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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군의 응 명동 88
'응팔'은 우리들이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케이블Tv에서 제작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드라마의 제목이다. 응팔이라는 드라마의 장소적 배경은 쌍문동이라는 서민들만이 모여 사는 서울 강북의 한 동네를 중심으로 하여 1988년을 전후한 대한민국의 80년대 후반을 시대적 배경으로 당시 서민들의 애달픈 삶의 애환을 소재로 그들의 일상적인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훈훈하게 그리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응 명동 팔 "이란 1980년대 중후반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것은 응팔과 같으나 장소적 배경이 K라는 젊은이가 근무했던 사무실의 소재지인 서울 명동을 중심으로 하여 그 당시 사회상과 샐러리맨들의 애환 고생 등을 배경으로 한 삶을 그리고 당시 은행의 분위기 등을 그릴 예정이다. 즉 K라는 젊은이가80년대 중후반 대한민국의 최중심지인 명동에서 바라보고 느낀 기억과 마음의 잔상을 3인칭 전지적작가시점에서 쓰고자 한다.
방법은 매일 연재하는 형식으로 쓸 예정이며 댓글을 통한 회원님들의 많은 격려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K군의 응 팔시대 명동 입성-
때는 80년대 중반 서울의 여기 저기에서 대학생들의 데모가 한참 그 정점을 향해 달리고 있을 때 K군은 당시 정부투자기관이던 K은행에 입행하여 Y지점에서 행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은행 지점내에 있는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 K군은 창구에 앉아 나른한 식곤증에 깜빡 깜빡 졸고 있는데 시끄럽게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으니 지점내의 교환양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K주임님 본점에서 전화예요' 라면서 전화를 연결시켜 주었다. "나다 별일 없지" 하는 소리가 수화기 저 너머에서 귀로 흘러 들었다. 아 형! 오랜만이예요. 그런데 왜요? 야 임마 왜요는 왜놈들이 깔고 자는 요를 말하고, 너 혹시 본부로 옮기고 싶지 않니?라는 고등학교 선배의 말에 가물가물하던 눈까풀이 크지도 않은 본부라는 한마디 소리에 확 열리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시 은행의 본부와 지점사이에는 얼핏 보면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찬찬히 뜯어 보면 대단한 차이가 존재하였다. 우선 업무가 지점의 일은 거의 대부분이 반복적이고 단순하여 노가다식의 업무가 많고 하나부터 열까지 사람에 치이는 것인데 반하여 본부의 일은 창의력을 요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승진문제에서도 본부직원들이 지점 직원들보다 앞서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창구라는 것이 없으니 고객이라는 것이 없어 시간이 나면 언제나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은행의 경영 분위기는 과거 60년대 와 70년대 소위 대한민국 근대화로 일컬어 지는 박정희대통령시대에는 무시 되었던 고객중심 마케팅의 개념이 조금씩 생성되기 시작할 때 였다. K군의 입장에서는 공부에 대한 욕심과 열정이 남아 있던 터라 본부라는 곳은 어느 부서가 되었든 반드시 가야 할 곳으로 생각하고 있던 중 이런 뜻밖의 전화를 받으니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닐 수 있으랴. 하지만 K군은 나 시시한 데 발령 나면 안가요. 라고 대답하고는 그 선배와 시덥잖은 농담 몇마디를 주고 받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로부터 1주일 후 K은행 전체의 정기 인사이동이 있었다. Y지점에서는 2명의 직원이 본점으로 발령이 났는데 K군은 종합기획부라는 곳으로 인사발령이 났고 다른 1명은 여직원이었는데 카드관리부로 발령이 났다. 4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K가 기억하는 것은 K가 종합기획부라는 곳으로 발령이 났다고 하자 마치 불가능한 일이 현실로 발생한 것처럼 경이롭고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지점 직원들의 시선이었다. 지점장께서는 한 술 더 떠 발령이 난 여직원에게는 야 ㅇㅇㅇ아 너 빽써서 가는 데가 겨우 카드관리부냐? 그런데 K자네는 누구 빽이야 잘 좀 부탁하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그로부터 3일 뒤 80년대 중반 K군의 명동시대가 문을 열게 된다. K군의 명동시대가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물론 K군의 자질도 한 역할을 하였겠지만 무엇보다도 큰 역할을 한 것은 K군이 소위 말하는 명문고 출신이었다는 것이었다.
(9.18)
- 당시 아침 대세중 하나는 출근버스 -
K군이 은행 본점으로 발령이 나던 80년대 중반에는 소위 방귀 꽤나 뀐다는 회사는 거의 모두 아침에 통근버스를 운행하고 있었다. K은행도 K군의 거주지인 A시로부터 본점까지 아침에만 운행하는 출근버스가 있었다. 지점으로 출근하던 K군이 본점 직원들을 부러워 하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출근버스였다. 가끔 아침에 지점으로 출근 중 먼 발치로 지나가는 출근버스를 보면 그 버스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곤히 자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볼 때마다 K군은 되뇌였다. 오! 아침 잠을 자는구나. 그래 나도 언젠가는 잘 수 있을거야 하던 꿈에 그리던 출근하면서 수면을 취하는 시대가 드디어 K군에게도 도래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K군은 아침이라도 일단 잠이 들면 엎어가도 모를 정도로 너무 곤하게 잔다는 것과 그 한 시간동안 자면서 온 버스안이 떠나갈 듯 코를 골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K군은 본점으로 발령이 나자마자 본점의 명물이 되었다. 그런데 출근버스의 아침잠의 위력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위력을 발휘하곤 하였다. K군이 아침에 출근버스를 놓친다든가 출근버스가 결행을 하는 날은 한동안 적응이 안되어 하루 종일 비몽사몽의 혼미한 정신으로 책상에 앉아 꼬박꼬박 졸기를 밥먹듯이 하곤 하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리 좋던 출근버스제도가 모두 경영기법상 비용의 다운싸이징(Downsizing)즉 비용절감을 위하여 불요불급(不要不急)한 곳에는 비용을 절약한다는 취지로 한 회사 두회사 출근버스제도를 폐지하였고 급기야는 K은행도 80년대 말에 출근버스를 없애버렸다. 한동안 K군이 한 낮에 닭병 걸린 놈이 된 것은 말하나마나 당연한 뻔한 일이였다.
- 그때나 지금이나 술하면 소주가 대세, 소주로 시작 소주로 끝-(9.20)
K군이 본점으로 출근하기 시작한 것도 일주일이 지났다. 그 일주일이 어떻게 생각하면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간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무지하게 지루하기도 했던 조금은 헷갈리는 일주일 이었던 것 같았다. 사무실의 분위기는 거의 겨울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도 아는 체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인사를 해도 고개만 까딱하면 그만이었다. K군은 아 이자식들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기에 이 지랄들이야. 그저 확 보내 버릴까보다 하고 속으로만 생각했으나 그럴수록 긴장감은 더욱 더 높아만 갔다. 그리고 지점에서 전문적인 법률지식을 요하는 상담전화가 폭주하는데 이것을 일일이 대답해 주는 것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K군은 이 전화에 대하여 앞자리에 앉아 있는 선임인 W양에게 일일이 물어봐서 대답을 하곤 하였다. W양은 E대 법대를 졸업하였다고 했다. K군이 느끼는 하루는 W양에게 전화상담 내용을 물어볼 때와 그 후 상담자에게 그 말을 전하는 시간동안은 매우 지루하여 이 하루가 언제나 끝나나 하며 지냈으나 본점 내에서 우연히 입행동기를 만난다든가 선배들을 만난다든가 하여 그들과 객적은 농담과 함께 이야기 하는 시간은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어쨌든 바쁘게 돌아 가는 일과는 본점이라고 나은 것은 없어 보였고 오히려 전문적인 법률지식을 요하는 업무분야는 대학교 때 공부를 하였다 하더라도 실무에 적용이 안되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본점 들어 와서 일주일동안 한일을 생각해 보니 그저 멍했다. 그래서 막상 자기에게 본점에 안올래 하고 전화를 했던 선배에게는 일주일 동안 인사도 못갔다. 결국은 기다리다 못한 선배가 그 다음 주 월요일 다른 부서를 갔다가 지나 가던 중 생각이 나서 들렀다면서 찾아와 겨우 인사를 하였다. 선배가 다녀간 날 저녁 K군을 환영하기 위하여 과에서 회식을 하려하니 저녁 약속을 하지 말라고 선임이 말하였다. K군은 생각하기를 평소 이 인간들이 하는 작태로 봐서 대강 먹고 마시고는 끝내고 집에 들어갈 때는 쌩쌩한 정신으로 집 대문을 통과하겠구나 하고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이는 K군의 큰 착각이었다. 우선 고기집에서 등심으로 배가 터지게 먹으면서(그때는 외국산 소고기가 수입될 때가 아니라서 소고기 하면 무조건 한우를 말한다) 술을 마시는데 모두 소주였다. 그런데 소주를 마시는 기법이 지금까지 K군이 경험한 것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조용조용 이야기를 하면서 잘근잘근 술잔을 비우는데 소주를 일인당 4-5병 정도 마시는 것 같았다. 학교 다닐 때 한술 하던 K군도 피곤한데다 말없이 조용하게 소주를 별안간 많이 마시니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K군의 선임여직원이 집에 가야 한다고 하여 그녀를 집에 보내기 위해서 고기집에서의 행사는 밤 열시쯤 끝났다. K군도 집에 갈 생각으로 담당대리를 비롯한 과장한테 작별 인사를 하려고 하자 담당대리가 한마디 한다. 과장님 입가심으로 맥주 딱 한잔만 하시죠. 그러자 과장님 왈 아주 선선하게도 ‘그랴 한잔만 더하자’ 하시더니 앞장을 서셨다. 그러더니 본점 근처 명동예술극장 뒷골목에 있는 건물의 2층에 있는 바로 가더니 소위 마담이라는 아가씨와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김마담 안녕! 하면서 신체의 일부를 더듬는 모양을 보니 매우 친하게 보였다. 그런데 그날 그 집에 나와 같은 사연이 있는 K은행 본점 사람 때문에 다른 부서 사람들이 2팀이나 더 있었다. 그들은 기다리기라도 한 듯 우리에게 아주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그래서 입가심 딱 한잔을 위하여 시작된 술판이 새벽까지 이어졌는데 신기한 건 분명히 맥주집에 맥주를 마시러 왔는데 상당한 시간이 지나자 모두들 소주를 마시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날 그 술판의 끝은 명동 제일백화점 뒷골목에 있는 “24시간 해장국집”까지 이어져 해장국 먹고 동그랑땡을 안주로 하여 소주를 각 1병씩 마시고 난 새벽 5시 반쯤 술판이 끝났다. 그 시간에 각자 헤어져 집에 오니 K군의 아내는 남편이 전화 한 통화 없이 밤이 새도록 집에 안와 걱정으로 잠을 못자고 밤새 기다렸다면서 술냄새에 찌들어 냄새가 풀풀풀 나는 K군의 양복을 받아 걸면서 앞으로는 전화를 꼭 해 줄 것을 부탁하고는 K군의 아침을 위하여 부엌으로 갔고 K군은 속옷과 와이셔츠만 갈아 입고는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바로 출근을 하였다. 그날 출근버스는 어떤 놈의 코골이로 몸살을 앓았다고 전설처럼 전해 진다. 그런데 K군을 더 놀랍게 한 것은 K군이 출근한 날 전날 술때문에 비실대는 것은 K군 한 놈뿐이고 담당 대리와 과장은 언제 술을 먹었느냐는 듯 아주 쌩쌩하게 일을 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K군은 이러한 현실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란 오직 한마디 “뭐야 이 시튜에이션(Situation)은!” 이라는 말뿐 그것도 마음속으로만 자신과의 대화로만이다. 어쨌든 그 일이 있고 난 후 K군은 여러 가지로 많은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고 본점생활에 대한 적응력을 기르는데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 K군 드디어 명동 룸살롱 입성 (9.21) -
K군이 명동생활을 시작한 지도 어언 삼주가 지났다. 이제서야 몇층에 어떤 부서가 있는지 그 부서는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도 하나 둘 눈에 들어 오게 되었다. K군이 근무하게 된 K은행 종합기획부는 약 30명 정도의 인원이 근무하고 있었고 5개 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 K군과 같은 행원들은 약 15-16명으로 하는 일은 주로 대리들의 업무 보조였다. K군의 성격이 워낙 붙임성이 있고 서글서글하여 이제는 다른 과의 행원들과도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삼주가 되는 금요일에 다른 과의 고참 행원이 오더니 오늘 저녁 행원들 모임이 있으니 다른 약속 하지 말라고 하였다. 후배들과 선약이 있다고 했더니 K씨는 꼭 참석하여야 한다고 하여 K군은 할 수 없이 대학 농구부 후배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후배들과의 약속을 1주일 연기하고는 행원들의 저녁 모임에 나갔다. 그날도 1차는 고기집에서 먹고 마셨는데 예상보다 빠르게 9시쯤 끝나 고기집을 나왔는데 분위기가 이상하였다. K군은 아무 것도 모르는 체 여직원들과 같이 집에 간다고 작별인사를 하니 남자 고참행원 한명이 다가와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였다. 잠시 뒤 여직원들이 모두 작별인사를 마치고 사라지자 모임의 수장격인 남자 직원이 “자 이제 갑시다 좋은데로, 그런데 K형은 왜 그리 눈치가 없어요, 거기서 집에 가겠다니 원 참, 어쨌든 갑시다” 하면서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어디를 갑니까? 술은 그정도면 된 것 같은데요“. ”아참 K형도 내일은 토요일이라서 떡이 되게 마셔도 오전만 개기면 집에 가는데 좋은데 가서 조금만 더 합시다“라며 모두 제일백화점 뒷골목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미 2주전 새벽에 한번 왔던 길이라서 약간 익숙한 자세로 따라가 보니 술집 간판이 있는데 다른 여느 술집과 다른 것은 간판에 ’룸쌀롱‘이라는 글자가 쓰여있다는 것이었다. K군은 지점에 근무할 때 한번 가본 적이 있었는데 술을 먹기 시작 하자 마자 같이 마시던 동료들끼리 싸움이 붙어 그 뒷치닥거리를 하고 바로 나와 뿔뿔이 헤어져 집으로 간 것 밖에는 기억이 없어 룸살롱에 대한 인상 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현관에 들어 서자 소위 웨이터로 불리는 자들이 검은 양복을 입고는 2열로 서서 어서옵쇼 라며 폴더형태의 조폭 인사를 하였다. 그러자 오늘 모임의 수장격인 행원이 웨이터중 한명을 가리키며 ”야 보영아 이리 와봐 오늘은 귀한 손님 모시고 왔으니까 형님들 파트너 넣어 주고 세 명은 이집에서 제일 예쁜 애들 넣어라. 그렇지 않으면 다음부터는 이 집은 끝이다“. ”아이 형님도 참 내가 언제 못생긴 애 넣는 거 봤수. 기다리쇼 새로 온 애 있는데 이뻐“ 이런 이야기가 오간 후 K군과 그 일행들은 맥주를 3박스 시키고 안주를 두 개 정도 시켰다. 그러자 보영이란 친구가 수장격인 직원에게 아 형님 오늘 환영회인 모양인데 쪽팔리게 맥주만 시켜요? 양주도 최소한 한 모금씩은 해야죠 안그래요”'"네가 환영회인줄 어떻게 알아" " 아 내가 K은행 일 모르는거 있수' 시킵니다" 그러자 쪽팔리게라는 말이 걸렸는지 양주도 큰 거 두병을 주문했다. 술과 안주가 들어오고 약간의 시간이 흘러도 아가씨들이 들어 오지 않자 “오늘 금요일이라서 바쁜 모양이군만. 그건 여기 사정이고 술 마시러 온 내사정은 그게 아냐’ 하더니 문을 열고는 지나 가는 새끼웨이터를 부르더니 야 너 보영이 좀 오라고 해 빨랑. 잠시 후 보영이로 불린 아까 그 웨이터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수장격인 직원이 야 보영아 임마 너 똑바로 안할래 빨리 들여보내. 네 형님 알겠습니다. 곧 들어 올겁니다. 금요일이라서 바쁘네요 죄송합니다. 하고 방을 나가고는 한 2-3분이 지나자 한쪽 옆이 허리까지 터져있는 아래위 검은 색의 치파오(중국 여인네의 치마) 형태의 치마를 입은 아가씨들이 K의 직원들 숫자에 맞추어 입장을 하였다. K군은 술을 한잔 해서 그런지 허리까지 터진 부분을 통하여 보이는 아가씨의 허벅지 안쪽의 하얀 속살이 매우 자극적으로 보였다. 한 순간 저 구석에 접어 놓은 본능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한 가지 실망한 것은 기존 근무하고 있는 직원들의 파트너는 모두 예쁜데 K군을 비롯한 신입 3명의 파트너는 영 아니올씨다 였다. 보영이란 놈이 K은행에 대하여 알기는 확실히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새로 온 직원들은 예쁘다 밉다 타박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 날은 첫날이라서 K군은 파트너보다는 다른 직원들과 재미있게 놀면서 친교에 비중을 두었으나 K군은 내심 ‘좋아 나도 예쁜애 하나 파트너로 만들어 놓지 뭐’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나중에 K군으로 하여금 큰 사단을 저지르는 단초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K군 고기 맛을 본 고양이 되다 -(9.22)
K군은 응팔시대 명동 룸살롱을 돌이켜 보면 아 그땐 그렇게 천국과도 같은 곳이 있었구나 하고 그리움에 젓게 되고 이제는 아득한 추억을 그리게 만든다. K군이 같은 부서의 직원들과 2차 환영회를 아주 흡족하게 보낸 후 공부하랴 일하랴 바쁘게 약 두달 정도를 보낸 어느 날 같은 부서의 직원 하나가 “정형 오늘 저녁 마이크나 잡으러 갑시다” 라는 제안을 했다. 지금에야 노래방이 지천에 깔려 있어 그 말이 그리 어려운 말이 아니었으나 당시에는 노래방이 없어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지를 못했다. 의아해 하는 나에게 그 직원은 룸살롱가자고요 라고 말했다. 당시 명동 룸살롱의 실태를 보면 우선 강남에 비하여 아가씨들의 팁 값이 무척 쌌다. 아가씨 팁값으로 강남이 3만원 내지 5만원을 받을 당시 명동은 5천원 이었는데 돈이 없으면 외상도 가능했고 말만 잘하면 안줘도 되었다. 물론 강남과 명동에서 술시중을 드는 아가씨들에 대한 세평이 결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남이 우월하다고 하긴 하였지만 K군이 느끼기에는 명동 아가씨들도 나름 예쁜데 팁값 차이가 너무 나는 것 같았다. 다만 명동의 팁값은 응팔 후반기가 도래하기 직전쯤 1만원으로 상향 조정 되었다. 그리고 강남 룸살롱에서는 반드시 양주를 마셔야 하나 명동에서는 맥주만 마셔도 되었다. 다만 한가지 같았던 것은 노래연주를 위한 밴드마스터였다. 처음에는 기타와 마이크 시설을 가지고 다니는 남자가 손님들로부터 신청곡을 받아 손님이 노래를 부르면 직접 기타로 반주를 하고는 소위 오부리돈이라 불리는 팁을 받고 별도로 반주비도 받았다. 그러다가 응팔 후반기에는 손님이 부를 노래제목을 입력하면 그 노래의 악보와 기타 코드가 화면에 떠올라 그 코드를 보고 연주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응팔 이후 90년대 최종 노래방기기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래서 K군이 근무하던 사무실에서는 마이크 잡으러 가자 하면 룸살롱으로 술먹으러 가자는 나름의 암호였다. 어쨌든 K군이 생각하기에 명동만큼 룸살롱의 술값이 싼 곳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K군은 거기서 꽤 괜찮은 아가씨와 파트너가 되었다. K군은 그날 이후 술값이 거저라는 인식과 아가씨에 대한 그리움으로 한 달에 한 두 세번은 그 술집에 술을 먹으러 갔던 것 같았다. 그러면 그 돈은 다 어디서 났느냐가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인데 당시 K군이 근무하던 부서 행원급 직원들이 술을 마시면 한명이 카드로 그날 술값, 안주값, 팁값까지 결재를 하고 월말에 급여일 날 청구금액을 기재하여 각 자에게 알리면 해당 계좌에 입금시키면 되는데 한달에 약 10만원 내외의 금액이면 결재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술값이 생각보다 아주 싸게 먹힌다고 생각한 K군은 명동의 밤거리를 누비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늦어지게 되었다. 정말로 고양이가 고기맛을 보면 뭐도 안남긴다더니 K군이 꼭 그꼴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 술과 몫돈적금 그리고 천사같은 아내 -(9.23)
K군이 K은행에 입행하고 한 1주일 정도 지났을 때 Y지점의 서무담당직원이 부르더니 몫돈마련저축에 가입을 하란다. 당시 이 예금은 지금 같은 저금리시대에는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의 높은 금리의 예금상품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 예금은 기본 이율도 높은데다가 정부가 『근로자의재산형성및몫돈마련에관한법률』이라는 법을 제정하여 이 예금에 가입한 사람들이 이 예금을 만기해지 하면 국가에서 장려금도 지급해 주어 매우 인기 있는 예금상품이었다. K군은 가입 당시에는 이런 저런 생각없이 서무담당직원이 권하는 대로 매월 12만원씩 3년간 납부하는 것에 가입을 하였다. 그럴 경우 원금 432만원에 장려금과 기본 이자를 합쳐 만기 지급액이 5백6십만원을 훌쩍 넘어 단순하게 원금 대비 이율로만 따지면 이자가 약 30%를 넘었다. 그런데 문제는 K군이 가입 당시에는 아무 생각이 없이 권유에 따라 덜커덕 가입한 것이라서 그 예금의 소중함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고 그 것이 사단이 발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K군이 명동으로 출퇴근을 하기 시작한 지도 어언 1년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그사이 K군에게는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사무실에서는 나름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시간이 나는 대로 공부를 열심히 한 덕분에 특히 실무와 법이론의 접목과 그에 따른 법률지식의 발전은 한번 알려 주면 두 번 다시 알려주지 않는다면서 깐깐함을 자랑하던 대한민국 최고의 S대 법학과를 나온 담당 K대리도 인정하는 수준으로 발전을 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발전이었다. 그리고 본점 내에서 많은 행원들도 이러한 K군을 경외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술의 진화는 정말로 레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說)이 정설인 것 같았다. 다만 술의 양이 느는 속도는 산술급수적이나 주는 속도는 기하급수적이라는 것은 레마르크가 말하지 않았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느는 것이 술이었다. K군도 레마르크의 용불용설에 따라 그동안 술실력도 꽤 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술값을 결제할 돈이었다. 매달 거짓말로 용돈을 더 타다가 쓰는 것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라 거의 파산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값이 싸다는 이유로 충동구매를 하는 바보 같은 사람 마냥, 싸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퍼마시고 있었으니 지금 같으면 인간아 인간아 한심한 인간아 그랬을 것인데 그때는 왜 그랬는지··· . 아마 당시에는 야근도 많았는 데다 특히 부장이 고등학교 직속 선배라서 잘하려는 의욕이 상당하여 그만큼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이 이유라면 이유였던 것 같다. 그런 와중에 그 달 술값 결재일을 맞아 직원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하던 중 K군이 귀동냥으로 듣기에 직원중 하나가 다른 직원에게 “참 영업부에서는 재형저축에 한해서 직원들에게는 통장이 없어도 담보대출을 해 주는데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오 주여! 결코 나를 버리시지 않으시는군요. 감사합니다”라는 감사기도가 절로 나왔다. K군은 그길로 한달음에 영업부로 내려가 그달 치 월부금의 90%를 담보대출 받아 술값을 결재하였다. K군이 통장 없이 담보대출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건 가입후 약 6개월쯤 지났을 때 대학교 농구부 후배들에게 시합출전에 쓰라고 담보대출을 받아쓴 것을 아내가 알게 되어 통장을 아내에게 빼앗겼기 떄문이었다. 따라서 영업부에서 직원들에 한해 통장없이 담보대출을 해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통장에 납부된 월부금이 잘 보관되었다. 어쨌든 이렇게 군자금 조달의 길을 연 K군의 술마시는 일은 한동안 전혀 거칠 것이 없었다. 아내만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월부금의 90%가 매월 빠져 나가 깡통계좌가 되어 가고 있는데 매월 돈이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시간은 흘러 드디어 재형저축 만기일이 되었고 영업부에서는 담당 직원이 K주임님 몫돈마련저축 해지하러 오세요라는 전화를 하였다. K군이 전화를 받았을 때는 바쁜 시간이라서 영업부로 내려가서 해지신청서에 이름을 써서 담당 직원에게 주면서 금방되요 라고 물으니 대강 보더니 “아이 참 왜 이리 담보대출을 많이 받았어요. 매달이네 이거. 약 한시간쯤 걸려요”.라고 말을 하여 일단 사무실로 오기 위하여 돌아 서는데 그 여직원의 “종기부 직원이 왜 이래” 하는 소리가 등너머로 들렸다. 종기부 직원이 어때서요 라고 반문하고 싶었으나 꾹 참고 사무실로 돌아 와서 한 두시간 정도 일을 하다가 내려가서 얼마나 되요 라고 물으니 “한 1백만원 약간 넘어요. 어떻게 드릴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동건은 왠지 모르게 싸한 느낌이 오면서 뒷골이 땅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동건은 얼떨결에 백만원은 신권으로 주세요라고 하여 신권 백만원을 봉투에 넣어 양복 안주머니에 고이 고이 넣었다. 그날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석간인 동아일보를 열독하고 있는데 아내가 자꾸 K군 주위를 맴도는 것이었다. 그런 아내를 본 K는 ”나한테 뭐 할 말 있어“ ”혹시 오늘 은행에서 뭐 찾은 거 없어요“ ”응 양복 안주머니에 있어 찾아봐“. 그러자 아내가 내 양복상의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그런데 봉투를 꺼낸 아내는 당연히 봉투를 열어 보아야 하는데 그러지를 않고 봉투만 만지작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그러기를 일분여 아내는 깊게 한숨을 세더니 다시 봉투를 만지작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다시 그러기를 일분여 그 시간이 불과 이분 남짓 밖에는 안되나 K군에게는 한 20년 이상의 기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K군이 나중에 아내에게 물어서 알게 된 것이지만 아내가 양복에서 봉투를 꺼내자 바로 열어 보지 않고 만지작 만지작 거린 이유는 만기금액을 알고 있는 아내가 봉투를 꽉 잡는 순간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는 것이었다. 자기도 은행원 마누라라서 어느 정도 아는데 10만원짜리 수표로 들어 있다면 너무 두껍고 만원짜리로만 가져왔다면 턱도 없이 얇다고 생각 되어 도대체 5백 6십만원이 이 두께가 되려면 안에 내용물의 조합이 어떻게 되어 있을까를 생각하느라 그랬단다.
급기야 아내는 K군에게 ”얼마에요“하고 물었다. 여기까지는 통상 매일 있는 부부간의 대화였는데 아내의 얼마에요에 대한 K군의 답변이 ”응 백만원이야“가 사단의 발단이었다. K군은 왠지 모르게 별안간 방공기가 싸늘해지면서 아무 생각이 안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순간 겁이 덜컥 나서 보던 신문 너머로 아내의 동정을 살피는데 K군은 망연자실(茫然自失)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았다. K군이 지금까지 살면서 그렇게 하얀색의 하얗게 질린 얼굴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내는 얼굴에서 완전히 피를 빼낸 형색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더니 잠시후 방바닥에 모래성이 스르르 무너지듯이 조용하게 털썩 주저 앉더니 흑흑 우는 것이 아닌가? 그때까지도 K군은 아내가 우는 진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날부터 3일동안 아내는 말을 안했다. ”나 회사 갔다 올게“ ·······(아무룩). 겁이 난 K군이 술도 안먹고 일찍 퇴근하여서는 ”나 회사 갔다 왔어“ ·········(아무룩)· K군은 처음에는 ”지가 언제까지 그럴겨. 여기서 꺽이면 안돼 버텨“ 이런 심정으로 신경 안쓰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편 K군이 곰곰 생각해 보니 아내가 돈을 조금 갖다 주었다는 이유만으로는 그렇게 울고 사보타지(Sabotage)를 할 여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K군은 숨겨진 이유를 알기 위해 3일째 저녁 일찍 퇴근하여 아내에게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라고 하면서 눈치를 살피니 아내는 아무 말 없이 저녁을 차리더니 밥을 먹는 K군 앞에 앉아 조용히 아주 조용히 말하기를 ”앞으로 당신 이름으로 K은행에 통장 절대로 만들지 마. 만든 것 걸리면 그때는 끝이야. 이번 한번만 용서해 줄게” “오! 주여 감사합니다!. 드디어 죄 사함을 받아 해방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철딱서니 없게도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부르짖었으나 겉으로는 아주 게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래 미안해. ”그런데 급여통장도 있는데“ ”야 인간아 그것 없으면 당신이나 나나 뭐 먹고 살라고. 그건 남겨놔 해지 하지 말고.“ 그리고 나서 K군이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당신 왜 울었어?” 잠시 뜸을 들인 아내가 “여자들이 먹을 것 입을 것 아껴가면서 적금을 왜 그렇게 악착같이 붓는 줄 아세요? 알턱이 없는 K군이 다소 바보같은 표정을 지으며 멀뚱하게 가만히 있자 ”다 꿈 때문이에요. 만기금액을 가지고 어머님 아버님 용돈도 아주 풍족하게 드리고 뭣도 사고 뭣도 사고 당신 양복도 한 벌 새로 사고 하는 꿈 말이에요. 그렇게 미리 다 예약을 받아요. 이번에는 노쇼(No - show)로 끝나게 되어 오랜만에 품게 된 꿈이었는데 그 꿈을 다시 3년 뒤에나 이루게 되어 서러웠어요“. K군은 그제서야 아내가 울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자기 때문에 아내가 3년동안 그토록 기다려 왔던 꿈을 한 순간 잃어버리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K군은 남자들은 적금을 가입할 때 아무 생각 없이 은행 직원의 권유로 가입하고 중간에 이를 비자금으로 활용하여 그 효율성과 유비무환의 대비책에 자찬(自讚)하나, 여자들은 미리 예약을 받고 그 예약을 이루기 위한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차곡 차곡 쌓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K군은 또 하나의 감사기도를 드렸다. 오 주여! 감사합니다. 고집은 조금 세도 천사같은 마누라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날 이후 K군은 아내를 존경하며 살기로 했다. 그리고 그는 거지가 되었다.
- 데모(9.24) -
7080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사회현상중 하나를 꼽으라면 『데모』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K군도 한 때는 그 중심에 서 있었으나 군대에 갔다 와서는 언더에서 노는 후배들의 싸가지 없음 때문에 먼 발치에서 조용히 바라보면서 그저 데모대를 향하여 격려의 박수를 치는 관계로 변하게 되었다. 이는 어머님의 영향이 컸다. 한때는 데모를 하다가 잡혀 경찰서의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나오는 것을 가지고 무슨 훈장이라도 달은양 의기양양해 하던 때도 있었다.
K군과 아주 가까운 친구였던 고등학교 동창들 중에도 소위 말하는 S대에서 데모하다 붙잡혀 주모자로 낙인 찍혀 제적을 당한다든가 정학을 당한 친구가 몇 명 있었다. 한때는 그들을 친한 친구로 두었다는 것도 자랑거리가 되었다. 데모는 처음에는 학교내에서만 일어났다 끝나곤 하더니 그 행렬이 점점 더 학교바깥 세상인 학교근처 민가 쪽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학교 근처의 민가에서만 데모를 하였다. 데모대를 향하여 경찰은 사정없이 최루탄을 발사하였다. 거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무자비하게 최루탄을 발사하여야만 일반 시민들이 사는 집 주변이 매캐하게 되어 일종의 최루탄 오염과 같은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면 그 동네 간난쟁이들 즉 젖먹이들은 계속 칭얼대고 어른들은 매캐한 가운데 있으면 콧물도 나오고 하여 여러 가지로 불편하므로 동네 사람들은 비록 정의에 불타는 학생들에 의한 데모라고는 하나 결코 반갑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데모에 대한 여론을 나쁘게 형성할 수 있었다. 둘째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데모대를 해산 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그렇게 하였던 것이었다. 그러자 각 대학의 데모대는 학교근처 민가보다는 서울시내의 중심가로 이동하여 데모를 하기 시작했다. 서울시내에서 데모대가 주로 집결하여 데모를 하던 곳은 종로통과 을지로 입구와 롯데백화점앞 길 등이었다. 동건의 사무실은 지하철 2호선 을지로 입구역에 있는 롯데백화점과 바로 마주 보고 있던 터라 데모의 영향을 자주 그리고 많이 받았다. 어떤 때는 직원들끼리 점심약속을 하여 은행밖에서 식사를 하는 도중 데모가 발생하면 점심을 부리나케 끝내고는 학생들과 같이 데모를 하든가 인도의 한편에 서서 학생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박수를 치느라 사무실에 늦게 들어오는 직원들도 가끔 있었다. 하지만 K군의 은행은 당시 정부투자기관이어서 직원들의 신분이 준공무원에 해당되어 데모를 하다 잡히면 면직을 당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어 데모를 하는데 직접 참여 한다는 것은 심적으로 매우 강한 강심장의 소유자가 아니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일이었다. K은행 본점 건물과 롯데백화점 사이의 길에서 데모가 벌어지면 백화점과 은행은 영업이 한창 진행되는 시간인지 여부에 불문하고 현관 셔터문을 내렸다. 그러면 당시 데모진압으로 맹위를 떨치던 백골부대의 추격을 피하여 은행의 현관셔터문 옆의 비상문을 통하여 은행에 들어온 학생들에게 마실 것과 혹 간식이 있으면 함께 학생들에게 제공하고 무슨 큰 일이라도 한양 그것을 자랑하고는 하였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88서울올림픽 기간 동안 외국인이 한국을 찾는다. 전세계가 한국을 매우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고 있다는 둥의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데모를 자제해 줄 것을 부탁하는 캠페인을 하였다. 동건은 과연 학생들이 자제해 줄 것인지에 관하여 강한 의문을 갖고 있었으나 다행스럽게도 올림픽 기간 동안에는 데모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렇게 명동에서의 대학생들의 데모는 80년대 중후반 시대의 하나의 중요한 사회현상으로 K군의 뇌리에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회원들께서 너무 바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 일신상의 사정이 있어 한동안 연재를 일단 중단할가 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 야근과 타자수 -
K군이 근무하던 부서는 상급기관인 재무부에 여신거래처의 범위를 넓힐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그동안 수년간에 걸쳐 K은행법의 개정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다 8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서야 재무부로부터 개정작업을 하라고 지시가 떨어졌다. 결과부터 말하면 재무부의 지시가 떨어진 이후로 개정작업을 완료하기까지 1년반이 걸렸다. 그 기간동안 12시 이전에 집에 들어간 날은 1주일에 일요일 밖에 없었다. 야근의 연속이었고 어떤 날은 밤을 꼬박 새우고 집에 가서 속옷과 와이셔츠만 갈아 입고 바로 돌아 나오는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그도 귀찮으면 새벽 6시쯤 명동성당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로얄호텔 사우나에 가서 아침 8시 정도까지 잠을 자고 해장국 하나 먹고 속옷은 호텔직원에게 부탁하여 호텔 매점에서 사다 달래서 갈아입고 출근을 하곤 하였다. K군은 법안 하나 개정하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과 인력이 필요로 한다는데 놀랐다. 더구나 법안 개정의 범위가 일부 개정으로 약 2-3개 조문에 자구수정을 하는 것에 불과하여 개정의 범위만을 놓고 볼 때는 극히 미미한 것으로 그렇게까지 시간과 인력을 요할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K군이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시간과 인력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되었다. K은행 거래처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자료들이 필요하였다. 첫째 확대하여야 하는 이유. 즉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증명할 객관적인 자료들의 준비를 하여야 하는 것이다. 둘째 그럼 어디까지 확대할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이는 K은행 거래처의 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다른 국책은행들과 거래처의 범위가 겹치는 부분을 최소화 하여야 법 개정에 따른 혼란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첫째와 둘째에 필요한 자료들을 어디서 어떻게 구하느냐의 문제이다. 넷째 자료들을 구했다 하더라도 이들을 어떻게 정리하여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결과를 얻어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시도는 과정은 정말 좋았고 열심히 하였으나 결과는 참담함 그 자체였다.
담당 대리와 담당 과장은 항상 시간을 같이 보내기 때문에 통상적인 은행 내부의 일이라면 담당 과장 결재를 받는 데는 시간이 그렇게 많이 걸리지 않는 것이 일반적 이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어떻게 보면 K은행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결정짓는 중차대한 일이므로 신중하게 결정지어야 할 문제였다. 그래서인지 담당대리와 과장간에 수십차례 회의를 거친후 2-3주라는 시간이 경과한 뒤에야 과장의 결재가 났다. 그리고 부장 결재를 받는데 또 일주일 그리고 담당 이사 결재를 받는데 한달 반 정도는 걸린 것 같다. 문제는 담당 이사인데 당시에는 이사들 모두가 자기들이 퇴근할 때 결재를 올린 아랫사람을 오라고 하여 하는 말이 “이 결재서류 내일 출근하면 볼 수 있게 아침 일찍 책상에 올려놔” 라고 말하고는 ”그럼 수고해“라면서 자신은 퇴근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랫 놈들은 퇴근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결재를 올렸던 결재서류를 보면 여러 종류의 지렁이 들이 결재서류 여기 저기서 기어 다닌다. 이건 퇴근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지렁이들을 완전히 잡아야 퇴근을 할 수 있는데 그 놈들을 완전하게 잡는다는 것이 법개정 작업에서는 녹록(碌碌)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은 이사 결재를 득하는데 한달반 부행장 결재를 득하는데 한달 은행장 결재를 득하는데 한달을 잡아 먹어 은행내부에서 결재를 득하는데 걸린 시간만 약 5개월이 걸렸다. 그리고 재무부로 가니 거기 K은행 담당 사무관이 방향을 완전하게 딴데로 틀어버려 기초자료 준비를 처음부터 다시 하여야 했다. 은행 내부의 최종 결재권자의 결재로 정해진 일들은 완전히 없었던 일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자그마치 거의 반년을 집에도 제때 못가고 고생한 것이 완전히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K군은 과장이 담당 이사에게 결재를 들어가기 시작한지 약 2주일째 되는 어느 날 동료 행원들과 담배를 피우면서 말하길 ”어짜피 재무부에 들어 가면 개네들이 전부 칼질 할 건데 여기서는 대강대강 그러나 그럴 듯 하게 만들어서 재무부에 던지면 공은 개네들 한테 넘어가고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로비와 설득만 하면 될 것인데 왜 이리 작업을 어렵게 하는지 모르겠다 씨파“. 하면서 투덜댔던 적이 있는데 재무부에서 칼질을 당한 날 과장 이하 모두 모여 술을 한잔씩 하는데 그제서야 그 자리에서 그 말들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나 할 걸 하면서····· . 참으로 씁쓸한 장면이었다. 다음 날부터 기초자료를 바꾸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동안은 은행내 도서관이나 국립도서관에서 대한민국산업연감이란 책자를 빌려다 놓고 소규모기업 중기업 대기업에 대한 분석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통계청에 자료제공을 요청해 사과상자로 약 70박스쯤 되는 자료를 가져와 앉아서 그것을 분석하였다. 동건은 정말 죽는 줄 알았다. 나중에는 정말로 머리에 쥐가 난다는 것이 이런 거로구나 하게 되었다. 이제는 모든 일에 있어서 은행내의 결재는 대부분 3일을 넘기지 않고 재무부로 넘어갔다. 그러면서 또 기약없는 야근의 연속이었다.
지금에는 우리나라만큼 PC(Personal Computer)가 잘 보급된 나라가 그리 흔치 않다고 말하고 여러 가지 Word에 관한 프로그램들도 잘 보급되어 있어 타자기 자체가 이미 골동품이 되어 버렸지만 당시만 해도 타자기 없이는 일을 못했다. 특히 은행 같은 보수성이 강한 기관은 특히 더했다. 따라서 야근을 하게 되면 그것도 장기간 야근을 하게 되면 타자수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K군과 같은 행원들이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타자수가 야근을 하는데 아무 불만없이 야근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K군이 근무하던 부서에는 타자수가 2명이 있었다. 그것도 다른 부서는 거의 1명씩밖에 없었는데 기획부라서 2명이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타자수는 기획부내의 어떤 과에 배치는 되어 있었으나 기획부 전체의 일을 한 관계로 과에 대한 소속감은 거의 없었고 타자수 개인이 좋아하는 직원에 대한 소속감이 더 강했다. 기획부는 야근을 하는 날도 많았으나 위로부터 급하게 검토보고서를 올리라는 오더(Order)를 받을 때도 많았다. 그럴 때면 이 보고서를 제일 먼저 타이핑을 하여야 하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새치기인 것이다. 보통 타자수의 보조책상에는 순서를 기다리는 서류들이 겹겹이 쌓여있었다. 위에 있을수록 빨리 타이핑이 되는 것이다. 이 순서는 통상적으로는 직원들이 정하나 가끔은 타자수의 일방적인 권한과 끗발에 의해서 정해지기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타자수의 정함에 대하여 감히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만약 이의를 제기하였다 하더라도 다른 직원들이 그 정당성을 인정하지도 않을뿐더러 앞으로는 정땅성을 인정하였을 경우에는 이의를 제기한 직원과 그 이의제기에 정당성을 인정한 직원이 속한 과가 야근을 할 경우 해당 타자수는 영원히 야근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야근을 무슨 밥먹 듯 하던 기획부 직원들에게는 타자수 없이 야근을 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기 때문이다.
타자수와 친한 직원이 가끔 “음 이거 이사님이 급하게 해 달라고 하시는 거야”라고 말하고 서류를 건네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타자수는 “응 알았어요”라고 말한 후 서류를 쌓아논 직원들의 눈치도 보지않고 금방 푼 밥과 같이 김이 모락 모락 나는 서류를 겹겹이 쌓인 채로 간택만을 기다리는 서류들 맨 위에 털썩 올려 놓고는 제일 먼저 타이핑을 하고는 하였다. 이 혜택을 가장 많이 본 것이 K군이었다.
K군은 법개정 작업으로 야근을 시작하던 초기에는 야근의 기간을 점치지 못했다. 따라서 K군은 평소 타자수와 막역하게 지나던 참이라 믿는 구석이 있었는데 어느 날 견디다 못한 타자수가 홧김에 집에를 일찍 가벼려 낭패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단을 치기는 커녕 타자수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K군이 생각하기에 타자수를 묶어두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직감했다. 그러면 이 난관을 헤쳐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 해답은 간단했다. 목마른 놈이 우물파는 수밖에 즉, K군이 타자를 배워 간단한 것은 그가 치면 되는 것이었다. K군은 타자수 장양에게 “나한테 타자치는 법을 알려주면 우리가 야근할 때는 장양은 절대로 야근 안시킬게요”. “그래요 그럼 자세하게 알려 들릴 테니 잘 보세요”. 그로부터 약 1주일 동안 K군은 타자기에 타자수가 없으면 득달같이 달려 들어 타자연습을 한 결과 교정을 본 이후 오자 탈자나 자구수정을 하였을 경우 등 간단한 것은 K군이 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하니 야근할 때 타자수 문제가 반 정도는 해결이 되었으나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라서 평소에 타자수와 지속적인 유대관계를 형성하여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80년대 중후반까지 은행의 기획부 같은 직장에서 최고의 『Super갑』을 찾으라면 K군은 당연하게 타자수를 꼽는다. 그런데 이 훌륭한 타자수와 주판이라는 영물이 티지털화의 트랜드(Trend)에 밀려 자리를 잃거나 창고에서 보관물품으로 지내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재무부는 그나마 필요한데 국회는?
재무부로의 서류 전달일은 처음에는 대부분 K군이 전담하였다. 거기서 K군은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우선 중앙부처의 공무원들은 대한민국에서 일을 가장 많이 하고 있는데 문제는 그 일들이 생산성 있는 일들이 아니라 비생산적인 일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었다. 국회에 대한 답변 국회에의 출석 등 임시국회 및 정기국회 회의기간 동안 여의도 출장으로 1년중 반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K군이 보기에는 국회관련 일들 중 쓸만한 일은 한 1-5%정도에 그치고 나머지는 당리당략(黨利黨略)이나 국회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것들로서 일반 국민들이 보기에는 한심한 일에 고급인력들이 공연히 혹사당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국회가 하는 일이 한심해 보였다 보다. 그리고 공무원들이 승진욕과 명예욕으로 인하여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정신을 망각하고 항상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떤 사안을 검토할 때 사안별로 충분히 할 것과 가볍게 할 것을 구분하여야 하는데 후자의 경우도 전자의 경우처럼 하고 있다는 것인데 정작 자신들은 오랜 세월 거기에 익숙해 있어 그러한 사실을 자신들 스스로는 전혀 모른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이렇게 볼 때 전체적으로 중앙부처 공무원들이 매우 열심히 일을 한다는 것은 사실이나 그일 중 약 40-50% 정도는 지나침에서 나오는 일이며 국회 관련 일들은 90%이상이 쓸데없는 일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은행 서류를 가지고 가면 담당 사무관이 자료를 추가로 요구한다든가 새로운 자료를 요구할 때 보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었다. 물론 담당사무관은 아니라고 했을 것이지만 K군은 담당사무관의 지나침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시킬 자신이 있었다. 한편 K군이 재무부에 가면 담당사무관의 휘하에는 담당 주사가 있었다. 담당 주사는 재무부에서 K군을 반기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K군과 잘 사귀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K군이 예뻐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단지 자기가 할 일을 대신 시키고 자기 마음 먹은대로 부려먹을 사람이 나타났다는 의미일 뿐이었다. K군은 처음에는 담당대리의 신신당부하는 말이 있어 고분고분하게 시키는 일을 성심껏 잘하였으나 가면 갈수록 그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어 슬슬 자리를 피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담당주사와 눈치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러기를 한 달정도 지난 어느날 들어가기 싫은 재무부중소금융과의 문을 억지로 심호흡을 크게 하고 확 열어젖혔는데 눈앞에 웬 낯익은 친구가 사무관자리에 앉아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벌떡 일어나더니 ”안녕하십니까 형님!“ 하고 인사를 하였다. 만약 그 자리가 재무부가 아니고 술집이었다면 틀림없이 조폭선후배 사이로 보았을 것이다. 나도 사무관이고 나발이고 가리지 않고 평소와 같이 ”응 아무개구나 반갑다. 별일 없지?“ 하면서 악수를 하였다. 고등학교 1년 후배였는데 행정고시 합격후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귀국하여 재무부 중소금융과로 발령을 받아 그 자리에 앉아 있다 나를 만난 것이었다. 그리고는 나는 담당 주사는 아는체 마는체 하고 그 후배 사무관의 옆에 앉아 약 삼십분 정도를 이야기 하다가 담당주사 자리로 왔다. 담당주사가 K군에게 물었다. ”어떻게 아세요? 혹시 대학 선배세요?“ 속으로는 걸렸구나 하면서도 내색을 안한채 ”주사님도 잘 아시잖아요 저 S대 못나온거 저친구는 S대 법학과 출신이잖아요. 누구 약올리시는겁니까? 고등학교 선배에요.“ 그 다음날 담당 사무관으로부터 담당대리에게 전화가 왔단다. K주임은 그동안 일을 많이 했으니 이제는 쉬어야 한다고 사람을 바꿔달라고. 담당대리가물었다 ”너 혹시재무부에서 싸웠니? 그 성질머리하고는 너 혹 만에 하나 법안 통과가 안되면 책임져.“ 그 말이 끝나자 마자 K군은 씩 웃음면서 ”저는 국회까지는 책임을 못집니다. 그 이유는 K은행법은 재무부에서 입법신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 K군은 재무부로터 해방되었고 대신 후배 직원이 죽도록 고생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ps(post script) 위에서 말한 후배때문에 한 두번 난처했으나 유쾌했던 기억이 있다. 한번은 내가 담당 차장님과 담당 부행을 모시고 재무부중소금융과를 들어갔는데 두 분이 이 친구에게 90도로 구부리면서 폴더인사를 하는데 이 친구가 쳐다보는둥 마는둥 하고는 나한테 오더니 나에게 폴더인사를 하여 나를 어정쩡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번은 내 후임으로 재무부에 파견된 직원대신 재무부에 들어가서 주사에게 잡혀 막 복사를 하려는데 나에게 와서 형님 가시죠 하고 사무실 밖으로 데리고 나오더니 커피나 하시죠 하며 제가 들어가서 말 할테니 들어가시죠 하여 그냥 명동사무실로 들어온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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