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
어릴 적 외할머니가 들려주시던 한여름밤의 도깨비 이야기는 등골이 오싹하면서도 동심의 세계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좋은 일을 하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 맛있는 음식, 넉넉한 재물로 보답을 받고 그와는 정반대로 악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내용이 이야기의 골자었다.
과학의 발달과 함께 도깨비가 한갖 전설로 남아 있는 지금. 오늘날의 아이들은 슈퍼맨, 로보캅 등 첨단 기계와 컴퓨터로 만들어진 상징물들을 통해 저마다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권선징악을 다루는 내용은 서로가 같지만 후자는 도깨비가 가져다 주는 짜릿한 흥분과 손에 땀을 흥건히 적시는 스릴이 없다.
그만큼 지금의 아이들은 소중해야 할 꿈을 문명의 이기와 물질문명에 의지한 채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첨단 기계와 컴퓨터로 만들어진 상징물들의 영향으로 인해 동심들로 하여금 잔인함과 폭력성을 부지불식간에 키워준다는 우려의 소리마저 낳고 있다.
지난날 할머님이 입담 좋게 해주시던 도깨비 이야기를 듣고도 도무지 믿지 않으려고 한 적이 있었던 나.
도깨비가 기적과 같은 일들을 많이 이뤄놓고,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갖은 조화를 부렸다는 사실을 선뜻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어느 정도든 지금의 시점에서 그 이야기들을 생각해보면 선뜻 짐작이 간다.
추억의 저편에 어렴풋이 깃들어 있는 지난 어린 시절. 도깨비를 한 번만이라도 만나봤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갖고 지냈다. 아니 끝끝내 그러한 소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도깨비를 만나 잘만 보이면 나를 못살게 구는 사람들을 작신 때려 줄 수 있고, 장남감, 구슬 등도 선물로 받아내 골목대장도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먹고 싶어하는 음식도 배불리 먹을 수 있음은 물론, 때에 따라서는 부정한 방법으로 졸부가 된 사람들의 돈을 빼앗아 굶주림에 떨고 있는 이웃들에게 나눠줄 수도 있으리라 다짐하곤 했었다.
이런 꿈같은 일들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 도깨비에게 무슨 부탁을 먼저 할까 생각을 해보았다. 아무튼 도깨비를 만나게 해달라고 꿈속에서도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특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우리 논에서 도깨비와 도깨비불을 보았다는 무장 양반, 도깨비와 씨름을 했다는 영광 양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한편 무서우면서도 마냥 부러웠다.
사실 우리집 주위 환경은 도깨비가 나타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산 밑에 우리집이 있고, 동물의 뼈나 피가 묻어 있는 소각장도 있었으며, 무성한 수풀 가운데 10여 기의 묘가 자리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던 어느 날 메테를링크의파랑새속의 치루치루와 미첼마냥 나도 똑같은 탄성을 하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소망해 마지 않던 도깨비를 매일매일 만나고 있었음을 알았으니까.
그 도깨비는 씨름을 할 경우, 왼발 걸어 하면 도랑을 건너 집에까지 나를 바래다 주었다. 예상대로 이튿날 아침에 나가 보면 마당 한켠에 피가 발라진 수수깡 빚자루가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친구들과 싸우는 도중, 매를 맞고 있을 때에도 어떻게 정보를 알았는지 나타나서 그들을 신나게 때려주었다.
마음속으로 무슨 음식을 먹겠다고 다짐만해도 먹고픈 것은 물론 음료수까지 가져다 주었다.
그러기에 언제나 기쁨이 충만한 상태였고, 남들에게 도깨비와의 만남을 서슴지 않고 해줬다. 그들은 무척이나 나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이치와 도리에 맞지 않는 소원을 부탁하면 도깨비는 험악한 얼굴로 나타나 나의 뒤를 따라다니며 귀찮게 하거나 매질을 해댔다. 차라리 도깨비를 모른다고 하고 픈 적도 비일비재했다.
맞다. 도깨비는 숙제 등 내가 응당할 일은 절대 해주는 법이 없었고, 땅바닥에 넘어졌을 때 일으켜 세워주는 경우도 드물었다.
내유외강(內柔外剛)형의 도깨비는 풍악을 퍽이나 좋아했고 술도 잘 마셨다.
그러면 무엇하리. 벌써 오래전의 이야기가 아닌가.
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도깨비를 보는 횟수가 줄더니만 요즈음은 거의 도깨비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
문득 나의 전부이다 싶었던 도깨비가 이제는 쓸모없다 하여 내가 배은망덕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추해본다.
불철주야 숱한 활약상을 보여주었던 도깨비는 예전처럼 누구와 씨름을 해도 이기지 못한다. 어깨는 축 늘어지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가득하는 등 시간의 흐름속에 신통력을 상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여 소원을 들어주던 혹과 방망이마저도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아울러 논에서 도깨비불도 거의 볼 수 없게 됐다.
이 도깨비는 바로 다름 아닌, 아버지이시다. 아버지는 전설과 같은 일을 수도없이 일궈놓으신 분이시다.
그 흔한 초가집 하나 없는 무일푼 신세인 까닭에 밥그릇 몇 개와 젓가락 몇짝을 갖고 어머니와 살림을 시작하였다.
어느 해 던가, 한가뭄에 1백여 평에 가까운 방죽을 지게 하나로 메운 결과, 골병을 얻게 됐다. 이는 아마도 도깨비감투쯤은 될 것이다.
아버지는 진짜 도깨비가 나타날 법한 천둥치는 날 밤에도 논에 나가 물꼬를 텄다. 외할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이때 아버지가 담배를 피웠는데, 멀리서 보니 영락없는 도깨비불이었다고 한다. 물론 나와 씨름을 해서 일부러 져주고 집에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래서 외할머니가 말씀하셨던 기적같은 일들을 이제서야 겨우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과연 나도 아버지가 가졌던 신통력과 비법들을 전수받아 내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을까.
바로 얼마 전, 아버지를 찾아 뵈었을 때 가슴이 시려왔다. 벽에 대못을 하나 박아 달라는 것이었다. 힘이 딸린다는 것이 그 이유의 전부였다.
그러나출세보다는 인간이 우선이다.,건강해야 자기의 꿈을 펼칠 수 있다. 등 아직도 도깨비같은 주문을 잘도 외우시니 안심이다.
나로 인해 더 이상의 주름이 생기지 않도록 아버지에게 종종 연락을 취하고 시간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찾아 뵈어야지. 이것이 아버지가 그동안 나에게 해주었던 일들에 대한 보답이리라.
고향에 때론 내려가면 어스름한 밤하늘에 논둑길을 벗삼아 거닐면서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외할머니와 도깨비 아버지의 옛 일을 견주면서 거울 속 자화상을 바라본다.
첫댓글 이종근님
원고와 함께
공모전 신청서도 작성해
올려주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