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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신앙생활(2253.2024.6.9)
신28:1-6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의이름으로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목사님도 사랑--옆사람과 인사--사랑합니다.
6월4일 경북 4개지방 목회 부부 체육대회와 6월6일 경북북지방 한마음 체육대회를 은혜중에 잘 마쳤습니다. 저도 배구를 좋아해서 열심히 배구도 하며 친교도 나누었습니다. 지방 한마음 체육대회 참가하기 위해서 여선교회 성도여러분들이 한가지씩 맡아서 잘 준비 해 주셔서 잘먹고 잘 놀고, 은혜중에 마음껏 즐기고 올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는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서 즐거운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체육대회를 준비 해 주시고 함께 하신 여러분에게 감사드리고 은혜와 축복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공평하게 행복을 추구해 나갈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도 이 행복을 얻으려고 열심히 땀흘려 일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특히 사람은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 인간의 행복도 자연히 따라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 인간은 행복해지는 것입니까?
경제적인 풍요가 인간에게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는 구체적인 예는 이혼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혼이 급증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경제적인 풍요 때문입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살게 되면서 거기에 덩달아 이혼율은 급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이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는 구체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IMF때 한 남자가 죽을려고 산으로 올라갔데요. 죽으려는 순간 요술램프가 나타나서 마지막으로 한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자는 고민에 빠졌답니다. 무엇을 말하면 좋을까하고...다시 재기를 하려면 비상한 머리를 만들어 달라고 할까, 아님 돈을 많이 달라고 할까, 아님 예쁜 여자를 달라고 할까 고민고민하고 있는데 요술램프가이 재촉을 하더래요. 너같은 사람이 많아서 요즘 바쁘니까 빨리 말하라고 그래서 남자는 다 같고 싶은 나머지 아주 빠른 어투로 ‘머리,돈,여자’하고 아주빨리 말해대요 그랬더니 갑자기 하늘에서 진짜 머리돈 여자가 하나 뚝 떨어지더래요. 뭔 말인지 알죠. 머리에 꽃 꽂은 여자말입니다.
그러면 학벌이 좋고 많은 학문을 습득하면 그것 때문에 인간이 행복해 지는 것일까요? 반드시 많은 학문을 습득한다고 해서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바울은 빌3:7절‘자신은 이제까지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치 배설물을 버리는 것처럼 자신의 머리속에 있는 것들을 모두 버린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이 아는 가장 고상한 지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상의 지식을 통해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면 그는 결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많은 학문들을 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세상 적인 조건으로는 궁극적인 행복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영과 몸을 지닌 유기체이기 때문에 육체적인 것이 해결되었다고 해서 거기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일용할 양식과 함께 영혼을 위한 생명의 산 떡을 먹어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4:11-13절‘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가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경제적인 조건에 의해서 움직이는 바울의 모습이 아닙니다. 자신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주어진 조건에 의해서 제약을 당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주어진 조건을 초월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드리는 바울의 신앙적인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행복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고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 교회생활을 생각합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하고, 공동체에 참석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교회생활에 국한되어서는 안됩니다. 나의 생활 전체가 신앙생활 속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만 예수님이 드러나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모든 생활의 영역에서 예수님의 정신이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정신이 드러나는 곳에서 인간은 행복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면 인간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영역이 어디입니까?
오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우리 인생에 새로운 해답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막히고 얽혔던 것들이 열려지고 풀려지는 형통한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양---‘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뵐 땐 나는 만족하였네 저기 빛나는 태양을 보라 또 저기 서있는 산을 보아라 천지 지으신 우리 여호와 나를 사랑하시니 나의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나는 만족하겠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주님의 품안에서 만족한 삶, 풍족한 삶, 행복한 삶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고개가 끄덕여지고, 큰 소리로 아멘이 나오고, 믿어집니까? 믿어지는 것이 은혜요, 복입니다. 알고 믿는 것은 과학이고, 믿고 아는 것이 종교입니다. 믿어지는 것이 가장 큰 복이고, 믿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불행입니다. 말씀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믿어지지 아니하는 곳에는 능력도, 역사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말씀은 생명이기에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립니다. 말씀의 사역자가 살아나면 모든게 살아납니다. 교회도 살고, 가정도 살고, 일터가 살아납니다. 말씀이 모든것을 변화시킵니다. 이런 체험과 간증의 축복이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인간이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은 가정입니다.
인간이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은 가정이므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교회생활이 즐거우면 가정생활도 자연히 즐거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영혼이 잘되는 것 같이 범사가 잘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샘물이 하늘에서 교회로, 교회에서 가정으로, 가정에서 사회로 흘러들어가는 것입니다. 가정이 행복해 지려면 가족이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간의 세대차이를 극복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이해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 사랑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용서가 없는 가정은 삭막한 사막과 같습니다. 그곳에 오아시스를 만들어야 하고 그래서 온 가족이 그 샘물을 마시며 함께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의지할 데 없을 때에는 가족들이 의지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세상 살 맛이 나는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물이 있는 곳에 동물들이 모여들고 나무들도 자라는 것을 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의 가정은 샘과 같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부부간의 사랑과 이해와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돕는 배필입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붙들어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둘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주도권 다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면 주도권이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랑하면 하나가 되지 못하던 것들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모시고 사는 가정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에 따라 모든 가족들이 순종하면 혹 인간적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경우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온 가족이 하나로 뭉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귀중히 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가정은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올해에는 아직 혼자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이 둘이 함께 나오는 역사가 하루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의 가정이 점점 천국으로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무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은 자기의 어머니 한나가 기도하는 중에 가진 아들입니다. 자식이 없음을 한탄하던 한나가 하나님의 장막에서 기도하는 중에 아들을 잉태했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얼마나 소중했겠습니까? 그래서 한나는 자기의 아들 사무엘을 어릴 때부터 신앙 가운데 교육했습니다. 이 신앙이 사무엘의 삶의 방향을 결정했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분명히 자기 어머니 한나의 신앙적인 가르침 속에서 성장했을 것이고 가정에서의 신앙적인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자라났을 것입니다. 이러한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이 결국은 사무엘의 선지자로서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신약성서 가운데에는 어릴 때부터 신앙 가운데에서 성장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디모데 입니다. 디모데는 자기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었고 그리고 자기 어머니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어릴 때의 신앙교육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합니다. 어머니가 유대인이었으니 디모데는 어릴 때부터 가정의 신앙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사람입니다. 딤후1:5절에는 바로 디모데의 신앙은 자기 어머니와 할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습니다. ‘네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 확신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디모데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모습을 보면 디모데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신앙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디모데가 얼마나 가정의 신앙적인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는 이런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바울과 함께 주어진 선교의 사명을 잘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과연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가정입니까? 신앙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가정을 가꾸어가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우리는 가정공동체다. ‘이 가정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하는 생각이 듭니까? 만약에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이면서도 내 가정 속에서 행복감을 찾을 수 없다면 그 신앙생활은 무언가 잘못된 것일 겁니다. 교회만 다녀오면 믿지 않는 남편이 더욱 미운 생각이 듭니다. 교회만 다녀오면 자신의 가정이 신앙을 가진 가정이 되지 못함을 한탄하게 됩니까? 그런 생각이 든다면 분명히 그 신앙생활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아내나 남편 더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더 그를 위해서 기도하는 마음이 생겨야합니다. 내 아내가 교회에 나가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남편의 마음에도 행복감이 더 넘쳐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만 다녀오면 믿지 않는 남편을 향해서 ‘저 사탄 같은 남편, 자 마귀같은 남편’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남편은 그 아내가 살아있는 한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자고 맨날 이야기 해 보세요.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주님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교회같다 올동안 집지키라고 하지 마시고 함께 가자고 해야합니다.
가정의 회복이 필요할 때입니다. 이혼율은 높아져가고, 공부하는 아이들에게는 가정이 잠을 자고 나가는 하숙집 정도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가정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 가정은 분명히 병들은 가정일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행복은 가정에서 먼저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생활의 행복함을 회복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은 무언가 달라도 달라야 합니다. 표정이 다르고 태도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달라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정 속에서 느끼는 행복감이 달라야 합니다. 물질적으로는 부족해도 신앙의 영성은 차고도 넘치는 가정을 이루어 갈 때 우리의 가정은 행복해 질 것입니다.
2.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 교회생활이 행복해야 합니다.
지난 5월31일 진보감리교회 리모델링 감사예배에 다녀오신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교회를 폐지하려고 하다가 지키겠다고 했는데 너무 방치가 되어서 아름답게 리모델링 했는데 그대 봉사한 평신도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공로패 받기를 부끄러워 하며 장로는 돈벌어서 교회를 위하여 쓴다고 하면서 목사님들은 목숨걸고 목회하시라고 하는 말이 귓가에 들려옵니다. 리모델링 하기전에 보셨던 분들은 달라짐 교회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궁굼합니다. 너무 아름답게 바뀌었습니다.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서 교회생활이 행복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고 내가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건물도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생활하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그릇보다 중요한 것은 그 그릇안에 있는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한 가정과 같습니다.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은 형제간에 서로 우애하고 부모와 자녀들이 다같이 웃는 얼굴도 함께 생활하는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상주감리교회가 아름다워지려면 온 성도들이 서로 웃는 얼굴로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웃는 얼굴에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고 그러한 사람은 얼굴만 쳐다보아도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는 온 교우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교회가 되도록 연합을 잘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느끼지 못했던 따뜻한 사랑이 교회에 오면 느껴지고 울적했던 마음도 교회에 오면 편안해지고 위로를 받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편안한 마음으로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성령안에서 더욱 성숙한 신앙으로 거듭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오면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무슨 일이든지 걱정이 되지 아니하고 서로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매주일 주님앞에 나오는 것이 마치 잔치를 하러 가는것 같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기쁘고 즐거워야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불평과 원망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있으면 그것을 보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우울해 집니다. 서로 이해하고 손을 잡아주고 사랑하면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 행복한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의 동화 중에 새들의 불평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각양각색의 동물들을 만들어 산과 들과 바다로 내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새들은 입이 뾰루퉁하게 튀어 나와 있었습니다. 다른 동물들에게는 튼튼한 다리를 만들어 주면서 왜 우리에게는 이렇게 가느다란 다리를 주십니까? 그리고 양 어깨에 이 날개라고 하는 무거운 짐을 매달아 주시는 것은 또 무슨 이유입니까? 새들은 불평을 쏟아 냈습니다. 창조자 하나님이 빙그레 웃으시면서 새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는 그 양 날개를 활짝 펴 보아라’독수리가 맨 먼저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여겼던 육중한 날개를 활짝 펴서 힘껏 움직여 보았습니다. 그 순간 독수리의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지면서 창공을 날아오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들의 양 어깨에 붙어있는 것은 짐이 아니라 창공을 가르는 날개였던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새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상주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여러분들에게 마11:28-30절‘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고 말씀을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믿음을 가지고 살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 날개를 달아 주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하늘로 올라감과 같은 새로운 힘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하시고 열심히 교회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교회를 통하여 주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면 하나같이 교회마다 문제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지역적인 특성 때문에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온전한 생활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기 때문에 너희들의 몸은 성전과 같다.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한 것처럼 너희들의 몸도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의 몸을 함부로 더러운 곳에 내 맡길 수가 없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파가 4개파가 있었습니다. 골치아픕니다. 교회는 파가 생기면 안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도 하지말고, 그렇게 말하지도 말고, 그렇게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목사님을 중심으로 해서 똘돌 뭉쳐서 교회부흥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또 갈라디아 교회는 신학적인 논쟁으로 인해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던 교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느냐 행위로 구원을 얻느냐하는 논쟁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서 속죄함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또 에베소 교회는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열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말이 많고 모두가 자기 주장만을 할 줄 알지 다른 사람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잘못된 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에베소 교회처럼 교인들이 모두 하나같이 자기주장만 강한 교회는 정말 목회하기가 힘든 교회입니다. 다른 사람의 은사는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비판합니다. 교회 생활에도 질서가 없습니다. 모두가 어른입니다. 헛된 말로 교회가 어수선합니다. 있지도 않을 것을 자기 생각대로 말해놓고 모함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함하면 죽이는 행위입니다. 단순하게 신앙생활 하셔야 합니다. 모함하면 그 책임이 엄청나게 클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저는 이 신약성서의 교회의 모습을 읽으면서 ‘아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초대교회가 교회마다 문제가 있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거울을 볼 수 있도록 해주셨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라고 하는 곳은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다른 생각과 사상과 삶의 모습을 가지고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는 초대교회 처럼 어떨때에는 윤리적인 문제로 어떨때에는 신학적인 논쟁으로 어떨 때에는 인간의 고집스런 주장에 의해서 흔들릴 수밖에는 없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신약성서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잘못된 신앙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교회는 이러한 문제를 뛰어넘어서 참된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 가도록 그 길 안내의 역할을 해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이 행복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도 기도를 하는 것도 말씀을 보는 것도 공동체가 모여서 함께 교제하는 것 속에서도 행복함을 맛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에 짜증이 나서는 안됩니다. 힘들어서도 안됩니다. 신앙생활은 충만해야 합니다. 교회만 들어오면 세상에서 짜증나던 것도 다 풀어져야 합니다. 교회만 들어오면 영혼에 신바람을 느껴서 춤을 추고 싶은 신명이 생겨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만 오면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으로 들떠 있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상주감리교회가 아름다운 행복한 교회생활이 되기 위해서 항상 강조한 것이 혼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무엇을 할 때에는 같이 해야 합니다. 앞으로도 모든 일에 혼자하지 말고 같이하시고 회의에서 되어진대로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일하면서 절대로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평하려면 교회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염병 처럼 퍼지기 때문입니다. 일체 불평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교회 일하세요. 일해놓고 불평하면 목사님 힘듭니다. 말해놓고는 본인도 괴롭습니다.
3.여러분이 생업이 복을 받아 행복한 사회생활을 해야 합니다.
어떤 40대 가장들의 대학 동창들이 송년 모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네 친구는 각자 자신들의 삶에 대해 불만을 털어 놓았습니다. 요즘 속이 상해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 아마 간에 탈이 났을거야. 그러자 기업을 운영하던 친구가 그 말을 맞받았습니다. 회사문을 닫고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야. 이번에는 고등학교 교사인 친구가 하소연했습니다. 요즘엔 학생들을 가르칠 맛아 안 나. 모두 때려 치워야지. 이번에는 의사인 네번째 친구가 한숨을 쉬면서 투덜거렸습니다. 아내에게 실망했어. 아무래도 결혼을 잘못 한것 같아. 그리고 몇년 후 네 친구가 다시 만났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비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습니다. 술을 마신 친구는 간암선고를 받았고 기업인은 파산했습니다. 교사는 파면당했고 아내를 헐뜯던 의사는 이혼했습니다. 인생을 늘 불평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결국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미국에 오스틴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여자 속옷으로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뚱뚱한 여자들의 속옷만을 판매했습니다. 오스틴은 그 뚱뚱한 사람들의 대형 속옷을 뚱보형 이라고 하지 않고 ‘퀸 사이즈’ 라고 했습니다. ‘퀀 사이즈’ 라는 말은 ‘여왕형’ 이라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듣기 좋은 말입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너도 나도 와서 옷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하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신앙은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서 삼위일체적인 신앙생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서만 신앙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크리스챤들이 신앙생활을 사회생활에 까지 연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사회적인 문제에 연관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직장과 삶의 일터 속에서 행복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행복은 나의 신앙생활이 직장 생활로 연결되어질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과 교회와 사회생활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 세개의 공동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랑’이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세대는 부모 자식간에도 점점 사랑이 식어져 가서 서로 인격적인 관계가 되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형제지간에도 사랑이 없는 세대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도 경쟁심리만 남아 있어서 점점 직장생활 자체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이웃 사이에도 예전에는 담도 없이 살았던 관계가 이제는 옆집에서 누가 죽어도 전혀 무관심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욱이 교회공동체가 살아있어야 하는데 교회 공동체도 점점 그 사랑이 식어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전13장의 말씀을 통해서 사랑의 중요성을 말하며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혀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몸소 실천하는 사랑이 중요함을 가르쳤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밑바닥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이 깔려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밑받침될 때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생활에 행복이 찾아들 것입니다. 이제 사랑이 밑받침 되는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서의 신앙생활을 이루시어 신앙인의 행복을 찾으시고 건강한 크리스챤으로 사는 하나님의 축복이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생업이 복을 받아 복된생활이 이루어지도록 사회생활도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에게 허락하시는 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축복의 조건이 1-2절에 있습니다. 축복의 조건을 간단히 세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말씀을 삼가 들으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긍정적으로 듣고, 부정적으로 듣지말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고, 불신앙 또는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지켜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듣고 놓쳐버려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면 행함이 있고 순종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종은 믿음의 고백입니다. 즉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습니다. 순종은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봉사하는 것, 기쁨으로 헌금하는 것, 기쁨으로 전도하는 것, 기쁨으로 충성하는 것, 기쁨으로 생명도 받치는 것이 있어야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5복의 약속이 3-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가정의 복(3절)입니다. 성에서도 복을 받곤 했는데 성에서 받는 복은 집의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비록 가난하면서도 행복한 가정이 많고 부하면서도 불행한 가정이 많습니다. 특히 많은 자녀를 두고서도 가서 몸을 의지할 곳 조차 없는 불행한 노인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잘 산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어서 밥이나 먹고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남보다 더 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복(4절)입니다. 자녀가 있다고 다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녀들 때문에 부모들이 눈물 흘리는 경우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없는 것이 복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있기는 있되 부모에게 근심을 주지 않고 항상 기쁨을 안겨주는 것이 자녀를 가진 자의 복인 것입니다.
재산의 복(4절)입니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새끼들이 죽지 않고 잘 자라서 재산이 점점 불어나는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재산을 누리는 기쁨, 이것이 재산의 복입니다. 재산이 많고서도 그 재산 때문에 정신적으로 불행하고 마음에 근심이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건강의 복(5절)입니다. 광주리와 떡반죽 그룻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지못해 먹었습니다. 살려니 할 수 없이 먹었습니다. 그러나 미국같은 나라 사람들은 음식을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서 먹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면서 먹는 것을 즐깁니다. 우리나라의 식생활도 이젠 살기 위해 먹기보다는 즐기기 위해 먹는 편으로 많이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명예의 복(6절)입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고 햇습니다. 신28:13의 말씀처럼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는 복입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성도여러분은 금년 후반기에 드러와도 나가도, 오나가나 복을 받되 이상의 5가지의 복을 받고 누리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하며 그러기 위해 말씀을 듣고 지키고, 순종하는 성도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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