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구 |
1억2677만1622명 (2001년 1월 현재). |
인구성장률 |
0.18%(2000년 추정) |
출생률 |
10.2명/1천명 |
출산율 |
1.46명/ 여성 1명 |
사망률 |
8.15명/1천명 |
주요민족 |
몽고족 계통의 야마토족이 99%이상,기타 재일 한국인. 홋카이도에 거주하는 아이누족 |
평균수명 |
79.55세(남 76.57세, 여 82.68세) |
종 교 |
신토가 절반이 넘는 51.2%를 점하고 있으며, 불교 48.2%, 기독교 0.6% |
주요언어 |
일본어 |
일본인의 기원 - 2 (일본인의 기원)
B. 일본인의 기원
일본인의 기원에 대하여는 기원(紀元) 전후까지 채집 경제의 단계에 있던 토착의 조몬시대인[繩文時代人:조몬시대는 일본 선사시대의 시대 구분으로 수천년 전에서 기원 전후까지에 이르는 시대]이 그 후 한반도(韓半島)로부터 도래(渡來)하여 농경문화를 보급시킨 야요이시대인[彌生時代人:야요이시대는 일본 선사시대에서 대략 BC 300~AD 300에 이르는 시대]과 혼혈하여 형질적인 변화를 이루면서 현재의 일본인의 원형을 형성하였다는 설과, 조몬시대인이 그 이후에 도래한 사람들로부터 문화적 자극을 받아서 그들 스스로가 야요이 문화를 형성하였다는 설이 양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남일본에서 발굴되는 자료, 즉 인골(人骨)이 늘어남에 따라 긴키[近畿:현재의 京都·大阪·奈良·兵庫·三重·滋賀·和歌山의 2府·3縣을 포함하는 지방], 간몬[關門:下關·門司의 2市를 포함하는 지방]지방 등지를 중심으로 한반도의 도래인이 야요이시대 후반에서 나라[奈良]시대에 걸쳐 상당한 수에 달한 것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가 주장한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에 의하면 일본의 이른바 천손족(天孫族), 즉 일본인의 지배층을 이룬 천황족(天皇族)은 고구려인과 계통이 같은 기마민족인 부여족(夫餘族)으로, 그들이 한반도 남부에 정착하였다가 그곳 임나(任那)를 거점으로 해서 일본 규슈로 진출한 후 다시 긴키지방으로 들어가서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나라를 세웠다고 합니다.
일본어는 현재까지 그 계통이 충분히 밝혀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어와 친족관계에 있다는 사실이 가장 강력하게 추정될 수 있는 언어가 한국어입니다. 즉, 일본어가 개음절(開音節)로 끝나는 점(즉, 모음으로 끝나는 점)과 간단한 자음 조직을 가지는 점 등은 오히려 말레이-폴리네시아어와 유사하나, 일본어가 한국어와 같이 모음조화(母音調和) 현상이 있었던 점, 일본어와 한국어는 어휘상의 유사성이 있어서 음운이 대응하는 것이 약 200어에 달한다는 점 등이 그와 같은 추정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결국, 한국인과의 혼혈이 오늘날의 일본인의 형질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고, 또 일본민족이 야요이시대에서 고분시대(古墳時代:야요이시대에 이어 大和朝廷이 일본의 국가통일을 이룩한 4∼7세기의 시대)에 걸친 3~6세기경까지에 하나의 민족으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한국의 고대문화는 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본은 세계적으로 보면 유례가 드문 단일민족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오키나와현[沖繩縣]을 구성하고 있는 유구인(琉球人)은 본래 그들 자신의 유구국(國)을 세운 족속으로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일본어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그러나 유구어는 어계상(語系上)으로는 일본어계에 속하며, 일본에서는 유구인과의 민족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에서의 유일한 소수민족은 홋카이도에 사는 약 2만 2,000(1975)의 아이누인(人)으로, 그들은 본래 그들 고유의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있었으나 현재는 의식주 생활이 완전히 일본화하고, 언어도 일본어를 사용합니다. 한편 일본에는 1988년 현재 약 94만 1000의 외국인이 살고 있는데, 그 중 한국인이 약 67만 7100으로 전체 외국인의 72% 정도를 차지합니다. 이들 한국교포는 국권피탈 후 노동자로 이주한 사람들로, 제1차 세계대전 때와 제2차 세계대전 때 그 수가 증가하였는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다수의 한국인 노동자를 강제징용하여 일본 각지의 탄광, 군수공장 등에 투입하였습니다.
한국인 다음으로 많은 외국인은 중국인 12만 9300, 미국인 3만 2800 등입니다.
* 목차
1. 일본인 혈통 80% 한반도 등서 유래
2. 일본인은 한국인의 후예
3. 일본 야마이국의 첫왕 히미코는 가야 공주
4. 알타이諸語를 기준으로한 韓 日 양국어의 비교
1. 일본인 혈통 80% 한반도 등서 유래
日문부성 ‘유전자 프로젝트’ 책임 오모토 교수 인터뷰
월드컵 공동 개최를 앞두고 아키히도 일왕이 고대 천황은 백제왕의 후손이라고 밝혀 '한일 간 핏줄 커넥션'이 관심사로 등장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의 인류유전학 권위자가 현대 일본인의 형성에 한반도 이주민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밝혀 주목을 끌고 있다.
한국을 방문한 오모토 게이이치 토쿄대 명예교수(67·인류유전학)는 30일 동아사이언스와 인터뷰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은 유전학적으로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다"고 밝혔다.
오모토 교수는 문부과학성의 지원 아래 지난해까지 4년 동안 100명의 학자와 함께 수행한 '일본인과 일본문화의 기원에 관한 학제적 연구' 프로젝트 총책임자이다. 그는 성신여대 박경숙 교수, 단국대 김욱 교수 등 국내 유전학자들과도 유전자 정보를 교환하며 민족집단의 계통 관계를 연구해왔다.
일본인의 기원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주장이 많았다. 2차대전을 전후로 형성돼 나카소네 전 수상이 지지해온 황국사관(皇國史觀)이 대표적 견해. 이 사관은 일본인이 천황의 통치 아래 형성된 단일민족이라고 주장한다.
오모토 교수는 "최근 아시아인의 유전자 비교 분석 결과가 나오면서 황국사관은 사실상 해체됐다"고 힘주어 말했다. 일본인은 한반도 중국 일본이 육지로 연결돼 있었던 빙하시대(2만년 전)에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선주민 집단과, 약 2000년 전 한반도와 중국 대륙에서 수백년에 걸쳐 대량으로 이주한 사람이 섞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유전자 분석을 통해 밝혀졌다는 것이다.
"선주민인 홋카이도의 아이누인, 오키나와의 류큐인 등은 주로 채취수렵 생활을 했다. 그런데 채취수렵시대인 조몬시대(기원전 300년까지) 말기에 화산활동이 증가하면서 날씨가 나빠져 인구가 줄었다. 이 때 한반도와 중국 대륙에서 전쟁을 피해 대량으로 '보트피플'이 들어왔다. 대륙에서 온 사람, 즉 도래인(渡來人)과 선주민 사이에 약간의 전쟁은 있었지만, 평화로운 융합이 이루어졌다."
오모토 교수는 "여러 학자들이 일본인과 한국, 중국 등 아시아 민족의 단백질과 미토콘드리아, Y염색체의 DNA를 분석한 결과 도래인이 전체 일본인의 80%를 차지할 만큼 일본인의 형성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며 "특히 중국보다는 한반도에서 온 사람들이 더 많았으며, 관서지방에는 한반도에서 들어온 사람의 후예로 추정되는 유전형이 매우 높게 나타난다"고 말했다. 또한 본토 일본인은 아이누인, 류큐인 등 일본의 선주민보다 한국인과 유전적 거리가 더 가까운 경우가 많다는 것.
"도래인은 논농사 기술과 철기를 갖고 들어와 일본 최초의 농업시대인 야요이시대(BC 300년∼AD 300년)를 열었고,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AD 1년 무렵 사람들의 묘지가 있는 야마구치현 도이가하마 인류학박물관에 가면 당시 묻혀 있는 사람들의 머리가 모두 한국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야요이시대에 이어 정치권력이 탄생한 고분문화시대(300년∼700년)에는 백제 등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고분들이 일본에도 많이 들어섰다는 것. 오모토 교수는 "근세에 들어 히데요시의 한반도 침입과 한일합방 때문에 서로 민족감정이 나쁘지만, 월드컵 공동 개최를 계기로 고대에는 사실상 형제나 다름없었던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관계가 복원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모토 교수는 토쿄대 이학부에 인류학과를 만들었고, 94년 정년 퇴임 뒤에는 쿄토대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에서 유전학, 역사, 지질학, 지리학, 민족가요, 예술 분야 전문가와 함께 일본의 뿌리를 찾기 위한 학제간 연구를 해왔다. 또한 올해 9월 일본에서 열릴 국제인류학민족학 회의 조직위원장을 맡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신동호 기자 dongho@donga.com
2002년 2월 4일 과학동아
※ 제 생각에는 일본의 원주민은 2만년 전 사람이 아니라 고조선이 건군된 B.C. 2000년 경에 이주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2. 일본인은 한국인의 후예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과학전문지「디스커버」지 1998년 6월호에서「일본인의 뿌리」라는 논문을 통해, "현재 일본인은 유전학적으로나 골상학적으로나 한국 이민족들의 후예임이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는 일본인의 기원을 한국인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본 건국의 뿌리는 바로 우리 한민족이다.
일본에는 '단군조선' 말기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일대 변화를 가져왔던 '야요이(彌生)문화'가 있다. 이것이 바로 단군조선 말기에 한민족이 동(東)으로 대이동을 하여 일본에까지 가서 정착하는 단군조선의 역사와 부합되는 것이다. 단군조선 말기의 영향을 받은 야요이문화는 특히 한반도 남부 지방 사람들이 일본 규슈(九州)지방으로 이주하여 형성한 것이다. 이들 청동기는 일본열도에 이주한 한민족이 만든 것이 분명함은 한국과 일본열도 두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극명하게 그 관계를 밝혀주고 있다.
일본 북규슈(北九州) 사가(佐賀)현에는 단군조선 말기의 영향을 받은 야요이(彌生)시대 유구지가 있다. 일본은 1994년 야요이시대 유구지를 컴퓨터로 당시의 모습을 추리, 완벽하게 복원해 놓고 있다고 한다. 야요이문화는 단군조선으로부터 가까운 거리에 있던 서북규슈지방에서 시작되어 그 말기에는 훗카이도 일부를 제외한 일본열도 전지역에 확산되었다.
야요이문화의 연대는 그 발상지인 규슈지방의 경우 서기전 3세기(지금부터 2300여년 전) 무렵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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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사 제공> |
도쿄(東京)대학교 사사야마(笹山晴) 교수의 저서《일본고대사 연구》에 보면, "야요이문화는 일본에서 자생적으로 발전된 것이 아니라… 해외에서 도래한 것이 분명하다"고 했는데 그는 한국에서 도래한 것이라고 밝히지는 않았으나 '해외'라는 것은 곧 '한국'을 암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일본학자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1987년 발행된 도쿄대 인류학 잡지의 영문판《고대일본 이주자 수 추정》이란 하나하라(埴原和郎) 인류학자의 주장을 보면, "일본인의 골상과 얼굴, 모습 등을 토대로 당시의 도래인(한국개척자들)의 수를 컴퓨터로 계산한 결과 규슈지방은 도래인들이 거의 전부다.", "따라서 야요이시대부터 나라(奈良)시대에 이르는 약 1천년 동안 대륙(한반도)으로부터 일본에 건너 온 사람이 약 1백만 명이다"라는 '추정통계 보고서'를 발표하여 대량집단이 이주한 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나라시대는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문화 말기(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밝힘에 있어서, 즉 '한ㆍ일 관계사'에서 그 기원은 일찍이 '단군조선' 말기의 민족의 대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단군조선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된다. 일본열도는 대부분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이룩되어 왔는데 그 사람들의 대부분은 단군조선인들을 비롯 가야ㆍ고구려ㆍ백제ㆍ신라계라는 것은 이미 밝혀져 왔고, 또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와 삼한 등에 이어, 가야인들은 고구려ㆍ백제ㆍ신라보다 앞서 대마도를 거쳐 규슈로 대거 이주, 선주(先住)세력을 흡수한 후 규슈 전역을 장악, 고대 일본 국가형성의 주역이 되었다. 일본이 그들의 일왕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고분들을 비롯 당시 지배자들의 묘제는 3∼4세기에 걸쳐 성행했던 '가야고분'의 형태이며 5세기 중엽부터는 백제 전기의 석실분이 나타난다.
일본 일왕 즉위식에서 전달되는 일왕가의 삼종신기(三種神器)라는 이른바 동경(銅鏡), 동검(銅劍), 곡옥(曲玉) 역시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에 의심을 하는 한ㆍ일학자는 없다. 이 세가지는 가야의 고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대마도와 북규슈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오키노시마(沖ノ島)'는 고대유물의 정창원(正倉院)으로서, 출토된 유물이 대부분 '가야계'가 틀림없으나 일본 사학자들이나 궁내청(宮內廳)은 이에 대해 함구하고 있으며 무더기로 출토된 국보급 유물들에 대해 일본 궁내청은 오키노시마에 외부인의 출입은 물론 접근조차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이 오키노시마는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갈 때 중간기착지 역할을 했던 곳으로, 이처럼 일본은 고대 유적지 발굴 특히 일왕가와 연관된 유적조사는 금기로 하고 있다. 출토물들이 1만여점이 넘는데 전부 비밀에 부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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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수 아남그룹 명예회장 제공> |
왜(倭)와 일본(日本)이라는 국명은 언제 생긴 것이고, 이들 나라는 누가 중심이 돼 세운 것일까?
왜라는 국명은 15대 응신(應神)일왕 때, 일본이라는 국명은 38대 천지(天智)일왕 때 생긴 것으로 왜는 가야인들이, 일본은 백제인들이 중심이 돼 세운 것이다.
그러나 가야(伽倻)는 그간 한국사에서 가야사가 많이 누락된 채 엮어져 왔다. 최근 김해지방 고분에서 가야 유물을 발굴하는 등 고고학적인 성과에 의해 그 공백이 급속히 메워져 가고는 있지만 옛 문헌으로는 단지 ≪삼국사기≫에 그 일부분과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짤막한 내용만이 소개되어 있다.
가야는 서기 42년에 김해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에 의해 건국되어 520년간 존속하다가 서기 562년 신라에 병합되기 전 까지 고구려ㆍ백제ㆍ신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국시대를 이루어 왔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철기문화를 꽃피우며 김해만을 중심으로 해상왕국을 건설하여 일본에 진출해 일본왕실의 기원이 되는 등 동북아 문화의 젖줄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가 가야사를 포함하여 사국사기가 되어야 함에도 가야를 병합한 신라가 의도적으로 가야사를 누락시켜 버렸고, 그 후 ≪삼국사기≫ 등을 편찬하였던 고려마저도 가야사를 외면한 채 고구려ㆍ백제ㆍ신라 삼국 위주로 역사를 엮어왔고, 특히 일제강점기 때 '가야사'는 일본왕실의 기원이라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왜곡ㆍ말살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어용학자들을 내세워 일본 일왕가의 본관 감추기, 즉 일본의 기원인 단군조선을 비롯 "가야세력과 백제 망명정권이 일본 일왕가를 이루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수많은 고문서를 불태우는 등 우리 '역사'를 철저히 왜곡ㆍ말살하였다. 일제는 1915년 6월 29일 치안상의 이유를 내세워 총독부 극비지령인 경무령을 발동하여 가야 김수로왕을 시조(始祖)로 하는 김해김씨족보 발행을 금지했고, '가야사'를 보존한 김해김씨문중을 약탈했다.
가야인들이 낙동강 유역의 비옥한 땅을 두고 일본 규슈지방으로 집단이주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야지방과 일본열도, 특히 규슈와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고, 당시 일본열도는 인구가 적은 미개척지였기 때문에 개척의욕이 강한 가야인들로서는 개척의 대상이 되었고, 문물이 발달한 가야인들은 성품이 온화하여 투쟁을 싫어해 좌ㆍ우에서 백제와 신라의 크고 작은 협공을 수없이 받게되자 항쟁하는 것보다 차라리 신천지 개척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 이유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93년 4월에 고려대 교우회관과 인천(경기은행 본점 대강당)에서《역사적 뿌리 탐구의 여정》의 저자인 일본인 사학자 다카모도 마사도시(高本政俊; 1928∼)가 초청돼「일본 속의 가야문화 ─ 일본 사람에게서 한ㆍ일 고대사를 듣는다」라는 강연회가 개최된 적이 있다.
다카모도 씨의 '고본(高本)'이란 성은 고구려의 후손으로서의 고(高)자와 일본에 건너온 것을 의미하는 본(本)자를 따서 만든 성씨라고 밝혔다. 그는 또 일본 각처의 지명, 신사와 절의 이름, 인명 등을 열거하면서 많은 한국인이 수차례 걸쳐 집단으로 일본에 건너와서 일본민족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일본의 고대 왕조와 깊은 인연을 가졌다고 밝혔다.
고구려ㆍ백제ㆍ신라가 일본으로 진출할 때의 경로는 어떻게 될까?
고구려는 서해를 거쳐 규슈의 가고시마(鹿兒島)와 도쿄인근의 오이소(大磯)해안으로 상륙, 사이타마현(埼玉縣)과 도쿄를 개척하였고, 백제는 남해와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거쳐 긴키(近畿)평야의 중심지인 오사카(大阪)로 상륙하여 죽내가도(竹內街道, 다케노우치가이도)를 따라 나라(奈良)지방에 정착하였고, 신라는 동해를 거쳐 니가타(新潟)의 사도(佐渡)섬을 거쳐 일본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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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수 아남그룹 명예회장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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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본 야마이국의 첫왕 히미코는 가야 공주
전 후 일본열도는 고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안감힘을 썼다.
패전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그후에는 경제적 번영을 바탕으로 문화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온 국민의 성원 속에 규슈 지역과 긴키지역의 유적발굴이 이루어졌다. 일본 열도에 불어닥친 히미코 열풍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이곳에서는 일본의 고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들은 발굴자료와 문헌연구를 종합하여 규슈 지역에 「야마이국」이라는 고대국가가 있었으며, 그 첫왕이「히미코(=비미호,卑彌呼)」란 여성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규슈 지역의 발굴로 신화로만 알려졌던 것이 역사로 드러난 것이다. 이로써 일본의 역사를 몇백년 앞당기게 되었다.
이어 그 히미코가 한반도 남부를 정벌한 신공황후(神功皇后)라고 주장하는 논문도 발표되었다. 히미코가 한반도의 남부를 정벌한 여왕이라면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역사적 열등감도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일본열도는 온통 흥분으로 들끓었다. 그것은 힘이었다. 경제적으로 번영하여 옛 영광을 회복하려는 시점에서 일본인들은 정신적으로 「상처받은」 자존심까지 되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흥분의 도가니에서 고대사의 진실을 밝히는 빛이 비쳐졌다. 그것도 한 줄기가 아닌 세줄기의 빛이었다. 그 빛을 받아 모든 일본인이 진실을 찾은 것은 아니지만, 일본인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것만은 사실이다.
첫번째는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 등이 일본인의 기원으로 밝힌 기마민족설이다. 규슈 지역과 긴키 지역에서는 말재갈, 말에게 씌운 갑옷 등 무덤의 주인공이 기마민족임을 나타내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고고학적 성과와 문헌연구를 종합하여 에가미 교수는 1958년에 『일본민족의 기원』, 1967년에 『기마민족국가』라는 저서를 통해 일본의 고대국가를 세운 이들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기마민족임을 밝혀 일본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우리로선 당연한 이야기지만 일본으로서는 그렇지 않았다. 대다수 일본 학자들은 일본문화의 기원이 남방에 있다고 보았고, 이는 한국도 동일하다고 보았다. 북방에서부터 문화가 전래되었다고 한다면 한반도를 뛰어넘어 일본이 문화를 전수받을 수 없으므로 자연히 한국의 선진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일본의 학자들은 일본이 남방의 해양에서 문화를 받았고 이를 다시 한반도에 전수하였다는 전제 아래, 이를 입증할 만한 것들을 내놓았고 이것이 부족하다 생각하면 날조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에가미 교수의 발표는 분명 충격이었다.
두번째 충격은 우리나라 가야 지역의 발굴이었다. 특히 대성동 고분에서는 파형동기와 갑옷 등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
그 가운데 파형동기는 일본의 규슈와 긴키 지방에서 흔하게 출토되는 것으로, 최근세까지 일본왕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그런데 이것과 유사한 파형동기가 대성동고분에서, 그것도 일본보다 1백50여년이나 앞선 상태로 출토 되었던 것이다. 갑옷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에서 출토된 것과 흡사한 모양에 연대가 앞선 것이 가야에서 나왔다. 고대 사회에서 앞선 무기를 지닌 민족이 정복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이므로 이 유물을 보고서야 완고하던 일본 학자들도 고개를 떨구었다. 그 중 몇몇은 정식으로 일본 텔레비전에 나와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였다는 「임나일본 부설」이 사실이 아님을 솔직히 시인하였다.
마지막 충격은 『춤추는 신녀』의 저자인 이종기씨(95년 작고)가 일본어로 쓴 『卑彌呼 渡來の謎』라는 책이었다. 그것은 앞선 두 가지 빛보다도 훨씬 강도가 컸다. 이씨는 이 책을 통하여 일본인들이 개국 시조라고 믿는 야마이국 히미코(비미호) 여왕조차 한국인이며 그것도 가야국 수로왕의 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1976년 일본의 이견서방(二見書房)에서 이 책을 출간하자 당시 일본의 유명한 작가인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는 서문을 통하여 『야마이국 문제에 한국인 연구자가 정면 으로 파고든 예는 없다.
더군다나 저자는 그 근원을 고대 인도에서 찾았고 남한에서 본 모습을 보고서는 다시 규슈의 시라누이 해안에 도달한다.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웅대한 구상에 압도당한다』라고 평하였다. 당연히 일본 열도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나 결국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회수되는 운명을 겪어야 했다. 출판의 자유가 허용된 일본에서 한국인이 쓴 책이 뚜렷한 설명도 없이 발매 금지가 돼버렸던 것이다.
이후 그는 작고하기 직전까지 현장탐험을 계속해 새로운 자료를 보충해놓았는데, 그것이 유고작 『춤추는 신녀』를 통해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아동문학가이기도 한 이종기씨는 식민사관학자들이 왜곡한 역사의 물줄기를 되돌려놓으려는 일념으로 돈도 명예도 없이 길고도 먼 탐사의 길을 걸었다. 민족문화의 보고인 『삼국유사』와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 등을 안내자로 삼아 빌려 탄 자전거로 일본 규슈의 들판과 산속을 헤맸고, 이역만리 중국의 절 마당과 인도의 뒷골목까지 뒤졌다.
그렇게 해서 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수로왕릉을 상징하는 쌍어문(雙魚紋)이 일본 규슈의 신사에도, 중국 복주의 절에도, 저 멀리 인도 북동부 아요디아의 사원에도 있다는 것을 밝혀냈던 것. 이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수로왕비 허왕후가 실재하였음을, 그녀가 타고온 꽃가마 뱃길 또한 아시아 사람들이 서로의 지혜를 배우고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정기적으로 오고 가던 무역로이자 문화교류로였음을, 그리고 수로왕과 허왕후의 딸 비미호가 규슈로 건너가 국가를 세우고 여왕이 돼 통치하였음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확인했던 것이다.
이는 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초기기록에 불신감을 보이던 우리나라 일부 사학자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21세기 세계의 중심축을 꿈꾸는 동북아의 젊은이들, 특히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 희망과 용기를 던져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4. 알타이諸語를 기준으로한 韓 日 양국어의 비교
알타이어족은 한국어와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하다. 국어의 계통에 대한 연구가 19세기 후반부터 전개되어 왔으나 쉽게 밝혀내지 못하고 몇 가지 계통설이 제기되었다. 알타이 어족과 동계라는 주장(북방계설), 드라비다어와 동계라는 주장(남방계설), 일본어와 동계라는 주장(한 일어 동계설), 인도 유럽어와 동계어란 주장(인도 유럽어동계설)등이다. 이 중에 알타이제어와 동계라는 계통설이 일반적으로 강하다.
국어를 알타이어족에 포함시킨 학자는 핀란드의 람스테트이다. 람스테트는 알타이조어의 근거지는 흥안산맥 근처라고 추정하고, 일부가 흥안산맥 동쪽으로 이동한 후 갈라져서 북쪽에는 퉁구스족, 남쪽에는 한족이 자리잡았고, 흥안산맥 서쪽으로 이동한 일부는 다시 갈라져서 북쪽에는 몽고족, 남쪽에는 터키족이 자리잡았다고 보았다.
* 알타이제어들의 공동특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모음조화현상이 있다.
어두와 어말의 자음에 제약이 있다. (어두에 유음r이나 자음군이 오지 않으며, 어말 에도 자음군의 제약이 있다.)
교착성이 뚜렷한 첨가어이다.
모음교체 및 자음교체가 없다.(첨가어이므로 접미사(어미나 토)에 위하여 단어가 파 생되거나 문법적 기능을 나타내고, 인구어처럼 모음이나 자음의 교체가 문법적 기능 을 가지지 않는다.)
관계대명사 및 접속사가 없다.
동사와 형용사의 어미가 다양하다.(특히, 부사형어미의 사용으로 접속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인도 유럽어에서 두 용언은 접속사로 연결되지만 국어와 알타이어에서는 선행용언의 어간에 부사형어미를 첨가시켜 연결한다.)
주어가 서술어 앞에 오고, 수식어가 피수식어 앞에 오고, 목적어나 보어가 서술어 앞에 온다.
명사에 性, 數표지가 없고, 동사에도 性, 數가 나타나지 않는다. 성, 수는 접사나 단어의 첨가로 나타낸다.
위에서 알타이제어와 한국어와의 공통점은 대부분 일본어의 경우에도 적용이 된다. 다만 모음조화에 관한 것이 확실치 않다. 고대 일본어에 모음연결에 관한 제약규칙이 있었음이 드러나 있으나 이것이 알타이제어나 한국어에서 볼 수 있는 모음조화연상의 잔영인지는 결정하지 어렵다. 또 한가지 차이점은 일본어의 음절이 開音節으로서 모두 모음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알타이제어 및 한국어에서는 자음으로 끝날 수 있다.
* 그러면 이러한 알타이諸語를 기준으로 한국어와 일본어에서 보여지는 유사점은 다음과 같다.
알타이제어에서는 형용사가 명사의 일종으로 명사와 같은 曲用을 하는데 비해 한국 어와 일본어는 동사의 일종으로
활용.
명사에 접합하는 부속인칭어미나 반조어미가 없다.
술어에 접미하는 인칭어미가 없다.
こ そ あ ど 지시어체계가 近 中 遠의 3계열.
용언의 활용체계의 내부에 경의적인 형태소가 들어감.
[r], [l]의 음운적 구별이 없다.
15 6세기 한국어 자료에는 악센트표기가 있는 것이 있는데 현재 일부 방언에 高低악 센트가 행해지고 있다.
이러한 유사점을 통하여 한국어와 일본어가 알타이제어와의 공통적인 특성을 공유하는 면이 있으면서도 또한 알타이제어와는 相異한 측면에 있어서도 공유하는 면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알타이제어와는 별개의 각별한 관계를 두언어는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알타이제어와 한국어 및 일본어의 비교방법은 각 어군의 고대자료가 많지 않으며, 많은 언어가 자취를 남기지 않고 소멸하여 연구 방법을 적용하기에 많은 불리한 점을 가지고 있다. 李基文에 의하면 이러한 한국어와 일본어의 사이에는 소멸된 '잃어버린 고리'가 있다는 주장을 하게 되는데 이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겠다.
일본인의 기원 - 3 (일본인의 종교)
C. 일본인의 종교
일본인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두 가지 이상의 종교를 가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종교별 신도수의 비율은 불교가 48.2%, 신토[神道:자연숭배·조상숭배를 기본으로 하는 일본의 고유종교로, 神社를
중심으로 발달한 神社神道가 주류]가 51.2%를 차지하여 일본의 양대 종교가 되고 있고, 신·구교를 합친 그리스도교는
겨우 0.6%를 차지합니다.
일본의 종교는 일본에 오래 전부터 있었던 신토(神道) 와 외국에서 들어온 불교가 기본을 이루고 있습니다.
신토는 일본인만의 독특한 토착 신앙으로 일본인들의 자연관이나 조상 숭배 사상의 주요 핵심이라 할 수 있는데
지상의 모든 삼라만상은 신이 낳고 주관하며 모든 자연물에 신이 내려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2대 종교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독특한 신불(神彿) 신앙을 탄생시켰습니다.
일본인 가정에는 신단과 불단이 함께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신단을 향해 절을 하고 또 조상을 모신 불단을 향해 절을 하는 일본인들이 이상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요즈음은 '태어나면 진자(神社)의 우지가미(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에게 예를 올리고, 결혼식은 진자나 교회에서 화려하게
올리고, 죽어서는 오테라(절)의 호토케(부처님)' 라는 말이 있을 만큼 일본인들의 종교의식은 신앙 차원이라기보다는
생활 관습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면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설. 오미야마이리(남자아이는 31째, 여자아이는 32일째 되는 날에 신생아의 건강을 기원하는 첫 진자 참배를
말함). 시치고산, 진자의 축제 때는 부모는 자식을 데리고 진자에 참배하러 갑니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아기 건강의 기원과 결혼식은 신토식으로 올리며, 장례식은 불교식으로 스님이 참석하여 불경을
외는 가운데 화장을 합니다.
일본의 종교는 영혼의 구원을 갈망하지 않고, 체계적인 교리가 없이 형식만 남아 종교라기 보다는 관습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일본인이 왜래 종교를 그대로 받아 들이지 않고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변질시키는 경향이 있고,
메이지 정부가 권력 강화를 위해 기존 종교를 억압하고 인위적으로 천왕 숭배를 강요해 신토를 보급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일본인의 종교 역사와 무종교와 천황숭배의 실체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 목차
1. 무종교의 실체
2. 무종교의 역사
3. 퇘색한 종교관
4. 천황숭배의 실체
5. 불교의 변질
6. 결론
1. 무종교의 실체
일본인은 표면적으로는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일본인 중에서 확고한 종교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고,
그렇다고 무신론자라고 인정하지도 않으며, 대부분 자신이 '무종교'(無宗敎)라고 대답합니다.
여론조사 결과 일본인의 70%가 무종교(無宗敎)라고 대답합니다.
이상한 것은 이들 가운데 75%가 무종교이지만 종교심은 중요하다고 답한다는 점입니다.
일본인은 종교심이 대단히 강한 민족이지만 특정 종파에 소속되는 것은 싫어해 신을 인정하면서도 신을 믿지 않는
무종교(無宗敎)라는 특이한 사상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일본의 묘지 광고는 대부분 '종교를 묻지 않는다.'라고 선전하는데 이는 고객이 원하는 취향에 맞게 장례를 치루어
주거나, 나름대로의 종교적 분위기를 연출해 주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이 거부하는 '교단 종교'란 종교를 만든 교조(敎祖)와 경전인 교전(敎典)과 체계적 조직인 교단(敎團)이 성립된
종교로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교 들을 말합니다.
일본인들이 믿는 '자연종교'란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자연발생적인 종교로 선조로부터 무의식적으로
계승되었으며, 교조(敎祖)와 교전(敎典)과 교단(敎團)을 갖고 있지 않는 무속신앙 같은 종교입니다.
일본 사람은 정월 초하루에는 젊은 층까지 대부분 신토를 다녀 오는 '히쓰모데'라는 행사를 갖는데 이는 종교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의례적이고 관습적인 이유에서입니다.
또한 매년 7월에는 고향에 내려가 절에 가서 조상에게 공양하는 '오본'이라는 불교식 행사를 치룹니다.
봄 가을에는 조상의 묘를 찾아 묘에 물을 끼 얹는 '피안'이라는 출처 불명의 행사를 갖습니다.
일본인들은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같은 행사를 무의식중에 반복하면서 어느 틈엔가 자연종교에 동화됩니다.
일본인들은 이런 관습적 행사를 통해 현세의 안녕을 빌고, 사 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잊습니다.
때문에 일본인들은 다소 딱딱해 보이는 교단종교에 대한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도 매년 제사와 성묘를 드리면서 죽어 귀신이 되더라도 후손이 차려주는 제사밥을 먹겠다는 생각을 하며
종교를 갖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종교를 갖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 중심적이고 쾌락 지향적인 생활을 바꾸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에 있어서 큰 시련이나 한계나 허무함을 느끼기 전에는 종교를 갖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영원한 사 후 세계를 출처 불분명의 전통이나 관습에 맡긴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또한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토록 광대하고 정교한 우주만물을 만든 창조주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2. 무종교의 역사
일본 사람이 이렇게 교단종교를 멀리하고 무종교에 빠지게 된 역사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인도 중세에는 불교 사상을 받아 들여 내세(來世)가 존재함을 믿었고, 죽고 난 뒤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해탈을 통한 구제를 바랬습니다.
부처란 최고의 지혜를 깨달음으로써 두 번 다시 '육도 윤회'(모든 생물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天의 여섯
세계를 계속 순회한다고 믿음)를 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도 윤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가해 승려가 되어 수행을 했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고
번뇌와 욕심을 잘 다스릴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세의 일본 승려 신란(1173~1262)은 인간이 뿌리 깊은 번뇌를 극복하기에는 너무 무력하고, 가르침대로 수행을
계속해도 아무 효과가 없고, 허탈한 마음만 남을 뿐이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는 수행보다는 아미타불에 의지해 '나무 아미타불'(아미타불에게 귀의함)만 반복적으로 외우면
지극히 기쁜 세계인 극락에 다다를 수 있다는 사상이 유행했습니다.
16세기부터는 이 세상에서 인(仁), 의(義), 예(禮), 지(知), 신(信)을 행하면 부처 앞에서 합장하거나, 신사에 참배하지
않아도 인간은 구제될 수 있다는 유교의 사상이 가미되었습니다.
그래서 살았을 때에는 유교의 가르침에 따르고, 죽고 나서 귀신이 된 후에는 후대의 사람들이 아미타불을 외워 주면
지옥에 가지 않고 극락에 간다는 이상한 교리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원래 유교는 사후 세계에 대한 종교가 아니라 현세의 윤리 도덕인데, 현실세계에 대한 유교가 관심을 불러 일으킨 이유는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사람들이 사 후 세계보다는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인생을 고통스럽고,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존재는 잠시 나타났다 사라질 뿐 영원할 수 없다.)하다 하여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현실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인기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상한 인생을 괴로워 하지 말고, 그 자체를 즐기자는 '부세'(浮世, 확실한 중심이 없이 물 위에 둥둥
떠 배회함) 사상을 갖게 됩니다.
16세기의 시가집에서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지 말고, 어차피 덧 없는 꿈 같은 인생 마음껏 하고 싶은대로
즐기며 살다 가자는 시가 많이 발견됩니다.
이러한 향락적인 인생관이 나타나게 된 배경에는 16~17 세기 들어서면서 농업 생산량이 증대해 사람들이 생활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에 대한 공포심을 잊기 위해 지옥이 꼭 고통스러운 곳이 아니고, 그런대로 살 만한 곳이며, 지옥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상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것에 의심을 품는 회의론적인 사상을 갖게되고, 어차피 확실히 알 수 없다면 실컷 성적 쾌락 등을
즐기다 가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생각을 품게 됩니다.
그래도 마음 속에 일어나는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는 없기에 종교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고, 현세에는 즐기며
살다가, 죽고 나서 후손이 아미타불을 외쳐 주어서 극락에 가겠다는 타협점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장의(葬儀) 불교'로 부세의 삶이나 무종교와도 융합되는 일본 특유의 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의(葬儀) 불교'에서 장(葬)은 '장사할 장' 자입니다.
장의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고인에게 법명(法名)을 주어줍니다.
법명은 대체로 성씨를 석(釋)으로 주어 '석○○'으로 불리는데, 석은 석가의 석과 같은 자로, 원래는 생존 시에 불교도가
된 증표로 부여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장송(葬送)이 불교 의례로 행해지고, 승려가 참석한 가운데 고인을 위한 법요(法要)가 이루어집니다.
1주일 간격으로 법요가 이루어져 주로 49제가 행해지며, 백일제와 1주기 등으로 이어지는데, 보통 33회기로 종료됩니다.
49제는 인도로부터 유래된 것이고, 백일제나 1주기 3주기는 중국에서 유래된 것이며, 7 13 17 25 33회기는 일본에서
생겨난 것이고, 50 100회기는 정토진종의 영향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후손은 매년 고인이 죽은 날에 승려를 불러 독경을 하고, 집에 불단과 위패를 모셔둡니다.
이렇게 사람이 죽어도 가문의 일원이 되어 제사를 받게 된다는 '이에' 사상이 퍼지고, 장의불교가 이를 뒷받침 하게 됩니다.
에도 막부 시대에는 '크리스천 금제(禁制) 정책'이 시행되었는데, 모든 가구는 불교 사원에 소속되 있어야 하고,
소속된 절로부터 크리스천이 아니라는 증명서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장의불교는 민중의 호응과 막부의 지원으로 일본 전역에 퍼져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원래 불교에는 죽은 자를 위한 제사가 없으며, 석가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장례는 고향사람에게 맡기고
수행에만 전념하라고 했습니다.
인도에서의 불교식 장례는 화장할 때 간단한 경문을 읽는 것으로 끝납니다.
불교가 죽은 자를 위한 제사를 드리게 된 것은 효(孝)를 중시하는 유교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일본인들은 원래의 종교를 자신의 편의대로 변질시켜 자신이 믿고 싶은대로 믿는데 능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변질은 비단 불교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카톨릭이나 기독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진리를 변질시켜 사람이 만든 교리를 신봉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연옥 사상을 만들어 내었고,
기독교에서도 진리와 희생은 외면한 채 복 받기만 바라는 기복주의나 은사주의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3. 퇘색한 종교관
일본의 종교는 역사적으로 정권 유지와 권력 강화를 위해 정부가 주도적으로 보급시키거나 핍박한 특징이 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자 사람들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신분에서 벗어나 국가의
구성 일원인 '국민'이라는 자격을 선택하도록 강요 받았습니다.
'국민'은 국가 구성원으로서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지니는 대신 선거로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 존재입니다.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 정부는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일왕을 신성시 했고, '대일본제국헌법'에서
민중을 '국민'(國民)이 아닌 천황에 종속된 '신민'(臣民)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프러시아를 근대 국가의 모델로 정하고, 천황을 전면에 내세워 일본의 주권자로 삼았으며, 천황이 일본의
절대적 지배자라는 것을 신민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여러 형태의 대규모적인 국민 교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같은 역사책을 통해 천황이 신의 자손이란 신화를 믿게 했고, 신의 자손만이
일본을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이데올로기를 보급하였습니다.
기독교는 도쿠가와 막부에 이어서 메이지 정부에서도 금령(禁令)의 대상이었는데, 이는 기독교가 천황의 신성을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서양 열강의 압력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기독교를 인정하는 것처럼 표방하고, 대내적으로는
기독교 금령을 시행하였습니다.
일본 정부의 교묘한 기독교 방해 전략은 기독교를 개개인이 마음으로 믿는 것은 허용하지만, 선교나 출판이나 설교 등
표면적인 활동은 금지하는 것입니다.
또한 종파를 초월해 기독교나 불교나 신토 등을 하나로 다룰 개념이 필요해 1874년 '종교'(宗敎)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종교'는 일정한 교리와 체제를 갖춘 기독교나 불교 같은 교단종교를 말하며, 자연종교는 제외됩니다.
따라서 일본인들 사이에는 교단종교를 믿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무종교'라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 생긴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일본의 신민이 천황에게 절대 충성해야 하는 존재임으로 전 생애에 걸쳐 국가의 법률을 따라야 하며,
종교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정부의 허가 없이 종교 시설을 세우거나 종교 행사를 갖는 것은 법적인 규제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4. 천황숭배의 실체
메이지 정부 이전에 천황의 존재는 권력 없이 미약한 존재였고, 민중 역시 천황의 존재에 대해 무관심하였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천황이 절대적 지배자이고, 신민은 천황에게 절대 복종해야 된다는 이념을 국민에게 세뇌시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천황을 신성시 하는 이론이 종교 교리처럼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천황은 '아마테라스오 오미카미'(天照大神)라는 태양의 여신의 자손으로 강조되고, 천황에게는 '아마테라스오
오미카미'에게 제사드리는 것이 최대의 의무가 되었습니다.
천황은 이제까지 한번도 참배한 적이 없던 '이세 신궁'(천황가의 씨족신을 모시는 신궁)에 참배하게 되었습니다.
천황의 제사는 국민이 각자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로 이어져 국가적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천황을 신성시하는 가르침을 국민에게 널리 전파하기 위해 포교사(布敎師)를 전국으로 파견하였습니다.
그리고 1872년에는 교부성(敎部省)이란 관청을 설치하여 전국의 신주와 승려의 임명권을 장악하고, 그들을 동원하여
천황 숭배 사상을 널리 퍼뜨렸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이를 통해 국가 이념을 종교화해 권력을 강화하고 민중의 지배를 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일본 지식인들은 국가가 종교를 인위적으로 퍼뜨리는 것을 항의했고, 불교측에서도 천황숭배를 신토식으로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 유학중이었던 시마지 모쿠라이는 정치와 종교의 구별이야 말로 문명국의 조건이라며, 국가가 종교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국민에게 강요하는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주미대리공사(駐美代理公使)였던 모리 아리노라도 교부성의 국교 제정에 반대하고, 종교는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으며,
신앙은 인간의 천부의 권리임을 역설하였습니다.
교부성의 신불(神佛) 합동 방식은 신토의 국교화를 추진하려던 신토측에서도 반발하였으므로, 교부성의 국민교화운동은
모든 종교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결국 교부성은 해체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국민교화를 중단하지 않고, 교묘한 궤변을 거듭하며 국민들 사이에 침투하였습니다.
결국 신토는 종교가 아니라는 '신토비종교론(神道非宗敎論)'을 주장해 자연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열등한 종교 내지는
전통이나 풍속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천황을 절대시 하는 신토를 신앙의 자유라는 명목 때문에 국교화 할 수 없다면, 신토를 종교로 간주하지 않으면 됩니다.
신토를 종교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국민에게 신토를 강요해도 신앙의 자유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내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토는 종교가 아니라 관습적인 제사의식으로 천황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국민에게 공로가 있었던 신하의
영혼을 위로하는 일종의 도(道)라고 홍보하게 되었습니다.
5. 불교의 변질
메이지 정부는 천황을 절대시 하는 신토론으로 무장하고, 제정일치와 신불분리(神佛分離) 정책을 시행해 불교를
배척하였습니다.
이러한 노선에 큰 타격을 받은 불교 교단(정토진종)은 살아 남기 위해 신토비종교론을 흡수하여 신토를 인정하고
융합하였습니다.
막부 정권 하에서도 봉건적 질서를 준수해 살아남았던 정토진종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신자는 먼저 국가가 요구하는
충실한 신민이 되야 한다는 교의를 제정함으로써 타협합니다.
이로써 정토진종의 종교적 수행은 이차적인 것으로 전락하였고, 정토진종은 신토의 신들을 섬기게 되었으며,
국민에게 태평양 전쟁 협력을 종용하기까지 하였습니다.
6. 결론
일본의 종교는 민중의 편의와 정치적 목적 하에 심하게 변질되었고, 결국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 후 세계를 보장할 수
없는 출처 불분명의 관습적인 종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은 우리와 같은 셈족으로 종교성이 강하기 때문에 영적 갈망을 해소하지 못하고, 광적인 취미생활이나
변태 엽기 등 빗나간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영들림 현상이나 우울증 등 정신병과 자살도 증가 추세에 있고, 엽기적인 강력범죄도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한 우동 가게는 손님이 칸막이가 쳐진 곳에서 종업원 얼굴도 보지 않고 주문해 혼자 어두운 곳에서 먹게 하는
시스템을 도입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자폐증적인 증상)
하루 속히 많은 일본인들이 무종교와 천황숭배의 실체를 깨닫고 복음을 받아 들여 하나님을 믿게 되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개인 신앙의 발전단계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본능의 지배를 받는 무의식적인 삶을 삽니다.
그러다 사춘기가 되면 자아를 인식하게 되고, 인간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고민에 빠집니다.
주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 '나의 사후는 어떻게 되나?' 등 근원적 문제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을 해도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없고, 결국 명확히 알 수 없다는 회의론에 빠지거나, 알아야만 한다는
집념을 불태우게 됩니다.
회의론 부류의 사람들은 인생을 실컷 즐기다 가자는 쾌락주의나, 모든지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염세주의에 빠집니다.
알아야겠다는 부류의 사람은 철학이나 불교처럼 자력으로 해결하겠다는 사람과 기독교처럼 신을 의지하겠다는 부류로
나뉩니다.
그러나 자력으로 해결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대부분 해답을 얻지 못하고 인간의 여러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아무리 수련을 하고 지식으로 무장해도 자신의 불안하고 죄악된 마음 하나 다스릴 수 없습니다.
인간은 본래 교만하기 때문에 철저히 자신의 한계를 깨달을 때 애타게 신을 찾게 됩니다.
결국 인생에 있어 고민과 시련과 고통이 많은 사람일수록 구원 받을 수 있는 확률은 높아지게 됩니다.
* 참고 서적: 일본인은 왜 종교가 없다고 말하는가 (아마 도시마로 지음, 정형 옮김, 예문서원)
일본인의 기원 - 4 (일본 왕실의 기원)
D. 일본 왕실의 기원
일본 왕실은 본래 가야와 백제의 유민이 일본으로 건너가 세운 왕조입니다.
원주민에 비해 높은 문명을 소유한 이들은 일본에서 존경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왕실이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추앙 받은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정부가 권력 강화를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일본 왕실을 신격화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목차
1. 현재 일본왕실은 백제인의 후손
2. 근대권력 ‘천황폐하’를 만들다
3. 일본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풍속
1. 현재 일본왕실은 백제인의 후손
백제가 서기 660년에 신라와 당나라 군사에게 멸망시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일본에 있던 그의 누님인 제37대 '제명(齊明, 사이메이)일왕'에게 구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도중에 제명일왕이 죽자, 제명일왕의 조카이면서 일찍이 왜로 와 있던 의자왕의 아들인 중대형(中大兄, 나카노오에)이 이끄는 구원군은 나ㆍ당연합군에 대항하지만 서기 663년 금강(錦江)하구로 추정되는 곳(일본 문헌에는 백촌강(白村江)전투)에서 대패했습니다.
서기 663년 최후의 거점인 주유성(州柔城 또는 周留城)이 함락되자, 일본열도에서는 "이제 주유성을 잃었구나.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겼으니 선조들의 묘소에도 이제 다시 못가게 되었구나"라는 비통의 노래가 유행했다고《일본서기》(663년 천지(天智)2년 조(條))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본열도는 백제의 멸망과 함께 또 한번의 소용돌이를 칩니다. 백제의 유민들이 대거 일본열도로 망명해 들어오자 일본열도의 백제계는 다시 뭉치게 됩니다. 백제 재건의 꿈이 무너지자 중대형은 나ㆍ당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해 일본 각지에서 산성(山城)을 서둘러 쌓는데 전력투구하였습니다.
산성쌓기는 664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북규슈 후쿠오카현(福岡縣)에 태재부(太宰府)를 건립하고, 그 주변에 백제식 토성(土城)을 쌓아 신라군이 공격해 올 경우 수공(水攻)으로 방어하기 위해 성(城)을 만들었는데 그 규모는 높이 14m, 길이 1.2km, 기저부의 폭이 80m나 되었습니다. 뒷산에는 백제의 망명세력의 지도하에 백제산성을 모방하여 축성한 성이 8km에 걸쳐 토담과 석벽으로 산의 정상부를 두르고 있었는데 지금도 그 유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667년에는 대마도의 하도(下島, 시모섬)에도 축조했습니다. 이 대마도 산성이 유명한 금전성(金田城, 가네다노키)으로 러ㆍ일전쟁 때와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대포 등을 놓고 요새로 삼았습니다. 7세기 후반에 쌓은 이 산성이 20세기 실전에 쓰일 정도로 견고하게 잘 쌓았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 당시 백제인의 높은 건축기술 수준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제38대 천지(天智)일왕이 된 중대형(中大兄, 나카노오에)은 668년에 왕으로 정식 즉위하고, 백제계 중심의 왕권을 강화합니다.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혈통인 중대형이「천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본격적으로 출범시키는데 '일본(日本)'이란 국호는 서기 670년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제40대 일왕이 된 천무(天武)는 도읍을 다시 아스카(飛鳥)로 옮겨 이른바 왕족과 일반 호족의 신분을 명확히 하고 일왕 중심으로 씨성제(氏姓制)를 재편성하고, 193개의 성씨(姓氏)를 하사하여 지배계층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천무일왕이 죽자 그의 부인이 왕이 된다. 제41대 지통(持統)일왕은 이름 그대로 전통을 지킨다는 뜻에서 일왕의 이름을 지통이라 했고, 백제계 중심의 호적을 재편성하고, 백제계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습니다.
2. 근대권력 ‘천황폐하’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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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에 찍은 위 왼쪽 사진은 공식 궁정복 소쿠타이 차림에 수염이 없는 군주 메이지의 앳된 얼굴이다. 반면 바로 그 이듬해에 찍은 위 오른쪽 사진에서는 몸에 딱 맞는 서양식 군복을 입고 머리는 짧게 잘라 가르마를 탔으며 수염을 길렀다. 친정을 펼치기에 어울리는 적극적이고 남성화한 이미지로 바꾼 것이다.
왼쪽 그림에서 군기를 든 기마부대가 지나가고 눈앞에는 이제 막 화려한 서양식 궁정마차가 지나가고 있다. 아낙부터 멋들어진 실크햇을 쓴 서구풍 신사까지, 길가에 늘어선 백성들의 눈길은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맨 앞의 노인들은 절로 엎드려 신민의 예를 표하고 있다.
책의 표지는 1906년 러-일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일본 왕(천황)의 개선관병식을 그리고 있는 석판화다. 지금 봐도 ‘모던’해 보이는 이 표지는 책의 내용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차에 탄 왕의 얼굴은 길가에 드리워진 버드나무 가지 때문에 교묘하게 가려져 있다. 앞좌석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종장의 모습을 통해 이 권력자의 위치와 권위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군중과 수행원들이 권력의 소재를 드러내 보여도 바라보는 백성들은 왕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만세일계의 혈통을 이어왔다는 일본의 왕은 아직도 반신반인의 존재다. 인간을 초월하므로 그에게는 성(姓)도 없다. 이러한 왕의 관념적 이미지는 너무나 강해서 주변국인 우리조차 그 존재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정도다. 그러나 그가 지금 같은 존재가 된 것은 불과 일백수십년 전의 일이다. 막부 통치를 끝내고 근대 제국주의 시대를 연 일본의 정치엘리트들이 새로운 국가통합의 상징으로 허울뿐이었던 존재를 부각시키기 전까지, 평범한 일본 민중들은 왕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결국 이는 근대에 ‘발명’된 시스템인 것이다.
천황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책 표지 그림은 그 본질을 명쾌하게 드러내 보인다. 천황이란 결국 일종의 ‘국가적 미장센’이라고 볼 수 있다. 책은 이런 관점에서 메이지와 함께 개선관병식 행진과 같은 다양한 ‘패전트’ 곧 국가의례 또는 공식의례를 통해 일본 근대 권력의 창출과정을 문화사적으로 들여다본다. 지은이 다카시 후지타니는 미국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인으로 샌디에이고대학 역사과 교수로 있는 일본 연구가다.
후지타니는 메이지가 당시 지배층들에 의해 철저하게 국가 패전트로 활용됐다고 분석한다. 이를 만들어낸 자들은 왕을 이용해 국민들을 근대화 물결에 동참시킨 동시에 그들 역시 왕의 권위에 절대 복종한 ‘확신범’들이었다.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이와쿠라 도모미 등이 바로 그 주역들이다. 이들은 왕을 신비하면서도 가시적이고, 초월적이면서도 관여하고, 신적이면서도 인간적이며, 모든 인간사에서 면제되면서도 국가의 모든 성취를 책임지는 이원적 존재로 만들었다. 극적인 국가의례가 논리적으로 지탱하기 힘든 이원성을 현실화했다.
지은이는 메이지 정부가 많은 기억 못지않게 수많은 망각, 곧 자신의 기억을 만들어낸 기원과 일본 국민의 근대성이라는 패권적 프로젝트에 적합하지 않은 다른 모든 경험에 대한 망각까지 함께 생산했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일본의 근대와 ‘천황제’를 근원적으로 비판한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누구의 전통인가” 일본인 모두에게 국가적 표상의 오만방자함을, 즉 국가적 표상의 정치를 문제 삼도록 촉구하려는 질문이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한겨레 2003.11.14.
3 일본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풍속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백제와 가야 사람들은 본래 하나님을 믿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일본 왕실과 풍습에서는
하나님을 믿던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앗시라아와 바빌론에게서 멸망할 때 포로로 잡혀 갔다가 흩어졌던 이스라엘의 유민도
해상 또는 육로로 일본으로 유입되 이스라엘의 풍속이 일본에 남아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일본에 있는 기독교인이 이에 관해 연구한 글을 번역하였습니다.
a) 일본의 한 축제에서 발견되는 이삭의 이야기
일본 나가노현, "스와-타이샤" 라는 큰 신도(神道)의 사원이 있다. (신도는 일본 고유의 전통적 종교이다.) 스와-타이샤에서는 매년 4 월 15 일 온토사이 축제가열린다. (음력을 사용하던 당시에는 양력 3 - 4 월 경.) 축제는 성경의 창세기 22 장에 나오는 이삭의 이야기를 묘사한다 -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제로 드리려고 하는 장면.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온토사이 축제는 스와-타이샤의 가장 중요한 축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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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uwa-Taisha" shrine 스와-타이샤 신사 |
스와-타이샤 뒤편에는 모리야산(- 山)이 있다. 스와 지방 사람들은 모리야산의 신을 숭배하기 위해 모리야의 사원을 건축함. 축제에서 한 소년이 대나무 자리 위에서 나무로 된 기둥에 묶여진다. 신도의 사제는 칼을 준비하여 소년에게 다가와 나무 기둥의 윗부분을 친다. 그 때 전령(다른 사제)이 와서 소년이 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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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토사이 축제에서 사용되는 단검과 칼 |
축제에서는 동물 희생이 바쳐진다. 75 마리의 사슴. 이들 중에는 귀가 갈라진 사슴이 있다고 믿어진다. 이 사슴은 신이 직접 준비한 사슴으로 여겨진다. 이삭이 풀려난 후에 대신 희생제물이 된 수양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임. 이삭을 대신한 수양은 수풀에 걸려서 잡혔으므로 귀가 찢겨 있었던 것이 아닐까. 옛날 일본에는 양이 없었으므로 사슴으로 대체되었던 것이 아닐까. 심지어 옛날에도 사람들은 이 사슴희생제를 기이히 여겼다. 왜냐하면 동물 희생제는 일본의 전통적 신도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의 친구가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사마리아의 게리짐산(山)에서 열리는 유월절 행사를 참관하였다. 그가 사마리아인 사제에게 몇 마리의 양이 제물로 바쳐지냐고 물었다. 과거에는 75 마리의 양이 바쳐진다는 대답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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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찢어진 사슴 |
사람들은 이 축제를 "미사쿠치-신(Misakuchi-god)"의 축제로 부른다. "미사쿠치(Misakuchi)"는 "mi-isaku-chi." 가 변형. "미(Mi)" 는 "크다는(great)" 것을 뜻한다. "이사쿠(isaku)"는 이삭(Isaac, Yitzhak-히)을 뜻할 가능성이 크다. 치(chi)는 전치사 같은 것이다. 스와의 사람들은 우상숭배자들의 영향으로 이삭을 신격화 했던 것으로 보이다. 소년이 제물로 희생되려는 순간 풀려나는 이 풍습은 오늘날 거행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볼 수 있는 나무기둥은 "오니예-바시라(oniye-basira)"로 일컬어진다. 이는 희생-기둥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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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묶여지게 될 '오니예-바시라' |
오늘날에는 산 동물을 희생시키는 대신 박제된 동물을 사용한다. 이 동물 희생제와 소년을 나무에 묶는 풍습은 약 100 년 전 메이지(明治)시대의 사람들에게 야만적으로 여겨져서 현재 중단되었다. 그러나 축제는 아직도 거행된다. 소년의 풍습은 명치시대 초기까지 남아있었다. 에도시대의 학자이자 기행문 저술가인 마스미 스개(Masumi Sugae)는 그의 기행문에서 스와에서 그가 본 것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이 기록은 당시의 "온토사이" 축제와 희생될 운명의 소년과 그를 놓아줌 그리고 동물희생제에 대해서 자세히 전하고 있다. 그의 기록들은 스와-타이샤 근방의 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온토사이 축제는 고대 이래로 계속 모리야(Moriya) 가문에 의해 유지되어 왔다. 모리야 가문은 "모리야노 카미(모리야의 신)"을 그들 조상의 신으로 생각한다. 또한 그들은 모리야산(山)을 그들의 성소로 여긴다. 모리야 라는 이름은 "모리아(Moriah, Moriyyah-히; 창22:2)"에서 유래한 것일 수도 있다. 모리아 산은 오늘날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산(Temple Mount)이다. 유대인들에게 모리아의 신(God of Moriah)은 곧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유일신을 의미한다.
모리야 가문은 이 축제를 78 세대 동안 주최하여왔다.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필자에게 모리야의 신에 대한 사람들의 신앙은 기원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고 말해주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묘사하는 축제는 다른 나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 전통은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일본으로 왔다는 강력한 증거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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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헤롯의 문 위에 있는 문양 |
일본 왕실의 문장 |
일본 왕실의 문장은 16 개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꽃모양의 둥근 표식이다. 현재는 국화처럼 보이지만,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고대에는 해바라기에 가까왔다고 한다. 일본왕실의 이 문장은 매우 오래되었다. 헤롯의 문에 있는 것과 동일한 표식이 제 2 성전(聖殿)시대 예루살렘의 유물에서 발견되며 기원전의 아수르의 유물에서도 또한 발견된다.
b) 이스라엘과 비슷한 모자와 나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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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킨(tokin)을 쓰고 나팔을 부는 |
성구함(phylactery)을 쓰고 소파(shofar)를 |
야마부시는 수행중인 종교인을 뜻한다. 오늘날 그들은 일본 불교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나, 중국과 한국의 불교에는 이러한 관습이 없다. 야마부시의 관습은 7 세기 경 불교가 일본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야마부시는 이마에 토킨이라고 하는 조그만 검은 상자를 검은 끈으로 묶어서 쓴다. 이 모습은 유대인이 역시 검은색 상자인 성구함을 쓴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토킨의 크기도 유대인들의 성구함과 거의 같지만 모양이 둥글며 꽃모양을 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성구함은 대제사장 아론이 끈으로 "패"를 이마에 매었던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출28:36-38) 민속학에 의하면 그것의 크기는 4 센티미터이고 일부 학자들은 그것이 꽃모양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는 야마부시가 쓰는 토킨과 거의 같은 모양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과 일본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종교적인 목적으로 검은 상자를 이마에 쓰는 관습이 있는 나라이다. 이 밖에도 야마부시는 큰 바다조개를 나팔로 사용한다. 이는 양뿔로 만든 쇼파나팔(shofar)을 부는 유대인의 모습과도 매우 흡사하다. 야마부시의 나팔 부는 방식과 소리는 쇼파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일본에는 양이 없었기 때문에 양뿔 대신 바다조개를 썼는지도 모를 일이다.
야마부시는 산을 종교적 수행을 쌓는 성스러운 장소로 여긴다. 이스라엘인들고 역시 산을 신성히 여겼다. 십계명의 율법이 주어진 곳은 시나이산이었다. 예루살렘은 산 위에 위치한 도시이다. 예수님은 기도를 하러 산으로 올라가고는 하셨다. 변화사건(transfiguration)도 역시 산에서 일어났다.
일본에는 텡구(天狗)의 전설이 있는데, 그는 야마부시의 모습을 하고 산에서 살며 크고 두드러진 코와 초자연적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어졌었다. 옛날의 닌자는 주인을 위해 봉사하는 동안 텡구의 초능력을 얻으러 산으로 들어가고는 했다. 그러면 텡구는 닌자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전수한 후에 토라-노-마끼(tora-no-maki, 토라 두루마리)를 주었다. 이 토라의 두루마리는 위기상황에서 도움을 주는 매우 중요한 책으로 여겨졌다. 일본에서는 아직도 이 '토라'라는 용어가 쓰인다. 유대인들의 토라(Torah) 두루마리가 일본의 유적에서 발견된 적은 없다. 그러나 일본의 토라 두루마리는 유대인들의 토라에서 유래하는 것일 수도 있다.
c) 일본에서 발견되는 이스라엘 언약궤와 복식
역대상 15 장에서는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언약궤를 메고 들어가는 장면이 묘사된다.
"이에 다윗과 이스라엘 장로들과 천부장들이 가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즐거이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올라왔는데 하나님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을 도우셨으므로 무리가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으로 제사를 드렸더라. 다윗과 궤를 멘 레위 사람과 노래하는 자와 그 두목 그나냐와 모든 노래하는 자도 다 세마포 겉옷을 입었으며 다윗은 또 베 에봇을 입었고 이스라엘 무리는 크게 부르며 각과 나팔을 불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힘있게 타며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어 올렸더라." (역대상 15: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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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언약궤 |
일본의 "오미코시(Omikoshi)" 궤 |
필자는 이 구절을 읽을 때, "이것은 일본인들이 축제에서 '오미코시'를 메고 가는 모습과 어쩌면 이렇게도 흡사하단 말인가? 일본 '오미코시'의 모양은 언약궤와 비슷해 보인다. 일본사람들도 그 앞에서악기의 소리에 맞추어 춤추고 소리친다. 고대 이스라엘의 풍습과 매우 유사하다." 라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은 보통 두 개의 막개기를 사용하여 어깨로 운반한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한대로 레위 자손이 채로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 (역대상15:15)
이스라엘의 언약궤는 두 개의 막대기로 꿰게 되어 있었다. (출25:10-15) 언약궤를 재현한 일부 모델들은 궤의 윗부분에 막대기를 꿰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성경은 막대기가 궤의 "네 발"에 붙어있는 네 개의 고리에 꿰어지도록 되어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출25:12) 고로 막대기는 궤의 바닥부분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의 "오미코시"와 비슷하다.
이스라엘의 언약궤는 윗부분에 금으로 된 두 개의 그룹(cherubim)의 상이 있었다. 그룹은 새와 같은 날개를 갖고 있는 천사들이다. 일본의 "오미코시"도 역시 꼭대기에 "호-오(Ho-oh)" 라는 금으로 된 새가 있다. 호-오는 상상의 새로서 천상의 존재로 생각되었다. 이스라엘의 언약궤는 전체가 금으로 덮였었다. 일본의 "오미코시"는 부분적으로, 때때로는 전체가 금으로 덮인다. "오미코시"의 크기도 이스라엘의 언약궤와 거의 동일하다. 일본의 "오미코시"는 고대 이스라엘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이스라엘의 다윗왕과 백성은 언약궤 앞에서 악기의 소리에 맞춰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일본인들도 역시 악기에 맞춰 오미코시 앞에서 노래하며 춤을 춘다. 몇 년 전, 필자는 "다윗 왕(King David)"이라는 미국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는 다윗 왕의 일생에 관한 영화였다. 영화에서 다윗왕이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 언약궤 앞에서 춤을 추는 장면을 보면서, "예루살렘 배경을 일본으로 바꾸면 이 장면은 일본의 축제에서 볼 수 있는 장면과 똑같을텐데." 하는 생각을 하였다. 음악의 분위기도 역시 일본음악과 비슷하였다. 다윗왕의 춤도 일본의 전통춤과 비슷해 보였다.
쿄토에서 개최되는 신사(神祠) 축제인 "기온-진자(Gion-jinja)"에서는 사람들이 "오미코시"를 메고 강으로 들어가서 강을 건넌다. 필자는 이것이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을 건넌 것을 기념한데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일본에는 내륙에 위치한 세토해(Sea of Seto)라는 바다에 섬이 있다. 이곳에서는 "오미코시"를 나르도록 선발된 사람들이 한 집에서 행사일 전에 일 주일 동안 합숙을 한다. 이는 부정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게다가 "오미코시"를 나르기 전날에는 바닷물에서 목욕재개를 하여 자신들을 정화시킨다. 이것도 역시 고대 이스라엘의 관습과 유사하다: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케하고" (대상15:14)
성경은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나서 행진이 끝났다고 말한다, "또 이스라엘 무리의 무론 남녀하고 매 명에 떡 한 덩이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병 하나씩 나누어 주었더라." (대상16:3) 이것 또한 축제가 끝난 후에 단 과자를 모두에게 주는 일본의 풍습과 비슷하다. 어린시절의 필자에게 이것은 큰 기쁨이었다.
성경을 보면 다윗이 언약궤를 갖고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 세마포 겉옷을 입었다고 한다. (대상15:27) 제사장과 노래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어 성경에는 이 부분이 "흰 세마포 예복(robe of white linen)"으로 되어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대제사장은 색상이 화려한 옷을 입었지만 일반 제사장은 단순한 흰색 리넨옷을 입었다. 제사장들은 성스러운 행사에서 흰 옷을 입었다. 일본의 사제들도 성스러운 행사에서는 흰 예복을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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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술(fringes)이 달린 흰 예복을 입은 일본의 신도 사제 |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神祠) 중 하나인 이세-징구(Ise-jingu)에서는 승려들 전원이 흰 예복을 입는다. 또한 많은 신사들의 경우, 특히 전통이 깊은 신사에서는 오미코시를 운반할 때 이스라엘에서 그랬던 것처럼 흰 옷을 입는다. 불교 승려들은 고급스러운 색깔있는 옷을 입지만 일본의 신도에서는 흰 색을 가장 성스러운 색으로 여긴다.
일왕은 대관식을 마친 직후 신도의 신(神) 앞에 홀로 선다. 그는 흰 예복으로 온 몸을 덮는데 발만은 예외로 맨발이다. 이는 샌달을 벗고 맨발로 하나님 앞에 서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행동을 연상시킨다. (출3:5, 수5:15) 일본에서 10 년 동안 거주했던 랍비, 마빈 토케이어(Marvin Tokayer)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일본의 신도 승려들이 입는 리넨 예복은(linen robes) 고대 이스라엘 제사장들의 흰 리넨 예복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일본 신도 승려의 예복은 모퉁이에 매달린 20-30 센티미터 정도의 끈들이 달려있다. 이 장식술은 고대 이스라엘의 예복에 달린 끈과 흡사하다. "입는 겉옷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 Thou shalt make thee fringes upon the four quarters of thy vesture, wherewith thou coverest thyself." (신22:12) 이 술은 그 옷을 입는 자가 이스라엘인이라는 상징이었다. 신약성경에서도 바리새인들이 옷술을 크게 한다는 술에 대한 기록이 있다. (마23:5)
혈루증을 앓던 한 여자가 예수님께로 와서 그의 겉옷의 옷술을 만지는 장면도 기록되어 있다. (마 9:20; Charles B. Williams 譯, The New Testament: A Translation in the Language of the People)* 상상에 의존하여 고대 이스라엘 시대를 그린 삽화에서는 종종 옷에 술이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예복에는 실제로 술이 붙어있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걸치는 탈릿(Tallt, 기도용 숄)에는 전통에 따라 모퉁이에 술이 붙어있다.
==== 역주:
* 개역한글 마태복음 9:20 에서 겉옷 "가" 로 번역된 희랍어 단어는 옷술을 의미하는 "kraspedon" 으로 마태복음 23:5 및 14:36, 막6:56, 눅8:44 에서도 이 단어가 사용된다. 사람들이 병을 고치고자 예수님의 옷술을 특별히 만지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http://www.blueletterbible.org/cgi-bin/words.pl?word=2899&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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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신도 승려들은 어깨에서 허벅다리까지 내려오는 직사각형의 천을 예복 위에 걸친다. 이는 다윗이 입었던 에봇과 같다: "...다윗은 또 베 에봇을 입었고" (대상15:27) 대제사장의 에봇은 보석이 달리고 색상이 있는 화려한 것이었으나 일반 제사장의 에봇은 단순한 흰색 아마천이었다. (삼상22:18) 랍비 토케이어는, 일본 신도 승려의 예복 위의 직사각형 천은 유대 제사장, 코헨(Kohen)의 에봇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다고 기술하였다. 일본 신도 승려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그랬던 것처럼 머리에 관(cap; bonnet - KJV)을 쓰고 허리에 띠를 두른다. (출28:40) 일본 신도 승려들의 복장은 고대 이스라엘의 복장과 비슷하게 보인다.
d) 이스라엘 성막과 비슷한 일본의 신토
고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성막의 내부는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성소이고 다른 하나는 지성소이다. 일본의 신사도 역시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일본 신사의 기능은 이스라엘의 성막과 유사하다. 일본인들은 성소 앞에서 기도를 하며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신도의 사제 및 특별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신사의 지성소에는 신도의 사제가 특별한 시기에만 들어갈 수 있게 되어있다. 이것도 이스라엘의 성막과 유사한 점이다.
일본의 지성소는 대개 신사의 서쪽이나 북쪽 끝 부분의 자리에 위치한다. 이스라엘의 지성소는 성전의 서쪽 끝 부분에 있었다. 또한 신사의 지성소는 성소보다 높은 위치에 있하며 그 사이에는 계단이 있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솔로몬의 성전의 지성소는 성소보다 높은 위치에 있었으며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폭이 약 2.7 미터 되는 계단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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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형적인 신토 사원 |
일본 신사의 앞에는 "코마이누(komainu)"로 알려진 두개의 조각상이 출입로 양쪽에 있다. 이것은 섬기는 우상이 아니라 신사를 지키는 수호자이다. 이것 또한 고대 이스라엘의 풍습과 같다. 이스라엘의 성전과 솔로몬의 궁전에는 사자의 조각상이 있었다. (왕상7:36; 10:19) 일본에는 사자가 한 마리도 없었다. 하지만 사자의 상은 고대 이래로 일본의 신사에 있었다. 일본 신사의 사자 조각상은 중동지역에서 기원한다는 학자들의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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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을 수호하는 코마이누(Komainu) |
신사의 입구쪽에는 "테미즈야(temizuya)"가 있다. 참배자들이 손과 입을 씻기 위한 장소이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발까지 씻었다. 이러한 풍습도 유대의 회당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하다. 고대의 성막과 이스라엘의 성전에도 입구 근처에 손과 발을 씻는 물두멍이 있었다.
신사의 앞쪽에는 "토리(torii)"라는 문이 있다. 이러한 종류의 문은 중국과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고 일본에만 있다. "토리" 문은 두 개의 수직으로 선 기둥과 윗부분에 연결된 빗장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토리의 원형은 두 수직기둥과 윗부분에 걸쳐지는 밧줄로 구성되어있었다. 신도의 사제가 문앞에서 허리를 숙여 예를 할 때 그는 각각의 기둥에 한 번씩 두 번 예를 표한다. "토리" 문은 원래 두 개의 기둥으로만 만들어졌었다.
이스라엘의 성전에는 문으로 사용되었던 두 기둥이 있었다. (왕상7:21)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사용하였던 아람어로 문을 뜻하는 말은 "타라(taraa)" 이다. 이 단어가 약간 변형되어 일본어의 "토리(torii)"가 된 것이 아닐까 싶다. 특히 오래된 신사에서는 토리가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 필자는 이를 생각할 때마다 문의 두 기둥과 상인방에 출애굽의 전날 밤 양의 피가 칠해진 장면이 떠오르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일본의 신도에는 "시메나와(shimenawa)"로 불리우는 밧줄이 그 밑부분에 흰 종이조각들이 달린 채로 성소를 둘러치고 있다. 시메나와 줄은 경계선으로서 세워진다. 성경에 기록되기를,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경을 정하였다." (출19:12) 이 "지경"의 재료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밧줄이 사용되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일본의 시메나와 줄은 모세의 시대로부터 유래하는 풍습일 수도 있다. 줄을 따라 끼워진 흰 종이의 지그재그 패턴은 필자에게 시나이산의 천둥번개를 상기시킨다.
일본의 신사와 고대 이스라엘 성전간에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일본 신사에서는 동물의 번제를 드리는 제단이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신도가 고대 이스라엘에서 유래한다면 왜 신도에는 동물 희생의 관습이 없을까 의문을 가졌었다. 하지만 곧 필자는 신명기 12 장에서 해답을 발견하였다. 모세는 백성에게 가나안 땅의 특정 장소를 제외한 다른 장소에서 희생제를 드리지 말 것을 명한다. (신12:10-14) 따라서 이스라엘인들이 고대 일본으로 왔다면 동물 희생제를 드리도록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신사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쿄토의 마츠오 대신사 (Matsuo-taisya) 에서와 같이 문이 동쪽에 그리고 지성소가 서쪽에 위치하도록 지어진다. 그 밖의 경우에는 문과 지성소가 각각 남, 북쪽에 위치하도록 지어진다. 고대 이스라엘의 장막은 문이 동쪽에, 그리고 지성소가 서쪽에 가도록 세워졌는데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으로부터 온다는 믿음때문이었다.
신사는 예외 없이 나무로 건축된다. 이스라엘 성전의 상당 부분이 나무로 지어졌다. 이스라엘인들은 성전의 일부에 돌을 사용하였으나, 벽, 마루, 천장 및 모든 내부에는 레바논산 백향목의 목재를 사용하였다. (왕상6:9, 15-18; 5:6) 또한 이스라엘의 성전의 나무는 금으로 덮혀있었다. (왕상6:20-30) 일본에서는 본성전의 중요한 부분은 이세징구(Isejingu) 신사와 같이 금으로 덮혀있다.
일본인들이 신사의 성소 앞에서 기도를 할 때는 우선 입구의 중앙에 걸려 있는 금종(金鐘)을 친다. 이와 비슷한 것을 고대 이스라엘의 풍습에서 볼 수 있다. 대제사장 아론은 옷단에 금으로 된 종을 달았다. 이는 그가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다 죽지 않게끔 종 소리가 들리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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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토 사원 입구에 있는 금종 |
일본인들은 신사에서 기도할 때 두 번 손뼉을 친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나는 약속을 지킨다." 라는 의미였다. 성경에서 "pledge (맹세, 서원)" 으로 번역된 단어를 볼 수 있다. 이 히브리어 단어는 원래 "손뼉 치는 것" 을 의미한다. (겔17:18, 잠6:1)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서약을 하거나 중요한 일을 할 때 손뼉을 쳤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은 손뼉을 치고 기도하기 전과 후에 신사 앞에서 절을 한다. 또한 사람을 만날 때 정중한 인사로써 절을 한다. 절을 하는 것 또한 고대 이스라엘의 풍습이었다. 야곱은 에서에게 다가가면서 절을 하였다. (창33:3)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일상에서 절을 하지 않으나 기도문을 암송하면서 절을 한다. 이디오피아인들은 현재에도 절을 하는 풍습이 있는데 이는 아마 고대에 이디오피아로 이주한 유대인들의 풍습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일 수도 있다. 이디오피아에서 절하는 법은 일본에서와 비슷하다.
불교 사원에는 부처 및 그 밖의 신들의 형상으로 조각된 우상이 있다. 하지만 일본의 신사에는 우상이 없다. 신사의 지성소의 중앙에는 거울, 칼 또는 펜던트(pendant) 장식이 있을 뿐이다. 신도의 신자들은 이것들을 신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신도에서는 신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거울과 칼과 펜던트는 우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이 강림하는 성스러운 장소임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의 석판, 마나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가 있었지만 이것들은 우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이 강림하는 성스러운 장소임을 나타내기 위한 물건들이었다. 신사에 있는 물건들도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될 수 있다.
e) 일본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풍속
유대인들은 오순절(Shavuot)의 7주 전에 그들이 수확한 첫 곡식의 다발을 흔든다. (레23:10-11). 그들은 또한 장막절(Sukkot)에 식물(植物)의 가지를 묶은 단을 흔든다. (레23:40) 이는 모세의 시대 이래 지켜진 전통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사람들을 정화시킬 때 식물의 가지를 흔들었다. 시편에서 다윗은,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라고 말한다. [시51:7(9)]. 이 또한 일본의 풍습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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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토 사제가 정화를 위해 나뭇가지를 흔듦 |
일본의 승려가 사람이나 물건을 정화시킬 때에는 나뭇가지를 흔든다. 막대기나 흰 종이로 식물처럼 보이게 만든 하라이누사(harainusa) 라는 것이 사용되기도 한다. 오늘날의 하라이누사는 번개의 표시와 같이 지그재그 형태로 접힌 흰 종이로 단순하게 변형되었지만 옛날에는 식물의 가지나 곡물이 사용되었다. 필자가 아는 기독교인인 일본인 여성은 이 하라이누사를 단지 이교적인 풍습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후에 그녀가 미국에 가서 장막절 행사에 참여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녀는 유대인들이 추수한 곡식의 단을 흔드는 것을 보았을 때 마음속으로, "어머나 이것은 일본의 사제가 하는 것과 똑같은데! 여기에 일본인들의 고향이 있다." 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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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을 뿌리는 일본의 스모 선수 |
일본인들은 어떤 것을 정화(淨化)하기 위해 소금을 사용해왔다. 사람들은 불쾌한 사람이 떠난 후에 소금을 뿌린다. 필자가 티비에서 사무라이극을 보았는데, 거기서 어떤 여자가 그녀가 싫어하는 남자가 떠난 자리에 소금을 뿌리는 장면이 나왔다. 이 풍습은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풍습과 같다. 아비멜렉은 성을 점령한 후에 "소금을 뿌렸다." (삿9:45) 일본인들은 이것이 성을 정화하는 행위임을 금방 알아차린다.
필자는 유대인들이 이사를 하게 되면 그곳을 정화하기 위해서 소금을 뿌린다고 들은 적이 있다.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식 음식점에서는 입구 부근에 소금을 쳐놓는다. 코셔 미트(Kosher meat - 유대인들의 율법에 합당하게 처리된 고기 - 역주)에는 소금이 사용된다. 코셔 미트는 소금에 의해 정화되고 모든 식사는 빵과 소금으로 시작된다.
일본인들은 장례식장의 입구에 소금을 뿌린다. 장례식에서 돌아오면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일단 몸에 소금을 뿌린다.
신도에서는 장례식에 가거나 시체를 만지게 되면 부정하게 된다고 믿는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이와 동일한 개념이 있었다.
일본의 스모선수들은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씨름판에 소금을 뿌린다.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은 이를 의아하게 생각하지만 랍비 토케이어는, 유대인들은 이 의미를 금방 이해한다고 기술하였다. 일본인들의 종교적인 봉헌에는 할 때 항상 소금이 함께한다. 이는 이스라엘인의 풍습과도 같은 것이다: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 (레2:13)
예전의 일본인들은 아기를 낳아서 처음으로 씻길 때는 물에 소금을 넣었다. 고대 이스라엘인은 아기를 낳으면 소금으로 가볍게 문지른 후 물로 씻겼다. (겔16:4) 소금 및/또는 물에 의한 정화는 일본인들과 고대 이스라엘에게는 보편적인 풍습이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부정(不淨)"하다든지 "정결"하다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유럽인들이나 미국인들은 이 개념에 익숙하지 않지만 일본인들은 이를 잘 이해한다. 정결함에 가치를 두는 것과 부정함을 피하는 것은 신도의 중심적 개념이다. 이 개념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유래하는 것일 수도 있다.
f) 일본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언어
일본의 신사에서 수 년간 거주했던 유대인인 요셉 아이델버그는 "일본인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사라진 열 지파들" 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많은 일본 고대어의 단어들이 고대 히브리어에서 유래한다고 썼다. 일례로, 일본인들은 망신이나 수치스러운 것을 표현할 때 "하즈카시메(hazukashime)" 라고 말한다. 히브리에서는 이를 "하닥 하솀(hadak hashem; 이름을 짓밟는다는 뜻; 욥40:12 참조)"이라고 표현한다. 단어의 의미와 발음이 거의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이인칭 "당신"은 일본어와 히브리어에서 동일하게 "안타(anta)" 이다. 고대 일본의 왕은 "미코토(mikoto)"라고 불리었다. 이는 "그의 왕국"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말후토(malhuto)"에서 기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일본의 왕은 "미카도(mikado)"로 일컬어진다. 이는 "고귀한 자(the noble)"를 뜻하는 히브리어, "미가돌(migadol)"과 유사하다. 고대 일본어에서 지역의 지도자를 "아가타-누시(agata-nushi)," 라 하였다. "아가타"는 "지역"을 뜻하고 "누시"는 "지도자"를 뜻한다. 히브리어에서 이들 단어는 각각 "아구다(aguda)" 그리고 "나시(nasi)"가 된다.
일본의 고대 민요의 가사 중에는 일본어로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이 많다. 에이지 카와모리타(Eiji Kawamorita) 박사는 이들 중 상당수가 히브리어라고 여긴다. 쿠마모토현에서 전해오는 민요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이 부른다: "할렐루야, 할리야, 할리야, 토오세, 야웨, 야웨, 요이토나... (Hallelujah, haliya, haliya, tohse, Yahweh, Yahweh, yoitonnah...)" 이것 역시 마치 히브리어인 것처럼 들린다.
g) 성경과 일본 신화의 유사점
성경의 이야기와 일본의 신화에는 주목할 만한 유사점이 있다. 일본의 어느 학자는 일본 신화 중에서 니니기(Ninigi)의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는 야곱의 이야기와 상당히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일본의 신화에서 일본의 왕가와 야마토국은 하늘에서 내려온 니니기의 후손들이라고 전해진다. 니니기는 야마토 혹은 일본국의 조상이다. 반면 야곱은 이스라엘의 조상이다. 일본의 신화에 따르면 하늘에서 내려올 자는 니니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니니기가 태어났고, 결과적으로 니니기는 그 사람을 대신하여 하늘에서 내려와서 일본국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하게 성경에서는 야곱의 형인 에서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로 되어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은 야곱에게로 돌아가고 야곱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다.
일본의 신화에서는, 니니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후에 "코노하나-사쿠야-히메(Konohana-sakuya-hime)"와 사랑에 빠져 그녀와 결혼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 뿐만 아니라 그녀의 언니와도 결혼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녀의 언니는 못생겨서 니니기는 그녀를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낸다. 마찬가지로 성경에서는 야곱이 아리따운 라헬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려 한다. (창29)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언니보다 먼저 그녀가 시집갈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언니(레아)에게 먼저 장가갈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언니는 별로 예쁘지 않아서 야곱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처럼 니니기와 야곱의 이야기에는 유사점이 보인다.
일본의 신화에서 니니기와 그의 처 코노하나-사쿠야-히매는 야마사치-히코(Yamasachi-hiko)라는 이름의 자식을 낳는다. 하지만 야마사치-히코는 그의 형에게 괴롭힘을 당하여 바다 신의 나라로 가야만 했다. 그곳에서 야마사치-히코는 신비의 힘을 얻어 그의 형을 기아(饑餓)에 처하게 하지만 나중에는 죄를 용서해준다. 성경에서 야곱은 그의 처 라헬과의 사이에서 요셉을 낳고 요셉은 그의 형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여 애굽으로로 가게된다. 그곳에서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권력을 얻어서 그의 형들이 기아로 인해 애굽으로 왔을 때 그들을 용서하고 도와준다. 이와 같이 야마사치-히코와 요셉의 이야기도 대응관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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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족보와 일본 신화의 유사성 |
일본의 신화에서 야마사치-히코는 바다 신의 나라의 딸과 결혼하여 우가야-후키애즈(Ugaya-fukiaezu)라는 자식을 낳는다. 우가야-후키애즈는 네 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들 중 둘째와 셋째 아들은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넷째 아들인 진무(Jinmu)가 황제로서 야마토의 땅을 정복하게 된다. 일본 왕실의 계보는 여기서 비롯된다. 반면에 성경은 어떠한가?
요셉은 애굽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아들을 낳는다. 에브라임은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는 점에서 우가야-후키애즈와 닮았지만 그의 둘째, 셋째 아들은 일찍 죽임을 당하게 된다. (대상7:20-27) 그리하여 넷째 아들의 후손에서 여호수아가 나와서 가나안 땅(이스라엘의 땅)을 정복하게 된다. 이스라엘 열개 지파의 왕가의 계보는 에브라임에서 시작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성경의 계보와 일본의 신화 사이에 주목할 만한 유사점이 있음을 본다 - 니니기와 야곱, 야마사치-히코와 요셉, 일본의 왕가와 에브라임의 지파. 게다가 일본의 신화에서는 하늘이 타카마의 하라(Takama-ga-hara 또는 Takama-no-hara)로 불리운다. 니니기가 그곳으로부터 와서 일본국을 세웠다. 이 타카마의 하라와 관련하여, 일본의 연구가 젠이치로우 오야베(Zen'ichirou Oyabe)는 이곳을, 한때 야곱과 그의 조상들이 가나안에 와서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기 전에 살았었던 토가마(Togarmah) 지역에 있는 하란성(Haran 城)으로 본다.
야곱이 그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상속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을 때, 꿈에서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본다. (창28:12) 이 점은 니니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과는 다르지만 비슷한 이미지라 할 수 있겠다. 구체적인 디테일을 제외하면 일본 신화의 큰 줄기는 성경의 기록과 매우 유사하다. 이후 8 세기 경에 저술된 일본 연대사인 코지키(古事記)와 니혼-쇼키(日本書紀)의 신화들는 원래 성경의 이야기들을 토대로 한 것이었지만 나중에 다양한 이교적 요소가 섞였을 가능성도 생각해 봄 직하다. 심지어 일본 신화는 원래 일본인이 야곱, 요셉 그리고 에브라임의 후손들임을 보이기 위한 일종의 족보였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마저 생각해 볼 수 있겠다.
h) 머리 모양의 유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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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일본 사무라이의 머리 모양인 |
유대인의 '페이욧'(peyot) |
위 왼쪽의 사진은 일본의 나라(奈良)에서 출토된 5 세기 후반의 유물 중에서 발견된 고대 일본의 사무라이의 상이다.
이 상은, 머리카락이 관 아래로 내려오며 말아진 채로 양쪽 귀 앞에 달린 "미즈라(mizura)"로 알려진 고대 일본남자의 헤어 스타일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일본 사무라이들의 이러한 머리 모양은 광범위하게 볼 수 있었으며, 이것은 중국이나 한국에서 유입 된 문화가 아닌 일본 고유의 문화이다.
이것이 머리카락을 말아서 귀 앞으로 길게 늘어뜨리는 유대인들의 헤어 스타일인 "페이욧(peyot)"과 닮았다는 사실은 단지 우연일 뿐인가? "페이옷"은 유대인들의 독특한 머리모양이며 오랜 기원을 갖는다. 시리아에서 출토된 기원전 8 - 9 세기경의 인물상이 있는데, 이 상은 페이욧을 한 히브리 남자가 장식술(fringe)이 달린 숄(shawl)을 걸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 출처: http://www5.ocn.ne.jp/~magi9/isracame.htm
원래 하나님을 믿던 일본 왕실에 이스라엘 유민은 거부감 없이 받아 들여졌을 것이고, 이스라엘 제사법을 따라
신토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할 신토에 현재 태양신과 조상신이 숭배되고 있고, 하나님을 믿던 일본 왕실 사람들이 신의
자손으로 신격화 되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