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잡은 나의 인생
김 동 근
'할 말이 있고, 보여 줄 것이 있으며, 남겨두고 갈 것이 있는 삶'을 가장 보람된 인생이요, 그것은 가족을 통한 가정의 완성이라는 주장이다.
그런 인생의 주인공은 멋쟁이 높은 빌딩 으시대는 것이나 유행따라 제멋대로 사는 재미보다는 부부사랑, 자녀사랑, 부모사랑, 형제사랑을 나누게 되는 가족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늘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러한 사랑을 나눌 가족이 있음이다.
나에게는 하늘이 맺어 준 아내(임향욱)가 있다. 다름도 많고, 차이도 있지만 나에게는 과분한 만남이다. 어쩔 수 없는 부부의 연에 의한 결혼이 아니라 부족함을 채워 주고, 풍요로움을 더해주는 그야말로 나에게는 천생연분에 축복이기에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육천 가정 축복 후에 아내는 원리연구회 학사장 사모로 3년, 해외 선교사 사모 10년, 그리고 선생 사모로 21년을 보냈다. 신혼은 원리연구회 학사장 사모로 학생들과 보냈고, 10여년의 해외선교 기간에는 한국에 홀로 남아 자녀 사랑에 세월을 보냈다.
해외 선교의 명을 받고 태어난(1996, 7) 첫째는 ‘선교둥이’이다. 선교출발 전에 가정적 4위 기대를 이루었고, 조상들에게는 5대 장손으로의 도리를 하게 되었다.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출국을 하는 상황에 가족의 거처가 과제이었다. 믿고 의지하기에는 식구들이 많이 거주하는 구리에다 단칸방을 마련하였고, 그래도 관심을 갖고 가족을 보살펴 줄 교회를 찾고자 인근 구리교회, 이문교회, 지금교회를 탐색한 결과 박태성 목사님의 지금교회로 택하였다.
120일 된 아들과 아내를 두고, 해외 선교의 길(1986, 11)을 떠났다. 아들은 남은 아내에게는 외로움을 달래 줄 동반자이지만, 나에게는 선교활동의 볼모와 인질과도 같았다.
둘째는 ‘올림픽둥이’이다. 태국, 필리핀, 칠례를 거쳐 파라과이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하던 차 참부모님은 섭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88 서울 올림픽 기간에 전 세계 선교사들을 한국으로 소집을 하였다. 자국 선수들의 도우미 활동(9/27~10/3)을 하기 위함이다. 파라과이에서도 선수들의 도우미 역할을 하고자 한국을 찾았다. 각국 선수단으로 맥콜도 전달을 하였고, 참가 선수단 스탭들 초청 리틀엔젤스 공연에 선물도 준비하였으며, 그리고 경기장을 찾아 응원도 하였다. 올림픽대회에 출전한 현진님의 승마경기 관람, 세계통일국개천일 선포, 한국의 목회자와 120개 선교국과의 자매결연 등의 행사도 있었다. 올림픽 행사에 참석한 기회에 그야말로 ‘뽕도 따고, 님도 본다’고 둘째를 얻게(1989. 6) 된 것이다.
셋째는 참부모님 고희기념 작품이다. 인생 칠십 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하였던가 ? 예로부터 사람이 칠십을 살기는 드문 일이라고 하여 칠순 잔치를 귀하게 생각을 하였다. 1990년에 참부모님탄신 70주년 행사(2/1-10)를 위하여 전 세계 선교사들이 한국을 찾았다. 파라과이 경제적 여건상 참가하기가 어려운데 한국에 있는 가족도 볼 겸해서 식구들의 정성으로 방한을 하게 되었다. 역사적인 참부모님 고희행사에 참석도 하고, 사랑스러운 막내를 얻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하늘의 크나큰 은총이라고 아닐 할 수가 없다. 세상에서는 아들 둘은 목메달, 아들 하나 딸 하나는 동메달, 딸 둘은 은메달, 아들 하나 딸 둘은 금메달이라고 하였으니 막내 덕분에 아내는 드디어 금메달이었다.
무엇보다도 아내는 해외 선교 기간에 나 자신도 못하였던 고향에 어머니를 일주일 수련(92.07)에다 기성 축복을 받게 하였다. 밑으로 둘은 친정에 맡기고 환고향 섭리에도 동참을 하였다. 어려운 살림에 비좁은 방을 전전긍긍하면서도 참부모님 말씀선집을 지성으로 챙겨 155권을 마련한 것도 귀하게 느껴졌다. 참부모님 말씀 선집은 재직 중에 선정학교 원리연구실에 기증을 하였다.
보은과 부안을 오가며,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역할에도 최선을 다하였고, 친정에 홀어머니와 할머니 돌봄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협회창립 41주년(1995.05.01) 행사가 참부모님을 모신 가운데 브라질의 새소망 농장에서 개최가 되었다. 기간 중에 부모님을 모시고, 김형태, 지희선 선교사 등과 낚시를 하러 나갔다가 휴식 중에 참부모님과의 대화가 있었다. “색시들은 잘 있느냐 ?”라는 질문을 하신다. 나에 대한 답변을 김형태회장이 대신 하였다. “파라과이 김선교사는 가족을 한국에 두고, 홀로 와서 활동을 하기에 선교는 가족이 함께 해야 된다며 가족을 데려오라고 재촉을 하고, 인사조치를 한다 해도 그냥 지내고 있었는데 나름 사정이 있었습니다. 친정에는 연로하신 할머니를 모시는 어머니가 있고, 시댁에도 맏며느리로 노모가 있었습니다”라고 사연을 말하였다. 참부모님은 잠시 생각하시더니 “어른을 모시는 것도 필요하지”라고 묵인을 하셨지만, 참부모님이 아내의 생활을 접하게 되는 황송한 일도 있었다.
자녀 사랑, 부부 사랑, 부모 사랑이 무엇인지를 느끼며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금메달’에 주인공인 아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러한 아내를 만나게 됨은 얼떨결에 땡잡은 나의 인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