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달과 뉴욕
김문석
나는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명동 신세계백화점의 신관 10층 문화홀이 비춰졌다. 무대 아래 400석의 자리는 만석이었다. 오프닝 멘트는 여러 번 수정된다.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남자 아이돌 DJ가 멘트를 할 때마다 객석에서 환호성이 이어진다. 피디는 손을 들어 여러 번 수신호를 했다. 천천히. 혹은 빨리. 우리는 지금 오후의FM공개방송을… 음악이 깔린다. 빅뱅, 거짓말. DJ가 마이크 오프 버튼을 누른다. DJ가 오른손을 들어 허공에서 크게 원을 그린다. 원. 동그라미. 얼굴. 나는 누군가의 얼굴을 생각한다. 탐스러운 긴 머리. 유화원. 객석에 그녀가 끼어있다. “원래 네 꿈이 DJ가 아니었니?” 방송이 끝난 후, 나는 누군가로부터 그런 말을 듣는다. “먹고 살려고 이것저것 덤비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 화면이 바뀐다. 나는 문을 닫는다. 다시 문을 연다. 6호선 이태원 역. 밤거리는 불야성이다. 지하철 출구 밖으로 나오자 바지 뒷주머니에 길게 손수건을 내려뜨린 남자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거리에서는 여기저기 폭죽이 터지고, 남자들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고, 여장남자들이 거리로 나와 호객행위를 한다. 누군가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든다. 음악들.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이 골목 어딘가로 스며든다. 남자들의 행렬이 음악소리에 묻힌다. 거리 위의 사람들이 오버랩 되는 영상에 묻힌다. 나는 거리로 추방된다. 그들의 행렬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공무도하. 공무도하. 공경도하. 공경도하. 타하이사. 타하이사. 당내공하. 당내공하. 눈앞에 강이 그려진다. 키스를 하는 남자들 사이에서 누군가 내가 중얼거리는 말들을 따라 외친다. 건물이 사라지고, 자동차들이 나타나고, 사람들의 행렬이 사라진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길게 이어지다 내 눈 앞에서 멎는다. 눈을 질끈 감는다. 다시 눈을 뜬다. 누군가 호명하는 이름들. 그것은 아주 오래전에 목도했던 기억 속의 장소였다. 어둠 속에서 화원이 말한다. “누군가 그리웠어. 제일 먼저 네 생각이 나더라. 전화라도 하려다 그만뒀어.” 그녀는 쓸쓸히 웃었다. 카페 실내에선 주앙 질베르토가 부르는 ‘데사피나도’가 막 끝나고 아스트러드 질베르토의 ‘카니발의 아침’이 흐르고 있다. 서운했다. 화원. ‘카니발의 아침’이 끝나갈 즈음에 우리는 카페 밖으로 나왔다. 강남 역 사거리. 거리는 젊은 사람들의 발길이 가득하다. 분주한 발길들. 나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다. 소풍가는 꼬마아이처럼 휘파람을 불어본다. “어디로 갈까?” 내 물음에 그녀는 손을 들어 내 앞섶을 쓰다듬었다. “발길 닿는 대로.” “네가 무슨 크눌프라도 되니?” 나는 대답 대신에 랭보의 ‘나의 방랑생활’이란 시를 읊었다.
흰 종이에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친다. 눈, 코, 입을 붙이고 긴 머리칼을 그려 놓는다. 여자. 여자가 웃는다. 종이 안의 여자가 눈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한다.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을 받아 적는다. 전남 장흥. 예년보다 24일 빠른. 제비 떼. 조간신문. 엽서 한 장. 소인은 도쿄, 니혼코쿠. ‘공경도하(公竟渡河)’. 전화벨이 울린다. 그해 봄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스마트폰 전화벨이 잠시 멎었다가 더욱 큰 소리로 울려 퍼진다. 나는 깊은 바다의 고래가 되어 잠을 자고 있다. 전화벨이 나를 침범한다. 눈이 아려온다. 눈을 뜬다. 기억… 속의 얼굴이 나를 찾아왔다. 기억은 항상 불친절하게 찾아왔다가 사라진다. 그 기분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어떤 날은 오래된 책을 읽다가 맞게 되는 사진 같기도 하고, 어쩌면 쉽게 잊히지 않는 도장 자국처럼 선명한 핏자국이 되기도 한다. 원고를 쓰고 있었다. 어젯밤. 노트북을 켜 놓고 늦게까지 써지지 않는 원고 때문에 스마트폰의 라디오 애플리케이션을 켜 놓았다. 빌리 할리데이가 음울한 얼굴로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고, 낯선 이국의 대화들이 유령처럼 찾아오기도 했다. 오프닝 멘트로 이런 말을 적는다. ‘당신이 달과 뉴욕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좋을지 모를 때는 어떤 것을 하는 게 좋을까요?’ 뉴욕, 눈앞에서는 자유의 여신상이 우뚝 세워진다. 그리고 애플. 토와 테이의 노래 ; 시이나 링고가 부르는 ‘애플’이 꿈과 밤의 사이를 오간다. 아흐레데루, 나미다, 쿠주레다스, 오모이, 유메노나카, 미에타, 민나노하지마리, Apple Tree…. 꿈속에서 언뜻 언뜻 전자음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때 나는 잠의 한가운데 있었다. 자고 있는 동안 마치 물속에 떠있는 기분이 들었다. 눈을 떴다가 다시 감고, 베개로 머리를 감싸며, 몸을 움츠렸다. 벨은 계속 울려 댔다. 베개로 머리를 감싸고 있다가 결국 거칠게 전화를 받았다. 스마트폰 너머의 인물은 다름 아닌 화원이었다. “아직도 한밤중?” 나는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시간을 물었다. 그녀는 정오가 막 지났다고 대답했다. “오늘방송나갈원고때문에늦게잠들었거든… 아… 귀찮아.” 그녀는 전업 방송작가라도 되면 얼굴 보기 힘들겠군, 하며 말했다. “오늘 무슨 요일이야?” 내 물음에 화원은 건조하게 내뱉었다. “토요일, 약속 잊었어?” 약, 속. 입엣 말로 따라하다가 그녀가 보내온 엽서를 떠올렸다. “오늘 방송국에 원고 넘기고 심의만 받으면 될 거야. 녹음은 하루 젖히면 되고.” 화원의 말대로 카페 ‘발코니’는 지하철 2호선 역삼역 근처의 삼성건설건물 맞은편에 위치해 있었다.
질문들. 마실까 말까. 술잔 속에 달이 뜬다. 술잔의 달을 마신다. 내 몸이 달이 될까. 차가워진다. 누군가 이야기를 한다. 고독의 의미는? 너의 코드 주파수 범위로 들어온 것이겠지. 나는 벌거벗은 여자의 등에 손 글씨를 쓴다. 좋은 사람 만나야지. 그녀가 나의 페니스를 감싸 쥐다가 손을 들어 내 가슴에 뭔가를 써 내려간다. 내.가.좋.은.사.람.이.되.지.못.해.서.좋.은.사.람.을.못.만.날.것.같.아. 손목시계의 시간이 멈춘다. 추억이 정지된다. 눈을 천천히 감는다. 타로 카드를 손에 든 검은 벨벳 드레스의 여인. 드레스 끝자락이 한없이 길게 이어진다. 여인이 옷자락 위에 카드 한 장을 올려놓는다. Death. 긴 갈고리 창을 든 죽음의 신이 나를 보며 웃고 있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뜬다. 여인이 내 이름을 호명한다. 여인의 눈동자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그려진다. 화원? 그녀가 이야기한다. 여기는 도시의 가장 낮은 곳이라고 생각해. 나는 천천히 그녀의 안으로 내 몸을 밀어 넣는다. 버티는 게 아니고 견디는 것, 아마도 사는 이유가 아닐까. 여인의 웃음소리가 나를 침범한다. 여인이 손에 든 카드를 치맛자락 위에 올려놓는다. 카드들이 낙화처럼 화르르, 흩날린다. 바지 뒷자락에 손수건을 길게 늘어트린 남자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남자들의 웃음소리가 몽롱하게 들려온다. 트럼프 카드 병정들이 그들을 좇는다. 흰 토끼들이 뛰어가고, 머리에 붉은 리본을 단 핑크 드레스의 소녀가 달려가고, 바람을 따라 트럼프 카드들이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강이 나타나고, 바람이 강을 건너고, 강 끝에는 달이 가라앉고 있다. 물이 차가워지고, 누군가 부르는 노랫소리와 현악기 소리가 들려온다. 여인의 눈동자에서 빠져나오자 나는 바람이 된다. 나는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끌어 모아 강을 건너고, 산을 지나, 도시로 향한다. 아스팔트 위로 높은 건물들이 세워지고, 건물 사이로 길이 등장하고, 자동차들이 그 길을 지나고, 나는 그 길을 걷는다. 웰컴투더판타스틱월드. 간판. 거리에서 호객하는 여장남자들이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틀어 놓고, 드랙쇼를 한다.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이 발길을 멈춘다. 박수소리. 내가 호명하는 모든 것들은 새롭게 거리로 나타난다.
화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봄볕 아래 빌딩들을 희뜩 올려다보며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불을 붙였다. 후우, 담배연기 사이로 보이는 거리 위로 흰 토끼들이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다. 머리에 붉은 리본을 달고 핑크빛 드레스를 입은 여자아이가 토끼들을 쫓아 달려가고, 트럼프 카드 병정들이 여자아이를 따라가고, 바지 뒷주머니에 길게 손수건을 늘어뜨린 남자들이 병정들을 쫒는다. 넘친다. 기억. 불빛. 사라지는 꿈. 기억들. 주크박스. 바람. 지워진다. 애플. 계속. 계속. 고독. 호시노. 별. 손풍금소리. 기러기. You Must Know. 애플. 애플. 애플. 애플. 넘친다. 눈물. 무너져 나온다. 생각. 꿈속. 보였다. 모두의 시작. Apple Tree…. 모두 사라진다. 페이드아웃. “기억나니? 네가 이 시가 있는 시집을 선물 해줬잖아. 카세트테이프에 노래를 녹음한 것과 같이 말야.”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일까?” “우리 1학년 과엠티 때, 네가 그 노래를 불러줬잖아. 글렌 메데이로스던가. 존 레넌이던가. 엘비스 프레슬리였던가. 아니 보이즈 투 맨?” 그걸 기억하고 있다니. 그 봄, 그녀는 내게 누가 부른 노래냐고 물었다. 이름들. 그 많은 이름들 속에서 내가 불렀던 노래의 가수를 떠올린다. “그냥 주면 어색할 것 같아서 시집을 샀지.” 화원과 나는 그 노래들을 이야기하며 지하도로 내려갔다. 사람들 사이에서 멀미가 날 정도였다. 교통카드를 개찰기에 댄다. 피익~, 환승입니다. 플랫폼으로 발길을 옮긴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그녀가 물었다. “방랑을 시작하는 거야.” “방랑?”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화원의 얼굴.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그녀는 아이처럼 웃었다. 우리는 난생 처음 맞선이라도 보는 사람처럼 유리창에 비친 서로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나와 그녀의 시선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해 있다는 것. 그제야 우리가 타인이라는 걸 알게 됐다. 동호대교를 지날 무렵이었을까. 그녀는 한강을 내려다보며 내 어깨로 살포시 기대어왔다. 나는 화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젖는다. 기억. 넘친다. 보일까. 바다. 제비. 태생지. 갈매기. 뱃고동 소리. 제비. 제비. 제비. 그녀는 제비가 되어 어딘가로 날아오른다. 옥수역을 지나고, 금호역을 거쳐 약수역을 지나, 종각역으로 가기 위해 종로 3가에 내릴 때까지 그녀는 그렇게 내게 기댄다. 지하도 밖은 어둠이 시작되고 있었다. 종로 타워가 불을 밝히자 세상은 또 다른 이미지로 변한다. 화원이 고개를 들었다. 화장이 얼룩져 있다. 거리 위로 네온불빛들의 건물들이 꽂히기 시작하고,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춤을 추듯 미끄러져 간다. 나는 그 불빛에 미끄러지다가 문 워킹을 한다. 가부키 배우들이 등장한다. 온나가타가 껑충껑충 파고다 공원 쪽으로 뛰어가고, 긴 검을 든 니방메가 뛰어가고, 산방메가 그들을 쫓는다. 홍등을 손에 든 두 번째 온나가타가 그 뒤를 따라 걸어간다. 그 풍경은 미장센으로 남겨둔다. 모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어두운 술집들의 거리. 누군가 보드카를 병째로 마시며 춤을 춘다. 샤미센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눈을 감고 그 노래를 듣기 위해 귀를 쓰다듬는다. 감은 눈 사이로, 조악한 화면의 영상들이 스쳐간다. 모래 바람. 생각. 알아? 이찌방. 이서방. 코도크. 또는 고도크. 그 위로 전차가 지나가고, 누군가 플랫폼에서 떨어진다. 사람들의 비명들. 핏빛으로 물들 철로. 누군가 그렇게 사라져간다. “그 꼴로 다닐래?” 화원은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고 온다는 말을 하고 다시 지하도로 내려간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여러 개비의 담배를 태운다. 담배 연기 사이로 보이는 종로 타워는 먼 도시의 이정표처럼 낯설었다. 내 앞에는 그녀가 남기고 간 커다란 보스턴백이 유실물처럼 남겨진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보자. 화원은 왜 나에게 ‘공경도하(公竟渡河)’란 글을 적은 엽서를 보냈을까.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는 고조선 때에 진졸(津卒)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麗玉)이 지었다고 전하는 노래라고 전한다. 사실, 그녀가 누군가를 좋아했다는 걸 짐작했던 적이 있다. 그가 누가 됐든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화원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중국 진(晋)나라 때 최표(崔豹)가 명물(名物)을 고증해 엮은 책인 <고금주(古今注)>에 기재된 관련설화를 살펴보면 그 까닭을 짐작할 따름이었다. 어느 날 곽리자고가 강가에서 백수광부(白首狂夫)의 뒤를 따라 물에 빠져 죽은 어느 여인의 슬픈 모습을 보았다.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아내인 여옥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고, 여옥은 그 여인의 슬픔을 표현한 노래를 지어 공후에 맞추어 불렀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공경도하. 그녀는 지금 인생의 어느 부분. 그 강을 건너고 있는 중이었다. 강 너머에서 누군가 손을 흔든다. 나는 손을 들어 그 사람을 따라 흔든다. 그 사람은 물속으로 향하고 있다. 나는 그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은 내가 되기도 한다. 눈을 감는다. 누군가 흥얼거리는 노래가 꿈결처럼 나를 감싼다. 몸이 차가워진다. 공후를 켜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니 샤미센이던가. 눈을 뜬다. 화려한 기모노를 입은 납처럼 허연 얼굴의 여인네들이 춤을 추듯 걸어간다. 기모노의 허리 부분을 감싼 오다가 온통 붉다. 달그락, 달그락. 게다, 왜나막신을 신고 걸어가는 이의 발걸음 소리가 어두운 저녁거리를 울리고 있다. 빛이 스친다. 눈을 뜬다. 화원, 그녀가 나를 보며 웃었다. 화원은 창밖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뭔가 읽고 있는 듯했다. 아이보리 빛의 트렌치 코트 안에 검정색 블라우스를 입고 아이보리 빛의 구겨진 면바지를 입은, 그 차림새로 금세 그녀인 걸 알 수 있었다. 카페 ‘발코니’. 실내에서는 아이유가 부르는 ‘금요일에 만나요’가 나지막한 톤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화원은 뭔가 보고 있었다. 책? “뭘 읽고 있어?” 그녀는 고개를 들어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책표지를 내보였다. ‘기러기’ 모리 오가이. 표지에는 기모노를 입은 낯선 여인이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웬 책이야?” 나는 물었다. 평소에 그녀는 소설책을 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냥, 첫사랑이 생각나서.” 나는 첫사랑과 이 책의 관련이 있냐고 물었다. “그 사람이 좋아하던 책이야.” “대체 첫사랑이 언제인데 첫사랑 타령?” 화원은 중학교 때, 대꾸하며 책을 덮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 대신에 재킷 주머니에서 쿠바나 담배를 꺼내 피워 물었다. 나는 그제야 그녀가 들고 다녔을 갈색 보스턴백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여행은 즐거웠어?”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며 유리컵의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그 사람하고 다녀왔니?” 그녀는 고개를 들어 모로 저었다. 도시는 지하철로 연결된다. 야마노테 선. 도쿄, 유락쵸, 신바시, 하마마츠쵸, 타마치, 시나가와, 오오사키, 고탄다, 메구로, 에비스…. 화원은 야마노테 선의 역들을 이야기한다. 에비스역. 1번 출구. 서쪽. 어업의 신(神) 에비스 동상. 광장. 스카이 워크. 에비스 가든플레이스. 삿뽀로 비어스테이션. 맥주박물관… 화장을 진하게 한 교복차림의 여고생들이 화르르, 스쳐간다. 골목이 꺾이고, 골목이 이어지고, 여고생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이고, 어둠이 뒤엉킨다. 타임리프. 겁의 시간을 지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신사가 나오고, 거리 위로 라이터가 떨어지고, 거리가 불타고, 시간이 뒤섞인다. 담배연기 너머로 작은 이자카야 간판이 보인다. 메뉴와… 삐루 또 카츠돈, 고레다케.
모르페우스가 찾아온다. 나의 꿈속이다. 나는 도시에서 추방된다. 도시를 떠나면 나는 또 다른 도시를 부른다. 모르페우스는 날개를 접고, 나로 변신해 모터사이클을 타고 그 도시를 질주한다. 알록달록한 네온불빛들. 캔디향의 담배 연기. 누군가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나는 그 노래를 경청한다. 나는 모르페우스가 전하는 이야기들을 꿈으로 꾸고, 그 꿈들은 기상과 동시에 사라진다. 뷰티벌. 뷰티벌. 뷰티벌. 뷰티벌. 뷰티벌. 뷰티벌데이. 기억은 초현실적인 그림처럼 형상화된다. 잊혀 진다. 기억. 형태학. 모르핀. 모폴로지. 수면. 모르페우스가 다녀간 날이면, 나는 잊힌 기억들을 좇는다. 잠을 쫓는다. 사랑을 좇는다. 추억을 좇는다. 시간을 좇는다. 당신이 이야기하는 모든 것들을,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것까지 욕망한다. 지도 위의 국경은 무너진다. 내가 국경을 넘자 모든 것들은 해체된다. 내 기억들은 유효기간을 지닌 채 어느 순간에 일방적으로 소멸된다. 뉴욕을 부르자 자유의 여신상이 등장했고, 서울을 부르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아스팔트 위로 솟아올랐으며, 파리를 호명하자 에펠탑이 하늘에 내려와 꿈의 지면 위에 박혀든다. 이곳은 이상한 나라인가. 엘리스를 찾는다. 토끼를 쫓는 그녀의 모습은 꿈의 끝자락에서 발견된다. 도쿄를 부른다. 그곳에서도 탑이 존재한다. 도쿄타워가 등장한다. 매일아침 업데이트 되는 모바일 뉴스처럼 클릭하지 않은 기억들은 소멸된다. 시간의 유효성. 현대에선 시간의 유효기간이 짧아진다. 근대의 유효기간은 기차시간에서 비롯된다. 내 의식 속에서 기차가 지나고, 전차가 스쳐가고, 한 쌍의 나무패를 맞대어 치며 시간을 알리는 야경꾼의 뒷모습이 음각으로 새겨진다. 의식은 한없이 되풀이된다. 마치 어린 시절에 불렀던 돌림노래처럼 매일 밤 반복되는 꿈은 타인의 꿈을 도둑질하는 모르페우스의 짓일 것이다. 판타스틱월드. 꿈은 왜곡될수록 더욱 더 선명한 자국을 남기다가 소멸된다. 우리는 그 소멸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한다. 당신이 읽고 있는 이 텍스트의 유효기간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전한다.
시간의 이미지 : 그것은 하나의 징조로 변주된다. 화원은 모리 오가이가 쓴 소설 ‘타카세부네’를 이야기한다. 소설의 결은 봄날에 꾼 꿈처럼 몽롱하다. 토쿠카와 이에야스 시절의 가난한 형제에 관한 이야기다. 오사카로 향하는 카모 강. 폐병에 걸린 동생이 자살하려던 걸 도왔다는 이유로 낯선 섬으로 유배를 떠나는 30세 남자와 그를 호송하는 호송관이 나룻배를 타고 가며 나누는 이야기란다. “그 소설이 왜 좋은데?” 유배. 유배. 유배. 유배. 시간이 유배된다. 모든 것이 정지된다. 내가 그것의 버튼을 눌러야 다시 재생된다. 시간이 재생되자 그녀가 이야기를 한다. “마치, 누군가를 떠나는 내 모습같이 느껴져서.” 나룻배. 교토. 죄인. 유배. 타카세부네. 살인죄. 섬. 청년. 외투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들어 화원은 눈가를 닦는다. 손수건이 젖어든다. 인생은 어쩌면 순환 지하철 같이 맴돌고 있지만,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어느 순간에 그것은 공허함이 된다. 어차피 인생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에 죽음을 맞게 되는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을 꺼내 들어 화원이 이야기한 소설을 떠올리며 지하철역들을 웅얼거려본다. 시부야, 하라주쿠, 요요기, 신주쿠, 신오오쿠보, 타카다 노바바, 메지로, 이케부쿠로, 오오츠카, 스가모, 코마고메, 타바타, 니시닛뽀리, 닛뽀리, 우구이스다니, 우에노, 오카치마치, 아키하바라, 칸다… 다시 도쿄. 우리나라 서울의 2호선과 같은 순환선이다. 도쿄 역을 기준으로 도쿄~신주쿠 방면은 우치마와리, 도쿄 역에서 시나가와 방면은 소토마와리, 라고 일컫는다. 지난 가을. 그녀와 오랜만에 마주치게 됐다. 방송 때문에 늦은 점심을 먹으러 담당 피디와 나섰는데 우연하게 들어간 방송국 인근의 중국음식점에서였다. 처음에는 그녀가 아닐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녀는 삼십대 후반에서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다가 눈에 들어온 여자가 낯이 익었다. 나는 담당피디와 점심으로 짜장면을 주문했다. 언뜻 그녀를 보았을 때, 낯이 익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얘기를 하면서 화들짝 놀랄 정도로 크게 웃는 웃음소리 때문에 더욱 자세히 쳐다보게 됐다. 대학동기인 유화원이었다. 함께 있던 남자는 그녀가 손으로 제스처를 취하며 말하는 사이사이에 해바라기처럼 환하게 웃어보였다. 자세히 본 것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잘 생긴 남자였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다가 나는 먼저 알은 체를 했으나 그녀는 가벼운 눈인사를 하고 그 남자와 순식간에 사라져 갔다. 김 피디가 아는 사람이에요? 하고 물었을 때, 사람을 잘못 본 것 같다는 투로 응수했다. 빨간 에이프런을 걸친 남자가 커피를 놓자 화원의 옆에 있던 남자는 안개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커피 안 마셔?” 그녀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창밖, 연초록빛으로 변해가는 플라타너스가 길게 이어진다. 그 풍경 속으로 다정한 연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손을 맞잡고 걸어가고 있다. 어딘가로. “뭘 보고 있어?” 화원은 나를 따라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보기, 좋지.” 그녀는 다시 내 얼굴을 쳐다보며 묻는다. “뭐가?” “저기, 두 사람.” “어디.” “손을 잡고 걷는 연인 말야.” 그녀는 내가 맨 처음 바라봤던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다. 그녀는 오른손에서 검지를 펴서 그들을 가리키며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부럽니?” “…….” “눈 빠지겠다.” 화원이 웃었다. “그냥 보기 좋아서. 우리도 저런 시절이 있었을까?” “어떤 때.” “대학에 들어 간 스무 살 때.” “스무 살?” 그래,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그게 언제였는지 기억은 흐릿하지만, 그 시절은 저렇게 행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군대에 갔고, 너를 잊었지. 아니 잊어야만 했어. 너는 이미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나는, 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도, 같다. 널 다시 만나고서 아련한 그 시절의 기억을 추억이라 생각하며 살았지.
내가 화원의 연인이었던 남자에 대해 들었던 것은 달이 뜬 어느 추운 겨울밤이었다. 일주일 째 이어지는 눈 소식에 라디오 토크에서의 가장 많이 이야기된 소재는 눈이었다. 5층 자료실에서 1층 라디오 스테이션으로 발길을 옮기는 동안, 오늘 쓸 원고 안의 콩트 코너를 생각한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건물 밖 흡연구역까지 이동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백지처럼 하얬다. 누군가 나를 부른다. 방송국의 라디오 국에서 안면이 있는 작가였다. 라디오 채널의 로고가 그려진 포스트잇 한 장을 건네준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원, 오후 7시 영등포 역, 카스타운. 장소는 영등포 역 롯데백화점 맞은 편, 시장 안에 있는 호프집이었다. 일을 마치고 여의도에서 택시를 타고 곧장 영등포역으로 향했다. 술집은 시장 초입에 있었다. “그 사람, 죽은 아버지를 닮았어. 생전에 그렇게 미워했던 양반인데.” 500CC 맥주 한 잔을 비우고 나서였다. 나는 길게 트림을 했다. 끄억, 그녀는 테이블을 응시하며 국어책을 읽듯 이야기했다. 2번 째 잔을 비웠을 때, 그녀가 말했다. 나는 마른안주로 나온 멸치를 집어 입안에 털어 넣었다. “초등학교 다니는 딸을 둔 남자였어. 내가 맡은 초급회화반의 수강생이었어.” 이 대목에서 나는 2개비의 담배를 연이어 피웠다. “어느 날 강사연구실에서 강의준비를 하는데 그가 들어왔어. 어떤 말을 했던 것 같아. 그만두겠다는 요지였다. 그리고 비가 오던 어느 날 퇴근길에 거리에서 우연히 만났지. 자동차 경적 음에 고개를 드니 그가 자동차를 멈추고서 나를 쳐다보며 웃고 있었어. 그와 저녁을 먹었던 것 같다. 그리고 술을 마셨고 같이 잠을 잤어. 누군가를 닮았다 싶었는데, 돌아가신 아버지랑 많이 흡사하더라.” 나는 또다시 담배 한 개비를 피웠다. 담배연기 사이로 화원은 손수건을 꺼내 들어 이마의 땀을 닦았다. 나는 그녀의 눈 속에서 잊힌 사람의 얼굴을 좇는다. 자동차 사고가 난다. 아버지는 함께 일하던 여직원과 눈이 맞아 도망가던 중이었던가. 여행을 돌아오던 길이었던가. 가드레일을 들이받아 전복된 그랜저 안에는 피로 물든 두 남녀가 편안한 인상으로 세상을 떠나고 있다. 나는 그녀의 눈에서 잊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본다. 우는 화원과 울지 않는 그녀의 오빠. 오빠가 화원에게 묻는다. “행복하니?” 화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 아내 되는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지난겨울에 그와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내밀었어.” “그래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어. 대꾸했어. 알겠다고. 여자가 사라지고서 강의를 못 들어갈 정도로 몸이 아팠어.” 그날, 나는 오래전 우리 집에 세를 들어 살았던 남녀의 이야기를 그녀에게 전했다. 술에 취해 나온 이야기는 그녀를 연상케 하는 어린 날의 단상이다. 남자의 아내가 오고 나서 여자는 떠난다. 나를 꼬마라고 부르던 여자다. 그녀는 아내가 있는 남자를 사랑했던 여자라고. 암암히 떠오르는 기억. 내게 책을 읽어줬던가.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코끼리를 집어 삼킨 보아 뱀 그림.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니 건넌방의 흔적은 없다. 방을 둘러보다가 구석에 놓인 책을 발견한다. 어린왕자. 책을 들고 집을 나와 초등학교를 지나고, 골목을 지나 면사무소를 지나 신작로까지 달려간다. 버스정류장의 차부에도, 그녀는 없다. 나는 어두움이 익숙해질 때까지 신작로를 서성이다가 울다 돌아오는 꿈을 꾸곤 한다. 화원을 택시로 먼저 보내고서 유령처럼 집에 들어와 홀로 주방 식탁에 앉아 술을 마셨다. 깜짝 잠이 들었… 초인종소리. 손목시계. 새벽 3시. 문을 연다. 유령인가. 화원. 나는 두 손으로 그녀의 뺨을 움켜잡으며 입을 맞췄다. 그녀와 키스를 하자 귓가가 뜨거워졌다. 오른손으로 화원의 코트를 벗기며 등을 쓰다듬었다. 브래지어 후크가 손에 잡혔다. 블라우스 안쪽으로 손을 넣는다. 왼쪽 검지 손가락을 브래지어 뒷줄에 댄다. 엄지와 중지 손가락으로 브래지어를 브이자로 접었다고 놓는다. 손 안에 그녀의 사과만한 가슴이 잡힌다. 블라우스 안으로 얼굴을 묻었다. 그럴수록 화원의 호흡은 빨라졌다. 나는 목부터 배꼽까지 천천히 키스를 하며 내려왔다. 그녀는 내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나는 왼손으로 그녀의 등을 더듬거리듯 쓸어내렸다. 내 페니스를 잡는 화원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강을 건너고 있었다.
존재하는 것들은 언제나 하나가 되길 원한다. 너였다가, 나였다고, 너였다가, 너였다고, 아니 나였던 적이 있던…. 이 도시에 왜 왔어? 크눌프가 묻는다. 고독을 알기 위해. 누군가가 피리를 분다. 나는 크눌프가 되어 춤을 춘다. 스마트폰을 꺼내 든다. 흰 토끼 사나이가 나와 바비 브라운의 Humpin' Around에 맞춰 로저래빗 댄스를 춘다. 두 손은 물건을 들어 올리듯 위 아래로 펌프질을 할 것. 두 다리는 팔에 맞춰 엇박자로 제자리 뛰기를 하듯 움직인다. 아, 아저씨 그건 토끼춤이라 아니라깐요! 무대가 정리된다. 크눌프가 말한다. 내가 도시를 찾는 이유는 도시를 떠나기 위해서지, 그래야 고독을 알게 될 테니 말야. 나는 손을 들어 크눌프의 뺨을 때린다. 그가 몸을 움츠리다 희미하게 사라진다. 유령들. 유령들은 검은 옷차림의 남자들이다. 그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쇠사슬 끄는 소리가 들려온다. 앞은 잘 보이지 않는다. 크눌프의 마지막은? 어느 낯선 도시의 쇠락한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영겁의 시간이 갈라진다. 그가 생전에 했던 일들, 존재했던 장소, 만났던 사람들, 먹었던 음식들 등이 주마등처럼 빛의 속도로 스쳐간다. 그 빛이 사라지는 지점을 좇는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벽을 닦는다. 유리벽. 내 손자국이 스쳐간 자리마다 잊힌 영상들이 새겨진다. 모래바람이 불고, 나룻배를 타고 가다보면 왜나막신을 끄는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귀향을 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그려진다. 호송관이 남자에게 묻는다. 후회는 없느냐. 남자는 고개를 모로 젓는다. 아니요, 오히려 그곳에서 잠시나마 머물 수 있다는 게 행복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이름은 뭔가. 오가이, 라고 합니다. 성은 모리. 호송관이 남자의 눈빛을 살핀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하늘에는 보름달이 뜬다. 나는 이자카야를 부른다. 그러자 내 눈앞에는 이자카야의 나무테이블 앞에 앉아 사케를 마시는 남자의 뒷모습이 빛바랜 사진처럼 그려진다. 도쿠리는 적당한 온도로 데워져 있다. 덥힌 술을 검은 잔에 따르자 뽀얀 달이 솟아오른다. 나는 젓가락을 들어 달을 건지려 한다. 달은 쉽게 잡히지 않는다. 나는 천천히 술잔을 비운다. 뭔가 뜨거운 것이 목에 걸린다. 기침을 하다가 그것을 뱉어낸다. 나무테이블, 술이 흘러내린 자리에 초승달이 뜬다. 고개를 숙여 달을 들여다본다. 그 안에는 내가 있었고, 나는 또 다른 누군가가 되고, 손바닥으로 달을 지운다. 손을 들어본다. 손바닥에는 반달이 뜬다. 그것을 혀로 핥는다. 목에 차가운 뭔가가 걸린다. 기침을 하다가 뱉어낸다. 보름달이 술잔 위로 떨어진다. 달은 사라지지 않는다. 달 속에는 나룻배가 흘러가고, 누군가가 구슬피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손을 들어 문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