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티 투어가 있는 날이다. 시티투어 출발시간이 오전 9시 반이라 아침식사를 한 후 시간이 여유가 있어 지금은 점차 어려워져 가는 아르헨티나 경제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도 이런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건 나만의 우려일까?
▶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 법학부 건물
9시 반 전용버스를 타고 7월 9일 거리를 따라 플로라리스 헤네리카(Floralis Generica) 공원으로 간다. 플로라리스 헤네리카가 있는 곳이 나시오네스 우니다스 광장 Plaza de las Naciones Unidas라고 하는데 바로 옆에 마치 고대신전과 같은 거대한 건축물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 법학부 건물이 보인다.
▶ 플로라리스 헤네리카 Floralis Generica
▶ 플로라리스 헤네리카 앞에서
이 광장네서 차를 내려 공원으로 들어서자 멀리 잔디언덕 위 호수 한가운데 연꽃 모양의 금속조형물이 반짝인다. 이 조형물은 세계에서 가장 큰 꽃 조형물이자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새로운 상징물이 된 플로라리스 헤네리카 Floralis Generica라는 조형물로 건축가 Eduardo Catalano가 만든 작품으로 고정된 위치에서 죽은 듯 서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함께 반응하는 조각품을 만들고자 했던 그는 18톤 가량의 스테인레스 스틸과 알루미늄을 사용해서 해가 뜨는 낮에는 피고 밤에는 접히는 움직이는 꽃을 만들었는데 햇빛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고 전기로 움직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꽃잎 중 하나가 고장 나 밤에도 접히지 않는데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 재정이 바닥이라 이것까지 수리할 여력이 없다고 한다.
▶ 빨로 보라초
이 조형물을 배경으로 꽃을 손으로 들고 있는 것 같이 해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이 많이 보이기에 우리도 한 컷 촬영해 본다. 공원내에는 빨로 보라초라는 나무가 많이 보이는데 줄기와 가지에 무시무시한 가시로 무장하고 있어 누구든 날 건드리면 이 가시로 응징해 주겠다는 표시인 것 같다.
▶ 엄마와 함께 자전거를 탄 아기
플로라리스 헤네리카 공원을 나오니 자전거 헬멧에 스포티한 복장을 한 젊은 엄마가 아기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라이딩을 나왔는데 발랄한 모습이 보기 좋다.
▶ 일광욕을 하는 여인들
공원 옆 잔디에는 젊은 처자 둘이 아예 비키니를 입고 일광욕을 하러 나온 모습이 마치 햇볕 보기가 어려운 유럽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 누구의 기마상일까?
장미공원으로 이동하던 중 언덕에는 누군지 모르지만 기마상이 보인다. 아마 아르헨티나의 영웅 중 한사람이겠지.
▶ 2월 3일 공원
중산층 이상의 부호들이 살고 있다는 북쪽(남쪽은 서민층)의 팔레르모 마을에 위치한 2월 3일 공원(장미공원)에 도착한다. 2월 3일 공원은 1852년 우르끼사 장군의 군대가 독재자 로사스 대통령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날에서 따온 이름으로, 로사스의 사저가 있던 이 지역을 후에 사르미엔또 대통령이 시민들의 휴식공간인 공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 장미 정원
▶ 아르헨티나 國花 세이보
▶ 공원 내 이곳 저곳
▶ 자카란다 꽃이 만개한 거리
공원 안은 지금 장미와 자카란다 꽃이 절정을 향해 간다. 이 나라의 국화인 세이보(이웃나라 우루과이의 국화이기도 함)가 선홍색의 아름다운 빛깔을 띄운다. 숲으로 둘러싸인 넓은 호수에는 오리들이 무리를 지어 노는 모습이 평화롭다.
▶ 레콜레타 묘지 정문
▶ 레콜레타 묘지 입구
▶ 파타고니아 원주민 학살의 장본인인 로카 대통령 묘
▶ 이태리 대리석으로 조각한 묘지들
버스를 타고 장미정원에서 멀지 않은 레콜레타 묘지(Cementerio de la Recoleta)로 간다. 레콜레타 묘지의 정문 위에는 라틴어로 편히 쉬소서(Requiescant in Pace)라고 쓰여 있다. 레콜레타 묘지는 에바 페론이 묻혀 있어 우리에게 유명한 곳으로 원래 수도원의 정원이었던 곳인데 수도원이 폐쇄되면서 묘지가 조성되어 전직 대통령과 노벨상 수상자 등 유명 인사들과 부유층들이 묻혀 있는 일종의 가족단위 납골당이다. 이 묘지 가운데 94기는 국가역사유적으로 지정돼 있다. 묘지라기보다는 프랑스와 이태리에서 수입한 대리석과 자재로 만들어져 호화로운 조각공원에 온 느낌으로 아르헨티나 상류층들이 얼마나 부유했고 생활이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이 레콜레타 묘지는 고인들의 안식처로서의 목적도 있지만 상류층들이 자신들의 가문을 자랑하고 과시하기 위한 전시물이기도 해 우리로 말하자면 집안의 족보인 셈이다. 우리 가문은 이렇게 뿌리가 있고 휼륭한 조상이 있다는 일종의 과시욕의 산물이다.
▶ 두아르테 가족 묘
역대 대통령, 정치인, 유명 연예인 등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방문객이 많은 묘는 바로 에비타의 묘이다. 에비타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 꿋꿋하게 자라 배우가 된 후 페론 대통령의 부인이 된 에바 두아르테(Eva Duarte)의 애칭이다. 에바 페론이 묻혀 있는 두아르테 가족묘 앞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그녀의 생애를 추억하고 있다.
▶ 에바 페론(에비타)의 장례식<퍼 옴>
에비타는 남편인 후안 페론(Juan Perón)이 그의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한 한 달 후인 1952년 7월 26일에 3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큰 충격으로 에비타의 죽음이 알려지자 그녀의 시신이 안치돼 있는 카사 로사다에 이르는 각 방향의 도로들은 열개 블록 이상에 그녀를 보기 위해 몰려든 시민들로 가득 찼고 꽃이 동이 났고 칠레 등 이웃나라에서 공수해 와야 했으며 그녀의 장례식에는 3백만 명 가까운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에비타의 시신은 영구 보전하기 위해 해부학자인 페드로 아라(Pedro Ara) 박사에 의해 방부 처리돼 레닌처럼 국민들이 그녀의 시신을 볼 수 있도록 전시할 기념관 건설에 착수했으나 기념관이 완공되기 전인 1955년 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군사정권은 여전히 국민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그녀를 지우기 위해 에비타의 시신을 탈취했던 것이다. 행방불명된 에바 페론의 시신은 파란만장한 삶만큼이나 쉽게 안식처를 찾지 못했다. 그녀의 시신이 이태리 밀라노로 보내져 그곳 한 성당의 지하 납골당에 보관돼 있는 것이 1971년에 밝혀졌지만 그녀의 방부 처리된 시신은 이미 많이 손상되고 부패돼 있었다. 그녀의 시신은 남편 후안 페론이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스페인에 보내져 그곳에 보관된다. 에비타 시신의 다시 아르헨티나로 귀환되는 과정도 우여곡절이 많다. 군사정권은 끝났지만 에비타 시신의 귀환을 반대하는 군사정권 잔당들이 아직 남아있 에비타의 시신은 아직 귀환하지 못하고 있다 페론주의를 지지하는 도시게릴라 단체인 몬토네로스(Montoneros)는 에비타 시신의 귀환을 요구하며 1955년 군사쿠데타의 주모자이자 군사정권의 실권자였던 페드로 에우헤니오 아람부루(Pedro Eugenio Aramburu)의 시신을 탈취하고, 에비타의 시신이 아르헨티나로 귀환하자 아람부루의 시신을 돌려준다. 그렇게 해서 1974년 에비타의 시신은 비로소 조국으로 돌아와 레콜레타 묘지에 있는 친정인 두아르테(Duarte) 가족 납골당에 안장됐다. 탈취를 방지하기 위해 그녀의 시신은 핵폭탄이 터져도 안전할 정도로 이중문과 이중 내실로 안전장치가 된 지하 깊이 안장돼 있다고 한다.
영부인이 된 이후에도 가난한 민중을 잊지 않고 그들을 위해 많은 활동을 했던 이 여인은 여전히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한편, 남편인 후안 페론은 차카리타 묘지(Cementerio de la Chacarita)에 있는 가족묘에 안장돼 있다가 그의 주말 별장이 있던 산 비센테(San Vicente)에 별도의 영묘가 만들어지면서 2006년에 그곳으로 이장됐다고 한다.
▶ 길에서 탱고공연을 펼치는 남녀
에바 페론이란 인물에 대한 여운을 갖고 레콜레다 묘지를 나선다. 묘지 앞 공원에는 거대한 고목나무 아래서 두 남녀가 탱고 길거리 공연을 하고 있다.
▶ 엘 아테네오 서점 간판
레콜레타 공원에서 버스에 올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오면 누구나 한 번쯤 찾아보는 아름다운 서점이라는 엘 아테네오(El Ateneo) 서점으로 간다.
▶ 엘 아테네오 서점 내부 전경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오면 누구나 한 번쯤 찾아보는 아름다운 서점이 있다. 엘 아테네오(El Ateneo) 서점이 그곳이다. 원래 이 건물은 1919년에 그란드 스플렌디드 극장(Teatro Gran Splendid)으로 개관됐으나 2000년부터 서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엘 아테네오 서점은 2008년 영국의 <가디언지>(The Guardian)에 의해 세계에서 2번째로 아름다운 서점으로 선정됐다.
▶ 엘 아테네오 서점 내 카페
오페라 극장답게 공연 무대와 화려한 좌석 모습이 그대로 살아있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서점으로 둥그런 오페라 극장의 관람석에 맞춰 책도 그렇게 전시되어 있다. 오페라 극장 무대는 현재 카페로 운영되고 있어 그 곳에서 간단한 식사나 음료를 하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도 있다. 사용하지 않는 오페라 건물을 서점으로 리모델링해 도시의 명소로 만든 이들의 현명함이 놀랍다. 새로운 것과 좋은 것은 같은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 지하 어린이 도서 판매장
지하에는 어린이용 도서가 전시되어 있는데 놀이방처럼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 있다. 책장 사이의 공간도 충분하고 중간 중간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도록 소파나 의자를 갖춰 놓았다. 책만 잔뜩 쌓여있는 우리네 대형서점은 책을 파는데 만 집중하고 책을 보는 사람에 대한 배려는 부족했던 게 아닐까.
▶ 오페라 극장을 개조한 엘 아테네오 서점
엘 아테네오 서점은 단지 오페라 극장이었던 건물을 활용한 서점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옛것을 현대에 어떻게 재활용하는지에 대한 좋은 모델이 되는 것 같다. 아울러, 상업적인 측면에서는 조금 손해를 보게 되는 고객을 위한 배려가 결국은 더욱 많은 고객을 불러온다는 것을, 심지어 지구 반대편에서 온 여행자들까지 오게 만든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요즘 소비자들은 현명하면서도 영악하다. 품질이 떨어지는 제품이라도 구매해주던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기업들이 눈앞의 이익에 전전긍긍하지 말고 그들이 말하는 진정한 고객만족이 무엇인지를 보여줘야 할 때다.
▶ 엘 아테네오 서점 인증 샷
내가 무엇을 살 것처럼 이것저것 두리번거리자 현지 가이드가 영어책 거의 없고 대부분 스페인어로 되어 있으므로 혹시 기념으로 산다면 모를까 별로 실용성 없으니 책 사는 건 권장 하지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계산하는데 정말 오래 걸리므로 혹시 뭔가 사고 싶으면 빨리 사라고 한다. 결국 화장실만 들리고 빈손으로 엘 아테네오 서점을 나와 점심을 먹으러 버스를 타고 코리아타운으로 간다. 코리아타운은 엘 아테네오 서점에서 꽤 멀리 떨어진 부에노스 시내 남부에 있다.
▶ 부에노스 아이레스 코리아 타운 입구
코리아타운이 위치한 지역은 예전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판자촌이었는데 그 때 버스109번 종점이 위치하고 있어서 백구마을이라고도 한단다. 아르헨티나의 이민은 반공포로 몇 분으로 부터 시작이 되었고 그 이후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5년 정부에서 급증하는 인구 분산책의 일환으로 아르헨티나에 농지를 구입해 농업 이민으로 70년에 몇 십 세대가 아르헨티나로 건너 왔지만 땅도 농업에 부적합하고 이민자들 역시 농사 무경험자가 많아 실패를 거듭했는데 의무 정착기간이 지나고 영주권이 나오자 농업을 포기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오게 된다. 농업 이민의 실패로 돈 한 푼 없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제일 큰 판자촌에 장착을 하게 되면서 손재주가 좋은 한국인들의 특성을 살려 유태인 옷 가게의 하청을 받아 옷들을 가족 단위로 재봉 일을 시작하면서 눈썰미가 좋았던 한인들이 옷을 만들어 판다. 다행히 유태인 옷 가게에서 만든 옷보다 싸고 품질도 뒤지지 않아 인기를 얻어 돈을 약간 벌자 제일 큰 판자촌 앞 동네에 집을 사서 이사를 했기에 본래 코리아타운은 판자촌 앞에 위치해 있다.
▶ 코리아 타운 거리
▶ 코리아 타운 옷가게
한국인 교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아사도와 한식이 곁들여진 점심으로 식사를 하고 코리아타운 구경에 나선다. 요즘은 그곳 치안이 불안해 본래 코리아타운에 거주했던 교민들 많이 빠져 나가 유태인들의 플로레스따 또는 아베샤네다 패션 도매상가로 많이 진출해 한산한 분위기다. 그렇지만 아직 이곳 300m 정도의 거리에는 한인 마트와 한국 음식점이 많이 있어 교포 및 한국인 관광객들이 찾고 있으며 옷가게들이 많이 보이는데 문을 닫은 곳도 몇 군데 보인다. 이곳 옷가게들은 소매보다 도매 위주의 상가로 최신 패션의 옷을 대량 구매하기 위해 매일 새벽 아르헨티나 지방 각지에서 관광버스나 승합차를 타고 이곳으로 몰려오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동대문 시장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 러시아 정교회
탱고의 발상지라는 라 보카로 간다. 라 보카로 가는 도중 비잔틴 양식의 돔들이 유난히 눈에 띄는 교회가 보인다. 1901년에 건축된 러시아 정교회 소속의 교회라는데, 형형색색의 외벽과 독특한 외관으로 눈길을 끈다.
▶ 마라도나가 뛰던 보카 주니어스 홈 구장
이 교회를 지나 조금 더 가자 길 옆으로 큰 경기장이 보이는데 축구 역사에 있어 전설적인 선수였던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가 뛰었던 보카 주니어스(Boca Juniors La Bombonera)의 홈구장이란다. 아르헨티나 남성들에게 독보적인 인기가 있는 보카 주니어스 라 보카 지역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1905년에 창단된 클럽으로 상류층에게 인기가 많은 리버 플레이트와 라이벌이며 경기장은 약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데 경기나 특별한 이벤트나 없는 평일 낮에는 관중석에 무료로 들어가 볼 수 있다고 한다. 오늘이 목요일, 평일이니 잠시라도 내려 보카 주니어스 홈구장을 구경하고 싶지만 그냥 지나치고 만다.
▶ 상가 2층 베란다에서 마라도나와 에비타, 탱고 황제가 우리를 반기고 있다
우리 일행은 라 보카 항구 인근 카미니토 거리 입구에서 내린다. 버스에서 내린 카미니토 거리 입구 상가 건물 2층 베란다에는 축구선수 마라도나, 영부인 에비타, 탱고의 황제 까를로스 가르델 조형물이 손을 흔들어 우릴 환영하고 있다.
▶ 카미니토 거리의 이모저모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옛 항구가 있었던 라 보카(La Boca) 지역은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 정착했던 곳으로 특히 부두노동자들과 선원들의 거주지였던 카미니토(Caminito) 지역의 울긋불긋한 원색의 집들이 인상적이다. 선박에 사용하고 남은 원색의 페인트를 칠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역 최대의 항구로 모든 교역의 중심지였지만 그 이면에는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던 수많은 사람들의 고뇌가 함께했다. 뱃사람들의 힘겨운 노동, 가난한 노동자의 삶,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흑인들의 슬픔, 선술집의 어두운 분위기, 그들이 어울려 인생의 아픔을 달래고, 그 속에 숨겨진 욕망을 분출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춤이 바로 탱고로 이민자들의 애환이 스며있는 탱고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 시에서 야외 박물관으로 공식인정된 카미니토(Caminito) 거리
카미니토 거리와 탱고의 발생 배경을 현지가이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폐허에서 태어나 고아원에서 자란 화가 마르틴은 라 보카 항구 지역을 활기와 활력이 넘쳐나는 일상생활의 생동감을 그림으로 그리고, 거리 골목과 그 집들도 밝고 강렬한 색으로 화려하게 채색하면서 엘 카미니토 (El Caminito) 거리를 야외 박물관으로 만들려고 했다. 후안도 그 시절 일을 마치고 카미니토 거리에서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 부르며 서로 한 가족처럼 어울려 놀았던 항만노동자들의 삶을 시 작품으로, 음악으로 표현하기 시작하고 쿠바계 음악, 스페인 식민지시대 음악, 이들로부터 파생된 음악이 혼합된 탱고를 아르헨티나만의 음악, 탱고 아르헨티노(Tango Argentino)로 만들어 갔다. 화가 마르틴은 그 거리를 후안의 음악 작품 이름을 그대로 빌려서 엘 카미니토라고 명명하고 예술 공동체 운동을 거듭하고 죽으면서까지 그는 색깔에 둘러싸여 살았던 사람들은 일반 상자에 묻힐 수 없다 라고 하면서 관의 덮개에 라 보카 항구의 그림을 붙였다고 하며 1959년 시정부도 거리 엘 카미니토 (El Caminito)를 야외 박물관(open-air museum)으로 공식 선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카미니토 거리는 야외박물관인 셈이다.
▶ 건물 2층에서 관광객을 환영하는 교황
100m 쯤 되는 카미니토 거리 끝 한 건물 2층에는 프란시스코 교황 조형물이 손을 흔들며 여행객을 환영하고 있다.
▶ 고단한 노동자들의 삶을 표현한 벽화
▶ 라 보카 항구와 카미니토 거리를 탄생시킨 베니토 마프틴 동상
카미니토 거리를 지나면 라 보카 항구가 나타난다. 입(mouth)이라는 뜻을 가진 라 보카는 마탄자 강(Matanza River)의 입에 해당하는 강변 지역으로 1536년 처음 상륙한 스페인인들과 1830년 제노아(Genoa)에서 대규모로 이민 온 이탈리아인, 그리스, 동유럽, 아일랜드, 영국, 프랑스 등에서 온 이민자와 그 후손 크리오요(Criollo), 아프리카 흑인노예가 합류하여 아르헨티나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발전되자 1880년대 아르헨티나 공화국에서 탈퇴하여 라 보카(La Boca) 공화국을 설립했지만 실패한다. 그 후 이 지역은 이 지역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지만 도시가 빈민촌으로 몰락하여 폐허가 되다시피 하면서 전래되어 온 고유한 지역 문화도 사라져 가게 된다.
▶ 라 보카 항 주변 식당에서 탱고를 추는 무용수들
이제 카미니토 거리와 라 보카 항구 주변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옛 정취를 찾아온 여행객들로 북적거리는 관광지일 뿐으로 거리엔 온통 무용수들이 탱고를 추면서 손님을 유혹하는 레스토랑들과 카페, 이곳에 어울리는 강력한 원색의 그림들과 기념품들을 파는 가게와 노점상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으며 상인들이 호객행위로 여행객들을 부르고 있어 시끌벅적하다.
라 보카에서 버스를 타고 5월 광장으로 간다. 이곳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오늘의 시티투어를 마무리한다. 일행들 중 일부는 버스를 타고 호텔로 가고 일부는 오늘 시티투어에서 본 가본 곳으로 삼삼오오 헤어진다. 우리 동갑내기 3부부는 데펜사 거리(Calle Defenza)를 따라 호텔로 걸어가기로 한다.
▶ 데펜사 거리
5월 광장에서 레사마공원를 연결하는 약 2km의 길이 바로 데펜사 거리(Calle Defenza)이다. 이 길은 일요일이 되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으로 산토 도밍고 교회에서부터 시작되는 수많은 벼룩시장은 없는 것 빼고 다 판다 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갖가지 신기한 물건들을 판매하고 있는데 남미의 해방 영웅 체 게바라를 활용한 상품부터 용도를 알 수 없는 진귀한 물건들까지 구경할 만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고 하지만 오늘이 목요일인 관계로 평범한 상가와 사무실, 성당만 보일 뿐이다.
▶ 산토 도밍고 성당
데펜사 거리를 걷다보면 몇 개의 성당이 보이는데 그 중 하나가 산토 도밍고 성당(Iglesia de Santo Domingo)이다. 1779년에 완성된 이 성당은 1807년 영국의 2차 침공 당시 영국군이 이곳에 주둔하며 크리오요 군과 전투를 벌였던 것으로 유명한데 정면 우측 탑에는 크리오요 군이 영국군에게 퍼부었던 총탄의 흔적이 남아 역사의 현장임을 말해 준다. 성당 마당으로 들어가니 엄청나게 커다란 원형 탑이 보인다. 이 원형 탑 아랫부분에는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을 닮은 여인상이, 윗부분에는 천사들이 둘러서 있는 조각들이 있다. 성당 내부에는 아르헨티나 국기를 고안한 마누엘 벨그라노 장군(General Manuel Belgrano)의 관이 안치되어 있다고 하지만 성당 문이 잠겨 있어 내부 구경을 할 수 없다.
성당에서 나오는데 부인네들이 아이스크림을 사먹자고 한다. 핸드폰 구글 지도를 열어보니 멀지 않은 곳에 아이스크림 전문점이 있어 구글 지도를 따라 데펜사 거리에서 Belgrno거리를 따라 Nicolo Helados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호텔로 돌아온다.
▶ 도레고 광장
아내와 인근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골동품 노점으로 유명하며 거리 탱고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는 도레고 광장(Plaza Coronel Dorrego)으로 간다. 저녁시간이라 그런지 골동품 노점도 탱고 거리공연도 보이지 않고 광장에는 인근 식당에서 내 놓은 야외 식탁에서 몇몇 시민들이 저녁식사를 하는 광경뿐이다.
▶ 부에노스 아이레스대학교 공과대학 건물
도레고 광장에서 거기서 비탈길을 따라 두 블록 더 내려가니 빠세오 꼴론(Av. Paseo Colon)대로가 나온다. 길 맞은편 멀지 않은 곳에 그리스 신전 모양 큰 석조건물이 보인다. 궁금해 걸어가 보니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공과대학 건물이다. 석조계단과 열주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호텔로 돌아오기 위해 건널목을 건너는데 도로 중앙 분리대 역할을 하는 작은 공원에 깐또 알 뜨라바호(Canto al Trabajo : 노동자의 합창)이란 커다란 조형물이 띠빠라는 커다란 아카시아 종류의 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이 조형물은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가 이루르띠아(Yrurtia)가 만든 것으로 나신의 남녀노소 십여 명이 큰 돌을 밧줄로 끌고 있는 모습의 대작이다. 낮에 와 여유를 가지고 이 근처를 둘러 봤으면 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호텔로 돌아온다.