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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노케 히메에 나타난 숲(森)과 신도(神道)사상
이혜화
1.일본인의 그리움, 곧 숲(もり)
우리가 일본문화에 대해 가지는 감정은 적대적인 것과 부러움이라는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정치 논리와 경제 논리라는 잣대로 들여다보는 일본의 모습은 늘 왜곡되고 편파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여 진다.
이러한 이중적 잣대와 왜곡은 일본을 우리의 상상력의 편파적인 틀에 가둠으로서 그들의 문화와 만남을 스스로가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일본은 늘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나라로 남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화라는 것은 숲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단조롭고 평화롭게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생물들이 존재하고 변화무쌍한 풍경들이 존재한다.
애니메이션도 그렇다. 우리가 애니메이션에서 보게 되는 것은 화려한 액션이나 주인공 캐릭터의 움직임이다. 하지만 한편의 애니메이션에는 우리가 간과하고 넘어가는 다양한 사상들이 공존하는 경우가 많다.
미야자키 감독은 세계 애니메이션계에서 하나의 코드로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대중성과 인간의 감성을 건드리는 스토리가 큰 힘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그의 애니메이션에는 인간의 원초적인 기억을 건드리는 어떤 다른 무엇이 존재한다. 그 무엇 중에 하나가 숲에 대한 (자연에 대한이라고도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기억이다.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다양한 형태의 숲이 존재한다. 그것은 역사적인 숲이기도 하지만 신화의 숲이기도 하고 인생이라는 숲이기도 하지만 신성의 숲이기도 하다.
1997년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부라고 불리는 미아자키 하야오가 일본 영화계를 평정했다고 해도 좋은 한해였다. 미야자키가 5년에 걸쳐 막대한 자본과 고도의 기술력으로 만들어낸 모노노케 히메 곧 “원령공주”가 관객 동원 1300여만 명이 넘는 빅히트를 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 애니메이션을 보기 위해 극장 앞에서 밤을 새웠고, 연일 매진 소동으로 입석표마저 매진되었으며 애니메이션으로는 처음으로 심야와 조조 상영도 시도되었다. 처음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관객 동원과 더불어 모노노케 히메는 1998년 실사영화를 물리치고 일본 아카데미에서 애니메이션으로는 최초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옛날 옛적에 이 나라는 울창한 숲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곳에는 태고적 신들이 살고 있었다.”로 시작되는 모노노케 히메의 공간은 숲이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미야자키 감독은 자신이 한 번도 묘사를 해 본적이 없는 일본의 고대 시, 공간을 무대로 삼고 있다. 1000년 전 일본으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1000년 전 일본이라고 해도 그것은 일본 역사의 공간은 아니다. 미야자키 감독은 특정한 시, 공간의 잡아 자신만의 시선으로 역사에서 분리시키고 재창조 해 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이 작품을 일본의 어느 특정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역사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미야자키 감독이 모노노케 히메에서 창조해낸 공간은 고대 일본의 모습 중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선택한 제한적인 공간이다. 그리고 그는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고향처럼 존재하는 모리(もり) -숲이라는 의미와 신사라는 의미를 같이 가지고 있다-를 시시가미 숲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재창조 해 낸 것이다.
모노노케 히메가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숲을 향한 일본인의 그리움, 곧 신도사상의 모습을 작품 속에서 그려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2. 신도의 모리( 森-숲 또는 신사)와 모노노케 (원령-物の氣)
일본의 신사는 원래 ‘모리’라고 불렸는데 이는 숲을 뜻하는 말이다. 우리가 ‘절’하면 산을 떠올리듯이 일본인들은 어릴 때부터 ‘신사’ 하면 숲을 떠올리며 자란다. 실제로 일본 어디를 가든 숲에 둘러싸인 신사를 만나게 된다. 일본의 신도(神道)의 신사문화는 숲을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이것은 신사문화가 숲에서 태어난 문화이기 때문이다. 원래 신도는 신사라는 건물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신사의 건축이 시작된 것은 일본에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들어오고 사찰들이 새워짐에 자극을 받아서 라고 이야기 한다.(박규태, 일본의 신사, 도서출판 살림,2005) 그 이전에 신도의 신성한 공간은 숲이었다.
고대의 일본인들은 숲 속의 큰 나무나 혹은 바위 혹은 산 자체를 신(神)이 깃들어 있는 신성공간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신성시 되는 공간의 주변에 상록수를 심거나 큰 돌들을 세워 울타리로 삼았다. 그리고 이러한 신도 습관이 오늘날의 신사의 기원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신사가 세워진다 해도 그들의 종교의 원천은 숲이다.
이러한 종교의 원천인 신도의 숲은 오늘날까지 일본인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으며, 일본인들은 어릴 때부터 신도를 특별히 종교로 신앙하지 않는다 해도 신도와 신도의 숲에 대해 매우 친근한 감정을 품고 자라게 된다. "모노노케 히메“는 이런 신도적 숲에 대해 일본인들이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애정과 기억을 건드림으로서 크게 성공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신사와 더불어 일본인의 정서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원령이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원령은 죽은 자이다. 아니 죽은 자가 아니라 죽은 자의 영혼이다. 하지만 일본인이 가지고 있는 원령사상은 우리의 그것과는 다르다. 일어로 모노노케는 “物の氣”로 쓴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물건에 들어있는 기운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원래 이 모노노케(物の氣) 란 산사람에게 들러붙어 괴롭히는 사령 또는 생령을 의미하는 말이다.(황패강. 일본 신화의 연구, 지식사업사, 1996)
모노노케 히메의 첫 장면은 질주하는 거대한 멧돼지, 타타리가미라는 재앙신이다. 이 멧돼지는 에보시가 쏜 총에 맞아 저주스러운 재앙신이 되었고 결국은 아시타카가 쏜 총에 맞아 죽게 된다. 이 재앙신이 원령의 일종이다. 여기서 멧돼지의 원령이 되는 타타리가미는 살아있으면서도 재앙신이 되는, 즉 살아있는 생령인 것이다. 인간은 재앙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 속의 재앙신은 아시타카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된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다시 사령이 되는 재앙신의 저주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은 오행사상을 통해서 풀어볼 수 있다.
애보시의 제철소에 필요한 것은 나무(木), 곧 불(火)이다. 인간은 불을 사용함으로서 금속(金)을 이용하여 문명세계로 급속하게 진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금속을 재련하기 위하여 나무(木) 곧 살아있는 것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살아 있는 것들의 몸에 총탄이라는 금속(金)을 박아 넣어야 했다.
이것을 간단하게 만들어 보자면 이렇다. 불과 금속, 금속과 나무는 상극의 관계이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재앙이라는 상극의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탄생하는 것이 재앙신, 곧 원령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예부터 이 원령을 위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고 그 와중에 태어난 것이 원령 신앙이라는 것이다.
중세 이래 일본은 생전에 원한을 품고 죽은 귀족이나 왕족이 사후에 탈이나 재앙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것은 생전이 한을 품거나 비명횡사한 자의원령이 산 사람을 괴롭히고 여러 가지 재앙을 불러온다고 하여 두려 하는 민간신앙이다.
일본의 예기 중 ‘노’ 라든가 ‘가부키’등은 이러한 원령신앙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일본 전통 가면극인 ‘노’의 주인공들은 통상 신령, 사령, 노인들이 많이 등장하며 이 주인공들은 세상에 남긴 원한의 감정을 토로하다가 사라지는 모습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일본 가부키의 가장 유명한 극의 하나인 “주신구라(じゅしんくら)는 분하게 죽어간 주군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47인의 사무라이들이 원수를 차례로 죽인 역사적인 사건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 모노노케 히메에서 주인공인 ‘산’은 아기였을 때 들개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재물로 던져진 존재이다. 그리고 들개의 젖을 먹고 자란, 사람으로서는 이미 죽은 살아있는 원령이다.
3. 모노노케 히메 이야기 속에 나타난 신도사상
기존의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들과는 달리 이 모노노케 히메에는 일본적인 색체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신도적 애니미즘에 입각한 숲의 사상이라든지 인본인 특유의 원령 관념이다. 일본인 특유의 정신적인 코드를 애니메이션 작품 속에 적절히 삽입해 넣은 것이다.
먼저 숲의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자. 미야자키 감독의 애니메이션에는 숲이 많이 등장한다. 숲은 아예 작품의 주제가 되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이웃집 토토로”와 지금 이야기 하는 작품 모노노케 히메이다. 하지만 “이웃집 토토로”와 모노노케 히메에서 나타난 숲은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선 ‘이웃집 토토로’에서 나타난 숲은 친주(鎭守)의 숲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여기서 친주란 일본의 마을을 지키는 씨족신을 모시는 신사의 다른 의미이다. 이른바 마을을 지키고 질서를 만드는 코스모스의 숲인 것이다.
일본은 원래 씨족들로 만들어진 부락들로 형성된 나라이다. 그때 자신의 조상들을 신으로 모시면서 원시신도가 형성되었다. 그것이 “무라”라고 불리는 마을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자연스럽게 마을을 지키는 공동체 수호신으로 섬겨지게 되었다. 이 신들과 주민들 사이에는 우지가미(氏神)과 우지코(氏子)라는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은 조상신과 후손이라는 자연스러운 관계로 형성 된 것이다. 마을 가운데 세워진 숲인 친주는 이런 조상신들을 위한 자리이고, 조상신들은 자신의 후손인 마을 주민에게 안녕과 행복을 주는 존재이다.(박규태,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책세상,2001) 그렇기 때문에 이웃집 토토로의 숲은 친근하고 다정하게 다가서는 것이다.
일본의 신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들은 손으로 만지고 (나무라든가 돌이라든가 밥그릇, 젓가락 까지도) 냄새 맡고 (향이 올라가는 연기의 냄새, 나무의 향기, 어떤 특정한 과일의 향 등) 눈으로 보고 (책에 쓰인 글자가 귀신이 되어 나타난 이야기가 <곤야쿠 이야기집>에 몇 번이나 등장한다) 그리고 맛볼 수 있는(달걀귀신이 어느 나라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가?) 모든 것에서 신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그들의 신은 하늘 위나 땅 속 깊은 추상적인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같은 처마 아래에서 인간과 같은 감정을 느끼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신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친근한 모습으로 인간의 집들이 존재하는 숲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존재가 원령이 되었을 경우 그 의미는 달라진다. 원령이 된 신은 인간의 존재를 저주하고 파괴한다. 시시가미는 목이 잘려나가자 인간은 물론 그 본래 존재인 자연마저도 모두 파괴해 버린다. 공포의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질서가 물러가고 폭력과 저주가 난무하는 세상이 되어 버린다. 시시가미의 원시림이 이렇게 생겨난 숲이다.
모노노케 히메의 시시가미 원시림은 카오스의 숲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혼돈이 존재한다. 사실 시시가미 숲은 일본에 존재하는 숲이 아니다. 일본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혼돈의 원시림을 미야자키 감독은 시시가미라는 존재로 화면 안에 펼쳐놓은 것이다. 이러한 숲은 혼돈 안에도 질서가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는 원시적 생명력이다. 이 원시적 생명력으로 존재하는 숲의 존재는 일본인들이 숲에 대해 품고 있는 기억의 무의식을 건드렸고 그것이 이 작품을 히트 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이야기 한다.(박인하, 아니메 미학 에세이, 바다출판사, 2003)
그리이스인들은 돌로 신전을 지었다. 돌로 지은 신전은 영원하리라는 믿음이 무거운 돌을 나르고 하늘을 향해서 올리는 어려운 역사를 감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무라는 존재는 영원하지 않다. 쉽게 썩고 불타버린다. 하지만 그 숲에는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생명이 존재한다. 신이 살고 인간이 살고 동물들이 함께 존재하는 숲은 카오스, 그 혼돈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며 영원한 생명성을 부여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신의 존재를 가까이 느끼는 일본인 특유의 신도 사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4. 신도사상의 동경으로 이루어진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
일본에서 신은 가미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 모노노케 히메는 이 신을 살해하는 이야기, 즉 가미고로시(神殺し)이야기이다. 프레이저는 그의 저서 <황금가지>에서 종종 동물의 형태로 표상되는 신을 살해하는 이야기가 세계 각지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나오는 시시가미는 단순히 사슴신이 아니다. 미야자키 감독은 이 시시가미 안에 시시가미와 다다라봇치라는 두 가지 모습을 모여주고 있다. 시시가미라는 캐릭터 안에는 12지로 대표되는 동물들의 모습을 모두 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숲을 지키는 사슴신 시시가미와 목이 없어진 다음 숲을 파괴하는 원령신 다다라봇치라는 극렬한 대비를 보여준다.
미야자키 감독은 여기서 일본신도의 선악적 사상 모습을 보여 준다. 신도 사상 속에는 악과 선의 구별을 명확하게 긋지 않는다. 선이 때가 타면 악이 되고, 그 악을 깨끗하게 씻으면 선이 된다는 것이 일본 신도의 선악 관계이다. 영원한 악과 선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더럽고 깨끗함의 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시시가미가 목을 베임으로 다다라봇치가 되었다가 목을 돌려받음으로 다시금 시시가미로 변하는 모습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문명으로 대표되는 에보시는 자연의 파괴함으로 평화로운 코스모스의 숲을 파괴적인 카오스적 숲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시시가미라는 숲의 신의 목을 베는 일 조차도 자연스러운 일로 만들어 버린다. 문명을 위하여 숲을 파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신의 목을 베는 행위는 것 잡을 수 없는 폭풍을 불러들여 힘들여 이루어 놓은 문명조차도 파괴하고 말 상황을 만들어 낸다. 자연은 복수심으로 가득 차 공격적이고 살벌하기 까지 한 존재로 변하고 만다. 시시가미 숲속의 모든 것이 원령(物の氣)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시타카와 산-모노노케 히메-이 시시가미의 목의 돌려준 다음 숲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가미고로시로 살해되었던 신은 다시 살아나 숲을 되살리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것이 일본의 신도 사상에 나타난 자연관이다. 모노노케 히메는 애니미즘적인 일본의 자연관을 배경으로 탄생한 것이다.
모노노케 히메의 배경은 너무나 일본적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귀신이 많은 나라라는 일본의 정신적인 배경이 되는 원령 사상과 전통적인 민간 신앙인 신도의 숲 사상이 이야기 안에 가득 담겨있다. 미야자키 감독은 이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다시금 자연파괴에 대한 경고를 보낸다. 문명 건설을 위해서 자연을 파괴해온 인간이지만 그 인간 역시 자연 안에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제철소로 상징되는 인간의 문명이 자연을 파괴하고 재앙신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야망을 위하여 자연으로 대표되는 사슴신의 목을 자르는 일조차도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증오를 키우게 되는 자연으로 대표되는 산-모노노케 히메-은 인간에 대한 공격으로 자연의 반격을 대신한다. 그 와중에서 자연과 인간의 평화를 바라는 아시타카가 공존한다. 각자가 고유한 영역을 지니고 있지만 그들의 공존은 참으로 어려워 보인다. 그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욕망과 분노로 대변되는 이질성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이로서 모노노케 히메는 이 카오스적 숲이 이질적인 타자의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타자를 동화시키거나 아니면 말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다. 선과 악 역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일본의 신도 사상이 교과서적인 결말을 기대하던 관객들 마음의 카오스를 코스모스 적 질서로 인도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잣대로 정당성을 주장하고 자신의 잣대로 타인에게 강요하지만 숲은 각자가 자신의 잣대대로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조용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미야자키 식 결론은 옳고 그름의 분명한 선을 그으며 살아온 유교문화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미야자키 감독은 현대 세계가 앓고 있는 지독한 난해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각자의 잣대는 너무도 분명하지만 타인의 잣대가 가지는 의미성을 이해하기는 어려운 난해한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교과서적 윤리의식에 입각한 생태학적 위기감으로 숲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각자의 잣대로 자신의 느낌대로 이야기의 결론을 추정하고 느껴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5. 모노노케 히메의 신도적 신화의 해석
나는 여기서 칼 융 학파의 정신분석학자 진 시노다 볼린의 이야기를 잠시 빌려보고자 한다. 여신숭배 운동의 바이블이라고도 불리는 그의 저서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은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에는 아르테미스 원형과 아테나의 원형이 있다. 아르테미스가 야생과 사냥, 숲과 다산을 이야기 하는 여신이라면 아테나 여신은 도시와 대장장이와 전쟁과 지혜의 여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각각 산과 에보시를 신들의 이름 앞에 배치할 수 있다. 즉 산이 야생과 숲을 상징하는 아르테미스의 원형에 속한다면 에보시는 도시와 문명을 상징하는 아테나 여신의 한 원형이라고 보여 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화해점이라고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들여다볼수록 더 큰 골짜기가 존재한다는 현실만을 알게 된다. (우메하라 다케시, 숲의 사상이 인류를 구한다, 청사사,1997)
하지만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은 신도의 숲을 통해서 각자 고유한 영역을 유지하면서 대화를 모색하는 길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길을 찾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갈등, 대립, 그리고 오해와 편견의 숲을 힘들게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함께 이야기 하고 있다.
인간의 행위란 이미 선악의 개념 따위를 넘어서고 있다.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말하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생명력이 얼마나 강하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그래서 미야자키 감독은 모노노케 히메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라.”라고 이야기 한다. -이 말은 옴 진리교 지하철 독극물 살포사건 이후 한동안 일본 사회의 유행어가 되었다. 반면 흥미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안노 히데야키 감독의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1997)에서 “모두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라는 멘트 역시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를 얻으며 널리 사용되었다-
신도의 숲에서 생명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다. 생명을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보고 죽음은 악이며 증오라는 도식조차도 신도의 숲에서는 무의미하다. 죽음은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지고 악이라는 것도 선이라는 것도 현재라는 잠시 속의 개념일 뿐이라고 숲은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미야자키 감독은 그 특유의 신도적 신화의 해석으로 모노노케 히메를 우리들의 시선 앞에 던져놓았다.
결론은 각자의 몫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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