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학원과 강사에 대한 불신을 낳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여러분들의 합격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말이라고 판단하면 어떤 얘기라도 칼럼연재에 넣고 싶습니다. 그렇기에 언젠가는 꼭 해야겠다고 생각해 온 얘기입니다.
수험생과 강사 사이에 성립하는 2가지의 법칙이 있습니다. 먼저, 제1법칙입니다.
★ 수험생과 강사 제1법칙 ★
수험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시험에 붙는 것이고, 강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다루지 않은 것이 시험에 나오는 상황이 있어선 안 되는 것이다.
시험 하나가 끝나고 수험생들 사이에서 "요번 시험 무슨무슨 문제가 P강사의 어느 책에 있는데 Q강사 책들 중에선 없었대" 이게 되면 Q강사는 곧바로 외면을 받게 됩니다. 수험가 입소문이 어디 보통 빨라야 말이죠.
강사들이 문어발식으로 특강과 교재를 계속 만드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마구잡이로 개설한 그 무수한 강의들 중 어디께라도 있으면 '적중률 높은 강사'가 됩니다. 설령 강의에서 안 다뤘어도 자기 여러 책들 중 하나의 구석탱이에 어떤 식으로라도 처박혀 있으면 "내 책에 다 있다"가 되고, 그 <내 책에 다 있다>를 만들기 위해 책도 갈수록 늘어납니다.
이렇게 적중률 지상주의는 온 수험가를 뒤덮습니다. 강사들은 다들 자기 과목에서 최고의 전문가들이지만, 그들은 수험생이 많은 과목을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 방대한 곁다리 강의들과 그 많은 책들을 수험생이 다 체화해서 시험장에서 샥 뽑아들 수 있는 수준으로 익혀서 출전할 수 있는지는 관심사가 아닙니다. 단지 자신이 언급하지 않은 게 시험에 나오는 상황을 최소화해야만 적중률 높은 강사로 살아남고 아니면 도태되는 구조입니다.
"자기 수강생 많이 붙으면 강사도 좋잖아요?"
물론이죠. 자기 수업에서 합격자 많이 나와서 싫을 강사가 어딨나요? 그러나 잊지 말 것은, 대형학원에서 한 클래스만도 수백 명이 넘어가고 인강 수강자까지 수천 수만 명에 달하면 그 중 누가 떨어져도 다른 누군가는 붙고 전체 수강생 대비 합격자 비율은 항상 그게 그거라는 점입니다.
이러니 어떻게 강사한테 양 줄여 주기를 바라겠습니까? 결국 '어디까지 양을 잡고 들어가느냐?'에 대한 판단은 오로지 수험생의 몫으로 남습니다. 내게 허락된 시간과 내 머리가 수용할 수 있는 양을 생각해서 어디까지만 확실히 내 것으로 만들고 그 바깥은 버리겠다는 판단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 판단은 강사도 그 누구도 대신해 주지 못합니다.
지금 이거, 강사들을 매도하려는 게 전혀 아니니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경제학을 공부하신 분들은 '합리적 선택'이라는 말의 뜻을 아실 겁니다. 어디까지나 그들은 '합리적 선택'을 하는 거예요. 그들을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그들도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고, 적중률 지상주의 하의 치열한 경쟁에서 생존해야 하고, 입소문으로 한 방에 훅 가는 거 일도 아닌 것을... 누굴 탓하겠습니까?
그러면 강사들이 이렇게 진화해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 수험생과 강사 제2법칙 ★
공급자인 강사가 무한히 양을 늘려 가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수요자인 수험생들이다.
수험생들이 원하는 건 시험에 나올 수 있는 모든 내용을 어떤 식으로든 언급한 강사입니다. 수험생들이 원하니 이렇게 되는 겁니다. 수요자가 원하는 대로 공급의 형태가 결정되는 것은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듯 당연한 자연현상입니다.
내가 주어진 시간에 어디까지 소화할 수 있나를 감안하지 못합니다. 꾸역꾸역 받아 먹다 일으킬 소화불량을 감안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한번에 짊어질 수 있는 무게에 한계가 있는 것처럼, 엘리베이터에 탈 수 있는 사람 수에도 한계가 있는 것처럼, 시험날 내 머릿속에 넣어갈 수 있는 정보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감안하지 못합니다. 암만 많은 강의를 듣고 많은 책을 봤어도 시험장에서 떠올려 내지 못하면 말짱 헛짓거리란 사실을 감안하지 못합니다.
그냥 닥치고 모든 것을 다뤄주는 강사여야 마음이 편한 겁니다. 내가 붙으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공부인가에 대한 고민보다, 이 순간 마음 편한 공부를 하는 게 우선이 됩니다. 그리고 그게 잘 하는 공부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모든 경제문제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재화의 희소성이듯, 모든 공부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시간의 희소성과, 기억용량의 희소성입니다. 이 두 제약조건에 대한 인지가 수험생의 모든 고민의 출발점입니다. 강사는 그 고민을 대신해 주지 않습니다. 오직 '적중률 100%'만 되면 그만입니다. 합리적인 선택에 의해서.
우리가 이렇게 만든 겁니다. 수험생의 고질병인 그 완벽주의가 강사들을 이렇게 만든 겁니다. 강의 추가개설, 책 추가집필이라도 좋으니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을 언급해 주는 강사라야 안심이 되고, 우리는 그런 강사를 적중률 짱인 족집게 강사라고 말합니다. 진짜 수험적으로 적합하게 콤팩트한 커리를 구성하는 강사는 적중률 떨어지는 강사로 간주합니다(학원에서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명강사의 아우라에서 나오는 권위는 수험생에게 그를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닐 것을 말없이 종용합니다. 적중률의 환상만 멍하니 좇으며 아무 생각 없는 공부를 합니다. 사실은 99%가 떨어지는 시험인데 99%를 따라합니다. 그리고는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1년 죽어라 달리고 보니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습니다.
시험을 봅니다. 떨어집니다. 명강사의 강의란 강의는 다 찾아다니고 책도 죄다 봤는데 이렇게 많은 공부량으로도 왜 안되나 이유를 모릅니다.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안 되니 이걸 정말 계속해야 하나 자괴감에 빠집니다. 사람의 노력만으로 되는 시험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공시는 운 싸움이라고 강변합니다. "에잇 1818 더러운 공시 퉤퉤" 하면서 떠납니다.
수험가에 우리를 위한 광고는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모든 광고는 우리가 아닌 저들을 위한 광고입니다. 강의와 수업교재를 만듭니다. 수험생을 빠르게 붙여 주기 위한 게 아니라 오래오래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기획사인 학원의 설계에 꼭두각시가 된 강사들은 학생들 앞에 얼굴마담으로 서서 안도감을 줍니다. 너무나 많은 강의와 책을 권합니다. 기본서 메인수업 외에 이 수업 저 수업 밑도 끝도 없이 개설됩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졸려 뒈질 지경입니다. 졸다 깨어 둘러보니 앞 놈도 옆 놈도 고개가 까딱까딱 궤도를 그리다가 덜컥 궤도를 이탈합니다. 우린 그렇게 강의와 수험서의 홍수에 빠져 익사합니다.
미네랄, 모두가 우리 수험생들 자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모두가!
이 기괴한 악순환 속에서, 대부분 이 그림을 보지 못한 채 의미 없이 시간만 허비합니다. 어느 시점을 넘어가면서는 갈수록 실력이 떨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암만 많은 시간과 비용을 쏟아 부어도 시험에 합격하기는 어려운 현재 수험가의 모순적 구조, 이것에 대해 수험생들의 자각이 시급한 상황입니다.
우린 꼭 알아야 합니다. 책은 기본서 한 권과, 기출문제 모음집과, 똘똘한 문제집 두어 권이면 충분하고도 넘칩니다. 특정 부분이 취약하면 인강의 해당부분 반복청취 등으로 보충해 주면 충분합니다. 어차피 과목 수를 고려하면 그 이상은 천재가 아닌 한 내 것으로 완전히 소화할 수도 없고, 억지로 공부한다 해도 시험장에서 떠올려 낼 수도 없습니다.
저는 다시 크게 외칩니다. 완벽한 공부를 추구하지 마십시오. 시험에 떨어지는 것은 내 기본서에 없는 내용 때문이 아니라 내 기본서와 기본강의에 있던 것, 그리고 그 연관내용을 자유자재로 정확히 써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본서에 완전히 없는 건 어떡해?" 이건 전형적인 장수생의 사고입니다. 그런 건 미련 갖지 말고 깨끗이 찍고 온다 생각하세요. 설령 낮은 확률로 출제되어도 어차피 남들도 모릅니다. 맞으면 좋고 틀려도 안 떨어집니다. 특정 곁다리 책이나 곁다리 강의에만 있는 것을 건지려고 불안감에 이리저리 '보충용' 강의 찾아다니고 책 사면서 거기에 집착해서는 절대 고득점 안 나옵니다. 그리고 설령 그러다가 봤었다 해도 시험장에서 그게 바로 탁 떠올라서 맞힌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한 문제당 평균 1분도 안 주어지는 시험장에서, 그 막대한 내용들이 얼마나 기억나더이까? 시험시간 내내 느껴지는 그 무력감을 위해, 시험 직후 느껴지는 그 허무함을 위해, 그리고 시험장에서 정작 써먹지도 못한 그 많은 지식들을 위해 그동안 꼴아박은 시간은 대체 얼마였습니까?
어차피 애버리지 85점만 넘으면 붙고 그걸 달성하는 이는 전체의 1% 정도인데 전체의 99%는 애버리지 100점을 위한 공부를 하고, 공부하는 모습만 보면 다들 전과목 올백 찍을 태세입니다. 그런데 너도 나도 명강사를 쫓아다니며 문어발식 공부를 한 그 무수한 사람들이 [한 권의 기본서 + 하나의 기본강의 + 혼자 정리하는 기출문제 + 혼자 하는 문풀, 그러면서 찾아 보기]만 딱 잡고 들어가서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던 사람들보다 실제로 몇 점을 더 득점하던가요?
수험생 여러분. 300만큼 다뤄 주고 90%를 커버하는 강사보다는, 100만큼 다뤄 주고 80%를 커버하는 강사가 실은 더 좋은 강사입니다. 나머지는 내가 완성해야 하는 퍼즐입니다. '강의로는 70~80%만 완성하겠다'는 마음으로 가야지 강의가 나를 커트라인 위로 멱살 잡고 하드캐리해 줄 거란 기대는 애초에 무리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최소 5년은 해야 할 텐데 그런 상황은 아무도 원하지 않을 거고, 더 큰 문제는 정작 그 5년 뒤에는 공부할 것은 더 많아져 있고 경향도 달라져 있다는 점입니다.
저요? 말씀드렸듯 저 특출나게 머리 좋은 것도 아니고, 무슨 리걸마인드나 전공상의 베이스를 가지고 달려든 것도 전혀 전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냥 시간 내에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알았고 나 자신에 대한 분석을 잘한 것뿐입니다.
끝으로, 성 프란체스카의 유명한 기도문의 일부를 인용하며 오늘의 칼럼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곳곳에서 너무 자주 인용되어 사람에 따라서는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오늘 칼럼을 이것보다 더 잘 압축할 수 있는 말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냥 훑기만 할 뿐 십중팔구 내가 시험장에 가는 머릿속에 꾸려갈 수 있는 범위에 포섭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더 중요한 것들의 기억이 흐릿흐릿해져서 총점은 오히려 떨어지죠. 사실 알고 보면 당연한 결과인데, 이게 많은 과목의 총점을 가지고 순위를 가린다는 걸 많은 분들이 잊어서 일어나는 일이죠... 사람 기억량의 한계를 잊고 완벽하게 최대한 많이 가져가려고 욕심내다 보니 그렇습니다. 수험생의 고질병인 완벽주의와 학원의 불안마케팅이 낳은 합작품입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9.01.07 01:31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9.01.07 08:34
첫댓글 학원에서 나오는 수기였다면 절대 언급할 수 없는 주제인데 고맙습니다. 처음에 강사 찾아보면서 ‘적중률’ 신화에 흔들렸는데 막상 시작해보니 기본양에 놀라서 내가 소화가능한지가 중요한거 같더라구요
수험은 절대 지엽적이거나 빈도수 낮은 내용의 숙지 여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 아닌데, 수험생이 되면 이 하나의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참 어렵나 봐요. 근데 어디 가서 이 말 하면 도리어 "당신 공시 잘 모르나본데..." 이런 말이 돌아오더라고요.
시험 끝나고 기본서에 없는 내용이 나왔다고 다른책을 찾아보면서 양을 늘린 경험이 있어서 공감이 가네요. 이러면 오히려 점수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냥 훑기만 할 뿐 십중팔구 내가 시험장에 가는 머릿속에 꾸려갈 수 있는 범위에 포섭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더 중요한 것들의 기억이 흐릿흐릿해져서 총점은 오히려 떨어지죠. 사실 알고 보면 당연한 결과인데, 이게 많은 과목의 총점을 가지고 순위를 가린다는 걸 많은 분들이 잊어서 일어나는 일이죠... 사람 기억량의 한계를 잊고 완벽하게 최대한 많이 가져가려고 욕심내다 보니 그렇습니다. 수험생의 고질병인 완벽주의와 학원의 불안마케팅이 낳은 합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