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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전도사 나정집의 감동의 글 ◈
Ⅰ. 【3가지 이야기】
1. 삶의 방정식
어느 대기업 회장이 귀한 손님을 접대하고자 고깃집에 갔다. “아줌마, 이 집에서 제일 맛있는 고기로 주시오.” 고기가 도착하자 회장은 얼굴을 찡그리며 종업원을 불렀다. “아줌마, 고기에 기름이 왜 이리 많아요?” 이때 찬 공기가 순식간에 돌기 시작했지만, 주인아줌마가 다가오며 던진 말이 회장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아이고 회장님, 이놈의 소가 운동을 안 했나 보네요.”
어이가 없는 대답에 회장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초대받은 손님은 한술 더 떴다. “아줌마! 괜찮습니다. 우리가 먹고 운동할게요.” 살아가는 삶의 방정식은 누구나 다르고 차이가 있다.
그 모든 것을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인간이기에 마음에 담았던 내용을 대화로 풀 수 있는 사람은 현명하고, 마음이 여린 사람은 한잔 술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노력을 한다.
2. Are you Jesus?
최근에 읽었던 책 안에 이런 예화가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었다. 폴이라는 한 회사원이 뉴욕에서 중요한 미팅을 마치고 자기 팀 동료와 함께 공항으로 갈려고 거리로 나왔다. 마침 그날이 금요일 오후 저녁 시간이어서 교통체증이 심해 택시 잡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때 정말 기적적으로 빈 택시 하나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 택시를 보는 순간 다른 동료들이 쏜살같이 달려가서 그 택시를 잡아탔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너무 빨리 달려가는 바람에 바로 길가에서 장사하고 있는 노점상의 야채 과일 박스를 박아버리게 됐고, 과일과 야채는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폴의 일행 중 누구도 이를 개의치 않고 택시를 탔다.
그러나 폴은 택시를 타지 않고 그 자리에 순간 멈추어 섰다. 택시 안의 동료들이 외쳤다. 빨리 타라고. 그리고 덧붙였다. 이 택시 타지 않으면 비행기 놓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은 나를 놔두고 먼저 가라고 일행을 떠나보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노점상 할머니에게 다가가니 그 할머니는 울고 있었다고 한다. 자세히 가서 봤더니 앞을 보지 못한 시각장애자였다. 눈이 성한 사람이라면 바닥에 흩어진 과일이나 야채를 주으면 그만인데, 앞을 보지 못하는 할머니가 어떻게 그 과일과 야채를 주워 담을 수가 있겠습니까?.
앉아서 울고 계신 할머니를 폴이 위로해 드리면서 땅바닥에 떨어진 야채와 과일을 하나씩 줍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다들 자기 갈 길이 바쁜지 아무도 노점상 시각장애인 할머니의 울음과 폴의 행동에 관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폴이 야채와 과일을 다 정돈한 후에 지갑을 꺼내 돈을 할머니 손에 쥐어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이 돈이면 손해 보신 것 충분히 해결될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Are you JESUS." (혹시 예수님 아닌가요?)” 이 말을 듣고 당황한 폴이 “나는 절대 예수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시각장애인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조금 전 노점 가판대가 넘어지고 과일과 야채가 땅에 떨어질 때 제가 도움을 요청할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JESUS please come help me.' (예수님 나에게 다가오셔서 제발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랬는데 기도의 응답처럼 당신이 와서 나를 도와주었으니까, You must be JESUS. (당신은 예수님이 틀림없습니다).”
그날 밤 폴은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하룻밤을 더 뉴욕 호텔에서 머물면서 한밤중에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When was the last time someone confused you for JESUS. (누군가가 당신을 예수님 같다고 착각하게 했을 때가 언제인가?) 나는 정말 작은 예수가 맞나? 나의 삶의 방향과 목적은 바른가?”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돈도 나의 능력이나 나의 재능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작은 예수가 될 때만이 가능하다. 나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고 기꺼이 양보할 수 있다면···.
만일 내가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만일 내가 예수님처럼 나를 희생함으로 누군가를 세우고 살려줄 수만 있다면 분명 나 한 사람 때문에 이 세상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 분명함을 말이다. “When was the last time someone confused you for JESUS. (누군가가 당신을 예수님 같다고 착각하게 했을 때가 언제인가?)”
3. 절망을 이겨낸 의지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국방장관이었던 뉴튼 베이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전쟁 중 유럽의 한 야전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참혹한 부상을 당한 미국 병사를 만났습니다. 그 병사는 두 다리와 팔 하나, 그리고 한쪽 눈까지 잃어버렸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베이커는 그 병동에 들러 그 병사를 다시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병사는 보이지 않았고, 병원원장은 병사를 간호하던 간호사와 결혼해서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귀국한 베이커는 몇 년 후, 장관직을 그만두고 존스홉킨스 대학교 이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그해 박사학위 수여식 때, 베이커는 깜짝 놀랄 일을 만났습니다. 처참한 부상을 당했던 그 병사가 휠체어를 끌고 박사학위를 받으러 단상으로 올라왔던 것입니다. 반가움과 놀라움으로 그는 병사의 손을 꼭 잡아 주었고, 병사는 그에게 짧은 인사를 건넸습니다. “장관님, 은퇴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직 보람 있는 일이 많이 있으니 기운 내시기 바랍니다.” 불쌍히 여겼던 젊은이가 그를 위로해 준 것입니다. 어떠한 절망적 상황도 인간의 의지보다 강할 순 없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순간 절망은 희망으로 변화합니다.
Ⅱ. 【찰리 채플린의 명언】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 보면 비극이다.”
어느 나무꾼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칡넝쿨을 거두려고 붙들었는데, 그것이 하필 그늘에서 자고 있던 호랑이 꼬리였습니다. 잠자는 호랑이를 건드린 나무꾼은 깜짝 놀라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화가 난 호랑이는 나무를 마구 흔들었습니다. 나무꾼은 놀라서 그만 손을 놓아 나무에서 추락했는데, 떨어진 곳이 하필 호랑이 등이었습니다. 이번에는 호랑이가 놀라 몸을 흔들었고, 나무꾼은 호랑이 등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호랑이는 나무꾼을 떨어뜨리기 위하여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무꾼은 살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 호랑이 등을 더 꽉 껴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농부가 무더운 여름에 밭에서 일하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불평을 합니다. “나는 평생 땀 흘려 일하면서 사는데, 어떤 놈은 팔자가 좋아서 빈둥빈둥 놀면서, 호랑이 등만 타고 다니는가?” 농부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호랑이 등을 붙들고 있는 나무꾼을 부러워했습니다.
때로 남들을 보면 다 행복해 보이고, 나만 고생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뜨거운 뙤약볕에서 일을 하고, 남들은 호랑이 등을 타고 신선놀음을 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실상을 알고 보면 사람 사는 것이 거의 비슷합니다.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나와 똑같은 외로움 속에서 몸부림을 칩니다. 남과 비교하면, 다 내 것이 작아 보인답니다. 나에게만 아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상을 들어가 보면, 누구에게나 아픔이 있습니다.
비교해서 불행하지 말고, 내게 있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은 희극처럼 살아도, 짧은 시간입니다. 우리 모두 건강하시고 서로 사랑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Ⅲ. 【공감능력】
흔히 EQ(emotional intelligence quotient)를 공감지수의 지표로 '마음의 지능지수'라고도 합니다. EQ는 거짓 없는 자기의 느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낙관적인 생각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 남을 배려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 집단 속에서 조화와 협조를 중시하는 능력 등으로, 인간의 총명함은 IQ가 아니라 EQ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공감능력은 서로 보는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다른 관점까지 기꺼이 들어주고 존중하고 싶어 하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의 공감지수는 얼마나 되나요?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생각의 프레임의 법칙에 갇혀 남을 정죄하거나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상황이라도 어떠한 틀을 갖고 상황을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인격을 다르게 판단합니다. 우리는 실력을 중시하고 학벌이나 스펙, 인증시험 성적 등에 따라 사람들의 능력을 판단하곤 합니다. 사람마다 생각하고 경험하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기에 서로 다른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관점만이 옳고 다른 사람의 관점은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각을 해서 급하게 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내거나 뛰다가 넘어져서 사고를 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지각을 하더라도 천천히 조심해서 오라고 여유 있게 상대방에게 말해줍니다.
자신의 가족이나 지인 중에 자살한 사람이 있는 사람은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등으로 두 번 죽이지 않습니다. 어떤 부모는 집에 방이 많지만 아이들에게 독방을 주지 않고 많은 형제들과 같은 방에 쓰게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서로의 불편을 이해하고 고통을 나누는 마음을 배우지 못하면서 장차 지도자가 되었을 때 어떻게 남의 고통을 이해하고 아픔에 공감할 수 있겠느냐”
진정한 리더는 개인적 능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공감적으로 이해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듯이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요즘은 혼자 하는 것이 편하고 쉬워서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여행을 하고 혼자 사는 것이 유행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함께 사는 법'을 배울 때 가장 필요한 건 상대방이 되어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 “절대 안 돼”가 아니라 “무슨 이유가 있겠지” “저 사람이 나에게 저럴 때에는 뭔가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거야.” “저 사람의 마음은 지금 얼마나 힘들까?”로 바꿔 보는 것입니다.
내 감정 절제하지 못한 채 섣불리 판단해서 서툰 행동을 하지 말고, 상대방이 나에게 왜 그랬는지, 나의 잘못은 없었는지, 냉정하게 되돌아보는 게 필요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식과 훈련과 능력과 기술의 사람입니다. 공감적 이해력은 사람들을 이해하는 관계의 능력입니다. 여기서 이해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사람의 깊은 내면에 들어가 그의 생각을 함께 나누고 그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능력입니다. 존중은 영적 능력으로, 인간의 존재 자체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존중한다는 뜻은 그 사람의 존엄성과 소중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Ⅳ. 【하얀 거짓말】
영국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왕이 한 죄수에게 사형을 언도하자, 신하 두 사람이 죄인을 감옥으로 호송하고 있었습니다. 절망감에 사로잡힌 죄수는 감옥으로 끌려가면서 계속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이 못된 왕아! 지옥 불구덩이에 빠져 평생 허우적거려라.” 이때 한 신하가 그를 나무랐습니다. “이보시게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지만 죄수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무슨 말인들 못하겠소.”
신하들이 궁으로 돌아오자 왕이 물었습니다. “그래, 죄인이 잘못을 뉘우치던가?” 그때 죄수의 말을 가로막던 착한 심성의 신하가 대답했습니다. “예, 자신에게 사형을 내린 폐하를 용서해 달라고 신께 기도했습니다.” 신하의 말에 왕은 매우 기뻐하며 그 죄수를 살려 주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때 다른 신하가 말했습니다. “폐하, 아닙니다. 그 죄수는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폐하를 저주했습니다.”라고 사실대로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왕은 그 신하를 나무랐습니다. “네가 하는 말이 진실인 것은 나도 안다. 그런데 나는 저 사람의 말과 행동이 더 마음에 드는구나.”
사실대로 말한 신하가 말했습니다. “폐하, 어째서 진실을 마다하고 거짓말이 더 마음에 드신다고 하십니까?” 왕이 말했습니다. “저 사람이 한 말이 비록 거짓말일지라도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말한 거지만, 네 말속에는 사람을 미워하는 악의가 가득하구나. 때로는 선의의 거짓말이 분란을 일으키는 진실보다 나은 법이니라.”
왕은 결국, 거짓말을 한 신하의 말을 믿고 죄수의 목숨을 살려주었습니다. 영국 속담에 거짓말에는 새빨간 거짓말과 하얀 거짓말이 있다고 합니다. 새빨간 거짓말은 나쁜 마음을 가지고 나쁜 의도로 하는 진짜 거짓말이고 하얀 거짓말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사람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기 위한 선한 거짓말입니다.
의학계에서 전해오는 ‘플라시보 효과’는 가짜 약을 진짜 약이라고 속여 투약을 해도 약효가 있다는 심리적 호전 현상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선한 거짓말이며 하얀 거짓말입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마지막 잎새’에서 존시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베어먼 할아버지는 마지막 잎새를 그려 놓았습니다. 이것 역시 선의의 하얀 거짓말입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있는 내로남불, 네 탓, 가짜뉴스, 통계조작, 선거조작, 왕따, 집단 따돌림 등에 동원되는 악의적인 거짓말은 새빨간 거짓말이고, 입만 열면 버릇처럼 ‘사랑해…!’를 연발하는 뻔한 거짓말은 하얀 거짓말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하얀 거짓말이 참 많습니다.
간호사가 자주 하는 “이 주사 하나도 안 아파요.”, 예식장 사진사가 말하는 “지금까지 제가 본 신부 중에 제일 예뻐요.” 중국집 사장님이 말하는 “예, 지금 바로 출발합니다.” 등입니다. 가끔은 악의에 찬 진실보다도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깃든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이 깃든 말, 아름다운 말은 말하는 사람도, 말을 듣는 사람도 행복하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Ⅴ. 【인생을 바꾸는 사고방식】
미국의 한 대기업 CEO가 지하도를 건너다가 길거리에서 연필을 팔고 있는 걸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른 행인처럼 그 CEO도 1달러만 주고 연필을 받지 않고 그냥 지하도를 건너갔습니다. 지하도를 얼마 지나지 않아 CEO는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서서 다시 횡단보도를 돌이켜 건넜습니다.
“방금 제가 1달러를 드렸는데 연필을 못 받았군요. 연필을 주셔야지요.” 걸인은 처음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1달러를 주고 지저분한 연필을 갖고 가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 연필들 좀 봅시다. 이 연필 한 자루가 좋겠군요. 사장님.” 그러자 거지는 또다시 이상한 표정으로 CEO를 쳐다보았습니다. “이제 당신은 더 이상 거지가 아닙니다. 당신도 저와 같은 사업가입니다.”
매일 연필을 들고 돈을 구걸하면서 이제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사장님이란 말을 들은 걸인은 갑자기 자신의 자아 이미지가 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업가? 그래. 나는 연필을 팔았으니까 사업가야. 당당하게 연필을 팔고 돈을 받는 사업가지.”
그 CEO의 말에 걸인은 갑자기 자아의 벽이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고 자기 자신에게 “난 거지가 아니야. 난 거지가 아니야. 난 사업가야.” 하며
스스로에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만약 그가 “난 거지야. 그래서 거지처럼 행동하고 거지처럼 비굴하게 굴고 거지처럼 표정 짓고 살아야 해.”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자아의 벽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는 걸인이 아닌 사업가로 당당히 성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후에 그는 그에게 연필을 사 주었던 그 CEO를 만나서 “당신은 나의 은인입니다. 감사합니다.”하고 고맙다며 찾아왔다는 실화입니다.
우리가 지금 꼭 거지가 아니더라도 우리 스스로의 어떤 벽에 우리를 가두어 버린다면 거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싶은데 자신은 전혀 벗어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면 자신에게 벗어날 수 있다고 외치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아의 벽을 깨부수고 당당히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으로 나오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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