정대부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에 증직된바 있다. 그리고 이 정자는 원래 울산시 북구 농소면 천곡리에 ‘잠재정사(潛齋亭舍)’로 있던 것을 1953년 입실리 ‘본동(本洞)’으로 이전하면서 ‘봉서정’이라 했다.
그리고 이로써 입실2리 ‘본동’마을은 안동권씨 ‘경주문중’의 본거지(本據地)가 되었다. ‘봉서정(鳳棲亭)’이라는 이름은 외동중학교 교가에 등장하는 동대산을 당시에는 ‘봉서산(鳳棲山)’이라고 칭한 데서 연유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잠재공(潛齋公) 권영(權嶸)의 자손을 안동권씨의 “경주문중”이라 하는데, 잠재공의 10세손 권영해(權寧海)는 회원님들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필자의 모교인 외동중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6사단장, 국방부차관을 거쳐 국방부장관, 안전기획부장(安全企劃部長)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같은 ‘경주문중’인 냉천리 덕동 출신인 권순복(權純福)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내무부(內務部) 민방위국장, 경남부지사, 전북부지사, 국가보위입법회의 내무위원(內務委員) 등을 역임한바 있다. 5공 당시 국가보위입법회의(國家保衛立法會議) 내무위원은 국회 내무위원회 위원의 신분이었다.
봉서정(鳳棲亭)
[수북(水北)]
입실(入室) 동쪽에 있는 마을로 ‘입실거랑’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 ‘수북’이라 불렀다. 외동중학교 정문에서 남쪽으로 뻗은 길 동편에 해당한다. 청안이씨(淸安李氏) 집성촌이었다.
[약국마을]
‘수북’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약국(藥局)이 있었다.
[신기(新基)]
입실(入室) 동남쪽에 새로 들어선 마을이라 ‘새터’, ‘입실거랑’ 남쪽에 있어 ‘수남(水南)’이라고도 한다. 삼아아파트 등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마을이다.
필자의 경우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3학년일 때 이 마을에서 다른 ‘악당’ 둘과 자취생활(自炊生活)을 한 일이 있는데, 그때는 ‘새말’ 또는 ‘새마을’이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의 ‘새말’
[토점(土店)]
입실리(入室里)의 ‘토점(土店)’은 가장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토기(土器)를 만들던 토기점이 있었다고 하여 ‘토점’이라 불렀다.
마을 동쪽에는 ‘쇠부리(철점)’도 있었다고 한다. ‘쇠부리’는 지금의 용광로(鎔鑛爐)로 울산의 ‘달천거랑’에서 사철(砂鐵 ; 돌·모래·자갈 속에 섞여 있는 자철광으로 하천이나 바다의 바닥에 퇴적되어 있다)을 수집해 솥·농기구와 병장기(兵仗器)를 만들었다.
‘외동고개’의 외동읍 쪽인 입실리(入室里)의 ‘토점(土店)’부락은 ‘갓 밑’, 즉 산 밑에 있는 마을로서 백일산(白日山 ; 동대산)에서 흐르는 입실천(入室川)과 14번 국도(國道)를 따라 올라가는 ‘외동고개’ 밑에 소재하는 조그마한 산골마을이다.
옛적 ‘토점(土店)’에는 연료를 쉽게 구할 수 있어서 용광(鎔鑛)을 설치하여 울산(蔚山) ‘달천’ 부근의 강가에 있는 사철(砂鐵)을 수집하여 우마(牛馬)를 이용하거나 사람이 지고 와서, 쇠를 뽑아 무기(武器)를 만들었다고 한다.
[안점]
‘토점(土店)’ 동쪽 골짜기 안에 있던 마을로 1가구가 살았으나, 입실저수지(入室貯水池)가 생기면서 수몰(水沒)되었다.
[갓밑]
입실(入室) 동쪽 ‘말림갓’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갓밑’이라 부른다. 여기에서 말하는 ‘갓’이란 ‘나무나 풀 따위를 함부로 베지 못하도록 하여 가꾸는 땅이나 산’을 말한다.
[쉰짐] → [순금(舜琴)]
입실3리의 자연부락으로 옛날 이곳에 쉰 짐(50짐, 반결)의 곡식이 났다는 큰 밭이 있어 ‘쉰짐’이라 불렀는데, 나중에 ‘순금(舜琴)’으로 변했다고 한다. 입실(入室)의 아래쪽에 있어 ‘아랫마을’이라고도 한다.
외동읍 문산리와 울산시 북구 천곡동의 경계선을 이루고 있는 속심이 뒷산을 순금산(舜琴山) 또는 순등산(舜登山)이라 하는데, 이 산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지명이다. 다만, ‘쉰짐(50짐, 반결)’이라는 말이 ‘순금(舜琴)’으로 변화되면서 한문자(漢文字)는 순금산(舜琴山)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일설에 의하면, 문산리(汶山里)의 순금산은 중국의 ‘순(舜)’임금을 비유하여 ‘순금산(舜琴山)’이라 했고, 입실3리의 ‘순금(舜琴)’은 신라의 경순왕(敬順王)이 이 마을에 와서 거문고를 타며 즐겼다 해서 ‘순금(舜琴)’이라고 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 명칭은 똑 같이 ‘순금(舜琴)’이다.
다만, 현지의 유래와 경순왕(敬順王)의 ‘순(順)’자와 순금(舜琴)의 ‘순(舜)’자는 일치하지 않는다.
[관거리(冠巨里)]
이곳은 도성(경주)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관(冠)을 쓰고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아 ‘관거리(冠巨里)’라 불렀다고 한다. ‘새터’ 서남쪽에 있다.
[우물각단]
‘순금(舜琴)’마을과 한 마을인데, 마을 가운데에 우물이 있는 마을을 특별히 ‘우물각단’이라고도 부른다. 입실3리 마을회관이 있는 부근이다.
참고로 여기에서 말하는 ‘각단’이란 사전적(辭典的) 용어로 ‘일의 갈피와 실마리’를 말하기도 하나, 여기에서는 ‘한동네 안에서 몇 집씩 따로 모여 있는 구역’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새미각단’은 샘가에 형성(形成)된 마을이라는데, ‘선달각단’은 선달이 살았다는데, ‘회나무각단’은 회나무가 있다는데서 명칭이 연유(緣由)하며, ‘각단’은 각각 나뉘어 있다는 뜻으로 보통 마을 이름에 붙여 사용되고 있다.
‘우물각단’은 ‘마을 가운데에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고, ‘가운데 각단’은 ‘마을 가운데 위치한 작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공식적(公式的)인 행정구역명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예외로 ‘도로명 주소’에서는 이 말을 사용하고 있는 곳도 있다. 지번주소(地番住所)인 울산광역시 중구 북정동 315번지의 경우 도로명 주소에서는 울산광역시 중구 ‘각단길’ 2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시골의 마을에는 유난히 ‘각단’ 또는 ‘새각단’이라는 이름이 많다. 사전에도 없는 ‘각단’이란 말은 ‘뜸’이라고도 하는데, 작은 마을(또는 동네)이라는 뜻이다. 용례(用例)로 윗각단․아랫각단․뒷각단․대문각단․대밭각단․서당각단․거랑각단 등을 들 수 있다.
‘새각단’이란 새로이 조성된 마을을 말하며, 신촌(新村)․신리(新里) 또는 ‘새터’ 즉 ‘신기(新基)’라고도 한다. 그리고 주막(酒幕)이 있으면 ‘주막각단’, 냉수(冷水)가 솟아나면 ‘냉수새각단’, 건너마을은 ‘건너각단’, 골짜기마을은 ‘고랑각단’, 모시밭이 있으면 ‘모시밭각단’이 된다.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도 ‘고랑각단’, ‘대밭각단’, ‘새각단’ 등으로 불리는 ‘각단’들이 있다. 위에서 소개한 입실리의 ‘우물각단’을 제외한 외동읍내의 ‘각단’ 몇 곳을 알아본다.
리 별 |
마을 이름 |
개 요 |
모화리 |
새 각단 |
모화리(毛火里)의 ‘새 각단’은 ‘하모(下毛)’에 속해 있는 새로 생긴 작은 마을로 뜸뜸이 인가가 산재하여 형성되었다 하여 ‘새뜸’이라고 불리는데, 여기에서의 ‘뜸’이라는 말도 ‘각단’, 즉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 촌락명이 거의 불리지 않고 있다. |
석계리 |
대밭각단 |
석계리(石溪里)의 ‘대밭각단’은 낮은 산 밑에 위치하여 볕이 잘 드는 가장 따뜻한 마을이라 하여 ‘양지말’이라 불린다.
과거에는 대나무가 많은 마을이어서 ‘대밭각단’으로 불리었다. |
석계리 |
담안각단 |
석계리에는 아랫말 또는 하리(下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의 본래 이름은 ‘담안각단’이었다.
이후 ‘담안각단’은 ‘아랫말’로 불리어졌고, 후에 다시 ‘하리(下里)’로 불리어 지고 있다.
이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450여년 전 김원경(金元鏡)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입향하였다. |
연안리 |
고랑각단 |
연안리(淵安里)의 ‘고랑각단’은 연안천(淵安川) 남쪽에 조그만 야산이 있고, 이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곳에 있었는데, 옛날에는 30여 가구 정도가 되는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
개곡리 |
돌 각단 |
‘상촌마을’ 위쪽에 있는 작은 마을로 돌이 많아서 지어진 이름이다. |
개곡리 |
용천각단 |
‘중마을’의 가운데 있는 마을로 ‘용천(湧泉 ;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
개곡리 |
윗 각단 |
‘개곡’의 윗쪽에 있는 마을로 ‘상촌(上村)’, ‘윗마을’이라고도 한다. |
개곡리 |
아릿각단 |
마을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하촌(下村)’이라고도 한다. |
[한강재(漢江齋)] 및 [신재정(愼齋亭)]
청안이씨 신재(愼齋) 이기(李基)의 덕행을 추모하여, 조선 고종(高宗) 32년(1859)에 후손들이 ‘토점’ 서북쪽 ‘한강지(漢江池 : 한강못)’ 위에 세운 재실(齋室)이다.
이기(李基)는 장기현(長鬐縣 ; 포항시의 옛 명칭) 현감을 지냈으며, 입실리(入室里) 청안이씨 문중의 입향조(入鄕祖)로 그 후손에서 ‘영풍정’ 이계수, ‘낙의재’ 이눌 등 ‘임란창의 의사’ 16위가 나왔다.
‘신재정(愼齋亭)’은 ‘신재’ 이기(李基)의 호를 따서 지은 정자로 ‘한강재(漢江齋)’ 남쪽에 나중에 세운 부속건물이다. 이곳에는 이응춘(李應春) 등 청안이씨 ‘임란창의의사(壬亂創意義士)’ 12위의 추모비(追慕碑)가 나란히 서 있다.
이곳에 추모비(追慕碑)가 세워진 것은 이들 창의의사(創意義士)들이 활동한 주무대가 ‘한강못’ 배면(背面)에 위치한 동대산맥의 ‘바디령’이었고, 입실리(入室里)에 입향한 입향조 신제(愼齊) 이기(李基)의 인연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청안이씨 12인 공적비
(낙의재(樂義齋) 이눌(李訥)이 혈족 12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이눌이
선무원공신 1등, 2등공신 3명, 3등공신 3명, 창의 의사 5명 등 12명이
임란창의 공신으로 기록되어 이를 기리기 위해 2006년 세워진 경주시
외동읍 입실리에 세워진 청안이씨 12인의 공신(功臣)에 대한 공적비다)
[영풍정(詠風亭)]
입실리(入室里) ‘신기’마을에 소재하는 정자로 선조 23년(1590) 청안인 ‘영풍정(詠風亭)’ 이계수(李繼秀)가 세운 정자이다. 이계수의 자는 한서(漢瑞)로 명종 22년(1567)에 태어났으며, 외동읍 개곡리(開谷里) 출신 ‘이눌’ 의병장의 삼종형이다.
이계수(李繼秀)는 임진왜란 때 왜적이 침입하자 삼종제(三從弟)인 이눌(李訥)에게 “마땅히 힘을 합쳐 왕실을 보존하고 왜적을 토벌해야 한다.”고 하고는 지금의 양남면 소재 우산령(牛山嶺)에서 창의(創意 ;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킴)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때의 활동으로 1598년(선조 31)에 용양위부사직(龍驤尉副司直)에 제수되고, 1605년(선조 38)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추록되었으며, 1634년(인조 12)에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으로 승자(陞資)되었다.
이후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에 다시 의병을 일으켜 진격하던 중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에서 떨어져 71세로 순절(殉節)했다. 지금의 정자는 원래의 것이 아니고, 1957년에 후손들이 ‘신기마을’ 남쪽에 새로 세운 것이다.
지금의 영풍정
이계수(李繼秀)가 창의(倡義 ;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킴)한 우산령(牛山嶺)은 지금의 양남면 석읍리(石邑里)에 소재하는 해발 334m의 ‘소미기산’을 말하는데, 이 산은 석읍리와 외동읍 계곡리(開谷里)와의 경계에 있는 효동리, 상라리, 양북면 죽전리에 걸쳐 소재하는 산으로 현지에서는 ‘우산(牛山)’ 또는 ‘우산봉(牛山峰)’이라고도 한다.
[봉산사(鳳山祠)터]
임란공신 경주인 우락재(憂樂齋) 최동보(崔東輔)와 아들인 병족당(幷足堂) 최여호(崔汝琥)를 제향하던 사당으로 조선 순조 32년(1832)에 세워졌으나, 고종 때 금령에 의해 철거되었다. 동대산 아래 입실리(入室里)에 그 터만 남아 있다.
최동보(崔東輔)는 임진왜란 때 중부 최인(崔認), 계부 최계(崔誡), 아들 최여호(崔汝琥)와 함께 창의해 문천회맹과 팔공산회맹, 화왕산회맹에 참가했다. 순조 8년(1808) 호조참판에 추증되고, 대구 평천사(平川祠)에 봉향되었다. 아들 최여호(崔汝琥)는 병자호란 때 순절했다.
[임란공신충의비(壬亂功臣忠義碑)]
외동읍(外東邑) 출신 임란의사 44위(位)의 용맹과 충의를 기록한 비석으로 2006년 3월 ‘신기’마을 동쪽에 세웠다. 외동읍민체육회관 동쪽 입실리 1344-69번지에 소재하는 ‘외동임란공신충의비(外東壬亂功臣忠義碑)’는 지난 2006년 12월 11일, ‘외동임란공신숭모회’ 주최로 제막식을 가진바 있다.
이 충의비(忠義碑)는 임진왜란 당시 외동읍 출신 의사(義士)들이 외동읍의 사수를 위해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 ;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의 선봉에서 맹공(猛攻)한 전공(戰功)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 지난 2003년 8월 발족한 ‘외동임란공신숭모회’의 주도하에 건립되었다.
충의비(忠義碑)는 높이 5m 규모로 거북좌대에 용두겁으로 조성되었으며, 경주시비(慶州市費) 1천만원, 사업회 기금 5천만원 등 총 6천여만원이 투입되었다. 충의비의 비문내용은 아래와 같다.
白頭大幹이 東走 三千里한 雄脈이 東海로 入首하면서 힘찬 靈氣는 鳳凰이 깃든 鳳棲山을 이루었다. 이를 鎭山으로 한 外東坊村에는 지맥 따라 人傑이 世世代代로 부단히 義로서 紀綱을 세우도다. 壬辰倭亂은 有史以來 全國土는 焦土化 되고, 國運이 風前燈火처럼 危險하였으니, 無祿의 선비들은 倡義蜂起하여 抗倭討賊한 그 忠勳이 宣祖實錄과 功臣錄券 등 靑史에 榮譽가 永遠히 찬연하도다.
壬亂은 宣祖 25년 4월 14일 倭賊 20萬 大軍이 釜山浦로 처들어와 釜山鎭城과 東萊城이 차례로 陷落되니 官軍은 賊勢에 눌려 도망가고, 이에 慶州府城도 衆寡不適하여 無血占領당해 千年古都는 焦土化 되었다.
賊盜들의 掠奪 放火 殺人등 天人共怒할 蠻行에 慶州府尹과 判官은 흩어진 官軍을 모으는 한편 慶州士民에 抗倭討賊하자는 檄文을 傳하였다. 이에 坊土의 憂國志士들은 釜洞谷 黃龍厓와 旗朴山城에서 結陣編隊하여 決死報國할 것을 하늘에 盟誓하며 抗倭奮戰이 시작 되었다.
亂初에 蚊川會盟에서 誓死抗爭을 決意하여 兵營城奇襲戰과 永川邑城收復戰 및 東都復城戰 등을 비롯하여 屯據하고 있는 倭賊을 쫓아 各地에서 奮戰하였다.
丁酉年에 賊盜들이 다시 대거 侵入하여 再亂이 일어나니, 明의 援軍과 官軍이 島山城 攻城戰을 시작할 때 慶蔚의 義兵들은 東征軍의 先鋒에서 奮鬪하였고 最後로 島山倭城의 倭賊을 처물리칠 때까지 七年戰爭동안 唐橋會盟과 鷗江會盟 八公山城會盟 및 昌寧火旺山城會盟으로 倭種之滅을 다져가며 여러곳에서 誓死抗賊하여 세운 殊勳은 전국에서 우뚝하니 鳳捿之馘이요 鶴城之斬이며 鷄林之捷이라, 그 忠義가 靑史에 길이 빛나고 있다.
이에 거룩하신 義士들의 救國抗倭精神을 宣揚하고, 그뜻을 追慕하며, 그 英靈을 慰撫하며, 地域의 守護神으로 모시고 子孫萬代에 忠義精神을 본받아 龜鑑으로 삼고자 이 碑를 세우노라.
西紀 二千五年 五月 日
外東壬亂功臣崇慕會 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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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임란공신 충의비
[입실리 석탑(入室里石塔)터]
삼아아파트 앞의 논에 신라시대(新羅時代) 것으로 추정되는 폐탑(廢塔)이 있었는데, 1973년 경주경찰서(慶州警察署) 신축 때에 경찰서 정원으로 옮겨갔다.
1층 탑신에는 우주(隅柱 ; 건물의 모퉁이에 세운 기둥)가 있고, 그 사이 4면에는 원형대좌 위에 서 있는 불상(佛像)이 양각되어 있다. 이 석탑은 기단부(基壇部)가 남아 있는 것에 비추어 본래 쌍탑(双塔)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일대를 ‘탑거리’라고 한다.
[관음사(觀音寺)]
입실리(入室里)와 구어리(九於里) 경계지점에 1970년대에 들어선 절이다. 이곳은 옛 절터로 일제 때 양각보살입상(陽刻菩薩立像)이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불당(佛堂)터]
‘안점’ 서남쪽에 있는 불당(佛堂)의 터로 지금은 입실저수지(入室貯水池)에 편입되었다.
[미리봉]
정월 대보름에 달이 제일 먼저 솟는다고 하여 ‘미리봉’ 또는 ‘명월봉(明月峯)’이라고 한다. ‘띠밭등’ 남쪽 산으로 ‘갓밑’ 위의 꼭대기를 말한다.
[범왕산(凡旺山)]
‘새터’ 동쪽 산으로 마치 ‘범’이 웅크리고 내려다보는 형상이라 하여 ‘범앙산’이라고도 부른다. ‘범’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 형국(形局)이라 마을이 잘 안된다고도 한다.
[북봉]
‘안점’ 동쪽에 ‘북(타악기)’처럼 솟아 있는 산으로 ‘고봉(鼓峯)’이라고도 하며, 함박산 미리봉 동쪽의 높은 산으로 정상부(頂上部)에 넓은 평지가 있어 ‘함박산’이라고도 한다.
[넓적등]
‘범왕산’ 북쪽 아래쪽에 있는 넓적한 등성이를 말한다.
[띠밭등]
입실리(入室里) 동쪽에 ‘띠풀’이 매우 많았던 등성이를 말한다.
[벌밋등]
입실리(入室里)에서 양남면(陽南面)으로 넘어가는 도로 남쪽, 저수지 동북쪽에 있는 등성이로 옛날에는 묘(墓)가 많아 ‘벌밋등’이라고 한다.
[설매봉]
‘송골’ 동북쪽에 있는 산등성이를 말한다.
[알속등]
입실리(入室里) 동남쪽 ‘범왕산’ 아래에 있는 오목하게 생긴 등성이를 말한다. ‘범’의 앞발 사이와 같이 오목하면서 볼록하게 솟은 등성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옻밭등]
‘안점’ 서북쪽 등성이로 옻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이 등성이 아래에 ‘쇠부리터’가 있었다고 한다. ‘쇠부리터’는 쇠를 달구는 자리, 즉 용광로(鎔鑛爐)가 있던 자리를 말한다.
[큰속등]
‘범왕산’ 서쪽에 있는 큰 등성이로 ‘범’의 머리에 해당한다고 한다.
[둥디잇재]
외동읍 입실리(入室里)에서 양남면(陽南面) ‘하서리(下西里)’로 넘어가는 고개로 ‘외동고개’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14번 국도(國道)를 말한다.
동대산맥의 줄기인 이 고개는 옛적에 왜구(倭寇)가 침입할 때 ‘둥둥’하고 북을 울려 알렸다고 하여, ‘둥둥골’이라 부르다가 ‘둥디잇고개’, ‘둥디골’ 혹은 ‘고고령(鼓鼓嶺)’이라고도 불렀다. 외동읍과 양남면·양북면의 경계를 이룬다 해서 ‘외동고개’ 또는 ‘입실고개’라고도 한다.
이 고개를 넘어가면 양남면(陽南面)사무소, 양북면(陽北面) 어일장, 감포(甘浦)항구, 문무대왕 수중릉, 박제상이 왜국(倭國)으로 출발한 ‘밤개포구’ 등으로 연결된다.
[큰재]
입실리(入室里) ‘안점’ 동쪽에서 양남면 석촌리로 넘어가는 ‘둥디잇재’의 큰 고개를 말한다. 양남면 석촌리(石村里)는 외동읍 입실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간 마을이다.
[적은재]
‘안점’ 동쪽에서 양남면 석촌리(石村里)로 넘어가는 ‘둥디잇재’의 작은 고개로 ‘큰재’ 보다 낮아 ‘적은 재’라고 한다. 경주(慶州) 지방에서는 ‘작다’라는 말을 ‘적다’라고 표현하기 때문에 ‘작은 재’를 ‘적은 재’라고 한 것이다.
예를 들면 ‘작은 아버지’를 ‘적은 아버지’라고 호칭하는 경우와 같다. 이 ‘재’는 백토(白土)가 많이 나서 ‘힌디깃재’라고도 한다. 옛적 민둥산일 때는 이 백토(白土)가 허옇게 보여 이 산을 ‘백일산(白日山)’이라고도 했었다.
[곧은 골]
‘평풍골’ 맨 안 골짜기로 똑바로 들어간다고 해서 ‘곧은 골’이라고 했다.
[대밭골]
대나무 밭이 있었던 골짜기로 입실저수지(入室貯水池) 동남쪽 ‘평풍골’ 서쪽에 있다.
[대성골]
‘곧은골’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두리챗골]
‘평풍골’ 동쪽에 있는 두 번째 골짜기를 말한다.
[둥디잇골]
‘북봉’ 밑에 있는 입실저수지(入室貯水池) 안쪽 골짜기 전체를 말한다. ‘둥둥골’이라고도 한다.
[매탯골]
‘첫골’ 맞은편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문바우골]
‘문바우’가 있는 골짜기로 ‘복햇골’ 동쪽에 있다. ‘문바우’란 바위의 모양이 마치 ‘문(門)’처럼 생긴 바위라는 뜻이다.
[물탕골]
‘안점’ 북쪽에 약물(藥水)이 났다는 골짜기를 말한다.
[복햇골]
폭포(瀑布)가 있는 골짜기로 ‘복해’가 많이 찬다고 ‘복햇골’이라고 한다. ‘두리챗골’ 동쪽에 있다. ‘복해’는 작은 폭포를 말한다.
[삼밭골]
‘벌밋등’ 남쪽 골짜기로 옛날에 산삼(山蔘)이 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송골]
‘범왕산’ 북쪽 골짜기로 ‘선골’이라고도 한다.
[수영골]
수정(水晶)이 많이 났다고 하여 ‘수정골’이라고도 한다. 입실저수지(入室貯水池) 아래 골짜기는 ‘바깥수영골’, 저수지 안쪽은 ‘안수영골’이라고 한다.
[용짓골]
용제(龍祭 ; 기우제)를 지냈다는 골짜기로 ‘옻밭등’ 남쪽에 있다.
[제비골]
지형(地形)이 마치 제비집처럼 생긴 골짜기로 ‘곧은골’과 ‘홈갯골’ 남쪽에 있다.
[종이티골]
입실리(入室里) 170-2 소재 영수아파트 위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첫골]
‘평풍골’ 동쪽에 있는 첫 골짜기를 말한다.
[평풍골]
산이 평풍(병풍)처럼 둘러 있는 골짜기로 ‘안점’ 동남쪽에 있다. 골짜기가 깊어 ‘아흔아홉골’이라고도 한다.
[홈갯골]
물을 대기 위해 홈통(물을 이끄는 데 쓰는 긴 통)을 놓았던 골짜기로 ‘문바우골’ 동쪽에 있다.
[후리바웃골]
‘안점’ 동북쪽 골짜기로 ‘적은재’ 북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문바우]
바위의 모양이 마치 ‘문(門)’처럼 생긴 바위로 ‘문바우골’에 있는 바위를 말한다.
[담뒤]
‘수북’ 뒤에 ‘듬벙’이 있었던 들이다. 지금은 경지정리(耕地整理)를 하여 없어졌다. ‘듬벙’은 ‘듬비’ 또는 ‘웅디’라고도 하는데, ‘웅디’는 ‘웅덩이’를 말한다.
[상봇들]
‘상보(上洑)’의 물을 대어 농사를 짓는 들판으로 입실리(入室里) 동북쪽에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보(洑)’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둑을 쌓고 냇물을 끌어들이는 곳’을 말한다.
[중봇들]
‘중보(中洑)’의 물을 대어 농사를 짓는 들판으로 ‘상봇들’ 서쪽에 있다.
[개발논]
‘혈수정’ 서쪽에 있는 논을 말한다.
[곽답]
‘중보(中洑)’ 가운데 있는 논을 말한다.
[도티논]
‘상보(上洑)’ 동쪽에 있는 논을 말한다.
[마디논]
‘중보(中洑)’ 동북쪽에 있는 논을 말한다.
[밀랑논]
‘중봇들’ 서쪽에 있는 논을 말한다.
[복숭아나무 자리]
복숭아나무가 있었던 논으로 ‘중보(中洑)’ 서남쪽에 있다.
[성채논]
‘중봇들’에 있는 논을 말한다.
[시루논]
‘시리(시루)’처럼 물이 잘 빠진다는 논으로 ‘상보(上洑)’ 동북쪽에 있다.
[원거논]
‘원거’라는 사람의 논이었다고 한다. ‘밀랑논’ 동북쪽에 있다.
[은행나무 자리]
‘복숭아나무자리’ 밑에 있는 논을 말한다.
[종율논]
‘종율’이란 사람의 소유였던 논으로 ‘중보(中洑)’ 동쪽에 있다.
[지청구논]
‘지청구(지칭개)’가 많았던 논으로 ‘개발논’ 동쪽에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청구’란 ‘지칭개’를 말하는데, ‘지칭개’란 국화과(菊花科)에 속한 두해살이풀로 높이는 60~90센티미터 정도로 자라며, 줄기에서 나온 잎은 깃꼴로 깊게 갈라진다.
여름에 자주색 두상화(頭狀花)가 피며 어린잎은 식용(食用)으로 먹는다. 우리나라, 중국, 일본, 인도 등지에 분포한다.
[진 배미]
‘상보(上洑)’ 남쪽에 있는 긴 논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배미’란 구분된 논을 세는 말로 “외삼촌네 논은 우리 논에서 두 ‘배미’ 아래에 있다.”라는 용례(用例)가 있다. ‘진 배미’는 ‘기다란 논배미’라는 뜻이다.
[탑거리]
탑(塔)이 있었던 논으로 ‘중보(中洑)’ 서남쪽에 있다.
[태수논]
‘태수’라는 사람의 소유였던 논으로 ‘상보(上洑)’ 동남쪽에 있다.
[혈수정]
‘상보(上洑)’ 서쪽에 있는 논을 말한다.
[굴대지기]
‘탑거리’ 북쪽에 있는 보(洑)를 말한다.
[담뒷보]
‘담뒤’에 있는 보(洑 ;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둑을 쌓고 냇물을 끌어들이는 곳)를 말한다.
[상보(上洑)]
맨 위쪽 ‘상봇들’에 있는 보(洑)를 말한다.
[새보]
‘담 뒤’ 위쪽에 새로 만든 보(洑)로 지금은 없어졌다.
[자부리]
‘중봇들’ 아래에 있는 보(洑)를 말한다.
[중보(中洑)]
‘상보(上洑)’ 아래에 있는 보(洑)를 말한다.
[텃보]
‘중보(中洑)’ 남쪽에 있는 보(洑)로 부근에 집터가 있었다.
[입실천(入室川)]
입실리(入室里) 가운데로 흐르는 하천으로 입실마을에서 발원하여 국도 제14호선의 길과 비슷하게 입실리 중심지를 거쳐 남서류(南西流)하다가 태화강의 지류인 동천(동천강 본류)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입실천
[순금천(舜琴川)]
입실리(入室里)에서 ‘구어리’ 앞으로 흐르는 도랑이다. ‘순금(舜琴)’에 대한 설명은 앞서 소개한 ‘순금’마을에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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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실리(入室里)는 외동읍의 중심이지만, 기반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아 발전이 더디고 인구유입도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특히 입실리(入室里)의 도시계획도로는 이미 30년 전에 계획되어 있지만, 추진이 되지 않아 사유재산권(私有財産權) 침해는 물론 발전의 걸림돌이라고 한다. 주민들은 이의 조속한 시행을 바라고 있다.
또 입실리(入室里)를 비롯한 외동읍은 공장이 600개가 넘는데도 주거환경(住居環境)이 개선되지 않아 인구의 유입(流入)이 이루어지지 않고, 따라서 발전도 늦어지고 있다.
때문에 입실리(入室里)를 비롯한 외동읍민들은 특목고(特目高)를 비롯한 주거환경개선사업을 소망하고 있고, 재래시장(在來市場) 활성화와 울산(蔚山) 시내버스의 입실리 운행을 바라고 있다.
입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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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실리(入室里)에는 외동읍의 중추(中樞)를 이루고 있는 지금의 저명인사들 외에 수많은 선열(先烈)들이 배출된 마을이기도 하다.
북부지방의 경우는 일제(日帝)의 앞잡이나 봉건지주(封建地主)들이 활개를 치기도 했으나, 외동읍(外東邑) 남부지역의 경우는 임진왜란(壬辰倭亂)과 항일독립투쟁기간을 통해 수많은 의장(義將)과 투사들이 새파란 젊음과 영화를 버리고, 조국(祖國)의 안녕과 독립을 위해 초개같이 자신들을 불살랐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백척간두의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경울(慶蔚 ; 경주와 울산)지역에서 왜적(倭敵)을 무찌르고, 장렬하게 순국한 수많은 외동읍(外東邑) 남부지역 출신 의병장(義兵將)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대다수 외동읍(外東邑) 출신 선열들의 경우 출신지인 외동읍(外東邑)보다는 다른 지역, 특히 울산지역 선열(先烈)들로 이름 지어져 있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게다가 그들을 기리는 사당(祠堂)이나 향교, 서원(書院), 정자는 물론 묘역(墓域)을 비롯한 관련 지명까지 출신지인 외동읍(外東邑)보다는 주로 울산이나 포항(浦項) 등 다른 지역에 소재하고 있거나, 명명(命名)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울산광역시에서는 신라의 재상 박재상은 물론 외동읍 입실리(入室里) 출신 이응춘(李應春) 의병장, 이우춘, 이삼한과 기박산성(旗朴山城) 전투의 유공자 이봉춘 등을 울산이 낳은 의병장(義兵長)들인양 홍보하고 있으며, 이들의 위패를 울산시 중구 학성동에 소재하는 충의사(忠義祠)에 봉안하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다.
울산시 중구 학성동에 위치하고 있는 충의사(忠義祠)
외동읍(外東邑) 사람들이 바로 인접한 울산지역(蔚山地域) 전투에 참가했다 해서 울산사람이라는 주장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외동읍이나 경주지역(慶州地域) 의병들이 울산지역에 침투한 왜적(倭敵)을 무찌르기 위해 울산지역으로 진출(進出)하여 전투를 벌인 것은 크게는 나라를 침범한 왜적을 소탕(掃蕩)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가까이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외동읍(外東邑)과 신라의 천년고도(千年古都) 경주를 침략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전쟁과 전투(戰鬪)란 국가와 자기 향토(鄕土)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자기 집이나 방안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막는 것이 아니고, 최종 방어선(防禦線)인 산성이나 산정(山頂)의 전방지역으로 진출하여 적의 침투로(浸透路)를 차단하여 방어하고, 격퇴(擊退)하는 것이다.
경주(慶州)와 외동읍 출신 의병들이 경주와 외동읍(外東邑) 지역을 방어하려면, 왜적의 주요 침투로인 관문성(關門城)과 기박산성의 전방인 울산지역의 주요 침투로(浸透路)와 동대산맥 이동(以東)의 동해안 지역인 양남면의 주요 접근로에까지 진출하여 최후의 방어선인 관문성과 동대산맥(東大山脈)을 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군이 관문성을 넘어 경주읍성으로 직결되는 영남좌로(嶺南左路)나, 동대산의 외동고개(둥둥이재)와 개곡리(開谷里)의 '바디령'을 넘어 불국사(佛國寺)와 영남좌로를 점령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의병들을 울산지역이나 동해안의 주요 침투로(浸透路)에 전진 배치시켜 소탕하는 것은 당연한 전술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효과적(效果的)인 전투를 벌이기 위해 울산지역에 진출하여 왜적을 무찌른 외동읍 출신 의병(義兵)들과 그 전투를 울산사람이나 울산의 의병 또는 울산을 위한 전투로 각색(脚色)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울산에서 울산관내의 임란 당시 격전장(激戰場)이라고 홍보하는 공암(孔岩), 달현, 사자평, 관문성, 이견대, 기박산성 등은 울주군 삼남면의 ‘사자평(獅子坪)’을 제외하고는 모두 당시의 경주부(慶州府) 지역이었고, 지금도 경주시 외동읍(外東邑) 또는 양남면 지역이다.
‘공암(孔岩)’의 경우 지금도 경주시 양남면과 울산시 북구 강동동의 경계선일 뿐 그 시절의 전투까지 울산지역의 전투라고만 할 수는 없다.
2013년 4월 29일 경주시 양남면 임란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가 동해 ‘칠의장군’의 맹약비와 순직 의사(義士)의 유령비, 귀향한 의사의 전적비(戰績碑) 등으로 구성된 추모비(追慕碑)를 이곳 ‘공암(孔岩)’에서 제막한 것도 당시의 ‘공암(孔岩)전투’가 경주지역 전투였기 때문이다.
동해 ‘칠의장군’의 추모비(追慕碑)
(임란 당시 동해안에서 활약한 황희안, 김득복, 김응택, 김몽택, 박인국, 박춘무, 박춘영 등 소위 '동해 7의장'을 기리는 경주동해안 임란창의공원. 2013년 봄, 경주시 양남면 임란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가 양남면 기구리에 조성하였다. 기념공원 내에는 '임란창의군전승기념비', '임란순
절의사위령비', '공암구국맹약기념비' 등 세 개의 비가 함께 설치됐다)
그리고 공암(孔岩), 달현, 사자평(獅子坪), 관문성, 이견대, 기박산성 지역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당시의 의병장들인 장희춘, 이응춘(李應春), 이삼한(李三韓), 윤홍명, 서인충, 이계수, 이우춘(李遇春) 등 이른바 ‘남영 7의장(義將)’들도 거의가 외동읍(外東邑) 출신들이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외동읍(外東邑) 지역의 전투를 울산(蔚山) 지역의 전투로, 이들 전투지역의 외동읍 출신 전투원들도 모두 울산사람으로 싸잡아 일컫는 것은 맞지 않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제향(祭享)을 올려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경주시(慶州市)나 외동읍(外東邑)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해 준다는 뜻에서다.
그리고 한 가지 참고할 것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의 경주부(慶州府)는 지금의 경주시 전체, 포항시(浦項市) 죽장면 전지역, 신광면, 기계면, 기북면과 영천시(永川市) 임고면 일부, 고경면 일부, 북안면 일부, 대창면 대창리, 그리고 울산광역시(蔚山廣域市) 울주군 두동면과 두서면을 관할하는 부(府)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당시의 경주부 지도
따라서 임진왜란 당시 이들 지역에서 외동읍(外東邑) 출신 의병장들이 벌인 왜적(倭敵)과의 전투는 당연히 경주지역 전투에 해당한다.
조금은 박절한 말이지만, 그 당시 경주와 울산에서 벌어진 왜적(倭敵)과의 모든 전투는 울산보다는 경주(慶州)를 보호하기 위한 전투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신라(新羅) 천년의 고도(古都)와 불국사, 그리고 수많은 불교유적지를 금수(禽獸)와 같은 왜적들로부터 보호하려는 충의(忠義)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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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 입실리 출신 이응춘(李應春) 의병장과 그의 아들 이승금(李承金), 두 아우 이우춘(李遇春), 이봉춘(李逢春), 그리고 개곡리(開谷里)에 살던 그의 종질(從姪) 이삼한(李三韓)과 이눌(李訥) 등 일족의 전공(戰功)과 생애를 간략하게 소개함으로써 이제나마 우리들 외동읍의 후손들이 그들의 존재를 올바로 인식케 하고, 그들의 애국충정(愛國忠情)을 기리게 하고자 한다.
먼저 입실리 출신 이응춘(李應春) 의병장과 그 일족의 일부를 소개한다. 이응춘 의병장은 자(字)를 태영(泰英), 호(號)를 퇴사재(退思齋)라 하며, 본관은 청안(淸安), 고려 검교태보시랑(檢校太保侍郞) 충원공(忠元公) 양길(陽吉)의 후손이다.
장기현(長鬐縣 ; 지금의 포항시 구룡포읍, 장기면, 대보면 동부, 동해면 상정리·중산리·공당리를 포함하는 지역)의 현감 ‘이기(李基)’의 증손이며, 홍원현감 광보의 맏아들로 중종 35년(1540),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外東邑) 입실리에서 출생하였다.
이응춘(李應春) 의병장은 명종 21년(1566),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오위부장(五衛部將)에 이르렀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인 입실리(入室里)로 낙향하였다.
이후 공(公)은 지역의 지식인들과 교우하며, 임진왜란 2년 전인 선조(宣祖) 23년(1590)에는 불국사(佛國寺) 법영루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시회(詩會)를 갖는 등 유사시를 대비하였다.
선조 25년 4월, 왜적이 침공했을 때는 아우 이우춘(李遇春), 이봉춘(李逢春)과 아들 이승금(李承金), 종질 이삼한(李三韓 ; 判官), 이눌(李訥 ; 領將)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키니 뒤따르는 사람이 들끓었다.
그리고 동월 23일, 울산의 개운포(開雲浦)로 상륙하는 왜적을 이언춘, 윤홍명, 장희춘 등 의사와 합세하여 크게 격파하고, 이어 동해안의 ‘공암(孔岩)’으로 달려가 적을 격파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공암(孔岩)’은 지금의 울산광역시 북구 강동동의 법정동인 신명동을 말하나, 경주시 양남면(陽南面)과 경계하는 해변마을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에는 이곳에서 빈번한 전투가 있었다. 양남면에서는 이 전투를 양남면 지역 전투로 기리고 있다.
이응춘(李應春) 공은 또 1592년 5월14일에는 영천 창암전투에 참전하여 적을 무찌르고, 5월 29일에는 의병을 이끌고 다시 ‘공암(孔岩)’으로 진을 옮겨 침투해 오는 왜적을 방어하였다.
이후 동년 6월 9일에는 ‘문천회맹(汶川會盟)’에 가담하여 왜적의 소탕을 다짐한 후 동년 9월 8일 경주읍성(慶州邑城)을 탈환하였고, 경주읍성에 대한 왜적의 재침을 막기 위해 울산의 개운포(開雲浦)를 지키다가 다시 9월 21일 선도산(仙桃山 ; 경주시 서악동 소재)전투에 참전하여 적을 무찔렀다.
여기에서 말하는 문천(汶川)은 지금의 형산강의 지류인 ‘남천(南川)’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옛적에는 ‘남천(南川)’을 ‘문천(汶川)’이라고도 했는데, 그 까닭을 잠시 소개한다.
경주시내의 형산강 지류에서 가장 큰 가닥은 ‘서천(西川)내’ 줄기다. 이 서천의 한줄기는 토함산(吐含山)에서 흘러내려 ‘사등이내’를 이루고, ‘수남’, ‘원들’, ‘양지버들’, ‘갯들’을 지나 옛적 내동면(內東面)과 경주읍성의 남으로 흐른다 해서 ‘남천(南川)내’라 부른다.
그 시절 문천(남천 : 1798년)
(그림의 아래쪽 '오릉' 위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문천'이다)
‘남천내’를 ‘문천(汶川)’이라고 한 것은 이 개울에 ‘모래’가 유난히 많다는데서 연유(緣由)한다. ‘모래’가 많아 당시의 경주사람들은 사투리로 ‘몰개’가 많다는 뜻으로 ‘남천’을 ‘몰개 내(沙川)’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또 발음(發音)이 정확치 않은 경주사람들의 ‘몰개’라는 소리가 듣기에 따라서 ‘모개이(모기)’와 운률(韻律)이 비슷하다는 점도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조선시대 한양(漢陽)의 양반들이 경주에 와서 시(詩)를 지을 때 주민들에게 들은 ‘몰개’ 또는 ‘몰개이’의 운률(韻律)이 ‘모기’ 즉 ‘모개이’라는 것 같이 들리자 이에 맞춰 한자로 ‘모기 문(蚊)’자를 써서 ‘남천’, 즉 ‘몰개내’를 ‘문천(蚊川)’이라고 명명해 버렸다.
‘모래’가 ‘모기’로, ‘몰개내’가 ‘모기내’, 즉 ‘문천(蚊川)’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어느 시기부터 이 ‘蚊川’을 물이 흐르는 시내라는 점을 감안하여 ‘汶川’으로 바꾸어 쓰고, 부르게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응춘(李應春)을 비롯한 외동읍의 의사(義士)들이 모여 회맹(會盟)을 한 곳은 탑동(塔洞) 지역의 ‘문천’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응춘(李應春) 공의 종질인 외동읍 개곡리(開谷里) 출신 이눌(李訥) 공이 이응춘 공의 지휘 하에 경주성 공략을 위해 진을 친 곳 중 한 곳이 계림(鷄林)이었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그만큼 탑동의 ‘문천’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경주시 도심 외곽을 감도는 지금의 남천(문천)
또한 여기에서 말하는 ‘회맹(會盟)’이란 옛적 중국에서 여러 나라 사이 또는 제후간(諸侯間)에 맺는 동맹 또는 그때 행하는 의례(儀禮)를 말한다.
한 나라의 읍과 읍 사이 또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그 나라나 읍의 대표자들이 모여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약속을 정하고 맹세를 한 의례로, 특히 춘추전국시대 때 제후국(諸侯國) 사이에서 성행하였다.
이때의 의례(儀禮)는 각 대표가 한 장소에 모여 소(이를 ‘희생(犧牲)의 소’라 한다)를 잡아 귀를 자르고 그 피를 서로 받아 마시며, 약속을 하늘에 알려 맹세하고, 그것을 서류로 만들어 ‘희생의 피’와 함께 땅에 묻는 것이다.
주(周)나라의 경우 왕도(王都)를 동천(東遷)한 후 기존지역의 세력이 약해지자 실력 있는 제후국(諸侯國)이 회맹(會盟)을 관리하는 맹주가 되기도 했었다.
중국의 춘추시대(春秋時代)에는 회맹의 맹주가 되는 것이 패자(覇者)의 필수조건으로, 제(齊)나라 환공(桓公)은 ‘계구(癸丘)의 회(會)’에서, 진(晉)나라 문공(文公)은 ‘천토(踐土)의 맹(盟)’에서 각각 맹주의 지위를 확보하여 패자가 되었다.
이때의 ‘회(會)’와 ‘맹(盟)’이 합성되어 ‘회맹(會盟)’이라는 말이 탄생되었고, 이 말과 의식(儀式)이 600여년이 지난 1590년대에 들어 우리나라에서 쓰이고 행해진 것이다.
그리고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때의 회맹(會盟)은 강국으로 부상한 진(秦)나라에 대한 공수동맹(攻守同盟) 형태로 나타났다.
또한 회맹(會盟)이 기능을 제대로 발휘한 때는 진(秦)과 한(漢)의 통일국가가 성립되기까지라고 볼 수 있다. 1004년 송(宋)나라와 요(遼)나라 사이에 맺어진 ‘전연의 맹’ 등은 회맹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들의 고향 경주시 문천(蚊川 ; 지금의 남천)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던 ‘문천회맹(蚊川會盟)’의 내력을 잠시 상고(詳考)해본다.
아시는 바와 같이 기나긴 세월에 걸친 한반도의 우리 민족사, 단군(檀君)이래로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그리고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너무나도 많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왔다.
그때마다 의연(毅然)하게 일어서서 그들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숨져간 영웅들이 있었으니 우리는 이들을 순국선열(殉國先烈) 또는 호국영령(護國英靈)이라 부른다.
그중에서도 근세(近世)에 와서 심각했던 국란의 하나로 임진항쟁(壬辰抗爭)이 있었으니 당시의 침략군인 왜병(倭兵)들과 맞서서 우리의 경주(慶州)를 지키려 싸우다가 숨져간 사람 또한 적지 않았다.
이 전투에 참여하였던 모두를 임란의사(壬亂義士)라고 하는데, 이들은 조선의 관군을 포함하여 거의 대부분이 민간인들이었으며, 경상도(慶尙道) 전역에서 분기하여 모여든 의병대(義兵隊)들이었다.
서기 1592년인 선조(宣祖) 25년 4월 14일, 일본(日本)의 왜군들이 동래(東來)에 침공하여 선조 31년인 1598년에 이르기까지 7년간이나 조선의 전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이 기간의 모든 전쟁이 곧 바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다. 1592년 4월 21일 경주가 함락되고, 이미 전국의 곳곳에서 전투가 전개되는 동안인 선조 25년인 6월 9일에는 비밀리에 통문(通文)을 받아든 의병들이 경향 각지에서 모여들어 경주의 문천(蚊川, 南川)변인 반월성(半月城) 남쪽에서 경주읍성 탈환을 위한 결사항쟁의 맹세를 다지게 된다. 이 맹세를 이른바 ‘문천회맹(蚊川會盟)’이라 한다.
‘문천회맹(蚊川會盟)’은 ‘팔공산(八公山)회맹’과 ‘화왕산(火旺山)회맹’보다 앞서는 모임으로서 살기 아니면 죽기로 작정한 피의 맹세, 즉 혈맹(血盟)이나 다를 바 없는 모임이었다. 백마(白馬)를 잡아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그 피를 나눠 마셨다.
경주(慶州)를 위시하여 동래, 울산, 양산, 영천, 흥해, 영일, 자인, 장기, 대구, 언양, 영해 등지에서 자원한 의병들은 경주의 판관인 박의장(朴毅長)의 군사들과 합세(合勢)하게 되자 동년 6월 27일에는 무려 4,200명의 인원이 운집하였고, 몰려드는 모습이 구름 떼와 같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의병(義兵)과 관군의 합세로 하여 증강된 군사력은 문자 그대로 막강지세(莫强之勢)였고, 사기충천이던 바, 경주읍성(慶州邑城)의 탈환을 목표로 차근차근히 군사작전은 진행되어 갔다.
이후 동년 8월 20일에는 관군(官軍)과 의병군이 일시에 경주 북쪽 40리 밖인 안강(安康)에 집결했는데, 통합인원이 무려 3만7,000명에 달했으니 실로 대군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때에 외동읍 개곡리(開谷里) 출신 이눌(李訥)은 각 곳의 철물(鐵物)을 수합하여 창, 칼 등의 무기를 제작하는 한편, 북천건너 동천(東川)마을 훈장 이언춘(李彦春)은 마을사람들을 규합하여 함께 거병하기도 했었다.
또 남산(南山)아래 월남(月南, 現오릉마을)마을의 김호(金虎) 장군은 60세의 노구를 끌고 가솔(家率)과 더불어 참전하였다.
여기에 내남면 출신 최진립(崔震立)장군과 손엽(孫曄) 장군, 그리고 영천의 권응수(權應銖)의병장 등도 가세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이로써 경주 부윤 윤인함(尹仁涵)이 읍성탈환의 작전계책을 세우고,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한 화포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로 중무장하여 금장대(金藏臺)에다 진을 치고 복성군(復城軍)과 규합하여 전투지휘본부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경주읍지(慶州邑誌)』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이 당시의 읍성탈환과정에서 2,000여명의 복성군(復城軍) 병력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었으니 전투의 치열함과 참담함을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문천회맹(蚊川會盟)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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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입실리 출신 이응춘(李應春)공의 얘기로 돌아간다. 이후 이응춘 공은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2월 태화강으로 침투하는 적을 이여랑, 최봉천, 윤홍명, 박인국 등 의병장과 합세하여 대첩을 거두는데 공헌하고, 곧 불국사로 진을 옮겨 울산에서 경주로 들어오는 적을 방어하였다.
동년 10월 29일에는 태화강 사수를 다짐하는 구강동고록(鷗江同苦錄)에 서명하고, 선조 27년(1594년) 10월 9일 개운포(開雲浦)에서 적의 대병력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다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이응춘(李應春)공이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전사하자 조정(朝廷)에서는 그의 전공을 높이 치하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하고, 원종공신 3등으로 녹훈(錄勳)하였다.
이응춘의 전공과 시호(諡號)와 관련된 내력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왕조실록의 관련기사를 게재한다.
○ 命故判決事贈吏判李時茂加贈, 豐基故參判贈吏判黃暹賜謚, 蔚山故部將李應春及其子故訓鍊正承會贈職, 時茂, 贈領相廷立之父, 而壬辰殉節者也, 暹以文學名節, 著績於宣廟朝, 光海時被削者也, 應春戰亡於倭變, 而承會以復讎募義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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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실록의 내용을 직역하면 “고(故) 판결사(判決事) 증 이조 판서 이시무(李時茂)에게 증직을 더하고, 풍기(豊基)의 고 참판 증 이조 판서 황섬(黃暹)에게는 사시(賜諡)하며, 울산(蔚山) 고 부장(部將) 이응춘(李應春)과 그 아들 고 훈련정(訓鍊正) 이승회(李承會)에게는 증직하라고 명하였는데, 이시무는 증 영상(領相) 이정립(李廷立)의 아버지로서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했던 자이고, 황섬은 문학과 명절(名節)로 선묘조(先廟朝) 때에 공적이 드러났는데 광해군 때 삭직(削職)당했던 자였으며, 이응춘은 왜변(倭變 ; 임진왜란)에 전사하였고, 이승회는 원수를 갚기 위하여 의병(義兵)을 모집했던 자였기 때문이었다.”라는 뜻이다.
실록에는 ‘이승금(李承金)’을 ‘이승회(李承會)’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금(金)’자가 ‘회(會)자’로 오기된 듯하다.
울산광역시에는 이응춘(李應春)공과 관련한 지명이 있기도 하다. 지금의 울산시 중구 반구동(伴鷗洞)이다. 반구동의 동명은 동천이나 태화강의 토사가 지금처럼 퇴적되지 않아 하나의 반도를 이루고 있을 때 이를 구강이라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다.
임진왜란 때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 입실리 출신 의병장 이응춘(李應春)공이 이곳에 정자를 세워 그 이름을 반구정(伴鷗亭)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지명으로 굳어진 것이다. 반구(伴鷗)는 기러기와 짝지어 논다는 뜻이다.
반구정(伴鷗亭)은 태화강에 연접된 왜성(倭城·학성공원)의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정자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거기에서 구강회맹(鷗江會盟)이 결성되어 개운포(開雲浦)에 상륙한 왜군(倭軍)과 치열한 싸움이 있었던 역사적인 전흔(戰痕)의 정자이기도 하다.
이 정자는 뒷날 이수삼산정(二水三山亭)으로 개칭되는 등의 일화(逸話)를 남기면서 이응춘의 관향인 청안이씨(淸安李氏)들의 정자로 변모했다.
앞에서 소개한 이응춘(李應春) 의병장의 아우인 이우춘(李遇春)과 종질인 이삼한(李三韓)은 울산의 개운포전투에서 선조 25년 9월 다른 의병장 장희춘, 이응춘(李應春), 윤홍명, 서인충, 이계수 등과 함께 치열한 전투를 벌여 왜적 100여명을 참수함으로써 후일 ‘남영 7의장(義將)’이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
이우춘(李遇春)은 또 그의 형 이응춘, 종질 이삼한과 함께 선조 26년 1월 적선들이 태화강(太和江)으로 들어온다는 연락을 받자 학성관 객사에 모여 대비책을 논의한 후 동년 2월 6일, 왜군(倭軍) 수천명을 태운 왜선(倭船) 수십척이 태화강 입구로 들어와 상륙하는 것을 보고 바람을 이용한 화공(火攻)을 퍼부어 대승하였다. 이를 ‘태화강구 전투’라고 부른다.
또 다른 아우 이봉춘(李逢春)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울산을 왜군이 점령했을 때 기박산성(旗朴山城)에 진을 친 의병장 박봉수(朴鳳壽) 대장의 우위장으로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입실리의 또 다른 의병장에는 이응춘(李應春)의 둘째 아들인 이승금(李承金)이 있다. 이승금은 조선 명종 11년(1556)에 현재의 외동읍(外東邑) 입실리(入室里)에서 태어났다. 이승금은 13세 때 손가락을 끊어 병세가 위독한 아버지를 구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효성이 극진하였다.
선조 12년(1579)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1592)때는 아버지인 이응춘(李應春) 의장(義長)을 따라 두 숙부(이우춘, 이봉춘)와 함께 지금의 울산광역시 강동동과 경주시 양남면(陽南面) 경계선에 소재하는 공암(孔岩)지역과 당시 경주성(慶州城)의 남쪽을 돌아 흐르는 문천(蚊川 ; 汶川)전투에 참가하여 누차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운 의병장이다.
선조 27년(1594년) 10월 9일 아버지 이응춘(李應春)이 개운포(開雲浦 ; 울산 남구 성암동 일원) 전투에서 적의 대병력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다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순절하자 그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명(明)나라 원병이 도산성(島山城 : 鶴城 : 울산시 중구 학성동 소재)에 이르자 스스로 길잡이가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도산전투(島山戰鬪)에서 조ㆍ명(朝明)연합군이 패배하여 경주(慶州)로 철수하자 실의에 빠진 이승금은 선영(先塋)을 찾아 시묘(侍墓)를 살면서 벼슬길에 뜻을 버렸다.
그 뒤 조정에서는 이승금의 전공을 높이 평가하여 선무원종훈삼등(宣武原從勳三等)으로 녹봉(祿封)하고, 훈련정(訓練正)을 제수(除授)하였으나, 선조 34년(1601) 46세로 짧은 일생을 마쳤다.
그 후 조정에서는 순조(純祖) 32년(1832) 아버지 이응춘(李應春)은 병조참판으로, 이승금은 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로 추증하였다.
현재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대복리에 있는 오복동(五福洞) 언덕에 부인 경주 안씨(慶州 安氏)와 합장으로 모셔져 있다. 묘 앞에는 상석(床石)만 남았고, 유품으로는 교지(敎旨) 4장을 후손이 보관하고 있다.
이승금이 안장된 대복리의 오복동(五福洞)은 정조 때는 오복(五福)과 대양(大陽) 두 마을로, 1894년(고종 31)에는 오복동(五卜洞)과 대양동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를 합하고 대양동의 대(大)와 오복동(五福洞)의 복(福)을 따서 대복리(大福里)라 하였다. 이 마을 대양에 있는 등성이에 의병장 이승금(李承金)의 묘가 있다.
위대한 외동읍(外東邑) 출신 의병장들이 왜 하필이면 거의가 출생지(出生地)와 살던 곳이 아닌 울산(蔚山)에서 순절하고, 그 묘역(墓域)마저 출생지를 떠나 외동읍이 아닌 울산 등지로 정해야 했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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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실리 출신 출향인사로는 앞서 소개한 입실초등학교 출신 인사들 외에 재경외동향우회 임원을 역임하였거나, 역임 중인 인사로 황보중덕, 손대익, 정영생, 이정우, 서영숙, 김영선, 김진걸, 최교식, 정선화, 정용준, 김광열씨 등이 모두 입실리 출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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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음악이 필요치 않을 듯도 하나, 보시는 바와 같이 기사의 길이가 무려 A4용지로 100여 페이지를 넘고 있어 이미자(李美子)의 ‘고향의 봄’을 선곡(選曲)하여 음미하고자 한다. 이 노래는 가수 이미자(李美子)가 직접 작사 작곡하여 노래를 불렀다는 특징이 있다.
입실리(入室里) 출신 회원님들께서는 동대산(東大山) 기슭과 ‘아기봉’ 자락에 아롱지는 따사로운 봄기운을 느끼면서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향의 봄
작사 : 이미자
작곡 : 이미자
편곡 : 박경호
흑난초 곱게 피는 고향에 봄은
강남제비 찾아와서 집을 짓겠지
내 어이 고향 두고 타향을 왔나
그리워서 불러보고 눈물을 짓는
정든 고향 찾아가자 꽃피는 고향
흑난초 눈에 어린 고향에 봄은
강남제비 돌아와서 피었으련만
천리타향 머나먼 곳 내 어이 왔던가.
오늘 밤도 잠 못 들어 밤을 지새는
정든 고향 나는 가리 꽃 피는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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