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마라톤
정은영(72회)
- 나의 마라톤은 끝나지 않았다.
인생은 계속 뛰지 않으면 안 되는 참으로 길고도 먼 코스의 마라톤이다. -
- 손기정
#1. 가지 않은 길
노란 숲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 로버트 프루스트, ‘가지 않은 길’ (피천득 역)
2017년 6월 어느 날이었던가, 휘문 72회 졸업 동기들이 종로 5가 광장시장의 박가네에서 만나던 ‘종로모임’이 있었다. 술도 약하고 동창 모임에 잘 나가지 않던 나는 그날따라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혜화동에 있는 학교를 마치고 걸어서 대학로를 지나 종로 5가의 광장시장으로 걸어 내려갔다.
2015년 초에 선친께서 고관절 골절로 앓아누우신 후, 치매와 함께 병세가 심해져 결국 송추의 요양 병원으로 입원하게 되셨고, 주말이면 어머니와 함께 찾아뵙곤 했다. 우리를 맞는 아버님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고, 2016년 11월 26일 – 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아직도 작년 일처럼 생생한데 벌써 5년 전 일이라니 - 폐렴 합병증으로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 날짜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버님을 찾아뵙던 언젠가 문득 ‘나도 나이 들어 병들면 이곳에 와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 안되지’하는 대답과 함께 ‘여기에 오지 않으려면 내가 건강하고 제 정신을 가져야겠다’는 깨달음이 뇌리를 스쳐갔다. 나는 다음날부터 학교 출퇴근 시간을 이용해 동대문운동장 자리에서 버스를 내려 동대문 지나 낙산을 넘고 혜화동에 이르는 등산 아닌 등산을 하게 되었다. 그에 몇 년 앞서 ‘휘나래’라는 72회 동기 산악회에 가입하여 매월 셋째 주의 정기 등산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함께 등산을 하는 친구들은 지금도 술자리에서 나의 첫 등산하던 때를 떠올리며 ‘조금만 올라가도 숨을 헐떡거리고 가슴이 답답하다던 은영이가 산에 다니며 많이 좋아졌어, 술도 늘고’라며 놀리곤 한다.
이렇게 매월 첫째 주에는 휘문 총동문 산악회인 ‘휘산회’ 등반, 셋째 주에는 72회 동기 산악회 ‘휘나래’ 등산 그리고 주중에는 출퇴근길 낙산 넘어다니기를 하며 등산의 재미에 푹 빠져 있던, 앞서의 2017년 6월 어느 날이었다.
광장시장 박가네 ‘종로 모임’에서 막걸리에 빈대떡을 먹으며 옆의 친구들과 시끌벅적 이야기를 할 때, 정묵이(임정묵) – 당시 ‘휘마동’의 부회장이자 72회 ‘종로 모임’의 좌장이었음 -가 슬며시 옆에 앉았다. 작은 소리로 ‘다음 달에 휘마동 야유회가 있는데 놀러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어리숙했지만 – 이천에서 산부인과 의사를 하던 이노범도 나와 같은 과로 착하고 어리숙함 -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김신, 손은혁, 박중권 등)은 얼마나 영악했던가. 정묵이의 낚시질을 눈치채고 심드렁해 할 때, 한구(이한구)가 가세하여 ‘출발, 도착의 차량 제공과 함께 일체의 숙식 및 주류 제공’의 물량 공세로 거들었고, 솔깃한 우리는 – 사실 나는 술에 별 미련이 없었지만, 다른 친구들은 없어 못 먹을 정도로 술에 ‘환장’(?)하지 않았던가 - ‘우리는 절대 뛰지 않아도 되고 그냥 먹고 마시고 숙소 주변의 야산이나 오르기’로 하고 2017년 ‘휘마동 야유회’에 참석하마고 했다.
다음 달 금요일의 야유회 전날, 다른 친구들은 각자 가기로 하고, 등산화에 등산복을 걸친 은혁이(손은혁)와 나는 퇴근 후 정묵이 집 앞에서 만나 숙소인 양평으로 이동했는데 마침 장마철이어서 비가 억수로 내렸다. 저녁 끼니때를 넘겨 9시 경에 도착했더니 이미 선발대로 도착한 회원들은 한창 여흥과 함께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김선기 선배님, 동호 형님 그리고 일남 형님은 직접 가져 온 앰프며, 악보대를 겸한 모니터와 컴퓨터 노래방 준비를 마치고 떠들썩하니 악기를 연주하고 - 통상의 다른 모임 MT 규모에 비해 화려하고 엄청난 규모의 악단이라 할 만해서 처음에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감탄했지만, 그 후의 휘마동 여러 모임에서는 늘 악단은 악단대로, 멤버는 멤버대로, 박자며 가사며 춤이며 모두 제 흥에 겨워서 하는지라 규모며 장비에 비해 가성비는... 음, 좋았던 것(?) 같다. ㅋㅋ - 다른 회원들은 노래를 부르고 또 몇몇은 술을 마시며 제각각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얼떨결에 인사를 나누고 술자리에 합석했는데 어수선한 속에서도 신입 회원이라고 격렬히 - ‘열렬히’와는 조금 다른 느낌(?), 새로운 먹잇감을 맞는 ‘맹수’들의 분위기였다고나 할까 - 환영해 주며 술잔을 나누었고, 정묵이는 가방에서 너희들 거라며 졸업 기수(72)와 각자의 이름이 적힌 휘문마라톤 상의와 모자 – ‘공짜라면 잿물도 먹는다’ 했던가, 음, 공짜로 옷도 주고 게다가 모자도, 이게 어디냐. 그때까지도 우리는 정묵이의 치밀하고도 음흉한(?) 속내를 몰랐다. ㅋㅋ -를 꺼내 주었다. 그 와중에 한구가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와 양평역에서 뛰어오는 길이라며 인사를 하고 그 뒤에도 71회 성탁이 형을 비롯한 몇몇 분들이 역시 뛰어서 오는 길이라고 잇따라 들어서기에 우리는 속으로 감탄인지 놀람인지, 아무튼 세상엔 별별 사람들이 다 있느니 하며 – 우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세계일지니 – 휘마동에서의 첫날밤은 깊어갔다.
이튿날 아침에 다들 昨醉未醒(작취미성)으로 뒤척거리는데 아침 운동한다며 다들 숙소 밖으로 집합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냥 내쳐 자려고 하는데 부회장인 정묵이가 어서 나가서 착복식할 테니 어제 나눠준, 각자의 이름이 적힌 녹색 마라톤 상의를 입고 모자를 쓰고 나오라는 것이었고, 우리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상반신은 마라톤 복장에 하반신은 등산복 바지에 등산화를 신은 어정쩡한 모습으로 연수원 마당에 나가 준비 운동을 대충 따라 하고, 신입 회원으로 열렬한 박수 속에 인사를 마쳤다. 우리는 슬슬 눈치를 보며 빠지려 하는데 ‘휘마동’의 전통인 ‘야유회 런닝’을 해야 한다며, 그냥 천천히 걷는 듯이 뛰라는 말에 얼떨결에 구보 대열에 끼어 들었고, 군대를 벗어난 이래 처음으로 아침 구보 – 등산화를 신었으니 런닝보다는 ‘구보’가 더 어울림 –를 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처음엔 진짜 천천히 뛰어 ‘음, 할 만하군’하며 쫓아갔는데 조금씩 속도가 붙더니 허덕거리던 우리는 결국 본대를 먼저 보내고 우리 본연의 목적 - 음, 우리는 등산 왔지, 등산화는 폼이 아닝게 -이라 할 수 있는 연수원 야산을 둘러보고 야유회를 마쳤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날의 ‘휘마동 야유회’ 참석이야말로 ‘가지 않은 길’로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 후기 : 야유회 다음 토요일에 남산에서 정모를 하니 꼭 나오라는 전두선 회장님의 무셔운(?) 분부에 우리 72회 신입회원들(나, 김신, 손은혁 그리고 이천에서 올라온 이노범)은 새로 장만한 유니폼을 갖춰 참석하였고, 대충 회원들을 따라 뜀박질에 나서, 뛰거니 걷거니 하다가 그 다음 정모부터는 필자만 남아서 ‘가지 않은 길’을 계속 갔고, 다른 친구들은 아직도 이 길 저 길을 갈팡질팡 헤매고 있음. 그래도 이 친구들은 ‘휘마동’에 남아 눈팅과 함께 때 되면 생일 축하 인사를 받고 있음.
– 이 치들은 회비는 잘 안 냄 BUT 나는 회비는 물론 찬조금도 잘 냄 -
#2. 群鷄一鳲(군계일시)
매월 2, 4주에 실시되는 남산 하계 정모에 빠지지 않고 나가던 어느 날, 런닝 중에 남산을 산책하던 ‘김선덕’이라는 친구를 만났다.
이야기를 잠시 삼천포로 빼 보자.
1977년 2월, 고등학교 추첨 발표를 TV로 지켜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가슴 졸였던가. 두 살 위의 형이 중앙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던지라 나도 공동학군의 ‘경복고’나 ‘서울고’ - ‘경기고’는 그때 이미 강남으로 갔음 –를 내심 희망했고 아니면 중앙고나 배재고 정도도 괜찮지 하며 다른 데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는데 TV - ‘黑白’으로 나와 지금도 기억 속에는 더 선명하면서도 극적(劇的)인 인상으로 남아 있음. -에서는 ‘가나다’ 순으로 이 학교들이 모두 그냥 지나갔고 이제 남은 건 ‘ㅎ’으로 시작하는 학교만 남았으니 ‘환일고’가 아니겠냐며 실망하던 차에 환일고도 지나 ‘휘문고등학교’가 나의 진학 학교로 발표되었다. 순간, 정적이 흘렀고 잠시 후 옆에서 보던 큰 누나의 ‘어머, 잘됐다. 휘문이 더 좋아’라는 축하의 말과 함께, 先親께서도 ‘옛날에 부잣집 애들(?)이 다니던 학교야, 좋은 학교다.’라고 말씀해 주셔서 ‘徽文’이라는 이름이 우리 家門에 들어왔다.
그 해 3월에 1학년 5반 교실에서 나는 이 ‘김선덕’이라는 친구를 만났다. 72회 친구들 중에 이 친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싶은데, 1학년 때부터 꽤 떠들썩하게 학교생활을 했고, 결국 2학년 말이었던가에 무슨 일로 학교를 그만 두게 되어 3학년 졸업을 하지는 못했지만 ‘의리의 사나이’였던지라 친구들에게 호감을 받던 친구였다. - 뒤에 선덕이는 검정고시를 거쳐 동국대 영문과에 진학하였다. 대학 졸업 후, 국군영화제작소에서 빼어난 영화 감독 겸 軍史 기록 작가로 맹활약함. -
다시 본 이야기로 돌아오자.
선덕이는 집이 남산 아래 후암동이라 이 시간이면 늘 산책을 한다면서 휘마동 유니폼을 입은 나를 보며,
“은영아, 뻐꾸기 형 왔냐?”라며 뜬금없이 물어보는 것이었다.
“뻐꾸기 형? 누군지 모르겠는데”
“아, 응규 형이라고 그 형 별명이 뻐꾸기야. ㅋㅋ”
나는 핑곗김에 같이 걸었다. - 사실 덥고 힘들어 죽겠는데 얼마나 고맙던지 -
“휘마동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응규 형이 누군지 잘 몰라. 그런데 왜 뻐꾸기야?”
“야, 학교 다닐 때부터 친한 선배인데, 얼마나 말이 많은지 그 형이 있으면 십 리 밖에서부터 시끄러워 ㅋㅋ”
선덕이와 나는 마주 웃으며 헤어졌고, 운동을 마치고 남산 밑 족발 집에서 뒤풀이를 할 때, 경범 총무에게 물어보았더니 응규 형은 요즘 잘 안 나온다고 했다.
‘응규’라는 이름을 그때 처음 들었고, 여름이 지난 얼마 뒤에 여의도로 옮겨 간 정모에서 드디어 응규 형을 만났다. 운동을 마치고 ‘수라정’에서 예의 뒤풀이를 하는데 과연 名實相符요 名不虛傳의 ‘뻐꾸기’였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선배님들과 말하다가도 불쑥 오른쪽의 후배들과 이야기하고, ‘다다다다’ 목소리는 어찌나 크던지, 게다가 중간중간 ‘신발’이라든가, ‘식빵’의 추임새를 넣어가며 듣기 거북한 단어가 튀어나오는데도 어떻게 천연덕스럽던지, - 72회에도 이런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도 ‘金氏’로 ‘욕쟁이’인데도 미워하는 친구가 없다. 그것도 재주다. ㅋㅋ - 좌중의 혼을 다 빼놓는 것이었다. - 응규 형님은 입술이 얇았는데 떠들어 대느라 살이 붙을 여유가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 -
그때 응규 형은 암반 등반 모임인 ‘휘마클’에 심취하여 히말라야 등정을 앞두고 있었던지라 자연스럽게 ‘휘문교우등반대’ 이야기를 꺼냈고, 후원회 결성을 위해 협조를 구하고 있었던가, - 입회한 지 얼마 안되는지라 자세한 내용은 잘 몰랐다. - 응규 형은 처음 보는 나에게 이런저런 말을 하셨고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친다니 몹시 반색을 하면서 ‘국문과’ 후배가 왔다고 좋아하셨다. 한국문단의 전설적 시인인 ‘박목월 선생님’께 대학시절 전공 강의를 들은 이야기를 하며, 당신에게 '恒說(항설 : 늘 떠들어 댐 ㅋㅋ
)이라는 雅號(아호) - 그 역시 수업 중 말이 많아서 목월 선생님이 장난삼아 지어 주셨다 했다. 즉, 목월 선생님조차도 인정한 ‘뻐꾸기’였던 것이다. -를 받은 이야기부터 국문학의 전공으로 넘어가 장광설을 늘어 놓으셨다. 남들이 서너 잔 기울일 동안에 응규 형은 떠드느라고 그 절반이나 겨우 마셨을까.
음, 진정 ‘群鷄一鳲(군계일시 : 鳲 - 뻐꾸기 시)’라 할만 했다.
* 후기 : 이제 ‘故 김응규’ 형님이라 불러야 하는 상황이 아쉽기만 하다. 2019년 여름에 ‘휘마동’이 여름 캠프를 양평으로 갔을 때, 응규 형님은 ‘휘문 교우 등반대’를 이끌고 알프스 몽블랑 등정에 나섰다가 불의의 사고로 幽明을 달리하셨다. 그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73회 이전구 후배와 함께 캠프를 산책하던 도중, 인공 암벽을 발견하고 알프스의 응규 형을 생각하며 암벽을 타는 시늉을 하고 사진도 찍었더랬는데, 불과 몇 시간 후 알프스에서의 확인되지 않은 悲報가 날아들었고, 회원 모두는 잘못된 소식이기를 간절히 빌었으나 결국 응규 형은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나셨다.
#3. 走後飮酒(주후음주)
어느 신문에선가 ‘등산이나 운동 후, 술을 마시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표제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열심히 운동하고 나서 기분 좋게 마신 술이 오히려 근육을 약화시켜 운동을 무위로 돌린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세상 일이 어디 교과서대로만 되던가. 흠뻑 땀을 흘린 뒤의 시원한 맥주 한 잔이며, 텅 빈 뱃속에 들어오는 먹거리 – 이때는 맛없는 음식이 없다 - 때문에 운동을 그렇게 공들여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이니 ‘닭(운동)이 먼저인지 달걀(술)이 먼저인지’는 여기에서도 풀지 못할 난제인가 싶다.
처음 정모는 앞에 잠깐 언급했던 한여름의 남산 코스였다. 역시 처음에는 준비 체조를 하고 열을 맞춰 천천히 워밍업을 하고 반환점부터는 제각각 능력에 맞춰 돌아오는 것이었다. 처음 정모에 나간 우리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몰라 엉거주춤한 표정이었을 텐데, 그에 맞춰 기존 회원들 역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 생각했는지 그냥 예의 정모처럼 막무가내로 진행됐다. 달리기라면 ‘뜀박질’이나 군대에서의 ‘구보’밖에 모르던 우리는 궁금한 게 꽤 많았지만 아무도 자상하게 알려주지 않았다. 나중에 물어보면, ‘호흡이고 주법이고 간에 자기가 편한 대로 뛰면 된다’라고 말하기 일쑤였다. – 사실 아직도 그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는 것 같기도 함 -
‘휘마동’이 초보 입문한 사람들에게 무책임하다는 생각에 분개한 몇몇 ‘憂國之士(?)’가 있어 후에 ‘徽馬校’가 탄생하게 되었고, 그 불똥이 엉뚱하게 ‘상도(78회 이상도)’ 후배에게 튀었다.
달리기가 끝나고 몸을 씻고난 – 남산에 이런 무료 샤워장이 있다는 걸 난생 처음 알았음. 서울역이나 명동 주변의 노숙자들은 아직 이걸 모르나보다. 욕심인가, 알려주어선 안 될 것 같다. ㅋㅋ - 우리는 남산골의 ‘족발집’에서 뒤풀이를 하였고, 맥주로 시작해서 기호에 맞춰 막걸리와 소주파로 나뉘었다. 그다지 술이 세지 못한 나를 뺀 나머지 신입회원들은 드디어 기회가 왔다는 듯이 비로소 달리기(?)를 시작했고, 이 달리기만큼은 역전의 마라톤 선수들 못지않았다.
가을로 접어들며 선선해지자 정모는 ‘여의도’로 바뀌었으니 ‘별장’을 떠나 ‘본가’로 돌아왔다고 할까. 회원들은 편안해 했고, 나는 走路의 강바람이 차갑고 외로웠다.
동기로 세 몸 되어 한 몸같이 지내다가
두 아운 어디 가서 돌아올 줄 모르는고
날마다 석양 문외예 한숨 겨워 하노라.
- 노계 박인로
다정다감한 선배님, 후배님들이 잘 챙겨 주셨지만, 함께 입회한 동기 녀석들이 없어서였다. 다행히 근래에 다른 동기들(신도환, 라대식)이 들어와 반갑다. 게다가 도환이와 대식이는 술이나 탐하는(?) 친구들이 아니기에 – 성실하고 무엇보다 회비도 잘 냄 ^^ - 코로나19가 어서 물러가 주로에서 만나기를 기대하게 된다.
물길이 또 삼천포로 빠졌다. ㅋㅋ
여의도 선착장에서 동작대교까지의 왕복 주로를 달린 뒤에, 짐을 챙긴 우리는 여의도 가운데의 목욕탕(‘수라정’ 지하)으로 이동하여 몸을 씻는다. 음, ‘휘마동’에 대해 예전에 한구(이한구)가 던진 낚싯밥이 있었다.
“휘마동은 어디보다 선후배의 정이 끈끈해. 운동하면서 등에 있는 이름을 쉽게 알게 되고, 땀 흘리면서 운동을 해서 전우애를 느낄 정도인데다, 무엇보다도 운동 끝나고 목욕탕에 가서는 알몸으로 탕에 들어가 마라톤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고민과 사는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누니 저절로 단순한 모임 이상의 관계를 갖게 되지.”
이제 한구의 말을 평가해 보자면, 음, 맞는 말이다. 약간 아쉬운 게 있다면, 옷이 가리고 있던 몸매가 숨김없이 드러나게 된다는 점일까. ‘써브-4’급의 몸매와 ‘레슬링부’의 몸매가 날것으로 드러나니. ‘열심히 뛰면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고 마음먹기엔 시쳇말로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일 것 같아 씁쓸한 입맛만 다셔본다. 당장 이 일(목욕)이 끝나면 ‘먹고 마시는 일’만 남았는데 어찌 이를 마다할 수 있으랴. 사실 ‘뛰는 것’보다 ‘먹는 것’이 더 발목을 잡는다. - 맨밥만 먹어도 맛있는 걸 어쩌랴. ‘잠보’, ‘먹보’처럼 ‘밥보’에서 동음 탈락을 거쳐 ‘바보’가 파생됐다는 어원 해석도 있다. ㅠ ㅠ -
沐浴齋戒(목욕재계)하고 이제 ‘수라정’에 오른다. 아마 휘마동 창립 초기부터 드나들었을 터이니 ‘수라정’과의 인연 역시 ‘20 주년’을 맞겠다. 20개의 星霜을 보내도록 다른 곳으로 바꾸지 않은 걸 보면 ‘수라정’의 음식 맛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저 ‘남도’의 멋을 한껏 드러내며, 메뉴도 다양하고 철따라 바뀌는 제철 음식을 맛보이니 다른 곳은 엄두도 못 낼 것 같다.
처음 ‘수라정’에 갔을 때는 – 뭐, 모든 게 처음이었으니 – 놀라운 풍경이 많았다. 수라정 사장님이며 이모라는 분들과 회원들의 스스럼없는 대화와 모습, 술이며 음식의 풍성함과 맛, 여의도 한 복판에서 실컷 떠들고 심지어 노래까지 하며 펼쳐지는 옛스런 풍경 등인데 나도 이제 어색한 느낌이 없으니 어느 새 ‘수라정’ 문화에 젖었나보다.
‘수라정’에서의 좌석은 지정된 건 아니지만, 고참 선배님들부터 안쪽에 앉기 시작해서 졸업 기수가 내려오면서 자리가 배치된다. 초기에 이 불문율을 모르고 안쪽에 앉았는데, 누가 뭐라 그러지는 않았지만 오가는 이야기가 결이 달라 다음부터는 저절로 내 자리를 찾아갔다.
54회 선배님들부터 거의 30년 지난 뒤의 후배들까지 한 자리에 모이니 자주 갖는 자리임에도 그 화제가 무궁무진하다. 또, 술자리의 역사도 오래인지라 휘마동 술자리에서의 ‘꿀팁’도 전수되고 술버릇도 나타난다. 예컨대, 승도 형님 옆자리에 앉을 때는 옷을 두껍게 입으라든가, 두선 형님과 같이 있을 때는 술잔이 비는지 잘 봐야 한다는 것, 마라톤으로 10만원빵을 하자는 정묵이의 경남 후배에 대한 도발, 전국적으로 유명하다는 튀김만두를 술자리 중간에 사와서 맛보라는 성규 후배 등 끝도 없이 이어질 이야깃거리가 많을 것이다.
적당히 먹고 마시고 시간이 되면, 전문 사회자가 나서서 회원들의 소회와 평가를 듣고, 은행가와 세무사가 전문 지식을 살려 회비를 걷는데 - 割鷄牛刀(할계우도 :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사용함)라 할까, 옛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ㅋㅋ – 한 푼의 모자람도 용납하지 않는다.
술이 약한 나는 통상 ‘수라정’에서의 1차로 마무리하지만, 헤어짐이 아쉬운 회원들은 다시 자리를 옮겨 차수를 연장한다. 2차, 3차로 이어지는 후기를 보면 마라톤도 술자리도 나 - ‘耳順’을 올해 막 지나 6학년이 되었음 -는 아직 햇병아리임에 틀림없다.
#4. 夫唱婦隨(부창부수)
우여곡절 끝에 휘마동에 가입하여 정모에 참석할 때, 아내 – 朴相仁(휘문여고 72회), 이하 朴女史로 칭함 –는 진작부터 ‘휘산회’와 ‘휘나래’에 맹렬히 참석했던 터라 ‘휘마동’ 활동 역시 관심을 가졌고, 내가 정모 외에 평소 집에서 하는 마라톤 연습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평소 활동적인 朴女史는 이번에도 나를 지원하는 차원을 넘어 독촉하며, 자신도 열심히 뛰었다. - 나의 대외 할동을 지원하는 內助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다이어트를 위한 방편이 아닌지 가끔 의심스러움. ㅋㅋ -
동기들과 산에 가서 식사 중, 한 잔 하려 하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마시지 말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러면서 친구들에게 내게 줄 술을 자기에게 달라는 거다. 막걸리는 못 먹고 소주나 고량주 같은 높은 도수의 술을 좋아한다고 하며 술잔을 내미니 아니 좋아할 친구가 없다. 얼떨결에 남편보다 술 잘 먹는 朴女史로, 또 山 잘 타는 朴女史로 소문이 났다. 여기서 밝히지만, ‘동기들아, 朴女史는 떠드는 말처럼 술이 세지도 않고, 山도 꾸역꾸역 올라가는 거나 잘하지 내려가는 건 겁이 많아 너무 느려요.’
하여튼 朴女史는 나를 따라 마라톤도 시작했고, 매일 얼굴이 빨갛게 땀을 흘리며 달렸다. 내가 마라톤에 입문한 석 달 뒤인가 코엑스 앞에서 개최된 ‘2017년 세계평화마라톤대회’ 하프 코스에 처음으로 장거리 출전 신청을 하고 긴장하자 朴女史는 연습주를 함께 해주며 말없는 지원을 했다. 이 대회를 완주하고, 이어 춘천 마라톤 풀코스 출전을 하겠다니 자신도 10km 코스에 나가겠다고 해서 우리 부부는 출전 신청을 하고 백화점 아식스 코너에 가서 춘천 마라톤 기념 런닝화를 샀다. 그냥 운동화로 모든 생활을 하던 부부가 난생 처음으로 마라톤 출전을 하며 돈 들여 마련한 전문 마라톤화였다.
‘휘마동’ 모임에도 가끔 나온 朴女史는 이번에도 어느 새 ‘술이면 술, 달리기면 달리기’로 남편을 능가하는 ‘마라토녀(女)’가 되어 있었다.
#5. 大會出戰(머리 얹기)
2017년 여름의 남산 정모에서 시작된 나의 마라톤 여정은 거침없이 달려갔다. 거의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참여했던 정모의 뒤풀이 자리에서는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마라톤의 ‘3대 메이저 대회’ 이야기가 무용담으로 흘러 나왔고, 그 해 마지막 남은 ‘춘마’의 휘마동 공식 참가에 따라 이번에도 순전히 얼떨결에 – ‘나는 할 수 있다.’가 아니라 ‘너는 할 수 있다.’는 격려인지 꼬드김인지에 넘어가 - ‘푸-ㄹ 코스’에 도전하게 되었다. 언젠가 정모 뒤풀이 자리에서 어떤 선배가 “연습에서 5km를 뛰면 실제로는 10km를 뛸 수 있다는 거고, 10km를 뛰면 실전에서는 하프 코스를 뛸 수 있다는 거야. 그러니 너도 충분히 풀 코스를 완주할 수 있어.”라고 한 말이 기름을 부운 격이었다.
그 동안 10km는 빠르지는 않아도 쉽게 연습해 왔고, 하프 코스 또한 몇 차례해서 두려운 건 없었지만, ‘풀 코스’는 연습이든 실전이든 해본 적이 없어 신청한 순간부터가 근심의 시작이었다. 낮에도 ‘끙끙’, 밤에 자면서도 꿈속에서 ‘낙오하면 어쩌지... 끙끙’, 어쩌다 신문이나 TV 뉴스에서는 ‘마라톤 대회 중 사망’이라는 기사도 눈에 띄었다.
아무튼 하루하루 시간의 수레바퀴는 굴렀고 대회 당일이 되었다. 나는 밤잠도 설치고 새벽같이 일어나 밥 먹고 – 대회 중 배고프면 안 되니까 –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고 - 대회 중 싸면 안 되니까 – 잠실 경기장 앞에서 ‘휘풍당당’ 스쿨버스를 탔다. 옆 좌석의 朴女史는 내 심정도 모르고 ‘위풍당당’했다. ‘아, 나도 객기 부리지 말고 10km만 할 걸’하는 후회도 밀려왔다. 30년 전에 특전사에서 ‘공수훈련’을 받을 때, 낙하산을 메고 ‘C-123’ 군용 수송기에 앉아 미사리 백사장에서의 첫 강하를 앞두었을 때의 심정이 이랬을 것이다.
춘천에 도착하여 수만 명의 마라토너들이 바글바글한 모습은 장관이었다. 온 나라의 마라토너들이 모두 모인 듯 어수선 했고, 소변은 왜 그리 자주 마려웠던지, 화장실에 가면 길게 줄을 서 있고, 결국 요령껏 길가 풀섶에 실례를 해야만 했다. - 다음 해 동아마라톤 대회에서는 광화문 한 복판의 정부청사 담벼락에 실례를 했는데 꽤 많은 사람이 하고 있어 덜 미안했다. -
선수들부터 출발하고, 차례로 기록이 낮은 사람 순으로 해서 드디어 나도 출발했다. 초반의 언덕배기를 힘겹게 올라 달리노라니 먼저 출발한 사람들이 다시 얼굴을 보였고, 함께 뛰던 회원들은 어느 새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5km, 10km를 지나면서 왼쪽 발바닥이 아파와 두 겹으로 신은 양말이 접혀서 그런가 하는 생각에 신발을 벗고 살폈지만 괜찮아 보여서 다시 신발끈을 조이고 뛰었다. - 지금 생각해도 웃기는 건, 무슨 대단한 기록을 세울 것도 아닌데 이런 사소한 일로 시간을 소모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서둘러 신발을 벗고 신고했던 일이다. ㅋㅋ – 하지만 20km를 지나면서 다시 발바닥이 아파왔고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는 느낌이어서 양말 하나를 벗었다. 아픔은 계속됐고 결국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30km인가 35km인가를 지나 뛰다가 걷다가 할 때, 나와 함께 처음 풀코스에 도전하는 동진 후배(77회 강동진)가 길가에서 민규(74회 서민규)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리에 쥐가 났다고 한다. 나는 내 갈 길을 계속 갔고, 그래도 몇 km 남지 않았다고 다짐하며 결국 피니쉬 라인을 통과했다.
기록은 42.195km, 05:35:34. 朴女史는 10km, 01:05:59.
다섯 시간을 30분이나 넘긴 피니쉬 라인의 풍경은 시골 장터의 ‘파장’ 분위기였지만, 朴女史가 반갑게 맞아주었고 한구가 끝까지 남아 사진도 찍어 주었다.
시내의 목욕탕으로 걸어가면서 朴女史는 말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 낙오한 줄 알았어요.”
“…….”
“혹시나 하고 기다리다 멀리서 뛰어오는 모습이 보여 눈물 났어요.”
“…….”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첫댓글 휘마동 더큐를 봅니다
이렇게 좋은 글을 남기셨네요
72회 홧팅!!
멋진글 잘 읽었습니다. 휘마동 가입전분터 지금까지 같이한 친구라 내용이 솔솔 귀에 들어오네요. 정은영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