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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묵상글 ( 사순 제3주간 화요일. - 복을 상속 받으십시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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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복을 상속 받으십시오
우리는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걸맞은 노력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어느 한순간 걸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아무의 도움도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넘어지는 이유를 보면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야고보사도는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야고4,1-2).하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도 탐욕과 어리석음과 성냄이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독이라고 가르칩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화를 내고 다투는 일이 없을 텐데 욕심 때문에 남과는 물론 심지어 형제와도 등지게 되기도 합니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서로를 힘들게 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담을 높이 쌓게 됩니다.
얼마 전 한 어르신이 자녀들에게 유언으로 유산을 분배하고 세상을 뜨셨는데 자녀들에게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자녀들은 모두 내로라할 만큼 큰 재산을 가진, 그야말로 살만한 사람들이었는데 서로 서운함을 가지고 등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재산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재산은 분명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데 재산이 사람을 죽입니다. 그 담을 허물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담을 허문다는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용서라는 것이 말같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듯이 하느님으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성찰해 볼 때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삶을 살아온 날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음을 다잡으려 하지만 인간의 연약함에 넘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왔고, 앞으로도 분명 용서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내가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 용서 덕분에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유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당신을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며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60). 하고 애원하였던 스테파노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선물로 주어졌지만 만약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담고 있게 되면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고립되게 되고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건강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용서는 결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선행도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만큼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설령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이라도! 어느 날, 내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3,9). 주님 안에서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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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사순 제3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무것도 없을 때
“그렇지만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 주소서.”
몇 년 전부터인지 모르지만, 저는 아자르야의 이 기도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점차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의 아자르야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저의 영혼과 정신이 아자르야처럼 부서지고 겸손해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물론 이전의 저는 결코, 이런 존재가 아니었고
아직도 이런 존재와는 거리가 먼 저이며,
또 이렇게 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이전의 저는 부서진 영혼이 아니라 부수는 영혼이었고,
겸손해진 정신이 아니라 교만하기가 하늘을 치달을 정도였습니다.
내 영혼이 부서져야 한다고 생각지 않고
다른 사람 특히 불의를 저지르는 인간들이 부서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교만한 저인 줄 알면서도 그 교만을 꺾을 수 없다고
제가 교만한 줄 아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겸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말로는 작은 형제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결코 작지도 낮지도 않고 사람들 위에 군림했기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중요한 책임을 많이 맡다 보니 그리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저를 보는 것이 너무도 괴로웠습니다.
작은 형제인 제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그렇지만 생각뿐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의 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저 스스로 이렇게 되지 못하니 하느님께서 저를 부숴주십니다.
오늘 아자르야가 얘기하는 그대로입니다.
아자르야는 이스라엘의 지난날과 지금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 저희는 저희의 죄 때문에 온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저희에게는 제후도 예언자도 지도자도 없고
번제물도 예물도 분향도 없으며 제물을 바쳐 자비를 얻을 곳도 없습니다.”
죄 때문에, 있어야 할 것들 그러니까
백성을 다스릴 지도자, 바쳐야 할 제물, 제물을 바칠 성전이 하나도 없게 되었는데,
그것은 겉으로 보면 바빌론 임금의 침략으로 인한 것이지만,
신실한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께서 바빌론 임금을 통해 그렇게 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아자르야와 청년들은 불가마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바빌론 임금 앞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아니 다른 번제물이 아니라 지금 불에 타서 죽을 자기들을 번제물로 봉헌합니다.
자기들 대신 바칠 번제물들이 없으니 자기들이 번제물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내게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없게 되었을 때
영혼과 정신이 부서지고 겸손해지고,
우리는 그것들 앞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이렇게 온전히 또 진실하게 있게 됩니다.
그리고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번제물이나 예물 대신 자기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바치는데
이것이 오히려 하느님께서 더 기꺼워하시는 번제물과 예물입니다.
이제 갈수록 힘도 없어지고 건강도 잃게 되었을 때
저도 그리고 여러분도 오히려 더 하느님 앞에 온전히 있게 되길 빌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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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
사순시기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관계맺음의 한편에는 “회개”가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제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용서의 한계를 묻는 이 질문은 용서를 선심 쓰듯이 적당히 아량을 베풀면 되지 않겠느냐는 마음의 발상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당시 유대의 랍비들이 세 번까지 용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던 것보다는 관대한 것이었기는 하였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
참으로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절대적입니다. ‘만약 상대가 회개하거나 용서를 청하면’이라든지 혹은 ‘상대가 준비가 되면’이라든지와 같은 조건을 달지 않으시고,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용서를 적당히 하거나 알량한 선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항구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그렇게 먼저 우리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셔도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또한 자기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용서는 무색해지고 말게 되는 경우를 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넘겨준 유다는 자신의 죄를 뉘우쳤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간음죄와 살인죄를 지은 다윗, 성범죄를 지은 막달레나, 스승을 배반한 베드로, 그리스도인을 박해한 바오로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을 용서했으며, 그래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사실, 자신이 용서받았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용서하는 사람은 자신이 받은 바로 그 용서의 심연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결국, 먼저 자신을 용서할 때 타인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머리로 하거나 동정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야말로 용서는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이 됩니다. 사실, 우리가 용서한다는 것은 그의 죄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며,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이 말씀은 용서받는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절대적으로 용서를 행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골로 3,13).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용서할 수 있게 하소서.
아니, 용서하기에 앞서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여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주님! 일곱 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게 하소서.
무한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나아가,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 도와주고 돌보게 하소서.
주님!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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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무협지’를 읽을 때가 있었습니다. 무협지의 주된 사상은 ‘권선징악(勸善懲惡)’입니다. 부모님은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어린 아들이 깊은 산중에서 스승의 가르침으로 무예를 익힙니다. 성장한 아들은 이제 부모를 죽인 무도한 사람들을 상대로 원수를 갚는 것입니다. 무술의 경지는 약방의 감초처럼 즐거움을 주지만 결국 무협지의 결론은 선은 승리하고 악은 응징한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도 공동체를 이루면서 ‘권선징악’이 사회의 질서를 이루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의 내용도 권선징악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야 권위가 생기고, 질서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다닐 때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lex talionis)’도 배웠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잘못을 응징하는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표현으로 이야기합니다. 구약의 율법과 계명도 권선징악과 동태복수법의 근간에서 제정되었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라는 말처럼 선한 일에는 보상을 주고, 악한 일에는 벌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권선징악과 동태복수법’의 ‘틀’을 과감하게 허물었습니다. 이는 기존의 질서 속에서 권위를 누리던 이들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물었던 ‘틀’은 안식일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지킬 수 없는 사람은 ‘죄인’으로 규정했습니다. 죄인들은 속죄의 행위로 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물었던 ‘틀’은 ‘권선징악’의 질서였습니다. 물론 선한 사람에게 상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도 방법이지만 악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면 하느님께서는 그 자비를 보시고 나의 잘못도 용서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 하느님께서는 나의 잘못도 용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물었던 ‘틀’은 동태복수법의 질서였습니다. 누가 뺨을 때리면 다른 뺨마저 내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천 걸음을 가자고 하면 이천 걸음까지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주라고 하셨습니다. 달라고 하면 기꺼이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가르침이 있지만 이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악인들도 자신의 가족들은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이제 자신의 가족을 넘어서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이웃의 잘못을 몇 번이나 용서하면 좋은지 물었습니다. 일곱 번이면 충분한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용서에는 제한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간구하였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자비와 용서’였습니다.
1930년대에 미국은 ‘대공황’이 있었습니다. 대공황의 원인은 산업혁명으로 많은 제품이 생산되었지만 그것을 소비할 수 있는 노동자들에게 공정한 임금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본가는 공장을 늘리고, 수익을 올리지만 노동자는 더욱 가난해 지고, 생산된 물품을 소비할 수 없기에 공황이 시작되었습니다. 대공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정부 주도로 새로운 사업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적법한 임금을 지급하였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새로운 경제 정책 수립에 도움을 준 사람은 가톨릭교회의 성직자 라이온 몬시뇰입니다. 라이온 몬시뇰의 이론적인 근거는 교황 레오 13세가 반포한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였습니다. 이 교서는 간단히 말하면,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기본권과 의무를 올바르게 제시하여 사회 정의를 실현하게 한 것입니다. 이 교서의 사회 정의관에 근거하여 자본가와 노동자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노동법으로 미국의 노동자들은 제대로 임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노동자의 구매력이 왕성해졌으니 자본가의 생산 활동도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의 ‘틀’을 버리고 모두가 행복한 공생의 ‘틀’을 만들었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들 또한 자비와 용서의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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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몇 년 전에 결혼식 주례를 위해 예식장에서 겪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신랑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으로 결혼식 주례를 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랑 신부도 잘 모르고 또 하객들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와 신랑 아버지의 친분만 있을 뿐이었지요. 신랑 아버지는 어떻게든 저를 챙겨주려고 하셨지만, 오시는 손님을 맞이하셔야 하니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린 뒤에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서 예식장 주변을 돌면서 묵주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예식 시간에 맞춰서 들어가 주례를 선 뒤에 곧바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아쉽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연히 이 결혼식의 주인공은 제가 아니라, 신랑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단지 결혼식을 빛내기 위해 잠시 들린 엑스트라 중 한 명일 뿐입니다.
만약 주인공인 신랑 신부에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고, 저한테만 모든 관심이 쏠렸다면 어떠했을까요? 이 결혼식은 엉망이 되고 맙니다. 주인공은 항상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어느 어르신과 대화를 나누다가 자신이 왕년에 얼마나 대단하셨는지를 이야기해 주십니다.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음을 말씀해주셨습니다. 한때 이런 분을 만나면, ‘꼰대처럼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열심히 사셨다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주인공은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하고,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열심히 사신 분을 무시하는 것은 큰 실례입니다.
이렇게 따져보면 그 누구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됨을 깨닫습니다. 스스로 다른 이로부터 관심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은 것처럼,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사람 편에 서셨고, 그들에게 당신 사랑을 가득 전해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성경에서 ‘7’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를 의미합니다. 즉, 일곱 번 용서하면 완전한 용서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더 큰 용서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그 뒤에는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사는 사람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삶의 주인공인 ‘나’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삶의 주인공을 소홀히 합니다. 주인공인 ‘나’를 불편하게 했다면서, 다른 삶의 주인공을 판단하고 단죄하기를 당연한 것처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하고,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라는 덕목으로 분명해집니다. 우리 모두 특별하기에 용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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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이 적다면 얻는 것도 그만큼 적다. 인간의 재산은 그의 노고에 달렸다(로버트 헤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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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인생은 “자비의 학교”이다
-기도와 회개, 용서와 자비의 사람이 됩시다-
“주님, 당신의 길을 저에게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제게 가르쳐 주소서.”(시편25,4)
파스카의 봄철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누리에 가득한 주님의 자비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바로 시편 136장은 온통 주님의 자비로 가득한 세상을 노래합니다. 봄이 되면 시도 노래도 많습니다. 예전 써놓고 애송했던 시가 생각나 나눕니다. 이또한 깊이 보면 주님의 자비를 노래한 시입니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봄은 생명이다
봄이 입맞춘 자리마다
환한 꽃들
피어나고
봄의 숨결 닿은 자리마다
푸른 싹
돋아난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봄은 생명이다.”-1999.3.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한 파스카의 봄철입니다. 봄비 내린후 확연히 주변 풍경도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봄비란 시도 생각납니다. 봄비란 시를 떠올리면 정말 봄비같은 딸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주책없는, 대책없는 생각도 떠오릅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2005.3.
봄비뿐 아니라 봄꽃, 봄길, 봄빛, 봄바람, 봄햇살 다 예쁜 이름입니다. “봄햇살 붓으로”란 시도 생각납니다. 흡사 자비하신 아버지께서 그림 그리는 장면처럼 생각되어 저절로 솟아난 감흥에 써놨던 시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오, 하느님
바야흐로 그림 그리기 시작하셨네
생명의 화판 대지위에
부드러운 봄햇살 붓으로
연한 초록색 물감
슬며시 칠하니
조용히 솟아나는 무수한
생명의 싹들
오, 하느님
당신의 화판
봄의 대지위에
바야흐로 그림 그리기 시작하셨네”-2007.3.
시는 짜내는 것이 아니라 선물처럼 주어진 것을 줍는 것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시가 저절로 와야지 내가 억지로 시를 불러낼수는 없습니다. 말그대로 시는 자비하신 주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시중의 시가 우리 수도형제들이 평생 날마다 7차례 바치는 시편 성무일도입니다.
시편집 대부분의 시가 하느님의 자비를 노래한 찬미와 감사의 시에 속합니다. 마음을 다해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속속들이 체험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생명과 빛, 희망으로 가득한 시편들을 통해 하느님께 맛들이다 보면 저절로 세상의 시詩나 세상의 맛은 저절로 잊게 됩니다.
인생은 자비의 학교입니다. 평생학인이 되어 자비의 배움터에서 주님의 자비를 배워가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평생 전사이듯, 졸업이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평생 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역시 자비의 공부요 훈련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선택하여 훈련함으로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오늘 지금 여기 자비의 훈련장에서 자비의 실천에 의식적 노력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자비를 체험할 때 기도와 회개는, 용서는 저절로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주님께서 무한히 용서하시고 사랑하심으로 여기까지 살아온 우리들이기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도 용서가 가능합니다. 밑빠진 독에 물붓듯이 끊임없이 주어지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아가페 순수한 용서의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은 수없이 밥멋듯이 숨쉬듯이 용서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이어 무자비한, 매정한 종의 비유가 나옵니다. 자비의 열매가 용서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체험한 마음에서 저절로 나오는 용서입니다. 아, 자비도 훈련이지만 용서도 훈련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용서의 훈련에 의식적으로 항구히 노력하다 보면 정말 은총으로 자발적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참으로 용서할 때 용서받음으로 내 먼저 치유되고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무자비한 종은 정말 무지의 사람입니다. 자기를 모릅니다. 얼마나 하느님께 사랑의 빚을 많이 졌는지 말입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인데 이 무자비한 종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모르니 자기를 알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내가 누구인지 알길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계시기에 회개와 겸손인데 도대체 하느님 없이 지정 회개와 겸손은 불가능합니다. 똑같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범국가인 독일과 일본을 비교하면 뚜렷이 드러납니다. 독일은 겸손히 자기의 죄과를 뉘우쳤지만 일본은 여전히 자신의 죄과를 인정하는 회개와 겸손이 없습니다.
자비로운 하느님도, 자기도 모르는 오늘 복음의 무지하고 무자비한 종이기에 그렇게 많은 빚을 탕감받고도 까맣게 잊고 소액의 빚진 자기 빚장이 종에게는 그토록 무자비하고 가혹합니다. 주님의 정의로운 판결이자 우리 모두에게는 경종이 됩니다. 행여나 주위 형제들에게 무자비했다면 즉시 회개하여 용서하라는 깨우침을 줍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래서 의식적 용서의 훈련입니다. 용서가 되지 않으면 용서하려는 지향을 던져놓고 의지적으로 용서의 노력을 다하다 보면, 때가 될 때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성경 말씀 공부와 시편 성무일도를 통해 하느님 자비의 훈련에 항구하다 보면 자비하신 하느님은 때가 되면 ‘용서의 사랑’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자비의 훈련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참 좋은 주님의 자비 훈련의 사람이 제1독서 다니엘서의 다니엘의 세 동료들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의 금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하자 이들은 불타는 화덕속에 던져졌고 이들은 하느님을 찬송하고 주님을 찬미하며 불길 한가운데를 거닐읍니다. 그리고 아자르야는 불 한가운데 우뚝 서서 입을 열어 주님께 찬미가를 바칩니다.
다니엘4,34-43까지 아자르야의 구구절절 아름답고 감동적인 진정성 가득한 주님께 대한 겸손한 신뢰와 사랑의 고백입니다. 이들이 평소 자비하신 하느님 공부가, 하느님 체험이, 하느님 자비의 훈련이 얼마나 항구하고 깊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들이 거인 신앙에 비하면 우리는 난장이 신앙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하느님의 자비를 공부하고 체험하는데 온갖 노력과 훈련, 정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평생 학인으로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자비의 수행에 항구할 때 주님은 당신 자비를 풍성히 체험할 수 있게 해주실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기도 합니다.
“주님, 당신의 진리 위를 걷게 하시고 저를 가르치소서.
당신께서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니
날마다 당신께 바랍니다.”(시편25,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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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잘한 것은 칭찬받고 싶고, 못한 것은 숨기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은 다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오늘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자신의 넓은 마음을 자랑합니다. ‘용서를 일곱 번 정도 하면 많이 하는 거죠? 저는 그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라는 의미를 담아 예수님께 말합니다.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사도 베드로는 주님의 대답에 머쓱한 웃음을 지었을 것입니다.
사실 사도 베드로가 말한 일곱 번의 용서도 저는 대단한 그것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찬찬히 생각해보면 같은 잘못을 일곱 번씩 이해하고 용서한 기억이 없기 때문입니다. 잘 참아야 세 번 정도가 아닐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일흔일곱 번의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냥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이십니다.
말이 쉽지요. 끝까지 용서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같은 의미로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우리를 모욕하고, 배신하고, 죽음으로 몰고 갔던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사랑할 수 있을까요? 솔직하게 저는 못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말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겸손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의미를 주는 상징이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셨으니 우리도 한번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겸손으로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을요.
우리는 지금 사순이라는 용서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 길을 오늘도 우리가 충실히 따라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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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나마타타
“걱정할 것 없어, 모든 게 다 잘될 거야!”
괜찮아! 잘 될 거야!
아침마다 하루를 시작하는 나에게 이 말을 해주면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다른 말들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너는 잘 할 수 있어.
너는 참으로 소중한 사람이야.
당당하게, 쫄지말고.
이런 말 말입니다.
외국 사람들도 이런 말을 하며 긍정적인 효과를 얻는다고 하네요.
‘하쿠나마타타’
하쿠나마타타는 스와힐리어 구문으로
걱정을 떨치고 힘을 내게 하는 주문이라고 합니다.
괜한 걱정이 들 때마다 크게 외쳐보세요.
하쿠나마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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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용서>
죄를 지었지만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용서받을 수 있음에도
용서받지 못하는 책임은
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뉘우치지 않고
용서를 청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기에
용서받지 못하는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죄를 지었지만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음에도
용서하지 않는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뉘우치지 않고
용서를 청하지 않으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서할 수 없기에
용서하지 못한 책임은
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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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사순 제3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 18,23)
임금과 종들의 셈
이 비유에서 종들은 말씀을 나누어 주는 이들입니다. 임금은 종들과 셈을 할 때, 임금의 종이 아닌 사람들로서 종들에게서 빌린 이들에게도 곡식 백 근, 기름 백 병, 또는 무엇을 받았는지 묻습니다. 이 비유에 따르면 매정한 종의 동료 종은, ‘너는 나의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느냐?’라는 말에서 분명히 드러나듯 곡식 백 근이나 기름 백 명을 빚진 사람으로 판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선행과 적절한 행동 하나하나는 이윤이나 소득으로, 그러나 악행 하나하나는 손실로 보십시오. 어떤 소득은 액수가 더 크고 어떤 소득은 액수가 작아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선행의 경우에도 더 큰 소득과 그보다 작은 소득이 있어 값어치가 다릅니다.
-오리게네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50가지 예수 모습 / 안셀름 그륀
32. 다정다감 예수
예수님은 말 못하는 남자의 혀에 침을 발라 주셨는데, 하인리히 뵐의 말대로 그 행위가 입맞춤일 수도 있다. 예수님은 입맞춤 같은 내밀한 신체 접촉도 꺼리지 않으셨음이 분명하다. 그분은 당신의 혀로 말 못하는 사람의 혀를 풀어 주셨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셨다.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면서 마음 문이 닫힌 그의 머리 위로 하늘을 열어 주셨다. 예수님의 다정다감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과 통한다. 예수님의 다정다감을 통해 하느님의 정다운 사랑이 전해진다. 예수님은 한숨을 쉬셨다. 아픈 사람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측은한 마음을 가지셨다. 그를 위해 마음을 여셨다. 그리고 인간적 사랑과 신적인 사랑이 서로 통하는 곳에서 귀 멀고 말 못하는 사람에게 용기를 주셨다: “에파타(열려라)!(마르 7,34). 머리 위로 하늘이 열리고 고통을 함께할 사람이 곁에 있어야 입을 열어 “제대로 말할 수 있다" 그는 말 때문에 ‘낙인찍히거나 비난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치고 가슴에 담아둔 생각과 소망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랑안에서 우리는 말을 하고 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다.(157)
✝️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3월 2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18-22장
금주간 생태 행동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개인 혹은 공동체 차원에서 먼저 하루를 정해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모든 피조물의 왕이요 하늘과 땅의 왕이신 예수님, 세상을 구속하여 하나의 커다란 가정으로 만들고자 하시니 감사드리나이다. 당신 나라에 죄인과 아픈 이를 멸시받고 거부당하는 사람들의 자리를 마련해 두셨으니 찬미받으소서.
예수님, 당신은 그 누구도, 심지어 당신을 거부히는 사람들조차 거절하지 않으시니 감사드리나이다. 모든 이가 당신을 흠숭하며 만나뵙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그들에게 당신을 드러내
어 구원하심으로써 그들이 장차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침묵 가운데 당신 기족과 친구들, 조국과 온 세계 특히 신앙의 위기를 겪고 있는 사람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한다.)
축복기도
예수님, 당신을 흠숭하며 아픈 사람과 장애인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믿나이다. 고귀하고 거룩하며 전능하신 주님, 한 말씀만 하소서. 모든 악을 몰아내시어 저희를 구하소서. 불안해
하는 이들을 진정시켜 주소서. 미움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소서.
오늘날 불의가 판을 치는 곳에 당신의 정의를 다시 세워주소서.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바꾸어 용서하게 하시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에는 생명을 되돌려 주소서. 죄악에 물물어 있는 이들을 해방하소서. 성령 안에서 저희와 모든 민족에게 소중한 축복을 내려주소서. 당신은 세세에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241)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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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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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사순 제3주간 화요일.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이 질문의 바탕에는 당시 유다인들의 생각이 깔려 있는 듯합니다.
유다교에도 잘못한 형제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라삐들은 같은 죄를 세 번 용서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유다인들의 관습을 생각한다면 베드로 사도의 질문은 훨씬 더 관대합니다.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보다 더 큰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인의 윤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일흔일곱 곱절’입니다(창세 4,24 참조).
어떤 학자들은 ‘일곱 번’을 ‘일흔 번’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수가 얼마나 큰지를 떠나서
자신에게 잘못한 형제를 용서하는 데 제한을 두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두 종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가장 큰 계명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이 비유에서 강조되는 것은 ‘용서받는’ 것과 ‘용서하는’ 것입니다.
만 탈렌트라는, 당시에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종이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형제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의미로 본다면 본인은 엄청난 죄를 용서받았으면서도,
형제의 죄는 좀처럼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중요한 점은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입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보다 용서받은 체험이 먼저입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모습 그대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가엾이 여기십니다.
이 마음을 본받아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자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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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베드로가 주님께 제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묻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야 한다.”(22절)고 하셨다. 일흔일곱이라는 수의 신비는 이 특별한 수가 모든 세대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음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여기엔 한 세대도 빠지지 않았으므로, 십자가 안에서 주어진 하느님의 용서라는 충만한 선물을 받지 못한 세대는 하나도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용서해 주셨듯이, 우리도 서로를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용서를 이처럼 여러 번 하라는 것은 분노할 시간이 없음을 보여준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로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하시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많이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가 우리에게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의 은총을 통해 하느님께 한없는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임금이 그에게 일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과 셈을 시작한다. 종은 많은 돈을 맡고 또 빌렸지만, 주인에게 아무런 이득도 가져다주지 못하고 많은 돈을 잃은 듯하다. 이익을 내기는커녕 엄청난 돈을 잃어 많은 빚을 지고 말았다. 임금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을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탕감받는 빚이 얼마인지 정확하게 알려 줌으로써 그를 가르치고자 했다. 그도 그와 같은 자비의 마음을 가지도록 가르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했는가? ‘아내와 자식을 판다.’는 것은 하느님의 기쁨으로부터 완전히 철저하게 소외되는 것을 뜻한다. ‘판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란,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마태 7,23; 루카 13,27)라는 가차 없이 무서운 말을 듣는 사람들이다.
종은 무릎을 꿇고 참아달라고 탄원한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27절) 주인은 종이 이 일에서 배워 동료 종들에게 관대해지고 자신의 불행에서 깨달음을 얻게 하려고, 그가 큰 망신을 당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책임을 지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탕감해 주기는커녕 참아주지도 않고 그를 옥에 가두어 빚을 갚게 하였다. 이 사실을 알고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34절) 이는 영원히 고문 형리에게 맡겨졌다는 뜻이다. 그는 결코 그 빚을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하실 것이다.”(35절)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아버지’라고 하셨다. 하느님을 이렇게 사악한 사람의 아버지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께 용서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내 형제를 받아들이고 용서해 주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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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용서는 기적이다
1882년 프레드릭 카벤다쉬와 토마스 버크를 찔러 죽인 브라디라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공공연하게 자신을 고발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용서를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며 그를 설득하려했지만그는 그것도 잘 알고 있고 자신도 죽어 마땅한 사람임도 알고 있지만 자신을 고발한 그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형 집행 전날, 한 수녀님이 그에게 면회 신청을 했습니다.
수녀는 그를 만나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브라디씨, 저는 어떤 사람을 몹시 미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사실 나의 신앙으로도그를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수녀에게도 그런 일이 있습니까?” 브라디의 눈빛이 빛났고 수녀는 조용히 말을 계속하였습니다.
“아무리 그를 용서해야 되겠다고 다짐하여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를 기회만 있으면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만 더해갑니다.
정말 어쩌면 좋겠습니까?”
수녀는 정중하게 문의했고 브라디는 제법 대견하게 대답했습니다.
“안되지요. 용서하는 데는 까닭이 없지요. 그냥 마음을 풀어 버리면 되는 게 아닙니까?”
"그게 안 되니까 말이지요.그래서 신앙생활도 그만 두어야 하지 않을까하고 나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천만에, 그러지 마시오. 용서할 수 있도록 좀 더 힘쓰셔야죠!"
이때 수녀는 브라디의 손을 잡으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 했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뵈닉스 공원에서 버크를 죽인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는 바로 나의 오빠입니다."
그러자 브라디는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그 큰 눈을 한참 감고 있더니,
"죄송합니다. 그리고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저를 고발한 사람을 지금 용서합니다.
이제는 마음이 후련합니다. 감사합니다."
신앙의 평화를 체험하고 브라디는 조용히 숨을 거뒀던 것입니다(디럭스 바이블 예화에서 발췌)
저도 종부성사를 줄 때 항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지 먼저 물어보게 됩니다.
특별히 남편의 외도로 병이 든 자매들은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남편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남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매님을 위해서라도’ 용서를 하라고 하면 눈물을 흘리시며 용서한다고 하십니다.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 한 명쯤 미워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워하면 정말 괴로운 것을 알지만 용서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용서가 안 되는 것’ 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용서해야 되는 걸 누가 모릅니까? 용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 어떤 것도 나의 힘만으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용서는 하나의 기적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혼자 힘으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기적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자매님에게 외도하는 남편을 위해 하루에 성체조배 한 시간씩 하라고 했더니 일 년이 지난 뒤 저에게 와서 이제는 남편이 오랜만에 들어와도 식사도 차려주고이부자리도 깔아주는 등 자신이 기적을 체험하고 있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외도하는 남편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힘에 의한 기적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면 하느님께도 용서받지 못한다는단순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란 우리나라 돈으로 수조원에 해당하는 액수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짓는 잘못이 아니라 하느님께 짓는 죄를 나타냅니다.
이 액수가 바로 예수님의 피 값입니다.
백 데나리온은 이웃이 나에게 잘못 한 액수인데
이는 수백만 원에 해당합니다.
수백만 원도 탕감해줄 수 없는 사람에겐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죄의 용서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내가 누구를 미워하는 것은 내 안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있는 죄를 내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서 내면에서 자신도 모르게 미워하는 사람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누구를 미워하면 나에게 죄가 있음을 먼저 깨달아야합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은 죄가 없으셔서 누구도 미워하시지 않으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서로 핑계를 대며 미움이 세상에 들어왔음을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어쨌든 용서는 내 자신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화에서 보았듯이 다른 사람도 변화시키는 기적의 힘이 있습니다.
기적은 나도 살리고 다른 사람도 살립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고 기적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노력하지 않으면 누구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누가 미워집니까? 먼저 나의 죄를 찾아 반성하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십시오.
용서의 기적을 체험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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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사람은 같은 사건을 겪어도
다르게 반응하고 살아갑니다.
누구는 위기 안에서 기회를 찾지만
누구는 위기 안에서 좌절할 뿐입니다.
이는 각자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바라본다면
그는 위기에서 좌절하고
기회에서 기쁨을 얻습니다.
하지만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 흔들리는 삶입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는 다릅니다.
그는 위기 안에서 하느님 뜻을 찾고
기회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전합니다.
어려움 속에서 나와 함께 하는 하느님을 발견하기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고 감사합니다.
기회 안에서 나에게 베푸신 사랑을 체험했기에
그 사랑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떤 시선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삶의 질과 풍부함이 달라집니다.
불길 속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자세도
용서받았기에 용서할 수 있는 자세도
우리 안에 하느님이 자리 잡고 계시기에 가능합니다.
오늘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에서도 하느님과 동행하며
주님 안에서 흔들리지 않고 행복으로 나아가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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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해계십니다!
이 세상 수많은 말 가운데, 용서(容恕)라는 말처럼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요?
살다 보면 백번 깨어나도, 천 번 마음을 고쳐 먹어봐도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소중한 인생을 완전히 파멸시킨 그, 내 소중한 사랑을 앗아간 그 사람, 나를 지근지근 짓밟은 그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성경은 집요하게 용서하라고 당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술 더 뜨십니다.
한번 두 번도 아니고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이건 너무 지나친 권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건 차라리 바보가 되라는 거야 뭐야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렇게까지 용서와 관련해서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용서가 영성 생활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영성 생활뿐 아니라 육체의 건강, 더 나아가서 정신건강에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특히 어머님들에게 많이 발생하는 독특한 병이 있습니다.
화병입니다.
소화불량, 두통, 불면증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점점 죽음으로 몰고 가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 원인을 추적해 올라가 보면 용서란 중요한 작업을 소홀히 했거나 서툴렀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 즉시 우리는 심리적 정서적 균형을 잃게 됩니다.
그 누군가로부터 받은 상처에 연연하기 시작할 때, 즉시 끔찍한 내면의 고통이 시작됩니다.
결과적으로 그로 인해 내가 내 인생을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그가 내 삶을 좌지우지합니다.
마음이 늘 불편합니다.
신체의 모든 장기들이 원활하게 가동될 리 없습니다.
즉시 이런저런 신체적 질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절실한 하느님 체험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기도에 집중하려 해도 집중이 안 됩니다.
용서란 참으로 어렵고도 험난한 작업입니다.
용서(容恕)란 단어의 용(容)자는 ‘받아들임’을 나타냅니다.
서(恕)자는 상대방을 뜻하는 如(여)자와 심(心)자로 이루어져 있으니 결국 상대방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헤아린다는 뜻입니다.
용서란 말은 내 입장에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는 일입니다.
내 시각이 아니라 상대방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일입니다.
상대방이 지니고 있는 나름의 고충을 참작해주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이해해주는 일입니다.
큰마음 먹고 다시 그를 받아들여 주는 일입니다.
다시 한번 새롭게 그와의 관계 형성을 시작하는 일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위대한 일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일이 용서입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큰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큰 겸손이 필요합니다.
이토록 어려운 일이기에, 용서를 실천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큽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참 평화가 찾아옵니다.
새로운 관계 형성이 시작되는 만큼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속적인 용서의 과정이 우리 내면 안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네 삶을 즉시 휘청거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함으로 인해 우리 영혼에 퇴적되는 갖은 독소들-적개심, 증오심, 복수심, 미움, 폭력성, 분노...-은 언젠가 반드시 부메랑처럼 우리에게 되돌아와 우리 영혼을 갉아먹을 것입니다.
용서를 통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본인 자신입니다.
용서를 통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자유로워집니다.
나 자신부터 편안해집니다.
내 인생길이 편해집니다.
용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가장 구체적인 현존방식입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해계십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십니다.
용서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때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인간 상호 관계 안에서 찾을 필요도 있습니다.
서로 용서를 주고받는 인간관계 안에서, 다시금 새롭게 출발하는 인간관계 안에서 하느님께서 환하게 미소 짓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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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매정한 종의 비유>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2-35).”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라는 말씀의 뜻은, “하느님께서 이미 너를 용서하셨으니 너도 형제를 용서하여라.”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있는,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우리가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용서의 은총’을 취소하신다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행동을 지켜보시다가 당신의 마음에 안 들면 이미 주신 은총을 취소하시는 분일까?
정말로 그런 분이라면,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느님은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을 것을 모르셔서 무턱대고 용서부터 하시는 분일까?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이라는 말씀을 설명할 때,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보다 용서받은 체험이 먼저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용서받은 체험이 없으면 형제를 용서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그 체험은 언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용서받은 체험을 하려면 죄를 지은 체험부터 하라는 말인가?
‘매정한 종의 비유’에 나오는, ‘만 탈렌트’ 라는 엄청난 거액을 빚진 종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의 빚은 백 데나리온이다. 만 탈렌트는 저 사람의 빚이다.” 라고, 즉 “나의 죄는 작고, 저 사람의 죄는 크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게 아니다. 네가 바로 ‘만 탈렌트’ 라는 빚을 탕감 받은 종이다.” 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렇게 큰 빚을 진 적이 없다.” 라고 반박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받은 체험’을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나는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다.” 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또 나 대신에,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십자고상을 벽에 걸어 놓고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다.” 라고 자처했던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대신 속죄 제물을 바치는 메시아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믿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또 그들은 죄를 지은 적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으니 용서를 청해서 받을 필요도 느끼지 못했고,
이웃들에 대해서도 용서가 아니라 심판과 단죄만 말했습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우리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사랑이신 하느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즉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랑함으로써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관한 말은 그대로 용서에도 적용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은 우리에게 용서로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용서는 사실상 하나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하게 됩니다.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함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되고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사랑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사랑과 용서를 깨닫지 못하게 되고, 체험하지 못하게 되고, 믿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은 주시는 것을 안 받겠다고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안 받겠다고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가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다음과 같이 다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하느님은 한 번 주신 은총과 사랑을 취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니 취소하실 일을 하지 않으시고, 한 번 하신 일을 취소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은 영원히 유효한데, 내가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능동적으로, 또 진심으로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은총과 사랑을 받아서 나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자동적으로 나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고, 내 쪽에서 능동적으로, 또 진심으로 용서와 사랑을 실천해야만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사랑과 용서를 받아서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2) 우리는 용서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이미 나를 용서하셨고,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체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용서하는 것보다 용서받은 체험이 먼저다.” 라는 말은 ‘틀린 말’이고, “먼저 용서를 실천하는 사람만이 용서받은 체험을 할 수 있다.”가 올바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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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사순 제3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으로 한없이 용서하라! ♣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살다보면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지만 다른 이를 용서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는 듯싶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을 때 그 첫 번째 피해자는 자신이니 어쩌랴! 오늘 복음에는 한없이 용서하라는 가르침과 더불어 ‘무자비한 종의 비유’가 나온다. 이 비유에서 임금은 인간이다. 고대 사고방식에 따르면 임금은 생사여탈권을 행사한다. 이 비유에서는 임금이 최후 결산(25,19)을 본다. 그 임금은 곧 주님(25,27. 31. 32. 34절)으로서 종들과 셈을 밝히려 했다. 빚을 갚을 길이 없는 종을 보고 일단 관례대로 그 종의 아내와 자식을 팔아 빚을 갚도록 한다.
종이 주인의 돈을 횡령했다는 말은 없고 단지 빚을 갚지 안했을 뿐이다. 종은 빚을 탕감해 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았는데도 주인은 측은한 마음이 들어 빚을 용서해 준다. 32절을 보면 종이 빌었기 때문에 주인이 ‘빚을 용서’해 주었다지만 사실상 종은 시간적인 여유만 요구했다. 뜻밖에 주인이 그 종의 일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탕감해 주었다. 여기서 한 달란트는 노동자가 안식일을 빼고 20여 년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큰 액수이다. 이 종이 탕감받은 엄청난 액수는 헤아릴 수 없는 용서의 가치를 말해준다.
그런데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이 종은 친구의 사소한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18,30) 유대 법에는 채무자의 인신 구속이 없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고발이다. 자신은 늘 사랑받고 싶어하고 관대한 처분을 바라고, 조건없는 용서를 바라면서도 다른 이들에게는 냉정하고 옹졸한 태도를 보이는 우리에 대한 고발이다. 무관한 사람들처럼 폐쇄적인 마음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은 곧 스스로가 만든 감옥에 갇혀 사는 것이다.
주인은 다른 종들의 보고를 듣고 그 종을 불러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했다’고 한다(18,33). 용서의 원인은 주님의 자비하신 마음이지 종의 부탁이 아니다. 결국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18,34) 임금은 무자비한 종을 고문형에 처했다. ‘다 갚을 때까지’란 거액의 빚을 생각할 때 그 형벌은 한이 없다는 것이다. 이 종은 주님이 관용, 탕감을 순수한 은혜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친구간의 연대성과 우정을 무시해버렸으며, 필요 없게 된 친구의 돈을 강제로 요구하는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결국 친구간의 연대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봉변을 당하게 된다. 바로 그 종들의 친구들이(31절) 그 꼴을 보고 슬퍼했고 그들의 주인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우리도 주인과 악한 종(32절) 사이에 결정적인 역할을 맡은 친구들과 그들 사이에 맺어진 연대성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베풀어진 용서는 나누어질 용서이다. 받은 용서를 나눌 줄 모르는 것은 용서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주인이 화를 내면서 그 종을 형리에게 넘겼다. 말하자면 그 종은 용서의 거부가 초래한 결과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의 용서는 일흔 일곱 갑절로 보복을 하겠다는(창세 4,24) 라멕의 끝없는 복수심과 대조되는 용서이다. 한없는 용서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표지이다.
우리도 청하기도 전에 자비를 베푸시고 빚을 탕감해 주시는 아버지의 용서를 서로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한없이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의 그 자비로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18,35)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용서란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사랑이고 하느님의 자비를 전달하는 것이지 않는가. 우리 사이에는 갑을이 없고 하느님의 자애 앞에 연대하여 공유하는 길만이 남아 있다. 증오와 분노를 안고 산다면 형제를 살인하는 것이며 그 첫 번째 피해자는 자신임을 명심할 일이다. 냉정함과 미움은 하느님과의 단절을 가져오고 자아분열을 일으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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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독서들 안에는 "자비"라는 말씀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됩니다
"저희에게서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마소서"(다니 3,35).
바빌론에 유배 간 유다 청년들이 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하다 불가마에 던져집니다. 그중 한 명인 아자르야가 불길 한가운데서 주님께 이처럼 기도를 드리지요.
이스라엘에게는 지금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민족은 유배로 뿔뿔이 흩어졌지요. 게다가 자신들은 죽을 곤경에 빠진 상태입니다. 이토록 처참한 상황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신을 원망했을지도 모르지요.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는 아자르야의 고백을 통해 신앙의 정수를 만납니다.
"저희의 죄 때문에"(다니 3,37)
아자르야는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을 자신들에게 돌립니다. 하느님 탓, 조상 탓, 남 탓 하지 않고 자신을 봅니다. 원래 하느님 앞의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당신의 벗, 당신의 종, 당신의 거룩한 사람"(다니 3,35)이었지요. 이제 그 모든 걸 잃은 듯 보이는 생의 밑바닥에서 자신들의 우상숭배와 배반과 타협을 뉘우칩니다.
"당신 호의에 따라,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 저희를 구하시어"(다니 3,42)
우리가 기대하고 희망하고 간청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주님의 호의와 자비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우리가 주장할 권리는 사실상 없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용서를 화두로 하느님 자비를 가르치십니다.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마태 18,21)
베드로의 이 질문에서 "용서"는 마치 선심 쓰는 행위처럼 느껴지는데,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는 예수님의 대답에서 "용서"는 의무에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요?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마태 18,27)
예수님은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종의 이야기를 비유로 드십니다. 주인의 "가엾은 마음"에서 시작된 용서는 한 사람을 살릴 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재산까지 지켜 줍니다. 그런데 그 자비가 그 종에게 이르러 멈추어 버리지요. 그는 제가 입은 자비를 잊고 제 동료를 다그쳐 감옥에 가두어 버렸으니 말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마태 18,33)
주님은 자비의 연속성을 말씀하십니다. 한번 베풀어진 자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비의 길은 이어져야 합니다. 자비의 흐름이 끊기지 않고, 자비의 걸음이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태초에 시작된 하느님의 자비가 온 세상을 돌고 돌아 우리에게까지 다다랐는데 우리게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는 안 됩니다. 자비를 삼켜버리고 아무 꽃도 열매도 내지 못하는 돌덩이 심장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마태 18,35)
베드로의 질문 안의 "용서"와 예수님 답변 안의 "용서"가 같은 단어, 다른 온도를 담고 있음은 이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용서는 가식이나 요식행위가 될 수 없는 심장의 일이어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고 하시는 이 말씀 안에는 이미 그분이 우리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셨다는 전제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당신의 자비를 우리 죄에 대한 조건 없는 용서로 표현하십니다.
"주님, 당신의 자비 기억하소서"(화답송).
부족하고 나약한 죄인인 우리는 죄에 떨어질 때마다 주님 옷자락에 매달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해 달라고 읍소합니다. 그런데 사실, 진정으로 그분의 자비를 기억해야 할 존재는 바로 우리들이 아닐까요? 주님은 결코 당신 자비를 잊지 않으시지만 우리가 받은 자비를 종종 망각해 버리고는 그 자비가 필요한 형제와 이웃에게 영 딴소리를 하기 일쑤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받은 자비를 기억해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는 이제 우리에게 선심이 아니라 의무니까요.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비유를 맺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괜한 추임새가 아니라, 자비의 길을 이어가라고 한번 더 강력히 촉구하시는 다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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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
시편저자는 나탄 앞에서 다윗이 바쳤던 통회의 노래를 우리에게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의 제사는 통회의 정신, 하느님은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낮추 아니 보시나이다.” (시편 51,19)
최민순 신부님은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라고 번역하였는데 새 번역에서는 ‘부서지고 꺾인 마음’이라고 옮겼습니다.
여기서 ‘부서지다.’ ‘낮추다.’ ‘꺾이다.’라는 말마디는 죄를 뉘우친다는 공통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니엘 저자도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간절한 회개의 기도의 표현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진정한 회개의 모습을 제사보다 더 소중한 회개의 마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 주소서.”(다니 3,39)
시편저자는 “제사는 당신이 즐기지 않으시고, 번제를 드리어도 받지 아니 하시리이다.”(18절)라는 기도는 또 한편으로 예언자의 제사 보다는 사실 회개의 마음을 잘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에야 그렇지 않았겠지만 세월이 가면서 제사의 정신에서 점점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것으로 굳어 버린 것입니다.
예언자도 시편저자도 참다운 제사는 ‘부서지고 꺾인 마음’ 다시 말해 진심으로 뉘우치는 마음이야 말로 어떤 희생제사보다 가치 있는 것임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일곱 번까지 이웃을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에 주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라고 말씀하십니다. 무한히 용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루카는 이 용서에 대해서 조금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돌아와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4)
마태오는 얼핏 보면 모든 잘못을 무조건 다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뜻으로 비칠 수 있는데 비해 루카는 ‘회개’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루카가 전하는 주님 말씀이 우리에게 더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어서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임금에게 만 탈렌트나 되는 빚을 진 종에 대한 비유 말씀을 전합니다. 용서를 비는 그 종은 임금으로부터 크게 탕감을 받고 용서까지 받습니다.
그 종이 풀려나서 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는 그 친구가 애걸을 해도 봐주는 것 없이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지요.
이제 우리는 탈렌트와 데나리온을 따져봐야 하겠습니다. 그 모진 종이 진 빚이 일만 탈렌트이고 그 친구가 진 빚은 백 데나리온이라면 큰 차이가 납니다.
일 탈렌트가 6000 데나리온이니까, 100탈렌트라면 6십만 데나리온이 되는 셈이지요.
그렇다면 6십만 데나리온에서 백 데나리온을 비교해보면 비교도 할 수 없이 작은 숫자의 돈인 것입니다.
자신은 임금에게 이렇게 어마어마한 돈을 탕감 받았는데 정작 자신은 친구에게 작은 돈을 탕감은커녕, 그를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그래서 고약한 소문을 들은 임금은 그 모진 종을 불러 불호령을 떨어트리지요.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32-33절)
사단이 난 겁니다. 그리고 임금은 그 모진 종을 고문형리에 넘기고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말씀을 마무리하시며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35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말씀의 뜻은 우리가 하느님께 큰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는 것처럼 우리도 내 이웃의 작은 잘못에 대해서 너그럽고 용서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그 의미를 새긴다면 우리도 자비하신 하느님처럼 내 이웃에게 너그럽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느님의 마음을 닮아 용서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인간은 사실 용서하기에는 너무 작은 존재가 아니겠어요? 사실 자기 몸 하나 주체하기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웃의 무례함과 이웃이 주는 상처를 이해하며 용서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우리는 입장을 바꾸어 이웃에게 ‘뭐 그런 것 같고 그래?’라는 말을 쉽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요.
심리학자들이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아주 섬세하고 부드러워서 머리카락 보다 더 작고 가는 자극에도 쉽게 상처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섬세한 마음의 소유자인 사람이 용서할 수 있는 길은 하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부서지고 꺾인 마음’이 될 때, 비로소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회개야 말로 하느님과 통할 수 있는 통로이지요. 비로소 속좁은 사람이 하느님의 마음이 되어 너그럽게 되는 것이지요.
회개 없이 용서는 없는 것입니다.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는 먼저 이웃을 향한 시선이 아니라 먼저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죄를 살피며 회개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 사순절이야말로 나를 새롭게 그래서 넓고 크게 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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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사순 제3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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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사순 제3주간 화요일.
겸손과 섬김으로 평화를 이루는 삶
<2023.3.14> 아침을 여는 묵상 (마 21:1~11절)
❝겸손과 섬김으로 평화를 이루는 삶❞
❚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 어떠한 곳에 평화가 임하게 됩니까?
➲ 섬기고 낮아지는 곳에 평화가 임합니다(1~3절).
예루살렘으로의 입성을 앞두고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하라고 하면 즉시 보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3절).
섬김의 삶에 대해 말씀하셨던 주님은 화려하고, 튼튼한 말을 타시는 것을 거부하시고, 약하고 초라한 나귀를 선택하셨습니다. 입술로만 ‘주의 제자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답게 일상의 삶 속에서 섬김의 자리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두 제자의 사명은 묶여 있는 나귀 새끼를 풀어서 주님께로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인 나의 일차적인 사명은 매인 자들을 풀어 주님 안에서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삶의 짐에 짓눌린 채 묶여 있는 자들에게, 세상 죄악의 사슬에 묶여 있는 자들에게 다가가 주님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진리를 선포하고,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작고 연약하지만 내 물질, 내 시간, 내 재능, 내 열정등등을 주님을 위해 쓰여 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섬기고 낮아짐이 있는 그곳에 진정한 주님의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 겸손히 순종하는 곳에 평화가 임합니다(4~7절).
예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화려한 개선장군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위에 깔았습니다(4~7절).
내가 지금 주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아 주님의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이 일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법대로 하고 있느냐..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혹 내 판단, 내 생각을 앞세워서 하고 있지는 않은지 또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산다고 말하면서도 겉모습만 화려하게 꾸미거나 내가 가진 것으로 세력을 과시하려는 모습은 아닌지 끊임없이 점검하고 또 점검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과 반대되는 삶을 살면서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섬김과 순종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삶으로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진정한 주님의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평화가 임합니다(8~11절).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들이 소리 높여 외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예루살렘 성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누구냐... 라는 질문에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들 합니다(8~11절).
나의 입술을 통해 나온 찬양과 고백 속에 진실과 정직이 담겨 있기를 원합니다. 주변 사람들을 따라 충동적으로 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또한 단순히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대하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환영하고 모시되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히 알고, 고백하여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단순히 선지자 중에 한 분??으로가 아니라 예수님이야말로 구원의 길이요, 평화의 길이요, 행복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믿는 확신 속에 ‘호산나’를 외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이 선포되는 그곳에 진정한 주님의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오늘도 진실한 믿음과 확신이 바탕이 되어 호산나를 외치며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뿐만 아니라 낮아짐과 겸손 그리고 섬김의 삶이 일상에서 실천되어짐으로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마 21:1~11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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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사순 제3주간 화요일. cpbc TV.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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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사순 제3주간 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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