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한 여행
아들로부터 일본의 지진 소식을 들은 것은 지난해 9월 초 춘천에서 이름난 어느 막국숫집에서였다.
동인지에 낼 수필의 원고를 마무리하기 위해 글의 소재인 약사동 망대를 돌아본 뒤, 같이 갔던 J동장과 식사 주문을 해놓고 뒷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아버지, 오늘 새벽 홋카이도에 지진이 났다는데 예정대로 가실 거예요?”
지진이 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나는 당장 며칠 후 떠나야 하는 여행이라 상황을 자세하게 물었다.
“조금 전 뉴스에 나왔는데 산이 무너져 사람들이 실종되고 공항도 폐쇄되었대요.” 아들은 걱정스러우니 다음에 가는 것이 좋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나로서는 아내의 환갑 기념으로 준비한 여행이 불투명하게 되었으니 난감했다. 진즉부터 벼르던 남유럽 해외여행을 아내의 사정으로 가까운 일본으로 변경한 것인데 그나마도 이런 예기치 않은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아내는 괜찮으니 내년에나 가자고 아예 멀찌감치 날짜를 거론했지만 기왕에 가기로 한 여행인데다 진갑 여행이 되게 할 수 없다며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다. 여행사에서는 여행비 전액을 환불하겠다고 했으나 여행이 가능할 것이라는 10여일 뒤로 일정만 연기하는 변경 예약을 했다. 다른 지역으로 변경도 권유 받았으나 당초 계획대로 홋카이도를 그대로 가기로 한 것이다. 특별히 홋카이도를 꼭 가야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도쿄나 오사카 등지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어 일본사람들에게도 마치 해외 같이 이국적인 곳이라는 매력이 마음을 움직였다. 아내도 언젠가‘노천 온천의 로망’이라는 홋카이도를 한번 가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남들은 대부분 여행계약을 취소하는 상황인데 불안전한 지진지역으로 기어이 가겠다고 무모한 짓을 하고는, 그만둘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했다.
다행히 큰 지진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고 여진도 약해져 신치토세공항의 피해가 복구 되자 곧 항공기 운항이 재개될 것임을 여행사 측이 전해왔다.
마침내 2018년 9월 18일 H투어의 홋카이도 여행이 재개된 첫 날 우리 부부는 치토세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조금 전 인천공항 제2청사 출국장에서 만난 또 다른 패키지 여행자들과 하야시쨩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가이드와 함께 푸른 동해의 상공을 조심스럽게 날았다.
세 시간 가까이 비행 끝에 도착한 공항은 지진 여파 탓인지 한산했다. 청사의 일부 구역이 아직도 폐쇄되어 있어 지진이 할퀴고 지나간 상처가 느껴졌다.금세라도 어디서 땅이 흔들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스쳤다. 하야시쨩은 그런 걱정을 알아차렸는지 일행을 안심시키려 애를 썼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워낙 지진이 많이 발생하여 사전 대책이나 사후 복구가 철저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시도 때도 없는 지진에 훈련된 결과인지 일본 사람들은 지진에 대해 그리 놀라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듣고 보니 지진에 비교적 잘 대처한다는 말이겠지 아무려면 그 무서운 지진을 두고 놀라지 않기야 하랴.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일본은 자연재해가 많이 발생하는 나라이다. 환태평양지진대에 위치하여 유독 지진과 화산활동이 그치지 않을 뿐 아니라 홍수와 태풍 역시 일본을 괴롭히고 있다. 끔찍한 대형 지진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1923년 9월 14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간토(關東) 대지진은 20세기에 일본에서 발생한 최대의 참사였다. 이 간토 대지진은 이곳에 살고 있던 선량한 조선인 수천 명이 처참하게 희생된 비극적인 관동대학살(關東大虐殺)로 이어졌다. 1995년 1월에 일어난 고베지진으로도 불리는 한신·아와이(阪神·淡路) 대지진은 6,500여명의 사망자를 낸 금세기 최악의 재난이었다.
하야시쨩의 설명에 따르면 홋카이도는 지진이 많은 곳은 아니었다. 1975년 그리고 1993년과 1994년에 각각 지진 기록이 있으나 그 이후에는 20여 년이 넘도록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랬는데 일본에서 지진 안전지역은 없다는 듯이 2018년 9월 6일 새벽 3시, 진도 6.7의 강진이 일본 최북단의 삿포르시를 비롯한 인접 일부지역을 강타한 것이다. 긴박한 순간들은 실시간으로 전파를 탔다.
진앙지는 삿포르시 남동쪽 64.8Km 지점인 아쓰마초(厚眞町) 지역으로 밝혀졌는데 일본 기상청은 이례적으로 ‘헤이세이 30년(2018년) 홋카이도 이부리 동부지진’이라 명명했다. 그만큼 홋카이도 지진은 일본으로서도 예사롭지 않게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대형 산사태로 가옥이 매몰되고 도로가 갈라지고 침하되었으며 발전소의 가동이 중단되어 홋카이도 대부분의 지역이 정전과 단수로 암흑으로 변했다. 치토세공항을 폐쇄하고 항공기의 이착륙을 금지했다. 이 지진으로 40여 명이 사망하고 68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지진으로 고립된 한국인 관광객들은 임시 항공편을 긴급 투입하여 귀국시켰다. 홋카이도 당국은 2026년 동계올림픽 유치신청을 포기했으며 각국의 관광객들이 여행예약을 취소하여 외국인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지진이 가져온 처참한 결과였다.
지진이 발생한지 꼭 12일 만에 밟은 홋카이도는 피해가 빠르게 복구되어 공항이 정상화되고 참화 전의 일상으로 돌아온 듯 보였지만 방문도시에는 여행자들의 모습이 뜸했다. 공항에서 이동하여 첫 코스인 시코츠호를 찾았을 때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 한두 팀 정도만이 눈에 띄었다.
“저기도 용감한 사람들이 있네.” 하는 누군가의 말에 다들 웃었다.
홋카이도의 유명 온천지라는 오타키무라와 노보리벳츠 또한 조용했다. 일본에서 아홉 번째로 큰 호수라는 도야호에서 유람선을 탈 때도, 오타루 운하와 삿포르 시내의 여행지에서도 많은 관광객은 만나지 못했다.
우리 일행을 실은 H투어의 전용 버스 또한 여유로웠다. 큰 차에 타는 인원이 적으니 여기저기 편안하게 자리를 잡았다. 여행사가 계획한 상품의 모객 인원은 25명 규모였지만 지진의 여파로 12명만이 오게 되니 일행이 단출했다.
하야시쨩은 홋카이도를‘강원도를 관광하며 전라도의 음식을 먹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그녀의 말인즉슨, ‘음식하면 전라도, 경치하면 강원도’라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누린다는 뜻이렷다.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웠지만 시시각각 시야에 들어오는 풍광만큼은 우리나라 가을처럼 맑고 깨끗하다. 그녀는 이야기 끝에 꼭 가볼만한 일본 여행 포인트로 오호츠크해의 유빙 관광을 추천했다. 겨울 바다를 뒤덮은 거대한 얼음의 향연은 자신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장관이란다.
3박 4일간의 일정 중마지막 여행지로 들린 붉은 벽돌로 상징되는 홋카이도 구 청사. 그 옛날 에초지(蝦夷地)라 불리던, 원주민 아이누족의 삶의 터전이었던 이 땅을 짓밟았던 침략의 본산이다. 메이지정부는 1869년 마침내 이곳에 개척사(開拓使)를 설치하고 에초지를 홋카이도(北海道)라 개칭했다. 일본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청사를 복원하고 내부에 전시한 홋카이도 개척의 역사는 결국은 아이누족에 대한 수탈과 말살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아이누족은 이제 멸족 상태로 사라지는 민족이 되었다니, 세상에 이 같은 통한의 민족사도 없으리라.
아이누족의 피와 눈물로 얼룩진 에초지의 옛 땅을 뒤로하며, 하늘 길에서 내려다 본 홋카이도의 연안은 더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언제 지진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고요했다.
‘이런 땅에 지진이라니….’
일본이 저지른 치유될 수 없는 숫한 악행의 역사를 생각하면 나올 수 없는 탄식이건만 자연의 대재앙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에는 연민을 금할 수 없다.
이런저런 상념으로 며칠 동안의 일들을 떠올리다보니 어느덧 인천국제공항에 착륙하겠다는 기내 방송이 나른한 귓전을 울린다. 이윽고 항공기가 특유의 마찰음을 내며 활주로에 내려앉자 비로소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심신이 홀가분해 진다. 여행 내내 지진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 때문에‘설마’하면서도 긴장을 했던 모양이다. 아내 역시 가벼워 보인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 여행은 발길을 오호츠크해로 돌려 오로라 유빙선을 타고 시베리아 아무루강에서 바람 따라 조류 따라 흘러오는 얼음의 향연을 보자고 기약하며 춘천행 리무진버스에 몸을 실으니 피로감에 금세 잠이 밀려온다.
며칠 가볍게 휴식을 겸하여 다녀오려던 아내의 환갑여행이 예기치 않았던 지진으로 인해 출발부터 차질을 빚은 아쉬움은 있지만, 이 또한 우리 부부의 노년에 소소한 이야깃거리로 간직하고 싶다. (2019년 길 제4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