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목사님
나훔 1장 10절 합독하시겠습니다.
(나 1:10) 가시덤불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같이 모두 탈 것이거늘 아멘
원어중심 성경 강의 나훔 17번째 카쉬, 지푸라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한글 성경으로 보면 지금 ‘모두 탈 것이거늘’이라고 이 문장이 끝났잖아요, 이렇게 끝나면 뒤에 말과 이어져야 되죠. 그러니까 10절만 봐서는 끝난 것 같지 않은 마무리가 안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은 그래서 뒤에 구절, 11절과 연결되는 구절처럼 보이죠, 그래서 제가 지금9절, 10절, 11절을 그 박스 안에 넣어놨어요.
9 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10 가시덤불같이 크러졌고 술을 마신것 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 같이 모두 탈것이거늘
11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사람이 너희중에서 나와서사악한것을 권하는도다
우리 말로 보면 ‘모두 탈 것이거늘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 나와서’ 이러면서 이렇게 문장이 연결되어있는 걸로, 한글 성경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죠. 그렇지만 10절의 마지막 단어가 ‘말레’인데, 말레의 왼쪽에 끝에 보면은 다이아몬드 표시 같은 게 2개가 찍혀 있죠, 이게 문장이 끝난다는 뜻이에요.
‘솦파숙’이라고 하는데 소프파숙인데, 빨리 읽으면 솦파숙이 되는 거죠. 발음이 좀 어렵긴 한데, 이게 ‘마침표’예요, 히브리어의 마침표. 9절도 마침표가 찍혀 있어요, 9절도 솦파숙이 찍혀 있어요, 마침표, 10절도 찍혀 있어요, 그리고 11절은 따로 시작하는 거죠, 그러니까 10절과 11절이 연결되는 구절이라고 볼 수가 없죠. 그러니까 우리 한글 성경 번역은 조금 본문으로 보면 좀 어색한 그런 번역이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10절은 ‘키’라는 접속사로 문장이 시작을 해요. ‘왜냐하면 ~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이죠.
그러니까 ‘~이기 때문이다’라는 건 뭐예요? 앞에 것과 연관 있죠, 뒤에 것보다는 앞에 것의 내용에 대해서 이유를 설명해 주는, 그런 내용이잖아요. 그러니까 10절을 다시 한 번 ‘키’를 넣어서 번역을 하면은 ‘왜냐하면 가시덤불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같이 모두 탈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10절은,11절보다는 9절과 더 가깝다라고 봐야겠죠. 9절이나 앞부분을, 그 앞부분부터 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런 내용으로 봐야겠죠. 본문을 보겠습니다.
10 가시덤불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같이 모두 탈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근데 이 구절이 어떻게 보면은 쉬워 보이고, 어떻게 보면은 굉장히 어려워 보이고 그런 구절이에요. 이게 마른 지푸라기같이 타게 되는 자들, 그들을 앞에서 수식한 거잖아요, 묘사한 거잖아요. ‘가시덤불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같이 취했다’. 그거는 일종의 그들을 비유한 거죠. 근데 그들은 결국 지푸라기같이 탈 것이다. 이렇게 내용이 돼 있어요. 근데 신학자들은 이 구절을 굉장히 번역하기 까다로워하는 그런 구절로 생각을 해요. 그래서 성경 버전을 보면은 서로 막 달라요.
제가 조금 소개를 해놨는데, RSV(Revised Standard Version)이죠, 영어 개혁 표준판 성경이에요, 그리고 JB (Jerusalem Bible)이죠, NEB(New English Bible) 요거 영국 거예요. 이런 성경들에서는 “술을 마신 것같이 취한 그들은” 이걸 없애버렸어요, 이 구절을 소개를 안 해요, 아예. 그리고 NRSV(New Revised Version)는 RSV의 계정판이에요. 그래서 신 계정 표준역 성경이 되는데요, 뉴 디바이스드 스탠다드 버전이죠. 이거는 원문을 그대로 집어 넣어서 번역하고 있고요.
쉽게 보려면 쉽게 보고, 어렵게 생각하면 굉장히 어렵고 이런 구절인 것 같아요, 이 구절은. 그렇지만은 이 그들, 그들이라는 대상은 앗수르가 되겠죠. 그리고 그들의 운명은 마른 지푸라기가 불에 타듯이 잘 타겠죠. 그러니까 완전히 타서 소멸될 것이다 하는 거죠.
열왕기하 18장 32절부터 35절까지 합독하시겠습니다.
(왕하 18:32-35) 32a 히스기야가 너희를 설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하여도 히스기야에게 듣지 말라 33민족의 신들 중에 어느 한 신이 그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34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스발와임과 헤나와 아와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 35민족의 모든 신들 중에 누가 그의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예, ‘하셨느니라’ 하는 걸 보니까 전하고 있는 거죠 말을. 그러니까 앗수르 왕의 말을 앗수르 군대 장관 ‘랍사게’가 전하고 있는 거죠. 고대에는 민족들마다 각각 신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를 정복하게 되면은, 자기 신이 다른 신을 이겼다, 이렇게 표현하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랍사게가 하는 말도 너희 신들은 다, 우리를 이길 수 없다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여호와를 신 중의 하나로 부르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게 앗수르가 강성할 때의 이야기죠. 그래서 강성한 자들이 자랑과 교만이 넘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에 와서 겁박을 하고 있는 거죠.
하맛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자주 나와요. 하맛 어귀라는 말이 성경에서 많이 나오잖아요. 그게 이스라엘이 가장 잘 됐을 때, 북쪽 끝 경계를 주로 하맛 어귀라고 한단 말이죠. 다메섹 쪽이에요, 다메섹 쪽에 해당하는데, 그리고 아리밧, 아르밧은 수리아 쪽, 수리아 북부 지역의 요 하맛과 가까운 곳이에요.
그래서 하맛과 아르밧이 성경에 보면 같이 나오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스발와임도 역시 수리아의 성읍이에요. 그리고 앗수르왕이 스발와임과 뒤에 나오는 아와, 아와도 역시 마찬가지고, 이 땅의 거민들을 사마리아 쪽으로, 북이스라엘 쪽으로 이주를 시키는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민족들이 서로 섞이는 그런 일이 있었던 거죠.
헤나는 유브라데 강변 쪽에 성읍이에요. 이게 전부 지금 앗수르가 점령한 곳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라, 그 왕, 거기를 얘기하고 있고, 그 나라의 신들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있는 거죠. 열왕기하 19장에 보면은 이 성읍들의 이름이 그대로 나오면서, 하맛왕이라고 하맛왕, 아르밧왕, 스발와임왕, 헤나, 아와의 왕 이렇게 말하기도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각각이 나라였던 거죠. 그들을 다 자기들이 점령했다, 그렇지만 아무도 자기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나라가 없다라고 말하고 있죠.
이사야 선지자가 앗수르에 대해서 심판의 예언을 한 바가 있죠. 이사야서 10장 12절 합독하시겠습니다.
(사 10:12-15) 12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 13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선을 걷어치웠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처럼 위에 거주한 자들을 낮추었으며 14 내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버린 알을 주음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 15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예, 지금 14절까지는 열왕기하에서 랍사게가 한 말과 비슷한 어조죠, 자기들은 이렇게 자랑을 했단 말이죠.
그렇지만은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어떤 쓰임을 받는 도구다라고 지금 이사야 선지자가 얘기하는 거죠. 근데 지금 그 앗수르가 하는 말, 앗수르가 강대국이고 다른 나라를 점령하고 여러 나라를 복속시키던 제국이었단 말이에요.
근데 그 나라, 나라라는 거는 왕이고, 나라고, 그건 전부 나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나의 자랑, 교만을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드러내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했다는 거에요, 내가.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거, 이게 전부 우리 안의 이야기를 가르쳐주는 그런 말씀이란 말이죠. 그렇지만은 결국은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냐, 도끼를 들고 사용하는 자가 있단 말이에요.
근데 도끼가 내가 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거예요. 톱도 마찬가지고, 막대기도 마찬가지고, 전부 도구라는 말이에요. 역사적으로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치는 회초리의 역할을 했죠, 그래서 이스라엘을 아주 크게 혼을 내요, 그래서 나라를 멸망시키기도 하잖아요, 북이스라엘을.
근데 이게 우리 이야기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앗수르처럼 강성할 때 나 잘났다라고 그런 교만이나 자만심이 가득할 때가 있었잖아요. 인간은 누구나 강성할 때, 힘이 넘칠 때, 능력이 있다라고 스스로 자부할 때, 그때는 교만이 나오는 거예요, 자기도 모르게 자랑이 나오고, 교만이 나오고, 그것들이 넘치는 거예요. 근데 그게 전부, 하나님 앞에서 도구로 사용되는 그러한 일이라는 거예요.
내가 힘이 있어서 뭔가를 이 땅에서 뭔가 능력을 발휘하는 것 같고, 다른 사람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 같이 보이는데, 이 앗수르처럼, 그러한 강대국이고 제국이 되었는데 근데, 그게 알고 보니까 하나님께 도구로 잠시 사용되는 중이죠, 그렇지만 결국은 지푸라기처럼 다 타버리는 그러한 존재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잠시, 인간의 교만이나 자만심 이런 것들은, 잠시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이 땅에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소유하고 가졌을 때, 그리고 나의 능력이 발휘될 때, 하나님 뜻과 관계없이 뜻을 발견하지 못할 때, 그럴 때 나오는 것들이라고 그랬죠. 시편 73장 2절로 3절, 17절로 19절, 합독하시겠습니다.
(시 73:2-3) 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 73:17-19)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이게 의인이, 그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시기하고 질투했던 그런 내용이죠. 그러다가 성소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다라고 하는 거죠.
그들이 어떠한 자들이고, 그들이 어떠한 자리에 있는가, 그러니까 미끄러운 곳에 두셨다는 거예요, 넘어지기 좋은 곳에. 이게 결국은 의인과 악인은 전부 내 안을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나의 그 교만이 나를 실족 할 뻔하게 하다가, 그렇지만 하나님이 성소에 들어가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게 바깥으로 보면 나의 밖으로 보면은, 세상에서 형통한 자들이 많이 보이죠, 이런 구절을 보면은 어떻게 보면 성도에게 고난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는 구절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내가 앗수르처럼 강성할 때, 잘 나갈 때, 그러면 주변에서 사람들이 우러러 봐주죠. 칭찬하고, 높여주고, 그런 대접을 받을 때, 사람들이 그렇게 봐줄 때, 겸손하기가 쉽나요? 어렵죠, 뭔가 우쭐해지고, 나의 능력이 보인단 말이에요.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라고 사람은 생각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당연하게, 내 안에 두 사람이에요, 그렇게 보시면 돼요. 근데 이제 바깥으로 보았을 때 재벌이나, 갑부나, 능력 있는 자들이나, 스타들이나, 이렇게 보면서 부러워할 때가 있단 말이에요. 야 저런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나도 그래 봤으면, 이런 마음을 가질 때가 있는데 이게 성경은 물론 내 안을 이야기해요. 그렇지만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이 있으니까, 근데 이 앗수르처럼 내가 강하고 잘 나갈 때, 이렇게 내 밖에 어떤 사람들 모습도 마찬가지고, 그럴 때 나의 모습은, 강하면 강할수록 겸손하기는 어렵단 말이에요.
그 의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뜻은 절대로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말이에요. 찾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내가 강하면 강할수록, 하나님은 찾기가 어렵고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어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뉴스를 보면 능력자, 가진 자, 이런 자들이 많이 나오고 또 그들의 일이 나오고, 또 그들의 횡포에 대해서도 나오고, 그래서 그걸 보면서 울분을 토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하고, 막 이런단 말이에요. 근데 누군가 남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강성한 모습을 가졌다고 하는 거는, 이거는 앗수르의 예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성도의 교육을 위해서, 잠시 필요해서 도구로 삼았다라고 보시면 되는 거란 말이에요. 의인이 지금 악인을 보면서 그의 형통함을 보면서 부러워했는데, 그게 알고 보니까 미끄러지기 쉬운 곳에 둔 거군요라는 걸, 성소에 들어갈 때 깨닫는단 말이에요. 하나님을 만날 때, 진리를 깨달을 때, 그때 알게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회초리란 말이에요. 이 세상에서 높은 자, 강한 자 이런 자들은 회초리란 말이에요. 회초리, 교육의 재료, 성도를 교육시키기 위한 교육의 재료, 그 회초리가 성도보다 약하면 돼요? 회초리를 쳤는데 회초리가 부러지면은 교육이 되겠냐고요, 절대로 부러지면 안 된단 말이에요. 훨씬 더 강해야 된단 말이죠.
회초리가 이게 부러져 버리면 교육생은 과정을 무시해버리고 뛰쳐나간단 말이죠. 마음껏 쳐도 끄떡이 없어야 교육생한테도 교육이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성도는, 세상의 높음이나 강함을 굳이 질투하고 부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거죠. 그렇지만 결국 이야기는 내 안의 이야기예요. 성경의 악당은 나란 말이에요.
앗수르의 교만한 모습은 내 모습이란 말이죠. 앗수르가 하나님의 권능도 무시할 정도로 교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은 결국은 황폐되고, 전멸되는 거죠. 완전히 멸망한단 말이에요. 십자가 죽음을 죽는단 말이에요. 반드시 죽는 거죠. 정녕 죽으리라, 무트 타무트 하는 거란 말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은혜라는 거예요. 그 은혜가 임해서 앗수르였던 내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되는 거란 말이죠.
본문을 보면요, ‘왜냐하면 가시덤불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같이 모두 탈 것이다’라고 했는데요. 요게 이 문장이 ‘키’로 시작을 하는데 이게 다음에 나오는 게 ‘아드’라는 전치사가 있긴 하지만 바로 4개의 단어가 연달아 나오는데 전부 ‘사메크’라는 글자로 시작을 해요. 제가 표 안에 넣어놨죠.
박스 안에, 각 단어의 맨 오른쪽에 동그라미처럼 돼 있는 글자가 사메크에요, 사메크. 시르, 시르라는 단어 나오고, 사바크, 소베, 사바, 이렇게 네 글자가 연달아 나와요, 특이하게. 그러니까 이게 ‘시르’가 원래는 ‘단지, 항아리, 솥’ 이런 뜻이에요. 근데 여기에 가시덤불이라고 지금 번역이 된 거예요. ‘가시’라는 뜻이 있죠, 가시. 그리고 ‘엉크러졌다’라고 하는 게 ‘사바크’, ‘막 뒤섞였다’라고 하는 거죠. 그리고 술은 ‘소베’ ‘음료, 술’ 그리고 ‘마신다’는 거는 ‘사바’라고 해요. ‘술을 마시다’ 소베나 사바는 같은 글자예요, 명사와 동사의 관계인데 모음이 달라서 발음만 살짝 다르고 자음은 같죠.
자음이 같다는 건, 같은 글자라는 거에요, 옛날에는 모음이 없었으니까. 가시덤불이 사바크 막 섞여 있어요.
가시덤불은 쓸모가 없어서 태워져야 되는 것들이죠. 그게 마구 사바크 엉크러져 있는 거예요. 그리고 엉크러져 있는 거를 지금 사바크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죠. 이 시르라는 말이 우리 말도 비슷하죠, ‘시루’라고 하죠, 시루 비슷하죠 의미가, 솥으로 우리 성경에서는 주로 쓰였어요. 가시로 쓰인 건 많지 않은데
(출 16: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그러니까 출애굽 때 광야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 애굽 땅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애굽이잖아요, 애굽은 율법이란 말이에요, 율법. 율법의 때를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그러한 의미가 있는 거예요. 가마가 시루란 말이에요. 이거는 큰 가마, 도자기 가마라고 하는데, 큰 그런 가마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솥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집집마다 있던 솥에 앉아서 그 고기를 구웠죠. 집집마다 고기 구워 먹은 거는 언제적 얘기하는 거예요? 유월절 이야기하는 거죠, 유월절 양, 유월절 어린 양 먹은 걸 생각하는 거예요.
근데 그걸 육으로, 고기로, 먹었단 말이에요. 그 말씀을 율법으로 받으니까 그게 좋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 말씀 그 율법으로 살고 싶다라고 하는 그런 희망을 지금 드러내고 있는 거죠. 고기는 육체고 율법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저녁에 고기 주고 아침에 떡 준다, 이렇게 말씀하셨죠. 성도는 저녁에 그 고기, 그걸 먹는 때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돼야 된다, 이러면서 하나님이 기브롯 핫다아와를 응답하시는 거죠. ‘기브롯 핫다아와’ ‘탐욕의 무덤’ 고기 달라고 하던 자들을 치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그 어린 양, 양고기를 먹고 싶다. 고기 가마 옆에서 애굽 땅의 그 일을 그리워하는 거는 율법, 율법에 머물겠다라고 하는, 예수 또 죽이겠다라고 하는 거죠. 그걸 드러내는 거고, 하나님은 그거 절대로 안 된다! 라고 하시는 거죠. 그래서 탐욕의 무덤, 기브롯 핫다아와를 장사 지내 주시는 거죠. 우리의 탐심을 죽여서 묻어 주시는 거죠.
(전 7:5-6) 5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6 우매한 자들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라고 해요.
여기서 솥이라는 말이 시르란 말이죠, 근데 시르인데, 가시나무도 시르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해석한다는 게 참 같은 글자 두 글자 놔두고, 이 의미를 알아먹으라고 한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쉽지 않은 일이죠. 첫 번째 시르는 솥이고, 두 번째 시르는 가시나무다. 이렇게 그걸 분별해 냈단 말이에요, 성경 독자들이. 이 전도자가 ‘우매한 자의 웃음소리는 가시나무 타는 소리 같다’라고 하는 거죠. 가시나무 타는 소리가 어떻다는 거예요?
그 내용은 조금 이따 하고, 5절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게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낫다’라고 해요. 이거 굉장히 지혜로운 말이죠, 지혜서예요. 그래서 이런 말을 통해서 어떤 생활의 지혜, 인생의 지혜를 얻을 수가 있겠죠. 지혜로운 사람에게 야단 맞는 게 나아, 그 사람에게 쓴 소리를 듣는 게 하나라도 듣는 게, 우매한 자들이 즐겁게 노래하는 그거 듣는 것보다 백 번 낫지. 당연한 말이에요. 그래서 지혜자, 세상의 지혜자라고 하면은 뭔가 능력 있는 자죠. 그런 사람과 만나기 위해서 식사권을 가지고 막 경매를 해갖고 수십억에 사기도 하고 막 그러잖아요. 그런 일도 있단 말이에요. 지혜자의 말소리를, 한 말씀을 들어보겠다고 인생에 도움이 되는, 그런 일도 한단 말이에요. 그렇지만 성경은 생활 이야기하는 건 아니죠. 구원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지혜로운 사람’ 이거는 ‘하캄 이쉬’라고 해요. ‘하캄’은 ‘지혜로운’이라는 뜻인데, 명사가 ‘호크마’ ‘지혜’ 호크마는 그리스도를 가리키죠, 그리스도, 진리의 말씀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리스도, 진리, 그의 책망을 듣는 거 진리의 책망을 듣는 거 ‘게아라’라고요, ‘꾸짖음, 힐책’ 그게 우매자의 노래보다 낫다.
(시 18:15)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
여호와의 꾸지람, 게아라와 콧김, 요게 ‘네샤마 르와흐 아프’라고 해요. ‘르와흐’가 ‘성령’이고 ‘아프’가 ‘코’잖아요. 코의 성령의 네샤마 호흡, 성령의 호흡인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견책과, 성령의 호흡, 호흡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거죠. 성령을 주시면 우리에게 생명이 들어오고, 그리고 진리를 깨닫게 되는 거죠. 그게 진리의 원천과 세상의 근본이 드러나는 거죠. 물 밑, 물 진리잖아요. 진리의 원천과 세상의 근본, 세상의 터 세상의 근본이란 말이에요.
그게 ‘갈라’ ‘덮개를 벗는다’ 진리가 드러나는 거, 그걸 갈라라고 한단 말이에요. 온전한 진리로 드러났다, 성막을 덮었던 짐승 가죽이 벗겨지는 거, 덮었던 것이 벗겨지는 거, 그러면은 ‘알레데이아’ ‘진리’, 하늘의 진리가 온전하게 우리에게 깨달아지는 거죠. 드러나는 거는 깨달아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리스도, 진리의 말씀을 듣는 게, 이게 우매한 자, 우매한 자는 율법이란 말이에요. 율법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율법의 즐거움 나를 즐겁게 하는 그 소리를 듣는 것보다 ‘토브’, ‘선’이다, 이게 선이다라고 하는 거죠. 우매한 자들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나는 가시나무 같아. 그러니까 우매한자 웃음소리는 율법이잖아요.
율법이 만족한 웃음소리죠. 그것은 시르 밑에서 시르, 솥 밑에서 시르,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아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헛되다라고 하죠, 그러니까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는 헛되다라는 거예요.
왜 헛되다라고 하냐면 가시나무라는 것 자체가 쓸모가 없단 말이에요, 쓸모가 없어서 고작 땔감으로 쓰는데 그거조차도 제대로 타지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소리만 잠깐 요란했다가 금방 꺼져버리니까 땔감으로도 별로 쓸모가 없는 그런 거죠. 예 그래서 전도자가 헛되다라고 하는 거죠.
그리고 본문에 와서요. ‘가시덤블같이 엉클어졌다’라고 하는데 사바크라고 해요. 가시덤불은 그런 의미가 있고요, 시르. 엉크러졌다, 엉크러졌다는 말은 ‘사바크’, ‘섞어 짜다, 뒤섞다’라는 뜻이에요. 엉크러지다 엉크러졌어요, 엉크러진 거는 마구 뒤섞인 거죠. 풀기가 힘든 거예요.
사바크라는 말이 성경에서 딱 두 번 나와요. 그래서 이게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서 다른 구절에 한 번 살펴보면요, 욥기 8장 17절, 그러니까 요기 한 번 나오고, 우리 오늘 본문에 한 번 나오고, 딱 두 번 나오는 구절 단어예요, 사바크가.
(욥 8:17)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서리어서, 전혀 도움이 안 되죠. 이거는 서리어서, 서리다는 거예요, 서리다, 김이 서리다, 수증기가 창에 서린 것처럼 서리는, 이게 뭔가 나타나는 거, 어리어리하게 나타나는 거, 이런 걸 서리다고 하는데 또, 또 다른 의미는 이렇게 동그랗게, 또아리처럼 동그랗게 감기는 거, 이걸 서린다고, 그래서 이게 뭔가 빙빙 둘러가면서 뿌리가 돌 가운데로 들어갔다, 그런 의미인 거예요. 이게 수아 사람 빌닷의 말이에요, 욥의 친구죠. 그 빌닷 말 중에 유명한 그 구절이 하나 있죠.
(욥 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게 우리가 시작은 시작은 레시트잖아요, 베레시트란 말이에요. 성도의 처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도의 처음은 미약하였으나 ‘미츠아르’라고 하는데 ‘미약한, 하찮은’ 이게 ‘차이르’, 차이르가 어린 아이예요. 거기에서 ‘맴’이 앞에 붙은 거예요. 그래서 미츠아르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성도는 태초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었잖아요. 진리가 뭔지 전혀 모르는 상태, 어린 아이의 상태였단 말이에요. 그렇지만은 ‘종말’, ‘아하리트’라고 하는데, 종말은 심히 창대하다라고 해요. 그러니까 이게 커진다라는 건데, 레바논 백향목같이 커진다, 자란다, 장성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장로가 된다, 진리를 아는 자가 된다,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업이 작게 시작했다가 나중에 크게 번창한다, 이런 데 쓰는 그런 구절은 아니고 어쨌든 그 빌닷이 진리를 말하긴 했죠, 진리를 말하긴 했는데,
지금 여기에 나오는 ‘돌 무더기에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하는 이 구절은 진리를 말한다기보다 굉장히 율법적인 말이에요. 뭐냐면은 이 악인의 어떤 운명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뿌리가 좀 안 좋은 땅, 돌무더기의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간다. 굉장히 옥토가 아니라 박토죠, 돌이 많은 땅, 그런 데에서 뿌리가 어떻게 비집고 들어가서 돌 가운데, 이거는 ‘돌의 집’이라고 하는 거예요. ‘베트 에벤’. 그러니까 돌의 집에 들어갔다 해도 결국은 쫓겨난다, 멸망한다, 이런 이야기를 빌닷이 하고 있는 거죠. 율법적인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뭔가 율법적인 정죄를 지금 빌닷이 하고 있는 거예요. 니가 믿음이 없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욥이 망한 일이.
돌의 집이라고 하잖아요, 에벤, 에벤의 집, 에벤은 파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집이니까 진리의 눈으로 보면은 성전이 되는 거예요. 성전에 들어가도 결국은 버림받는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근데 그럴 일은 없죠, 성전에 들어가는 자에게 있어서. 그렇게 엉크러진 것이 사바크고요.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은 ‘술’은 ‘소베’라고 했고요. ‘사바’가 술을 마셔요, ‘술을 마신다’는 거의 의미는 율법에 취하는 걸 술을 마신다고 하죠.
(호 4:18) [그들이 마시기를] 다하고는 이어서 음행하였으며 그들은 부끄러운 일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니까 마시고, 음행하고, 부끄러운 일을 하는데, 이것들이 인간의 어떤 그런 행태 속에서는 뭔가 다른 일로 보이겠지만 진리의 눈으로 보면은, 이게 다 같은 일이라는 거예요. 마시는 거, 술에 취하는 거, 술 마시는 거, 그리고 음행하는 거, 부끄러운 거 이게 전부 같은 일인 거예요. 이게 전부 율법을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들이 마시기를 다하고는 이어서 음행했다’ ‘자나자나’라고해요, 그러니까 ‘자나’가 두 번 반복해서 나와요.
‘간음하고, 매춘하는’ 거, 그러니까 이게 호세아서잖아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는 말이에요. 그리고 그들이 우상을 숭배를 해요, 우상을 숭배하는데 어떤 식으로 하냐면은 술을 마시고 그러고 음행을 해요. 술을 마셔서 취한 다음에 진탕 마시고 나서 음행을 하고, 그리고 우상숭배하는 그런 의식을 행한단 말이에요. 그게 전부 우상숭배의 행태였죠, 그걸 했단 말이에요.
(벧전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음란, 아셀게이아' 이게 '방탕 방종 호색'이라고요. 그리고 정욕, 정욕은 '에피뒤미아, 충동 욕망 갈망'이라고 하고요. 그리고 '술취함, 오이노플뤼기아' 술에 취한 상태, 술취함 그리고 '방탕, 코모스' 이것도 이제 술잔치라고 하죠.
술을 잔뜩 먹는 거예요. 그리고 '향락' 향락은 '포토스'라고 하는데 '주연'이에요. 술 마시는 잔치예요. 그러니까 똑같죠, 술잔치. 코모스나 토포스나. 그리고 '무법한 우상숭배, 에이돌론 라트레이아' 라트레이아가 예배예요. 예배인데, 에이돌론, 우상을 숭배한다라고 하는 거. 근데 이게 전부 같은 일이란 말이에요.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하는 일이 뭐예요? 율법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술 취했다고 하는 거는 율법에 취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술은 계속 율법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율법에 취한다. 새 술에 취해야 되는데 율법에 취하고 있는 거예요. 옛 포도주 신 포도주에 취하고 있는 거죠. 이게 음행이고 방탕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거는 지나간 때로 족하다. '크로노스' 그걸로 족하다라고 해요.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라
술 취하지 말라. '엔, 그 안에' 방탕함이 있다라고 하는 거예요. '아소티아, 방탕'. 방탕이라는 말은 '아'라는 부정 접두어에다가 '소조'라는, 소조가 이제 '구원하다'는 뜻이에요. 소조라는 단어가 합쳐진 거예요. 그게 방탕이에요. 그러니까 방탕은 구원 못 받는 일인 거죠. 그러니까 술 취하는 거 율법에 취하는 거는, 율법에 완전히 함몰되는 거는 구원 못 받는다라고 하는 거예요. 술 취하는 것 자체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율법 이야기하고 있단 말이야. 율법에 취하지 말라, 율법 안에서는 구원 못 받는다, 아소티아. 술 취하는 일에 대해서 살펴봤고요. 본문으로 가서요.
'마른 지푸라기까지 모두 탈 것이거늘'
마른 지푸라기, '카쉬'라고 해요, '그루터기'. '마른다'는 말은 이제 '야베쉬'라고 해요, 마른. 마른 지푸라기까지 모두 탄다라고 하는데 탄다는 말이 '완전히 탄다, 말레'라는 말이 있고요. 그리고' 탄다' 탄다는 말은 '아칼'이에요. 먹는다는 거예요. 다르죠, 느낌이 다르죠. 마른 지푸라기 같이 모두 완전히 탄다. 이게 푸알형으로 쓰였어요, '아칼'이. 푸알형은 수동태 강조형이라고, '반드시 먹힌다'라고. 그건 완전히 느낌이 다르죠. 이사야서 40장 6절부터 합독하시겠습니다.
(사 40:6-8)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라고 해요. '뭐라고 외칩니까'라고 하니까 '모든 육체는 풀이다'라고 해요. '풀, 하치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육체, 육 우리고 그리고 우리 안의 율법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사르, 육'이란 말이에요. 고기란 말이에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그러니까 풀의 아름다움인데 우리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우리의 아름다움. '아름다움'은 '헤세드'예요. 헤세드는 '들의 꽃과 같아'라고 해요. '헤세드'는 '친절 인자 자비 자애'예요.
이거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헤세드 자비, 사랑이란 말이에요, 사랑. 사랑은 들의 꽃과 같아. 들에 꽃이라는 거는 뭐예요? '들, 사대'죠. 사대는 광야예요. 광야와 같은 의미죠, '미드바르'. 그 광야의 '치츠, 꽃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풀, 우리란 말이에요. 우리에게 꽃이 피는 거는 풀 같은 우리 육체에 주님이 꽃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 오셔서 꽃으로 피워주시는 거란 말이에요. 풀에 꽃이 피는 형국을 지금 이제 묘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꽃은 피었다가 져요, 죽는단 말이에요. 꽃이 지면 뭐가 생겨요? 씨가 생기죠, 씨. 씨가 풀에 맺히게 되죠, 풀이니까. 그러니까 우리 육체에 씨가 생긴단 말이에요.
풀은 헛된 것이고 공허한 것이에요. 푸르다고 하는 것 자체가 텅 비어 있다는 의미란 말이에요. 푸른 풀, 그 텅 비어 있는 혼돈이고 공허인 우리 안에 씨, 씨는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시는 거예요. 이게 헤세드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이게 모든 헤세드다. 하나님의 모든 친절이고 인자하고 자비고 사랑이다라고,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인 거죠.
창세기 1장에 보면,
(창 1: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고
(창 1: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그리고 이제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는데, 그게 너희의 먹을거리야 라고 하잖아요. 씨가 있는 거, 씨를 먹을 것이라고 하는 거죠. 진리가 너희의 양식이다라고 하는 거죠.
우리가 씨가 없는 자였는데 씨가 우리 안에 오신단 말이에요. 씨가 우리 안에 오시면 그 씨가 우리를 땅에서부터 이끌어내는 거란 말이에요. '야차, 땅'에서 이끌어내서 진리로 나올 수 있게 해주는 거죠. 애굽에서 출애굽하듯이 나오게 해주고.
풀은 마르고 '야베쉬, 마르고' 꽃이 시드는 것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루아흐'란 말입니다. 루아흐가 분다. 성령, 진리의 말씀. 성령은 진리의 말씀이라고 했잖아요. 진리의 말씀이 그 위에 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덮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수면 위를 운행하시기 때문에, '라하프'. 근데 그 위라고 했는데 그 위가 아니라 여기 '베'라는 전치사가 있어요. 그 안에 분다. 우리 안으로 여호와의 기운,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거다라고 하는 거죠.
(말 4: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아수르고 우리란 말이에요. 우리를 용광로 불 같은 날에 다 탄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모든 교만한 자와 모든 행악자, 그가 지푸라기처럼 다 탄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선악을 판단하면서 하나님처럼 사는 거 이게 교만인 거고 선악을 판단하는 일, 그게 이제 악을 행하는 거죠. 그래서 악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을 깨닫는 자는 자기가 교만한 자고 행악자라는 걸 누구나 알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죄인 맞군요. 그러니까 죄가 뭔지를 알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불타야 될 지푸라기다라는 그런 걸 이제 알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진리라는 거, 이거는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사랑 그걸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 모양 저 모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데, 우리 인생의 모든 거는 그거 알라고 주시는 것들이란 말이에요. 그 사랑 배우라고 그 진리 배우라고 주시는 교육의 재료인 거예요.
근데 우리는 그 교육의 재료 그 안의 내용 배우라고 하는 그 안의 내용을 보는 게 아니라 사실은 교보재에 더 눈길이 가죠. 그래 가지고 교보재가 이게 마음에 드나 안 드나 이걸 볼 때가 많단 말이에요. 그래서 심지어 재료가 좀 많았으면 좋은데 그걸 좀 많이 주시면 하는 그런 원망 불평도 하는 거죠. 그렇지만 이 재료가 성격이 달라서 그렇지 재료는 다 똑같이 충분하게 충만하게 가고 있는 거에요, 각자에게. 전부 말씀으로 주고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것들이 어느 한 사람 부족함 없이 충만하게, 그러니까 그 재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더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재료가 감사인 거죠.
만약에 그 재료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곳으로 나를 끌고 가게 하는 그런 재료라면 그거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상태 그 헤세드가 임하지 않은 상태, 물론 또 나중에 또 따로 보충 수업처럼 특별 수업처럼 또 따로 부어 질 때도 있겠죠. 우리는 아수르니까 강한 듯하고 이 영화가 영원할 것 같은데 어느 날 완전히 하나님의 그 몽둥이에 오히려 거꾸로 터지고 극렬한 풀무불에 완전히 불타는 그런 존재가 되는 거란 말이죠. 그 극렬한 풀무불이 우리에게 임하는 거예요. 성령의 불이란 말이에요. 성령은 말씀이잖아요, 말씀의 불. 말씀이 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탐심을 불태우는 건 진리의 말씀이란 말이죠.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그 이르는 날, 그날이라는 거예요, '하욤'. 그들을 살라 모든 교만한 자 모든 행악자, 이거 전부 내 안에 있는 율법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근데 그게 '레' 전치사가 있어요, 그들을 위해서. '그들을 위해서 사르겠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라고 하는데, 그들을 위해서 사른다. 계속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고 계신 거란 말이에요.
우리를 위해서 이러한 일을 진멸시켜준다라고 하시는 거죠. 그래서 '뿌리와 가지 남기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하죠.
우리 안에 그 근본된 그 율법 완전히 불태워주겠다라고 하시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타아와' 그 '탐심' 다 죽여서 기브롯 핫다아와, 장사 지내주겠다, 라고 하시는 그런 은혜의 말씀인 거죠.
(사 5:24)a 이로 말미암아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 같이,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루터기, 카시' 그 불꽃이 여기 '애쉬' 애쉬가 '불'인데 불의 '혀, 라숀'이라고 하죠. 혀, 불의 혀 사도행전에 나오죠.
(행 2:3-4)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장 2장 3절에 보면,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 '불, 글로사' 혀가 '갈라진다, 디아메리조', 분배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이 각자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디아메리조, 분배되는 거예요. 혀가 막 나눠지는 게 아니라. 육적인 생각을 불태우고 분리하는 그 불같은 '글로사, 말씀'이 성도에게 모두에게 주어진다. 주어지는 그러한 일인 거죠.
(출 15:7)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르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지푸라기 같이 사르니이다
진노가 하나님의 사랑이죠. 계속 우리가 공부했잖아요. 그걸로 우리를 이렇게 완전히 지푸라기같이 불태워주는 거죠. 그게 하나님의 은혜인 거죠. 마른 지푸라기같이 모두 '탄다, 아칼'이란 말이죠. 여호와는 소멸하시는 분이시다라고 하죠. '소멸한다'는 말도 '아칼'이에요. 하나님은 먹는 분이시다. 우리를 먹는다라고 하는 거예요, 먹는 불. 불은 말씀, 성령이고 말씀이죠. 그러니까 말씀으로 우리를 먹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먹는 분이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4장 32절부터 합독하시겠습니다.
(요 4:32-34) 32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 텔레이오오'. 그러니까 나를 보내신 이의 뜻, 뜻은 뭐예요? 항상 하나님 나라잖아요.
새 성전을 이루는 거죠, 십자가에서. 그래서 성도를 죽이는 거란 말이에요. 텔레이오오. 텔레오가 칼라잖아요, 칼라. 지난 시간에 한 거.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테텔레스타이'로 완전히 죽여서 다시 살리는 것 이게 완전히 이루는 완성인 거죠.
그 일을 지금 사마리아 여자에게 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사마리아 여자가 나가서 그 물동이를 버리고 동네에 들어가서, 이제 사람들이 나오죠. 폴리스란 말이에요. 동네에서 나온단 말이에요. 성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라는 성에서 나와서 주님께로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이 성령의 불이 말씀으로 성도를 먹어버리는 그러한 일인 거죠. 이게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일, 곧 주님의 양식인 거죠.
주님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거는 십자가란 말이에요. 십자가에서 죽여서 살리는 거예요, 불과 화염으로 성령의 말씀으로 우리의 그 견고한 성을 불살라버리고 우리를 돌아오게 해 주시는 거죠. 하나님의 성으로, 성전으로 바꿔주시는 거죠. 그게 '아칼, 먹는 양식'이 되는 거죠.
다리를 저는 그 므비보셋이라는 인물이 있죠? 요나단의 아들. 그가 다윗의 상에서 함께 식사를 하잖아요. 함께 식사를 하는 게 뭐예요? 내가 너로 더불어 먹고 너는 나로 더불어 먹고, 그 일이 이루어진 거죠. '다리를 전다'는 말이 '나케'라는 말이에요, 나카. 나케, 이게 나카에서 온 말이란 말이에요. '나카'가 뭐예요 '치다 때리다 죽이다'. 그러니까 반석을 치듯이 때려서, 반석이 죽었죠. 죽고 죽으니까 이제 성령이 오시듯이. 지금 뭐예요? 므비보셋은 맞고 죽고 부활한 자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 왕 주님의 상에서 함께 식사하는 자가 되는 거야. 우리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출애굽기 5장 12절부터 합독
하시겠습니다.
(출 5:12-14) 12 백성이 애굽 온 땅에 흩어져 [곡초 그루터기를] 거두어다가 짚을 대신하니 13 감독들이 그들을 독촉하여 이르되 너희는 짚이 있을 때와 같이 그 날의 일을 그 날에 마치라 하며 14 바로의 감독들이 자기들이 세운 바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을 때리며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에 만드는 벽돌의 수효를 전과 같이 채우지 아니하였느냐 하니라
.
'곡초 그루터기, 카쉬'죠. 백성이 애굽 온 땅에 흩어져서 곡초 그루터기를 걷어다가 짚을 대신해요. '짚'은 '테벤'이라고 하고요. 그러니까 애굽 감독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벽돌 만드는데 짚을 주지 않은 거죠. 짚을 주지 않겠다고 했어요. 감독들이 짚을 주지 않겠다고 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고초가 심해진 거죠. 그런 일로 보여요.
감독이에요. '감독'은 '나가스'라고 해요, 나가스. 나가스의 분사형이죠. 그래서 강제로 시키는 자 그가 감독인 거예요. 그러면 이제 감독은 율법을 이야기하겠죠, 강제로 하니까. 강제로 시키고 억압하는 거니까. 율법이 짚을 주지 않겠다고 하는 거죠.
'너희의 일을 너희는 짚이 있을 때와 같이 그날의 일을 그날에 마치라'. '마아세, 일'이란 말이에요, 너희의 일. 그러니까 지금 마아세 곧 그날의 일을 이게 '다바르 욤'이라고 해요. '날의 말씀'이에요. 다바르가 일도 되지만 말씀의 의미도 있단 말이에요. 날의 말씀인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의 일은 말씀인 거예요. 성도의 일은 날, 날은 빛이 있는 때를 날이라고 하죠. 요 진리를 받은 때 진리를 받은 때의 말씀을 마쳐라, 칼라, 완성해라. '진리를 받았으면은 십자가 죽음 십자가 진리 깨닫고 십자가 죽음 죽어라' 라고 하는 거죠. 진리를 말하고 있는 거예요. 피엘형이에요. 반드시 완성하라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게 지금 하나님이 하시는 명령과 같은 말씀인 거죠. 그래서 감독이 명령하고 있단 말이에요. 이 감독은 바로에게서 받은 거예요. 바로에게서 받은 명령이죠. 바로는 왕이에요. 여기서 왕은 하나님의 의미로 하늘의 왕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그 감독이 재촉했단 말이에요. '우츠, 재촉한다'. 이게 소돔성에서 천사가 롯을 재촉하듯이 끌고 나오듯이 재촉하는 거예요.
'감독들이 짚을 안 준다'라고 했죠, 짚.
(삿 19:19) 우리에게는 나귀들에게 먹일 짚과 여물이 있고, 라고 해요.
'나귀'는 '하모르'. 하모르는 '하마르, 붉다'는 뜻에서 왔죠. 그래서 붉은 빛 짐승이에요. 그러니까 짚이라는 거는 붉은 빛 짐승, 짐승의 먹이에요. 율법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율법을 감독들이 안 주겠다라고 하는. 그러면 이게 꼭 불행한 일이 아니죠. 우리 인생에 어떤 그런 재료들이 줄어들었을 때, 오히려 그게 하나님의 진리가 오고 있는 그런 일일 수가 있단 말이에요. 파님으로 주신 것들, 부모 자식 형제 자매 전토 이런 거 뺏어가실 때, 율법이란 말이에요. 그거 뺏어 갈 때 그 대신에 진리가 오고 있는 걸 수도 있단 말이죠. 근데 이제 우리는 그런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해요? 속상해하는 거죠. 율법의 종노릇하던 이스라엘처럼 괴로워하는 거예요. 원망 불평하는 거죠.
14절에 보면요, 바로의 감독들이 자기들이 세운 바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을 때려요. 기록원들은 이스라엘 사람이에요.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해요, 자손. '기록원들' 여기 '쇼테르'라고 하는데요. 이 쇼테르가 맴을 앞에 붙이면 미쉬타르가 돼요, '미쉬타르, 통치권'이라는, 권능 지배권. 그러니까 쇼테르는 관원, 관리라는 뜻인데, 그러니까 통치권을 가진 이스라엘 자손이란 말이에요.
누구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님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율법이 통치권을 가진 이스라엘 자손, 주님을 때려요, 나카예요. 반석 치듯이 나카, 쳐서 죽이는 거예요. 실제로 애굽에서는 이스라엘이 이런 강제 노역을 했을 거고 이러한 감독도 있고 기록원도 있고 당연히 이런 시스템이 있었겠죠. 그런 일들이 있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성경은 그 일을 들어서 진리를 성도에게 진리를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너희가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의 만드는 벽돌의 수요를 전과 같이 채우지 아니하였느냐' '로 칼라, 완성하지 못했느냐' 그러니까 율법이 성도에게 벽돌 만드는 일, 성전 만드는 일이란 말이에요. 그걸 위해서 뭔가를 요구하고 있는 거예요. 이거 왜 완성하지 않아 왜 이거 못 했어?
성도가 성전으로 지어지는 데 있어서 필요한 거는 뭐예요? 말씀이죠. 진리의 말씀이란 말이에요. 그 말씀은 처음에는 우리에게 율법으로 주어져요. 근데 그 말씀이 주어졌을 때 율법으로 주어졌는데 그 율법은 성도를 처음에는 몰아붙여요. 그래서 율법의 강압에 의해서 뭔가를 해야 되지 않느냐라는 그런 조바심, 강박을 느낀단 말이에요. 뭐도 해야 되고 뭐도 해야 되고. 물론 교회에서 헌금도 내고 십일조도 내고 봉사도 하고 당연하게 이제 뭔가를 해야 한다라고 처음에는 그렇게 배웠잖아요. 근데 그 하라고 하는 것들 그것들을 안 하면 믿음 없다라는 소리도 듣기도 하고 그러면 믿음 없다는 말은 곧 천국 못 간다라는 그런 낙인처럼 들리기도 했단 말이에요. 그런 시절이 있었죠.
물론 그렇지만 이거는 그런 걸로 한정해서 볼 일은 아닌 거예요. 율법의 강압이에요. 율법은 원래 하나님 말씀이란 말이죠. 처음에 율법은 마치 우리의 사고 방식 행동 양식 이런 거에 전반에 걸쳐서 우리에게 뭔가 올바르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에요.
그렇지만은 원래 율법 속에 담긴 내용은 다른 요구하는 뭔가가 있단 말이에요. 뭔가를 하라 안 하라 이러한 관점으로 나를 강제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속에 그 율법 속에는 뭐가 담겨 있어요? 진리가 담겨 있죠. 진리란 말이에요. 그 진리를 율법은 알기를 원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재촉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걸 이제 '율법의 요구'라고 하죠.
(롬 8: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 성도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 행한다는 거는 행동하는 게 아니라 '페리파테오, 간다'는 거예요, 가는 거. 주님 따라 십자가 지고 따라서 가는 거.
'그러한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한다' '율법, 노모스' '요구, 디카이오마' 요구가 아니에요. '규정, 법령, 의로운 행동'이라는 거예요, 디카이오마. 이거는 법이란 말이에요. 법인데 의로운 행동, 그러니까 하나님 뜻 가운데서 행하는 어떤 의로운 행동이라는 거예요.
(롬 5:18) 그런 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의로운 행위, 디카이오마' 그러니까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이거는 '디카이오시스'예요. 이게 '칭의'예요, 칭의. 의롭지 않은데 의로운 거 없는데 의롭다 해 주시는 거, 그걸 칭의라고 하죠, 디카이오시스. 그러니까 우리는 전혀 외롭지 못한데 디카이오시스, 의롭다 하심을 받아서 생명에 이르게 되는 한 의로운 행위, 디카이오마예요.
그러니까 이거 뭐예요? 이게 뭘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린 전혀 죄와 허물로 죽은 자인데 근데 디카이오시스를 주는 거예요. 근데 그럼으로써 생명에 이르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 주시는 한 의로운 행위는 십자가, 십자가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디카이오마는 십자가,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말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디카이오마가 성경에서 규례라고도 하고 예법이라고도 해요. 그리고 70인 역에서는 히브리어 '호크' 미시파트의 역어로 써요. '호크, 규정, 법령, 관습, 의무' 법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미시파트' 역시 '심판, 재판'. 근데 심판은 가르침이라고 했죠. 그 샤파트가, 샤파트에서 온다는데 샤파트가 재판하다 다스리다 통치하다. 샤파트 앞에 맴이 붙은 게 이제 '미시파트, 심판'으로 우리가 흔히 아는 단어죠. 근데 맴이 붙었단 말이에요. 맴은 말씀이잖아요. 진리잖아요. 그러니까 말씀 진리로 다스리고 통치하는 게 미시파트 심판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호크, '호크'는 주로 '법, 귤례, 율례' 이렇게 그런 의미로 쓰여요. 이게 전부 뭐예요? 구약에서 이렇게 쓰이는데 구약에서 법 규례 율례 이러면 전부 율법이죠. 예 심판도 마찬가지고, 미슈파트도 마찬가지고. 근데 이것들이 뭘 가르쳐주는 거라는 거예요. 요게 디카이오마를 가르쳐주는 거라는 거죠. 호크와 미시파트의 역어로 쓰였잖아요. 디카이오마, 십자가 가르쳐주는 거란 말이에요.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게 되는 한 '의로운 행위, 디카이오마' 그 십자가 가르쳐주는 게 법이고 규례고 율례고 모든 율법이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의 요구는 이거란 말이에요.
바로의 감독들이 그 율법들이 자기들이 세운 바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을 때려요. 주님을 때려서 죽여요. 그러면서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의 만드는 벽돌의 수요를 전과 같이 채우지 아니하였느냐. '벽돌의 수효, 호크 라반' 호크란 말이에요. '디카이오마' .그리고 레라반이라고 해요. '라반'이 '희다, 벽돌을 만들다'예요. 그러니까 벽돌을 만들기 위한 호크, 법을 이야기한 거예요. 이걸 벽돌의 수요라고 번역을 한 거죠. 그러니까 벽돌의 수효는 벽돌을 만들기 위한 법이란 말이에요.
근데 그 법이 뭐라는 거예요? 아까. 십자가라고 했잖아요, 십자가의 진리. 그걸로 완성해라. 왜 완성되지 않아? 라고 이제 감독이 말하고 있는 거죠. 근데 라반에 벽돌 말고 다른 뜻이 있죠? 희다 하얗게 된다라고 하는 거죠. 희다, 의란 말이에요. 의의 법이라는 말이에요. 그게 십자가다라고, 그게 성전 만드는 거예요.
성전 만드는 게 이 벽돌의 수효, 요걸로 성전 만들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십자가의 의로 그걸 만든다라고 하는 거죠. 성전을 하얗게 되기 위한 의롭게 되기 위한 그 십자가, 그거 왜 채우지 못해, 왜 칼라 하지 못해라고 하는 거예요. 왜 완성하지 못해, 완성해야지, 테텔레스 타이 해야지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나카란 말이에요. 그 기록원이 나카하는 거예요. 주님이 먼저 맞아 죽으시는 거예요. 반석이 쪼개지는 거예요.
이렇게 죽는 게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서 생명에 이르게 되는 한 의로운 행위, 디카이오마였던 거죠. 그게 어제와 오늘 왜 못 만들었냐가 아니라 이게 '어제와 오늘' 이거는 '테몰 쉴숌'이란 말이에요. 테몰 실슘, 어제와 오늘이 아니라 '사흘 길로 하늘의 뜻을 이루는 그 셋으로 이루어라' 라고 하는 거죠.
근데 우리는 못하죠. 그 명령 내리신 하나님이 다 이루신다라고 하는 거죠. 이게 백성이 애굽 온 땅에 흩어져 곡초 구루터기를 걷어다가 짚을 대신하는 일이었던 거죠. 짚은 하모르, 그 붉은 빛 짐승의 양식, 율법이었단 말이에요. 그걸 바꿔주겠다라고 하는거죠. 그루터기, 바꾸는 거니까, '라반', 그 의의 흰 성전 짓는 이야기하는 거죠. 그 성전을 짓기 위해서 바꾸는 거니까 진리로 바꿔주겠다라고 하는 거예요.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그렇게 되게 지금 우리를 말씀으로 먹여주고 계신 거고, 그렇게 하고 계시기 때문에, 9절에서 나훔 9절에서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 거라는 거란 말이죠. 영 단번에 십자가로 서서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진리의 말씀을 서로 더불어 먹게 된다라고 하시는 거죠.
그렇게 우리를 불태워 주시고 진멸해 주시는데 그게 먹어주시는 거고 그게 내가 너로 더불어 먹고 네가 나와 더불어 먹는 그 영혼의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교제하는 일이라는 거죠. 하나님이 이렇게 계속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부으시고 계시고 우리는 면목 없이 그 은혜 받는 자로 나가는 거죠. 그 은혜 깨닫고 감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모든 그 진리의 말씀을 양식으로 주시기 위해서 영 단번에 십자가 죽음으로 죽어주시고 우리에게 그 진리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그 모든 파님, 그것들을 둘로 보던 우리의 두 마음, 탐심을 모두 불태워주시고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하나님 찬송할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