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마가복음 12강
말씀/ 마가복음 8:1-26
요절/ 마가복음 8:15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라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지난 시간 예수님은 두로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두로에서 시돈을 거쳐 갈릴리 바다 동편 데가볼리, 이방인 지역으로 내려오셨습니다. 8장 1절을 보십시오. 큰 무리가 몰려왔는데,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1) 6장에서 오천 명이 몰려왔을 때에는 제자들이 먼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곳은 빈들이고 날도 저물어가는데, 무리들을 어떻게 하지요? 빨리 마을로 돌려보내 무엇을 사먹게 하시지요. 더이상 굶겼다가 무슨 일 벌어질까 걱정입니다.”(6:36) 그랬던 제자들이었는데, 여기에서는 아무런 문제 제기를 하지 않습니다. 사흘 동안이나 함께 했는데도 말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문제제기를 하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이 썰렁했습니다.(4) “우리가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일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떤 학자들은 이방인 지역이라는 환경에서 이유를 찾았습니다. “예수님, 우리가 이방인들까지 챙겨야 합니까!”, 그런 심정이었다는 것입니다. 나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대상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혹은 자신의 절박한 현실 문제이든, 하늘로부터 양식이 내려오는 일을 기대하는 것은 때마다 믿음을 필요로 한다는 데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만날 때마다, 물이 떨어지면, 고기가 떨어지면, 울퉁불퉁 험한 길을 만나면 두려워 떨고 원망하고 불신에 갇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습니다. “주님, 얼마 전에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셨듯이, 이번에도 사천명을 먹이실 것을 믿습니다”, 그렇게 연결시키지 못했습니다. ‘장소가 다르다, 사람도 다르고 숫자도 다르고 떡 개수가 다르다’, 그러므로 과거의 체험과 지금 상황은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체를 믿지 못하면 문제를 만날 때마다 매번 새롭고 매번 두렵고 매번 한계에 갇혀 버리게 됩니다.
5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예수님은 항상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십니다. 오병이어 사건 때보다 떡이 무려 두 개나 많았습니다. 사람 숫자는 오천 명에서 사천 명으로 줄었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한계에 갇혀 있는데, 예수님은 일하십니다.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먹게 하십니다.(6)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었습니다.(7) 이것도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게 하십니다. 8,9절을 보십시오. 그렇게 칠병이어로 무리들을 배불리 먹이고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나 되었습니다.(8) 그때 먹은 사람이 사천명이었습니다.(9) 예수님은 유대인만을 먹이는 유대인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먹이시는 만민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생명을 줄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이방 세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생명을 줄 수 있는 분이라는 표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만 잘 먹고 살게 하려는 이스라엘 민족신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온 세상 만민에게 생명을 주고 영생의 길을 열어주고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만민의 그리스도로 오신 것입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이스라엘 문제에 갇혀 있는 눈을 들어 온 세상 만민구원역사를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먹이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서편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습니다.(10)
그러나 11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힐난하며 시험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보시오!” 아니,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을 보여야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으로 인정할 것입니까! ‘칠병이어의 기적’은 하늘의 표적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들이 말하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란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환호할 수 있는 표적, 곧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표적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수백 년 동안 바벨론과 헬라와 로마로 상징하는 강대국의 수탈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다 몰라서 그렇지, 얼마나 끔찍한 상처와 고통을 겪었겠습니까! 우크라이나 혹은 팔레스틴 뉴스는 약소국의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조금이나마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36년 일제시대의 고통이 아직까지 해소되지 않아 옆 나라와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고통을 지긋지긋하게 겪으면서 강대국의 압제를 물리칠 수 있는 나라를 세울 그리스도를 열망했습니다. 그런 그리스도가 와야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며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칠병이어로 수많은 이방인들을 먹인 기적?, 그것은 이스라엘의 번영과 아무 상관없는 일입니다. 사회 하류층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 이스라엘 번영에 도움이 안되는 자들을 고친 것입니다. 그런 표적 말고 강대한 이스라엘을 세울 수 있다는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능력 없는 분이 아닙니다.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그런 기적을 보여주고 나면 바리새인들의 자세가 조금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내가 지금까지 보여준 표적은 무엇이냐!’, 논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십니다.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마음 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탄식은 말이 통하지 않는 대상을 만났을 때, 답답하고 화가 났을 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표적 자체를 보여주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지금까지 많은 표적을 행하셨으면서도, 앞으로도 행하실 것이면서도, 이제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표적을 구하는 목적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적을 허용하는 것은 현실문제 해결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보이는 세계에 매여 있지 말고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메시지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것도 그러합니다. 먹는 걱정 없이 살게 하겠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알도록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엎드러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나안 약속의 땅을 잃어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떡 문제 해결, 현실문제 해결에 모든 포커스를 두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소망을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입으로는 하늘의 표적을 말하지만, 실상 그들의 마음은 이 땅의 문제해결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흔히 바리새인의 누룩은 외식, 헤롯의 누룩은 정욕으로 적용합니다. 분명한 적용이어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외식과 정욕을 파고 들어가 보면, 그 뿌리는 이 땅에서의 영광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외식하는 이유는 존경과 인정을 받기 위해서이며, 정신적 지도자로서 맨파워를 갖기 위해서입니다. 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인 것은 ‘나에게 반대하면 죽는다’는 두려움을 심어 왕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바리새인과 헤롯은 정반대 극단에 서 있는 부류처럼 보이지만, 자기를 높이려는 욕망을 좇아 움직인다는 점에서 동일한 부류입니다. 예수님은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누룩은 보이지 않게 파고들어 본래 모습과 성질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와 같이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에 오염되기 시작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생활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게 됩니다. 병든 자,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고 섬기는 예수님의 사역을 초라하게 보게 만들고, ‘누가 크냐, 누가 예수님 좌우편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인가’라는 자기 영광을 위한 싸움에 몰입하게 합니다. 세상 모든 일들이 돈 문제, 파워 문제로 해석하게 만듭니다.
16절을 보면, 정말 그러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떡이 없는 문제와 연결시켜 해석합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은 저렇게 잘나가는데, 우리에게는 떡이 하나밖에 없다고 화나신거야, 우리가 떡을 많이 챙겨왔다면, 예수님이 저리 예민하게 말씀하지 않았을꺼야”, 예수님은 제자들의 수군거림을 아시고 사정없이 책망하십니다.(17) 17-20절에는 연속된 예수님의 질책이 나옵니다. 본문이 문어체로 쓰여졌는데, 구어체로 쉽게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내가 지금 떡 쪼가리 몇 개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머리가 그렇게 안돌아가? 둔해?(17) 눈이 삐였냐? 귀가 먹었냐? 치매 걸린 거 아니야?(18) 안드레, 떡 다섯 개로 오천명 먹일 때 몇 바구니 남았지? 그래 열두 바구니!(19) 떡 일곱 개로 사천명 떼어줄 때에 몇 광주리 남았어? 그래 일곱바구니!(20)” 예수님이 이리 화내신 적이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본적으로 제자 편입니다. 안식일 전통을 어길 때나 손을 씻지 않아 바리새인들의 공격거리가 되었을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심지어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도망친 베드로를 심방했을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숯불을 피우고 바비큐 생선을 구우며 마음을 녹였습니다. 그런 분이 사정없이 책망하십니다. 누룩에 젖어있으면 아무리 많은 표적을 보고 아무리 신령한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는 것을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누룩이 들어온 것이 심각한 문제임을 인식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해야 말씀이 깨달아지고 예수님이 주시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우리는 삼가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 우리시대에 적용하면, 저는 자본주의 누룩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의 최고 가치는 자본, 다른 말로 실리입니다. 2016년 트럼프는 45대 대통령 수락 연설문에서 노골적으로 “아메리카 퍼스트”라는 말을 강조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 ‘미국의 실리’가 앞선다는 것입니다. 그전까지의 미국은 세계 평화를 앞세웠는데, 이제부터는 아메리카 실리를 앞세운다는 그런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전에도 앞세웠지만 이제부터는 눈치 보지 않고 노골적으로 앞세우겠다는 선언입니다. 저는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쳐갔던 기억이 납니다. ‘세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저렇게 드러내놓고 뻔뻔하게 말하고 있으니, 온 세상이 뻔뻔해지겠구나!’ 뻔뻔 누룩이 세상 곳곳에 퍼지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세계 각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보면, 그런 우려들이 결코 기우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모습, 중국이 대만에 대놓고 위협하는 모습,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사과 없이 군사대국화의 길을 선언하는 모습들이 그러합니다. 얼마전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유럽퍼스트'라는 슬로건을 제시했습니다. 최근 이스라엘이 팔레스틴 가자 지역을 무자비하게 폭격하는 모습들도 그러합니다. 세상의 여론은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오직 우리의 유익을 좇겠다는 뻔뻔 바이러스가 퍼져간 모습입니다. 최근 우리 대통령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봅니다. 원칙과 질서, 관용과 도덕..., 그런 것들은 개나 줘버리고 내 식대로 가겠다, 우리만 좋으면 된다‘ 뻔뻔 누룩입니다.
문제는 정치인들로 끝나지 아니하고 우리안에 파고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리를 좇는 모습이 뻔뻔하게 해석되기보다 힘 있고 지혜로운 모습 심지어 솔직한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는 거기에 가치를 찾기보다 ‘그래서 뭐가 내게 유익이 되었느냐’에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신앙 양심에 따라, 부르심을 좇아 사는 것보다 지금 좋은 것, 지금 편한 것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저 같은 스텝목자에게 적용한다면, 말씀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하는 목자로 사는 거기에 가치를 두기보다 ‘그래서 몇 명대 역사를 이루었느냐’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영적 가치, 하나님앞에서의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지금 유익하고 지금 필요한 것에 올인하는 것입니다. 10여년전 수억원을 대출 받아 집을 샀을 때입니다. 돈의 위력이 실감나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통장에 100만원 이상의 현금 잔고를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매월 카드 결제일이 보릿고개처럼 보내고 있었습니다. 돈의 위력을 실감케 하는 현실은 제게 있던 가치들을 강하게 뒤흔들었습니다. 두가지 해석이 동시에 찾아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바보처럼 대책 없이 살았구나!”라는 해석과 “지금까지 내가 세상 염려에 휘둘리지 않고 용기있게 살았구나”라는 해석입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하게 살고 있지만, 신앙의 연수도 더 많이 쌓였지만, 여전히 두가지 해석은 끊임없이 찾아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말씀대로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당장의 유익을 따라 자신과 하나님의 나라를 평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삶에 이루신 역사를 감사함을 넘치게 하고 그 믿음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우리안에 이루신 은혜의 역사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교만과 허무와 정욕의 죄로부터 구원해주셨습니다. 돈과 인정과 헛된 영광을 좇아 살다가 아무 열매 없이 사라질 인생이었는데, 말씀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세계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최근 상담학을 공부한 어떤 분이 제 성향을 분석하기를, 세상과 분리되어 동굴에 들어가 나 홀로 사는 것을 좋아하는 ‘분열성 인격장애 스타일’이라고 했습니다. 잠깐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곰곰히 자신을 돌아보니 그런 분석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한걸음 더 깊이 생각해보니, 그런 사람이 자기 세계에서 나와 말씀을 증거하고 양들을 돕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길을 가고 있다니..., 예수님이 제 인생가운데 드러내신 하늘의 표적이었습니다. 이는 저 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님이 이루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꺼내기 시작하면 예배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많을 것입니다. 다만 세상의 누룩으로 말미암아 잊혀지고 헷갈리고 놓쳐버린 것 뿐입니다.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의 역사를 지키는 것, 그것이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가운데 이루신 그 역사를 소중히 여기고 지키고 그 믿음 위에 굳건히 서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2-25절에서는 특이한 고침의 장면이 나옵니다. 벳새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려와서 고쳐달라고 했습니다.(22) 예수님은 맹인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23) 그러더니 그 눈에 침을 뱉고 그에게 안수하며 물으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그러자 맹인이 대답합니다. 24절입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입니다” 보기는 보는 완전하게 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2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님이 한방에 고치지 않고 단계적으로 고치신 모습이 특이합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한방이었습니다. 말씀만으로 고치기도 하고 안수로 고치기도 하고 비대면 원격으로 고치기도 하시는데, 대부분 한방으로 끝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2번으로 나누어서 고치셨습니다. 헛소리하는 제자들을 돕다보니 기가 빠지신 것일까요? 예수님이 한번으로 해결하지 못하실 때가 있다니..., 인간이 얼마나 고치기 어려운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아울러 희망의 메시지도 됩니다. ‘지금 제대로 보지 못하는 모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단계를 거치면서 밝히 보게 될 것이다!’, 그런 메시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았고 칠병이어의 기적을 보았는데도 떡 개수에 마음이 매여있는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현재의 모습만 생각하면, 부르심 취소하고 다른 제자들을 뽑아야할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심하게 책망하신 후에 다시 안고 가십니다.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경고를 듣고도 세 번이나 부인했는데도 다시 찾아오십니다. 부활을 목격하고도 물고기 잡으러 갔는데, 다시 찾아오셔서 숯불을 피우고 떡을 굽고 고기를 구우며 도와주십니다. 지금 제대로 보지 못했던 제자들이 그렇게 단계를 거쳐 사도로 빚어지고 만민 구원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기록해 놓은 마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붙잡혀 가시던 밤, 마가는 벗은 몸으로 도망쳤습니다. 수치를 모르고 도망치던 사람이었습니다. 1차 전도여행 때, 갑자기 힘든 마음으로 ‘come back home’하여 바울과 바나바을 싸우게 만들었습니다. 그랬던 사람이 베드로를 뒤어어 이방인 교회의 감독이 되고 박해의 시대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부족한 사람이 단계를 거치며 눈을 뜨며 한 단계 성장하고 다음 단계를 넘어갑니다. 그렇게 한 단계, 한 단계 거치면서 점점 눈이 떠지기 시작합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세계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보지 못한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보잘 것 없다며 정죄하거나 하찮게 여길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은 ‘어느 세월에! 급하다 급해!’이지만, 우리 주님은 결코 급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25년의 세월을 두고 도우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때를 따라 역사하시며 단계별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염려보다 기도, 낙심보다 희망으로 보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때가 차기까지 인내하는 자들이 되어야 겠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인생속에서 반드시 당신의 손길을 드러내십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