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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영화 <안녕,미누>
''나 이제 죽어도 좋아.''
미누(네팔 이름 미노드 목탄)가 말했다ㆍ
그가 결성했던 다국적 밴드'스탑 크랙다운'맴버들과 9년만에 재회해 공연을 마쳤을 때~
2018년 DMZ 다큐영화제 때
한시적으로 3일간 입국허가가 되었을 때
'목포의 눈물'을 부르고 난 뒤에도
미누는 ''나 이제 죽어도 좋아.'' 라고 했다ㆍ
그런데,말이 씨가 되었는지 그는 안타깝게도 네팔로 돌아간 뒤 한 달만에 심장마비로 숨졌다ㆍ
미누는 1992년 21살 나이로 한국에 와서 18년간 일하다 2009년 강제 추방 되었다ㆍ
처음 식당에서 일할 때 동료인 아주머니들이 참 살뜰하게 대해 줬다고 했다ㆍ
아주머니의 애창곡 '목포의 눈물'도 가르쳐 주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손도 잡아 주면서 했던 말이 참 따뜻했다고 한다ㆍ
''미누야,아프지마ㆍ친구들 만나지마ㆍ그래야 돈 모을 수 있어ㆍ아프면 나한테 말해''
미누는 창신동 달동네에서 연탄불 피우며 집에서 밥해 먹고,
식당에서 봉제 공장에서 일했다ㆍ
2003년 정부가 고용허가제 도입을 앞두고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대대적으로 단속하자 이들은
농성과 시위로 맞섰다ㆍ
임금체불과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 학대 받던 외국인 노동자의 자살도 속출했다ㆍ
이때 미누와 동료들이 농성장에서 밴드를 결성했다ㆍ
단속을 멈추라는 뜻의 '스탑 크랙다운'이다ㆍ
미누는 노래할 때 손가락이 잘린 빨간 목장갑을 끼고 노래 불렀다ㆍ
목장갑은 한국인이 외면하는 일을 도맡아 우리 나라 경제의 바닥부터 지탱하는 이주노동자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ㆍ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기계에 잘려나간 피묻은 손과 아픔을 공감하겠다는 의지였다ㆍ
다큐영화 <안녕,미누>에서 미누는 한국을 그리워하며 한국행을 준비하는 예비 이주 노동자를
교육하고,공정무역 사회적 기업 트립티의 네팔 대표를 맡아 일하고 있었다ㆍ
네팔 여성들의 소득증대를 위해 옥수수 껍질에 천연 염료를 물들여 민속인형을 만들어 파는
일을 지원했다ㆍ
미누는 2017년쯤 서울국제 핸드메이드 페어에 네팔 대표로 비자를 받아 들뜬 마음으로
인천공항에 내렸지만 법무부출입관리사무소는 입국을 거절했다ㆍ
법에는 강제출국자라도 5년이 넘으면 입국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미누만은 10년이 넘어야 입국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ㆍ
8년만에 다시 한국에 온다는 설렘에 신발 사고,가방 사고,염색까지 했던 그는
큰 실망을 안고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ㆍ
그런데,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ㆍ
지혜원 감독이 만든 영화 <안녕,미누>가 DMZ 국제다큐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면서
3일간 영화제가 열리는 지역에서만 머무는 조건으로 입국 허가가 났다ㆍ
미누는 한국에서 첫 끼니로 비빔냉면을 앞에 놓고 울었고
행사가 끝난 뒤풀이 장인 노래방에 가서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ㆍ
한국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을 보낸 미누는 이주노동자로,문화활동가로 살았다ㆍ18년간 네팔에 가지 못 했고,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가지 못 했다ㆍ
영화 속에서 미누는 참 많이 웃었다ㆍ
그러나 그 웃음 뒤에는 회한과 슬픔도 느껴졌다ㆍ
허망하게 떠난 미누의 장례 때는 미누가 그렇게 그리워하고 좋아했던 대한민국 태극기가
그의 주검을 덮고 있었다ㆍ
먹먹해지는 장면이었다ㆍ
미누를 보며 32년전 만났던 미얀마에서 온 이주노동자가 생각났다ㆍ
1989년 5월,나는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사거리 이면 도로 뒤 주택에 세들어 살았다ㆍ
꼭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그런 저택의 반지하 방이었다ㆍ
천장 아래 붙은 창문으로 주인집의 초록 잔디와 붉은 연산홍이 보였다ㆍ
출산 한 지 한 달 만에 서울로 이사한 나는 갓 태어난 아기를 혼자 키우는 게 버거워
이모네집 근처에 비싼 대치동에 방을 얻었던 것이다ㆍ
여의도에 직장이 있던 남편은 출퇴근 시간에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ㆍ
답답한 지하실 방이 싫어 아기를 유모차에 태워 밖에 나와 있는 날이 많았다ㆍ
그러다 옆집 다세대 주택 지하에 사는 동남아지역에서 온 외국인과 자주 눈이 마주쳤다ㆍ
선해 보이는 눈빛 때문에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ㆍ
그리고 누추한 우리 집에 초대했다ㆍ
영국식 영어를 하는 그들과 간단한 단어와 문장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ㆍ
그들은 미얀마에서 왔다고 했다ㆍ
지하 악세사리공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한 달 받는 봉급이 10만원이라고 했다ㆍ
당시 공기업에 다니던 남편의 봉급은 100만원 정도였다ㆍ
우리에게 한 달 봉급이 얼마냐고 물어서 100만원이라고 했더니
너무 놀라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ㆍ
그들이 놀란 것은 월급이 자신보다 많다는 것,
또 그에 비해 형편없는 반지하방에 사는 우리가 많은 봉급을 받는 게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ㆍ
서울은 지금도 집세가 비싸지만 32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ㆍ
방 2칸짜리 지하방이라도 전세가 1500만원이었으니까ㆍ
그 돈이면 강릉에서는 작은 아파트를 사고도 남는 돈이었다ㆍ
아무튼 그들은 우리 집에 자주 놀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갔다ㆍ
그러나 그런 만남은 오래가지 못 했다ㆍ
그들을 고용한 한국인 사장이 우리 집에 가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다ㆍ
안타깝게도 그 후 그들을 집 밖에서도 자주 볼 수 없었다ㆍ
그들은 미누처럼 88올림픽이 끝나고 정부의 묵인 하에 우리나라에서 일하게된 이주노동자 1세다ㆍ한국에 올 때 꾸었던 꿈을 이루었는지,
아니면 몸과 마음을 다쳐 상처입고 고국으로 돌아갔는지 알 수 없다ㆍ
예전에 비해 이주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ㆍ
미누를 통해 이주노동자의 노동을 일회용 부품처럼 소비해온 정책을 뒤돌아 보았다ㆍ
분명 우리 경제에 기여한 바가 크지만 우리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없었던 그들이다ㆍ
이주노동자는 한국과 그들의 나라를 연결하는 귀한 자원이다ㆍ
미누가 그 점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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