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주님의 나라
마태복음 11:1-30
마태복음 11장의 내용
오늘의 성경 말씀은 마태복음 11장입니다. 이것을 몇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부분은 1-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인 나사렛과 전도 생활의 중심지였던 가버나움 일대, 즉 갈릴리 전체를 돌아서 나인 성에 가서 과부의 독자를 살리신 이야기가 저 아래 베레아 땅 마케루스(Machaerus) 감옥에 갇혀 있는 요한에게도 전달되었고 요한은 자기의 제자 둘을 보내서 예수님께 여쭈어 본 것입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1절). 예수님이 갈릴리 전도 여행을 하신 이야기인데 이 여행 중에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낫게 하셨습니다. 요한이 마케루스에서 제자 둘을 보낸 이야기는 그다음에 있습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2-3절) 그러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4-5절). 그리고 다시 하시는 말씀이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6절).
이 말씀을 하시고 그다음에 우리 주께서는 요한에 대해서 칭찬하셨습니다. 그것이 7-19절에 있습니다. 그중에 16절 이하를 보면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단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16-19절)
그리고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가장 친근하게 가까이 계시면서 늘 가르치시고 권능을 행하시던 곳들이 패역해서 듣지 않는 사실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20-24절).
고라신은 갈릴리 북쪽 해변에 있는 고을로서 예수님이 전도하실 때에 본부로 삼으셨던 가버나움에서 북쪽으로 십리 정도 올라가면 거기에 옛터가 있고 그 터에 유대인의 회당을 지었던 자리가 있었던 것을 후세에 발견하였습니다. 벳새다는 갈릴리 바다 북방에 있는 어촌으로 베드로 형제와 빌립의 고향입니다(요 1:44:12:21). 이 근방의 환한 들에서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이신 기록도 있고, 그뿐 아니라 마가복음 8:22부터 보면 소경을 낫게 하신 기록도 있습니다. 이런 곳들은 가버나움과 함께 예수님께서 권능을 많이 행하시고 말씀을 많이 전하셔서 그곳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많았고 또한 예수님의 권능을 다른 곳보다도 더 많이 보았지만, 오히려 마음이 무디어지고 면역성이 생겨서 예수님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마음 가운데 회개하는 일도 없이 그냥 그대로 지나가는 것을 볼 때에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이 세 고을, 가버나움과 고라신, 벳새다에 대해 '화 있을진저!'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중해 해변의 항구로서 이방 사람인 베니게 사람들이 사는 곳이고 이세벨과 같은 악한 여자가 태어난, 바알을 섬기는 속되고 이교적인 도읍인 두로와 시돈에 비해서, 가버나움이나 고라신이나 벳새다는 예수님께서 본부로 삼고 활동하시고 가르치신 일도 많고 권능도 많이 행하시고 거기서 훌륭한 제자들이 난 곳입니다. 그래서 소위 성적이 많은 곳이지만 그까짓 이름은 다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제 마음대로 완고하고 패역한 심정을 가지고 있는 상태, 회개가 없는 상태에 대해서 예수님은 분노하시고 '네가 하늘까지 높아지겠는가? 그렇게 뽐낼 수 있겠는가? 음부까지 낮아질 것이다' 하셨습니다. 심판 때에 두로나 시돈이나 죄악으로 말미암아 멸망을 받은 소돔이 차라리 논죄가 가벼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25-27절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형식을 취했습니다만, 무엇을 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안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송한 내용입니다. 그렇게 독백을 하신 다음에 28-30절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의 내용은 이렇게 구분해서 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메시아 왕국관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오늘은 11장 전체를 놓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주님의 기적의 의미’를 계속해서 생각해 나가겠습니다. 지난번에는 첫 부분 여섯 절에서 세례 요한이 제자들 편에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선생님입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리오리까?' 하고 물은 이야기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마음 가운데 이러한 의문을 일으킬 만한 이유가 있어서 '참말로 그분인가, 아닌가?' 하고 굉장히 의심한 것은 아니지만, 완곡하게 '더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진정으로 주님은 그런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은 분입니까?' 하고서 물은 것입니다. 큰 의문은 아니지만 어떤 의문점이 있어서 그것을 여쭈어 본 것입니다.
단순히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직접 예수님께 가서 들으라고 보낸 것만이 전체의 목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도 있겠지만 요한이 전통적인 메시아관과 메시아 왕국관을 가지고 예수님이 어떻게 행하시는가를 주시하면서 옥중에서 매일매일 기다리다가 특별한 소식이 없어서 실망했다기보다는 재촉하는 의미도 있고 '우리의 메시아관에 의하면 메시아는 이러이러한 분인데 그러면 지금 선생님이 그분 곧 우리가 대망하고 있는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물론 다른 분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그분이면, 즉 우리의 마음 가운데 생각하고 있는 메시아라면 무엇인가를 행해 주셔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하는 의미를 포함해서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전통적인 메시아 왕국의 관념에 대해서 '나는 누구다'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가장 현저한 말씀 가운데 하나가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에게 '가서 너희를 보낸 사람에게 보고 들은 것을 고해라.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걷고 문둥이가 깨끗하게 되고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자는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는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는 것을 가서 그대로 전해라' 하셨습니다. 별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소경을 보게 하지 않느냐? 앉은뱅이를 걷게 하지 않느냐? 세상 사람이 다시 더 접촉할 수 없다는, 일생 사형 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문둥병자가 깨끗이 되어서 여상하게 되지 않았느냐? 귀머거리가 듣고 죽어 버린 사람이 다시 살지 않았느냐?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 이 세상에서 괴롬을 많이 받아서 세상의 혜택을 많이 받지 못하고 사는 까닭에 마음 가운데 좀 더 좋은 세상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 너는 그것을 가서 고해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가 지금 메시아 왕국에 대해서,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상에 대해서 생각하는 데에 큰 빛을 비춰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지금은 이름만 왕이고 차함(借銜)이고 실함은 없다' 하고 주장합니다. 옛날에 차함이라는 벼슬이 있었습니다. 실지로 권력이나 지위를 가진 것은 아니고 이름만 주는 그런 벼슬인데, 예수님도 그와 같이 실지로 왕의 실권을 가지고 행사하지는 않고 그것은 보류해 두었다가 나중에 재림하신 다음에 천년왕국을 건설한 다음에 행할 것이고 지금은 왕은 아니고 그저 대제사장으로 우리의 구주로 계시면서 우리 교회의 주님이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완전히 그리스도의 왕국과는 별개의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 행사는 현재에는 없고 장차 나타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금 기독교인 가운데에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마치 옛날 유대 사람들이 어떤 이상적인 메시아 왕국을 고대하고 이 땅 위에 굉장한 그리스도의 왕국, 찬란한 안식의 세계를 건설할 것을 기대했던 것과 같은 이러한 성경 해석과 생각들이 많이 퍼져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건실하고 착실하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친 위대한 교사들은 그렇게 가르친 것이 아니고 19세기 중엽에 영국에서 일어난 어떤 특이한 사람들의 생각이 미국으로 퍼졌고 주로 그런 사람들의 사상이 동양으로도 수입되어서 신학적인 특기할 만한 용어는 아니지만 소위 배제주의(配劑主義, dispensationalism)라는 이름까지 붙여가지고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폐단이 생겨났습니다. 이상적인 왕국이 땅 위에 홀연히 임할 것을 기대한다는 점에서는 옛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나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여기 나와 있는 것이 예수님의 중요한 대답입니다.
현재는 예수님이 왕이 아니시라고 자기네 마음대로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현재 제사장이 아니다' 하고 말하면 '아, 그럴 수가 있느냐?' 하지만, '왕이 아니다' 하면 감연히 '그렇다. 이름은 왕일는지 몰라도 지금 실권을 행사하시지는 않는다. 지금 이 세상의 왕은 마귀다' 하는 식으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한때일망정 마귀를 이 세상의 왕으로 두어두시고 예수님이 그 위에서 통재하는 일도 없이 마귀가 완전히 전권을 가지고, 하나님은 공중에서 팔짱을 끼고 쳐다보면서 감독만 하고 그저 과하게 하지 못하도록 할 뿐이고 마귀가 제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하게 두었다고 생각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 사람들은 '성경이 그렇게 가르쳤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왕권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철저히 마귀의 모든 국권, 소위 그들이 말하는 정사와 권위, 즉 ‘아르콘’(ἄρχων)이나 혹은 ‘아르케’(ἀρχή)와 엑쑤시아(ἐξουσιά), 그리고 어둠에서 그것을 주장하고 있는 세상 주관자, 즉 코스모크라토르(κοσμοκράτωρ)를 친히 왕으로서 통치하고 계신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사나 권세나 그런 것들이 지배하던 사람들 가운데에서, 그런 것들의 권위를 쳐서 물리치고 당신이 선택한 백성들을 빼내 오셔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기시는 큰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정사와 권세를 벗겨 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신 예수님의 그 거룩한 사실을 조금이라도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골로새서 2장에서 그런 말씀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3-15). 아르케 혹은 엑쑤시아라는 것들을 벗겨 버려서 ‘자, 이 정체가 무엇인지 보아라’하고 밝히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사실은 마귀가 가지고 있는 큰 권세를, 즉 머리를 상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죽음의 권세에서 주께서 원하시는 선택한 사람들을 건져 내신 것입니다. 이 죽음의 권세에서 건져 내신 큰 사실, 죽음의 주장자인 마귀의 권세에서 벗겨 내신 이 사실을 항상 주의해서 기억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2장을 보면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11절). 우리를 왜 형제라고 부르셨느냐 하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다 같은 혈맥으로 난 것처럼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그가 돌아가신 그것으로 누구를 건지려고 했는가 하면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14-15절).
그런 사람들을 건져 내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16절).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17절). 그렇게 해서 범사에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 형제들과 같이 되신 것이다. 그렇게 하신 것이 또한 마땅한 일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서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뿐 아니라 우리 주께서 십자가에 의해서 승리하시고 그의 왕권을 이제 정당하게 행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있고, 가령 십자가 이전일지라도 이미 그가 오셔서 행한 여러 가지 일로 인해 왕으로서의 권위가 조금도 손상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왕권을 계속적으로 행하고 계셨지 권리를 보류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신 일이 없습니다. 보류나 양도가 없이 필요에 응해서 왕권을 행사하시되 당신의 목적은 그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왕일지라도 왕은 언제든지 '나는 왕이다' 하고 뽐내고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미복(微服)을 하고 사람들의 실정을 살피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왕인 줄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왕이 아닙니까? 이와 같이 예수님이 형제들과 같은 몸, 즉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해서 왕이 아니신 것이 아닙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을 할 때에도 빌라도가 '네가 왕이 아니냐?' 하고 물었고 예수님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왕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왕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는 말씀입니다.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요 18:37-38).
왕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거룩한 능력을 행사하실 때에,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기대하면서 이상적인 왕국이 이 땅 위에 건설되기를 바랐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무엇을 만들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여론이나 의견, 사람의 소원에 따라서 무엇을 만들어 주는 그런 공무원, 즉 공복(公僕)과 같은 의미의 왕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국가의 지도자들이라도 민중의 공복으로 자처하고 지도하고 있는데 그런 의미의 왕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있고 비로소 그의 왕국이 존재하며 또한 그 왕국의 요소들, 즉 통치를 받는 백성들도 그에게 연결되어서 비로소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왕권이라는 것은 보통 세상 사람이 생각하는 왕권이라는 관념보다는 더욱 크고 위대한 내용을 가졌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왕권을 가지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왕권을 행사하실 때에는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기이하신 사랑과 지혜와 권능의 프로그램에 따라서 일을 해 나가십니다. 그에 따라서 그 나라를 땅 위에 가져오는데 그 나라에 대해서 사람들은 자기 나름으로 별달리 '이래주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되어야 하겠다. 저렇게 해야겠다' 하고 메시아 왕국을 제멋대로 해석합니다. 이 세상의 포악과 흑암과 여러가지의 옳지 못한 것들로부터 받는 괴롬 가운데서 사람들은 흔히 '그런 것이 없어지고 화려하고 평안한 이상적인 천국이 건설되었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합니다. 유대 사람들은 과거 수백 년 동안 적어도 주전 6백 년경부터 예수님 당시까지 바빌로니아 혹은 페르시아나 메디아의 큰 세력 혹은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나 그 후에 나누어진 수리아나 애굽의 세력, 그 후에는 로마의 세력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큰 나라들이 계속해서 지배하고 특별히 로마는 가차 없이 세금을 늑징(勒徵)했던 까닭에 그들은 항상 허우적거리며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세금 문제는 사회 정의라는 관점에서도 쟁론이 될 만한 일이어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옳습니까? 메시아 왕국에서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그냥 용인할 수 있습니까?' 하는 문제를 예수님 앞에 내기도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주님의 나라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 왕국을 무엇이라고 표현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친 것에 의해서 예수님의 왕국에 대하여 여러가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여기 세례 요한이 보낸 사람들, 즉 그러한 인간적인 메시아 왕국의 관념을 전제적(前提的)으로 가지고 나와서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 세례 요한 자신이 그 문제에 대해서 분명히 해명해 주기 위해서 자기 제자를 보낸 듯한데 - 거기 대하여서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자, 너희들이 보고 듣는 대로 있는 사실을 가지고 다 이야기해라. 너희들도 그렇게 알아라.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너희 선생 세례 요한에게 자꾸 질문하면서 의심을 일으키지 말고 이제는 사실대로 보고 듣는 대로 너희가 바르게 생각해 보고 거기에 의해서 바른 관념을 세워 봐라. 소경을 보게 하지 않느냐? 앉은뱅이를 걷게 하지 않느냐? 사람들이 다 포기해 버리는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지 않느냐? 귀머거리를 듣게 하지 않느냐? 죽은 자를 다시 살게 하지 않느냐? 극한 상황에 있는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공급되고 그것이 하나의 징표로 나타날 때에 그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해라. 그리고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고 괴로움을 받고 또 세상에서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므로 마음 가운데 항상 좀 더 나은 세계를 바라고 무엇인지 다른 큰 정의가 나타나서 구제해 주기를 바라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참된 복된 소식이 전파되고 있지 않느냐? 그것을 바르게 생각하고 그것에 의해서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의문에 대한 대답을 고요히 시도해 보아라.'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이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나라입니까? 기적에 의해서 어떤 이상적인 사회를 홀연히 나타나게 해서 사람들은 거기서 잘 먹고 평안히 즐겁게 살고 평화롭게 사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기적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인들의 생각대로, 기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을지라도 땅 위에 새로운 질서를 도입하고 여러 가지 과학이 더욱 발전해서 사람들이 살기 편하고 즐겁고 부요롭고 강성해서 편안하고 튼튼한 그런 물질적인 나라, 죄 있는 인간들이 죄를 그대로 가진 채로 그러나 즐거움을 누리고 사는 그러한 나라인가? 결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 주께서 이 땅 위에 도입하시고 우리에게 보이시고 가르쳐 주시는 거룩한 세계는 결코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것과 같은 그런 국가가 아닙니다. 그러한 것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없습니다. 오직 사람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진정으로 주님을 사모하고 그 거룩하신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자 할 때 그 말씀에 의해 비로소 그 거룩한 나라의 상태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의 진통과 괴로움을 바라보면서 그 속에서 사람들이 고생할 때, '죄 때문에 그런 고생을 한다. 그런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건져 주시기를 바라면 예수께 나오라' 해서 예수님을 모든 문제의 답인 것같이 소개를 해 주면서도, 적확하게 그 개개인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고 이미 정죄되어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을 위하여서 영원한 형벌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은폐하고, 오직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해서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덮어놓고 건져 내려고 온 것같이 선전하고 있는 복음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사람들의 대중적인 운동이나 선전에 대해서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주님은 그런 일을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은 명백하게 서 있습니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메시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마음대로 상상하였듯이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리스도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마음대로 이야기하고 자기네 형편에 좋을 대로 생각합니다. 물론 다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렇게 기독교를 해석하고 메시아 왕국을 해석합니다. 그렇지만 실지로는 그 말씀을 가지고 주께서 이 땅에 오신 큰 목적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주님의 나라는 어떠한 것인가를 바르게 알고, 주님의 거룩하신 일의 순서가 무엇인지 알고, 그 일과 주님의 나라의 범위 안에서 하시는 일의 순서에 따라서 기적이라는 것도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사회 신질서를 도입한다. 사회 문제를 해결한다. 인류의 진통을 없앤다. 흑암과 혼란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겠다' 하는 이런 이기주의적이고 행복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인 선전에 의한 기독교와 그러한 그리스도라고 하면 사실상 기적은 크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병을 낫게 한다든지 소경을 보게 한다든지 앉은뱅이를 걷게 한다든지 하는 기적은 필요 없고, 그 사람들의 생각하는 새로운 질서, 이상적인 세계 건설을 위해서는 수많은 병원을 설시(設施)하고 수많은 복리 기관을 세우고 또한 여러 가지 자원을 풍부하게 하고 생산을 넉넉하게 해서 사람들이 살기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쓰고도 남을 만큼 자꾸 만들어 내도록 시설을 하고 시책을 하고 방법을 구해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사실상 기적은 개인적인 일이었고 대중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회 전체를 망라해서 무엇을 조직해서 하는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혼자서 만나신 그 개인에게 거룩하신 신적 능력을 베풀어 주신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그 나라의 일에 대해서 더욱 깊이 주의하고 그 성격을 바르게 깨닫고 이 세상 사람들이 그릇된 생각 가운데에서 해석하는 그릇된 기독교에 대해서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데에서 배교의 여러 가지 원인을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이 시간에도 아버지의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이제 거룩한 나라에 대해서 바르게 생각하게 하셨사옵나이다. 저희가 사람들의 여러 가지 그릇된 생각에 대해서 다시 살펴서 주께서 오신 거룩하신 목적과 오셔서 행하신 일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갖거나 오해하고 있는 것을 바르게 볼 줄 알고 지적할 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그리하여 아버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과연 무엇인가를 바르게 드러내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975년 9월 21일 주일 오전
출처/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우리의 믿음, 김홍전, 성약출판사, 2015, 77-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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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전 목사
1914년 11월 15일 충남 서천군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 전주 서문교회에서 성장했으며, 전주 신흥중학교와 서울 경신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평양과 일본 동경에서 음악을 공부하였고, 미국 시카고 센추럴 컨써버토리에서 음악박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0년대 초 한국 교계의 신학사상 노선의 혼란기에 전국을 순회하며 개혁주의 신앙에 관한 강설을 통해 바른 신학 노선 정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64년에는 표본적인 교회(model church)의 필요성을 느끼고, 서울 성약교회를 설립, 한 평생동안 개혁주의 신앙에 근거한 목회에 전념했다. 성약교회는 신학적으로 역사적 개혁신학과 그 신앙을 표방한 개혁교회의 모습을 띠고 출발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이미 몇 갈래로 갈라져 있던 장로교회의 특정 교단에 남아서 활동하면 제약이 많겠다고 판단하여 독립적인 교회로 출발하였다. 지금은 안양 강변교회, 대전 성은교회, 전주 한사랑교회와 더불어 독립개신교회 교단을 이루고 있다. 성약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해외 선교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갖았던 그는 1967년 5월부터 1970년 10월까지 도쿄 기독교대학 교수를 겸임하였으며, 1968년에는 일본에서 영도(榮都)교회를 시작하였다. 그 후 1974년에 캐나다로 이주, 토론토 지역 교회를 시작하였으며 2003년까지 토론토에서 거주하였다. 한 평생동안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에게 개혁주의 신앙을 일깨운 김홍전 목사는 향년 89세를 일기로 2003년 7월 6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소천했다. 하나님 말씀의 해명은 신학교 교실보다 교회 강단에서 이루어 진다는 견해를 갖고 있던 그는 『부활절강설』, 『주께서 쓰시는 사람』, 『예수님의 행적』(10권), 『요한계시록 강해1,2』를 비롯하여 50여권의 신앙강설집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