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여호와의 종이신 그리스도
(12)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
(이사야64-66장)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라.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우리 열조가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의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무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오히려 스스로 억제하시리이까. 주께서 오히려 잠잠하시고 우리로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리이까.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지내며 돼지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물건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 보라.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내가 잠잠치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할지라. 너희의 죄악과 너희 열조의 죄악을 함께 하리니 그들이 산 위에서 분향하며 작은 산 위에서 나를 능욕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먼저 그 행위를 헤아리고 그 품에 보응하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포도송이에는 즙이 있으므로 혹이 말하기를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 하나니 나도 내 종들을 위하여 그같이 행하여 다 멸하지 아니하고 내가 야곱 중에서 씨를 내며 유다 중에서 나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내리니 나의 택한 자가 이를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나의 종들이 거기 거할 것이라. 사론은 양 떼의 우리가 되겠고 아골 골짜기는 소 떼의 눕는 곳이 되어 나를 찾은 내 백성의 소유가 되려니와 오직 나 여호와를 버리며 나의 성산을 잊고 갓에게 상을 베풀어 놓으며 므니에게 섞은 술을 가득히 붓는 너희여 내가 너희를 칼에 붙일 것인즉 다 구푸리고 살육을 당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하며 내가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으며 나의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니라. 이러므로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나의 종들은 먹을 것이로되 너희는 주릴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마실 것이로되 너희는 갈할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기뻐할 것이로되 너희는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마음이 즐거우므로 노래할 것이로되 너희는 마음이 슬프므로 울며 심령이 상하므로 통곡할 것이며 또 너희의 끼친 이름은 나의 택한 자의 저주거리가 될 것이니라. 주 여호와 내가 너를 죽이고 내 종들은 다른 이름으로 칭하리라.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 앞에 숨겨졌음이니라.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에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의 건축한 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아 그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훤화하는 소리가 성읍에서부터 오며 목소리가 성전에서부터 들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대적에게 보응하시는 목소리로다. 시온은 구로하기 전에 생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자를 낳았으니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뇨.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순식간에 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구로하는 즉시에 그 자민을 순산하였도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임산케 하였은즉 해산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해산케 하는 자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너희가 젖을 빠는 것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같이 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 원수에게 더하리라.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 그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를 베푸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 여호와께 살육 당할 자가 많으리니 스스로 거룩히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케 하고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 있는 자를 따라 돼지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의 소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열방과 열족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 내가 그들 중에 징조를 세워서 그들 중 도피한 자를 열방 곧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열방에 선파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열방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약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나는 그 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 월삭과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이사야 64장에서 66장까지의 요점은 새 하늘과 새 땅이다.
1.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기를 구함
이사야는 주께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기를 구하였다(사64:1).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하늘이 가로 막혀 있다. 사람은 땅에 거하고 하나님은 하늘에 거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무한한 막힘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려오시지 않으면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오실 때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다(창18장). 그에게 찾아왔던 세 사람은 구약에서 유일하게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던 하나님이다. 이것은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셨던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어떤 다른 모양이 되셔야만 땅에 오실 수 있는데 아브라함에게는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던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직통하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도를 하는 사람도 많고 하나님을 보겠다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기도를 한다고 그것이 상달되는 것도 아니다. 그분이 어떤 모양으로 오셔야만 서로 관계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다.
그 이전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저 높은 하늘에서 그 말씀이 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늘을 가르고 아브라함에게 말씀으로 오신 것이다. 하늘의 상태, 하늘의 사정, 하늘의 입장을 버리고 우리가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오신 것이다. ‘천지차이’라는 말이 있듯이 하늘과 땅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사람끼리도 낮선 사람을 만나면 잘 모른다. 우리가 짐승을 만나면 더욱 모른다. 그 속사정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물며 하나님과 사람이 어떻게 서로 만나지겠는가?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는 형태로 오셔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형태로 오신 것이다. 그렇게 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이 아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이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돼야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냥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마지막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현실적으로 오늘 교회를 통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는 하늘이 가로막혀 있다. 그래서 하늘을 뚫고,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기를 간구한 것이다.
모세에게 오실 때는 시내산으로 내려오셨다. 광야가 아닌 산으로, 하늘과 땅 사이의 시내산으로 내려오신 것이다. 이것은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신 것이다.
지난번에 올 때는 대구 상공에서 20분간을 선회하다 내렸다. 지상의 구름층이 두꺼워서 앞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중에서 돌다가 내려왔는데 그 두꺼운 구름층을 뚫고 내려와 보니까 날씨가 맑았다. 땅에서 비가 와서 난리라도 난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중간이 막혀서 비행기가 내려오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도 중간에 막힌 것이 있다. 영적으로 말하면 죄가 가로막고 있다고 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존재적으로 막혀 있다고 할 수 있다. 근원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은 존재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사람이 범죄하지 않았다고 해도 하나님과 사람은 바로 만날 수 없다. 더구나 죄로 말미암아 구름처럼 가려져서 그것을 헤쳐 버리기 전에는 오실 수 없다.
그런데 모세는 시내산에서 그분을 만났다. 하나님은 시내산으로 내려오셨고 모세를 산으로 부르셨다. 거기는 빽빽한 구름과 번개와 뇌성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셨다는 뜻이다. 두꺼운 구름층을 뚫고 비행기가 땅으로 내려올 때 굉장한 진동이 있었다. 조금만 더 심하면 멀미를 할 정도였다. 내 옆에 앉았던 사람은 결국 토하고 말았다. 하늘이 갈라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구름과 번개와 뇌성은 하나님이 시내산으로 내려오셨던 광경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오셨다. 우리에게 가장 가깝게 오신 것이다. 인간의 몸으로, 육체라는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려면 막혀 있는 하늘이 갈라져야 가능하다.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내리는데도 그렇게 진동이 심한데 하물며 하늘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땅으로 오시는데 얼마나 진동이 심하겠는가!
여기서 죽음이 생긴 것이다. 예수의 죽음이다. 그렇지 않고도 내려오실 수 있으면 십자가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이 없이는 하나님과 사람이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중간층을 뚫고 하나님이 사람 안에 오신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생각할 때 처녀의 몸에서 나셨다는 것을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까 신기한 일이고 기적이라고만 생각한다. 물론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니까 기적이지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이적을 마태와 누가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표현한 것이다. 처녀가 잉태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고 표현하였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이고 하늘을 뚫고 내려오신 것이다.
분명히 교회는 겉으로 볼 때는 의인들만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오합지졸이다. 사도행전 이후의 서신서들을 보면 인간의 문제가 얼마나 복잡한지 드러나 있다. 그런 인간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다. 그런 교회가 어떻게 그분을 표현하는 단체적인 실체가 되겠는가? 그것은 그 영 때문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 영 때문에 비록 우리가 육신을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영의 하나 되게 하심을 통해서, 그 영의 표현하게 하심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결코 우리에게 육신의 조건이 있어서, 우리에게 그렇게 할 만한 요건이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는 전혀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고린도교회를 보거나 에베소교회를 보거나 어느 교회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오늘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거기에 그 영의 하나 되게 하심, 죽고 다시 산 한 분의 인격이 그 사람들을 지배하기 때문에 거기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도 하늘을 가르고 내려온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완전한 의인들만 모여 있다면 세상이 볼 때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을 뚫고 내려온 사건이라고 할 수 없다. 세상이 볼 때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고 어쩌면 그들보다 못한 사람들만 모여 있는지도 모른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한 것을 보면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표현이 되고 찬송이 될 수 있는가? 그런데 바울은 말하기를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라 하였다. 죄를 많이 지어야 좋다는 말이 아니라 죄가 많은 곳에 오히려 은혜가 넘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이 교회를 볼 때 “저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 아니냐? 오히려 우리보다 못하지 않느냐?”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께 대한 찬송이 나온다. 왜 찬송이 나오는가? 죄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을 가르고 내려온 모습이다. 그러니까 역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교리적으로 본다면 의로운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완전하게 의로운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누구라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정반대다. 그래서 세상이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이 볼 때 정말 의로운 사람만 있으면 세상은 오지 않더라도 굴복은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비웃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당하신 핍박은 그런 핍박이다. 지금 사람들은 예수님이 굉장한 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때 당시의 사람들이 볼 때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선지자라고 하면 대단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적을 행하다고 해서 하나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에게는 모세나 엘리야처럼 놀라운 선지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조상이 어떠했다는 것을 그들은 어려서부터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를 만났을 때 과연 ‘저 사람은 하나님 아들이구나.’라고 보였겠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절대로 볼 수 없었다. 하늘이 갈라진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오신 것은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신 사건이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가로 막혀 있는 하늘이 갈라진다는 개념은 인간의 생각과 사상과 감정 속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다(고전2:9).
우리가 볼 때는 ‘저런 사람이면 하나님을 찬송하겠구나.’라고 생각되는데 그렇지 않고 ‘저런 사람이 교회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바라지만 그런 사람은 오지 않는다. 대구시장이 교회에 온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지만 그런 사람은 오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상하게 전혀 다른 사람을 들어 찬송을 받으시는 분이다.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기를 구한 선지자의 소원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 소원이 발전하고 또 발전해서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오셨다는 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계1:7).”는 말도 이래서 나온 말이고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그분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그냥 다시 오신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런 역사적이 배경이 있고 계시의 발전이 있어서 여기까지 온 것이기 때문이다.
2. 주의 백성으로 보아주시기를 구함
두 번째로 이사야는 그 백성을 주의 백성으로 보아주시기를 간구하였다.
그 백성의 허물과 타락과 부패를 고백한 후에 그럴지라도 당신의 백성으로 보아주시기를 원한다는 기도를 하고 있다. 그들이 의로우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아주시기를 구한 것이 아니라 비록 그들이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아주시기를 구한 것이다. 이사야 64장 6절에는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라고 하였다. 볼 것도 없고 하나님께 거역하는 백성이었다. 그런데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64:8).” 하였다. 그래도 당신은 우리의 창조자요 아버지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라는 사상이 처음 나오게 된 것 같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이 말은 우리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라는 말을 사도 바울은 인용하였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이렇게 만들든 저렇게 만들든, 뚝배기를 만들든 항아리를 만들든 토기장이의 자유라고 하였다.
토기를 만드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진흙 한 덩어리를 주무르고 또 주물러서 여러 과정을 거쳐 그릇을 만드는 것을 보면 하루 종일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매 순간 모양이 변한다. 토기장이의 손끝에서 온갖 모양이 다 나온다. 진흙을 납작한 판자처럼 만든 다음에 그것을 연결해서 붙인다. 떨어질 것 같은데도 들어붙어서 항아리가 된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다. 우리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이렇게도 지어질 수 있고 저렇게도 지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라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에게 불만이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공교한 손에 의해서 다루어지고 연마된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알게 될 것이다. 흙 한 덩어리는 아무 가치도 없다. 그런데 유명한 토공에 의해 다루어지면 우수한 그릇이 된다. 고려청자나 이조백자도 흙 한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그 토공의 솜씨에 의해 지금까지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장난하다가 버린 진흙 덩어리는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유명한 토기장이가 다루었기 때문에 고려청자가 되고 이조백자가 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다루시기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들이 주의 백성임을 상기시켰다.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사64:9).” 이것은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한 말이다.
하나님은 백성이 필요한 분이다. 백성이 있어야 그분은 왕이 되실 수 있다. 시험을 봐서 왕이 될 수 는 없다. 아무리 자격이 있다고 해도 백성에 의해서 왕이 되는 것이지 시험을 보고 왕이 되는 법은 없다. 월남이 망하자 엊그제까지 대통령이었던 티우는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니었다. 백성이 호치민에게로 다 넘어가 버렸으니까 자기 백성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미국의 모 대학에서 초청을 받아서 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학생들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왕은 백성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다. 왕이 훌륭해야 백성도 좋은 백성이 되겠지만 백성이 얼마나 좋은 백성이냐에 따라서 왕도 훌륭해지는 것이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얼마나 좋은 대통령인지는 시험을 통해서 알 수 없다. 미국이라는 국력 때문에 부시는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것이다. 겉모양만 보면 깡패 같기도 하고 인상이 싸움을 잘할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 사람이지만 미국이라는 힘 때문에 그 사람의 말이 힘이 있는 것이고 미국대통령의 특별한 권한으로 북한을 공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 64장 11절에는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의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무하였나이다.”라고 하였다. 주의 전을 사랑하는 말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오히려 스스로 억제하시리이까.”라고 하였다. 당신의 전이 이렇게 불에 탔고 황폐해져서 창피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속마음을 억제하고 감추려고 하시느냐는 특이한 말을 한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잘못했다고 해도 여호와의 전이 불에 타고 황무하게 되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당신은 분명이 이 전을 우리보다 사랑하실 텐데 어찌하여 그것을 감추고 계십니까?”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을 깨움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깨우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깨운다는 말은 이상한 말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깨우는 것은 사람이다. 하나님을 안식케 하는 것도 사람이고 하나님을 진노케하는 것도 사람이다. 사람에 의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되기도 하고 깨어있는 하나님이 되기도 하고 쉬는 하나님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은 안식하셨다. 아담이 하나님을 쉬시도록 했던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면 하나님은 쉬게 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벗어나면 하나님은 수고하셔야 한다. 안심하실 수 없으면 하나님은 불안하셔서 쉬실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 의해서 좌우되시는 분이다.
어떤 사람은 “부처님은 대자대비하시고 하나님은 사랑이 넘치신다는데 왜 그렇게 진노하시느냐?”며 따지는 사람이 있다. 원수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잘못된 것이라며 따진다. 자기에게는 원수가 없다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보다 낫다는 것이다. 자기에게는 모든 것이 무니까 미운 놈도 없고 좋은 놈도 없으며 선도 없고 악도 없다고 한다. 그런데 왜 성경에는 원수를 어쩌니 하는 말이 나오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원수를 갖고 계시거나 하나님 스스로 진노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에 의해서 진노하기도 하고 사람에 의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분이다. 사람들은 사랑이신 하나님이 왜 이러느냐는 식으로 질문을 한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는 사랑이시지만 누구에게는 진노일 수 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다. ‘나는 ~이다.’이신 분이다. 하나님을 오해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도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사람에 의해서 노하기도 하고 축복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는 분이라고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분이다. 사람과 아무 관계없다면 자기 스스로 자존자가 되어 좋을 일도 없고 성낼 일도 없고 축복할 일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사람에 의해서 축복할 수도 있고 진노할 수도 있는 분이다. 우리에게는 어떤 하나님이 필요한가? 도사 같은 하나님이 필요한가, 아니면 우리와 관계되는 하나님이 필요한가? 우리와 관계되는 하나님이다. 전에 누군가 하나님이 왜 화를 내시느냐는 질문을 해서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님이 왜 화를 내시는가? 그것은 바로 너 때문이다. 너만 아니면 하나님이 화를 내지 않을 텐데 너 때문에 화를 내신다.”
가. 진토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깨우는 사람이다. 어디서 누가 하나님을 깨우는가? 진토에서 하나님을 깨울 수 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여기서 하나님은 깨신다. 우리가 진흙일 때 그분은 토기장이로 깨어나신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와 같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 앞에서 내가 무엇이냐에 따라 그 사람이 깨어난다.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가서 욕을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처음에는 그 사람이 참겠지만 계속 욕을 먹으면서 열을 받다 보면 갑자기 포악한 사람으로 변한다.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서 포악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순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전처와 살 때는 매일 싸웠는데 후처와는 오순도순 잘사는 사람도 있다. 전 남편과 살 때는 매일 싸우던 사람도 다른 사람과는 잘살 수도 있다.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디에서 깨우는가? 진토에서다. 자기가 큰 바위가 되어서 하나님을 보고 “왜 당신은 깨어나지 않으십니까? 왜 모른 체 하십니까?” 하고 있으면 깨지 않는다. 토기장이는 진토를 볼 때 벌떡 깨어난다. “좋은 흙이 왔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잠자다가도 벌떡 깨어난다. 백자를 만들 수 있는 아주 좋은 고령토가 왔다는 소문을 들으면 자다가도 깨어날 것이고 죽었다가도 살아날 것이다.
하나님을 깨우는 길이 있다. 사람도 사랑이 저절로 나오지 않는다. 사랑을 자극해야 나오지 자극하지 않으면 사랑이 나오지 않는다.
가만히 있는데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사람은 돈 사람이다. 혼자 히죽 히죽 웃고 있는 사람도 있다. 누가 웃게 해서 웃어야지 아무 상대도 없는데 자기 혼자 웃고 있는 사람은 돌은 사람이다. 반대로 아무리 웃기려고 해도 웃지 않는 사람도 문제다. 웃기지 않는데도 웃는 사람이나 웃기는데도 웃지 않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찬송할 때도 보면 남이 다 찬송하는데 자기 혼자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독창은 못할 사람이 있어도 다 같이 노래할 때는 노래하는 것이 정상이다. 입을 다물고 있는 데는 무슨 사연이 있다.
나. 주의 백성으로서
그리고 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깨운다. 임금은 자기 백성을 볼 때 힘이 난다.
아무리 훌륭한 임금이라도 백성들이 계속 데모나 하고 돌이나 던지면 포악해진다. 못난 왕이라도 백성이 일심으로 “우리는 당신의 백성입니다.”라고 하면 좋은 왕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의 백성입니다.”라는 이 자리에서 그분을 왕으로 깨우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수준의 백성이 되느냐에 따라서 그분이 어느 수준의 왕이 되시느냐가 결정된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아무리 학식이 많고 능력이 많아도 백성들이 매일 데모나 하고 있으면 국제무대에 나가서 아무 힘도 쓸 수 없다. ‘자기 나라에서 저러고 있는데 되겠느냐?’고 생각하지 약속해 봤자 믿어주지 않는다. 지금도 FTA 협상을 한다니까 데모하고 난리를 치는 것을 미국 대표들이 보고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허수아비들이 나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일은 당연히 정부에서 결정해서 할 일인데 반대자들이 저렇게 난리를 치는 것을 보면 정부를 믿지 못할 것이다. 백성에 의해서 임금은 권세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참 백성을 보면 하나님은 왕으로서 깨어나신다. 그러면 그분의 통치력을 발휘하실 수 있다. 왜 하나님의 통치는 나에게 임하지 않는가?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 주의 자녀로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이 말은 “우리는 당신이 돌보아야 할 당신의 자녀입니다. 당신이 없으면 안되는 자녀입니다.”라는 말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아버지로 깨어나신다. 아버지가 되셔서 아버지로서의 책임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자녀로서 서게 되면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부모가 되면 어느 누구보다 친근하고 가깝다. 부모보다 자녀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여기는 사랑이라는 말이 필요하지 않다.
라. 전의 황폐함을 인하여
그리고 전의 황폐함을 통해 하나님을 깨우고 있다. “우리 열조가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의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무하였나이다.” 하나님의 거처가 이렇게 황폐해도 되겠느냐는 것이다.
성전은 마지막에는 새 예루살렘이 된다. 구약에서는 물질적인 성전이었지만 이것이 점점 발전해서 말씀이 육신이 된 하나의 전이 나오게 되고 그 전이 더욱 발전하고 확장되어서 새 예루살렘이라는 하나의 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하나님은 전이 있어야 되는 분이다. 집이 있어야 되는 분이다. ‘벧엘 하나님’은 집-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 아니다. 거하실 집이 있어야 하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당신의 집이 이렇게 황폐해졌는데 스스로 억제하고 계십니까!”라고 한 것이다. 이사야는 탁월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하나님을 깨운 것이다.
상대방을 잘 알면 깨울 수도 있고 쉬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방을 모르면 동문서답을 하게 된다. 깨워야 할 때는 자게 하거나 자야 할 때는 깨우는 식이 된다. 사랑할 때는 분노하게 만들고 북을 치지 않아야 할 때 치는 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오케스트라에서 여러 악기들이 연주하고 있을 때 뒤에서 심벌즈를 들고 있는 사람은 잘못하면 졸지도 모른다.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어느 순간에 한 번 때려야 하니까 재미도 없을 것이고 어렵기도 할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졸다가 엉뚱하게 쳐 버리면 어찌 되겠는가? 음악회에 가서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박수를 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미쳐 끝나지도 않았는데 박수를 쳐 버리면 그 음악회를 망치고 만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깨울 수 있다. 사람을 알아야 그 사람을 깨울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깨운다고 한 것이 오히려 분노를 일으키게 할 수도 있다. 상대방의 속을 잘 알아야 그 사람을 깨울 수도 있고 쉬게 할 수도 있다. 하나님도 쉴 때는 쉬게 해야 하고 깨워야 할 때는 깨워야 한다. 무작정 깨워도 안되고 무작정 재워도 안된다. 그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다. 그 날은 하나님께서 쉬셔야 하니까 그 날만이라도 깨우지 말고 쉬라고 하신 것이다. 하도 사람들이 잠을 재우지 않고 깨우니까 일주일에 하루라도 쉬고 싶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 복을 주겠다고 하셨다.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쉬게 해 주면 복을 주겠다고 하셨으니 얼마나 피곤하시면 그렇게 하셨겠는가?
3. 여호와께서 그 종을 버리지 않으심
이렇게 하나님을 깨우니까 진노하셨던 하나님은 자기의 종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셨다. 포도즙을 얻기 위해 포도송이를 상하지 않음 같이 자기의 종들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종들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이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것은 포도송이에서 포도즙이 나오듯이 황폐한 사람들 속에서 그래도 하나님을 찬송할 백성은 그 백성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방인이 하나님을 찬송하겠는가? 그래서 포도송이를 상하지 않음 같이 자기의 종을 해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런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의 풍성과 자비가 나왔다. 포도송이를 상하지 않음은 포도즙이 있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다가 벌레가 먹었어도 버릴 수 없는 이유는 먹을 것이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못쓰게 되었으면 버릴 수밖에 없지만 그나마도 먹을 것이 있으면 버리지 않는다. 요즘처럼 사과가 비쌀 때는 썩은 사과라도 다 버리지 않는다. 그래도 한쪽은 먹을 수 있으니까 칼로 도려내고 먹는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인생은 범죄했지만 그래도 그분이 취할 것이 있다. 사람밖에는 기대할 데가 없기 때문이다. 주의 백성에게서밖에는 기대할 수 없으니까 다 버리지 않겠다고 하셨다.
이사야 65장 9절에는 “내가 야곱 중에서 씨를 내며 유다 중에서 나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내리니 나의 택한 자가 이를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나의 종들이 거기 거할 것이라.” 하셨다. ‘야곱 중에서 씨’는 야곱의 후손이다. 다윗과 그리스도, 그리고 오늘 우리다. 우리는 그 씨가 흘러와서 살아 있고 이 씨에 의해서 거듭났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다고 하였다(벧전1:23). 이 씨를 내고 이 씨를 남겨 놓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망했고 마침내는 예수를 죽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씨는 그들을 통해서 전달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을 통해서 보존되었고 전달되어 왔다. 야곱 중에서 씨를 내고 남겨두신 것이다.
‘유다 중에서 나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내리니’라고 하셨는데 ‘산들’은 정권이나 권세를 의미한다.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나왔으니까 그 왕들을 끊이지 않게 하겠다고 하신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것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비로소 왕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말을 문자대로만 믿는다. 그들은 지금도 유다 지파 중에서 왕이 나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사도들은 예수가 바로 그 왕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쓴 것이다. 마태복음의 주제는 왕이신 그리스도다. 그 근거를 말하려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 하였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마1:3)”라는 말을 한 것이다. 신약의 해석, 사도들의 해석은 예수가 곧 유다 지파의 왕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는 말을 타고 오는 왕이라야 왕이지 예수 같은 분은 왕이 아니다. 그들의 개념은 완전히 다르다. 신약과 구약은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이, 그것도 기독교계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육신적인 유다 왕국이 회복될 것이라고 믿는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그렇게 주장하는 것을 보면 이해가 안된다. 그것이 끝나고 새로운 해석이 왔는데 왜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하는지 알 수 없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입장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유다 중에서 나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내리니’라고 하셨으니까 유대 왕국이 세계적인 왕국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유대교만이 아니라 기독교도 그렇게 믿는다. 기독교 국가가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나도 어렸을 때는 이스라엘을 마치 우리의 모국인 것처럼 생각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을 조국처럼 생각했던 것과 같다. 소련은 때로는 민족주의를 때로는 국제주의를 부르짖었다. 국제공산주의의 단일노선을 추구한 스탈린 때에는 소련을 종주국으로, 조국으로 생각했다.
‘유다 중에서 나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내리니’ 만일 이 예언을 물질적으로 해석한다면 이 예언은 틀린 것이다. 벌써 27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유다 중에서 산들을 기업으로 얻은 자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완전히 실패하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도들은 이 사람이 곧 그 왕이라고 해석하였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분이 이사야가 예언했던 바로 그 사람이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소망이다. 언젠가는 그런 왕이 올 것을 소망하고 있다. 그 소망을 그들은 지금도 잡고 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이 소망을 끝까지 잡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했으면 예수가 왕이라는 것도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나온다고 한 것이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고집하고 있다. 기어코 유다 지파 중에서 세계를 지배할 왕이 온다고 소망하고 있다. 이 소망을 그들은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누구를 위해서 버리지 않고 있는가? 예수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다. 신기하다. 이것은 나의 해석이 아니라 바울의 해석이다. 그들이 그렇게 잡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
만약 그들이 유다 왕국이 망할 때 “틀렸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것은 다 거짓말이다.”라고 했으면 우리는 아예 예수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끝까지 그것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만나게 된 것이다.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은 그것을 계속 붙잡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가 어느 날 그 교리를 중심으로 해서 다른 것을 얻을 수 있다.
축구에서 경기를 하는 선수는 경기를 해야 하고 깃발을 들고 선심을 보는 사람은 깃발을 들고 있어야 한다. 코너에서 깃발을 들고 있는 선심은 축구가 다 끝날 때까지 깃발만 들고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깃발을 들고 있기 때문에 코너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코너킥을 하면 골이 잘 들어가니까 상대방에게 공을 차내도록 만들어서 일부러 코너킥을 얻으려고 한다. 우리를 위해서 깃발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나올 것을 굳게 믿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문자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성경은 지금의 형태로 보존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성경은 완벽하게 보존되었다. 일점일획이라도 고치면 안된다는 사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성경은 보존되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보존했으니까 그 사람들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을 번역할 때는 의역을 하면 안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대로 직역을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직역을 해 놓아야 다음에 누군가가 그것을 보고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역을 해 놓으면 원본이 자꾸 변해서 뒤로 가면 딴소리가 나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자기가 몰라도 문자대로 번역해야 한다. 우리말 성경에 ‘영과 실재로’를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번역한 곳이 있다. 자기의 개념에는 ‘영과 실재’가 없으니까 신령하게 진정으로 빌던 개념으로 번역해 놓은 것이다. 그렇게 해 놓으면 다음에는 다르게 해석할 수 없다. 그러니까 몰라도 ‘영과 실재로’라고 번역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이것이 탁월한 사람들이다. 절대로 성경은 변경될 수 없다. 그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점 하나를 찍더라도 꼭 기도를 하고 찍는 식으로 성경을 보존해 왔다. 그것 때문에 오늘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알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소망이 비록 물질적인 데로 흘러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했던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4.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심
이사야 65장 17절 이하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겠다는 말씀이 나온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가. 주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 함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을 것이라고 하셨다(사65:18). 그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망한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렇게 완전히 망하면 세상에서는 그것으로 끝이다. 그런데 선지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당신의 약속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확고한 사상이 있었다. 그러니까 만약 안되면 새로 창조라도 해서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없으면 창조하시는 분이다. 세상에서는 불타 버리고 나면 없는 것인데 선지자들의 하나님은 창조하시는 분이다. 없어도 다시 만드시는 분이라는 신앙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 우리도 어떤 현실 속에서 모든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다 막혀서 다 끝나버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고 그분이 모든 것을 하신다는 믿음을 가진다면 우리는 그분이 없는 데서 있게 하실 것을 기대할 수 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라 하였다(롬4:17). 우리에게는 이것이 가능하다.
사람은 희망이 있으면 살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이 없으면 못산다. 모든 데 절망해서 한 군데도 희망이 없으면 자살한다. 그런데 한 군데라도 희망이 있으면 자살까지는 하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모든 것이 끝나서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창조자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다시 만들 수 있는 분이 있으니까 최소한 자살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별 것 아닐 수도 있다. 아이들은 장남감 하나만 망가져도 절망하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완전히 절망 상태에 빠져서 ‘이제는 나에게 장난감이 없다. 영원히 나에게는 장난감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부모가 볼 때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 하나 사다 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장에서만 생각할 일이 아니라 그분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를 알면 결국은 절망하게 된다. 어린아이가 생각할 때는 장난감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이 없어지면 그만이다. 그래서 누가 자기 장난감을 가져 가려고 하면 죽니 사니 하며 운다. 부모가 다시 사 준다고 해도 못믿고 계속 운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부모를 믿기만 한다면 ‘그래, 저것을 주면 더 좋은 것을 사주시겠구나.’라고 알 것이다.
우리가 창조자를 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혹시라도 허망하게 끝날 수도 있고 100% 된다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거기서 희망을 가지고 창조하신 이를 기억한다면 솟아날 구멍이 있다. 우리나라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이 있다. 참 좋은 속담이다. 콩을 넣어서 맷돌질을 해도 그대로 나오는 콩이 있다. 그렇게 갈아대도 어떻게 갈리지 않았는지 그냥 나오는 놈이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절대로 절망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어딘가에 길이 있는데 모를 뿐이지 절대로 절망은 없다.
이것은 나의 인생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절대로 희망이 없었다. 내가 대구에 살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나를 아는 친구들이 생각하면 이것은 창조 이상의 일이다. 여러분은 잘 모르시니까 내가 당연히 대구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를 아는 사람들이 본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 여러분 중에 내 고향에 가 보신 분이 있겠지만 노화도는 땅끝에서 제주도와 추자도 다음으로 먼 곳이다. 거기서 나는 모든 것에 희망이 없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도와줄 사람도 없는 형편이었다. 거기서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것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친구가 나를 부를 생각을 했는지 너무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맷돌에 갈면 콩이 다 갈려 버리고 만다면 아무 희망이 없겠지만 그래도 갈리지 않고 온 콩이 나올 수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희망이 있다. 사방이 다 막혀 있어도 하늘은 열려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늘은 막혀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을 향해서 창을 열어 놓아야 한다. 노아의 방주에는 창이 있었다. 다른 데는 다 물에 잠겨도 거기는 잠기지 않는 곳이다. 하늘로 뚫린 창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도 하늘로 뚫린 창을 놓아 두어야지 그것까지 막으면 안된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로 가는 통로, 하나님이 나에게로 오실 수 있는 통로는 열어 놓아야 한다. 그 길만 열어 놓으면 언제든지 오실 수 있다.
나. 수한이 차므로 여한이 없음
이사야 65장 20절에는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에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하였다. 어려서 죽는 자가 없을 것이고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다고 하였다(사65:22).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이 그대로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나무는 수명이 정해져 있는 것 같지 않다. 같은 나무라도 땅에 따라 오래 살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같은 소나무라도 땅에 따라서 백 년을 살 수도 있고 천 년을 살 수도 있다. 미국에는 주목 자생 단지가 있는데 거기는 이천 년 삼천 년짜리 주목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그곳만의 특별한 토양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땅에는 아무리 심어도 뿌리가 더 이상 뻗어나갈 데가 없다. 그러면 나무는 죽어 버린다. 그런데 잔뿌리가 계속 날 수 있으면 계속 살 수 있다. 사람도 장이 좋아야 오래 산다. 장에서 모든 것을 흡수하니까 장은 나무의 뿌리와 같다. 사람은 영양분을 흡수해 들일 수 있는 데까지 살 수 있다. 그러나 영양분을 흡수하지 못하면 죽는다.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며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다고 하였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은 누구도 해할 수 없다. 자기의 몫은 자기가 다 찾아 먹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의 몫을 다 찾아 먹고 자기의 몫 이상의 것을 찾아 먹을 수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인생에 감추었던 모든 것을 찾아 먹는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다 찾아 먹지 못하고 죽는다. 그래서 한이 있는 것이다. 자기의 몫을 다 찾아 먹지 못지 못하니까 죽을 때는 억울하고 한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몫을 다 찾아 먹게 되면 우리의 수한을 다 채운 것이고 날 수가 찬 것이며 하나님이 주신 것을 다 누린 것이다. 그러면 수한이 차므로 여한이 없어진다. 우리는 왜 여한이 없다는 말을 하는가? 우리가 찾아 먹을 것을 다 찾아 먹었고 누릴 것을 다 누렸기 때문이다.
다. 가옥이 안정되고 농사가 소득을 냄
이사야 65장 21-22절에는 가옥이 안정되고 농사의 소득을 얻는다고 하였다. 집을 지어서 자기가 살 것이라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평범한 말이지만 이 말이 나온 것은 자기 집을 다 빼앗겼기 때문이다. 침략자들이 와서 집을 빼앗으면 집을 지어도 소용이 없다. 내가 지은 집에는 다른 사람이 와서 살고 나는 다른 사람의 집에 가서 살아야 하니까 집을 지어서 거기서 살 것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농사를 지어 소득을 낼 것이라는 말도 농사를 지어도 다른 놈이 다 가져가 버렸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블레셋이 와서 가져가고 앗수르가 와서 가져가니까 농사를 지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일제시대 때는 일제에게 공출 당했고 고리대금업자에게 장리쌀로 주고 나면 농사를 지어도 먹을 것이 없었다. 장리쌀 이자는 봄에 한 가마니를 빌리고 가을에 두 가마니를 갚아야 했다. 농사를 지어서 그렇게 하고 나면 먹을 것이 없다. 그래서 가난이 대물림되었던 것이다. 장리쌀 이자를 주고 공출을 당하고 나면 가난을 벗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보리 고개가 생긴 것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보리가 익는데 양식은 다 떨어져서 먹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풋보리를 베어다가 불에 그을려서 그것을 먹고 살았던 것이다. 해방이 된 다음에도 수년 동안 미국에서 보낸 밀가루와 우유가루로 겨우 연명하고 살았다.
농사의 소득을 얻어서 농사를 지은만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태평성대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날에는 내가 집을 지어서 거기서 안정하게 살 것이고 농사를 지으면 소득을 내가 가져 올 것이다. 남이 빼앗아 갈 수 없게 될 것이다.
라. 수고가 헛되지 않음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이 말은 탈취당하거나 재난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농사를 잘 지어도 군대가 와서 빼앗아 가거나 재난이 와서 쓸고 가 버리면 헛일이다. 홍수가 오고 태풍이 와서 휩쓸어 버리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이니까 의외의 사건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마. 부르기 전에 응답함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과 먼 관계에 있을 때는 그분을 부르려니까 목이 터져야 했다.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을 보면 표가 난다. 하나님이 들으라고 큰소리로 불러서 목소리가 걸걸하게 쉬었기 때문이다. 작게 말하면 못들을 것 같으니까 크게 부른다. 작게 하면 힘이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잡생각이 들어오기 때문에 큰소리를 질러야 한다. 그래서 신령하다는 사람들을 보면 다 목이 쉬었다.
그러나 부르기 전에 응답하겠다고 하셨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내가 부르기도 전에 벌써 알고 계시며 내가 말하기도 전에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는 한 세계를 말한 것이다. 요청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요청을 하기도 전에 알고 계신다는 것이니까 이것은 한 몸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어떻게 내 속을 다 알아서 배고프기 전에 먹을 것을 준비해 놓고 내가 소원하기도 전에 소원을 다 이루어 놓겠는가? 그분과 하나가 되어야 그렇게 된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이상이다.
부르기 전에 응답하겠고 말을 마치기 전에 들을 것이라고 하셨다. 사람도 친하고 가까우면 속을 다 아니까 부르기도 전에 대답한다. 이것이 하나됨의 결과다.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새 예루살렘을 어떤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이것이 불가능하다. 만일 어떤 공간이 있고 사람들이 거기 들어가서 살고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부르기도 전에 응답하겠는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어떻게 이런 친밀한 관계가 되겠는가?
새 예루살렘을 보면 그 성 자체가 사람이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단련되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하나의 성이다. 그 성 자체가 하나님과 하나인 것이다. 그러니까 부르기도 전에 응답을 받고 말하기도 전에 이루어지는 성인 것이다. 그분과 하나니까 따로 기도할 일이 없는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부르기도 하고 좇아가려고 하는 것이지 하나가 되면 부를 일도 없고 좇아갈 일도 없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이다. 땅 위에서 시공간적으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 한 생명, 한 몸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바. 주의 성산에는 상함도 해함도 없음
이사야 65장 25절에는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하였다. 이 말씀은 유명한 구절이다.
‘주의 성산’은 하나님의 산이다. 하나님의 산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하는 새 예루살렘이다. 요한계시록 21장 10절에는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라고 하였고 14장 1절에는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사천이 섰는데”라고 하였다. 요한계시록에는 이 이상이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친히 성전이 되셨고 하나님은 빛이시고 어린양은 등이 되셨으며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의 강이 흘러내린다.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고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고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리와 어린양은 천적이다. 그런데 함께 먹는다는 것이다.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는다는 말은 그렇게 한가해진다는 것이다. 소가 마른 짚을 먹고 있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푸른 풀도 아니고 바짝 마른 풀을 소가 겨울 내내 먹는 것을 보면 그것을 어찌 먹고 있는지 의아하다. 그런데 사료만 주고 짚을 주지 않으면 소는 섬유질이 없으니까 장이 붙어서 죽는다. 그래서 마른 짚을 주는데 소는 그것을 하루 종일 일없이 씹고 있다. 무슨 맛으로 그것을 씹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사자가 그렇게 한가해진다는 것이다. 소는 물기도 없는 짚을 하루 종일 씹고 있다. 소는 이빨이 아래만 있지 위에는 없다. 그런데도 그 질긴 것을 씹고 있다. 사람은 영양분만 먹으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시레기 같은 영양가 없는 것도 먹어야 하는 이유는 섬유소가 들어가야 장에서 비벼주고 섞어주기 때문이다. 요리를 해서 먹긴 하지만 우리도 사실은 소처럼 풀을 먹는 것이다.
그리고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라고 하였다. 창세기에서는 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고 살 것이라고 하셨다(창3:14). 뱀이 흙을 먹고 살게 되면 세상은 평안해진다. 뱀이 흙을 먹지 않고 육체를 먹다 보니까 마지막에는 붉은 용이 되었다(계12:3). ‘붉은 용’은 아주 강력하고 힘이 센 용이라는 뜻이다. 붉다는 것은 힘이 세다는 것이다. 해삼도 홍삼이 더 비싸고 좋다고 한다. 뱀이 흙을 먹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지만 뱀이 흙을 먹지 않고 사람을 먹으면 용이 된다. 그렇게 되면 세상이 어지러워진다.
사. 평강과 영광이 넘침
이사야 66장 12절에는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같이, 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같이 주리니”라고 하였다. ‘열방의 영광’은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게 될 열방의 풍성으로 세상의 모든 풍성한 보화들이 다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믿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얼마나 특이한 사람들인지 모른다. 그 거지 같은 처지에 온 만방에서 왕들이 모든 보물을 싣고 예루살렘으로 올 것이라고 믿으니 얼마나 황당하고 허황한가! 이렇게 정신 나간 사람들이 유대인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엉뚱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그들은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 안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이상을 준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미친 사람들도 필요한 것이다. 나라가 다 망해서 열두 지파 중에 두 지파 반밖에 남지 않은 처지에, 그것도 곧 포로로 잡혀갈 처지에도 그들은 이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이것이 놀라운 점이다. 그래도 그들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런 희망을 가질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이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아무리 다른 이론을 내놓는다고 해도 창조를 부인하면 근거가 생기지 않는다. 뿌리가 없는 것이다. 인생이 아무리 큰소리를 치고 별소리를 해도 창조를 부인하면 뿌리가 없는 사람이다. 뜨인 돌 하나에 무너질 사람이다. 거창하게 지어 놓았지만 기초가 없으니까 진짜가 오게 되면 깨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느브갓네살 왕이 보았던 거대한 신상은 머리는 정금이고 가슴과 팔들은 은이며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었지만 뜨인 돌 하나에 산산히 부서졌다. 뿌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 같지만 그렇지 않고 뿌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비록 나무는 잘려서 그루터기가 되었어도 뿌리는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세상은 나무는 서 있어도 뿌리가 없다.
옛날에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 시절에 대통령께서 어딘가로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그 지역의 군수인지 도지사인지가 갑자기 조경공사를 한답시고 생소나무를 잘라다 세워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오신다던 날에 오지 않는 바람에 들통이 나버렸다. 아무리 큰 나무라도 뿌리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가진 소망은 나무는 잘렸어도 뿌리가 있으니까 이 그루터기에서 싹이 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소망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소망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런 소망을 가졌다면 황당하고 미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들은 미친 사람들이 아니다.
자. 평강과 영광이 넘침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같이, 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사66:12).”고 하셨다.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흐르게 하겠다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 안에는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닌다고 하였다(계21:24). 그 말이 여기서 나온 말이다. 인간이 완성된 새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분으로 차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한 사회 안에는 그 영광이 흘러넘친다. 그래서 해와 달이 쓸데없다고 하였다. 이 예언은 여기서 성취되었다.
문자적으로 이 예언을 붙잡았던 사람들은 허탕을 쳤지만 우리는 이방인으로서, 약속에 대해서는 외인이고 소망이 없던 자들인데 예수 한 사람을 인해서 우리는 새 예루살렘의 소망을 갖게 되었다. 그 한 사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 것이다. 우리는 예수 한 사람으로 인해서 새 예루살렘의 소망으로 바꾸어진 것이고 그들은 예수 한 사람을 잘못 해석함으로 인해서 지금도 이 껍데기를 붙잡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한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따라서 운명의 길이 완전히 달라진다.
차. 열방을 모아 예루살렘에서 경배케 하며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음
그리고 열방을 모아 예루살렘에서 경배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의 처지로 보아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나라는 다 망해가고 우상은 득실득실하고 세상은 엉망이 되어가는 판에 열방을 모아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경배하게 한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이런 말씀이 나왔다.
그리고 그들을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을 것이라고 하셨다. 열방 중에 일부를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삼으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의 소망이다. 비록 유대인들이 믿음 안에서 잘못된 소망, 빗나간 소망,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을 갖기는 했어도 그들이 이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바통이 넘어온 것이다. 첫 번째 주자가 트랙을 따라서 제대로 달렸기 때문에 다음 주자는 또 다시 트랙을 따라서 달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인들을 무시할 수 없다. 기독교 역시 빗나간 길로 가지만 우리가 그들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사람들이 이것을 지켜 왔기 때문에 우리에게 바통이 넘어온 것이다. 철저한 보수주의나 교리주의와 같은 것들은 정말로 답답하지만 그 사람들이 이것을 보존해 왔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자유롭게 이런 해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믿음 안에서의 소망
창조자에 대한 믿음, 구속자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에 대한 믿음은 우리를 새 예루살렘으로 가게 하는 믿음이다. 창조자가 공연히 창조하셨겠는가? 버릴 것을 무엇 하려고 창조하셨겠는가? 마음에 안든다고 다 때려 부수려면 무엇 하러 지으셨겠는가?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창조자는 절대로 자기의 피조물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구속자가 그 백성을 공연히 구속하셨겠는가? 광야에서 모세도 그렇게 기도하였다. “당신이 애굽에서 구속한 백성이 여기 있는데 이 백성을 여기서 버리면 세상 모든 사람이 여호와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여호와는 일을 시작하고 마치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할 것 아닙니까? 왜 이 백성을 구속해서 광야에서 다 죽게 하십니까?(출32:11-13)” 이것이 구속자에 대한 믿음이다. 아들을 보내어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이 공연히 우리를 구속하셨겠는가?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알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이런 일을 하게 하고 이런 세계를 이루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믿음을 버릴 수 없고 우리의 믿음이 식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
왜 믿음이 왔다 갔다 하는가? 자기의 목표를 세워놓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데 안되거나 자기가 목표를 세웠는데 안되니까 믿음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늘 변경될 수 있다. 늘 바뀔 수 있다. 나뭇잎처럼 흔들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 될지라도 창조자에 대한 믿음, 구속자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에 대한 믿음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으로 최종 완성
이 예언은 새 예루살렘으로 최종 완성된다.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은 전 성경의 완성이다. 어린양의 신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하나님의 장막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한 성으로,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의 종들이 그를 섬김으로 그의 얼굴을 보며 그의 이름이 이마에 있다고 하였다(계22:3-4). 그의 이름이 이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표시가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표시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다. 이마에 문자를 써 놓고 있는 것이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이 표시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라는 것이다. 사람을 볼 때는 그 사람의 이마부터 본다. 그런데 그 사람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표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르기 전에 응답하시며 말하기 전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예전에 모세 시대만 하더라도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모세와 같은 사람이라도 바위틈에 숨겨놓고 여호와께서 손으로 덮으셨다. 모세는 여호와의 등은 보았으나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그의 얼굴을 볼 것이라고 하였다. 그 시대에 가장 유명한 사람, 하나님과 말할 때 마치 친구와 말하듯이 했던 사람도 감히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22:5).” 하였다. 밤이 없다는 것은 어둠, 즉 사망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허황된 소망이 아니다. 창조자가 있기 때문에, 구속자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가 있기 때문에 이것은 허황한 꿈이 아니다.
공산주의의 꿈은 허황한 꿈이었다. 공산주의의 이상을 다는 모르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지구상에서 정치적인 이상 가운데 가장 분명하고 가장 확실한 이상을 제시했던 것이 공산주의다. 어느 군주도 어느 이상가도 이렇게 분명한 이상을 제시한 예가 없다고 한다. 지금 자본주의는 이상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단지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뿐이지 어떤 이념적인 이상이 없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인류에게 이상을 제시했다.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 사회가 오면 지배자가 따로 없어도 모두 평등해질 것이고 완전한 평화의 세계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 표절했다는 말이 있다. 공산주의는 성경의 모조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은 성경에만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공산주의에서만 이런 이상을 제시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실패했다. 새 예루살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담을 가지고는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없다. 스탈린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나라가 되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이라야 그런 나라가 되지 스탈린이 어떻게 되겠는가? 수없는 피를 흘린 그런 인간이 어떻게 그런 낙원 세계를 이루겠는가? 이리들이 모여서 어떻게 평화를 이루겠는가? 이리들이 모여서 유엔 총회에서 평화회담을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유엔 본부 앞에는 소련이 기증한 상징물이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칼과 창을 쳐서 보습을 낫을 만드는 평화를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그러나 그 나라가 평화의 나라가 될지 안될지는 스탈린을 보면 알 수 있다.
스탈린이 어떻게 평화의 나라를 만들겠는가? 황새도 못만드는데 늑대가 어떻게 평화의 나라를 만들겠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라며 왕을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무엘은 왕을 세우면 그가 너희 자녀들을 종으로 삼고 군대로 삼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그래도 그들은 왕을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왕정이 시작된 것이다. 이솝 우화가 여기에서 착안한 것 같다. 연못에 있는 개구리들은 왕을 달라고 하였다. 신령님께서 왕을 주면 너희를 다 잡아먹을 것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왕을 달라고 하자 황새를 주었다. 황새는 점잖게 “내가 너희를 잘 보호해 줄테니 안심하고 놀아라.”라고 말했다. 그러자 개구리들은 만세를 부르며 좋아했다. 그러나 황새는 배고플 때마다 한 마리씩 잡아먹어서 마지막에는 개구리들을 다 잡아 먹고 말았다. 황새를 모르기 때문에 왕으로 세웠던 것이다.
황새를 알면 평화로운 연못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스탈린을 모르니까, 레닌을 모르니까 사람들은 이상 사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사람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떻게 늑대가 어린양의 나라, 평화의 나라를 만들어 내겠는가? 다른 맹수는 배가 고플 때만 짐승을 잡아먹는데 하이에나라는 배가 고프든 안 고프든 상관없이 만나는 동물마다 잡아서 찢어 죽인다. 그런 하이에나에게 동물의 왕국을 잘 다스리라고 하면 그 나라가 잘 되겠는가? 그래서 어린양의 통치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예수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자기의 피로 세운 나라는 예수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나라다. 공산주의 혁명을 이루려면 남을 죽여야 하는데 남의 피를 흘려서 어떻게 평화의 나라를 이루겠는가?
여호와의 종이신 그리스도는 이사야이기도 하고 이스라엘 백성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그 사람, 그 백성을 통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루어진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속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말씀을, 만질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으며 들을 수도 없는 귀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늘에서 오는 말씀, 하늘의 소식, 하늘의 이상, 하늘의 계획, 하늘의 목표를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듣게 하심을 감사하며 만지게 하심을 감사하고 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땅은 캄캄하고 어두울지라도 하늘이 밝은 것을 보게 해 주시고 구름이 끼어 있을지라도 하늘이 맑은 것을 볼 수 있는 선지자의 눈을 주시고 선지자의 마음을 주시고 선지자의 귀를 주시기를 원합니다. 파도가 흉흉하며 폭풍이 올지라도 그 너머에 당신의 창조의 목표가 있고 당신의 경륜의 목표가 있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형편이 어떠할지라도 당신의 계획은 다르다는 것을,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다고 하신 이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분이며 영원한 목표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이 영원한 사실 앞에 우리는 밤의 한 경점과 같이 지나갈 아무것도 아닌 자들입니다. 우리의 계획도 우리의 생각도 우리의 소원도 다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당신의 것만 영원히 남아 있고 영영히 설 것입니다. 주의 나라가 영원히 설 것에 대한 소망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당신만이 우리의 기둥이며 우리가 붙잡아야 할 동아줄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며 이 믿음이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