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세이] 천진암성지 디딤길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40407500064
입력일 2024-04-07 수정일 2024-04-09 발행일 2024-04-14 제 3388호 3면
서학에 관심을 가진 지식인들 중 18세기 후반에 성호학파 녹암 권철신이 이끄는 신진 학자들이 주어사와 천진암에서 강학모임을 가졌고, 이 모임은 조선에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자 한국 천주교회 설립을 위한 선행적 바탕이 됐다.
지난해 부활 4주간 토요일이었던 2023년 5월 6일 디딤길의 예정된 순례는 7-1코스로, 천진암 성지에서 앵자봉(667m) 정상을 넘어 산북성당에 도착해 마무리되는 코스였다. 순례 전날부터 이미 많은 비가 내렸고 순례 당일 주말 아침에도 강풍과 함께 쏟아지는 빗줄기 소리는 요란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망설임 없이 순례길에 나섰다.
순례는 천진암성지 입구에 있는 광암성당에서 12시 미사 봉헌으로 시작됐다. 미사 시작 전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기에 창립선조 5위 묘역(이벽,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정약종)에 먼저 올랐다. 1979년에 처음 이벽의 묘가 이장되었고, 1981년에는 정약종,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의 묘가 이장되면서 1982년 창립선조 5위 묘비가 건립된 곳이다. 5위 묘역에 주모경을 바친 후 세계평화의 성모상 앞에서 환희의 신비 1단부터 5단까지 바쳤다.
묵주기도 후 천진암성지 입구에 있는 광암성당으로 다시 내려와 12시 미사 봉헌 후 시작기도와 함께 본격적인 순례가 시작됐다.
가르멜 수녀원을 지나면서 천진암 계곡에 다다랐다. 전날과 당일 쏟아진 폭우로 계곡마다 흘러넘치는 우렁찬 물줄기 소리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5월의 싱그러움을 가득 담은 초록의 계절을 느끼며 땀방울을 식혔다.
20여 년 전 직장 산악회에서 등산을 목적으로 걸었던 앵자봉이었다. 하산 길에 멧돼지를 만나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던 그 길을, 우리는 우비를 입었고 한 손에는 우산을 받쳐 들고 등에는 배낭을 메고 앵자봉 정상을 향해 가파른 산길을 올랐다. 계속 퍼붓는 비였지만 우리의 발걸음 기도를 멈추게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을 뿐이었다. 낙엽이 촉촉이 젖어 오히려 말랐을 때보다 겸손되이 납작 엎드려 걷기에는 훨씬 나았다.
드디어 앵자봉 정상 해발 667m에 도착했고 오월의 연분홍 새색시 산철쭉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줬다. 마치 이벽의 열정이 한밤중에 주어사에서 천진암으로 향하였듯이 우리의 순례도 주님께서 열정으로 인도하시는 게 아닐까? “곧 하늘에서 비와 열매를 맺는 절기를 내려 주시고 여러분을 양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셨습니다.”(사도행전 14,17)
최종 도착지 산북성당까지 우중 순례였으나 많은 분들의 기도 덕분에 무사하게 잘 마쳤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피정의 순례길을 우리는 늘 기다린다.
글 _ 박수희 아녜스(수원교구 디딤길팀 책임봉사자)
==================================================
[신앙에세이] 디딤길 도보순례와의 만남 / 박수희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40325500028
입력일 2024-03-25 수정일 2024-03-28 발행일 2024-03-31 제 3386호 3면
코로나19가 시작되고 의과대학병원 교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평소 자주 이용하던 병원 근처 식당에 가면 병원직원이라는 이유로 식당에 들어오는 것을 거절당하기도 했고, 직원 자녀들이 초등학생인 경우 반 친구들로부터 부모가 병원에 근무한다고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나는 성당에서 미사를 드려도 될까?”를 스스로에게 묻게 됐다. 혹시 나로 인해 성당에 좋지 않은 바이러스가 전파되면 어떻게 하지? 그러면서 2년여 동안 본당 미사를 쉬게 됐고, 이때부터 주말마다 가족과 차량으로 수원교구 17곳 성지를 순례하기 시작했다. 17곳 성지순례를 차량으로 완주할 때쯤 나는 정년퇴직을 맞이하게 됐고, 그렇게 38년 동안 근무했던 직장을 마무리하고, 다시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게 됐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주보에 안내된 ‘디딤길 도보순례’에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첫 번째 도보순례일인 2022년 4월 16일에 예정된 코스는 은이성지에서 고초골공소까지였다. 막상 순례가 시작되고 보니 만만치 않은 길이었고, 공사 중인 구간이 있어서 다른 곳으로 우회하여 4시간30분 정도 걸려서야 순례가 마무리됐다. 귀가 후 온몸이 아프고 너무 힘들었다. 다시는 도보순례를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스멀스멀 순례의 시간들이 다시 내 마음속에 맴돌기 시작했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찬양하며 걷는 신앙의 길! 싱그러운 봄날엔 아름답다, 아름답다 하지만 마음까지 빼앗아 가도록 아름다운 순례길. 뜨거운 여름날에도 우리는 자신을 믿으며 신앙의 힘으로 주님만을 찬미하며 걷는 길 위에서 무엇이든 난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그 속에 매 순간 익히고 배우고 성숙할 수 있음을 찬미한다.
하늘이 파랗고 바람 솔솔 부는 가을날은 잘 무르익은 열매의 시간과 같다. 기쁨의 순간을 쌓아가며 벅찬 행복과 소원 꽃을 피우며, 우리는 이 순례길이 행복한 보람이기를 서로의 부지런한 열정을 응원한다.
장시간 걸어도 믿음의 찬양과, 자연과 같이 기도하는 신앙의 벗님들이 계시기에 행복한 길이다. 순례를 시작하기 전 성지에서 드리는 미사는 순례자들의 영혼까지 적시어 주시며 천천히 깊이 취하게 된다.
나 혼자서는 불가능하지만 함께이기에 가능한 순례길, 함께이기에 정이 듬뿍 있었고 마음도 편안했고 외롭지 않았던 순례길, 걷고 보고 느끼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기쁨의 길 위에서 순례자들의 삶은 아름다운 진실이라고 오늘도 두 손 모아 찬미를 바친다. 아멘.
글 _ 박수희 아녜스(교구 디딤길 도보순례팀 책임봉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