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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광석시인과 태안 *
글/사진 김경식
구월도 하순으로 접어드는 날 오후 늦게 만리포를 향해 달린다. 서산의 마애석불과 보원사지, 개심사, 해미읍성을 답사하고 우리나라 서쪽 땅끝 만리포를 향해 저녁 길을 달린다. 서산에서 태안을 거쳐 만리포에서 소멸하는 32번 국도는 멀고 길다. 그러나 대한민국 육지의 가장 끝 마을 만리포 가는 구월의 저녁 길은 아름답다.
아침과 저녁의 기온차가 심하다고 하지만 유난히 이날 밤은 구월의 밤치고 살결이 오싹할 정도로 차갑다. 주변이 훤하게 밝아지더니 만리포해수욕장의 입구에 닿는다. 만리포해수욕장은 폭풍우에 흰 물결이 넘실거린다. 9월의 해변가에서 문득 생각나게 하는 시는 문병란 시인의 '구월이 오면' 이라는 시다.
만리포해수욕장
9월이 오면
해변에선 벌써
이별이 시작된다.
나무들은 모두
무성한 여름을 벗고
제자리에 돌아와
호올로 선다.
누군가 먼길 떠나는 준비를 하는
저녁, 가로수들은 일렬로 서서
기도를 마친 여인처럼
고개를 떨군다.
후회는 이미 늦어버린 시간
먼 항구에선
벌써 이별이 시작되고
준비되지 않은 마음
눈물에 젖는다.
문병란 시인의 시 -- ‘구월이 오면’ 부분
그렇다. 구월의 밤 바닷가 바람속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별의 소리가 들린다.
여름의 그 열기는 모두 사라지고 소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가슴을 저민다.
서해안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접근이 용이한 곳이 태안반도다. 과거에 만리포는 유명한 해수욕장이긴 했어도 사실 오지나 다름이 없었다. 서해안 기름 유출사고 후에 많은 자원 봉사들이 이 바닷가에 인간띠를 연결하며 사투에 가까운 제거작업을 한 상흔이 있는 곳이다. 이제 서해바다는 다시 유출사고 전으로 돌아갔지만 이곳에는 자원봉사자들의 사랑과 봉사의 향기가 숨어있다.
바닷가를 몇 번 오고가는데 불빛아래서 우뚝 솟은 자연석이 서 있다. ‘만리포사랑 노래비’이다. 잘 생기고 하얀 화강암 바위가 마중을 나온 사람처럼 반갑다.
만리포노래비
똑딱선 기적소리 젊은 꿈을 싣고서
갈매기 노래하는 만리포라 내사랑
그립고 안타까워 울던 밤아 안녕히
희망에 꽃구름도 둥실 둥실 춤춘다.
점찍은 작은 점을 구비 구비 돌아서
구십리 뱃길위에 은비늘이 곱구나
그대와 마주앉아 불러보는 샹~송
노젖은 뱃사공도 벙실 벙실 웃는다.
수박빛 썬그라스 박쥐양산 그늘에
초록빛 비단물결 은모래를 만지네
청춘에 젊은 꿈이 해안선을 달리면
산호빛 노을속에 천리포도 곱구나.
반야월 작사와 김교성 작곡하였는데, 지금은 고인이 된 가수 박경원 선생이 노래를 불렀다. 한 때 이 노래는 국민가요가 될 정도였다. ‘만리포 사랑’의 노랫말을 읽으니 자연스럽게 노래로 불러진다.
누가 이 곡을 뽕짝이라고 무시하겠는가. 이 노래에는 우리네 삶과 이별, 희망이 서정적인 시정으로 가득하다. ‘만리포사랑 노래비’가 우뚝 서 있는 밤바다는 계속해서 강한 바람에 요동치고 있다. 대한민국의 서쪽땅 끝임을 알리는 ‘정서진’ 표석이 땅바닥에 누워있다. 북쪽의 끝에는 중강진, 남쪽엔 정남진, 동쪽으로 정동진, 서쪽엔 정서진이 있다.
지금 나는 육지의 서쪽 끝에 서 있는 것이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꼭 중강진에도 가보고 싶다. 철썩이는 만리포해수욕장에는 인적이 없다.
서둘러 바다가 보이는 펜션에 숙소를 정하고 바람소리를 듣는다.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여기 태안반도 서쪽 땅 끝에 와서 내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을 생각한다. 어둠속에서 화려하게 왔다가 사라지던 펜션의 뾰쪽 지붕들이 낭만적인 가슴을 마구 찌르고 창밖의 바람은 영혼을 흔들고 있다.
이곳에 오면 한 시인을 찾고 싶어진다. 안면도가 고향이며 시와 평론을 쓰면서 불꽃처럼 살다가 떠나간 사람은 누구던가. 아직 세상 사람들에게 무명인 채광석 시인(1948~1987)이다.
밤이 늦도록 만리포 앞바다를 보면서 그가 쓴 시 한편을 찾는다. 이 속에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낭만적 그리움이 스민 간절한 사랑시가 그대로 살아서 꿈틀거리기 때문이다. 하긴 전쟁중에 사랑은 더욱 간절하고 소중하게 빛난다고 하지 않던가.
흙을 뒤엎으면 이상 한파의 심장 속에서
스스로 새싹을 키워 온 꽃순들을 만나느니
우리들은 버리운 계절의 고동을 귀에 담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사랑이여 너마저 잠재우는
시대의 곤고함과 자아의 무반성을
통채로 흔들어 깨우며
우리는 다시 죽어야 한다 봄에 눈을 뜨는
새싹들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사랑 속에서
사랑과 함께 죽어야 한다.
채광석 시인 시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부분
만리포 소나무숲
80년대의 문학은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이런 수난의 시대에 시인들은 펜을 들어 시대를 대변하여 '민중시인의 시대'라고 칭하기도 한다.
1980년 당시 5월 광주는 진보적인 시인들에게는 양심적인 부채이자 시심의 근원이 되었다.
이 무렵 채광석 시인은 진보적이며 문학적인 권력의 왼팔이며 지식인 담론의 중심적인 생산자였던 '창작과 비평'지의 그늘 아래서 안주하던 문학평론가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채광석은 용감하게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고난당하는 민중 속에서 호흡하는 문학을 찾아내려 노력한다.
이 때 채광석 시인이 발견하려고 한 것은 노동자 시인중에서 그들을 직접 대변하는 작가였다. 박노해 라는 무명의 노동자 시인을 발견하고 광맥에서 금을 찾 듯 기뻐한다.
자신이 오랫동안 갈구하던 기층 서민의 문학적 이론을 증명해 줄 시인의 출현은 채광석 시인에게는 설레임이었다. 당시 박노해의 시를 읽은 지식인들과 보수 문인들의 당혹감은 크고 놀라웠다.
채광석 시인은 1948년 7월 11일 충남 태안군 안면읍 창기리에서 4남2녀 중 차남으로 출생한다
고향마을의 창기초등학교와 안면중학교를 졸업하고 대전고등학교에 입학한다. 분명 채광석 시인은 이곳의 자연과 풍습 속에서 자란 태안의 순박한 아들이었다. 이런 그가 달라진 것은 1968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에 입학하면서 부터다. 진실을 알고 실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의리와 의협심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실천이 없는 진리를 얼마나 떠들며 다니고 있었던가. 채광석은 달랐다. 1971년 강제 징집되어 군대생활을 마치고 복학한 이듬해인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다. 긴급조치를 항의하는 집회가 서울대에서 열렸는데 주모자로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서 1977년 6월 24일까지 만 2년 1개월간 감옥생활을 한다. 당시의 집회를 오늘날과 비교한다면 큰 오산이다. 당시에 집회 참여자는 무조건 감옥행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 창작은 이때부터 왕성하게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많은 옥중시가 창작된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강정숙에게 많은 편지를 띄어 보낸다. 이 편지들이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형성사, 1981)라는 제목으로 간행되기에 이른다.
펜션의 창문을 열면 어둠속에서 만리포해수욕장의 해수면이 희미한 불빛에 넘실거린다.
계속해서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소리는 밤새 계속되었나 보다. 어느 시간 불현듯 잠이 들었고 창문을 여니 아침이다. 밤새도록 강하게 불던 바람은 이제 잠이 들었다. 본래 숙소를 홍익대 연수원으로 하기로 하였는데, 큰 방밖에 없어 오히려 아주 작은 펜션으로 선택했다.
구월의 아침, 잠에서 깨어나 보니 햇살은 눈이 부시고 바람이 사분거리며 불어 기분이 상쾌하다. 이제 본격적인 태안의 여러 곳을 탐방하여야 한다. 태안의 역사와 자연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문지리학적인 약간의 지식이 필요하다.
만리포해수욕장에 있는 홍대수련원
태안군은 해안선이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과 낮은 산들이 연결되어 있는 구릉지대가 대부분이다. 지금은 서해안 고속도로 완공과 서해안 개발에 힘입어 임해휴양지역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태안읍과 안면읍을 중심으로 6개면이 서해바다와 천수만에 인접하고 있다. 6만여 명의 사람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 태안의 역사는 아득하다.
삼한시대에 마한(신소도국),백제(성대혜현), 통일신라(소태현),이란 이름으로 불리어 지다가 고려시대 충렬왕때 비로소 태안군이란 이름을 얻는다. 1914년 군과 면의 폐합으로 태안군이 폐지되고 서산군에 병합되어 버린다. 1989년 서산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75년 만에 다시 태안군으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태안의 지형은 서산의 가야 산지에서 뻗어 나온 지맥이 백화산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이어져 나간다. 이런 산지들이 서해로 침강하여 많은 반도와 섬을 만들어 놓았다. 많은 간척지가 조성되어 제법 넓은 평야들이 태안군에 존재하게 되었다.
태안 인근의 바다에는 제주해류가 흘러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에서 가장 따듯하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역이지만 약 45%의 주민들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태안 주민들이 거의 대부분 관광 산업에 종사한다는 것도 어찌보면 오해일 수 있다.
가장 먼저 만리포 해수욕장 해송숲을 몇바퀴 돌면서 천리포 해수욕장을 찾아 나선다. 버려진 땅을 의미있고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만들어 평화와 기쁨을 준 사람이 있다.
민병갈( Carl Ferris Miller)씨다. 그는 1962년의 어느 날 만리포 해변가를 걷는다. 이 때 한 노인이 나타나 지금은 수목원이 된 땅의 일부를 구입해 줄 것을 제안한다. 자신의 딸이 시집을 가는데 혼수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때 그의 다급한 부탁의 청을 들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오늘의 수목원 땅이 된다. 그가 땅을 산다고 소문이 퍼지자 계속해서 인근의 땅 주인들도 땅을 사줄 것을 부탁하여 지금은 그 영역이 18만평에 이른다. 1970년부터 이 땅에 별장을 건립하고, 식물들을 지속적으로 수집 관리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천리포수목원의 기원이다.
충남 태안반도 끝자락에는 백리포, 천리포, 만리포가 이어져 있다. 이중 만리포 해변이 가장 유명하지만 천리포 또한 그 못지않게 유명하다. 바로 천리포 수목원이 있기 때문이다.
안면도 자연휴양림
이 수목원의 관리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자신은 한국은행에 근무하며, 증권회사의 고문역을 감당하면서 이곳에 정열적으로 투자를 한다. 비로소 2000년에는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증을 받는다. 이것은 세계에서도 12번째, 아시아에서는 최초의 인증이다. 천리포 수목원에는 많은 수종이 있지만, 마그놀리아(magnolia)라 칭하는 목련과 호랑가시가 대표 수종이다.
그는 진정으로 나무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나무 사랑의 첫걸음은 바로 관심을 갖는 거예요. 그 하나하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꽃이 언제 피는지, 열매는 어떤 모습인지, 오늘은 어제보다 키가 얼마나 컸는지, 어디 아프거나 목이 마른 것은 아닌지 배려하는 마음은 그 다음 단계죠. 자연이 겪고 있는 아픔을 외면하는 사람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자격이 없어요.” 그의 말이다.
18만평에 이르는 천리포 수목원은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니라, 나무를 위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영에 어려움은 겪고 있지만 함부로 사람을 받지 않는다. 나무를 지켜줄 뿐 나무의 주인 노릇을 하지 말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를 위한다는 핑계로 몸통에 영양주사를 놓고, 해충을 없앤다고 살충제를 쓰는 것은 생각도 못한다. 다른 수목원처럼 나무를 예쁘게 키우기 위해 가지를 치고 잎을 다듬고 더 좋은 곳으로 옮겨 심을 수도 없다. 나무를 최대한 나무답게 놔두는 것, 자연을 자연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그 덕분에 천리포 수목원은 정말 자연스럽다.
천리포수목원의 창립자 민병갈씨는 비전이 장기적이며 큰 인내심의 소유자였다. 몇 십 년의 안락과 단기적인 성과를 기대하였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수목원은 지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생은 길어야 백 년이지만 나무는 천 년까지 삽니다. 나는 적어도 3백 년은 내다보고 수목원을 시작했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도 자식처럼 키운 천리포 나무들은 몇 백 년 더 살며 내가 제 2의 조국으로 삼은 한국에 바친 마지막 선물로 남기를 바랍니다. 내가 평생을 통해 나무를 가꾸면서 깨달은 것은 수목원 사업은 영원한 미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수목원을 조성하는 일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는 사심이 없던 사람이었다. 증권전문가로서 수입은 많았지만 일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수목원을 조성하는데 모두 사용한다. 인간성도 좋았다. 타인에게는 끝없이 후덕했으나, 자신에게는 매우 인색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승용차를 24년간 사용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여 우리에게 큰 선물을 주고 떠나간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면서
천리포수목원을 출발한다.
안면도로 진입하기 전에 태안의 지도를 펴고 들여다본다.
최북단 ‘꾸지나무골 해수욕장’에서부터 최남단 ‘바람아래 해수욕장’까지 이름이 있는 해수욕장이 31곳이나 된다. 안면해수욕장 소나무 숲에 채광석 시인의 시비가 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정보였다. 이것을 안면해수욕장에서 알게 되었으니 토요일이고 정보를 알 길이 막막하다. 태안군 문화관광과에 연락하였으나 담당도 모른다고 한다. 한참 후에 다행스럽게 전화 연락이 왔다.
" 안면휴양림에 있다고 합니다 유~"
꽃지해수욕장
이내 ‘꽃지해수욕장’까지 내려 갔다. 안면도국제꽃박람회가 개최되는 장소라 주차장 넓이가 이만저만 넓은 것이 아니다. 이곳의 일몰이 서해안에서는 으뜸이라고 하였는데 아직은 오전 햇살이 눈부시다. 충남 태안군 안면읍 승언4리에 위치한 꽃지해수욕장은 할미, 할아비 바위 사이로 사라지는 일몰이 장관이라고 한다. 이 바위에는 전설이 있어 의미있다. 신라42대 흥덕왕 4년에 장보고가 지금의 전남 완도인 청해진을 기점으로 하여 북으로는 장산곶, 중앙부로는 견승포(안면도 방포)를 기지로 삼아 주둔 하였을 때 일이다. 그 기지에는 승언이라는 한 사내가 있었는데 부인과 금슬이 매우 좋았다.
어느 날 명령을 받고 떠난 남편인 승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승언의 아내 '미도'는 일편단심으로 그를 기다리다 죽어서 바위가 된다. 이 바위가 할미 바위이다. 1,10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은 저 바위를 보면서 전설같은 이야기를 후대로 전하고 있다. 몇 천년은 더 이야기 하게 되리라.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은 이렇게 슬프고 애닯아 자연도 감동시키는 것인가. 안면읍 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4km쯤 떨어져 있는 꽃지해수욕장은 길이가 3.2km, 폭 300m의 큰 해수욕장이다. 경사도 완만하고 바닷물도 깨끗하다. 썰물때는 조개를 캐고 갯바위에서 게를 잡는 사람들로 연일 붐비는 곳이다.
할미바위
안면도의 해송숲은 유명하다. 안면도 소나무인 ‘안면송’은 경북 춘양목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얻은 소나무 품종이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 주는 붉은 줄기의 소나무는 옹이가 적고 곧게 자란다. 안면도의 이 소나무들은 다른 곳의 소나무들보다 키가 크다. 습기 많은 해양성 기후와 이곳의 토질 덕분이다. 안면도 소나무는 경복궁을 중건하는데 중요한 재목으로 쓰였다.
안면도(安眠島)는 글자를 해석하면 편안할 안, 졸면 , 섬 도자다. 졸면서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섬이 안면도다. 과거에 안면도는 한자의 뜻처럼 편안히 졸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관광객이 몰려와 차량행렬이 줄비하다.
안면도는 통일신라시대(고랍국) 고려시대(안면소)조선전기(안상면) 조선후기(안면소, 안면곶)이라 불려왔다. 편안하다라고 하는 安(안)자 이미 고려 때부터 쓰였다. 이곳의 인심과 사람들의 인심을 알만하지 않은가. 안면도가 본래 섬이 아니었던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1638년 인조때에 남면 굴항포와 창기리 서북단을 절단하고 부터 섬이 되었다.
안면도는 동쪽으로 천수만과 서쪽으로 서해바다를 향하고 있다.
안면도는 산이 낮고 산림이 우거진데 특히 소나무 숲이 유명하며 기후가 온화하다.
적송과 흑송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궁궐을 건립하는데 쓰여졌다. 산림도감에도 '안면송'이라고 별도로 적혀 있을 정도다.
안면도는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꽃게, 바지락, 어리굴젓 대하등은 안면도의 별미다,
꽃지 삼거리에서 고남, 영목항쪽으로 직진하다 보면 소나무 숲 사이로 오른쪽에 연두색 수목원의 담이 보인다. 왼쪽에 휴양림 매표소가 보이고 주차장이 있어서 좌회전을 해야 하는데 조심해야 한다. 반대편 차선에서 오는 차량들이 과속을 하기 때문이다.
안면도자연휴양림
‘안면도자연휴양림’이다. 안면송이 끝없이 펼쳐진 산자락에는 솔향기가 그윽하게 퍼진다. 수목원지구에는 한국전통정원과 13개의 자생식물원이 옹골차고 아름답게 들어서 있다. 아산정원은 정자,누정, 백제시대 모습의 연못 등 역사적으로 조상들과 함께 했던 우리네 멋스런 삶의 편린들을 만날 수 있다.
안면도에는 국내 유일의 소나무 천연림으로서 수령 100년 내외의 안면 소나무 천연림이 자라고 있다.
430ha에 넓은 지역이라 제대로 다 돌아 보려면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이곳은 고려시대부터 궁궐에서 사용하는 목재와 배를 만드는 목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왕실에서 특별 관리를 하였다. 이곳은 안면대교를 건너 영목항 방향으로 15km 지역에 있다.
휴양림 주차장 위에 있는 송림 숲사이로 채광석 시인의 시비가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설레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시비에 접근하면 시인의 시비가 반긴다.
시비에는 채광석 시인의 시 ‘기다림’이 새겨져 있다.
이름모를 산새들 떼지어 날고
계곡의 물소리 감미롭게 적셔 오는
여기 이 외진 산골에서
맺힌 사연들을 새기고
구겨진 뜻들을 다리면서
기다림을 익히히라
카랑한 목을 뽑아 진리를 외우고
쌓이는 낙엽을 거느리며
한 걸음 두 걸음 조용히 다지다가
자유의 여신이 찾아오는 그날
고이 목을 바치리라
대를 물려 가꿔도 빈터가 남는
기름진 고독의 밭에
불씨를 묻으리라
-- 채광석의 시인 시 '기다림' 전문
채광석 시인 시비
토요일이라 주차장이 만원이고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지만, 채광석 시인의 시비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소나무 숲에 특이한 구조물이 있어 관심을이 있을 법도 한데 이상하게 사람이 접근하지 않고 있다.
시대가 변하여 그를 알아줄 사람이 없기도 하거니와 모두들 복잡한 이론이나 문학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모두들 살기가 팍팍하고 일상의 삶이 분망하며 시간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사람들을 이렇게 만든 것인가? 돈을 많이 벌고 있는데 지출이 많기 때문인가? 살만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물어보면 돈 타령이다.
저마다의 삶속에서 모두들 허덕이며 궁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학생들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몇 편의 시도 외우지 못 할 뿐만 아니라 알만한 문인들의 이름도 알지 못한다. 세계적으로 독서는 꼴찌에서 몇 번째다.
생활하는 공간인 아파트와 주택에 모든 자금이 동원되어 많은 이들이 빚에 허덕이고 있다.
아이들 교육에 목숨을 건 사람처럼 너 나 할 것 없이 살아가고 있다. 학원과 과외 학습이 전부인양 야외에 나오면 일단은 공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본다.
그래도 이렇게 안면도 수목원까지 찾아온 사람들은 행복한 분들이다. 저분들이 소나무 숲속을 걸으면서 자신이 살아온 날들에 감사하고 살아가야 하는 날들에 희망을 가질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안면암에서 바라본 천수만
채광석 시인은 1970-80년대의 권위주의 시대에 온 몸으로 참다운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하며 살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987년 7월12일 민주화 운동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사고 당시 채광석 시인의 주머니에는 동전 150원이 있었다.
100원짜리 동전 하나와 50원짜리 동전 하나의 가난한 삶이었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 잘 살 수 있는 주변의 여건이 있었음에도 소외되고 가난한 자를 대변했던 그의 삶은 늘 고단하고 가난했다. 자신이 거쳐할 방 한 칸도 마련하지 못했던 시인 채광석의 문학적 역량은 대단했다.
그러나 그의 시와 평론은 아직 제대로 선양되지 못하고 있다.
문학평론가이기도 했던 채광석 시인은 현실을 벗어난 문학풍토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아름다운 취미생활이나 가식적 삶을 벗고 대중적 삶의 토대에서 문학이 출발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문인이었다.
옳은 일이라면 글로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이 채광석 시인이다.
안면암 입구
안면읍에서 채광석 시인의 고향마을 창기리를 찾기 위해 달리다 보면 ‘안면암’이라는 입간판이 보인다. 이곳에서 안면암의 초입길은 소나무 숲이 대단하다. 안면휴양림에 버금가는 소나무 숲은 그냥 지나치기가 아까울 정도다. 이곳에서 조금을 달리면 안면암에 닿는다. 절이 우리네 절하고 좀 달라 왠지 낯설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사찰에는 석탑이 있기 마련인데 안면암에는 절마당에 석탑이나 불교 관련 구조물이 없다. 몇 년전에 단양 구인사에서 보았던 그런 인상의 절이 안면암이다. 안면암 앞에 바다가 없거나 섬이 없었다면 이 절의 자연 경관은 별 볼일이 없다.
안면암
그러나 천수만의 큰 바다가 있고 멀지 않은 곳에 두 개의 작은 섬이 있기에 이 절집의 분위기는 사뭇 이국적인 모습도 볼 만하게 느껴진다. 안면암에서 섬까지 물에 뜨는 부상교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이 다리를 건너서 섬을 탐방하는 것이 인기코스다. 안면암은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는 서해의 몇 안 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쌍둥이 섬인 조구널 섬까지 연결된 약 200m 길이의 부교 위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이 아름답다.
쌍둥이섬인 조구널섬
이제 지상에 전혀 공개된 적이 없는 채광석 시인의 생가를 찾아 나선다.
그의 고향 주소는 충남 태안군 안면읍 창기리이다. 안면암을 나와 고개를 넘고 한참을 달리니 창기리 라는 동네가 왼쪽에 나온다. 알고 보니 이 마을은 창기 3리다. 그러고 보면 창기리란 동네는 제법 큰 동네다. 사람을 만나야 길을 물을 터인데 도통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대로 차를 몰아 내리 달리다 보니 제법 번화한 동네에 도착한다. '창기리'이다.
'원주민공인중개사무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두운 사무실에 한 사내가 앉아 있다.
김명실(58세)씨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서 공인중개사를 하고 있어 누구보다 동네 사정에 밝았다. 대뜸 채광석 시인을 아시느냐고 물었다. “예 잘 알지요” . “ 동네 형이었지유”
“그런데 창기초등학교 때 저 보다 한 3년 선배였고 일찍이 대전에 공부하러 간 후부터 소식을 잘 몰러유”
" 태안의 천재였지유"
그의 생가가 가장 궁금했다.
“생가는 저기 차 가는 길로 한 700M 쯤 가면 ‘옛고을’이라는 음식점이 나와유, 그곳이 그분의 생가여유”. “그 곳을 양지말 이라고도 해유”
채광석 시인의 고향마을 창기리 양지말 가는 길은 좁고 길다. 반대방향에서 차 한 대가 오면 미리 비켜 서 있다가 출발해야 한다. 삼봉해수욕장이 가까워서 인지 아름다운 펜션들이 여기 저기 마을을 이루고 있다. 결국 이 마을은 이제 펜션촌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벼가 누렇게 익어가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채광석 시인의 조부 때는 창기리의 너른 이 들이 그들의 소유였다고 한다.
채광석 시인 생가
채광석 시인의 생가는 이제 옛고을이라는 음식점이 되어 있다. 고가의 골격은 그대로 둔체 리모델링을 한 흔적이 역력하다. 음식점 주인 김영용 씨는 없고 그의 부인이 딸과 함께
문풍지에 풀을 바르고 있다.
“여기가 채광석 시인 생가가 맞지요?” 라는 질문에
“그런 소리 못들어 봤는데요” 어찌된 일인가?
채광석 시인의 생가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는 사람이 채광석 시인의 생가였던 것도 모르고 있단 말인가. 그럴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인들에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 아주머니는 “ 이 집은 채 참봉 집이라고 하더라구유”라고 대답한다. 그렇다. 이 집은 그랬을 것이다. 채참봉은 채광석 시인의 조부를 일러 하는 말이다.
채광석 시인의 부친은 안면 면장으로 근무하다가 1975년 해임된다. 채광석 시인이 감옥살이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채광석의 감옥살이가 그의 집안을 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는지 모른다.
감옥살이를 하면서 면장을 하시던 자신의 아버지가 해임 된 일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하루 하루 삶을 지탱하기 어려운 옥살이에 그에게 희망을 주는 여인이 있었다. 대학교 4학년 때 만난 강정숙이란 신입생이었다. 그에게 보내는 옥중서신은 단행본으로 출간이 된다.
책 서문을 읽으면 채광석 시인의 당시 삶의 편린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채광석 시인의 감옥생활은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기에 고독하지 않았다.
그는 부지런히 옥중에서 편지를 썼다. 아무래도 그의 생각과 사랑의 궁금증이 더해진다.
차라리 좀 길지만 출간당시 화제가 되었던 옥중 서간집의 서문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좋을 듯싶다.
사람은 누구나 일생을 통해 다른 시기들 보다 압축된 삶을 산 시기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시기들 중 젊은 시절의 것은 대개 사랑에 관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시대가 낭만을 터놓고 누릴 만큼 한가롭든 그렇지 않든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 있는 한 사랑의 문제는 언제나 젊음 앞에 가장 몸살나는 문제의 하나로 머무를 것입니다. 여기 실린 글들은 한 젊은 남자와 여자가 그와 같은 사랑의 문제를 앓으면서 죽 받은 편지들 중 남자 편지에서 보낸 것을 엮은 것입니다.
1975년 봄, 그 젊은 남녀는 서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조금씩 내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남자는 대학 4년생이었고 여자는 신입생이었습니다.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조금씩 시간을 보내는 만남이 한 달이 조금 지날 무렵, 남자는 중뿔나게도 무슨 거창한 신념의 깃대를 흔들어 대더니만 훌쩍 벽돌담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1975년 5월말의 일이었습니다. 남자로서는 시대가 낭만을 누릴 만큼 한가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듯 싶습니다. 그러나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 낭만은 야금야금 담 안의 세계와 담 밖의 세계를 관통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러다가는 드러내놓고, 마침내 삶의 중심을 차지할 만큼 그 벽돌담을 사이에 둔 기이한 사랑은 서로의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마도 거기에는 직접 만날 수 없는 지극히 단순화된 상황이 현실보다는 상상력을 더욱 부추켜준 덕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편지들은, 허다한 자기 한계를 노출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봉함엽서의 작은 공간에 자기의 온 현존을 쏟아넣으려는 과욕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1977년 초여름, 그러니까 들어간지 만2년이 조금 더 지난 어느날 아침 그 남자는 제 시간이 차지 않으면 도대체 열리지 않는 철문을 열고 바깥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1979년, 그들은 결혼했고 얼마 전에는 첫 아들의 돐을 기념했습니다.
제가 바로 그 편지들을 쓴 ‘그’남자입니다.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의 서문 중에서 - 채광석 씀
채광석 시인의 고향 동네
채광석 시인의 생가를 찾거나 확인한 사진을 아직 한 장도 볼 수 없었다. 물론 인터냇 상에도 그의 생가에 관한 언급은 한 줄도 없다. 지금 그곳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는 이도 일 년 이상을 장사를 하고 있는데 그를 찾는 방문객은 한 분도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마 필자가 그의 생가를 최초로 확인한 것인지 모른다. 이런 바쁜 세상에 시인의 생가를 찾는 일은 한가한 사람이 하는 일인지 모른다. 특히 한때 시국사범으로 몰려 감옥살이까지 한 시인의 생가를 찾는 일은 지금도 슬며시 눈치를 보아야 한다.
그의 시는 이미 많은 부분이 시대와 맞지 않게 되어 더욱 그를 왜소하게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시중에서 사랑을 이야기 시들은 지금도 적은 사람들이나마 돌려가면서 읽혀지고 있다. 그중 책의 제목이 되기도 했던 시 한편 읽어본다. 이제 이곳을 출발해야 한다. 길가에 곱게 핀 코스모스가 채광석 시인 생가와의 이별의 마음을 서러워 하는 듯 마구 흔들리고 있다.
채광석 시인의 시'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를 읽으니
내 마음도 마구 흔들고 있다. 구름도 흔들리며 흘러간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의 명복을 빈다.
삶은 언제나 구비쳐 휘도는 물길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삶은 구비치며 그대의 심장에 나의 심장을 잇대어
출렁거리는 물결로 이어왔느니 살지라
삶은 고뇌요 일상은 부대껴 권태의 늪을 이뤄갈지라도
살아서 즐거움과 괴로움 함께 마시며
사랑하는 작은 몸부림 속에 함께 피로 흐르라
맥을 거쳐 다시 맥으로
심장을 나와 다시 심장으로
펄 펄 펄 솟구치는 피가 되어 흐르다가
어느 한 순간 숨을 거두고
미래의 문턱에 선다한들
天·地의 저울대가 무슨 그리 대수로운 논의거리일 것인가
행여 윤회의 긴 회로에서
남자와 여자로 다시 만나지 못하고
이름모를 짐승으로 마주 으르렁대게
작정되었다 하더라도
사랑할지라
사랑에서 사랑으로
펄 펄 펄 타오르며 우리가 배운 삶의 생명은
사랑,
사랑은 우리가 지상에 남길 유일한 발자취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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